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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영국여행이야기

영국 여행 이야기(4) - 책 정리(C)

by 길철현 2017. 9. 13.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다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야할 지가 고민이다. 좋은 선택, 좋은 결정을 위해서 '고민'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고민'이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바둑에서는 흔히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을 쓴다.]

 

이사를 가는 대신에 불필요한 책들을 정리하는 쪽으로 생각의 추가 기울긴 했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의 일기엔 이런 고민이 잘 묻어난다.

 

(12월 24일)

나를 너무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현재의 상태는 상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단 현재 당면한 문제는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장 필요 없는 것은 버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가볍게 하는 면도 있다. 그렇다. 짐을 줄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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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정리한다는 것. 책에 있어서는 모으는 것만 생각했지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을 못했구나. 부족한 내 기억력을 책을 둠으로써 보완하려 했던 듯하다. 책이란 꼭 내가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 대체로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으니까 - 책을 좀 더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의 보고로서의 책의 역할이 인터넷에 많이 넘어갔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정리하는 일이 엄청 성가신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일단 천 권 정도는 아파트로 옮겨올 수 있다. - 철학 책 위주로

그 다음 몇 권 정도 처분할 수 있는가? 처분할 용기가 있는가?

(박정희 책 같은 것은 팔 수도 있지 않을까?)

 

답이 잘 나오지 않는데 대체로 나의 지나친 집착과 내 선택이 현재의 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계속 머리를 써야 한다.)

 

한* 주택 3천만 원. (매일 한 시간 정도 이사 가기 전까지 투자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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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두었던 책을 다 처분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을 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사를 가는 대신에 책을 처분하기로 했다고 하자 어머니는 대환영이었다(그것은 예전부터 어머니가 바랬던 바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혼자 거주하고 있는 대구의 아파트에 여분의 공간이 좀 있으니까, 이삼천 권 정도는 둘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책방을 비워주어야 하는 시간까지는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어서 처음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투자해서 책을 정리 하기로 했다. 책을 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내 아파트의 작은방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디오테이프부터 버리기 시작했다.책 외에도 나는 예전부터 비디오테이프와 DVD 등도 사모았는데 - 이것들은 주로 청계천에 있는 중고 비디오테이프와 DVD 할인 매장에서 구입을 했는데, 또 폐업을 하면서 헐값에 파는 곳이 있으면 소위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구입했다. 영화의 저장이나 재생 방식이 파일 형식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을 나는 뒤늦게서야 의식하게 되었는가? 글을 써나가면서 보니까 나에게 약간의 저장강박증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 4년 전엔가 새로 텔레비전을 사고부터는 비디오테이프는 말할 것도 없고 DVD도 재생하는 것이 굉장히 번거롭게 되어 버려, 왠만하면 그냥 VOD로 보거나 다운을 받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부피가 얼마 안 되는 DVD는 그대로 두고, 천여 장 정도 되는 비디오테이프 중에서 정말 아끼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낌없이(?) 버려 버렸다(천 권에 가까운 책을 꽂을 공간이 마련된 것인가?).

 

책을 처분*정리하는 과정을 일일이 메모해둔 것이 아니라서 기억이 닿는 대로 적어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같은 책을 두 권 이상 갖고 있는 것도 꽤 많았는데 - 갖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산 것도 있고, 책을 찾을 수 없어서 산 것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고 샀지만 못 준것, 혹은 워낙 가격이 싸고 상태도 좋아서 팔아도 이익이 될 듯해서 사 둔 것 등등 - 우선 이런 책들을 먼저 팔기로 했다. 그 중 우선 시집 스무 권 정도를 집 근처에 있는 헌책방으로 가져 갔다. '고물을 보물로 만든다'든가 그런 현란한 문구와는 달리 주인 아저씨가 저울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 집에서 나왔다. 며칠 간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가 그 책들을 내가 주로 책을 구입한 대형 헌책방에 가서 팔았는데, 겨우 오천 원 정도를 받았다. 이 일은 내가 필요해서 살 때는 헌책이라도 꽤 값을 주고 샀지만, 막상 팔려니까 정말 폐지값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