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낡은 일기장으로 되돌아가는 이십 년 전의 나
전시용 일기장에선 욕망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착한 소년, 말 잘 듣는 소년이 되겠습니다
이 말만 녹음기처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때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도 있지만
옳은 말과 길들여진 말 사이 나는 없었다
여동생이 대신 써준 부분도
아무 탈 없이 날짜를 메우고 있었다
숲속에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친 이발사처럼
난 비밀 일기장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거기서도 욕망은 숨을 죽인 채
그림이나 시로 가끔씩 고개를 빼꼼 내밀 뿐이었지만
적어도 가면은 벗겨져 있었다
그 일기는 주로 상처의 기록이고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연고이고
복수할 수 없는 복수였다
낡은 일기장 속의 나는 이제 없지만
이십 년의 두께 밑 어딘가에서
가끔씩 내 뒤통수를 서늘하게 한다
(980616)
(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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