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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야기/고흐 시편

김승희 - 기둥서방 빈센트

by 길철현 2022. 3. 5.

현재진행형은 울고 있다, 빈센트여, 너의 자화상 복사판은

한없이 잘게 분해된 프로방스의 태양빛을 담은 채로 언제나

나의 한심한 사생활을 내려다 보고 있지, 빈센트여, 부엌에

서 더러운 식기들을 닦으며 난 너를 언제나 올려다 보지,

리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은밀한 밀애처럼 슬프

게 몸을 던지고, 빈센트여, 난 너의 복사판 자화상을 벽에서

내려 난로불을 쬐듯이 나의 외로운 얼음손가락들을 활짝 펼

쳐 그위에 벌리네

 

깊은밤 연탄불을 갈려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면, 연탄광

문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내 손을 잡는 것은 그대였지, 그렇군,

난 나의 숨은 연인을 만나러 벨기에의 무서운 탄광속 제일

위험한 지하갱 내로 내려간 것이었지, 누덕누덕 기운 옷은 지

하탄광의 성자에겐 가장 어울리는 광기의 의상, 그곳에서 그

대가 읽는 것은 복음이었지만 아무도 복음을 믿을 만큼 한가

한 사람은 없었네, 검은 막장 속에선 누구나 절망만으로도

바빠 사고사 우연사 과실치사 아니면 불치병으로 위패도 없

는 죽음들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며 늘어서 있었지, 먹어

도 먹어도 죽음의 분량은 줄어들지 않아 하는수 없이 죽음의

주식을 공평하게 분배해 버린 사람들

 

연탄불을 갈면, 빈센트, 불위에 누워있는 그대가 보이네,

그대는 황홀하게 나의 왼손을 잡아 화염이, 넘실거리는 손목

으로 나를 끌고 있지, 안돼 안돼 불의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예배와도 같은 서러운 정사, 살고싶다고 난 너에게 말했네,

죽고싶다고 넌 나에게 말했어, 난 축귀의 동작처럼 왼손을

얼른 오른손 아래 감추며, 밑불 위에 얼른 연탄 두 장의 어둠

을 포개놓았지,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누르며, 중앙박물관에

있는 비로자나석불의 지권인 모양으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개놓으며, 난 또 하루치의 난방을 마치고 조용히 이층

연립주택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지, 또 다시 현재진행형은

울고 있고, 빈센트여

 

미치지 않더라도

언제나 행복이란 사교(邪敎)와 같은 것이라고

넌 또 변심한 애인을 달래듯이

웅얼웅얼

우리집 지하실 아궁이 속에서

행복의 금서를 소리내어 읽고 있지,

 

- 뜻풀이

지권인 [불교] 금강계(金剛界) 대일여래(大日如來) 만드는 인상(印相).  손의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손가락으로 감싼 ,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의 주먹 속에 넣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마주댄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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