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 글의 난해성과 지루함을 만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에 대해 간략하게 몇 자 적어보려 한다. 20대에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겸 수학자가 쓴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그 내용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를 어렵지 않고 설득력 있게 적은 좋은 책이라는 인상을 지녀 왔는데, 몇 년 전부터인가 그 제목이 많이 거슬렸다.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인가? 우리가 행복하면 다행한 것이고,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할 수 있도록 애를 쓰는 것까지야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정복까지 해야하는 것인가? 다소 불행하더라도 다른 즐거움이 있다면 체념할 부분은 체념(그러고보니 이 책에서도 행복의 조건 중의 하나로 체념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그냥 지금 생각에는 이 책의 내용까지 그렇게 공격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좀 과장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지나치게 서구적이고, 좀 제국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이 책의 제목을 비난하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닌데, 적다보니까 생각이 그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다(어쩔 도리가 없다).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와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떨 때 행복한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등등을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 -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더라도- 로 꼽고 있는데, 거기에는 나도 동감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적토대가 위태롭다면, 행복 여부를 논의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말해 끼니를 못 먹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행복'을 묻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 이것은 그냥 나의 상상이지만 그렇다고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듯한데 - 이 사람에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순간 만큼은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글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또 다른 곳으로 진행되고 쉽고 간결한 글을 적어보겠다던 처음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또 다른 연상이 파고 든다. 행복이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좀 더 각도를 달리 해서 볼 때는 '고통'이 적은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육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적 건강도 포함해서)을 행복의 제일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하다. 얼마 전에 읽은 조지프 콘래드 - 폴란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로 현재 내가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 의 [개스퍼 루이즈(Gaspar Ruiz)]라는 중편의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한 무리의 전쟁 포로들이 감옥에 갇혀 있고 그날 저녁에 총살을 당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감방 안은 올 여름의 무더위처럼 덥고 답답해서 포로들의 목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포로들은 간수에게 한 모금의 물을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죽고 사는 문제도 문제지만 바로 눈 앞의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 그것은 인간도 동물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으리라.
행복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고통을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된다. 바꿔말하자면 행복은 고통의 부재이거나, 적어도 고통의 강도가 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개인적으로 내가 경험했던 가장 극심한 고통은 축구를 하다가 상대편 선수와 부딪혔을 때이다. 명치 끝을 심하게 채였는지, 숨이 턱 막히면서 정말 1,2분 정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이 고통을 멈출 수 있다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또 동생이 심하게 다쳐 척추가 신경을 누르는 상황이었는데, 수술도 금방 하지 못하고, 십 일 이상이나 지나서야 수술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동안 병실을 신음으로 가득 채웠던 동생. 대신할 용기도 없으면서도 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던 마음. 황석영이나, 김원일, 또 임철우의 소설에 나오는 고문의 장면들. 그 육체적 고통 앞에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법적으로 고문을 금지한 것에는 인간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허약할 수밖에 없음을,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리라.
건강을 일단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물적 토대 - 우리가 흔히 '돈'으로 치환해서 말하는 - 일 것이다.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개인의 행복의 조건과 사회의 행복의 조건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듯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내전과 이슬람 국가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시리아와 그 인근 지역에서 개인 또한 당연히 행복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유럽으로 탈출하는 난민들을 보면 그들에게 행복은 일단은 전쟁터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건강해야 그 안의 개인들도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부유해야 그 안의 개인들도 행복할 것이라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에는 이상한 통계들도 있다. 국민 소득도 높고 복지도 잘 되어 있는 북유럽 국가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점이나, 행복 지수가 제일 높은 나라가 최빈국 중의 하나인 부탄이라는 말. 상식과 잘 맞지 않는 이 통계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 다음으로 또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은 가정을 꾸려 후손을 갖는 것이다. 성행위는 번식을 위한 중요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동반되는 쾌감은 성생활을 행복의 한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매김하게끔 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종말을 빠르든 이르든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 - 영화 [곡성]의 한 축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서 오는 충격'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 인데, 이것을 어느 정도 유예할 수 있는 한 방편이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의미에서 -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는 나로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 자식은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다(하지만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결혼과 자식은 불행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경제적으로 좀 불안하고 가정도 없는 나는? 어떠한가? 이렇게 적고보니 중요한 요소 하나를 빼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자아 성취라는 것이다. 꿈이 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당연히 행복한 것이다(하지만 많은 경우 일이 돈벌이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에서 별다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 [행복의 정복]에 나온 구절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곳에서 읽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예술 작품을 하나 완성한 예술가가 느끼는 행복감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감, 혹은 성취감, 뭐 이런 말이 떠오른다(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견해 또한 예술에 큰 의미를 두었던 시대적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다시 나를 묻는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위기도 좀 건넌 듯하고, 성적인 문제도 어떻게 어떻게 해결하고 있고, 써야 할 논문이 있고, 취미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서 행복한가? 경제적으로는 늘 후달리면서도 지출을 잘 자제하지 못하고(뭘 믿고 그러는 것일까?). 니체는 '운명애'라는 말을 어떤 의미에서 한 것일까? 처음 의도에서는 좀 벗어난 듯하지만, 이만큼 글을 쓸 수 있어서 그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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