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를 달래려 잠시 낮잠을 청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뇌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나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는데 - 이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지점을 통과해야 했다. 빠른 속도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차단기가 내려와 내 차의 보닛은 차단기에 끼이고 말았다. 인간의 뇌, 혹은 정신이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얼마 전부터 "죽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블로그에 죽음과 관련된 글들을 하나둘 모으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로 시작되는 독백일 것인데, 거기에서 햄릿은 '죽음은 꿈과 같은 것이지만, 그 꿈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고통스러운 삶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햄릿에게 있어서는 삶도 괴로운 것이지만, 죽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두려운 어떤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하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라는 것이 완전한 절멸로, 꿈 없는 잠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영혼이 저승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꿈 없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밤을 상쾌하다고 여기듯이, (온갖 걱정 * 근심으로 넘쳐나는) 우리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손해될 것이 없고, 영혼이 저승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현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또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플라톤이 빠트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격심한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대부분 통과해야 한다. 자다가 죽거나,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는 즉사의 경우는 드문 예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큰 문제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이라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인지하고 나서부터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도 오랜 시간 생각해 온 문제이면서도 섣불리 말하기 힘든 그런 것이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는데, 뜻밖의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 일단 그것에 대한 생각들을 먼저 적어보려 한다.
죽음은 생명체로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하나의 극점인데, [리어 왕]의 한 구절에 나오듯이(내 기억에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가 먼저 나아가서 죽는다는 것이 무슨 그리 대수냐'라는 대사가 있었던 듯한데, 찾을 수가 없다. 나중에 명확하게 밝혀지면 수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혹 아는 분이 있다면 조언을 주는 것도 좋으리라), 죽음이라 것을 인간은 - 또 다른 생명체의 경우에도 -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요 며칠 사이에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다. 가깝거나 친근한 사이는 아니지만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한 명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대학 동아리 후배였는데, 두 경우 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한 명은 갓 스물을 넘은 어린 여학생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아내와 두 딸을 둔 40대 중반의 회사원이었다.
나 자신의 경우에도 오랜 기간 정신적인 고통과 혼란에 시달리며 그 탈출구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며칠 전 낯선 지방 도시를 차로 헤매다가 사고가 날 뻔한 것을 한편으로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해결되지 못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자살은 낯설지 않은 것이면서도, 실제로 그런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자 마음에 파문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피하고 싶은 이야기지만, 내가 마음 속으로만 꿈꾸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시도를 내 여동생은 17년 전에 결행을 했고, 그 때문에 일 년 이상의 시간을 병실에서 신음을 하며 보내야 했고, 장애마저 안게 되었다. 동생을 간호하면서, 동생의 고통을 감히 함께 나눌 용기도 없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차라리 저 극심한 고통에서 동생이 해방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등등 별의별 생각이 들었고,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다. 동생의 경우 자살을 기도한 직접적인 이유는 남자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보다 더 뿌리 깊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체가 생명체로서 누리는 즐거움의 이면에는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육체적 * 정신적 고통도 있고, 특히 정신적 고통에 있어서는 당사자 자신도 규명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옆에서는 더욱 더 오리무중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종교적 계율 등을 앞세워,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무게를 제대로 갸늠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삶을 강요하는 것은 한 개인에게 죽음의 위안마저 빼앗는 가혹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한다. 외부적 도움이나 다른 해결책의 모색 없이 죽음으로만 치닿고 마는 것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실비아 플래스라는 유명한 미국 시인의 자살을 다룬 알바레즈의 [자살론](Savage God)을 보면 저자인 알바레즈 자신이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알약(아마도 수면제)을 엄청나게 과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글자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인간이 항상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고통에서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자신의 정신병이 가져다 주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반 고흐나, 유전적 요인에다, 역시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말년에 자살을 선택한 헤밍웨이,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받다 칠십의 나이에 자살하고 만 철학자 쥘 들뢰즈 등에 대해서 우리가 달리 어떤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한다. 나의 외삼촌 두 분도 오십 대 후반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던 두 분에게는 삶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기가 어려웠던 듯하다.
물론 자살이라는 것이 삶이 가져다주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육체적 * 정신적 고통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강렬한 자신의 의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일 합방 당시 자결로서 자신의 울분과 무력감을 표명한 황현 같은 분이 그 예일 것이다. 일본의 작가들 중에는 자살한 인물들이 상당히 많은데 -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 미시마 유키오 같은 경우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그것이 비록 극우주의적인 것이긴 하지만) 할복 자살을 결행했다.
나의 경우 1997년부터 동생이 자살을 기도한 1999년, 2000년 정도가 정신적 고통이 격심했던 시기였다. 죽음으로 향하는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극심한 불안과 무력감 가운데 허덕이고, 급기야는 정신과적 상담을 받아야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 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라는 영화가 갑자기 떠오른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삶의 즐거움을 그 긍정성을 추구했던 영화.
삶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정말 행복한 자이거나 아니면 지독히 멍청한 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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