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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야기/고흐 시편83

김승희 -- 귀가 없는 자화상 나의 방은 하얀 관을 닮은 상자 속처럼 고요하다. 나는 태양에 마취된 채로 주술에 빠진 무당처럼 고요하고도 행복하다. 나는 사랑으로 열정으로 보글보글 끓고 있다. 마치 스스로 전기스위치를 넣은 색채의 남비처럼 색채에 취하여 난 종이등불처럼 막막히 행복할 수 있다 태양 속의 촛불처럼 난 뜨거움을 사랑하지만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소리가 점점 가까이 더욱 가까이 고막 가까이 다가들면 태양 속의 촛불처럼 난 뜨거움을 사랑하지만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소리가 무서워서 난 귀를 막고 침대 밑으로 화병 속으로 구두 속으로 숨어들어야만 한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난 침묵을 원해. 조용하기만 하다면 불난 집 문을 꽈꽉 잠가버리고 난 그 집이 불타고 있다는 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 불이야--.. 2022. 3. 5.
김승희 -- 나는 타오른다 니체는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반드시 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하여 그의 책속에는 한 페이지마다 는 문장이 마치 피묻은 붕대처럼 여기저기 사방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화폭을 마칠 때마다 반드시 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그림 속에는 한 페이지마다 는 문장이 마치 희열의 격분처럼 검은 불꽃나무 사이프러스처럼 소용돌이쳐 쏟아지고 있었다. 니체와 나는 인간들의 악취로 숨이 막히는 이 우스꽝스러운 동물원 속에서 고뇌하다가 타오르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고뇌하면서 타오르는 신의 얼굴. 세상에서 가장 난폭하게 미쳐 있는 해바라기 연작들 나는 묻는다 미치지 않고서는 좀더 타오를 수 없었을까. 미치지 않고서는 타오르는 해바라기 속의 소용돌이치는 심령을.. 2022. 3. 5.
김승희 - 기둥서방 빈센트 현재진행형은 울고 있다, 빈센트여, 너의 자화상 복사판은 한없이 잘게 분해된 프로방스의 태양빛을 담은 채로 언제나 나의 한심한 사생활을 내려다 보고 있지, 빈센트여, 부엌에 서 더러운 식기들을 닦으며 난 너를 언제나 올려다 보지, 우 리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은밀한 밀애처럼 슬프 게 몸을 던지고, 빈센트여, 난 너의 복사판 자화상을 벽에서 내려 난로불을 쬐듯이 나의 외로운 얼음손가락들을 활짝 펼 쳐 그위에 벌리네 깊은밤 연탄불을 갈려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면, 연탄광 문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내 손을 잡는 것은 그대였지, 그렇군, 난 나의 숨은 연인을 만나러 벨기에의 무서운 탄광속 제일 위험한 지하갱 내로 내려간 것이었지, 누덕누덕 기운 옷은 지 하탄광의 성자에겐 가장 어울리는 광기의 의상, 그.. 2022. 3. 5.
고호의 방 -- 이승훈 아무 말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소리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너의 마음의 한구석에 켜져 있는 불이 작은 나무 침대가 탁자 하나와 의자 두개가 나의 어제의 초라했던 삶이 나의 어제의 무섭던 마음이 아직도 쓰지 못한 어제의 시가 아무것도 아닌 세월들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뜻도 없는 네가 나를 섬뜩하게 한다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들은 이 밖에도 많지만 이것으로 줄인다 2022.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