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이야기/고흐 시편83 해바라기 -- 박세현 쓸쓸하면 열리리라 피로를 잊고 오늘은 잠시 눈 감으면 드디어 미혹의 출구가 열리리라 세상을 듣되 듣지 않음이 어서 빨리 천국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게 되리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난 때처럼 시원한 절망을 맛보리라 밤이 시커먼 손으로 그러나 아침의 빗장을 열듯이 갈보같은 여자들이 그러나 오히려 순결하였듯이 개헤엄을 치며 허겁지겁 도달한 삶의 언덕에 기다렸다는듯이 마침내 피어난 한 생애의 인감같은 꽃 무덥고 길었던 지난 밤 우리들 수음의 끝에 핀 저 해바라기 2022. 3. 9. 귀를 자른 자화상 -- 문충성 흰둥이, 깜둥이, 빨갱이, 파랭이, 노랭이--- 색깔들의 싸움에 넌덜머리가 나고 색깍들의 노래 소리가 영영 들려오지 않았을 때 하릴없이 귀나 자르고 고호여 하는 짓이 부질없어지면 미친 세상 우리는 이 미친 세상을 빠져나가야 된다 미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도망친 세상을 미친 세상이라 부르고 병원에 갇혀 미친 사람 치료를 받으며 정말로 미쳐나고 있을 때 다시 미친 세상 사람으로 돌아와 컴컴한 불빛 아래서 삶을 감자를 먹을지라도 우리는 도망칠 세상을 다시 꿈꾸느니 그것이 몽마르트를 언덕 위 물랭 루즈의 돌아감이거나 돌아감의 끝에서 시작하는 멍충이거나 까마귀들 비상으로 언제나 노랗게 익는 밀밭이거나 밀밭 어디엔가 은밀한 둥지 트는 종달새 가슴이거나 그 가슴에서 눈 뜬 종달새 새끼들 재재되는 세상이거나 고호여 .. 2022. 3. 8. 해바라기 -- 문충성 만상이 가슴가슴 파랗게 새파랗게 불 타 오를 때 노랑노랑 천지가 노랗게 고문당한다 고문을 당해도 모가지가 꺾여도 말하지 않는다 죄인이여 예술가여 말하라 고호여 이승의 삶이 어째서 노란가를 이승의 죽음이 어째서 노란가를 이실직고하였다 고호여 2022. 3. 8. 폭풍 속에서 -- 고호의 화첩에 바친다 -- 문정희 폭풍의 혈족 그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온 몸에 신이 올라서 노란 뇌빈혈로 쓰러졌다. 녹슨 쇳소리의 광기가 그가 살고 있는 남불(南佛) 아를르의 적교(吊橋)를 건너 지중해를 돌아 단숨에 내 추운 방으로 달려와 내 프라스틱 침대는 박살이 났다. 시대와 허위 그리고 저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완강한 우리들의 폭군을 향해 작두날을 세우고 한바탕 무당 춤을 추다가 나는 망령같은 머리를 풀고 비로소 그의 완벽한 폭풍 속에 누워 오래 울었다. 그날 잠 내가 까만 절망이 쌓여있는 연탄광으로 내려가 떨리는 손으로 흰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을 때 그는 가해의 고통에 떨며 귀를 잘라버리고 한발의 총알을 갈증처럼 자신의 심장에 대고 쏘았다. 2022. 3. 8.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