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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유무 (I) 유무 (I) 김광규 염료상 붉은 벽돌집 봄비에 젖어 색상표에도 없는 낯설은 색깔을 낸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은 이 색깔 지붕에 벽에 잠시 머물다 슬며시 그 집을 떠난다 보일 듯 잡힐 듯 그 색깔 따라 눈이 좋은 비둘기는 종악이 울리는 아지랭이 속으로 날아간다 날다 지쳐 마침내 되돌아온 비둘기 옆집 TV안테나 위에 앉아 염료가 지저분한 벽돌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1989). 16. ----- 이 시가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는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색상표에도 없는 낯설은 색깔'이라는 표현이 시선을 끌면서 동시에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잘 포착되지 않는,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그래서 '눈이 좋은 비둘기'는 그 '색깔 따라' '날아간' 것이.. 2024. 1. 28.
김광규 -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을 스스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라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때도 그것이 너무나 허망하여 도저히 구체적으로 설명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구분은 기실 모든 추상적 규정을 떠나 자명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므로 모든 대상의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결코 유보할 수 없는 삶의 권리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과 욕망은 많이 조작되고 통제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삶을 기만하고 거짓된 죽음을 연습하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물론 현실과 친숙해진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쾌적한 마취 상태보다는 깨어 있는 .. 2024. 1. 28.
김광규 - 법원 법원 김광규 지루하게 긴 생애를 살아 허리굽은 노인이 종교를 믿지 않고 법원으로 간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사무실마다 쌓여있는 기록과 법령집들 미온지와 도장과 재떨이 사이에 법이 있으리라 믿으며 억울한 노인은 지팡이를 끌고 아득히 긴 회랑을 헤맨다 법을 끝내 찾지 못하고 어두운 현관문을 나서며 노인은 드디어 깨닫는다 법원은 하나의 건물이라고 검사실과 판사실과 법정뿐만 아니라 구내식당 다방 이발소 양복점이 있고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즐비한 법원은 호텔처럼 커다란 건물이라고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1979(1989). 78. ---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떠올리게도 한다. 법이 과연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집행되고 있는지를 꼬집는 시이다. 2024. 1. 28.
김광규 - 어린 게의 죽음 어린 게의 죽음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개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이 짧은 시는 울림이 있다. 존재의 비극이 절묘하게 묻어난다고 할까? 마지막 행이 빛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2024.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