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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2023. 9. 12.
김광규 - 책의 용도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딤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2023. 9. 12.
김광규 - 그 짧은 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하지만 이것은 너무 단호한 시학 아닌가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기 마련 의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 비록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사막에 감춰진 수맥이라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살려내는 그 짧은 글이 바로 시 아닌가 어려운 시학 잘 모른다 해도 * 예컨대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학'에 나오듯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33. 2023. 8. 29.
김광규 - 시인이 살던 동네 나뭇가지와 잎사귀 뒤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제 목소리로 바꿔보려고 뒷동산 갈잎나무들 얼마나 오랫동안 수런거렸을까 귓전 스쳐가는 그 소리 자기 말로 적어보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사람은 잠 못 이루고 몸 뒤척이며 귀 기울였을까 아무도 하지 않는 쓸데없는 짓 평생 되풀이하다가 떠나간 자리에 오늘은 빛바랜 낙엽들 굴러다니고 구겨진 낙서 몇 장 드문드문 행인들이 밟고 가는 뒷골목 소식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된 어느 시인이 살던 동네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82. 2023.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