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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개 발자국 온몸이 누런 털로 덮이고 슬픈 눈에 코끝이 까맣게 생긴 녀석. 뒤꼍 개집에서 봄여름 가을 나고, 겨울에는 차고 한구석에서 뒷발로 귀를 털면서 나이를 먹었지. 늘그막엔 주인집 거실 바닥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놈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열여덟 해를 혼자 살았다. 물론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주인 내외와 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고무친의 외톨이 아니었나. 천둥 벼락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놈이 위층 서재까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책상 아래 몸을 숨기기도 했다. 겁이 났던 모양이다. 놈을 야단치고 밖으로 쫓아내는 악역을 맡은 바깥주인도 이럴 때는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이렇게 정든 놈이 몸뚱이만 남겨놓고 세상 틈새로 사라져버린 다.. 2023. 8. 29.
김광규 - 서서 잠든 나무 5층 연립주택보다 훨씬 높이 자란 가죽나무 올해는 여름내 싹 트지 않고 꽃 피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도 없이 검은 골격만 허공에 남긴 채 살기를 멈춰버린 것 같다 겨울보다도 앙상한 모습으로 숨이 멎어버렸나 신록의 숲속에서 날아오는 텃새들 까치 까마귀 비둘기 직박구리 한 마리도 나뭇가지에 내려앉지 않는다 죽음의 뿌리 까맣게 땅속에 내린 채 뒷마당에 서서 잠든 가죽나무 동네 이웃들 지나가며 왜 죽었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75. 2023. 8. 28.
김광규 - 시를 읽는 사람들 멧새들 지저귀는 영롱한 소리 가을바람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홀로 생각에 잠기던 사람 해넘이 수평선 바라보다가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 헤아리고 잎 떨어진 갈잎나무 사랑하던 사람 이슥하도록 서재에 불 밝히며 짧은 글 몇 편 남기고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 수만 명 떼 지어 주먹 불끈 쥐고 부르짖는 시청 광장 가로질러 혼자서 고개 숙이고 걸어간 사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묻고 싶구나 그대들에게 시를 읽는 사람들이여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72 2023. 8. 28.
김광규 - 고요한 순간 창밖의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귀가 먹먹하게 울어대는 매미를 숲에서 날아온 멧비둘기가 잽싸게 낚아채 채마밭 건너편으로 몰고 갔다 매미의 다급한 비명 소리 금방 뚝 끊어지고 고요한 순간이 뒤따랐다 여름내 듣지 못한 짧은 침묵 들려주면서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61. 2023.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