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무정한 마음 치킨 배달 오토바이도 끊어지고 메밀묵 장수도 이미 지나갔다 편의점 창백한 엘이디 형광등과 자동차 블랙박스 파란 불빛만 어둠을 지키고 있는 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홍제내 골목길로 배 불룩한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 정확하게 약속을 지키려는 듯 새로 태어날 생명들만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시간 온 동네가 코를 골며 잠들었는데 낡은 솜이불 뒤척이면서 왜 그대만 혼자 깨어 있는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도 들어본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눈 감고 귀막아도 새카만 침묵에 빠진 잠 무정한 마음 끝내 다가오지 않는다 조간신문과 우유 배달이 올 때까지 선하품만 가끔 보내올 뿐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56. 2023. 8. 28. 김광규 - 그대의 두 발 영화나 연극이나 오페라 보면서 두세 시간 객석에 앉았도라면 참으로 오래간만에 양쪽 발도 보행의 노고를 벗어나 모처럼 안식을 누린다 적어도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이라도 마음 놓고 쉬게 하자 쉴 틈 없이 신발 신겨 부려먹으면서 착한 두 발 주물러주지는 못할망정 육신의 프롤레타리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업신여기지 말자 흔히 손보다 앞서 나가면서도 악수한번 못 해보고 언제나 당나귀처럼 순종하는 두 발 씻겨주지는 못할망정 그냥 내버려두기라도 하자 다행하게도 발을 다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은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48. 2023. 8. 24. 김광규 - 그저께 보낸 메일 오늘은 어제의 다음 날 어제는 예스터데이 비틀스 노래 속에 날마다 되살아나는 어제는 오늘의 바로 전날 독일어로 gestern/게스테른 그저께는 어제의 바로 전날 vorgestern/포어게스테른 영어로는 좀 길지만 the day before yesterday 그 긴 날 저녁때도 원고를 고쳐 쓰고 와인 한잔 마셨던가 가물거리는 그저께 기억 수첩을 꺼내 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났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에 손을 뻗치면 곧장 닿을 듯 가까운 어제의 하루 전날 안타깝게도 되돌릴 수 없네 그저께 보낸 메일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31 2023. 8. 24. 이전 1 ··· 20 21 22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