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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끈 끈                       김광규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스무 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행여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물에 빠지거나땅으로 스며들지 않도록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이제 나의 허리띠를 남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끈 자락을 만지작거린다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14. - 계속 이어나갈 전통을 낡은 혁대에 빗댄 시. 2024. 8. 30.
김광규 - 초록색 속도 초록색 속도                            김광규 이른 봄 어느 날인가소리 없이 새싹 돋아나고산수유 노란 꽃 움트고목련 꽃망울 부풀며연록색 샘물이 솟아오릅니다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갑자기 바빠집니다단숨에 온 땅을 물들이는이 초록색 속도빛보다도 빠르지 않습니까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23. - 봄이 찾아와 온 산이 연두색으로 물들었다가 금새 진초록으로 바뀌는 광경은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탈바꿈을 한 겨울산의 모습과 함께 언제나 경이를 불러온다. 2024. 8. 30.
김광규 - 어머니의 몸 어머니의 몸                        김광규 단칸방에 살면서시래기나물로 끼니를 때워도누더기 옷일망정 몸 가리기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냐 허옇게 드러난 속살부끄러움도 없이 이제는마구 쑤셔대고파내고잘라버린다 늦었나때늦게 뉘우치지 말고가려라 숲으로 덮어라우리를 낳아서 기른 어머니의 몸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34  - 생태주의적 사고가 드러나는 시. 2024. 8. 30.
김광규 - 한강이 얼었다 한강이 얼었다                        김광규 1951년 정월 초나흘 멀리서 대포 소리들려오던 한겨울 꽝꽝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소가 끄는 짐수레와 리어카에 사흘 치먹을거리와 이불을 싣고 삐거덕거리며옷 보따리 머리에 이고 등짐 짊어지고더러는 애기까지 가슴에 안고수십만 피난민들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눈보라도 강추위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혹독했던 그 겨울 살아남아반세기가 지난 오늘눈발 흩날리는 강변도로 자동차로 달려가면서스무 개로 불어난 한강 다리 양쪽끝없이 늘어선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 바라보니지금도 피난 행렬 눈앞에 떠오른다인해 전술에 쫓기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때보다이제는 오히려 두려움만 늘었나다리를 절면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갔던 얼음길지금은 편안하게 승용차에.. 2024.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