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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작약의 영토 작약의 영토                          김광규   앞마당 추녀 앞에 옥잠화와 작약, 대나무와 모과나무, 진달래와 영산홍을 심었다.   꽃나무는 줄기도 없이 뿌리만으로, 갈잎나무는 벌거숭이 맨몸으로 겨울을 나지만, 대나무는 사계질 푸른 잎을 서걱거리며 덩치를 키워서, 이른 봄에는 키가 창문을 가리고, 옆으로 퍼진 가지는 옥잠화와 작약이 있던 자리를 뒤덮어버렸다.  작약의 새싹이 돋아날 무렵, 대나무가 이미 그 위로 퍼져서 햇볕을 가리고 물 주기도 힘들어 올해는 탐스런 함박꽃을 보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신록이 푸르러지는 5월, 하늘이 활짝 갠 날, 틀림없이 누구의 손길이 우리 집 마당을 스쳐간 모양이다.  대나무의 그 무성한 가지와 잎이 무슨 끈으로 동여매기라도 한 듯, 스스로 몸집을 .. 2024. 8. 25.
김광규 - 시여 시여                  김광규 두 돌이 가까워오자 아기는 말을 시작합니다엄마아빠 물. . . 강강지는 뭉뭉이고양이는 야우니그 다음에는시여. . . 싫다는 말입니다 벌써세상이 싫다니요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20. 2024. 8. 25.
김광규 -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김광규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기침을 하면서, 지나간 생애의 어둔 골목길을 더듬더듬 걸어갔다.  분명 근처에 있을 전철역을 찾지 못하고, 미국식 고층 건물들이 위압적으로 늘어선 강남대로를 무작정 헤매기도 했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못 알아들을 말을 지껄이며 지나갔을 뿐, 도대체 행인을 만나지 못했다.  하기야 지금까지 나를 스쳐간 사람들이 대부분 모르는 이들이었다. 아니면 사투리가 반갑고 음식 냄새가 구수해도, 경계해야 할 동포들이었다. 사람들이 잠들고, 돈만 깨어 있는 밤중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불도 켜지 않은 채, 모서리 창가에 앉아, 밤새.. 2024. 8. 23.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 - 후감김광규의 시는 산문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브레히트 적이라고 해야 할까?) 시 읽기의 어려움과 또 시 쓰기의 어려움을 일시에 깨어버리게 했다. 나의 시 쓰기는 그러니까 그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그러한 방식의 시는 지속되면서 답답함과 지루함을 낳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 이런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것은 김광규의 시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의 시의 결을 제대로 살려 읽지 못한 데에서 오는 것도 있었다. 표면적인 편안함 가운데 숨어 있는 미묘한 변주, 그러한 성찰이 주는 충격, 프로스트의 그것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빗대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은 시집들도 꾸준히 읽어나가도록 하자.   * 성민엽. 두.. 2024.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