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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율 제3집] 권혜경(86) -- 들꽃 들꽃                권혜경(86) 어둠이 산등성일 타고 내려올 무렵.겨울부터 지금까지 한이 서린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저만치들려온다. 까맣게 그을린 초동의풀피리 같은 소리가 촌부(村婦)의 구릿빛 살갗을 닮은산언덕길 흙 위에누군가의 발자취가 남겨졌던가.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가.코끝을 간지르는 남풍에무심히 떨고 있는 빛바랜 무명 치마 같은 꽃잎.길섶에 무리지어 피어있는들꽃. 지천에 뒹구는 돌덩이, 흙덩이만큼그렇게 온 산을 메우고 있건마는, 오히려우리 누나 고운 미소 같은 꽃이여.누구나 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에더욱이, 애절한아름다움이여. 고이 생명이 침전해 있는 동안모든 웃음과 울음 캐어 주는영원히 시들지 않는 샘처럼생명력이 충일해 있는 이 들꽃.사랑보다 미움이 많았던 일월들이괴롭히며얼마나 많.. 2024. 11. 25.
슬픈 천사 자칭 천사인 당신주옥같은 삶의 정점인가절름 다리를 이끌고폐병쟁이 남편과 더불어떨칠 수 없던 노역의 질곡그 질곡에서 벗어나노년의 여유도 잠시지랄 맞게도 인지증이 찾아왔다 커피를 다 비우기도 전에 또 커피를 찾는단기 기억 상실은 가족을 도둑으로 의심하는 망상으로 발전하고대소변을 못 가리는 지경이 되더니급기야 몸을 일으키는 법마저 잊어버렸다 노름꾼 남편의 화투판을 뒤엎던 강단잘못한 아들을 모질게 매질하던 엄격모두 전생보다 먼 과거의 일이 되고여든다섯의 나이에죽자이 청춘이요 살자이 고생이라는터무니없는 말을 뱉어내는 철부지가 되고 말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똥구멍은 물론 코털까지도 아파,아파 아파 아파를 연신 되뇌는 당신 이제 그만 훌훌 털고 당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고 싶지만아들이 최고야에서최고는 지랄이 최고야로.. 2024. 11. 25.
유서 사람들이 나를 살인자라 부른다.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생을 범했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임형사는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난 신문을 들고 와서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일일이 읽어주기까지 했다. 이 모두는 새빨간 거짓이다. 배후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음모이다. 그날 나는 친구 성기와 학교 앞 정림에서 술을 마시고 열두 시가 넘어서야 자취집에 들어갔다. 동생은 그때 이미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그런데, 친구 성기는 그날 나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마저도 나를 배반한다. 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음모가 집요하게 내 목을 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뿐인 혈육을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온몸을 난도질할 수 있으며, 결혼을 한 달 앞둔 동생을 범할 수 있단 말인가?.. 2024. 11. 24.
일기장 낡은 일기장으로 더듬어보는 이십 년 전의 나제출용 일기장은욕망이 언제나 무릎을 꿇고착한 소년, 말 잘 듣는 소년이 되겠습니다앵무새보다 더 열심히 되뇌고 있었다어딘가에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옳은 말과 길들여진 말 사이그러나 나는 없었다여동생이 대신 써 준 부분도훌륭히 날짜를 메우고 있었다분장처럼 덧씌운 가면 거추장스러워진짜 일기장에다 나를 풀어놓는다욕망은 거기서도 무릎 아래로 숨죽이고그림이나 시, 낙서로가끔씩 고개를 빼꼼 내밀 뿐이지만분장과 가면은 많이 지워져 있었다마음의 일기는 또 상처의 기록이고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안티푸라민이고복수할 수 없는 복수의 기록이었다드물게는 용서할 수 없는 용서의 제스처였다 낡은 일기장 속의 나는 이젠 없다이십 년의 두께 밑 어딘가에서가끔씩 나를 벼락처럼 눈뜨게 한다   .. 2024.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