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읽고
--- [성서](Good News Bible)를 읽고 나서 (030411)
[덧붙임] (210621) [인간지성론1]을 찾아서를 써나가다 종교에 대한 생각을 약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예전에 써 둔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거의 20년 전 이지만 나름대로 생각의 전개가 나쁘지 않아 다시 옮겨 본다.
[덧붙이는 말: 13년 전 6개월 정도에 걸쳐 성서를 통독하고 난 뒤의 느낌을 적은 글이다. 그 때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이성이나 확실성 등에 대한 나의 믿음은 많이 약화된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틀에 있어서는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비친다. 다만 언어 자체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나, 인간의 행동 동기나 선택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의 근원에 대한 불가해성, 콜리지가 말했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섣부른 이성의 잣대를 대어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전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밀고 나가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어쨌거나 꽤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읽은 이 책은 종교적인 각성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어도,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 텍스트는 American Bible Society에서 발행한 [Good News Bible]이고, 한글 성서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공동번역 성서]를 참조하였다.)
먼저 육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하다. 친구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 두 사람은 이란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 A Tatse of Cherry]를 보고, 레스토랑에서 술을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의 주제가 종교쪽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던 나의 파트너는 신이 없는 세계의 공허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의 삶이 무목적, 혹은 맹목적이라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녀의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뭔가 의미 있는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한 잔 마신 술 때문인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이 날 본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결국 자살하고 말았고, 예이츠도 자신의 시에서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젊어서 죽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다시 그녀의 질문을 받는다면 좀 더 적절한 답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성서]라는 두텁기 짝이 없는 책을 읽어나간 것도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이라는 건 분명하다. 삶을 사는 일에 허덕이다 보면, 혹은 삶에 쫓기다 보면 ‘산다는 것’을 돌이켜 볼 여유가 없을 때도 있으나,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음에야 삶과 죽음의 의미를 캐묻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고, 그 대답이 아무리 불완전한 형태의 것이라도 나름대로 지니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긴 하지만 [성서]를 완독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밝힌 대로 [고흐의 편지] 번역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덧붙임 - 이 편지의 번역은 많이 진행되지는 못하고 50편정도 번역하는 선에서 마감되었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 얼마 동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려고 했고, 또 실제로 전도사로서의 일도 수행했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인용이 상당히 많아서,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성서]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으나 나중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창세기>부터 다 읽어나가자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것인데, 헬레니즘과 히브리이즘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의 두 축 중 하나로 뿌리를 내리게 된 힘, 거기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양적인 성장을 거둔 힘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 등에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오 개월 정도가 걸린 통독의 과정에서 좀 더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부족신이었던 하느님(하나님)이,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보편신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이후 기독교가 그의 제자들, 특히 바울의 전교 활동으로 당시 로마 제국이나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는 점이다(이후 기독교의 융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것,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훌륭한 신학자의 역할 등에 힘입은 바가 크겠지만, 그 부분은 따로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구약]에 드러나는 이 세상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그 창조에 있어서 실패한 것으로 비춰진다(적어도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면,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필요도, 노아의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멸하게 할 이유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까닭도 없지 않았을까(이 세상은 하느님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만들었던 것일까?)?[주 1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릴케의 [하느님 이야기]와, 고흐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의 하느님은 때로 이스라엘 민족을 제외한 다른 민족에게는 부자비하기 짝이 없고, 거기다 질투심에 불타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비춰진다. [그리스 신화]의 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지닌 그런 인물을 절대자로 믿고 섬기기란 어려운 일 아닐까?[주2 - 이 부분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은 [성서]의 절대성을 배제하고, [성서]란 것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하느님을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되리라. 그렇긴 하지만, [구약]의 구절들은 확실하고 권위적인 어조로 하느님의 음성을 기록하고 있어서, [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당시의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을 기술한 것으로 배척하든가 어느 한 쪽으로의 선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구약] 중에서, <욥기>나 <전도서> 등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읽고 공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전도서>가 [구약]에 포함된 것은 기독교가 그 포용력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 내지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그래서 우리는 때로 다소 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기독교를 예수교라고 부르지 않는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한 여러 기적들, 물 위를 걷는다든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는 그런 기적들이 현대인으로서는 회의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인 반면, 그의 가르침의 핵심에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할 강령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오22장 37절-40절, 공동 번역)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most important commandment. The second important commandment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 The whole Law of Moses and the teachings of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commandments.
[신약]을 읽어나가면서 예수의 뛰어난 능력 중의 하나는 마치 위대한 문학가가 그런 것처럼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나 비유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구절에서도 [구약]의 가르침들이 예수의 정확한 표현을 얻어 집약되고 더욱 강렬한 울림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위의 구절을 삶의 의미와 삶의 방식을 구체적인 언어로 천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첫째 계명은 이 세상이 어떤 목적을 띠고 생겨난 것이라면, 다시 말해 목적론적인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원인이 되는 것, 우리가 흔히 창조주라 부르는 하느님의 뜻을 있는 힘껏 받들고, 또는 추구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의미라는 말로 해석된다. 둘째 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인데, 이 말은 우선 그 타당성 여부나, 이 말이 미치는 파장, 실천 가능성의 면 등에서 다각적인 조명이 필요할 듯하다. 왜 남과 나를 같은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이웃의 범위는 어디인가? 결정적으로는 이 말이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 실천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현재와 같은 삶의 구조 속에서는 자기희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 희생은 결국 순교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덧붙임 - 이 부분에 대한 흥미로운 반박은 프로이트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웃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이고 나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잠재적인 적인 것이다. 프로이트 생각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오는 말, 즉 같은 종 사이의 생존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는 말과 연결된다). [주3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유일하고, 복제할 수 없는 실재이다(We are all one. But each one of us is unique and unduplicable entity)'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인간 혹은 우주 만물이 처한 이중적 상황을 잘 요약한 말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이리라. 나와 타인은 엄연히 구별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엇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가 아닌가? 또 불교에서 개인의 각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와 함께 자비라는 덕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이(혹은 더 나아가 만물이) 변전의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자각에서 나온 것처럼.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뚜렷한 답을 얻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맞으리라. 이 문제를 우회적인 형식으로 다룬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꿈>이라는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크긴 하지만 쉽게 공감할 수도 없고, 또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했는지도 지금은 혼란스럽다.
버거운 일이긴 하지만 논의를 좀더 밀고 나가본다면, 개체로서의 인간의 의무 중 하나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고, 또 인류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의무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인데, 이 두 가지가 상치되는 경우가 발생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다시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다시 말해 죽음을 인간 개체의 현상의 종지부로 보는가, 아니면 죽음을 우리가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삶의 힘겨움은 많은 미지의 것들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며, 그 반대편에 자리한 희망은 그런 미지의 것들이 해결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블레이크가 추구했던 ‘상반된 것의 불가사의한 통합’에서 찾아야 하는가?)]
[성서]를 다 읽고 난 지금, 처음부터 이 책이 나에게 커다란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인간이 쓴 글이라는 것은 역사적 배경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성서]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것이 하느님의 문제든, 삶의 방식의 문제든, 죽음의 문제든, 영생의 문제든, 우리의 이성을 배제하고는 논의할 수가 없는데, 이성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만큼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래서 도그마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철학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내 관심의 초점과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핀트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신(하느님)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내 관심의 초점이라면, [성서]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는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공감을 하기가 힘이 든다. 더군다나 [신약]의 신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에 [구약]의 신은 앞서 밝힌 대로 상당한 거부감마저 준다. [주4 - 신에 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자면 나의 현단계의 능력으로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신이 무엇인지 조차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로서는 이 우주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맹목적이라고 보는 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한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어차피 추측이나 요행을 바라는 쪽이 되고 마는데, 나의 경우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이나, 생명체가 겪어야 할 고통 등을 볼 때에는 오히려 신이 없는 세계가 더 맞아 보인다. 하지만 생각이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처럼 인간이 신이 되는 것--물론 이 경우에는 신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하겠지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확한 감상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상을 피력하는 데 그친 감이 없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또 종교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도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서]는 그 명성에 값할 만큼의 울림을 나에게 주지 못했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모순된 도덕률’과 ‘인간의 무지에 대한 무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러셀의 말을 빌자면, 어쩌면 [성서]는 수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우주관과 세계관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기독교라는 낡은 의복이 현대에도 유효한지, 아니면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는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이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처음의 그 질문 “만일 우리의 삶이 무목적, 혹은 맹목적이라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에 대해서 답변을 시도하면서 이 글을 정리해야 할 듯 하다.
우선 삶을 총체성 가운데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우리는 자신이 언제 어느 순간에 소멸될지 모른다는 운명을 안고 살아나가야 한다. 그 소멸의 시점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으며, 다만 주의를 늦추지 않음으로써 어느 정도 연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보편적 상황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주5 - 고갱의 그림 제목]’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 먹고, 잠자고, 기타 생리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이 거대한 의문에 답을 구하려 애를 쓰면서 살아간다. 이 거대한 질문에 압도당해 답을 구하려는 시도를 반쯤 포기하거나, 아니면 이미 주어진 대답에 매달리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주6 - 종교라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해 인식의 한 극점에 도달한 산물이라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 신자의 바람직한 태도는 그 종교가 이룬 인식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르고, 더 나아가 신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이 우주를 생각할 때 신을 배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티끌이나 먼지처럼 그냥 부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 맹목적, 혹은 무목적이라면, 자살만이 유일한 답일까? 이 가정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삶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에, 다른 하나 ‘죽는다’는 것이 선택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즉, 삶이 아무리 맹목적, 혹은 무목적이라도, 삶이 살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도 죽음의 선택이 자동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주7 -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a.삶이 주어져 있다. b.삶은 맹목적이다’는 명제에서 'c. 죽어야 한다‘는 명제가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c. 그래도 살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도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살의 문제’가 삶의 의미나 무의미보다는 ‘고통’과 더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살다보면 우리가 겪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버거운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처럼 고통의 무게가 살아있음을 저주스러운 것(때로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은 생각이 개입할 여유마저 주지 않을 정도로 즉각적이다)으로 만들 때에도 삶을 지속시켜 나가야만 하는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따른다. 삶이 별다른 의미가 없고, 고통에서 벗어날 가능성마저 없다고 한다면, 고통의 해결책으로서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주8 - 그러나, 여기에도 난관이 따른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명체가 무기물로 돌아가는 소멸로 보지 않는다면, 햄릿의 독백처럼 ‘죽음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며, 좀 더 극단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현재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 다시 말해, 지옥이라고 흔히 묘사되는 그런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삶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는 반대의 경우에는 ‘자살’의 문제가, 비록 우리 삶이 무의미하다고 가정할 지라도,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주9 - 실제 삶은 우리의 언어나 사고 작용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불가해한 부분이 많이 있다. 며칠 전 나는 내 정신적 고통의 뿌리 중 하나를 이해했고, 이제는 거기에서 해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그 다음 날인가, 이해할 수 없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순간적으로 나는 더 이상은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글을 적어 나가는 가운데, 나는 점점 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 축소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통의 경우만 하더라도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체험을 통해 느끼듯이,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로 볼 수도 있지 않는가? 미흡하긴 하지만, 처음에 던진 질문에 나름대로의 대답을 정리해 본다면, 삶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선택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은 아니며, 또 현실적으로 고통의 문제가 극심하지 않을 경우에는 죽음의 선택이 그렇게 대두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한다. 플라톤을 비롯 고대의 철학자들이 수학에 그렇게 매료된 까닭은 현실 세계의 불확실함과는 달리, 수학의 세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삶의 문제에서는 그러한 확실성이 획득될 수 없겠지만, 최상의 답을 얻어내려는 시도마저 중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상(020716)
[성서]를 읽어야 할 이유는 많이 있다. 우선 현재 진행하고 있는 [고흐의 편지] 번역에 필요하기 때문에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성서]는 종교적 경전일 뿐만 아니라, 서양 문화의 두 기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서양 문학을 전공한, 또 계속 공부해 나가려는 나로서는 [성서]를 읽지 않고서는, 서양인의 정신의 근저에 깔린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서]를 읽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의 핵심, 또는 그 진리성 여부를 탐구해야할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이 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도 말할 수 없으나, 길게 잡아도 백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과학 기술의 혁명적인 발달로 인간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도가 최대한도이다. 이 시간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 삶에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바는 각자 다르기 때문에 그 활용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삶이 가지는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서]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일정 부분은 받아들이되(“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대표되는 예수의 사랑의 정신 등), 하느님과, 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이야기하는 부분들, 기적들은 회의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여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어느 정도는 [성서]를 유태인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이것은 [요한], [마태오], [고린토] 등을 읽고 난 뒤에 좀 더 뚜렷하게 느낀 것이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힘을 생각할 때, 또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종교의 내용들이 아무리 비이성적으로 비춰질 지라도, 종교에 대한 섣부른 비난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고, 내 개인적인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지론자(agnostics)’의 그것이며, 불가지론은 다시 무신론쪽으로 기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에 든 여러 이유에서, 또 기독교인과의 좀 더 심도 있는 토의를 위해서도 [성서]는 한 번은 통독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