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여는 말

정신분석, 이 생각 저 생각

길철현 2021. 12. 10. 08:49

[새벽에 일어나 정신분석 카페에 오랜만에 글을 써내려 갔는데 공용 와이파이를 사용하다 보니 저장이 잘 안 되어서 결국 지우고 말았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써보는데 얼마나 복구될지 또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지 자못 궁금하다.]

 

1987년 군에서 복무를 할 때(34년 전이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을 읽으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정신분석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물론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그전에 들었겠지만 처음에 어떤 경로로 그의 이름을 접했는지 분명한 기억은 없다. 그리고, 1987년도에 초독을 했을 때보다는, 제대를 하고 1989년에 재독을 했을 때의 기억이 더 생생한데, 그 당시 독후감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상전집]에 속한 것으로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인 김성태가 영역본(아마도 제임스 스트레치의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었다. 다소 어렵기는 했어도 여타 다른 사상 서적과는 달리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번역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또 정신분석과 내가 코드가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꿈의 해석]에 도전했는데, 을유판으로 읽다가 포기를 하고, 동서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읽었다. 번역이 잘 되었다는 느낌은 없었어도 그래도 을유판보다는 읽기가 좀 수월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꿈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지루한 책이고, 7장 같은 경우는 상당히 난해했기 때문에(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계획]이라고 나중에 이름 붙여진 자신의 미발행 원고의 개념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싣기도 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이었던 내가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고 나름대로 소감을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리라.

 

그 후로도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조금씩 읽었지만 집중해서 읽은 것은 2005년 경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영역본으로 좀 읽기도 했으나 대체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전집판으로 읽었다. 번역이 매끄럽게 된 책도 있었지만 어떤 책은 도저히 참고 읽기가 힘든 정도였다. 내 석사논문의 제목은 [워더링 하이츠와 어머니의 부재]인데,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으로 잘 알려진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을 마가릿 말러(이분도 정신분석가이다)의 '어린아이의 발달에 있어서의 분리-개별화' 이론을 원용하여 해석해 본 것이었다. 나는 석사학위를 받는데 14년 6개월이나 걸렸는데, 물론 그 기간 내내 석사논문을 쓴 것이 아니고, 석사 졸업 연한인 6년 내에 논문을 끝내지 못해 한 동안 중단했다가 구제를 받고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논문을 너무 무겁게 인식했고, 논문을 쓰는 것이 내 안의 문제들과 부딪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처음에 논문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 달아나던 때의 내 심리를 되살려서 좀 더 자세하게 써본다면). 

 

처음에 석사논문을 쓸 무렵을 전후하여(실제로는 대학원 시절부터) 내 삶과 가족에 감당하기 벅차다고 할 정도의 위기가 닥쳐 나는 정신과 상담(치료)을 간헐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구제를 받아 석사논문을 마칠 무렵에도 상담을 받았는데, 정신분석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상담의 시간적인 제약(대신에 보험 적용을 받아 한 번 갈 때마다 30분 상담에 만 원 조금 넘게 지불하면 되었다. 이렇게 해주는 의사분이 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담당 의사분이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던 듯하다)과 내 마음의 심층적인 면을 다루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인터넷에서 정신분석적 치료를 하는 의사를 검색해보았다. 내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내 삶을 좀 더 잘 이끌고 싶다는 큰 전제 외에도, 나를 괴롭히는 내 마음의 불안과 우울감, 무기력 등의 근원을 캐내어 그런 것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최병건 선생님과 연결이 되어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내 이야기를 듣고는 선생님은 일단 자신의 수업을 들을 것을 권했다. 2007년도부터 선생님의 수업을 2-3년간 들으면서, 프로이트로 부터 출발해서 이후 정신분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In Treatment]라는 상담을 직접 다룬 드라마를 공부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선생님은 2011년에는 [당신은 마음에게 속고 있다]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영화를 통해 정신분석 개념들을 설명해주는 흥미로운 책이어서 숙독하고 영화들을 다 찾아보기도 했다.

 

그 중간에 나는 내 마음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는 애초의 생각을 다시 한번 선생님에게 피력했더니, 두 분을 추천해 주셨고 나는 그중에 민성혜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두 번 회당 45분 정신분석적 치료를 시작했다. 회당 비용은 십만 원으로 수입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는 상당한 금액이었으나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상담에 뛰어들었다. 민 선생님은 첫 시간에 원론적인 이야기이긴 해도 "정신분석이 마음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또 당시 내 마음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인, 녹음하는 버릇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거부를 표시(상담을 녹음해도 되냐고 했더니 선생님은 안 된다고 다소 단호하게 말했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습관을 고쳐주었다.  

 

처음에 나는 자유연상을 오해해서 떠오르는 단어나 파편적인 장면을 제시(융의 방식?)하기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면 되었다. 내 안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씩 선생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내가 주인공이고 더할 나위 없이 손쉬워 보이는 그 과정이 다른 한편으로는 내 안의 억눌린 감정들과 대면해야 하는 지극히 힘겨운 시간이기도 해서 몇 개월 만에 중단할 뻔한 적도 있었고, 2년 뒤에는 실제로 중단하고 말았다(구실은 이제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개월 뒤 다시 정신적 위기가 찾아와 상담을 재개해야 했고 이번에는 경제적, 시간적 부담 때문에 일주일에 1회로 줄여야만 했다. 이때(2010년) 나는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2013년쯤에는 내 수입을 상회하는 지출을 지속해(한 마디로 내 생활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방만했다) 상당히 많은 빚을 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또 한 동안 극심한 정신적 불안감에 시달렸다.

 

2014년도부터 2년 3개월 동안 최병건 선생님과 프로이트의 중요 저작들을 제임스 스트레치의 영역본으로 읽을 기회를 가졌다. 2주에 한 번씩 온라인으로 수업을 했는데, 이 기회를 통해 나는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좀더 면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사고의 틀은 2번 정도 크게 바뀌었고, 그에 따라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도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병건 선생님이 소개해준 샌들러 등이 쓴 [Freud's Models of the Mind]라는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맹정현이나 다른 사람들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프로이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첫 걸음은 그의 사고의 틀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좀 명료하게 머리에 담고, 그가 쓴 저작이 어느 시기의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읽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인문학에서 출발한 국내 프로이트와 라캉의 전문가들인 홍준기(이 분은 원래 법학도였구나), 맹정현, 김석, (이창재) 등의 저서도 흥미롭게 읽었다. 

 

이 당시 최병건 선생님은 다른 수업도 진행하고 있었고, 선생님이 만든 [공감] 카페는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 정신과 의사분, 그리고 나처럼 인문학도(나 외에는 없었나?)로 정신분석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로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메르스가 창궐하던 2015년 정도에 나는 다시 한번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기를 겪었는데, 그 시기를 벗어나면서 7년 넘게 이어지던 상담을 종료하였다(정확한 시기는 일기를 참조해야 할 것이나 우선은 부정확하지만 기억을 따르기로 한다). 내 나름대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내 삶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자꾸만 무기력과 좌절(물론 그 반대편에는 의욕 과잉과 근자감도 있다)을 반복하는 까닭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으나, 상담의 막바지에서는 상담 또한 매너리즘에 빠져 뭔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정신분석적 치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선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이건 보험적용이 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시간도 많이 들고, 그 효과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하긴 이 부분은 모든 치료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나는 박사논문 주제로 콘래드 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해 보려 했으나 주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박사 과정 수업은 2년만에 빠르게 마쳤으나 강의와, 종합시험, 외국어 시험 준비 등으로 몇 년이 훌쩍 지나갔고, 졸업 연한인 10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방향을 급선회하여 제국주의 문제를 비교적 연구가 덜 된 그의 초기 작품들과 연계하여 써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혼자 계시던 노모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어머니 간병 문제가 덧붙여졌다. 처음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어머니를 돌보다가 차츰 논문을 포기하고 내가 대구로 내려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이도 이미 오십 대 중반인 데다가 국내 영문과 박사학위를 받는다 해도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니 공부는 잘 되지 않고 힘만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동안 하고 있던 [독학사 칼리지]의 강의도 중단하고, 어머니를 돌보고 나머지 시간엔 내 최애 취미인 탁구에 몰두하고, 또 이런 저런 글을 쓰거나, 시간이 허락될 때는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내 인생의 후반부를 꾸려가기로 했다(다행스럽게도 어머니 덕택으로 경제적인 부담에서는 조금은 자유로웠다). 그런 생활을 몇 개월 했을까? 갑자기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 환자가 폭증하였다. 이후 전 세계는 모두 주지하다시피 코로나의 영향 아래 놓였으다. 코로나 상황과 어머니 간병에서 오는 힘겨움, 그리고 아무리 괜찮다고 했으나 논문을 못 마친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이런 것들이 올해 1월 1일부로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면증이었으나, 이내 불안과 우울, 무력증이 따라왔고, 무엇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초조감, 안절부절못한다는 표현이 딱 맞는 그런 증상이 나를 괴롭혔다. 바꿔 말해 이제 그만 이 삶을 끝내고 싶다는 욕망과 그래도 제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있었던 듯하다. 

 

처음 증상이 시작되었을 때 정신과 의원들을 수소문 해 보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도 급증하여 내가 있는 대구에서는 안정적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약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가까운 병원을 찾았는데 한 번 가면 두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했다. 어쨌거나 이때 내가 겪은 정신적 위기, 혹은 불안장애는 지금껏 내가 겪은 것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했고, 당시 허약해진 내 마음 상태 때문이겠지만 나는 이 위기를 못 넘어갈 것만 같았다(지나고 보니 흔히 하는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그밖에도 약에 대한 두려움도 나를 사로잡았다. 수면제와 항우울제 등은 한 번 먹으면 못 끊는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들도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그러고 보니 다른 사례이긴 하지만 조현병에 걸린 내 친구는 20대 초반에 약을 먹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약을 먹고 있고 병이 낫지도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애당초 인간 정신에 대한 나의 관심이 증폭된 것도 어느 정도는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1986년도에 발병한 이 친구로 인한 것이라는 것도 떠오른다.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 내 친구의 일을 계기로 해서 더욱 깊어졌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3개월 정도만에 회복을 했고, 약도 중단했다(의사는 단약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로부터 6개월 뒤인 9월에 다시 한 번 불안증세가 찾아와 잠시 약을 복용했다. 이번에는 증상도 약했고 1개월 정도만에 회복되었다. 어디서가 들은 "정신질환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 나에게 "그럼 버티면 되는 거네"라는 위안을 준 듯도 하(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별로 없었지만)고, 또 병의 와중에 내 자신이 무력하게 시간만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 안에서 여러 힘들이 치열하게 싸워 나가고 있었다"는 생각 역시도 큰 힘을 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내 마음은 상당히 고조된 상태이다(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진폭이 큰 감정기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논문을 놓으면서 한 동안 책도 손에서 놓았는데, 이제는 다시 콘래드의 공부로 어느 정도 돌아왔다. 학위 논문과 상관 없이 콘래드는 매력적인 인물이고 평생을 두고 도전해 볼만한 인물이다. 거기다 그는  프로이트와 동시대의 인물이기도 하다(콘래드는 프로이트보다 1년 늦은 1857년에 태어났지만 프로이트보다 훨씬 일찍 죽었다). 콘래드는 젊은 시기에는 정신분석을 알 수가 없었고, 그의 말년에 지인이 프로이트의 책을 소개해 주었을 때도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어쩌면 그는 인간 정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콘래드의 작품들은 정신분석으로 접근해 볼 여지가 농후하다. 정신분석과 콘래드에 대한 나의 공부의 부족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나의 둔함, 그것도 아니라면 자폐적인 내 정신 상태 때문에 10년이라는 기한 내에 논문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석사논문에 14년 6개월이 걸렸는데 박사논문을 10년 만에 쓰라고!) 이제는 그런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차근차근해나갈 수 있으리라(단순한 기대에 지나지 않을 수도). 

 

프로이트는 자신이 지적한 대로 코페르니쿠스, 다윈에 이어 인간관에 커다란 변화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요즘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윈과 프로이트의 연결고리이다. 그걸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다윈의 저작들을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무의식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인간 정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의식에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는 이전의 의식, 이성 중심의 인간관을 백팔십도 바꿔 놓았다. 이제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급속도로 발달한 뇌과학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점을 찾고 또 차별점은 무엇인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처음에 썼던 글보다 몇 배는 확대되었고 정신분석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조리가 없는 대로 뭔가 한 번 정리를 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