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파이더맨을 두 번 본 이유
오늘(2022년 1월 1일)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보았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해서 두 번 봤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낚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영화에 대한 칭찬이나 감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물론 멀티버스 운운하며 이전의 스파이더맨까지 총출동한 이 영화가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인류의 평화를 위해(지구는 언제나 멸망 직전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감내하고 다시 '고독하고 비밀스러운 영웅'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육십을 바라보는 노구의 심금을 울리는 데가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밝히는데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2021년 12월 27일에서 29일)까지 나는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즈음은 더더욱 언제나 혼자 하는 여행이다). 이튿날의 여정에는 인상 깊게 본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머물던 도시의 장소들을 찾아보는 것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찾고 싶었던 곳은 여주인공이 살던 집이었다. 이건 나만의 이상한 버릇은 아닐 텐데, 아마도 영화가 영화로만 머물지 않고 현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바꿔 말해 영화가 우리에게 준 감동을 현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지만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여주인공이 살던 집은 그 주소 바로 앞에서 끊어지고, 산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도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해 보아도 그 주소는 없는 것으로 나오고,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니 영화 속 집은 허물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탈함과 피로감이 마구 몰려왔다. 이틀 전에 있었던 탁구장 리그전에서 속된 말로 피똥을 싸면서 우승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심했고(수비수와의 게임에서 거의 진 게임을 역전시켰는데, 보통 20분 내외면 끝나는 게임을 한 시간 가까이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는 탁구를 좀 쳐본 사람이면 쉽게 알 것이다), 여행 이틀 째인 이날도 이 도시로 오기 전에 꽤 많이 걸었는 데다가, 기대감을 안고 걸을 때는 그래도 잘 몰랐는데 기대가 좌절되고 나니까 산길이라고 해도 무방할 비탈길을 헤매고 다닌 피로감이 급속도로 밀려온 것이다. 더 이상 여행을 지속할 수 없을 듯해서 심지어 대구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가 요즈음 스파이더맨이 인기가 있으니 일단 이 영화나 보면서 피로를 달래자는 쪽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주차비를 아끼느라 산꼭대기에 차를 주차해 두었는데 거기까지 걸어올라갈 힘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영화관으로 향했다(배보다 배꼽이 크군. 그리고 정말 서론이 기네). 코로나 때문에 관객이 없어서 인지 매표소에는 근무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인판매기에서 표를 구입해야 했고, 표 검사도 자율검사 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대신에 티켓 가격은 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동되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관람객이 한 명도 없었다. 평일 오후 시간대이긴 해도 현재 최고 흥행작인 스파이더맨인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20년도 더 전, 1999년 설날 아침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경산의 어느 소극장에 [이집트 왕자]를 보러 들어갔다가 나 혼자서만 관람한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다행히도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영화 상영 직전에 들어와 세 명이 같이 보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상영관이 프리미엄관인지 의자가 상당히 고급이고 앞뒤 간격도 넓었다. 거기다 안마의자처럼 뒤로 젖혀지고 발걸이도 있어서 아주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로에 찌든 나에게는 이 과분한 편안함이 내 눈꺼풀을 저절로 감기게 했다.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전세계에 공개되고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나는 혼곤한 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깨니까 윌렘 데포가 나오고, 자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다짐을 했건만 다시 한번 정신없이 잠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또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에는 스파이더맨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이해가 안 되는 대로 보려는데 자느라 잘 몰랐으나 극장 안이 추운 것이 새삼 느껴졌고, 내용 연결도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참고 보기가 힘들었다. 관객이 워낙 없다 보니 난방을 따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남쪽 지방이라 혹독하게 춥지는 않았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고야 말았다. 인류 전체에 닥친 거대한 재앙인 코로나는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타격을 가했다. 극장을 비롯 영화 산업 전반도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이다. "뤼미에르 형제 이후 영화는 멈춘 적이 없다. 코로나는 곧 물러나고 영화는 지속될 것이다"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이 머지않아 현실이 되리라 믿어 본다.
P.S.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케실리우스와 닥터 스트레인지가 결투를 앞둔 상황에서 이름을 두고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상당히 웃긴다(닥터 스트레인지는 자신에 대한 호칭에 상당히 민감하다).
케 : Yor are Mr.? (이름이 미스터?)
닥 : No, Dr. (아니, 닥터요)
케 : Mr. Dr. (미스터 닥터) [이름을 닥터로 알아들음]
닥 : It's Strange. (스트레인지라니까) [이상해라니까, 정도로 말함]
케 : Who am I to judge? (이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답을 "좀 이상하지요"로 알아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