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여는 말

쓰면 쓸수록

길철현 2022. 3. 19. 07:28

영국에서 근대장편소설(Novel)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에 로렌스 스턴이라는 작가는 [트리스트람 샌디]라는 일종의 반소설(Anti-Novel)을 써서, 정착되어 가던 새로운 장르를 그 근간에서부터 뒤흔들었다. 1767년에 완간된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신사, 트리스트람 샌디의 생애와 의견](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eman)으로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에세이에나 어울릴 의견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의 전반부는 트리스트람 샌디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백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작품의 중간 정도인 400페이지 정도가 지나야 이제 겨우 트리스트람이 다섯 살이 된다. 이 밖에도 저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장난과 실험을 해서 관습과 규칙에 틈을 만든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작중 화자는 '트리스트람 샌디의 생애 하루를 적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생애의 끝으로부터 더 멀어진다'는 희안한 말을 한다. 현미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시적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다는 뜻이리라. 1922년에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우리말로는 천 페이지가 훨씬 넘는 소설인데 스티븐 디덜러스와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두 인물의 18시간의 행적을 주로 그 의식 세계를 중심으로 파헤치다 보니 그렇게 방대한 저작이 되었다.

 

나의 사진 에세이는 의식의 흐름을 다루거나 샛길로 빠지지도 않는데도 쓰면 쓸수록 쓸거리가 밀린다. 여행을 너무 자주 다니고 쓰는 작업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리라. 계획대로 아귀가 딱 맞게 산다는 게 사실은 이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