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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예전것)

사랑의 기적(Awakenings) - 페니 마셜 (1990)

by 길철현 2017. 3. 13.

 

***Awakenings [98년 재 관람]

 

[보충 -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감상 후기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조만간에 이 영화에 대해 한 번 써보고 싶다.]

위의 말과 달리 공책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을 적어둔 것을 보게 되었다. (91년도에 보고 적은 것인데, 옮겨 본다.)

 

 

- 안암 극장(5월 11일. 혼자. 주연 :로버트 드 니로, 로빈 윌리암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가 여기에 해답을 줄 수 있을까?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답을 못 내리는데, 무엇이 확실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여부까지도 의심스러운데.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well-made)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감동적이었다는 것만은 확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심문]이 '인간의 자유'의 문제를 심도 있게 (여기서의 자유라는 말을 이렇게 피상적으로 써버리면 읽는 사람에게 혼동을 줄 여지가 있음을 깨닫는다. 설명을 좀 해 본다면, 내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자유'라는 단어는 현상적 의미에서의 그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라는 측면에서의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통해서 이야기해 본다면 '죄도 없이 감옥에 수감된 죄수(여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가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거짓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음으로서 진실을 지켰다는 것, 즉 그녀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진실을 지켜 그녀의 친구가 피해를 입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려냄으로써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과 같이, 이 영화도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삶의 의미 있는 부분들-- 영화의 대사에서 빌자면 일이나, 오락, 가정 등 --을 부각시켜 우리의  잠든 정신에 충격을 주기 때문에 감동적이었다.

[강경대 군의(학형의) 죽음으로 우리 사회는 굉장히 혼란스런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슈인데, 시위의 참여가 정당하고 옳은 것일지라도 돌과 화염병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최루탄의 경우는 용납할 수 없지만.

삶의 평화, 고요한 삶을 나는 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사냥꾼, 수렵 시대의 성격이 강하게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야기가 영화평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이 영화가 나의 이야기와 똑같이 삶의 문제를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호가 나에게 "학교에 안 나오면 정말로 단절이 되는 거죠"라고 말했을 때 나는 뜨끔함을 느꼈다. 뭔가 책임을 회피한 듯한.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지난 8일 영문과 총회에서 9일에서 11일까지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정이 났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을 믿고 11일까지 수업을 다 제꼈다. (그리고 과도관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 갔더니만 (보충 : 아마도 12일이리라) 9일만 수업 거부 했다고 해서 투덜거렸더니만 병호가 한 말이 위의 말이다.

그렇다. 지금은 동참을 요구한다. 현재의 상태를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는 영화의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줄거리를 정리해 보자.

말콤 세이어 박사(로빈 윌리엄스 분)는 의사이면서도 임상은 하지 않고 연구만 했는데, 브롱크스 만성 질환자를 위한 병원에 와서 환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가 맡은 환자들은 치매 환자들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세이어 박사는 환자들의 이러한 상태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병원의 사정에 익숙해지고 환자들을 남다른 애정으로 돌본다.

그는 이 치매성 환자들이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어떤 동인이 있으면 동작을 한다는 것을 발견해 내고는 몇 가지 진척을 본다.

환자 중에 로우(로버트 드 니로 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로우는 병원에서 30년 동안 식물 인간으로 살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돌보았다. 파킨슨 병에 대한 특효약이 치매 증세의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세이어 박사는 로우에게 제일 먼저 투약을 한다.

어느 날 밤 로우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세이어 박사가 자고 있는 사이, 다른 방에 가서,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쓰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33년간의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다른 환자들에게도 약이 투여되고, 그들 대부분은 오랜 동안의 꿈과 같은 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깨어난 것을 기뻐했고, 어떤 사람들은 늙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했다.

자신의 재탄생을 기뻐하던 로우는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고, 그는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혼자 자유롭게 다닐 것을 허락해 주기를 청한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이에 화가 난 그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병원의 경비원들에게 저지 당하고, 그는 과격한 행동으로 정신 병동에 갇히는 몸이 된다. 

그런데, '로우'에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의 몸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점점 심해져서,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게 되고, 급기야는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다른 환자들도 그렇게 되어 버린다.

세이어 박사는 이후에도 브롱크스 병원에 계속 근무하면서, 이들의 치료를 계속했지만 1969년 여름에 나타났던 기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상인이 아닌 사람들-- 난쟁이, 곱추 같은 신체적 불구자들, 암으로 죽음의 날짜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데, 흔히 동정심으로 표시되는, 그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숨겨진 우월 의식은 아닐까? 이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올해 초 국내에 개봉된 영화 [나의 왼발]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을 다룬 전형적인 영화 중의 한 편인데,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적고 있는 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그래 보다 섬세한 부분, 내가 원하는 부분을 그려내자.)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세이어 박사의 성격 묘사가 잘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려내기는 단순하지 않은데 이 영화는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로빈 윌리엄스가 나오는 영화는 여태까지 세 편을 보았는데 [굿모닝 베트남]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그의 역이, 그의 원래의 성격과 잘 매치되는 듯하여(추측이지만) 연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면, 요번 역은 그에게 상당히 힘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소화해 낸 것 같다.

로버트 드 니로는 타고난 연기자라는 생각이 든다. [언터쳐블], [미드 나잇 런], [앤절 하트]에서 개성이 뚜렷한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 어려운 역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누가 올해의 남우 주연상을 탔을까?)

영화 자체는 썩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건 장면 장면에서 극적인 효과가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영화는 '삶의 의미'를 또 한 번 추궁하게 해 준 작품이다. 우리는 과연 알 수 있을까? 알고 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

어느 쪽일까?

(영화를 볼 때 나의 선입견이 들어간 의미론적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