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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이성복3

이성복 - 극지에서 ​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 끝없는, 끝도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 나.. 2023. 5. 22.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그 봄 청도 헐티재 넘어 추어탕 먹으러 갔다가, 차마 아까운 듯이 그가 보여준 지슬못, 그를 닮은 못 멀리서 내젓는 손사래처럼, 멀리서 뒤채는 기저귀처럼 찰바닥거리며 옹알이하던 물결, 반여, 뒷개, 뒷모도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 (용어 설명) 죽지랑 : 신라의 화랑. 그와 득오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반여 : 윷판의 중앙 (방) 뒷개 : 윷판의 첫 밭에서 앞밭으로 꺾이지 않고 일곱째 되는 밭 (앞밭 : 모의 자리) 뒷모도 : 윷판의 뒷밭에서 안으로 꺾인 첫째 밭 (지슬이라는 말에서 이성복이 죽지랑과 윤슬을 떠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억측도 해본다.) 득오의 모죽지랑가도 옮겨본다 https://blog.naver.com/qlsd.. 2023. 4. 24.
이성복 -- 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 2020.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