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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이성복

이성복 -- 1959년

by 길철현 2020. 3. 13.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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