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를 돌아보다

일기장

by 길철현 2020. 6. 25.

일기장

 

낡은 일기장으로 되돌아가는 이십 년 전의 나

전시용 일기장에선 욕망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착한 소년, 말 잘 듣는 소년이 되겠습니다

이 말만 녹음기처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때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도 있지만

옳은 말과 길들여진 말 사이 나는 없었다

여동생이 대신 써준 부분도

아무 탈 없이 날짜를 메우고 있었다

숲속에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친 이발사처럼

난 비밀 일기장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거기서도 욕망은 숨을 죽인 채

그림이나 시로 가끔씩 고개를 빼꼼 내밀 뿐이었지만

적어도 가면은 벗겨져 있었다

그 일기는 주로 상처의 기록이고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연고이고

복수할 수 없는 복수였다

 

낡은 일기장 속의 나는 이제 없지만

이십 년의 두께 밑 어딘가에서

가끔씩 내 뒤통수를 서늘하게 한다

 

 

(980616)

(2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