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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영국여행이야기

영국 여행 이야기, 어쩌다 보니 문학 기행(14)콘래드 묘지 2

by 길철현 2022. 10. 19.

시립 묘지는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놀랍게도 콘래드 묘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영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콘래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일까? 그가 폴란드 출신으로 28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일까? 그가 이곳 캔터베리 근처로 이주한 것이 죽기 5년 전이라 이곳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우리의 문화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영문학사, 아니 더 나아가 세계문학사에서도 빛나는 별 중의 하나인 작가를 이렇게 홀대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수천 기는 되어보이는 무덤 중에서 어떻게 그의 무덤을 찾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난제가 놓여 있었다. 콘래드가 실제로는 카톨릭 교도가 아니었으나 폴란드 출신이라 형식적으로는 카톨릭 교도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가보았는데, 그 부근에는 알록달록 화려하게 장식된 아기들의 무덤들도 있었다. 하나하나 살펴보았으나 콘래드의 무덤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로 가보았더니 문이 굳게 잠겨져 있었고, 젊은 여자 한 명이 눈에 띄어 물어보려고 했으나 너무나도 슬픈 표정이라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죽은 남편을 찾아온 것인가?). 이 정도면 포기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시간도 많은 데다, 머나먼 이곳 영국까지 온 주된 목적 중의 하나를 이 정도 난관에 포기하고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인터넷에 나와 있는 사진과 대조하면서 경내를 다시 돌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 묘지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으나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는지 물으러 가거나 하지 않고, 계속 사진 속의 묘비를 찾아 이 구역에서 저 구역으로 묘지를 헤집었다. 그러다가 영원히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 않던 콘래드의 묘비가 묘지 한 쪽 구석 N 구역에서 내 눈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콘래드의 묘비는 그래도 다른 묘비들보다는 다소 크고 화강암으로 울퉁불퉁한 질감을 살린 것이라 특색이 있는 것이었다. 빛깔로 보아서는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묘비 아래에는 부인인 제시(Jessie) 콘래드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며, 비문은 그의 마지막 소설인 [방랑자](The Rover)의 제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Sleep after toyle, port after stormie seas,
Ease after warre, death after life does greatly please.

 

분투 다음 잠, 폭풍우 이는 바다 다음 항구,

전투 다음 휴식, 삶 다음 죽음 정말 기쁘도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다시 16세기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의 대표작 [선녀 여왕](The Faerie Queene)에 나오는 구절이다. 묘지에는 부부뿐만 아니라 두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도 있었다. 

 

 

 

 

 

 

 

 

무덤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드리고 논문을 제대로 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원도 했다. 아침에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가 참 좋았는데 어느새 날이 흐려지고 으슬으슬 추웠다. 머릿속엔 콘래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단어인 deracine(뿌리 뽑힌, 고향을 상실한 [사람])가 자꾸 맴돌았다. 

어느덧 2시도 넘었고 배도 출출해 벤치에 앉아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닭고기, 감자 튀김, 바나나로 한 끼를 때웠다. 그 때 무슨 계시처럼 내 옆으로 여우 한 마리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묘지 안내판을 들여다 보았더니 콘래드 묘소에 대한 안내가 조그맣게 있긴 했다. 조금만 더 꼼꼼하게 안내판을 살펴 보았다면 무작위로 묘지의 이 구역 저 구역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안내는 그보다는 좀 더 친절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