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재인폭포

[재인폭포 시편] 재인폭포에서 - 재인 아내의 말

by 길철현 2023. 9. 7.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불러 보지만 

이제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가버렸지요

아니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에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나요?

그래도 자꾸만 왜, 하던 그 목소리 들릴 듯하고

길쌈을 하는 내 손을 은근히 잡아줄 것만 같네요

서방님, 서방님은 정말 어디에 있는가요?

서방님과 저는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라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지요

양반님네들처럼 남녀유별이란 말도 몰랐고요

서방님은 갖바치의 아들

저는 백정의 딸

사람들은 천 것이라고 멸시했지만 

배곯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었어요

게다가 동무들과 어울려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피는 산으로

또 여름 들판 강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엔

웃음소리가 넘쳐 흐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서방님은 어릴 적부터 재주가 많았지요

소리면 소리 탈춤이면 탈춤 못하는 게 없었고

줄타기는 연천현에서는 그야말로 제일이었지요

머리도 비상하여 어깨너머로 언문을 배워

저에게도 가르쳐 주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버렸으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 아버지와 서방님의 아버님도 친한 사이였기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언약도 없었지만

서방님의 나이 스물

제 나이 열여덟에 자연스레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서방님은 인근 부자들 놀이에 불려 다니며

자신의 재주를 팔았고

그 재주 값으로 받은 삯으로

우리 두 식구 먹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죠

보릿고개에 산에서 칡뿌리를 캐 먹거나

터무니없는 고리로 양식을 빌려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의 형편은

그나마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서방님은 우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제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저 또한 타들어 가는 속으로

금슬 좋은 우리 부부를 시기하는 잡귀를 달래느라

새벽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 앞에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요

아쉬운 대로 그렇게 서방님과 저

한 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천하디 천한 우리에게도 이 삶은 견딜만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지체도 높고 학식도 높은

거기다 풍채도 좋은 신관사또는

부인에다 첩까지 두고서 

왜 저를 탐하는 것일까요?

저를 탐하다 못해 서방님까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나요?

배운 것 없는 천 것이라도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안타까운 사고라고 하지만

전 알아요,  누가 고의로 끊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걸요

법이 법을 어겼으니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나요?

세상이 진창처럼 더러우니

저도 적당히 더러워져

끼니나 챙기며 이 생을 건너야 하나요?

서방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부르면

금방에라도 왜, 하는 서방님의 목소리 들릴 듯한데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저에게도 이 삶은 더 이상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

 

(20140411)

(20230907)

 

* 재인폭포 안내문

 

재인폭포는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고 깊으며, 한탄강 상류에 인접한 관광지로서 연천이 자랑하는 명승지의 하나이다.

이 폭포는 이 고장의 줄타기에 뛰어났던 재인의 한과 그 부인의 절개에 관한 전설이 깃든 곳으로, 그 높이는 18.5m나 되며, 밑에는 넓고 깊은 연못을 이루어 피서지로서 특히 이름 높다.

폭포의 주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가을 단풍 또한 매우 아름답다.

옛날 고을 원님이 절색의 미모를 가진 재인의 아내를 탐한 나머지,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 위에서 줄을 타는 재주를 보이게 한 뒤 줄을 끊어 죽였다. 그리고 재인의 아내에게 수청을 들게 했으나, 이때 그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뜯은 뒤 혀를 깨물고 마침내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절개 굳은 코문이(재인의 부인)가 살았다 하여 ‘코문리’로 부르게 되었고, 후일 어음의 변화로 ‘고문리(古文里)’라 다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