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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 범주론/명제론

by 길철현 2016. 9. 20.

*범주론*명제론, 김진성 역주, EJB (080920)

 

<범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부는 실제적으로 김진성이 번역하고 주를 단 이 책을 들면서부터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대양 앞에서 길을 잃고 마구 헤매고 있는 나에게 나침반이 하나 떨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 [논리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적 논박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에 느꼈던 어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기분이다. (책들이 읽기가 어려운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책 자체가 갖는 어려움일 것이고, 두 번째는 나의 이해의 수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어느 쪽이든 간에 헤치고나가야 한다.)

김진성의 해설에 따르자면 범주(kategoria)는 원래 고발’, ‘고소등의 뜻을 가진 낱말인데, [범주론]은 사물의 개념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맞는지를 따져보는 그런 글로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념들 중 가장 일반적이고 으뜸인 것들을 다루고 있다(18). [범주론]에서 우선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플라톤의 입장의 확연한 차이이다. 플라톤이 현상보다는 이데아를 중요시한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을 으뜸 실체로, 이데아를 버금 실체로 보아, 현상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한 사물의 있음(존재)을 그 사물이 이데아를 나누어 가진다(분유한다, metechein)는 식으로 설명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사물의 있음이 개체 안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좋다고 우리가 말할 때, 플라톤은 이 사물의 좋음을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다시 말해, 그 사물이 좋음의 이데아를 나누어 갖기 때문에 좋다고 설명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입장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다는 단지 갖가지 좋은 것()들에 다양한 범주의 형태로 구분된 채 들어 있다고 본다. (20)

 

이 범주론이 다루고 있는 항목은 한 이름 다른 뜻인 것들, 한 이름 한 뜻인 것들, 갈려 나온 것들; 바탕이 되는 것; 서술 관계; 범주들의 열거와 명제; 실체; , 관계; , 능동과 수동, 나머지 범주들; 대립의 네 가지 종류; 반대자; 먼저; 같이; 변화; 가짐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김진성의 주와 함께 읽을 경우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가 나중에 칸트에 가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 되는지가 궁금하다. (논리학을 대학교에서 한 학기 배우긴 했는데,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갖추어야 할 듯하다.)

 

<명제론>

[명제론]의 그리스어 제목 ‘Peri Hermeneias’나 라틴어 제목 ‘De Interpretatione’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에 대한 표현물에 관하여, 즉 말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풀 수 있다(109). 그런데, [명제론]에서 문제가 되는 문장은 서술문, 주장문, 진술문이다. 이 글은 앞부분은 크게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데, 뒷부분은 논리학적 지식이 없기는 읽기에 무리가 따른다. 김진성은 이 글이 적은 분량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저술(113)’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단일 명제와 복합 명제; 긍정과 부정, 그리고 모순; 보편자와 개별자, 반대 명제와 모순 명제; 앞일에 관한 모순된 서술; 양상 명제의 종류와 모순 대립등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갖는 의미를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논리학>을 확립시킨 인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갖는 중요성이나 그 천재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