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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 [취임 연설](John Stuart Mill - "Inaugural Address")(1867)

by 길철현 2016. 10. 18.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취임 연설]("Inaugural Address")(1867)

 

 

1. 내용 요약

 

(353)교육은 좀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다룰 화제(話題)들 중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 가장 많은 부분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명석한 분들이 무수히 많은 견해를 피력한 분야가 따로 없겠으나, 그럼에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첫 탐구자들이 느꼈던 것처럼, 아직도 새롭기 짝이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육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 그런 논제이다. 한 인간을 형성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모두 교육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에 한정해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하여금 이미 성취된 향상의 수준을 최소한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더욱 끌어올리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 세대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전해준다는 의미에서의 교양이라 할 수 있으며, 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모두 당면하고 있는 그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대학(University)의 바람직한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는 상당한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대학이 직업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는 전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전문 직업 교육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빚지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 그 사회의 문명이나 가치 체계가 핵심적으로 좌우될 부분도 아니다. 그러한 교육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소수를 대상으로 전문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인간은 그가 변호사, 의사, 상인, 제조업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므로, 오히려 대학 교육 이후에 이루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문 직업인이 대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따라서 직업에 연관된 전문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전문 지식의 사용 방향을 이끌어 주고, 일반교양의 빛이 특수한 추구에 필요한 전문 기술을 조명해 줄 그런 것이다.

대학 교육의 위로의 한계가 개개인의 인생의 목적지에 합당한 부분으로 갈라지는 영역, 다시 말해 전문 직업 교육 이전으로 국한된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아래로의 한계는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몇몇 사람들은 대학에서는 이전에 배운 개별적인 부분을 다른 부분, 그리고 전체와의 연관성 가운데서 보는 것, 즉 자신의 지식을 조직화하는 것(to methodize)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학생이 이미 개별적으로 배운 것을 포괄적이고 상호 연관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 일반 교육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학문의 방법론(the Methods of the sciences)에 대한 철학적 탐구,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이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으로 나아가는 양식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영국의 교구 학교들이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드물기 때문에, 대학교는 기본적인 교육도 어느 정도는 보충해주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이 이러한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는 반면 잉글랜드의 대학들은 이러한 역할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대학들이 오랫동안 고전 언어와 수학이라는 두 과목만 강조한 것과는 달리,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은 거의 초기부터, 깊고 넓게 인문 교육의 전분야를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으며,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자연 과학과 도덕 과학(윤리학, Moral Science)도 포함시켰다. 스코틀랜드 대학의 교육 과정을 논하는 것은 그러므로 일반교양의 모든 필수적인 부분을 검토해 보는 것이 될 것이다.

(358)이에 앞서 현재 고등 교육과 관련해 진행되고 있는 커다란 논쟁, 교육 개혁가들과 보수주의자를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는 차이점, 다시 말해 일반 교육이 고전(혹은 문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해야 할 듯하다. 과학 교육이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문학 교육이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둘 다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하기보다는, 인간의 습득 능력을 믿는다면, 둘 다를 배워야 할 것이다. 또 시간의 부족 문제를 운운하기보다는 현재 교육 방식의 문제점을 개선하는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교육 방식의 개선은 정부나 교회의 개혁보다도 더 힘겨운데 왜냐하면 교육의 개선에는 우선 교사를 가르치는 문제가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희랍어나 라틴어를 배울 때, 복잡한 문법 규칙을 가지고 씨름을 하기보다는, 다른 현대 언어를 배울 때처럼 먼저 어휘를 연습과 반복을 통해 익힌다면, 보통 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기 훨씬 전에 라틴어나 희랍어 저자들의 산문 또는 운문을 유창하게 그리고 지적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이 두 언어를 적절한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다른 과목을 배울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학교 정규 과정에서 이 두 과목을 제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61)다음으로 학문의 분화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해 보도록 하자. 혹자는 학문의 제 분야가 익혀야 할 세부적인 사항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아주 좁은 부분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다른 모든 분야를 제외하고 한 분야만 외곬수적으로 추구할 경우에는 우리의 정신을 편협하고 뒤틀리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무지의 상태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하나 또는 소수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일반 지식과 결합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일반 지식이라는 말을 몇 가지 막연한 인상이나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한 분야에 대해 일반 지식을 갖는 다는 것은 그 분야의 대표적인 사실들(truths) 안다는 것이며,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것을 통해 큰 특징이라는 측면에서 그 분야의 진정한 개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 직업 지식이 아닌 모든 유용한 일반 지식의 제 분야가 학교나 대학의 교과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현대 언어의 경우에는 학교 밖에서, 이를테면 현지에서 몇 개월 생활을 함으로써 훨씬 잘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또 역사나 지리는 단순히 책을 읽으면 되기 때문에 대학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주요한 특징이라는 차원에서 과거 인류의 삶의 원인과 그것의 해명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역사 철학은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규 교과 과정에 포함시켜야 할 유일한 언어들, 그리고 유일한 문학은 희랍과 로마의 언어이자 문학이다. 이들은 그들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고수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교육에 있어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우수한 언어와 문학을 잘 안다는 것이 지닌 커다란 가치와, 또 이 특정 언어와 문학이 지닌 특별한 가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정당하다고 본다. 여러 언어를 익힘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순전히 지적인 이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를 사물로 착각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언어를 사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이러한 나쁜 습성은 하나의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정확하게 번역을 하고, 우리가 어릴 적부터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친숙하게 된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로 표현된 의미를 추적하는 가운데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추상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지만, 그들의 가장 뛰어난 지성이자, 철학과 우리 모두의 지적 교양의 기초를 놓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언어밖에 몰랐기 때문에, 언어의 우연성을 자연의 실제 관계로 착각하고, 희랍어로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도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 언어를 모르고서는 그들의 사고, 감정, 성격의 유형 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지식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은 반 정도만 확장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향상이나 개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견해를 사실과 좀 더 가까이 일치시키는데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 견해를 형성시킨 안경으로 사실을 본다면 어떠한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이 경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다른 사람들의, 즉 다른 민족들의, 그것도 우리와 아주 다른 국민들의 안경을 착용하고 사실을 보는 것일 것이다.

다른 교양 있고 문명화된 민족들의 언어와 문학을 아는 것이 이렇게 유용하다면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고전 언어와 문학이다. 현대 문명화된 유럽의 민족들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 반면에 또 먼 동방의 민족들의 경우에는 우리와 전적으로 달라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 평생이 걸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 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고 말하는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으로부터 직접 그 의도를 듣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위대한 저자들을 직접 연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고대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현명한 사고와 관찰도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 지금껏 생산해 낸 작품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교한 다수의 문학 작품들과 친숙성을 높이게 된다. 단순히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현대 유럽 언어들은 희랍어나 라틴어만큼 지성에 가치 있는 훈련이 된다고 할 수 없다. 문법이라는 것은 논리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고, 사고 작용의 분석도 거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희랍어와 라틴어의 규칙적이고 복잡한 구조는 모든 현대 언어를 훌쩍 뛰어넘는 우수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두 언어는 일반적으로 연구할 값어치가 있는 문학 또한 보유하고 있다.

(369)희랍과 로마의 문학 자체의 우수성은, 교육이라는 목적을 놓고 볼 때, 훨씬 더 두드러지고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언어의 문학 작품들은 삶의 지혜라고 불릴 만한 것의 창고이며, 당시 삶의 단순성과 양식을 바탕으로 한 관찰의 도움을 받아 당대의 예리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정신이 그들의 글에다 옮겨 놓은 인간 본성과 행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투키디데스(Thucydides),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호라티우스(Horace), 타키투스(Tacitus), 쿠인틸리아누스(Quintilian) 등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작품들이 그 이론을 예증하고, 플라톤의 작품들이 그것의 실제 적용을 보여주는 변증법만큼 가치 있는 인간의 발명은, 추구하는 지성을 자극하고 훈련한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진실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가장 최고의 용도에 적용하고자 하는 고귀한 마음가짐이 이러한 작가들에게 넘쳐흐르기 때문에, 우리의 최고의 문학 교육으로 고전 언어들을 익히는 가운데, 우리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교양을 향한 바람직한 기초를 쌓아나가는 셈이 된다. 시의 경우, 그 내용(substance)의 측면에 있어서는 현대의 시가 본질로 더욱 깊이 파고들기 때문에 고대 시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정신의 감정은 고대의 그것보다 보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고대인들은 그들이 표현해야 하는 것을 현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도 그에 맞먹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시도하지 못한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작가들의 스타일의 비밀은 그것이 훌륭한 판단력(good sense)의 완벽화라는 점이다. 첫째로 그들은 결코 의미가 없는 말이나 의미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투키디데스는 한 단락으로 그것을 읽은 독자가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또렷하게 전투의 장면을 제시한다. 고대 작가들의 글이 간결한 까닭은 그들이 글을 쓸 때 혼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작가들은 시간과 인내심의 부족, 또 예전과는 달리 분주하고 받아들인 준비가 덜 된 대중들을 향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야 한다는 사실들 때문에 그들의 시간을 걸작을 생산해 내는 데 헌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걸작들이 없었거나, 또 현대의 작가들이 그 위대한 작품들을 보지 못했더라면 사정은 훨씬 더 나빴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시한 이 모든 이유들을 생각해 볼 때, 이 두 언어와 그 문학은, 인문 교육의 일부로써 그들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이유들은 동시에 이 고전 언어와 문학에 대한 적절한 한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가 라틴 어나 그리스 어 작시법을 배우느라고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언어를 올바로 익히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하다면 산문을 쓰는 것 정도로 충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화를 연습하는 정도에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작시법을 배우는 것을 금지하거나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작시법 수업은 학교 교육에서 의무 과목이 아니라 선택 과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375)고전 교육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과학 교육의 용도, 아니 그보다는 그것의 필요 불가결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과학 교육이 지닌 가치의 가장 명백한 부분은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다. 이 세상은 그 현상들이 고정된 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그런 곳이고,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과학적 진리의 기초적인 지식이 일반 대중들 사이에 전파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엇이 확실한 것이고, 또 어떤 것이 확실치 않은지, 아니면 누가 권위 있게 말할 자격이 있는가, 또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결코 알 수 없게 되어, 그들은 과학적 언명을 전혀 신뢰하지 않거나 사기꾼들의 말에 쉽사리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특정한 전문 지식에서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과학적 제 현상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는 그를 교육 받은 인간이 아니라 무식자로 여길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점은 과학의 유용성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부분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적절히 수행해야 할 작업을 위해 지성을 단련하는 훈련의 과정으로 과학 교육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일생에 걸쳐 인간의 지성을 끊임없이 사로잡는 것은 진리의 규명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에 대해 실제로 무엇이 옳은가를 알려고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옛 결심을 바꾸려 할 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결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의 여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무리 달라 보이고, 또 그 중심 문제가 실제로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진리의 검증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두 가지 길밖에 없으며 그것은 관찰과 추론이다. 관찰은 물론 실험을 포함한다. 그리고,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인 추론과 관찰은 자연 과학(physical sciences)에서 가장 완벽하게 실행되어 왔다. 고전 문학이 표현 방식의 가장 완벽한 유형을 제시한다면, 자연 과학은 사고 방법의 가장 완벽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지성을 구별 짓는 주요하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것은 증거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우리의 직접적인 인지는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귀중한 지식의 경우, 진리의 바깥에 놓인 증거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 교육의 지적인 부분은 거의 보편적인 취약성, 즉 증거를 추량하는 능력의 취약성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러한 취약성을 타계할 세 가지 수단은 첫 째 모범(models)이고, 둘 째 규칙이고, 셋 째 적절한 훈련인데, 이 모두는 과학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먼저 수학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추론이라는 수단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주로 수학 때문이다. 현대, 특히 영국의 정신은 조사의 방법으로서 연역적 추론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기본적인 진리를 추론해 봄으로써 물질 대상의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몇 가지 기본적인 진리 자체도 추론을 통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감각에 명백하게 와 닿는 그런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인간 관찰이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부적 사항의 덩어리로부터 수학적 과정에 의해 추론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뉴턴이 이러한 방식으로 태양계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는 모든 후손들을 위해, 과학의 진정한 아이디어를 창조한 것이었다.

수학이 우리에게 추론에 의해 진리를 규명하는 전형적인 예를 제시한다고 한다면, 화학이나 순수한 실험 과학과 같이 수학이 아닌 자연 과학은 관찰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추론가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추리를 이끌어낸다고 공언하는데, 자연 과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 중에, 경험을 해석한다는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험 과학은 단순한 경험이나 체험이 제안하는 결론을 건전한 회의 정신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382)논리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원칙과 법칙을 규정하며, 수학과 물리학의 지적 보완물이다. 논리학은 연역(ratiocinative) 논리와 귀납 논리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전자는 전제로부터 추론하는 경우 우리가 혼돈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후자는 관찰로부터 결론을 내리는 것을 돕는다. 연역법은 가장 빨리 이해되고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연역 논리는 현재도 귀납 논리보다 좀 더 빠른 단계에서 습득하는 것이 낫다. 물론 논리학의 유용성이 주로 부정하는 데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것의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똑바로 가는 것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잘못 가는 것을 막아주는 데 있다. 그렇지만, 지성의 작용 방향이 제대로 가는 것보다는 잘못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논리학이 갖는 중요성을 경시할 수 없다. 논리의 이론이 얼마나 단순한가, 또 그것의 원칙이나 규칙을 완전히 습득하고, 더 나아가 그 원칙이나 규칙을 적용하여 상당한 정도의 전문성을 발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 등을 고려해 볼 때, 지적 추구에서 성공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논리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따로 변명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386)지금까지 나는 좀 더 완벽한 과학의 교육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이점들을 매우 불완전하고 요약적인 관점에서 제시하였는데, 좀 더 뒤떨어진 상태에 있는 다른 과학들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이 과학들은 정신의 성숙한 시기에는 그것의 전 힘을 요구하겠지만, 이후로 더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과학들을 조금이나마 배워두는 것은 대단히 유효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유기 생명체와 동물의 법칙에 대한 과학이자, 특히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과학인 생리학이다. 이 어려운 학문의 심오한 지식이 젊은 시절에, 또는 일반 교육의 부분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대표적인 사실들을 습득하는 일은 특정 전문 직업의 배타적인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될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위생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의 필요성은 그것의 주 대상이 이미 인간이라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인간은 그 특성상 상황과 독립해서 존재하지도 않고,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무한할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사고 등에 의해 무한히 수정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다. 생리학은 또한 습관의 영향력, 즉 어떤 일이 단순히 이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우리가 인정하는 첫 번째 학문이기도 하다. 생리학으로부터 우리는 발전 또는 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생리학의 상층 극단은 심리학 혹은 심리 철학과 맞닿아 있다. 물질과 정신 사이의 한계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경과 뇌는 정신 작용과 아주 긴밀한 연관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심리학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생리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코틀랜드 대학에서 심리학이 지니는 가치를 상술할 필요는 거의 없다. 로크와 버클리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학문의 진보에 공헌한 모든 것은 스코틀랜드 저자나 스코틀랜드 교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사실 단순히 말하자면 인간 본성에 대한 법칙의 학문이다. 인간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중에 그 자신의 본성과 그와 동류의 인간의 그것 외에 달리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학문을 일반 교육의 하나로 배울 때 그 적합성에 대해 언급할 것이 있다. 실험적 증거를 근거로 해서 내놓은 우리의 사고나 감정에 대한 관측된 법칙, 즉 연합의 법칙처럼 인정된 진리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제의 뿌리까지 파헤치려 개인의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하는 무모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심리학은 우리의 지적 기능을 예리하게 벼리는데 최상의 수단이며, 학생들에게 현재도 유익한 책은 홉스나 로크, 리드(Reid), 스튜어트, , 하틀리, 브라운, 해밀턴, 페리어 등의 저작이다.

(390)완벽한 과학 교육을 위한 이 짧은 개요에서 나는 윤리학과 정치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 지식의 현 단계에서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더욱이 정치학은 교과서나 교사의 교수로 배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분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각자는 스스로 탐구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과학적 정치학은 아무 곳에나 적용될 수 있는 모범답안 같은 결론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하여금, 주어진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힘쓰도록 하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경우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학 교수가 가르쳐야 할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의미이며, 또 학생들이 역사로부터, 한 시대 혹은 한 장소와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인간사이나 사회의 제도 사이의 주된 차이점을 수집하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교육이 학생들을 정치학이든 역사학이든 어떤 완전한 철학으로 무장시킬 수는 없겠지만, 시민의 의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긍정적인 것이 있다. 이러한 것 중에서 주요한 것이 인간 존재의 집합체를 위한 부와 물질적 번영의 원천과 조건 등을 다루는 정치 경제학이 있다. 정치 경제학에 대한 위대한 작가들을 연구하고, 거기에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굳건하게 보유하라는 것이 나의 충고이다. 정치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연구 대상은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법률학이다. 벤담이나 오스틴, 메인의 저작들을 집중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여기다 나는 국제법을 덧붙이고 싶다. 국제법은 법이라기 보다는 윤리학의 일부이다. 이 규정들은 인류의 도덕 감정 혹은 전체적인 이익감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전쟁 상태에서는 범죄나 고통을 경감시키고, 평화 시에는 정부나 국가가 서로에게 부당하거나 부정직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국가들이 여러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현재, 확립된 국제적 도덕 규정을 아는 것은 모든 국가의 의무일 뿐 아니라, 그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395)이 보다 고차원적인 학문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단지 조금 시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 정도라도 이러한 분야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첫 번째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나 지식의 습득은 교육이 절반 정도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것을 기꺼이 실천에 옮기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천의 문제는 도덕 및 종교적 교육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데, 이러한 교육에 있어서 대학은 피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도덕 및 종교적 교육은 감정과 매일의 습관을 훈련시키는데 놓여 있고, 이런 것들은 공공 교육의 범위를 넘어서고 그것의 통제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받는 도덕 종교적 교육을 주는 것은 가정이고 가족이다. 대학이 행사할 수 있는 도덕이나 종교적 영향력은 직접적인 가르침보다는 그곳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대학의 존재 목적은 인류의 사고의 축적된 보고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한 쪽을 편들어서 어느 누구를 옹호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굳건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가장 이로운 행위의 규율을 설립하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학생들 모두를 지도하는 것이다.

대학과 공립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쳐야 하는가 마는가 하는 문제는 지난 세대와 마찬가지로 현 세대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견해가 극단적으로 불일치와 반목을 보이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깊이 파고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대학에 가장 적절한 종교 교육은 교회사 연구 정도라고 생각된다. 동등한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또 동등한 정도의 수고를 한 사람 사이에, 이 많은 의견들이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갈린다는 것 자체가 양심적인 교사라면 자신의 견해를 젊은 학생들에게 권위적으로 부과할 권리가 없다는 것의 반증이 된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종종 가장 억압적인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가운데 나오기도 했기 때문에, 대학이 자유로운 사상과 의문을 억압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실패라고 보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대학은 자유로운 성찰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 시대의 흐름은 스코틀랜드에 있어서건 잉글랜드에 있어서건 의식이나 형식을 완화하고, 신앙의 조항들을 덜 엄격하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교리상의 정설의 한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모두가 스스로 그 경계선을 그리도록 몰아가기 때문에 양심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문제에 뭐라고 말하는 것이 무례함이 아니라면, 양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은 모두 교회에 머무르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는 밖으로부터 보다는 안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402)지금까지 나는 학교와 대학 체계가 증진시켜야 할 두 종류의 교육, 즉 지적 교육과 도덕 교육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해왔다. 이 둘 외에도 인간의 교양(culture)을 이루는 제 삼의 분야가 있으니, 이 둘에 종속되고 이 둘에 봉사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이 둘 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으며, 인간 존재의 완전성을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적 부문이 있다. 이것은 시와 예술을 통해 오는 교양이고, 감정의 교육이며, 미의 배양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 미의식, 혹은 예술은 지금껏 경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예술이 철학이나 학문, 과학과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완전히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너무나 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엄청난 정서적 차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스튜어트 왕조 이래로 영국의 성격을 형성해 온 두 가지 영향력, 상업적인 돈의 추구 성향과 종교적 청교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적 성향은 직접적으로 목적에 이바지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간의 손실로 간주하게 했고, 청교주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경심을 제외하고는 인간 본성의 모든 감정을 유혹이라고 보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유럽 국가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미덕과 선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감정의 문제인 반면에, 영국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적으로 의무의 문제이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를 양심적으로 살게 했는데, 이것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악을 행하지 않는 억제의 기능에 국한되는 면이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실제적인 잘못이나 실제적인 야비함뿐만이 아니라, 고귀한 목표나 추구가 없는 것도 단순히 비난받을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품성을 떨어뜨리는 일임을 깨닫고, 이 거대한 우주, 우리 동시대 인간의 집합체 앞에서, 그리고 과거의 역사와 무한한 미래 앞에서 단순한 자아의 비참할 정도로 왜소함을 인식하고 인생이 만약 우리 자신과 가족의 안락함을 추구하고, 또 사회적으로 한 두 계단 더 끌어올리는데 바쳐진다면 얼마나 초라하고 무의미한가를 느끼도록 이끄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좀 더 고귀한 대상과의 교감을 느낄 때에야 우리 자신을 존중하게 된다. 정신의 이러한 고양된 상태에 있어서 영감의 커다란 원천은 시이고, 또 시적 * 예술적 특성을 지닌 모든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 감정은 영혼을 고양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단테나 워즈워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그레이, 셸리의 작품들은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어 우리의 정신을 정화한다. 물론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양식은 비슷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자연의 풍광이 주는 힘 또한 인간 본성에 예술의 그것에 상응하는 울림을 준다.

미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그가 덕이 있는 성격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바랄 것이다. 미가 선보다 더 위대하다는 괴테의 말은 오해되거나 왜곡되기 쉽지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미는 선을 포함하고, 또 거기에 뭔가를 더하기 때문이다. 미는 완벽해진 선이고, 그것을 더할 나위 없고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모든 부수적인 완벽함과 어울리는 선이다. 그런데, 인간의 제작품 중에서 순수한 예술 작품만큼 완벽에 근접하는 것은 없다.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뛰어남의 정도가 즉각적으로 목적으로 삼는 것에 부합하는 정도이면 만족한다. 그러나 예술의 경우는 완벽성 자체가 목적이다. 예술은, 단순히 경험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갈고 닦는다면, 그것이 처음에 개념화 했던 것, 즉 영구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미를 유지한다.

(408)대학이 일반적으로 제공해야 할 교육의 전 범위를 여러분과 함께 여행한 바, 여러분이 그 선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라고 훈계하는 것은 거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사업이나 전문 직업 같은 세세한 일보다는 보다 더 크고 훨씬 더 고귀한 문제들에 일정 정도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지금 현재 익힌 것들은 나중에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러분의 사고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통해 계속 진보해 나갈 것이고, 또 매일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회를 활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우리가 성취하는 것은 우리가 보유한 시간의 양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활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다가오는 세대에 여러분 국가의 희망이며 자원이다. 그 세대가 해야 할 모든 위대한 것들은 여러분과 같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직접적인 보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나을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인생의 더 심오한 즐거움을 보답으로 받게 될 것이며, 그것은 죽는 날까지 지속 될 것이다.

 

2. 단상

 

이 글은 밀이 대학 교육의 범위와 그 목표를 밝힌 것인데, 좀 더 광의적으로 볼 때는 교육 일반이 지향해야 할 바로 확대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밀은 대학 교육을 크게 지식, 윤리, 미의식 세 부분으로 나눈 다음 각 분야의 중요성과 의의, 그리고 대학 교육이 그 각 분야를 수행할 때의 포함 범위 등을 설득력 있고 논리적인 어조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특별히 독창적인 생각을 내놓는 것이 아닌데도,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주장에 동조하도록 이끄는 힘은 그의 글이 폭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글에서 무엇보다 균형 감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은 종교 교육이라는 난제에 대해서 섣불리 의견을 표명하는 대신에 우회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 글에서 밀이 인간 이성이나 인간 자체에 대해서 견지하고 있는 긍정적 태도는 역사적으로 진보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의 세계관이나, 특히 당시의 영국이 세계 제1의 강국으로 번영의 일로에 있었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는 맞물린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말이 밀이 인간에 대해 소박한 낙관론을 지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음으로써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의 지반 자체가 예전과 같은 신뢰성을 누릴 수 없게 되고, 과학적 지식 또한 불확실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그의 주장의 확실성이나 유효성을 다시 한 번 원점에서 되짚어볼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 교육이라는 것이 좋든 싫든 한 측면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한 경고나, 교육의 폭과 범위에 있어서의 자유로움이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