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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독서일기95-00

성민엽 외,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99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성민엽 외,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99>>


1. 성민엽, 21세기 작가란 무엇인가(2000, 1016)

*김병익은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전망을 위한 성찰](문학과지성사 1987))에서 근대문학 내에서의 작가 상()의 변화를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대의 시인들은 이성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탁마의 도제들>이었고,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고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진실함을 포착>하려는 <세계 밖의 존재>였으며, 19세기의 작가는 <사회와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진술을 수행>하는 <세계내적 존재>였고, 20세기의 모더니즘 작가는 <자신의 소외와 파탄을 트러냄으로써 현대 사회와 인간의 소외와 파탄을 입증>하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작업을 통해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이다. . . . 이러한 요약을 통해 김병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문학 내에서의 작가 상의 변화는 사회 역사적 현실의 변화와 동궤의 것인바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되는 원리가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상투적으로 보기를 그치고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도모한다는 행위><한없는 외로움과 고통, 절망과 도전, 모험과 패배의 무거운 짐을 지겠다는 실존적 결단>이 그것이다. (17--8)

*김병익의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더욱 심각하고 보기에 따라 근본적이라 할 수 있을 낯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포럼의 취지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통일, 민주, 평등 등의 기왕의 문제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위에 <정보화 사회, 환경, 멀티미디어, 대중, () 등 새로운 문제들이 문학의 장() 안으로 가득 밀려들어온 것>이다. 이 새로운 문제들은 종래의 작가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과 위협으로 작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물음들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라는 개념의 유효성 안에서의 정체성 재정립을 통해 이 위기의 극복이 가능할까. 아니면 이미, 혹은 바야흐로 작가라는 개념의 유효성 자체가 소멸되어 가는 중인가. 한 개인으로서 작품 밖에 있고 작품에 선행하는 존재이며,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에게로 귀속되고, 완전무결하고 자족적인 그러한 작가는 더 이상 불가능한가. 근본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문학이라는 콘텍스트가 붕괴되고 그에 따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작가 역시 해체되고 있는 것인가. (18--9)

*문학이 시장에 대해 긴장되게 유지해 온 상대적 자율성이 이제 문화산업의 자본에 의해 시장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 여기서는 상품화되지 않는 것이 없다. (21)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기술 발전과 관련한 매체의 문제이다. 사실상 문화산업의 대두 또한 이 매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원래 근대문학의 생성은 기술 발전과 긴밀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대량 인쇄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활자 매체의 주도성 없이는 근대문학을 상상할 수 없다. 근대의 지배적 매체인 활자 매체와 결합된 문학은 그 결합으로 인해 근대의 문화적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활자 매체가 종래의 지배적 위치를 급격히 상실하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 때문이다. 새로운 매체들은 활자 매체를 중심에서 주변으로 끌어내리고 있고 이에 따라 문학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닌, 황지우 시인의 아이러니한 말투를 빌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비()활자 매체의 출현은 이미 오래전에 영화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전파와 결합되면서 텔레비전이 나왔으며 VTR의 보급과 더불어 비디오가 나왔다. 더욱 중요한 비()활자 매체는 컴퓨터와 정보통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고도의 능력을 갖춘 PC, 즉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고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 통신이 급속히 고도화되고 그리하여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매체가 생겨났다(이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매체들의 대중적 보급이 활자 매체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23)

*그러나 문자와 동화상과 음향이 한데로 겹쳐지는 하이퍼텍스트를 계속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4)

*오늘날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세계와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으며 단지 제한된 숫자의 조합만이 가능하다. 독창거인 것들은 이미 모두 시도되어졌다.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 사회>, 김욱동 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문학과지성사 1990), 248)

*이인성, 성석제, 황지우에 대한 개략적 분석 (33--41)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의미의 기원이며 다른 작가에 대해서는 독창성이라는 점에서 구별되고 사회에 대해서는 자율적이라고 믿어왔던,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작가 의식이 실제로는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선고받았다. 이제 작가는 글쓰기의 조건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글을 써야 한다. 게다가 그의 글쓰는 끊임없이 제도 속으로 흡수되어 가므로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글쓰기를 갱신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점은 단순히 문학적 글쓰기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만큼 그만큼 더 진정한 문학에 접근해 갈 가능성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어려운 것은 기술 발전 빛 문화산업과 관련하여 문학이라는 것의 정체성과 작가라는 것의 정체성이 동요되고 있고, 심지어는 문학도 작가도 그 존재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의 문제이고 역사적 필연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과 작가의 정체성을 동요시키고 문학과 작가의 존재를 박탈해 버리려 하는 것들이 수상쩍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이상주의라거나 윤리학이라거나 심지어 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그런 비난은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겠다. 여기서 작가는 소명의식의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명의식을 방기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라고 과감하게 말하고 싶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문학이라는 것은 그 내용이 채워져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텅 빈 공간이다. 문학 아닌 다른 것들과 비정형으로 교섭하는 그 공간 안에서 문학은 언제나 새롭게 탄생하여 그 공간을 채운다. 그 항상적인 탄생이 포기되거나 불가능해지는 것과 그 공간 자체가 폐기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문학이 처한 현실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암중모색해 보는 흥미로운 글이다. 그의 글을 이해하기에는 내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 의식>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2. 우찬제, 21세기 저자와 열린 텍스트

*푸코에 따르면 글은 저자가 완결된 것으로 명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과정적 실천태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글쓰기가 표현의 차원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글쓰기의 내면성이란 한계에 제약받지 않으며, 의미를 띠는 내용보다 기표 자체의 본질에 따라 배열되는 기호들의 상호작용이 중시된다. 글쓰기는 줄곧 제 나름의 규칙을 뛰어넘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어떤 놀이처럼 전개된다. 이제 글쓰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를 저자가 표방하거나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언어체계 속의 어떤 주체를 고정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글을 쓰는 주체가 한결같이 사라지는 그런 공간을 창조해 낸다고 푸코는 지적한다. 글쓰는 주체의 개인적 특질들은 소멸되어 간다. 글쓰는 주체는 자신과 자신이 쓰는 글 사이에 설정하는 모든 장치를 활용해서, 자신의 특별한 개성을 보여주는 기호를 은폐한다. 결과적으로 글쓰기에서 저자는 스스로 저자의 부재 상황을 생산한다. (49)

*주체가 탈중심화된다는 것이 당연히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과 등가적인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50)

(재니트 월프, <저자의 죽음>, 박인기 편역, [작가란 무엇인가](지식산업사 1996), 251

 

--저자 중심의 텍스트에서 독자가 텍스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혹은 사회의 온갖 복잡다단한 현실이 텍스트로 스며드는 그런 열림의 상태가 21세기 문학에서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라는 것이 중심 논제이다. 이러한 생각은 21세기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고, 모더니즘 이후 지속되어온 것의 심화 발전이라고 봐야 하리라.

 

3. 이인성,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

*문학은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문화적 중심에서 그 중심의 권위 즉 권력을 누려왔다. 그러면서, 문자중심주의 이데올로기 위에서 형성된 그 권력을 놓기가 아까워 이상한 고집을 부려왔다. 가령 벌써 백 살이나 먹은 영화를 진정한 예술도 올바른 문화도 아니라는 식으로 애써 치부해 버리면서 그랬다. 하지만 이 기득권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쉽게 말해 민심을 떠난 것인지는 2000년이 오지 않은 지금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현실이다. 보수적이게 마련인 교육 덕분에 문학은 여전히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일상의 감각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 것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만화로, 텔레비전으로, 비디오로, 영화로 몰려가고 있었다. (75)

*. . .쌍방향적 멀티미디어가 특히 강조되는 것은 그 동안 그런 소통 매체가 결핍되어 있었다는 데 대한 반대 급부적 부각을 의미했던 것이지, 그것만이 유일한 매체로 남는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았을까? 이 역시 일리가 있어 보이니 섬뜩했던 가슴은 다소 가라앉는다. 아무튼, 모든 정신적 * 물질적 조건과 체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문학으로 살아남아 저 자신만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78)

*언어는 참으로 희한하다. 언어는 감각적 실체가 아닌 기호에 불과한데도, 언어 없이는 어떤 현실도 구성되지 않으며 진전되거나 변화되지도 않는다. 그 무엇에 대해 사유하거나 상상한 것을 실체화할 수도 없다. 기호인 언어는 현실에 대해 끝까지 간접화된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으나, 현실의 한복판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87)

 

--이인성의 논지는 문학이 문화의 중심에서 한 걸음 내려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문학은 문학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4. 황지우, 이제 문학은 은둔하자 (20001021)

*서울과 도쿄의. . .상동 관계는 물론 지배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40년대 일본이 제국주의적 강제력으로 기획했었던 <내선일치>가 오늘의 두 도시의 피부와 피부 깊숙이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한 것은 나에게 꽤 충격적이었다. 도쿄를 향해 놓여져 있는 서울이라는 거울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시뮬레이션이 일제의 식민주의 모델과 그것을 정신역학적으로 계승한 60년대의 군사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에 내포되어 있는 강제적인 힘, 파시스트적 열정 못지않게 우리의 민간 부문에서의 <일본으로부터 배우자>는 자발적인 동경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98)

 

--황지우가 이 글에서 말하는 논지는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우리 문학의 전통성의 단절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글의 종지부를 놓고 볼 때는 문학이 문학 본연으로서의 위치를 지킴으로써 <문화 자본>의 위압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5. 성석제, 20세기의 겨울에서 21세기의 봄 사이(1021)

*내가 좋아하는 직업적인 공상인들, 그중에서도 양자역학에 관계된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장난꾸러기이고 여기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와 닐스 보어(1885--1962)가 포함된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 보어의 상보성 원리(相補性原理, complementarity principle)란 미크로 세계의 입자, 예컨대 전자는 때로는 입자 때로는 파동으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가설이다. 전자가 입자성을 나타내는가 파동성을 나타내는가는 전자가 무엇과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의해, 즉 전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전자 자체가 어떤가 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전자를 관측하는 것은 전자를 어떤 관측장치와 상호작용시키는 것, 곧 전자를 하나의 상황 속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미크로 세계의 소립자, 예컨대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마크로 세계의 관측자가 미크로 세계에 가한 조작은 전자의 위치 또는 운동량을 크게 변화시킨다(냄비 속에 끓고 있는 물의 온도를 재려고 냄비에 온도계를 집어넣으면 온도계의 온도가 물의 온도를 변화시키는 까닭에 결국 물의 온도를 정확히 잴 수가 없다는 이치다). 따라서 위치를 알려고 하면 운동량을 관측하는 일을 희생해야 하고 운동량을 관측하려고 하면 위치가 희생도니다. 위치의 오차와 운동량의 오차는 일정값보다 작아질 수 없는데, 한쪽의 오차를 1/2이하로 하면 다른 쪽의 오차는 2배가 되는 것을 증면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이다. (110--111)

 

*성석제는 다양한 부정형의 소설가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지해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따라서 소설에 관한 한, 21세기에도 나는 20세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언제나 부정형이다. 나는 21세기에도 감자를 좋아하고 부정형, 상보성, 불확정성을 지지하며 지금처럼 사람으로서 불순하게 살겠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20세기의 양자역학을 신봉하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