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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박이문

나의 삶 나의 길 -- 박이문

by 길철현 2022. 2. 12.

   어려서 나는 새를 무척 좋아했다. 여름이면 보리밭을 누비고 다니며 밭고랑 둥우리에 있는 종달새 새끼를, 눈 쌓인 겨울이면 뜰 앞 짚가리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방울새를 잡아 새장 속에 키우며 기뻐했다. 가슴이 흰 엷은 잿빛 종달새와 노랗고 검은 방울새는, 흔히 보는 참새와는 달리, 각기 고귀(高貴)하고 우아(優雅)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개도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개와 더불어 뒷동산이나 들을 뛰어다녔다. 가식(假飾) 없는 개의 두터운 정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날, 그 개가 동네 사람들에게 끌려가게 되던 날 나는 막 울었다.

 

   서울에 와서 나는 문학에 눈을 떴다. 별로 읽은 책도 없고, 읽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특수한 인간처럼 우러러 보였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하나하나의 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시인이 된다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와 같은 시를 쓸 수만 있다면, 횔덜린처럼 방황하다 미쳐 죽어도 상관없다고 믿었다. 어떤 직업에도 구애됨이 없이 작품을 내서 인세(印稅)로 살 수 있는 삶이 가장 부러웠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화려했던 사르트르가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사회와 거의 단절(斷絶)하고 사는 괴벽(怪癖)스러운 샐린저 같은 작가의 생활이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차츰 무엇이 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알고 싶었다. 모든 것에 대해서 투명할 수 있게 되고 싶었다. 정서적 표현에 대한 충동에 앞서 지적 갈증에 몰리게 됐다. 만족할 수 있는 시원한 지적 오아시스를 찾아, 나는 사막 같은 길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시골 논두렁길을 떠나 삭막(索莫)한 서울의 뒷거리를 방황하던 나는, 어느덧 소르본 대학의 낯선 거리를 5년 동안이나 외롭게 서성거린다. 파리의 좁은 길이 로스앤젤레스의 황량한 길로 연결되고, 그 길은 다시 보스턴의 각박한 꼬부랑길로 통했다. 이처럼, 나는 앎의 길을 찾아 서른 살이 넘어 10여 년 가깝도록 다시 학생 생활을 했고, 이제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학교의 테두리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50년의 긴 배움의 도상(途上)에서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고, 적지 않은 것들과 접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꿈에도 가볼 수 없는 지적 깊이를 보여 준 철학자들, 사상가들, 과학자들, 예술가들이다. 그것들은 거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성취한, 에베레스트보다 높고, 눈 덮인 들보다도 고귀한 도덕적 가치이다. 나는 이런 만남이 있을 때마다 찬미(讚美)와 존경(尊敬)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고, 경건(敬虔)하고 겸허(謙虛)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감탄을 잘한다.

   

  이런 경험만으로도 나는 내가 택한 배움의 길에 아쉬움 없는 보람을 느낀다. 내 환경이 만족스러웠던 것도 아니고, 내 운명에 대한 불만 의식이 적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가 내 뜻대로 앎을 찾아 배움의 길만을 택할 수 있게 해 준 내 환경을 고마워하고, 내 운명에 감사한다. 겉으로 보기에 나의 삶은 사치스러웠다고도 할 만큼 배움만을 위해 살아왔고, 앎의 길만을 따라다녔지만, 나는 아직도 잘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배운 것이 있다면 잘 알 수 없다는 사실뿐이며,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단편적인, 파편과 같은 것뿐이다.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아직도 나에게는 아물아물하다. 그러기에 나는 사물의 현상을 더욱 관찰하고, 남들로부터 더욱 배우고, 더욱 생각하고, 더욱 알고 싶은 의욕에 벅차 있을 뿐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이게 다 뭔가?’,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처럼 근본적이고 총괄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가 찾아낼 수 없음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아마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극히 단편적이며 극히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이나마 더 배우고, 생각해 보고, 더 알고 싶다. 나는 눈을 감는 날까지 더 배우고 더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믿게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투명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철학적 저서를 통해서, 혹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혹은 잡문의 형식으로라도 표현하고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만일, 내 자신을 위한 지적, 정신적 추구의 결과가 혹시 남의 사고에 다소나마 자극이 되고 사회에 티끌만큼이라도 공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막히게 기적적인 요행으로, 나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논두렁길에서 시작된 나의 길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고도 짧았다. 어느덧 내 삶의 오후가 왔음을 의식한다. 약간은 아쉽고 초조해진다. 갈 길은 더욱 아득해 보이는데, 근본적 문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어렸을 때에 초연(超然)했던 종달새, 우아했던 방울새, 정이 두터웠던 개가 생각난다. 엄격한 승원(僧院)이나 깊은 절간의 고요 속에서 이런 짐승들을 생각하면서 더 자유롭게, 더 조용히, 또 생각하고 또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