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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영국여행이야기

영국 여행 이야기, 어쩌다 보니 문학 기행(8)책방 순례 - 스쿱, 저드, 포일즈(Foyles)

by 길철현 2022. 10. 7.

대영박물관에서 나온 나는 10분 정도 걸어가서 스쿱 서점을 쉽게 찾았다. 지하 1층인데 규모가 커서 일단은 근처에 있는 저드라는 서점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이곳도 쉽게 찾았다. 1층과 지하 1층으로 된 서점이었는데 책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콘래드 관련 서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와 친분이 있었던 포드 매덕스 포드(Ford Madox Ford)가 쓴 콘래드 전기가 한 권 있어서 구입을 했다(6파운드 95펜스). 나이 든 주인이 연신 'thank you'라고 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스쿱도 나름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으나, 저드에는 미치지 못했다. 주인 아저씨는 제임스 조이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코가 좁고 높으며, 얼굴형도 갸름한 내 생각에 전형적인 영국 백인의 모습이었다. 인터넷에는 콘래드 관련 서적이 여러 권 올라와 있었으나 실제로 내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방랑자](The Rover)라는 콘래드의 마지막 소설 한 권뿐이었으며, 그 마저도 그의 첫 소설인 [올마이어의 어리석음](Almayer's Folly)과 합본된 것이었다.

 

대신에 프로이트 관련 서적들이 꽤 있어서 몇 권 구입을 했다. 영국에 온 김에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3권으로 된 어니스트 존즈(Ernest Jones)의 프로이트 전기가 눈에 띄어 먼저 그것을 뽑았고, 그 다음에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Freud and Oedipus)라는 책도 구입을 했다. [왜 프로이트는 틀렸는가](Why Freud is Wrong)이라는 책도 흥미로웠고, 볼비나 라파포트의 책들에도 눈이 갔으나 가격과 무게 때문에 내려놓았다. 또 콜럼비아 대학에서 나온 라캉 전기도 있었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두었다. 이 밖에 브리태니커판의 작은 글자로 읽고 있던 로크의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도 저렴한 가격이라 구입을 했다. 다소 몸집이 있는 여자가 주인에게 시끄럽게 불평을 하고 있어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내가 산 책이 30파운드가 넘어서 천으로 된 가방을 하나 선물로 받아 거기에다가 책을 넣어가지고 나왔다.

 

아침을 많이 먹어서 배가 그렇게 고프지는 않았으나 이 때 시각이 벌써 3시를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끼니를 때워야 할 듯했다.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중국 음식점이 보여 밖에서 메뉴를 한 번 훑어 보았더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저렴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뭘 먹어야 할지 몰라서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를 보고 있으니까, 직원이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붉은 색이 도는 고기를 가리키며, '이건 뭐죠?(What is this?)라고 묻자 닭고기라고 했다. 라이스(rice)와 샐러드를 곁들인 다음, 병에 든 오렌지 주스를 하나 가져오니 9파운드나 했다. 정말 고물가였다. 거기다 음식맛도 별로였다. 쌀이 생쌀을 씹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비워내었다. 저드와 스쿱 사이의 거리를 걸으며 내 시선을 끈 곳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게이가 세상'(Gay's the World)이라는 곳이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사진과 소설들이 진열창에 전시되어 있었다(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게이가 바로 그말'(Gay's the Word)인데 잘못 보았다. 이곳 또한 서점이었다). 

 

대형 서점에는 콘래드 서적이 좀 더 있을까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포일즈(Foyles)라는 서점이 떴다. 택시를 한 번 타볼까 하다가 이곳 역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가터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울프 부부가 살던 서섹스의  '몽크스 하우스'(Monk's House)는 National Trust에 등록되어 있다). 고층건물은 보이지 않고 패딩턴 근처에서 본 고색창연한 영국식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안내 책자에서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도로가 넓지 않아서 인지 사람들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차가 오지 않으면 그냥 길을 건넜다. 한국에서처럼 신호등을 준수하던 나도 사람들을 따라 그냥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방향을 확인하고는 무작정 그쪽으로 걸어간 다음에 다시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썼다. 열 권 가까운 책을 들고 계속 걸어가다보니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거리엔 거지 여인도 눈에 띄었는데 그 여인의 옆에는 'I'm the children'인지 뭐라고 쓴 팻말이 놓여 있었다. 공사를 하는 곳 앞에는 'No busking'이라는 표시도 있었다. 나는 이 때만 해도 busking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토트넘 역(토트넘 코트 로드[Tottenham Court Road] 역이었던 듯)부근에는 상당히 높은 고층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때마침 대대적인 공사중이었다(토트넘은 손흥민으로 인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지명이 되었다). 이곳이 중심가 중의 하나인 듯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고, 얼마 가지 않아 붉은 네온으로 된 포일즈 간판이 보였다. 서점 안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콘래드 관련 서적이 꽤 많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달리, 소설도 유명한 것만 몇 권 있었고, 그 밖에는 전기가 한 권, 자료집이 한 권 있을 뿐이었다. 자료집은 폴란드의 콘래드 친척들의 편지와 글을 모은 글이었는데 99.9파운드나 해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콘래드가 이렇게 인기가 없다는 것,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 콘래드를 논문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소설 섹션에서는 흥미롭게도 한국 작가 특집을 하고 있어서 신경숙과 한강의 소설, 안도현의 [연어 이야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몇 달 뒤의 일이긴 하지만 전시된 작품 중 한강의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는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위상을 더 높였다. 황선미는 누구인지 몰랐는데, 검색을 해보니 아동문학가였고, 크리스 리(Krys Lee)는 한국계 미국 작가로 촉망받는 신예 작가였다. 런던 한 복판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국을 이미 K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날은 우중충하고 콘래드가 홀대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체육복만 입었더니 밖으로 나오니 으슬으슬 추웠다(런던에 다녀온 한국의 지인들은 런던의 날씨를 이렇게 말했는데 딱 맞는 표현이었다). 일단 숙소로 와야겠다는 생각에 토트넘 코트 로드 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들어갔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바닥에 털석 주저앉는 것을 보고(첫 번째 아이가 먼저 특이하게도 양반다리로 앉았다) 문화적 차이를 실감했다. 

 

패딩턴 역에서 내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가게에서 맥주나 하나 살까 하다가, 호텔에 냉장고가 없으니 지금 사서 두면 맥주가 식을 것 같아서 생수를 하나 사서 들어왔다(Saka 1.5리터. 89펜스). 리셉션에서 호텔 직원에게 런던을 떠나 있을 동안 트렁크를 보관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5파운드를 내야 한다고 했다. 들어와서 텔레비전을 좀 보다가 너무 피곤해서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이 들었다. 이 때가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