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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최후의 최후

by 길철현 2023. 11. 25.

친구가 우리나라를 일컬어 코딱지만 하다고 했을 때 나는 콧구멍 정도는 된다고 항변을 했지만, 좁은 나라에 인구밀도는 높으니 주유소를 찾느라 고생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긴 해도 너무 마음을 놓고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도.
 

여동생과 어머니 간병을 교대하고 일주일 간 휴가를 갖게 되어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고창의 선운사 쪽이었으나, 혼자 하는 내 여행은 언제나 운전대가 향하는 대로여서 계획대로 되는 진행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거기다 갑자기 요통이 재발하여 장시간 운전은 무리일 듯하여 대구 근교의 청도로 가 풍양지, 수야지 등 몇 군데 저수지를 찾고 가볍게 산책을 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들른 풍양지 둘레를 천천히 걷던 중 허리 전체가 뻣뻣해지면서 심한 통증이 찾아와 길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질 뻔한 했다. 내 요통은 대체로 무리한 운동 때문에 오는 근육 경직이라 가볍게 산책을 하면 좀 풀리는데 이번에는 이상했다. 여행이고 뭐고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심한 통증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산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풍양지, 날씨는 쌀쌀하고 바람도 제법 세찼지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을 정도로 맑았다. 미세먼지도 날아가고 물빛 또한 더더욱 짙푸르다.
수야지, 작은 섬 하나가 이 저수지를 돋보이게 한다.

 
10시경에 집을 나섰는데 청도의 이서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오후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요통도 좀 잦아드는 듯하여 국도를 이용하여 창녕, 합천을 거쳐 광주대구고속도로(12번) 거창IC로 들어섰다. 광주대구고속도로는 원래 통행량이 많지 않은데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차량이 더욱 적었다. 목적지를 향하여 신나게 차를 몰았다. 중간에 우포늪 부근의 대학지에 들러 사진을 몇 장 찍긴 했지만, 그때로부터도 2시간 넘게 차를 달렸기 때문에  지리산 휴게소에 들러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허리에 휴식도 주고, 기름 가격도 1585원인가로 착하니 아직 100킬로미터 넘게 달릴 양이 남아있긴 해도 주유도 할 예정이었다.

대학지

 
그런데, 지리산휴게소에서 남원IC까지 20킬로 밖에 안 되는 걸 확인하고는 남원에서 숙소를 구하기로 하고 내처 달렸다. 요통 때문에 잠을 좀 설치긴 했어도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가 좀 좋아진 듯했다.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선운사로 향했다. 강천산휴게소의 가격은 1595원, 어제 지리산휴게소보다 약간 비쌌으나 그래도 싼 편이라 이곳에서 기름을 넣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더 가자 전광판에 '전방 ** 교통사고 전면 통제. 순창IC로 우회' 이런 메시지가 떴다.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다음 전광판이 나오기를 기다리니 '2차로 사고 처리 중'이라고 나왔다. 차가 막힐 것을 우려해서 나는 순창IC로 빠져나왔다.
 
순창으로 온 김에 예전(2019년)에 들렀던 강천산 인근의 강천제를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강천산에 들르는 길에 이 저수지를 본 것인데 당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공사도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얼마나 규모가 커졌을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름이 60킬로미터 달릴 정도라 주유소를 검색해 보았더니, 주변 주유소들은 모두 천육백 원 후반대라 좀 싼 곳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55번 국지도 강천로를 따라 올라가자 확장 공사를 마친 강천제의 제방이 위용도 당당하게 나를 맞았다. 제방 경사면에는 크게 '팔덕저수지'라고 적혀 있었다. 농어촌공사에서는 이 저수지를 강천제가 아니라 이 지역이 속한 팔덕면을 따라 팔덕저수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대기는 차갑고 투명했으며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팔덕저수지는 내 예상보다도 더 크고 맑게 나를 맞아주었다. 저수지 오른쪽에는 산책로가 나 있어서 저수지를 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갔더니 어느새 강천산군립공원이었다.

팔덕저수지, 만수면적이 40헥타르에 육박할 듯하다. 포털 사이트 지도는 아직도 확장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강천산 군립공원 입구에서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 가까운 주유소를 검색해 보니 강천산휴게소를 비롯하여 이미 지나온 순창 쪽의 주유소들이 떴다. 자동차 계기판에는 어느새 경고등이 들어와 있었고, 주행 가능 거리는 42킬로미터인가 그랬다. 이때쯤 이날의 숙소를 일단 정읍시로 정하고 경로 주변의 주유소를 검색해보니 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다. 1690원으로 비쌌지만 대안이 없었다. 시골의 주유소는 일찍 영업을 종료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머리에 떠올랐으나, 아직 2시도 되지 않아 시간은 넉넉했다. 나는 저수지 왼쪽 언덕에 위치한 전원마을에도 들러보았다. 그림 같은 주택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는 펜션도 여럿 있었다.   

전원마을, 역광이라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강천로를 달려나가자 도로 왼쪽 안으로 좀 들어간 곳에 저수지 두 개가 연달아 있었다. 사실 이 도로를 택한 건 이 저수지들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었다. 기름이 좀 간당거리긴 했으나 주유소에 도착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강천산 북쪽인 이 저수지들 안쪽에는 인가가 없는지 오가는 차량도 없었고, 어떤 곳은 쓰러진 나무가 도로를 반 이상 막고 있어서 가까스로 지날 수 있었다. 자양저수지(청계저수지)는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길쭉한 일자 모양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곳도 물이 진짜 맑았다. 그리고, 저수지 위로 쏟아지는 햇살. 윤슬. 이 저수지 바로 위에 위치한 외양제(원자실제)는 소류지로 물빛이 다소 검은 편이었다. 이곳에 들렀다가 나오니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주행 가능 거리 간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자양저수지(청계저수지)
외양제(원자실제)

 

강천로를 벗어나 21번 국도 밤재로로 들어서서 좀 달리니 이번에는 도로 바로 오른편 옆으로 월정저수지(구림저수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방 위에 차를 세우고 저수지를 탐방했다. 안내판을 보니 이 저수지는 1960년에 조성되었으며 만수면적이 22헥타르로 규모가 상당했다.

월정저수지(구림저수지) 상류에서 제방쪽을 보면서. 길쭉한 형태라 제방이 아득하다.
저수지 상류에 있는 마을 산 위에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주유소로 직행하지 않으면 어떤 불상사가 따를지 알 수 없었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을 하면 찌꺼기가 올라와 엔진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주유소까지 10여 킬로 남은 상황에서 상당히 높은 재를 하나 넘어야 했다. 그런데, 도로 조금 안쪽 높은 곳에 저수지가 하나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재만 아니라면 주유를 하고 돌아와도 되겠지만 고개가 부담이 되었다. 이날 따라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무한긍정이 나를 사로잡았던가? 제방으로 차를 몰고 올라간 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서둘러 내려왔다. 

이 저수지의 이름도 월정저수지이다.
고개의 시작. 밤재의 정상은 517m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고개를 오르기 시작하자 이제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주행 가능 거리를 상회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7킬로 정도 남았는데 주행 가능 거리는 6킬로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의 정상에 다다르자 주행 가능 거리는 5킬로였다. 내리막을 내려갈 때에는 기름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걸 예전 비슷한 상황에서  가지산 석남사 부근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생생하게 경험했기에 내리막이 아주 길게 이어지기만을 바랬다. 쌍치면으로 들어가는 로터리식 교차로에서는 우측에서 차가 한 대 들어오려고 얼쩡거려서 경적을 울리며 중심가로 들어섰다. 몇 백 미터만 더 가면 되었고 주행 가능 거리는 2킬로미터였다. 드디어 도착. 왼쪽에 있는 주유소로 들어섰다. 셀프주유소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주유기 계기판에 아무런 수치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카드를 넣으면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하기도 했다. 옆쪽에 있는 사무실로 가보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바깥에 걸어둔 칠판에 적힌 글자를 보니 토요일은 3시 20분까지 영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3시 32분이었다. 아뿔사! 답답한 마음에 지나가는 여자분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한술 더 떠 겨울엔 주말에 영업을 안 한다고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려하고 있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전날 밤 모텔에서 보았던 '미스트'라는 영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길 건너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파출소에 누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그레인저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행인 다른 여성 두 분도 따라내렸는데, 그중 한 분은 수녀분이었다. 한 분이 7킬로미터 거리에 주유소가 한 군데 있으니 그리로 가자, 라고 하자, 운전자는 주행 가능 거리가 6킬로미터 밖에 안 남아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게 낫지. 도로에서 차가 멈추면 어떻게 해. 보험사에 전화를 하면 기름을 갖다 주니까 보험사에 전화를 해야겠다. 곧이어 소형트럭 한 대도 주유소로 들어왔다. 나는 운전자에게 영업을 안 한다고 말했다. 
 
우군을 얻은 나는 사무실로 가서 칠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다행히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만 대답은 싸늘했다. 동절기엔 주말에 영업을 안 해요. 그럼, 방법이 없는 거네요. 예. 
 
소형트럭의 운전자는 곧 떠나가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보험사에 전화를 하는 것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을 듯했다. 다시 미스트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 영화는 예전에 후반부만 보아 무서움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는데, 넷플릭스로 시청이 가능해서 전날 밤 모텔에서 처음부터 다시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단순한 폭풍으로 시작해서 예전에 본 영화가 맞는지 긴가민가했다. 안개가 몰려들어 이 작은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안갯속에서 나온 정체 모를 괴생명체들이 마트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안개는 며칠 째 물러갈 줄 모르는데 마트 안의 사람들이 점점 더 종교적 광기에 휩싸이자, 주인공 일행이 차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급기야 차의 기름도 다 떨어지고.
 
그랬다. 영화에서도 차는 기름이 다 떨어져 멈추고 말았다. 보험사에 전화를 한다면 30분 이상 한 시간까지도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보험사에 전화를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무모하게도 시동 버턴을 누르고 있었다. 차가 도로에 멈춰 서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7킬로 떨어진 주유소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중심가를 빠져 나와 삼거리에서 좌회전. 오르막이 하나 있었다. 나는 차가 멈춰 설 것에 대비해 저속 바깥 차선으로 빠졌다. 계기판의 숫자가 대시 표시로 바뀌었다. 오르막을 끝까지 오르자 한시름을 놓았다. 내리막의 시작. 브레이크를 최대한 자제하며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에 이르자 앞의 차가 기어가고 있었다. 추월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돌발상황이 발발할지 몰라 그럴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차는 멈추지 않았고 이제 1킬로 정도만 더 가면 되었다.
 
주인공 일행은 괴생명체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살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 남은 총알은 네 발. 차 안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리고 주인공만 살아남았다. 자살할 방법을 찾지만 쉽지 않은 노릇. 바로 그때 그 앞으로 다가오는 탱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군인들과 트럭에 탄 구조된 사람들. 안개도 서서히 걷히고.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자 오른편에 아주 작은 주유소가 보였다. Saved by the bell, 살았다, 하는 심정으로 주유소로 들어섰는데 주유기가 낡았을 뿐만 아니라 녹이 슬어 있었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엔 옆쪽의 큰 가게 안에는 잡동사니들이 가득 있는 데다 괴괴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실망을 한 번 맛보아서인지 이곳은 아예 폐업한 곳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주유기가 있는 곳에서 차를 좀더 앞으로 몰고 나가  빈 공간에 차를 세웠다. 이제는 정말 보험사를 불러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 차 밖으로 나오니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이분이 과연 누구인가 의아해 하는데, 기름 넣을 거냐고, 이 차가 휘발유 찬가요? 그럼, 저 짝으로 오라고 했다. 후진을 해서 첫 번째 주유기 앞에 차를 세웠다. 기름 값이 많이 내렸다고 해서 내비에 나온 것보다는 좀 내렸는가 했으나 리터당 1760원이었다. 3만 원어치만 넣어달라고 했다. 거기다 미터기의 요금이 엄청나게 올라가고 있어서 할머니를 쳐다보았더니, 미터기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요청했는데 오지 않는다고. 종이에 적은 요금표를 보면서 17리터가 조금 넘게 넣어주셨다. 신용카드를 건넸더니 가게로 들어가 계산을 마친 할머니는 다른 것은 줄 것이 없다며 귤 하나를 건넸다. 운이 억세게 좋았다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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