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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한국현대시12

안도현 -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는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라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 2023. 10. 25.
김동명 -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1936) -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이 시는 일단 명료해서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큰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이국의 식물인 파초와 화자의 동일시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결말이 다소 안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큰 잎으로 겨울을 가리는 정도로는 별다른 카타르시스가 없지 않은가? 2023. 10. 8.
황인숙 - 겨울 햇살 아래서 - 갑숙에게 철 모르고 핀 들풀꽃과 미처 겨울잠에 들지 못한 철없는 꿀벌이 겨울 햇살 아래서 만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우리한테 미래는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미래에 대해 곰곰 생각하는 얼굴일 것이다 겨울 햇살 아래서. - 삶은 그 뒤에 어떻게 될 값이라도 향유해야 할 그런 것인가? 아마도 늦게 결혼하는 친구를 축하하는 시인 듯. 2023. 9. 13.
임화 - 네거리의 순이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상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핀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2023.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