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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328

이영광 - 봄날 봄날 안경을 잊어버리고 출근하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간밤 취해서 부딪혔던 골목 귀퉁이가 각을 잃고 편안히 졸고 있는 걸 보고 발길을 돌렸다 길이 뿌옇게 흐렸으므로 무단횡단도 하지 않았다 나의 약시가 담 모서리의 적의를 용서한 덕분일까 새 학기 들어 처음 흡족하게 강의를 마쳤다 미운 놈 고운 놈 제각각이던 학생들도 모두 둥글둥글 예뻐 보이고 오늘 따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중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물고 창밖을 내다보니 황사 며칠, 서울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흐릿해진 풍경 어딘가에 봄 내음이 스며 조용조용 연둣빛으로 옮겨내는 중이다 나는 세상을 너무 자세히 보려 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로 번져가는 중이기에 수묵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에 안경 도수가 높아갈수록 모든 것.. 2016. 4. 25.
김선우 - 도화 아래 잠들다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 2016. 4. 25.
김선우 - 대관령 옛길 김선우 - 대관령 옛길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 2016. 4. 25.
황인숙 - 강 [자명한 산책] 중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 2016.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