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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문예창작반(문창반)

가난한 자의 유희 -- 최성용

by 길철현 2022. 3. 17.

기억과 예측이 허락받지 못한

세상은 종이 한 장으로

시들어 가고

우리들의 유희는 강을 건너

빈 손으로 피리를 분다.

 

바람이 

제 몸에 상처를 입혀

하나 둘 나무의 키를 지우고

하나 둘 풀의 뿌리를 지우고

하나 둘 발자욱을 지운다.

 

지금껏 지워지지 않은 

애정이나 순결이 이싸면

마른 입술을 깨물어 붉은 피로

색인을 하여 간직할 일이다.

 

건너온 강은

뒷전에서 서성이고 땅과 하늘이 

몸을 비벼 잠들어

잠들어 돌아설 때

진리는 머리숙인 갈대에게 있는 걸까

 

우리들 

가난한 자의 유희는

사물의 세워진 이정표를 설명하지 못하고

간혹 빗겨구르는 조약돌의 웃음을 

홀린 듯 보기도 한다. 

 

[내재율 1호](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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