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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안면도 기행(1994년 10월 31일 - 11월 1일)

by 길철현 2022. 3. 30.

* 이 글은 1994년 스티븐 킹의 소설 [고양이 윈스턴 처칠](Pet Sematary) 초역을 마치고 안면도로 여행을 갔다온 다음 적은 여행기이다. 보름쯤 전에 지난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도 있었다. 공책에 적은 것을 맞춤법만 살짝 고치고 그대로 옮겨본다. 

 

만 스물여덟 살이 되고 난 어느 날, 난 삶을 나의 공부와, 여행에서 찾기로 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 말한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인 듯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무슨 난리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댄다. 그래서 난, 사람들이 결혼에 관해서 묻거나,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느냐고 물어올 때, 대체로 대답을 흐려버린다. 친구(들) 중 반수 이상이 결혼을 했고(이야기가 궤도를 벗어나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이문제를 써보자.), 또 결혼 날짜를 받아둔 아이도 상당수라서 이제 이 문제가 서서히 나의 목을 조아 온다.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로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외할 때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종교의 계율에 따라 결혼을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상당히 많겠지만, 일반인의 경우는 다른 나라에 비해 비율이 월등히 낮은 것 같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주변, 가족이나 친척, 친구의 압력이나 권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에게도 미래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작정 한 여인을 사랑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결혼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향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도 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나에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로서도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여자를 사랑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론은 결혼ㅇ리나느 책임을 질 능력도, 또 짊어지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괜히 미묘한 문제를 떠내서 글의 초점만 흐리게 했다).

 

지지난 주의 [소요산] 행은 무척이나 흥겨운 것이었다. 첫 발걸음이라는 의미도 있었고, 산행은 거의 언제나 즐거움으로 끝났다.

 

요번에는 어딘가 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산이라면 좋겠지만, 시간이 좀 어중간 했다. 월요일 오후에 떠나서 화요일 오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게(과외 때문에) 산행을 망설이게 했다. 장비만 있다면 야간 산행을 하는 것도 좋은데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 사실은 일상을 떠나,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갖는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부대 졸병이 있던 서산지역이었다. [서산해안국립공원](지도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지만 실지로는 [태안해안국립공원]이었다.) 쪽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철지난 바닷가라 조용할 것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게다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예산의 수덕사까지도 가볼 수 있을 터였다(물론 무리해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난 뒤 곧장 남부시외버스터미날로 향했다. 태안까지는 버스가 자주 있었다. 출발 시간은 2시 56분, 표를 끊자마자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살면서 가장 짜증나는 것은 교통체증이지만, 이 교통체증은 이제는 어느 곳 없이 심한 듯했다. 차량의 증가를 못 따라가는 도로의 신설이나, 차선의 확대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차를 만드는 것은 쉽지만 도로를 만드는 것은 그 수십 배의 공력이 든다. 그러나, 오늘은 서울에서 평택까지 8차선, 편도 4차선으로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려나갔다. 교통 계획은 어떻게 수립되는가? 한계 통행량 아래서 통행이 순조로울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하는가? 

 

평택은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도로가 새로 신설되고, 아파트 단지가 시의 초입 부분에(예전에는 농토였던)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한 안정리가 평택에서 2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평택은 낯익은 도시인데도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얼마 전 뉴스에 평택 지역의 땅값이 많이 올랐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 개발 붐은 서해안 고속도로의 공사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시외버스는 평택을 지나 팽성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아니 딱 한 번 부대에 있을 때, 이곳을 자전거로 지난 적이 있었다. 휴일을 이용해서 아산만 방조제에 갔다가 갈 때와는 달리, 올 때는 이 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삽교호를 지나기 전 휴게소에서 버스는 10분간 멈춰섰다. 화장실이 너무나 넓어서, 약간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단순히 넓다고 말하는 건 적절치 못한 표현같다. 원래 화장실이라는 건 좀 폐쇄적인 구조인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 화장실은 양 사이드로 소변기가 있고, 안쪽에는 대변소가 있는데 그 중간이 휑뎅그레하게 넓었다. 뭔가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매점에서 우동을 하나 먹었다. 의외로 면이 졸깃한 게(?) 먹을 만했다.

 

삽교 방조제는 어느 쪽이 바다이고, 어느 쪽이 삽교호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만큼 길게 뻗어 바다와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론 지도로 나의 왼쪽 편이 삽교호라는 걸 알 수 있긴 했지만, 정말 이 인공 호수는 육지가 안 보일만큼 아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신천(보충: 신평면인 듯)인지 뭔지 하는 곳은 개발의 중심지인 듯 곳곳에 부동산 중개업소와 신축 가옥이 눈에 띄었다. 정말 그곳은 농촌이 도시로 변하는 걸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쪽 지방은 개발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게 눈에 뚜렷했다. 

 

당진을 지난 버스는 서산에 도착했다. 서산은 예상밖으로 컸다. 태안에 도착한 것은 6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도시, 그것도 대도시에서만 생활을 해온 나에게는 이런 읍이 가장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의 정취도 도시의 화려함도 없는 초라함. 하지만 이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해도, 이방인의 눈에 비친, 편견은 쉽게 사그라들질 않았다.

 

읍내를 한 바퀴 휙 둘렀다. 뭔가 눈에 띄는 건 없었다. 하긴 내가 그 시간에 그곳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모든 행동은 일회적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다시 태안의 거리, 그것도 뒷골목을 걸을 기회란 오기 힘들테니까. 이런 위안의 반대편엔 월악산이나 속리산으로 가지 않은데 대한 후회가 조금씩 살아났다.

 

태안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좀 더 먼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안면도에 들어설 때쯤엔 이미 어둠이 깔린 다음이었고, 게다가 조그만 다리를 하나 건넜을 뿐 섬으로 들어섰다는 생각은 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도상으로 안면이라는 곳에 차를 내렸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정말 자그마한 곳이었다. 터미널을 둘러싸고 몇 군데의 음식점, 다방, 여관이 있는 정도였다. 더 먼 곳으로 가기에도 어중간하고 그냥 머물자니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 때 세 명의 사복 미군이 눈에 띄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도 미군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또 왜 그들이 여기에 와있는지, 혹은 나의 무료한 시간을 그들과의 대화로 메꿀 순 없는지 이런 생각들이 교차했다.

 

일단 만화가게라도 가서 만화를 보면서 밤이 좀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화가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좁은 바닥이긴 하지만 만화가게 하나 없다니, 아니 진짜로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낯선 이의 눈에 띄이지 않는 것일 따름일까? 두어 바퀴나 돌았지만 만화가겐 없었다.

 

그냥 저녁이나 먹는 수밖에 없었다. 맥주에다 양념닭 1인분으로. 양념 치킨집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는 주인에게 화장실을 묻자 거기서 먼주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저씨, 나하고 같이 갈려우"라고 말해 나를 한편으로 놀랍게, 또 한편으로 별 희안한 놈 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의 행식이 우스꽝스러웠다. 덥수룩한 수염에다 때투성이의 고르땐(골덴) 바지(그의 뒤에서 걸어서 엉덩이 부분에 묻은 시커먼 때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잘 기억나진 않지만 검은 색 계통의 윗도리를 입고 있었는데, 기골이 장대한 게 동네의 건달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데가 있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그는 크게 방귀를 뀌어 나를 또 한 번 웃게 만들었다. 그는 나에게 이곳이 초행이냐고 묻고, 나의 초라한 행색에 신경이 쓰이는 듯 읍내의 여관은 비싸다고 말하면서 좀 싼 데를, 바닷가의 민박을 알아봐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라고 덧붙였다. (그가 이렇게 신경을 써준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로서는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배낭에서 [오금순]씨의 수기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86년도 전방 입소 때 이분이 강연을 하러 오신 적이 있는데, 두서없는 이야기 가운데도 뭔가 진실됨 같은 게 여겨져 인상에 남았다. 전방 입소를 제재로 소설을 써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제재로 한 책을 모으다가, 우연히 이분의 [수기]를 헌책방에서 발견하게 되어 요번 여행에 가지고 온 것이다 수기는 그분의 강연에서 느껴졌던, 두서없음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전적인, 그것도 기구한 운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서 자꾸만 책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얼마쯤 그렇게 책을 읽고 있었을까? 이번에는 군복을 입은 미군 네 명이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들 중 세 명은 맥주를(주인과 약간의 혼란을 겪은 뒤) 주문했는데, 한 명이 내가 먹고 있는 양념닭을 먹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주인과 그 이상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걸 실감했다. 닭고기를 먹고 싶은 군인은 먼저 가격이 얼마인지를 알고 싶어했는데, 그는 그걸 한국말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고, 주인도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정의의 사자처럼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할 시기였다. 상대방의 곤란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어린 미군은(양념닭을 먹고 싶어하던) 나에게 Thank you를 연발했다. 저 지나친 감사의 표현. Private이 아니면 PFC가 틀림없을 터였다. 달리 할 일도 없고, 그들과 좀 이야기를 나눌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먼저 나서기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주인은 나를 다시 보는 눈치였다. 정말 간단한 수준의 회화였지만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굉장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곳 분이 아니죠"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이 근처에 어디 구경할만한 곳이 없냐"고 묻자, 그는 "밤에 구경할 곳으로는 어디어디라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낮에는 수목원에 가면 좋다"고 했다. 

불을 켜고 그물을 거둬들이는 모습이 이색적이라고 한 그곳이 어딘질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다시 묻지도 않았다.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걸어서 이십 분 버스로는 두어 정거장 거리에 있다는 수목원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양념치킨] 집을 나선 시각은 아홉 시가 좀 넘어서였다. 여관에 들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고, 게다가 여관들이 전부 도로변에 (4개 정도 있었는데) 있어서 별로 숙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지난 주에 소요산에 갔을 때--소요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가파른 산이었는데--여러 명이서 같이 등산을 온 아가씨 중 한 명이 "아저씨, 혼자서 오셨어요. 심심하겠다."라고 말했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산을 탄다는 재미 때문에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번 여행은 진짜로 그럴 낌새가 농후했다.

 

그러나, 여행의 프라이오리티를 어디에 두느야 하는 문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 여행은 사색의 시간인 것이다.

 

대로를 따라 별 생각없이 걸어갔다. 

 

얼마를 그렇게 걸어내려 갔을까? 시간이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도,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었다. 오른쪽에 보니까 초라한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놀랍게도 [순복음교회]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그렇게 많은 별을 몬 것은 처음 있는 일인 듯했다. 하늘 가운데로 은하수가 별가루를 흩뿌려 놓은 듯 흐르고 있었고, 이름모를 수많은 성욱과 성좌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수천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책에 씌어진 하늘과 이 하늘은 다른 하늘이었다. 조금만 나이가 어렸더라도 인도에 그대로 누워 오래도록 하늘을 보았으리라. 

 

[청아장] 여관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도로변이라 차소리가 수면을 방해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여관이 걔중 깨끗하고 나아보였다.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조용한 방을 달라고 하니까 다 조용하니까 염려 놓으라고 했지만, 나처럼 소음에 민감한 사람에겐 다 거짓말이었다. 

 

TV 뉴스에서는 군부대의 총기 난동 사고가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영점 사격장에서의 총기 사고. 중대장과 소대장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다른 소대장 한 명은 중태, 또 다른 부대원들도 부상을 입은 끔찍한 사고였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도 자살을 한 것으로 보도외었다. 진짜 끔찍한 일이 요즈음엔 연거푸 일어나는 듯했다. 

 

[오금순] 씨의 수기를 다 읽고는 어느 결엔가 잠이 들었다. 

 

성적인 욕구불만 때문이겠지만, 여관에서 잘 때면 언제나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기를 바란다. 물론 딱 까놓고 이야기 할 정도로 용기도 없기 때문에 혼자 (속으로) 이제나 저네자 기다리는 형편이지만. 이젠 이런 걸 벗어날 때가 된 듯했다. 언제나 기대는 요란하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으므로. 하지만 깨달음이 그리 쉽게 오지는 않으리라. 

 

지나가는 차소리 때문에 자꾸만 잠을 깼다. 우르릉거리며 지나가는 그 놈의 소리가 잠이 들만하면 깨우고, 또 깨우고 그랬다. 아직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할 텐데 했으나, 시계는 벌써 여덟 시를 넘고 있었다.

 

방포 * 꽂지라고 팻말이 씌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목원은 이곳을 다녀온 다음에 갈 예정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시골에선 사람이란 자연 속이 묻혀 있는 듯 없는 듯하는 것이 자연스런 풍경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서울은? 밤 열두 시가 넘어도 교통 체증이 일어나고, 하다 못해 산에라도 갈라치면 (좀 유명한 곳에다, 그날이 마침 공유일이라고 한다면) 사람에 부딪혀 앞으로 나가기 힘든 곳도 있었다. 정말 신은 망했다. 이갑수는 인간이 도시를 건설함으모써 신은 망했다고 했는데, 기막힌 명구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인간에겐 인간밖에 없는 것이다. 우러러 보아야 할 신도, 인간을 감싸줄 자연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약 이십 분쯤 걸어갔을까? 방포 해수욕장과 꽂기 해수욕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그 앞에서 나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두 군데 다 가 볼 마음은 없었고, 이제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발길을 방포로 옮겼다. 노래에도 있듯이 '철지난 바닷가'는 정말 쓸쓸했다. 여름이면 그래도 해수욕객들이 꽤 몰려드는지 민박이며 식당이며가 쪼롬히 모여있었으나, 사람들은 지어만 놓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래사장은 별로 넓지 않았고, 모래의 빛깔도 그리 맑진 못해서 일급 해수욕장 노릇을 하긴 힘들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주변 풍광은 산이 왼쪽편에 막아서 있는 모습 등은 지난 유월에 [들렀던] 영종도의 을왕리(?) 해수욕장과 거의 흡사했다. 

 

무슨 나문지, 색깔이 어땠는 지도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무 집단 군락지가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보충: 모감주나무 군락지이다).

 

올 때와는 다른 길로 수목원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국민학교를 하나 지났따. 첫 교시 수업이 시작했는지 학교는 조용했다. 조금 더 걸어나가자 아스팔트 도로--안면도의 끝인 고남으로 향하는 도로(보충: 77번 국도)--가 나왔다. 어제 양념치킨 집 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고남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수목원이 나올 것이었다. 

 

꽤 오래 걸은 것 같은 데도 수목원이라는 놈이 나오질 않아, 나는 어젯밤 아저씨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별 신통한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지막한 고개를 하나 넘고 나자 울창한 소나무숲이 보이면서 제대로 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길 양쪽으로, 왼쪽으로는 [산림 전시관]이 오른쪽으로는 [수목원]이 있었다. 좀 더 정취가 있어 보이는 수목원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꽤 넓은 길이 나있었다. 소나무 냄새가 향긋하게 코에 와닿는 것 같았다. 나무에 걸어놓은 안내판에는 서울과 이곳의 공기 오염도가 비교되어 있었다. 서울의 공기 오염도는 P.P.M.(Parts per million)이 0.054로 환경 기준치인 0.05를 초과한 반면, 이 수목원 내의 공기 오염도는 0.006으로 거의 10배나 아래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가 내뱉았다. 맑은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 싶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오전이었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서자, 갖가지 나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무들의 모양보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었다. 감탕나무과의 꽝꽝나무, 호랑가시나무, 광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 배롱나무, 수수꽃다리, 꽃치자, 좀등나무, 함박꽃나무, 범의과의 고광나무, 좀작삼, 노각******.

 

나무들 종류만 해도 이다지도 많은데, 거기다 각각의 나무에다 이름을 붙이기라도 한다면. 수목을 전시해 놓은 곳은 조경이 참 잘되어 있었다. 이 경치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전망대는 별로 그렇게 전망이 좋지 못했다. 좀 더 높이를 높여서 나무들에 시야가 가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였다.

 

--수목원 관람을 끝으로 여행은 끝이 났다. 이 다음의 과정은 돌아오는 길뿐이었다. 안면읍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몰라, 지나가는 빈 차를 불러 세울까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걸어갈까 하는데 안면읍 행 버스가 왔다. ([산림 전시관] 관람은 생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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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2시 55분이었다. 정말 딱 24시간 동안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