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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제주 기행 (7)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여섯째 날 - 8월 19일]

by 길철현 2016. 9. 14.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다시 올라가는 일출봉. 세찬 바닷바람.

그러나.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 * *


제주도를 삼다도라고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은 논이 없다는 것과, 남자들의 생김새가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두터운 입술에 약간 들창코를 하고 있었다.


제주시로 들어오는 길에 크게 펼쳐져 있던 수박밭도 인상에 남았다. 상한 수박들이 그 밭에 나뒹굴던 모습도.


떠나고 싶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여행은 이제 그만.


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지만, 표가 전부 예매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삼사일은 기다려야 했다.


페리 호 여객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목포로 떠나는 배가 곧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문옥 형(덧붙이. 군대 선임이었는데 제대 후에도 이 당시엔 만남을 이어갔다)에게 줄 선물을 하나 마련할까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배 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에 그냥 올랐다. 아침도 거르고.


삼박 사일 간의 체류였지만, 실지로 있은 날은 이틀 뿐이었다. 한라산을 올랐던 일, 해수욕장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성산의 일출을 보러 이 먼 길을 왔건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다.


* * *


목포로 돌아오는 뱃길은 진짜 고역이었다. 배가 울렁울렁 거려서 빈 속을 자꾸만 뒤집었다. 앓는 사람마냥 선실에 누워 낑낑대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 편은 매진되었기 때문에 일단 광주로 향했다. 광주 터미널에 내려, 식당에 가서 콩국수를 먹었는데 얼음을 갈아 국물 대신에 주는데 땀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이었다. 이 식당에다 나는 우산을 두고 나온 것 같은데, 그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멀리 떠나와버렸기 때문에 되찾으러 갈 수가 없었다.


영화관에 가서 '로보캅 2'를 보고, 만화방에 가서 또 고행석의 만화를 보았다. 한 팔 큐타법을 보여주는 당구를 소재로 한 만화였는데, 그것을 보는 동안에 기분이 점차 나빠졌다.


우산을 잊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여행이 지긋지긋해졌기 때문에.


달아나고 싶었다. 달렸다. 이름 모를 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내 다리는 쉽사리 피곤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