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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15

제주 기행 (5)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넷째 날 - 8월 17일] 비교적 일찍 일어난 나는 -전날도 나는 욕망에 몸부림쳤다- 여관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먼저 한라산을 오른 뒤에, 성산포에 가서 해돋이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제주도의 버스 노선을 해안을 끼고 도는 해안도로와, 한라산을 관통하는 관통도로로 크게 나뉘어 지는데, 이 도로를 이용하면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갈까 하는데, 곧 출발하는 차가 있어서 그냥 떠났다. 약 7시간 거린다는 등산 코스. 높이에 비하면 오르기가 굉장히 수월한 모양이었다. 한라산에서는 취사나 야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산과 다른 점이다. '영실'에서 내린 나는 허기진 배를 안고 부지런히 걸어 올랐다. 비싸긴 했지만 딴 곳에서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천 원이.. 2016. 9. 13.
제주 기행 (4)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셋째 날 - 8월 16일] 밖에 나와 잠을 잘 땐 대부분 그렇지만 이 날도 일찍 잠을 깼다. 어제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허탈하게 끝났던 아니던 이제 나는 성년의 문을 들어섰다는 생각이 내 머리속에 꽉 들어박혔다. 좀 더 잠을 잘까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 보다는 책을 읽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노신의 [아큐정전]을 폈다.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이 길로 내몰았을까? 이것은 지극히 타락한 생활이 아닐까? 아니다, 이건 하나의 경험이다. 작가에겐 온갖 종류의 경험이 필요하며, 닥쳐오는 하나하나의 경험을 세심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너의 꿈은 무너졌고, 신비는 허무함으로 판명났으니 네 발길을 돌려라. 서울로. 더 이상의 방황은, 네 보답받지 못할 사랑도 이젠 그만이다. 그래, 침잠, 침잠, 침잠, 수백 번 되.. 2016. 9. 12.
제주 기행 (3)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둘째 날 - 8월 15일] [둘 째 날] (8월 15일) 밖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 대고, 방안에는 조그만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지 온 몸이 가렵고 이래저래 잠을 설친 밤이었다. '파도'에 대해 뭔가 시상이 떠오를 듯도 했는데, 막상 펜을 들자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가 조금 못 되었다. 세수를 하러 문을 열고 나오니,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만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 말로는 한 시간만 하면 금산에 오른다고 했다. 해발 666미터. 육육육이란 숫자가 [오멘]에 나오는 마귀 꼬마를 연상시켜 약간 불길한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 보다는 이성복의 시집 제목 [남해 금산]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물론 나는 이 시집을 아직 읽진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금산을 다녀간 뒤에 그.. 2016. 8. 5.
제주 기행 (2)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첫째 날, 8월 14일] "그럼, 서울 올라갈 께." "말라고 이렇게 빨리 올라갈라 카는지 모르겠대이. 집에 좀 있다가 가면 될낀 대." 나는 엄마에게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말하면 괜히 걱정하실 것 같고, 무엇보다 구속을 받지 않고 훌훌 떠나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 바로 옆에 있는 서부 정류장으로 갔다. 아직 휴가철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정류장은 붐볐다. 방학의 끄트머리를 멋있게 장식해야 방학이 멋있어 진다고 믿는 대학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대학생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특권 계급이라는 생각이 요즈음엔 자주 든다. 소비할 시간도 많고, 부모로부터 용돈도 받지. (물론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나 또한 그런 특권을 철저히 누리고 있지 않은가? 나의 여행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할 순 있겠지만 적.. 2016.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