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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129

자살한 선풍기 무생물도 죽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자살할 수도 있는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밤을 이어 새벽까지 내리는 날 평소처럼 일찍 깬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여름 무더위를 그나마 견디게 해 주던 선풍기가,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친구 같은 이 친구가 갑자기, 별안간, 불현듯, 얼떨결에, 창졸간에, 정말 황망하게도, 자신의 목을 똑 부러뜨리며 급사하고 만 것이다 두 동강 난 선풍기는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었는데 굵은 힘줄 같은 선 하나가 상체의 추락을 버팅기고 있을 따름 무생물의 자살, 그중에서도 선풍기의 자살은 정말 듣보잡인데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초여름부터 끝나지 않는 늦여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더니만 임무를 다 마쳤음을 직감하고는 그만 .. 2023. 9. 14.
이판사판 공사판 내가 지금 이 순간 죽는다 해도 세상은 코털 하나 꿈쩍 하지 않는다 세상이 지금 이 순간 폭망한다 해도 나는 발가락 하나 꼬무락 대지 않 2023. 9. 13.
잠든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 길고 길었던 노역의 시간이 겨우 끝났는데 휴식 대신 아픔이 찾아왔네요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자의 것이라 약을 드리고 파스를 붙여 드리고 위안의 말을 건네며 몸을 주물러 드리는 것외에 달리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더욱 많이 아파서 또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면서요 어머니,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이 든 이 순간만큼은 그 무거운 고통을 멀리 보내버리고 추운 겨울 지나고 새 봄이 찾아와 온 산이 신록으로 물들 때 마음도 덩달아 연두빛으로 물들던 것처럼 찬연한 삶의 한 시절로 돌아가세요 2023. 9. 13.
나에게 탁구는 최애 취미이자 땡전 한 푼 안 되는 업 건강을 위한 운동을 넘어 신음소리 절로 부르는 노동 하루하루 늘어가는 기술에 반비례하여 한해한해 퇴보하는 체력 테이블 건너편 상대는 공을 주고 받고 함께 즐기는 파트너이자 무너뜨려야 할 적 하수 앞에서는 왕처럼 군림하지만 고수 앞에서는 길 잃은 아이마냥 헤매이기 일쑤 운명처럼 다가온 저주 이마에 굵게 패인 화인으로 어디 달리 도망갈 곳도 없다 온갖 모순을 꿰뚫고 작렬하는 송곳 스매싱 2023.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