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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진보의전초기지

플로베르 -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ecuchet) 소개. 김계선

by 길철현 2018. 11. 29.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ecuchet)

   


   프랑스 소설가 플로베르의 미완성 장편소설(1881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사후(死後)에 출판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두 명의 서기(書記)가, 어떤 유산을 얻어 전원에 은퇴하여 농장을 경영하면서, 지식욕으로 인해 차례차례 화학ㆍ의학ㆍ조원)造園)ㆍ지질학ㆍ고고학ㆍ역사ㆍ문학ㆍ정치ㆍ연애ㆍ심령학(心靈學)ㆍ형이상학ㆍ종교ㆍ교육학 등의 연구와 실험을 하지만, 그 제설(諸說)의 불완전과 모순에 기만되고, 또 자신의 응용의 무능에 실패를 거듭한 결과 농장을 팔아버리고, 인간의 사고에 관한 근대 제학(諸學)에 횡일(橫溢)하는 여러 가지 미몽(迷夢)을 수록하려고, 또 다시 필경(筆耕)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우애를 척결(剔抉)한 대규모의 통렬한 ‘사고(思考)의 희극’이다. - <문예대사전>(학원사.1969) -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의 1881년 발표된 미완성 장편소설. <부바르와 페퀴셰>는 파리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두 남자 부바르와 페퀴셰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같은 직업과 40대 후반의 독신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외모나 성격에서 다른 점이 더 많지만, 마치 부부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을 이룬다.

   부바르가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유산을 상속받자 두 사람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정착한다.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이 전원생활을 시작하여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소설은 수많은 책들과 함께 전개되는 다소 특이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에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누가 어리석다는 것일까? 학문의 세계에 뛰어들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부바르와 페퀴셰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어리석지 않다. 이미 소설의 1장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날로 그들의 “지성이 높아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연구 대상인 농업에서부터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기술된 전문 서적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나름대로 적용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들은 책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비판하고 자기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연구도 농업, 원예 같은 실용 분야에서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거의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연구 대상을 바꿀 때는 사소하지만 늘 어떤 계기가 있고,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해도 어떤 분야든 항상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다. 이런 두 인물을 어리석다고 보기는 어렵다.

   플로베르는 “현대의 모든 사상을 검토해 볼 작정”에서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소설을 위해 15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던 작가처럼 두 인물도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독서를 한다. 그런데 두 인물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서로 다른 이론과 마주치고, 그로 인해 고민을 해도 작가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작가가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 객관적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하며 모든 이론을 동등하게 기술함으로써 그 이론들은 가치의 평준화를 거쳐 끝내는 무화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우리는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어떤 이론도 절대적일 수 없고 모든 사고 체계가 헛되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르기가 십상이다. 작가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19세기는 과학이 진리이고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구원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과학의 시대였다. 소설에는 이 과학의 세기에 대한 희망과 환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부바르와 페퀴셰>에는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란 무용하고, 불변의 진리도 없다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어느 소설보다 진하게 배어들어 있다. 생의 근원적 쓸쓸함, 그런 생에 대한 씁쓸함이 곳곳에서 묻어나와 번역하는 내내 처연한 심정이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마담 보바리>와 <감정 교육>처럼 당대의 부르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하였다. 대혁명과 19세기 정치, 사회, 경제의 주역인 부르주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고 냉소적이었다. 플로베르에게 부르주아는 “누구든 천박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어느 소설에나 그 계층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담겨 있다.

   소설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인물이 있다면 부바르와 페퀴셰가 아니라 바로 샤비뇰의 부르주아들이다. 그들의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과 사고방식이야말로 작가가 진정으로 조롱하는 대상인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부르주아는 일시적으로 수세에 몰린 듯했다. 소설의 6장은 이 시기가 배경인데 부르주아의 모습이 어느 장에서보다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건, 상황에 따라 재빨리 처신을 바꾸건, 어느 경우에나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작가의 냉정하고 솔직한 시선이 느껴진다.

   플로베르는 일생을 작가로 살았지만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다. 자신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표현을 찾느라고 끊임없이 문장을 고치고 다듬고 다시 쓰면서 언어를 조탁했기 때문이다. 표현에 완벽성을 부여하기 위해 치열하게 언어를 탐구한 결과, 한 편의 소설을 쓰는 데 오륙 년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플로베르는 장인으로서의 작가라는 새로운 작가상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을 언어의 문제로 간주하여 주제보다 문체를 중시하고, 완전한 형식을 통해 절대적인 미를 추구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는 작가이다. 시대와 불화했고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세계를 증오했던 작가에게 글쓰기는 구원이었다.

   그에게 문학이란 범속한 현실과 달리 무한히 자유롭고 빛나는 세계였다. 글쓰기가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평생 그 길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글쓰기는 갈수록 어려워져 마지막 소설에서 절정에 이른 듯하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작가가 1872년부터 준비에 들어갔지만, 쓰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집필을 중단했다가 재개하였으나 죽음으로 인해 끝내지 못한 마지막 소설이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도입부인 1장과 에피소드에 가까운 7장을 제외하면 2장에서 10장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각 장은 두 사람이 어떤 학문을 선택하여 열성적으로 몰두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순환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부바르와 페퀴셰>를 읽다 보면 과연 소설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작가는 실제 사건을 <마담 보바리>로 씀으로써 이미 ‘이야기’ 중심의 전통 소설과 결별한 바 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농사가 실패한 원인을 찾다가 책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알고, 그때부터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당대의 수많은 사상과 학문이 섞임으로써 이야기가 사라지고 대신 책들이 등장하게 된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소설인데, 그래서 플로베르가 이 작품이 성공한다면 “예술의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한지도 모르겠다.

- 김계선(숙명여대 프랑스언어 문화학과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