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문예창작반(문창반)23 시 -- 최성용 목구멍 끝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봇대를 오락가락하는 참새처럼 어쩌다 집을 잃고 25,000V짜리 고압선에 앉아 눈 가에 굵은 자욱을 남겼다.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너의 이름이 튀어나오고 나는 빌려온 목소리로 되뇌이었다. 어둠 속의 어둠 혹은 어둠 밖의 거울에 네 모습이 있음에도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끝내 너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내재율 1호](1985) 2022. 3. 17. 가난한 자의 유희 -- 최성용 기억과 예측이 허락받지 못한 세상은 종이 한 장으로 시들어 가고 우리들의 유희는 강을 건너 빈 손으로 피리를 분다. 바람이 제 몸에 상처를 입혀 하나 둘 나무의 키를 지우고 하나 둘 풀의 뿌리를 지우고 하나 둘 발자욱을 지운다. 지금껏 지워지지 않은 애정이나 순결이 이싸면 마른 입술을 깨물어 붉은 피로 색인을 하여 간직할 일이다. 건너온 강은 뒷전에서 서성이고 땅과 하늘이 몸을 비벼 잠들어 잠들어 돌아설 때 진리는 머리숙인 갈대에게 있는 걸까 우리들 가난한 자의 유희는 사물의 세워진 이정표를 설명하지 못하고 간혹 빗겨구르는 조약돌의 웃음을 홀린 듯 보기도 한다. [내재율 1호](1985) 2022. 3. 17. 선 -- 박상태 한 발 짝 깨금발로 힘껏 뛰어보자 내가 선 곳은 어디냐 선 너머로도 그 뒤로도 갈 수 없는 땅 위에 함부로 그려진 선 왼 발로 서 있기도 오른 발로 버티기도 지난 세월이 너무 힘겨워 그저 흔들리고 있을 뿐 누가 그었을까 두 발로 서야 하는 이곳에 한 발로 흔들리는 그 만큼의 여유밖에 허용치 않는 아량을 모르는 선을 내 발을 꽁꽁 묶어버리고 마는 선 2022. 3. 17. 벌초 -- 이영광 풀을 베다, 문득 고개들면 아득히 흐르는 구름 구름을 밀고가는 바람. 저기 햇살 속으로 인적들 걸어가네 풍화된 살과 피의 율법이 풀잎에 살아있네 살아있네. [내재율 1호](1985) 2022. 3. 17.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