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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20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 · 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 2025. 4. 23.
서정주 -- 귀촉도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43년. . 선문사. 1946. 김소월의 "접동새"가 전래 설화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데 반해 서정주의 이 시는 촉나라의 망제 설화에서 '귀촉도'라는 말을 따오기는 했으나 그 설화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 시는 그 배경이 모호한 대로 님과 영영 이별하고 만 화자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마지막 .. 2025. 4. 12.
김소월-- 접동새 접동접동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오오 불설워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 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참아 못잊어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이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2호. 1923년 3월/ . 1925년. 매문사. 접동새는 두견(이)의 우리말 이름이다. 두견과 소쩍새는 다른 새이지만 중국과 우리 전통 시(가)에서는 구분을 하지 않았다(자연과 거리가 멀어져 이 새도 필자는 잘 모른다. 오늘 아침에 본 잿빛 새가 설마 접동새는 아니겠지?). 두견 혹은 소쩍새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현대시는 서정주의 '귀촉도.. 2025. 4. 11.
노철(81) -- 골목에서 스물네 해 동안 깊어가는 겨울 속에서쪼무래기들이 팽이를 돌린다.채찍의 신념으로 돌린 슬픔이 따라온다.수십 번 벗어버린 신발이265cm의 칫수로 고정되고담화문 붙은 동사무소를 지나조간신문을 읽으며 혁명 같은 소식을 찾는청년에게60,70년대 고향 들에서허수아비를 보던 신기함이 허수아비로 바뀌고서야그리운 가시네 숨결의 약속에도팽이를 돌리듯 채찍이 있다는 싱거운 놀라움이 떨리는 가슴 속에 반짝이는 슬픔이 된다. 2025.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