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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22

김기림 -- 기상도 - 세계의 아침 비눌돋힌해협은배암의 잔등처럼 살아났고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오만한 풍경은 바로 오전 7시의 절정에 가로누웠다. 헐덕이는 들 우에늙은 향수를 뿌리는교당의 녹슬은 종소리.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려무나.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을 오늘도 바래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차장의 신호를 재촉하며 발을 구르는 국제 열차.차창마다'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의 가족들.산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선부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에게 맡기고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2025. 4. 26.
박용철 --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가는 마음일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앞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간다 1930년, [감상]박용철의 시로 알려진 것은 이 시가 그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도 김수철이 이 시의 한두 구절을 차용한 "나도야 간다"라는 노래가 인기를 끈 것과 무관하지 않다. '떠나가는 배'에 빗대어 나도 떠나고자 하지만 정든 것들과, 또 미래에 대한 불안('앞애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2025. 4. 25.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 · 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 2025. 4. 23.
서정주 -- 귀촉도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43년. . 선문사. 1946. 김소월의 "접동새"가 전래 설화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데 반해 서정주의 이 시는 촉나라의 망제 설화에서 '귀촉도'라는 말을 따오기는 했으나 그 설화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 시는 그 배경이 모호한 대로 님과 영영 이별하고 만 화자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마지막 .. 2025.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