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 극지에서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나..
2023.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