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2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 · 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 2025. 4. 23. 김광규 - 바다의 통곡 바다의 통곡 김광규 이리호 호반에서 혹시존 메이너드*를 만나보았나디트로이트와 버팔로를 왕복하는 페리선조타수 존은 갑자기 화염에 휩싸인 배를죽음 무릅쓰고 호반에 안착시켜 승객들모두 구하고 자신은 조타실에서 탈출하지 못했다그의 몸은 백여 년 전에 연기로 사라졌으나그의 혼은 지금도 청동 기념판 속에 살아 있다치욕스럽구나 영혼을 잃고 육신만 남은 무리들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침몰했을 때3백여 승객 물결 사나운 맹골수로에 버려둔 채자기들만 구명정 타고 육지로 도망친 선원 팀승객의 귀중한 목숨보다 선주의 검은 돈을 위하여선박의 평형수와 무게중심을 팔아먹고가라앉는 배 속에 아이들 가두어 죽이고침묵의 장막 뒤로 숨어버린 무리들도저히 인간으로 용납할 수 없어분노와 절망이 온 .. 2024. 9. 27. 김광규 - 빗소리 빗소리 김광규 반가워라 한여름 빗소리손가락 마디만 한 대추나무 잎한 뼘쯤 자라서 반짝이는 감나무 잎어느새 탁구공만큼 커진 밤송이쟁반처럼 넓은 후박나무 잎더위에 지쳐서 떨어져버린능소화 주황색 꽃잎 들을후두둑 다급하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뒤따라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오랫동안 가물었던 논과 밭훅훅 열기를 뿜어대는 도심의 차도와 고층 아파트곳곳을 흠뻑 적시며플라타너스 가로수 통째로 흔들고때로는 돌개바람으로 창문을 부숴버릴 듯 두들기며장엄한 음향 들려주네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이 거센 비바람사이사이에 매미들의 합창꾀꼬리와 지빠귀들 틈틈이 지저귀고천둥소리 북소리처럼 울리며한나절 내내 또는쉬엄쉬엄 하루 종일땅 위의 온갖 나뭇잎들 모조리 씻겨주고섭씨 36도의 더위 시원하.. 2024. 9. 26. 김광규 - 누렁이 누렁이 김광규 두 앞발 가지런히 모으고양쪽 귀 쫑긋 세우고못 보던 누런 토종개 한 마리포장도로 길가에 앉아 있네뒷발로 벌떡 일어서 반갑게맞이할 주인 어디로 갔나날이 어두워도 나타나지 않에혼자서 음식 쓰레기 주워 먹고자동차 지나갈 때마다꼬리 몇 번 흔드는 누렁이길바닥에 내려놓고사라진 주인 돌아오지 않네벌써 며칠째인가 온종일SUV 달려간 쪽 골똘히 바라보며슬픔에 지쳐버린 누렁이맥없이 길가에 엎드려 있는황색 유기견 한 마리 김광규. [오른손이 아픈 날]. 문지. 2016. 72. - 자기를 버린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황색 유기견의 슬픔을 실감나게 그려낸 작품. 개의 슬픔이 배가 되는 것은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2024. 9. 11. 이전 1 2 3 4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