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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어둡기 전에 어둡기 전에                      김광규 걸어 다녀도 시간이 넉넉했던 시절그때를 아무리 그리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값비싼 승용차도 고속전철도 마찬가집니다직업에 상관 없이 출퇴근하는 데한두 시간씩 걸리고 때로는자동차 고치느라고 오후 내내정비센터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합니다시간의 바퀴는 보증수리도 안 되지요주말이면 식구들과 세탁물 찾아오고할인매장에 가서 장 보는 것도 큰일입니다도심에서는 차 세울 곳 찾기 힘들고주차비도 여간 비싸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나 기다리는 시간만 자꾸 길어지고그나마 남은 시간 점점 줄어듭니다퀵보드 타고 가볍게 스쳐가는 아이들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동안 어버이들은잠도 안 자며 맹렬한 속도로 뒤쫓아오는시간의 바퀴 피해보려고 백미러를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속페달 밟아보지.. 2024. 9. 6.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치매환자 돌보기                          김광규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눈을 돌릴 수 있나요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지난날이 사라지나요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여태까지 함께 살아온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구박할 수 있나요뽑아버릴 수 있나요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100-101.  - 어리석을 치, 어리석을 매, .. 2024. 9. 6.
김광규 - 생사 생사           김광규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에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 넣어한꺼번에 살처분한다조류독감 때문이다출입통제선바깥의 냇가에는어디서 날아왔나청둥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며 놀고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명상에 잠겨 있고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111. - 인간의 필요에 의해 수천 마리씩 사육하고, 또 각종 전염병 때문에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현실. 그 현실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는 않다. 2024. 9. 6.
김광규 - 땅거미 내릴 무렵 땅거미 내릴 무렵                            김광규 짙푸른 여름 숲이 깊어갑니다텃새들의 저녁 인사도 뜸해지고골목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때모기들 날아드는 마당 한구석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밀려오는 어둠에 잠깁니다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혼자서 지긋이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땅거미 내릴 무렵마당 한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차츰 환해지는 어둠 속에서한 점 검은 물체로 내가멀어져 갈 때까지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30. -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마당 한구석에 앉아 짙어가는 노년을 성찰하는 시. '환해지는 어둠 속'이라.. 2024.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