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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문예창작반(문창반)

오규희(85) -- 나는 너에게 불을 붙였다

by 길철현 2025. 3. 25.

                                       -- 고 전태일 동지를 생각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어대는 성냥이

제길 왜 이리도 

내 손이 떨릴까

두려움에 짓눌린 가슴으로

그러나 냉정하게 나는 

네 검은 외투에 불을 붙였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사이

그 넓은 시간의 가름 속을 길게 손 내밀어

네 외투에 젖어드는 

잔인한 휘발유에 슬그머니

빨간 불꽃 대어 봤을 뿐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재가 된 네 몸을 딛고 서서

그 거름으로 20년을 축적해 온 내가

네 마지막 외침을 애써 귀 막으며

아직도 네 몸에 성냥불을 

그어대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한 우리가

서로의 이름마저 기억치 못한 우리가

내가 이제 너를 위해

내 옆자리를 마련하고

네 터져 흐르는 피고름으로

내 더러운 눈 씻기우고

다시 떠진 눈으로 보리라

네가 남기고 간 무거운 쇳덩이

가여운 어깨로 지탱하리라

목아지가 짓이겨져도

결국은 당당히 고개 들 수 있을 것

드디어는 저 멀리로 굴려 보낼 수 있을 것

내가 너의 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되기 위해

나는 너에게 불을 붙였다

자, 그리고

열기 식지 않은 네 몸에

내 뺨을 부비게 해 다오

이제는 내가 썩어져

너의 거름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