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전태일 동지를 생각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어대는 성냥이
제길 왜 이리도
내 손이 떨릴까
두려움에 짓눌린 가슴으로
그러나 냉정하게 나는
네 검은 외투에 불을 붙였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사이
그 넓은 시간의 가름 속을 길게 손 내밀어
네 외투에 젖어드는
잔인한 휘발유에 슬그머니
빨간 불꽃 대어 봤을 뿐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재가 된 네 몸을 딛고 서서
그 거름으로 20년을 축적해 온 내가
네 마지막 외침을 애써 귀 막으며
아직도 네 몸에 성냥불을
그어대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한 우리가
서로의 이름마저 기억치 못한 우리가
내가 이제 너를 위해
내 옆자리를 마련하고
네 터져 흐르는 피고름으로
내 더러운 눈 씻기우고
다시 떠진 눈으로 보리라
네가 남기고 간 무거운 쇳덩이
가여운 어깨로 지탱하리라
목아지가 짓이겨져도
결국은 당당히 고개 들 수 있을 것
드디어는 저 멀리로 굴려 보낼 수 있을 것
내가 너의 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되기 위해
나는 너에게 불을 붙였다
자, 그리고
열기 식지 않은 네 몸에
내 뺨을 부비게 해 다오
이제는 내가 썩어져
너의 거름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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