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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문예창작반(문창반)

[내재율 제 3집] 김병호(86) -- 쥐

by 길철현 2024. 12. 12.

 

1.

"오빠! 영석 오빠!"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영석은 눈을 떴다.

미닫이 방문이 스르륵 열리고, 국민학교 5~6학년 쯤 된 계집애가 문밖에 서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귀여운 소녀다.

"희경이가 웬일이니?"

"오빠! 쥐 잡았어. 장롱 밑에서 쥐 집이 하나 나왔어. 빨랑 나와봐."

피곤한 몸을 일으키고 영석은 밖으로 나갔다. 

희경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주인집 막내딸이다. 그녀는 유난히 영석을 잘 따랐다. 영석도 또한 발랄한 그녀가 귀여워 놀이터에도 따라가 주고 가끔 시내로 나가 점심이나 저녁을 사주곤 했었다. 

영석은 부엌문 밖으로 나갔다. 영석의 방은 부엌이 딸린 두 평 남짓한 방이었다. 지붕 틈으로 보이는 겨울 하늘에 빛바랜 태양이 외롭게 떠있었다. 

'늦잠을 잤구나'하고 영석은 생각했다.

영석이 세들어 사는 집에는 세 가구가 지붕을 맞대로 'ㄷ'자 형으로 살고 있었다.

영석은 맥없는 다리를 옮겨 주인집 마루쪽으로 걸어갔다. 니스를 칠한 윤기나는 마루에 주인집 큰딸인 미선이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뭐니?" 영석이 물었다. "새끼 주ㅣ들이야. 불쌍해 죽겠어. 어떡하지, 오빠?"

미선이 얼굴을 다소 찌푸리며 말했다.

영석은 마루로 다가가 걸터 앉았다.

마른 풀들을 얽어 만든 동그란 쥐집 속에, 빠알간, 아직 털이 돋지도 않은, 아니 털이 돋지도 않은, 아니 아직 논을 뜨지도 못한 쥐새끼들이 꼬무락거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오빠. 내다 버릴려니 불쌍하고, 그렇다고 키울 수도 없잖아."

미선이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어디서 나온 거지?"

"장롱을 옮기려고 들어내는데 '툭'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잖아. 보니까 쥐집이었어."

"장롱을 그냥 두고 다시 쥐집을 장롱 뒤에다 두면 되잖아."

"그러면 어미 쥐가 들락거릴 거 아냐?"

"그렇겠군." 영석이 무심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내다 버리는 수밖에." 영석이 말을 이었다.

"불쌍하잖아. 아직 눈도 못 뜨는 어린 놈인데." 미선이 대답했다.

영석은 어떻게 할까 생각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수가 있다." 영석의 얼굴이 밝아졌다.

"뭔데?" 희경과 미선이 동시에 물었다.

"희경아 가게에 가서 소주 한 병 사오렴."

"뭣 할 건데. 술 마실려구?" 희경이 물었다.

"나중에 알게 될 테니까, 빨랑 사와." 영석이 말하며 그의 방으로 들어가 5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들고 나와 희경에게 건네 주었다.

잠시 후 희경이 숨을 할딱거리며, 소주 한 병을 들고 뛰어왔다.

영석은 소주병을 땄다. 그리고 빠알간 생쥐 한 마리를 집어서 병속에 떨어뜨렸다. 뽀글뽀글. 거품을 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직 죽지 않은 듯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비튼다. 영석은 무심하게 그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오빠, 뭐하는 거야." 미선이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보면 모르니. 술병에다 쥐를 집어 넣는 거지."

"뭐 땜에?" 그녀의 말이 독기를 품고 입에서 흘러나왔다.

"옆집 아저씨 드릴려구. 어른들은 보신이 된다고 이런 걸 잘 드시더라."

영석은 아무 생각없이 말을 흘렸다.

한 마리를 더 집어 넣었다. 거품을 내며 가라앉았다. 먼저 가라앉은 쥐은 움직임이 없었다. 벌써 숨을 멈춘 모양이었다. 

"오빠, 그짓 그만둘 수 없어." 미선이 울상이 되어 내뱉었다.

"왜 그러니? " 영석은 무심코 대답하며 다시 한 마리를 집어 넣었다.

다시 한 마리, 또 한 마리.

"오빠 잔인해! 인간도 아니야." 마침내 미선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예쁜 눈에는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미선이 자기방 문을 세차게 닫으며 들어가 버렸다.

영석은 자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미선은 자신에게 욕설을 부으며 울고는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욕설은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고, 그녀의 울음 역시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영석은 마지막 한 마리를 병속에 집어넣었다.

희경이도 슬며시 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곤 그의 방으로 들어가 촛불을 켜고 촛농을 떨어뜨려 병을 완전히 밀봉해서는 책상 밑에다 밀어 넣었다. 책상서랍을 뒤져 담배을 찾아 피워물었다. 깊이 들어마셨다. 거북했다. 다시 내뿜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의식은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향 마을의 공장 옆에는 커다란 과수원이 하나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과수원 속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냇물 가까운 곳에 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에는 털보 문섭 아저씨랑 지석 형 부자가 살고 있었다. 문섭 아저씨는 술을 좋아하셨다. 과수원에 농약이라도 치는 날이면 밥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고 막걸리만 여섯통씩 비우곤 하셨다. 지석 형의 아래에는 원래 동생이 하나 있었다.

 

오똑한 코에 하얀 얼굴을 한 아주 귀여운 녀석이었다.

영석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아마 그 녀석 이름은 문석이리라. 문섭 아저씨는 문석이를 무척 좋아하셨다. 

보통 금방 태어난 아기는 조금은 징그러운데 문석이는 태어날 때부터워낙 귀여웠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저석 형과 영석은 문석일 데리고 가까운 산으로 소풍을 가곤했다. 문석이는 들꽃을 좋아했다. 한아름 따서 안겨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둘은 가까운 산으로 소풍을 갔다. 봄날씬느 따뜻했다. 맷새소리도 이제는 귀에 익숙할 만큼 완연한 봄이었다. 지석 형이 문석일 업고 산에 올랐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정오 무렵의 날씨는 더웠다.

그늘을 찾아 앉아 둘은 점심을 먹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이마의 땀을 씻어주었다.

그들은 말없이 파아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물이 올라 이제 막 연초록의 땟깔을 벗어나 짙어지고 있었다. 

지석 형이 휘파람으로 유행가 한토막을 불러댔다. 맑은 소리가 공기를 타고 저 멀리 아지랭이가 피어오르는 언덕 부근에서 아롱아롱 하늘로 올라갔다. 영석은 신기했다. 휘파람 소리가 공기를 밀면 파란 하늘이 조금은 흔들려야 할텐데 도무지 하늘은 꿈쩍도 않는다.

"어무이"하고 영석이 소리쳐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소리들은 완전히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하늘도 나뭇잎도 풀잎 하나도 도무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뾰족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영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이내 지석 형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의미도 모르는 가사로 된 노래였지만 노래를 부르는 일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지석 형과 영석은 한참을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둘은 노래를 멈췄다. 그리고는 문석이가 없어진 걸 알았다.

둘은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문석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퍼뜩 영석의 머리에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용선동으로 넘어가는 길 옆에는 벼랑이 있었는데, 봄이면 온갖 꽃들이 눈이 시리도록 핀다. 해서, 따뜻한 봄날이면 사내나 계집애나 할 것 없이 그곳에서 모여 놀곤했다. 며칠전에 문석일 데리고 그곳에 갔던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핀 것이다.

"지석 형! 며칠전에 갔었던 용선동 넘어가는 길옆 벼랑 생각 나?" 영석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지석 형도 알아차린 듯 그쪽을 향해 달음질을 쳤다. 영석도 뒤따랐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급히 뛰어오는 바람에 숨이 찼다. 그곳에도 문석인 없었다. 이름모를 꽃들이 여린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을 뿐.

영석이 돌아서려는데 지석 형이 소리를 질렀다.

"영석아! 저기 봐라."

영석은 지석 형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도렸다.

파란 줄이 쳐진 고무신 한 짝이 꽃들 사이에 놓여있었다. 둘은 동시에 쫓기듯 벼랑 끝까지 뛰어갔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빨간 한송이 꽃을 꺾어들고 문석이는 벼랑 중턱 어린 나무들 사이에 걸려있었다. 둘은 한 동안 서있었다. 벼랑 아래로 돌들이 굴러 떨어지고 어린 나무 줄기가 조금씩 휘어지고 있었지만, 둘은 그냥 그대로 서있었다. 어린 나무 뿌리가 문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석 형도 영석도 움직이지 않았다. 잘만하면 내려갈 수도 잇는 곳이었다. 벼랑이라지만 칡넝쿨과 어린 잡목들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떨어지면 묵사발이 난다'는 생각이 영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영석은 지석 형의 얼굴을 돌아다봤다. 그의 눈 역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은 죽음을 방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공포심은 그것보다 큰비중으로 둘의 다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도망치듯 둘은 거의 동시에 줄달음쳐 산을 빙 둘러 내려갔다. 용선동 넘어가는 길 옆 벼랑 아래에 당도 했을 땐 이미 문석이는 개울가 잡풀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머리며 다리에 피를 흘리며 앙증맞은 하얀 손으로 빨간 꽃을 꼭 쥔 채로. 흔들흔들 떨리는 다리로 문석에게로 둘은 다가갔다. 

지석 형이 가슴에 귀를 대고 문석의 입에다 손을 대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잇는 것 같았따. 지석 형이 문석일 업고 읍내 병원으로 달음질쳐 갔지만 문석은 그날밤을 넘기지 못했다.

그날 이후부터 문섭 아저씨는 밥 대신 술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아무도, 물론 아무도 몰랐지만 죽음을 방관했다는 무거운 그림자로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도 그 사건 이후부터였다. 문섭 아저씨는 거의 일 년을 술로 날을 때웠다.  

하지만, 세월은 그의 가슴에 슬픔의 상처를 서서히 지워갔고, 4~5년 이후에는 망각이라는 무섭지만 안전하 ㄴ낱말 속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석 형과 영석의 가슴에 낀 무거운 그림자는 무좀처럼 끈질기게 때로 재발하여 둘을 괴롭히곤 했다.

지석 형은 그날 이후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문섭 아저씨는 쥐를 잘 잡았다. 과수원 자락으로, 달리는 쥐라도 번개같이 측면으로 뛰어가 발길질을 하면 언제나 옆구리를 내질린 쥐가 땅바닥에 툭 떨어지곤 했다. 

꼭 한 번은 문섭 아저씨가 헛발질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쥐를 뒤쫓았다. 그때만큼은 그의 도악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빨랐다. 뜨락으로, 마당으로 몰리던 쥐가 뒤뜰로 달음질쳐 쌓아놓은 보리짚 속으로 도망을 쳤다. 영석은 '이번만은 아저씨도 어쩔 수 없을 걸'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섭 아저씨의 손은 어느 틈에 보리짚 사이 달싹이는 쥐를 쫓았고, 드디어는 잡아내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놈은 사정없이 네 다리를 쭉 뻗고 죽어버렸다. 한데 다시 한번 문섭 아저씨의 손이 보리짚 사이를 더듬었다. 그의 털보숭이 손에 쥐집이 하나 들려나왔다.

그 속에 앙증맞은 빠알간 새끼쥐 여섯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영석에게 심부름을 시켜 소주를 사오게 했다. 그리곤 새끼쥐를 병속에 집어넣어 밀봉해 버렸다.

후에 가끔 새끼쥐가 가라앉은 술병을 든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석은 방바닥에 누워 생각했다. 어제는 무엇을 했나? 퇴원. 그저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그저께도 병실에 누워있었다. 그 전날도. 그 전날도. 또 그 전날도--.

흰 페인트 칠을 한 병실의 천정을 생각하며 영석은 하루하루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보름쯤 전이었다. 영석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며 3층 강의실을 올라가고 있었다. 소설을 쓴다고 달포 전쯤부터 끌적거리다가 도무지 쓰여지질 않아 닷새를 굶었다. 맹랑한 자학이었다. 첫 시간 수업을 빼먹고 잔디밭에 앉아 쥬니퍼 한 병을 몽땅 비워버렸다. 왜 술을 마셨는지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려는 순간 그는 천정이 빙 도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와글거리는 학생들의 비명을 잠시 듣고는 기억이 없었다. 깨어났을 때는 병실 침상에 누워 있었다. 허리를 다쳤는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 이틀은 어머님께서 곁을 지켜주셨지만 그 이후로는 쭉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무표정한 간호원의 얼굴, 옆 침상 환자의 신음소리, 그리고 흰 천정, 또 흰 천정. - - --

서서히 회복되어 갔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 감각을 잃어 버렸을까?'하고 영석은 생각했다.

닷새 후에 시 낭송회가 있다. 하지만 영석의 머리는 공허했다. 아직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허리가 결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내일은 학교엘 가야한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 무더기, 쓰다만 시, 학보사에서 청탁받은 쓰다만 소설, 그것들은 이전보다도 훨씬 먼거리에 놓여있었다. 

쓰다만 시를 집어 읽어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영석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완전히 텅 빈 것 같았다. 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병원 흰 천정에 붙은 시커먼 거미 한 마리가 무의식 속에서 헤엄쳐 올라왔다.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 수록 옆 침상 촨자의 신음소리만 귓전을 흔들었다. 흰 천정, 신음 소리 다시 흰 천정. 

다음 날 아침. 희경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을 땐 8시 30분이었다. 

가방을 챙기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거른 채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기 전 여러 친구들이 반갑다고 악수를 청해올 때 건성으로 대답만 했을 뿐 영석은 웃음 한 번 띠지 않았다. 

1교시 철학 개론 시간,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쓴 교수의 얼굴이 생소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영석은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다 보았다.

나목, 썰렁한 바람이 분다. 풀죽은 햇살, 금잔디, 겨울 하늘, 낱말들을 생각했지만, 일관성을 찾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다.

몇 번 시도 끝에 영석은 완전히 그러한 노력을 포기했다.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강당 지붕, 교회, 도로, 남산, 풍경 저편의 썰렁한 바람, 눈이 옮겨짐에 따라 생각도 바뀌었다. 풍경을 한 바퀴 돌고 난 영석이 눈이 교실 안으로 방향을 바꿔 위를 응시했다. 흰 천정, 교수의 목소리가 옆 침상 환자의 신음소리처럼 안타깝게 귓전을 맴돌았다.

오후에 데모가 있었다. 화염병이 날아가고 최루탄이 터지고 운동장에서 돌을 던지던 종섭이 눈물을 흘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학생 몇이 돌을 깨고 있었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시멘트 바닥에 큰 돌을 내리쳤다. 몇 조각으로 깨졌다. 다시 반복적인 동작.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소한 체구의 여학생 하나가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울고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설움이 복받쳐 영석도 울었겠지만, 그는 아무런 설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영석은 한기를 느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전경들은 연방 최루탄을 쏘아댔다. 그는 하늘을 쳐다봤다. 희뿌연 겨울 하늘,  아니 그것은 희 페인트 칠을 한 천정이었다. 구호소리. 아니었다. 영석의 귀에는 옆 침상 환자의 신음소리만 들렸다. 다만 좀 더 크게. 좀 더 여럿이 토하는 신음소리. 그리고 간호원처럼 제복을 입은 무표정한 전경대원들, 밀폐된 공간의 흰 천정, 옆 침상 환자의 신음소리, 간호원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지금의 하늘, 학생들의 구호, 전경들의 얼굴, ---

영석은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 울었다. 눈물이 끝없이 솟았다.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모두들 흰 천정에 둘러싸여 누워 신음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사정없이 엉덩이에 바늘을 꽂는 무표정한 간호원의 얼굴 아래서---.

 

영석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 열흘이 지나도. 영석은 무감각함조차 느낄 수 없었다. 

1교시 강의가 끝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하늘 위를 제외한 모든 세상을 동화시키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끝도 없이 하늘에선 흰 눈방울이 내려왔다. 하늘 위에 얼마나 많은 눈이 있어야 이만큼 쌓이게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눈을 만들려면 몇 대의 냉장고가 필요할까?

영석은 무심히 이런 생각을 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입김보다 짙게 담배 연기는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의식이 다시 흘렀다. 퍼뜩 영석에게 지석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지석 형은 변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석형은 이전보다 훨씬 매정해졌다. 그 후로 영석은 지석 형과 야외 소풍을 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석 형은 거의 매일 그의 방구석에 처박혀 책을 파고 있었다. 영석이 찾아가도 마루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기껏해야 과수원 울타리를 벗어나 파동 냇가까지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후 지석 형은 대구 시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뒤에 영석이 서울의 R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는 거의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추석이나 구정 때도 지석 형은 고향으로 내려오지도 않거나, 내려왔다 해도 제사만 지내고 아침 차로 다시 올라가 버렸다. 문섭 아저씨 댁으로 오는 지석형의 성적표 석차 난에는 2자가 드물었고 거의 1자 일색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지석 형은 서울의 명문 J대학 의예과로 진학을 했다. 그 다음 다음 해에 영석은 지석 형을 한 번 만났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겨울이었다. 방학을 하고 난 후에 영석은 집에서 낮잠을 자거나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고, 때로는 마을의 형들을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영석은 자라면서 차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나즈막한 산모퉁이에 남향을 하고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마을, 과수원 부근으로는 띄엄띄엄 흩어진 집들, 양편 산 사이에 뚤린 도로변의 논들이 더없이 정답게 느껴졌다.

산책을 하늘 날들이 많았다. 그날도 헤진 외투를 꼭 끼고 털모자를 쓴 영석은 산책을 나섰다.

발길 가는 대로 걷다보니 어느새 용선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들어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았다. 문석이 떨어진 벼랑이다. 다친 부분이 다시 헐어 아파오듯 영석은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길을 올라가 구름을 따라 벼랑으로 올라갔다. 벼랑 위에는 한 송이의 들꽃도 피어있지 않았다.

'겨울이지' 영석은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으스스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문석기 그곳에 없는 것처럼 이젠 그곳에 없었다.

'꽃들도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까?' 그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였다.

진달래 관목들이 뼈다귀만 앙상히 남은 채 세찬 바람에 떨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영석은 지석 형에게 배웠던 노래를 불렀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였다. 바람소리만은 아니었다. 돌아다 보였다. 턱이며 코 밑에 수염이 시커멓게 난 지석 형이 그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겨울 풍경보다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석 형이 영석의 노래에 맞춰 휘파람을 불고 잇었던 것이다. 지석 형은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영석은 아직 중학생이었다. 하지만 영석은 거리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지석 형 언제 내려왔어?:

"어저께." 지석 형은 짧게 대답했다.

"무슨 일로?" 영석이 다시 물었다.

"문석이가 보고 싶어서." 지석 형이 더 없는 슬픔을 자아낼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돌아섰다.

영석은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태연스런 얼굴을 지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석 형은 한참 후에 충혈된 눈을 부비며 영석이 앉은 자리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지석 형은 내내 말이 없었다. 바람소리만 귓전을 때렸다.

영석은 망연자실히 벼랑 아래만 보고 있었다.

지석 형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영석도 따라 불었다.

영석은 휘파람 소리가 하늘 끝까지 닿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불었다. 

자꾸만 휘파람 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석 형이 보고 싶었다. 오후 수업이 있었지만 영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교문을 나섰다. 버스는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창밖의 사람들이 추위에 몸을 움추리며 종종 걸음을 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버스 안에는 스팀이 들어오고 있었다. 따뜻했지만 속이 거북했다. 시골 부엌 아궁이 앞에서 느끼는 따스함과 스팀이나 석유 난로 곁에서 느끼는 따뜻함은 차이가 있었다. 

아궁이 불의 따뜻함은 적어도 역겨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영석은 자각하지 못했다.

버스가 멈췄다.

지하철 역사를 지나 올라가다가 주유소 부근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갔다. 골목에는 사내애들 몇이 입김을 호호 날리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털장갑을 낀 앙증스러운 손들이 눈을 뭉치고, 집어던지고 있었다. 문석이의 앙증스러운 손이 생각났지만 영석은 별반 가책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정말 별실에는 살아 숨쉬는 움직임이 없었다. 외로움에 찌든, 도저히 영혼을 가졌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동일한 멍한 얼굴과 신경이 마비된 듯한 눈망물들만 있었다.

'그러한 병실의 분위기가 내 감각을 마비 시켰을까?' 영석은 다시 한번 병실 생각을 하였다. 

골목을 벗어나자 J대학 의과대학의 철책 두른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J대 의대는 본교와는 떨어져 별도로 지어져 있었다. 철책 속의 금잔디 밭은 벌써 은잔디 밭으로 변해 있었고 향나무며 사철나무의 초록잎들도 점점 은색 잎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정문을 통과해서 영석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커다란 3층 건물이 영석의 눈에 들어왔다. 그 뒤쪽은 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지석 형의 방은 2층이었다. 층계를 올라 실험실에 들어섰을 때 지석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석 형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형은 책상에 손을 얹고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석 형."

형이 뒤돌아 보았다. 지석 형의 눈은 반가움으로 다소 빛났다.

"네가 웬일이냐?"
"형이 보고 싶어 왔우." 영석은 다소 무뚝뚝하게 이야기했다.

"참말이가?" 지석 형은 말투는 어느새 사투리로 변해 있었다.

"그라마 내가 거짓말 하까바, 근데 이거 무슨 냄새고?"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영석은 메케한 냄새가 거슬렸다. 

"쥐 오줌 냄새." 형은 손가락으로 조그마한 새 우리 같은 철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석은 다가서서 철장 속을 들여다 보았다. 잘게 썬 짚들이 깔려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게 쥐가 어딨노?" 영석이 물었다.

영석은 지석 형과 7년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말을 트고 지냈다. 그만큼 친근하기도 했다.

"속을 잘 봐라. 뭐가 있을 끼다." 영석은 짚 속을 바라다 보았다. 그는 옅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잘게 썬 짚 속에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긴 하얀 생쥐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족히 20마리는 됨직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분홍색 (피빛에 가까운) 눈망울 두 개가 나타났다. 몇 번 고개를 좌우로 돌리던 놈이 짚 위로 올라왔다. 놈은 눈보다도 하얀 눈부신 털을 가지고 있었다. 꼬리는 분홍색으로 가늘었다.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형, 출세하셨우. 이런 곳에 들어오구. 나 같은 놈이야 어디 형 아니문 구경이나 한 번 하겠수." 영석이 입을 삐죽이며 지껄였다. 

"출세는 무신 지랄할 놈의 출세냐? 내가 하구한 날 실험실에서 뭘하는지 알마 눈까리 뒤집고 자빠질 기다." 지석 형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무슨 말을 그래 해쌓노?" 영석이 말했다.

"문석이 죽은 후로 의사가 되겠다고, 다시는 살릴 수 있는 사람 안 죽일라꼬 이 곳에 왔지. 한데 여기 앉아서 내가 뭐를 하는지 아나?" 지석 형이 비양거리며 말했다.

"뭐를 하는데?" 영석이 물었다. 순간 지석 형의 눈이 매섭게 철장으로 향했다.

"내가 보여주지---." 지석 형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철장을 조금 열어 손을 집어넣었다.

"동작이 느리면 물리지." 지석 형은 중얼거리며 잽싸게 방금 전에 짚 위로 올라온 놈을 낚아챘다.

"이 놈의 혈당량은 사람의 혈당량과 비슷하지. 우리는 보통 이 놈을 마우스라 부르지 큰 쥐는 랫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말하면서 지석 형은 서랍을 열어 매스 세트를 꺼냈다. 볼펜만한 길이의 막대기에 칼날을 끼우자 매스는 조각도 같아 보였다. 

지석 형은 왼손으로 놈을 꽉 쥐고 오른손의 매스로 놈의 목덜미 부근을 찔렀다. 마우스(생쥐)가 네 발을 버둥거리며 발악을 했으므로 빨간 피가 지석 형의 가운데 튀겨졌다.

마우스의 하얀 솜털도 진홍색 피로 젖고 있었다.

"실험을 한다고 마우스의 피를 뽑지.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많은 피를 얻을 수 없어." 지석 형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진홍색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심한 비린 내를 풍겼다. 마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는지 지석 형의 손아귀에서 바둥거렸다. 지석 형의 손바닥으로도 피가 번지고 있었다. 지석 형의 하얀 가운데 마우스의 피가 튀길 때 영석은 몸서리를 쳤다. 온몸이 짜릿하게 떨려왔다. 역겨움과 함께 어떤 만족감을 영석은 느끼고 있었다.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 나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지석 형은 마우스를 완전히 죽여 쓰레기통으로 쳐박았다. 그리고는 다시 철장으로부터 한 마리를 더 낚아챘다. 그리곤 핀셋을 들었다. 지석 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부닺히면 모든 것이 녹아버릴 듯한 무서운 눈빛으로 지석 형은 마우스를 노려보았다.

지석 형의 떨리는 손이 마우스에게 다가가고, 핀셋 끝은 마우스의 분홍(핏빛을 닮은)색의 눈으로 향했다. 핀셋 끝이 마우스의 눈알을 뽑자, 눈알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ㅎㅎㅎ--- 히히히--- 걀걀걀." 지석 형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형의 방과 실험실을 진동시켰다.

영석은 그 자리에 얼어 붙은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수만 볼트의 전류가 그의 몸을 흐르는 것처럼 영석은 경련하고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과 동시에 예리한 만족감이 덮쳐왔다.

영석은 지석 형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지석 형은 창고같이 생긴 나지막한 건물로 영석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철장이 수십 개가 있었다. 지석 형은 말없이 한 철장으로 다가갔다. 영석도 따라갔다. 그 철장안에는 아직 털이 제대로 돋지도 앟은 빨간 마우스 한 마리가 있었다.

지석 형이 다가가서 건드려도 놈은 뒷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젖 뗀 후 얼마되지 앟은 마우스의 뇌에다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투입시키지. 보통 주사바늘의 앞부분에 더 가는 주사바늘 끝이 달린 형태의 그런 주사 바늘을 뇌에 꽂아. 바이러스가 뇌에 퍼지면 제일 먼저 뒷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나. 그러면 마우스를 꺼내서 머리뼈를 부수고 뇌를 끄집어 내어서 잘게 갈아. 그리고는 원심분리기에 넣어 회전시키면 바이러스는 침전하게 되. 실험실에서 쓰이는 바이러스는 이런 방법으로 얻는 거지." 지석 형은 무표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영석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흰 페인트 칠을 한 천장을, 그리고는 다시 지석 형의 무표정한 얼굴을, 마우스의 신음하는 듯한 빨간 눈빛을, 영석은 다시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흰 천정의 중압감과 무표정한 얼굴의 권태,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신음이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문 밖으로 나왔을 때 날씨는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눈은 그쳤다. 지겹도록 내리던 눈은 그쳐 있었다.

영석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석 형 역시 침울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곧 미국으로 떠날기다." 지석 형은 귀찮다는 듯 내뱉았다.

"00 그룹 회장 딸과 다음달에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곤 곧장 떠날기다."

형의 목소리가 무겁게 땅바닥에 깔렸다.

"미스 문은 어떻게 하고?" 영석이 물었다.

"술 묵으면서 이야기 하자. 오늘 내가 한 잔 사께."

지석 형은 도로를 건너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섰다. 50미터 쯤 걸어가자 술집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고향집." 간판 이름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흔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계산대에서 졸고 있었다.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아주머니! 저 왔심더." 지석 형이 소리쳤다.

"아이쿠! 왔어에." 여주인은 감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네 병하고 노가리 있는 대로 꾸버 주이소." 지석 형이 주문을 했다.

"네, 네, 알았어예." 여주인이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얘, 얘, 기선아 손님왔다. 어서 일라그라." 주방에서 여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 소주와 노가리 그리고 고추장이 날라져 왔다. 둘은 한 잔 씩 들이켰다. 안주에는 손을 대지도 않고 다시 한 잔 씩을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소주가 영석의 몸을 짜르르 흔들었다. 다시 한 반, 다시---. 취기가 점점 더해지고, 온 몸이 더워짐을 영석은 느꼈다.

벌써 소주 두 병이 비워졌다. 노가리의 살점을 뜯어 고추장을 찍던 지석 형이 입을 열었다.

"서울 가가 출세했다는 지석이는 맨날 하는 짓이 고모양 고꼬라지라. 생주 눈알이나 뽑고, 대가리를 빠개가 골이나 빼내고, 연구는 무신 나발의 연구고,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한다고, 지랄 옘병하고 자빠졌네. 매일 쥐새끼나 죽이는 게 연구는 무신 놈의 연구고---."

지석 형의 넋두리는 계속 되었다. 소주 네 병이 바닥이 났다. 다시 두 병이 날라져 왔다. 한 병을 비우고 나서 영석이 물었다.

"미스 문은 어떻게 됐어?"

미스 문은 J대학 부속 병원 간호원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래로 동생을 둘이나 데리고 있는. 

"처음 미스 문을 여관으로 데리구 가던 날, 나는 설마 지가 처녀겠나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침에 일나보이 미스 문은 없고 씨트에 빨간 핏자욱만 안 있나. 흐흐흐 씨입할." 지석 형은 울고 있었다.

"그란데 그걸 보고 있으니까 생쥐 생각이 나데, 맨말 맨날 생쥐 피 빼고 그것도 모자라가꼬 미스 문같이 착한 처녀 피도 빼고---. 나는 다시 태어나마 흡혈박쥐로 태어날 끼다. ㅎㅎㅎ."

지석 형은 눈물을 흘리고 잇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석이가 죽고 나는 그 눔아 생각밖에 안 했다. 그래서 의대엘 들어왔제. 그라고 쫌 더 배우고 싶어가 유학도 가고 싶었다. 그란데 마침 부잣집 딸래미 데리구 가라꼬 중매가 안 들어왔나. 배우고 싶었데이, 보다 나은 의술 말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 미스 문을 차뿌릿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걸 이자뿌라 카고 돌아섰제. 그란데 며칠 전에 내한테 와가꼬 아를 떼뿌맀다고 모질게 말하드만, 으흐흐흐---."

지석 형의 말을 듣는 순간 영석은 술이 번쩍 깨는 것을 느꼈다. 감각은 완전히 되돌아왔다. 왜 감각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영석은 그 집에서 2년간 자취를 하고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와도 정이 듬뿍 들었고, 희경이도 영석을 친오빠처럼 따랐다. 미선은 여대에 다니는 여대생이었다. 한집에 2년을 살다보니 같이 외출하는 일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저씨와 아줌마도 영석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영석과 미선의 사이를 나무라지 않고 좋게 받아들였다. 사실 영석도 이름난 R대학 영문과생이라는 간판을 가진 데다, 날아오는 성적표를 주인집의 아줌마가 가끔 보시기 때문에 더욱 영석을 믿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미선은 영석에게 육체적 접촉을 요구했던 것이다. 영석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선이 집에 사는 처지다 보니 확실하게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되기 전에는 피하고 싶었다. 엉뚱하게 일을 저절렀다가 미선이가 애라도 가지게 되면 생길 복잡한 문제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한집에 사는 처지에.

미선은 컴컴한 골목에서, 어두운 공원 벤치에서, 여관을 지날 때면 곁눈질을 해가면서 집요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영석은 시종일관 그런 미선의 몸짓을 모르는 체 했다. 미선이 영석에게서 어떤 움직임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영석의 마음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불안해 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서 확답을 받고 싶다는 그런 눈치였다. 사실 카니발이나 동문 야유회닌 이런 모임마다 미선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미팅에도 나가고 헌팅을 하기도 했다. 영석은 미선이 당연히 그런 것쯤은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다. '여자는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한다는 말이 지금에 와서 내게 던져질 줄이야,' 영석은 생각하며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집요하게 요구해도 영석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기 몇 달 전부터 영석은 그런 미선이 귀찮아 될 수 있는 대로 미선과 마주치기를 피했다. '그런 나의 자세가 그녀에게는 어떤 확신을 주었나 보다.' 영석은 생각하면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였다. 지석 형은 아직 울고 있었다. 

미선이 집을 나가서 이틀 째,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날도 영석은 학보사에서 청탁받은 소설을 쓰고 있었다. 다음 날까지 써주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애꿎은 담배만 조지고 있었다. 케케한 공기 속에서 미선의 가출에 대한 잡념 때문에 도무지 언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후에 경찰에까지 연락을 한 아저씨가 안절부절못하며, 급기야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영석의 방에 쳐들어와 물었다. 그런 아저씨를 보고 원고지만 구기면서 죽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버스에 올랐다. 스팀 때문에 속이 역겨웠다. 종로6가쯤에 이르렀을 때 영석은 스팀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한기가 영석의 몸을 덮쳤다. '겨울은 여성의 계절인가 보다'하고 영석은 생각했다. 거리에는 온통 갖가지 색의 고급 코트를 차려입은 여성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영석은 무작정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반대쪽으로 걷다가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런 무의미한 행동이 재미있었다. 한 시간 쯤 그렇게 쏘다니던 영석은 제풀에 기가 좀 꺾였다. 다리가 아파서 ㅇㅇ산부인과 앞 지하도 부근에서 쉬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영석 앞을 지나갔다. 아름다워 보였다. 한기가 몸에 스몄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으니까 몸이 오싹했다. 일어섰다. 돌아서서 걸어가려 할 때 ㅇㅇ산부인과 문밖 계단으로 익숙한 운동화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분홍 운동화. 고개를 들었다. 미선이었다. 재빨리 영석은 지하도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방금 본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하도 계단에 주저 앉았다. 믿을 수 없었다. ㅇㅇ산부인과로 뛰어 들어갔다.

 

지석 형은 아직 울고 있었다.

영석은 왜 그날 잔디 밭에서 술을 마셨는지, 왜 감각을 잃었는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지석 형이 고개를 쳐들었다. 매서운 눈빛이 영석의 안면에 박혔다. 

"꽝." 지석 형이 소줏잔을 탁자에 내리쳤다. 소줏잔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지석 형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번져나왔다.

놀라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영석은 지석 형을 부축해 술집을 나왔다.

지석 형은 어두운 골목에서 그때 것 마신 오물들을 토해냈다.

영석은 지석을 부축해 골목을 빠져 나왔다.

도로에는 듬성듬성 차가 달리고 있었을 뿐 사람들은 없었다. 도로까지 나오자 지석 형은 멈춰 섰다.

발이 빠지도록 쌓인 눈 위에 형의 선홍색 피가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문석아이. 나는 니같은 놈을 벌써 두 번 죽여뿌리따. 햇살도 한 번 못 본 내 새끼를 죽여뿌리따이."

지석 형은 여지껏 울고 있었다.

형은 혀가 꼬부라져 중얼거리고 있었다.

"형! 피가 많이 나는데. 우선 어데 가서 붕대라도 매야제." 영석이 말했다.

"나도라. 가만 나도라." 지석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이 부시도록 흰 눈 위에 빨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니 그는 그의 피를 뽑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마우스의 털처럼 흰눈에 지석 형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영석도 눈이 아려왔다.

 

영석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누웠다. 머리가 아프고 관절 마디마디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셨다.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아침이었다.

머리맡에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물을 마셨다.

갈증은 가셨지만 정신은 맑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뜨거웠다.

관절의 아픔도 여전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다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미선은 마우스로 변해 있었다.

영석은 바둥거리는 마우스를 꼭잡고 목을 땄다.

피가 영석의 하얀 까운으로 튀겨 나왔다.

피범벅이 된 마우스 아니 미선이 바둥거리고 있었다. 곧 숨이 끊어질 듯한 미선의 얼굴은 어느 새 문석의 얼굴로 바뀌어졌다. 그리고는 숨이 넘어갔다. 영석이 까운데 묻은 피를 닦는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아래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잽싸게 책상 아래 넣어둔 소주병을 꺼냈다. 새끼쥐들이 아직 바둥거리고 있었다. 빨간 다리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영석은 놀라 병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병속에 있던 새끼쥐들이 만번에 몇 천 마리로 불어나 바둥거리며 영석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영석은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버둥거렸다. 팔다리를 휘저었다.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물체가 영석의 손을 잡고 앉아있었다.

시야가 밝아졌다. 미선이었다.

"오빠 꿈꿨어?" 미선이 물었다.

"음. 아주 무서운 꿈이었다." 영석이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미선이 너 애기 가졌니?" 영석이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응--. 오빠도 알고 있었구나." 미선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의외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야?" 영석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 미선이 영석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말했다.

"낳을 거니?"

"아빠도 없는 애를?" 미선이 반문했다.

"내가 되어주면 되지." 영석은 말하면서 천정을 보았다.

흰 페인트 칠이 된 천정은 아니었다. 모서리에 희경이가 미술 시간에 그렸다는 어린 왕자가 걸려 있었다.

미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간호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웃고 있었다. 엷게---.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미선의 숨소리만 들렸다.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희미해져가는 천정에 문석이는 앙증스러운 손으로 빨간 꽃을 쥐고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