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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문예창작반(문창반)

[내재율 제3집] 김은정(86) -- 한여름의 신기루

by 길철현 2024. 12. 9.

8월은 정말이지 더울 권리조차도 없이 무덥다. 극지방에서 가장 큰 빙산 하나쯤 서울 한복판에 가져다 놓더라도 그 기세는 꿈쩍도 않을 꺼다.

 

어제 오후에는 전화세를 내러 근처 은행에 가서 2시간 가량 에어콘 덕에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보냈다. 그러나 어찌나 눈치가 보이던지. 오늘은 방법을 바꾸었다. 지하는 시원할 테지. 몇 권의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역으로 가는 도중 정부의 정부의 눈 가리고 아웅식의 도로 정비와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채 뿌리도 못 내리고 말라가는 이름 모를 꽃들이 나를 더욱 덥게 만들고 아시아 경기 후 삭막해 질 경기장 주변 생각이 더위에 대한 짜증을 부채질 한다.

 

선애역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였다. 무조건 표를 사서 올라 탔다. 지하철 2호선. 어떤 머저리 같은 사람이 비싼 돈 뿌리며 수십만이 모여 후줄근한 모해수욕장을 찾는지. 단돈 200원이면 호젓하게 독서에도 몰두하면서 더위조차 털어버릴 수 있는데.

 

시간이 어정해서인지 여기저기 빈자리 투성이었다. 한쪽 귀퉁이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았다. 웬지 불안해서 다시 일어났다가 앉았다. 이제야 편안해졌다. 나도 모르게 자신이 한심해졌다. 앞 차창에 비친 나는 폼재고 앉아 독서와 피서, 일석이조라고 혼자 흐뭇해하고 있었다. 내 자신의 비하는 그만두자. 

 

까뮈의 "이방인"을 폈다. 자기 자신의 행봉에 책임지지 못하는 주인공 뫼르소.

 

맞은 편 자리의 주인이 바뀌었다. 새로운 주인은 어떤 여성이라도 호감이 갈만한 호남아였다. 평소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나에게 그는 희랍 신화의 미소년 나르시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뫼르소가 더위에 지쳐 그의 어머니 장례식 날조차 슬픈 기색을 보이지 못했고, 급기야는 해변에서 살인을 하고 만다. 다만 이글거리는 때양 때문에.

 

퍼뜩 어떤 계시랄까. 뭐 그런 것에 의하여 나는 계속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사실은 누군가의 계속된 응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여남은 사람이 앉아서 신문을 읽거나,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명상인지 졸음과의 투쟁을 하거나, 그리고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거나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피로해진 눈을 쉬게한 후 책을 읽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번에는 예고없이 고개를 들었다. 범인을 찾았다. 바로 나와 마주 앉은 사람이다.

 

나를 계속 보고 있었나? 호박 감상이라도.

 

문득 보충 수업이라고 땀을 한 양동이씩 쏟으며 학교에 가는 동생 혜옥이 생각났다. 어젯밤 혜옥이는 귀찮다는 나를 붙들고 자기가 대학 입학하면 근사한 사람 소개시켜 주어야 한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것이다. 얼굴은 이러이러하고 성격은 저러저러한 마치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같은 사람을 꼬집어 냈다. '꼭 이런 사람이어야 해!'하고 마지막 못을 박는 순간 나는 웃어 버렸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대학 첫 여름 방학을 구들장 업고 이리저리 뒹굴까? 나는 순간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일축해 버렸다.

 

약간 들어가 결코 서둘지 않을 듯한, 또 성실해 보이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맞은 편 사람을 재빨리 보았다. 약80점.

 

빚어놓은 듯이 적당히 솟은 콧날, 꽉 다문 입술이 결코 차 보이면 안 되는데. 한 85점.

 

그는 출입구 상단에 붙은 수도권 전철 노선을 훑어보고 있다. 스포츠 형의 머리와 비 온 뒤의 풀잎처럼 시원하고 그의 넓은 어깨는 운동선수같다. 이런! 내가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나.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힌다.

 

나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하고 아무도 모르게 저편 어두운 창에 나를 비추어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터널이 양편으로 흩어지고 이따금 눈꼽만한 보안등이 형체없이 부서지고 있다. 입으로 훅- 불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들어올렸다. 항상 얼굴 전면에 퍼져있는 지저분한 점과 주근깨, 그리고 유별나게 코와 턱 주위에 몇 개 심술 여드름이 나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거울을 외면케 했었다. 그러나 거울만큼 정직하지 못한 어두운 유리였기에 오늘만큼은 그 심술 여드름조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어깨까지 드리운 머리를 양쪽으로 얌전하게 빗어 핀을 꽂은 채. 다시 책을 읽었다. 역시 "이방인"을. 맞은 편에서 자꾸 쳐다본다. 한동안 쭈욱. 때문에 뫼르소의 재판 광경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눈치를 못 채는 줄 아나보다. 사내가 떳떳하지 못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크니까 분명 키도 클 테지. 열차가 신촌 역에 멈추었다. 여기서 내리겠지 했는데 몇 사람이 내리고 또 몇 개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동안 그는 그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인지 알 수는 없었다.

 

열차는 신촌을 지나 이대 입구를 향해 그 무거운 몸뚱이를 치닫고 있다. 을지로나 동대문 쯤이겠지. 나야 순환선을 탄 이유가 뭔데! 냉방 잘된 2호선 안에서는 3시간 정도 사람 잡아먹을 더위도 한풀 꺾일 테니까. 

 

뫼르소도 이제는 사형 선고를 받은지 오래다. 이제 서너 장 후면 뫼르소도 내 시야에서 사라져 기억소자로 기록되겠지. 

 

이미 을지로4가. 그는 그대로다. 다은인가? 이제는 읽던 책을 무릎에 놓았다.

 

성수역.

 

3 정거장만 지나면. 때는 6시 40분.

 

나는 오늘의 피서를 끝내야 한다. 퇴근 시간이라 그 몹쓸 더위로 반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성내역에서 나와 함께 내릴 사람도 서넛 끼어 있을 꺼다. 그 미소년은 사람들의 넙적다리에 가려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내리려고 문쪽으로 갔다. 바로 그의 옆이다. 아직 내리지 않고 아무말도 않는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아직 닫혀있는 문을 향했다. 누군가 벌떡 일어섰다.

 

누굴까. 식은 땀이 등뒤로 흘렀다. 아마 함께 내릴려나 보다.

 

자, 문이 열리고 나는 내렸다. 몇 권의 책을 가슴으로 끌어 안고는 오른쪽 바지주머니를 뒤졌다. 없었다. 나는 피가 이마로 한꺼번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다시 뒤져 보았다. 아! 있었다. 승차권은 왼쪽주머니에 있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빨리 나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왜냐하면 검게 뻗힌 아스팔트가 오후의 열기를 한꺼번에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바쁜 사람들에 묻혀서 집으로 향했다.

 

그의 시원한 음성이 내 등뒤로 쏟아졌다.

 

"이것봐요. 아주 훌륭한 피서법이로군요. 아주 훌륭해요."

 

"……"

 

"내일도 피서를 함께……"

 

그의 음성은 계속해서 내 뒤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후의 자투리 열풍이 빚어낸 신기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