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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콘래드아프리카제국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전체주의의 기원 2. 이진우・ 박미애. 한길사 (1973) [1951] 11

by 길철현 2025. 2. 14.

[감상] 

 

이 책 또한 논문 작업에 필요해서 집어든 책이다. 어떤 평론가가 콘래드의 [진보의 전초기지]에 나오는 두 인물, 카이어츠와 칼리에를 '폭민의 일종'으로 본 내용이 있었고, 그게 논문을 쓰는데 도움이 될 듯했기 때문이다(아렌트 자신은 [어둠의 심연]에 나오는 커츠를 폭민과 연결시키고 있다). 책이 워낙 방대하여 일부만 읽을까하다가, 3부로 된 이 책 중 2부가 제국주의 편이라, 논문과의 관련성이 더욱 커 보였고, 그래서 과감하게? 처음부터 읽어나갔는데, 40일 정도만에(18년 12월 17일에 시작) 읽고, 정리하는 걸 마쳤고(읽고 난 뒤에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정리를 하는 악습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듯),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감상을 적고 있다. (중간중간에 따분하고 다소 난해하고, 세부적인 사항의 나열 등으로 인내심이 필요한 때가 많았는데, 또 중간에는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멍해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나간 부분도 상당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방대한 저작을 영어로 읽지 못하고 한글 번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 읽어냈다는 것이 뿌듯하다. 영어 실력의 부족이 뼈저리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그 때문에 나치의 집권과 함께 프랑스로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고, 몇 년 동안은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긴 했어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살을 당해야만 했던 현실, 또 스탈린 치하의 볼셰비즘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현실, 즉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현대의 전체주의 앞에서 그녀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으로 산다는 것' '인간의 광기'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녀의 분석이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반유대주의(인종주의), 제국주의 등이 현대의 전체주의와 한 줄로 꿰어지고, 그것은 일반 대중들의 '잉여감' '소외감' 등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된 논지라고 할 수 있다. 결말 부분에 쓴 그녀의 글은 시적인 감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절대악이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고,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현상을 실제로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 인도네시아의 대학살,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각종 분쟁 등에서 보아 왔다(그녀의 개념 정의에 꼭 맞는 것은 아니겠으나). 

 

우리는 분단 국가로서 늘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살아 왔지만, 지난 65년 간 운좋게도 전쟁을 겪지 않았고, 독재 정권 아래서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그래도 경제적 발전과 함께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은 상황에 무감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미하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1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 방대한 저작을 공들여 번역한 이진우, 박미애 두 분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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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짤막하게 글을 써보려 하다가, 현대의 전체주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볼세비즘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을 정리해 둔 글을 다시 읽고 그 감상도 보게 되었다. 인간의 광기와 어리석음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그것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는 요원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한나 아렌트가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절대악'에 대한 부분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섬뜩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 신앙은 이제까지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전체주의 정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악이 된다. 절대악은 이기심,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이나 비겁함 같은 사악한 동기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참을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죽음의 공장이나 망각의 구멍 속에 있는 희생자들이 사형 집행인들의 눈에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 최신종 범죄자들은 인간에게 모두 죄가 있다는 의식 하에 우리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다. (2권.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