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스톤과 그의 아내가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 자서전 형식으로 만든 책을 번역한 것. 초역인 데다가 수정도 안 한 것이라 거칠고 번역을 제대로 못한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1999년.]
*1873년 6월 -- 1881년 12월
1.런던, 1873년 6월
테오에게
테오야, 정말이지, 너를 이곳에 데려와서 내 하숙집을 보여주고 싶구나. 지금 나는 내가 언제나 꿈꾸어 왔던 그런 방에 머물고 있다. 천장도 비스듬하지 않고, 녹색 테두리를 두른 푸른 벽지 따위는 없는. 이 집 가족들은 매우 유쾌하다. 그들은 어린 사내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한단다.
나는 전체적으로 만족하고 있다. 산보도 많이 하는데,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조용하고 쾌적하다. 이 곳을 발견한 게 내겐 정말 큰 행운이었다.
여기서는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만 일하면 되므로, 헤이그에 있을 때만큼 바쁘진 않다. 그리고 토요일엔 네 시에 문을 닫는다. 언젠가 토요일엔 영국인 두 명과 템즈 강에 보트를 타러 갔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이 곳 상회가 헤이그 상회보다 이윤을 많이 남기지는 못하고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와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나중에 그림 판매가 특히 중요성을 띠게 되면 나도 얼마간 도움이 되겠지. 최근에 우리는 그림과 드로잉을 많이 들여왔고, 팔기도 많이 팔았어.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어. 더욱 더 지속적이고 확고한 것이 되어야 해. 내 생각에는 영국에서 해야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해. 물론 첫 번 째로 필요한 것은 좋은 그림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일 거야.
나는 잘 해 나가고 있어. 런던과 영국 생활 방식, 영국 사람들을 연구하는 건 나한테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따라서 난 자연과 미술과 시를 갖춘 셈이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무엇이 충분하겠니?
처음엔 영국 미술이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어. 친숙해 지는데 시간이 걸리나 봐. 그러나 뛰어난 화가들이 몇몇 있긴 하지. 누구보다도 ‘위그노’를 그린 밀레(Millais)를 꼽을 수 있겠지. 그의 작품들은 아름다워. 그리고는 보그턴을 들 수 있고, 나이든 축에서는 삼십 년 전쯤에 살았던 풍경화가 컨스터블--그는 훌륭해, 그의 작품은 디아즈와 도비니를 떠올리게 해--특히 아름다운 여성들의 초상화를 즐겨 그린 레널즈와 게인즈버로도 있고, 물론 터너도 빼놓을 수 없지.
너도 미술에 흠뻑 빠진 것 같구나. 테오야, 그건 정말 좋은 일이다. 네가 밀레, 자크, 샤이에, 프란스 할즈를 좋아하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마우베 형(***)이 말한 대로 ‘그런 게 진짜거든.’ 그래, 밀레가 그린 ‘만종’, 그게 바로 그림이야.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고, 그게 바로 시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찬미해야 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히 찬미할 줄을 몰라.
반 볼튼이 쓴 미술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의 말에 그다지 동의 할 수가 없었어. 너무 현학적이었거든. 버거는 더 단순하지만 그가 말하는 건 뭐든지 사실이야.
지난 일요일엔 사장님인 오바크 씨와 박스힐이란 곳으로 갔어. 런던에서 마차로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높은 구릉으로 일부는 백악 빛인데, 회양목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키 큰 오크나무 숲이 있었어.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키 큰 나무와 관목들이 들어선 멋진 공원들. 그렇지만 나는 홀란드와 특히 헤이그, 브라반트를 잊지 않아. 헤이그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나 즐거웠던지! 나는 매일같이 리즈위크 로를 거닐던 때를 떠올리곤 해. 우리는 풍차간에서 비 온 뒤에 우유를 마셨지. 바이센브루크가 그린 그 풍차간 그림을 보내주마. 그 사람 별명이 “즐거운 바이스”지 아마. 리즈위크 로의 기억은 아마도 나에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야.
세자르 드 코크가 그렇게 마음에 든다니 반갑구나. 그는 우리의 소중한 브라반트를 친밀히 이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화가 중의 한 명이지. 작년에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림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쌓도록 최선을 다해라. 가능한 한 자주 미술관에 가고. 나이든 화가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기회가 닿거든 미술책을, 특히 미술 잡지 ‘Gazette des Beaux-Arts'를 읽거라.
산보도 될 수 있으면 많이 하거라. 또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라. 그것이야말로 미술을 더 많이 이해하는 진정한 길이니까. 화가들은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보도록 가르친다.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정원을 가꾸느라 매우 바쁘다. 조그만 정원을 양귀비, 스위트피, 물푸레 따위로 가득 채웠다. 잘 자랄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 얼마 전에 드로잉에 손을 댔다가 그만 두었다. 아마도 언젠가는, 그게 언제지는 알 수 없어도 다시 손을 대겠지. 요즈음엔 책을 많이 읽는다. 네가 미실레를 읽고, 또 그를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다니 기쁘구나. 그의 책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사랑에 더 많은 것이 담겨있음을 가르쳐 준다.
「사랑」은 내게는 복음서일 뿐 아니라 하나의 계시였다. ‘늙은 여자는 없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늙은 여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한 여자는 늙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자가 남자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존재라는 것, 적어도 단지 피상적으로밖에는. 그래, 나도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해. 그리고, 남자와 아내는 하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 조각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 난 그것도 믿는다.
내가 준 돈으로는 알폰세 카의 「내 정원으로의 여행」을 사거라. 꼭 그래야 된다. 가을이 어느새 다가와 자연은 더욱 심각하게,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화랑은 이제 준비가 다 끝나 아름답다. 우리는 멋진 그림을 몇 점 가져다 놓았다. 쥘 뒤프레, 미셀, 도비니, 마리, 이즈라엘의 그림 말이다. 사월에는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아리 셰퍼의 ‘분수 가의 마가렛’이라는 작품을 아니? 그 소녀보다 순수한 존재가 또 있을까? ***
삶이 너무 쉽다고 후회하지는 마라. 내 삶도 다소 쉬운 편이다. 내 생각에는 삶은 꽤 긴 것이라 다른 어떤 것이 너를 휘감아, 네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끌어 갈 때가 곧 당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낸 시가 담긴 작은 책에서 나는 하이네의 ‘고요한 바다’를 베꼈다. 얼마 전에 내가 본 티 마리의 그림은 그 시를 상기시켰다. 층계진 박공과 높은 현관 계단, 잿빛 지붕, 흰색 혹은 노란색 문, 창틀, 배내기 등이 두드러지는 적갈색 집들이 열 지어 늘어선 오래된 홀란드의 마을, 배들이 떠있는 운하, 커다란 흰색 도개교, 그 밑을 지나는 너벅선에는 한 남자가 키를 잡고 운전하고. 어디든지 삶이 넘쳐 흘렀다. 손수레를 끌고가는 짐꾼, 다리의 난간에 기대서 물을 들여다보는 남자, 검은 옷에다 흰 보넷을 쓴 여인.
너에게 작은 드로잉을 보낸다. 지난 일요일, 그러니까 여주인의 어린 딸이 죽은 날 그린 것이다. 오크 나무와 가시금작화가 있는 넓은 초원 스트리텀 커먼의 정경이다. 너도 보다시피, 나는 이것을 에드먼드 로시의 시집 표제 페이지에다 스케치를 했다. 이 시집에는 무겁고 슬프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시들이 몇 편 있다. 너에게 베껴 주도록 하마.
테오야, ‘뭐라고 말해야 할까?’ C. M. 반 고흐 삼촌(?)과 터스티그 씨가 이 곳에 와 머물다가 지난 토요일에 다시 떠났다. 내 의견으로는 두 분이 아무 상관도 없는 ‘수정궁’과 또 다른 곳을 너무 자주 드나든 듯 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한 번 방문하는 것도 좋은 일이었을 텐데.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현재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길 기대하고 믿는다. 두고 보자. 시간이 지나야만 하겠지.
램즈게이트, 1876년 4월
성(聖) 금요일에 집 떠나던 때를 언제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우리는 Hoeve의 교회로 가 성찬을 받았다. 아버지의 설교 주제는 “일어나라. 이제 길 떠날 때다”였다. 오후에 우리는 정말로 일어났다. 차창으로 아버지와 어린 동생이 길에 서서 내가 탄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홀란드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작은 잿빛 교회 첨탑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하리치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서 새벽녘에 검은 들판과 어미 양과 새끼 양이 있는 푸른 목장을 보았는데 참 아름다웠다. 여기 저기 가시나무 숲과, 가지는 어둡고 몸통이 우중충한 이끼로 뒤덮인 몇 그루의 오크나무. 아직도 별이 몇 개 떠있는 흐릿하게 빛나는 푸른 하늘, 지평선의 잿빛 구름층. 해돋이 직전에는 종달새 소리도 들었다.
런던에 도착. 램즈게이트 행 기차는 두 시간 후에 떠났다. 기차로 약 네 시간 반 거리다. 언덕 기슭에는 풀이 듬성듬성 나있고, 꼭대기에는 오크나무 숲이 있는 아름다운 여행길로 고향의 모래 언덕을 상기시켰다. 캔터베리도 지났는데, 중세의 건물들로 가득찬 도시였다. 특히 아름드리 느릅나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당이 기억에 남는다. 그것을 그린 그림을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램즈게이트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차창 밖을 내다보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지.
한 시에 스토크스 씨 댁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원래 그런지 집은 광장에 있다(주위의 집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 광장 복판에는 커다란 풀밭이 있는데, 철책으로 못 들어가게 해놓고, 또 라일락 숲이 빙 둘러싸고 있다. 여가 시간에는 소년들이 여기서 논다.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도 같은 광장에 있다.
열 살부터 열네 살까지 스물네 명의 소년들이 있으니까 학교는 크지 않은 셈이다. 식사하는 곳은 바다와 면해 있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산책을 했다. 바닷가의 집들은 보통 황석(黃石)으로 단순한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고, 뜰에는 삼목과 다른 어두운 빛깔의 상록수로 가득하다. 또 배가 가득한 항구도 있다. 배 주위를 돌로 된 방파제가 둘러싸고 있어 그 위를 걸을 수도 있다.
어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저녁에 우리는 아이들과 교회에 갔다. 아이들은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어 여섯 시에 일어난다. 애들의 방은 재미있는 곳이다. 더럽기 짝이 없는 마룻바닥에는 여섯 개의 세면기가 놓여 있는 데 애들은 이것으로 몸을 씻는다. 그리고 세면대 위의 깨어진 유리창으로 침침한 불빛이 흘러 들어오고. 상당히 우울한 광경이다. 나말고 열일곱 된 보조 교사가 한 명 더 있다. 그와 네 명의 소년과 나는 근처 집에서 잔다. 내 몫으로 주어진 작은 방에는 벽에다 복제화라도 몇 장 걸어야 겠다.
우리는 자주 바닷가로 간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는 걸 도와주었다. Zundert의 뜰에서 너하고 같이 모래성을 쌓곤 했었지. 아이들에게 나는 초급 불어를 가르친다. 한 아이는 독일어와 계산 같은 다른 것도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학과를 듣고 받아쓰기를 듣는다. 현재로서는 어렵지 않다. 물론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그들을 돌봐줘야 한다. 토요일 밤에는 여섯 명의 어린 신사들이 목욕하는 걸 도왔다. 또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애쓴다. “넓고 넓은 세상” 같은 아이들 수준에 맞는 책이 내한테 몇 권 있다.
여기서 보내는 날들은 정말로 매우 행복하지만, 그건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행복이고 고요이다. 인간은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한 순간 그는 만사가 순조롭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또 만족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네 생일이구나. 뭐라고 축하해야 할지.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해가 갈수록 더 커지기를. 우리 두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나는 너무도 기쁘다. 어린 시절의 추억뿐만 아니라, 내가 엊그제까지 일했던 바로 그 상회에서 네가 일하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장소를 너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연과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최근에 본 폭풍우에 대해 이야기 했었니? 바다는 특히 해변 근처가 누랬고, 수평선에는 빛이 한 줄기 띠를 이루고, 그 위에는 엄청난 잿빛 먹구름. 그 먹구름으로부터 비가 비스듬히 억수로 퍼붓는 광경이라니. 그리고 멀리 보이는 마을은 Albrecht Durer가 에칭하곤 했던 마을들 중의 하나, 작은 탑, 방앗간, 점판암 지붕, 고딕 양식의 집들이 있는 그런 마을을 상기시켰다.
그날 밤에 나는 내 방 유리창에서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둡게 떠 있는 지붕과 느릅나무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이 지붕들 너머로, 별이 하나, 아름답고 큰, 정겨운 별이 하나. 누구도 이 광경을 잊지 못할 거야.
학교 유리창에서 방문을 끝내고 돌아가는 부모님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는 소년들을 자그마한 드로잉에 담아 보았다. 다소 우울한 장면이었다. 아이들은 고대할 것이라고는 먹는 것밖에 없다.***
스토크스 씨는 숙식만 제공하면 선생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절대로 봉급을 줄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순 없겠지. 조만간에 어떤 결정이 나리라.
내가 어느 정도의 우울함으로 많은 봉급, 세상으로부터의 존경 등과 같은 ‘세속적인 만족’의 생활을 돌이켜볼 때가 오겠지.
하지만, 테오야, 그거야 어쨌든 간에, 너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몇 달간 학교 선생으로 때로는 성직자 역할까지 해야하는 생활, 이 직업들이 주는 기쁨뿐만 아니라, 때로 나를 찌르는 가시 같은 고통스러움에서 조금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다. 이 직업들에서 내가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또 구필 상회에서 보낸 육 년이(그 기간에 이런 상황에 대비했어야만 했는데) 나에게 상당한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대도시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를 향한 갈망이 엄청나다. 공장이나 상점의 노동자들은 경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도시 생활은 때로 ‘아침의 이른 이슬’을 앗아가 버린다. 그럼에도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향한 갈망은 남는다. 우리 가슴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거기에 머무는 모양이다. 나는 정말로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해주오’라는 걸 좋아한다. 파리에 있을 때 종종 가곤 하던 작은 교회에서 어느 밤에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을 보면 공장 노동자들이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랜턴 야드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생활이 나온다. 수천 명의 이곳 사람들이 이 복음주의자들의 설교를 들으러 모여드는 것을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런던에서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유별난 일임에 틀림없다. 선교사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좀 경험을 쌓은 다음에는 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또 일자리를 구하는 외국인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내서 돕기도 한다. 나는 두 번인가 세 번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지를 알아보러 갔었다. 내가 몇 개 국어를 하고, 특히 파리와 런던에 있을 때 하층 계급 사람들, 또 외국 사람들과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외국인이므로, 그 자리에는 내가 적격이고 앞으로 점점 더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긴 하지만, 선교사가 되려면 적어도 스물네 살은 되어야 하므로, 어쨌거나 한 해를 더 기다려야만 한다.
지난 월요일, 나는 램즈게이트를 출발하여 런던으로 향했다. 걷기에는 먼 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출발 당시부터 무덥던 날씨가 저녁 무렵 캔터베리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무더웠다. 그럼에도 그날 저녁에 나는 더 걸어가 큰 너도밤나무와 느릅나무가 몇 그루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근처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휴식을 취했다. 새벽 세 시 반에 새들은 벌써 일어나 아침을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 때는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채텀에 도착했는데, 멀리 약간 범람한 저지대 목초지 사이, 여기 저기 서있는 느릅나무가 사이로 배들이 가득한 템즈 강이 보였다. 그곳은 언제나 날씨가 우중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채텀에서는 운 좋게 마차를 얻어 타고 몇 마일을 갔지만, 마부가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내려서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저녁 무렵에 낯익은 런던 교외 지역에 도착하여 길고 긴 길을 따라 도시로 걸어들어 갔다.
런던에서 이틀간 머물면서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내가 편지를 쓴 성직자도 있었다.
저는 성직자의 아들이지만,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하는 관계로 킹즈 칼리지에서 공부할 시간이나 돈이 없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입학생보다 나이도 몇 살 위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홀란드의 한 마을에서 성직자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열한 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열여섯 살까지 거기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직장을 선택해야 했는데, 무슨 일을 해야할 지를 몰랐습니다. 미술품 판매상이자 판화 인쇄상인 구필 상회의 동업자인 삼촌 중 한 분의 뜻에 따라, 저는 구필 상회 헤이그 지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삼 년동안 저는 거기서 일을 했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가 이 년 뒤엔 런던을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저는 구필 상회를 떠났으며, 지난 두 달 동안 램즈게이트에 있는 스토크스 씨의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표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므로 다른 자리를 찾아봐야만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하기 위한 소정의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여행 체험이나 그 밖에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 종교적인 사람과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어울림, 또 육체 노동과 사무실 근무 경험, 그리고 또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 등은 제가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어느 정도 벌충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목사님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교회와 교회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저의 타고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따금씩 잠들기도 했지만 매번 다시 각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 자신이 비록 부족하고 결점 투성이의 인간이지만,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주에 나는 햄프턴 궁으로 가서 아름다운 정원과 또 궁전과 그림들을 보았다. 다른 여러 사람의 작품 가운데 Holbein이 그린 매우 아름다운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림을 다시 본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1876년 7월, 아일워스
학교에서 수업 사이에 쓴다. 가스등이 깜박이고 아이들이 교과를 배우는 쾌활한 소리가 들린다. 또 중간 중간에 그들 중 누군가가 찬송가의 곡조를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내 가슴 속엔 ‘오랜 믿음’의 어떤 것이 되새겨 진다.
지난 토요일에 나는 런던으로 또다시 긴 여행을 했다. 새벽 네 시에 나는 이곳을 떠났다. 느릅나무가 늘어선 어두컴컴한 가도를 걸어가는 기분도 과히 나쁘진 않았다. 노면은 젖어 있었고, 잿빛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었다. 멀리에서는 천둥과 함께 폭풍우가 이는 듯 했다.***
런던에 도착한 뒤 몇몇 친구들을 찾아보고 또 구필 상회에도 들러 보았다. 거기서 밴 이터선이 가져온 드로잉도 몇 점 보았는데, 홀란드의 마을과 목초지를 그런 식으로나마 보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Artz가 그린 ‘운하 위의 방앗간’이라는 그림은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런던 거리를 네가 보았더라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모든 게 오늘이 토요일 밤이라는 걸 보여주는 런던 거리. 그 모든 분주함 가운데도 평화가 있어, 사람들은 다가오는 일요일의 여유와 흥분을 느낀다. 오 그 일요일들, 그 일요일들에 일어났던 일과 또 이루었던 모든 일. 그것은 그 가난한 지역과 분주한 거리에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이다.
나는 거기서 나에게 적당한 듯한 자리가 있다고 들었다. 리버풀이나 헐같은 항구의 성직자들은 때로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는 보조자를 원하는 데, 그 까닭은 뱃사람이나 외국인들 사이에서 일하고 병자를 방문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도 어느 정도 준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여기 학교에서는 사람들이 별로 걷지를 않는다. 험한 일 투성이었던 파리에서의 작년의 생활을 생각해 보고, 그리고 그 생활을 때로는 하루 종일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지금과 비교해 볼 때, 나는 가끔씩 언제 내가 그 다른 세계로 돌아갈 지 생각해 본다. 그 세계로 돌아간다해도 지난 해와는 다른 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걷기보다는 아이들에게 성경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 다소간 안도감을 얻는다.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거나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날은 없다. 현재 하느님에 관한 나의 말은 보잘 것 없지만,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으로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내가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냐고 물었지. 그래, 나는 보통 오후 한 시까지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한 시 이후에는 존스 목사님을 대신해서 심방(尋訪)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때로 존스 목사님 자제나 마을의 몇몇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나서 저녁이나 짬이 날 때 나는 내 설교 책에다 생각나는 것을 적는다.
존스 목사님은 나에게 앞으로는 수업을 그렇게 많이 할 필요없이, 사람들을 심방하여 이야기도 나누는 등의 교구의 일을 더 많이 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내일 나는 두 번째로 내 새로운 일의 대가로 얼마 간의 봉급을 받을 것이다. 그것으로 새 구두와 새 모자를 사려고 한다. 존스 목사님이 나에게 교구의 일을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점차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되리라.
이제 곧 겨울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겨울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하느님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길. 어머니도 너무나 보고 싶고, 아버지도 너무 보고 싶다. 아버지랑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왜 너와 나는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니? 왜 우리는 부모님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거니? 하지만 가족 간의 유대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고,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그러하여 가슴은 저절로 고양되고 눈은 하느님에게로 향해 기도드린다. ‘내가 가족으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 멀리 헤매지 말도록 하소서, 오 주여.’
테오야, 너의 형이 처음으로 설교를 했다. 지난 일요일 ‘이곳에서 나는 평화를 주노라’라고 쓰여진 하느님의 처소에서.
그 날은 맑은 가을 날이었다. 노란 잎사귀가 숲을 이룬 커다란 밤나무와 청명한 하늘이 수면에 비치는 템즈 강을 따라 리치먼드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거기다 밤나무 꼭대기 사이사이로 언덕 위에 위치한 리치먼드의 일부가 얼핏얼핏 보이곤 했다.
설교단 앞에 섰을 때 나는 지하의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정다운 햇빛 속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앞으로는 복음서를 설교하겠다는 생각은 또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걸 잘해 내기 위해서는 복음서를 가슴 속에 담고 있어야만 되겠지. 하느님이 나에게 그런 힘을 주실 것이다.
이 몇 달 사이에 내가 몇 살이나 더 먹은 듯한 느낌이 든다.
‘예수의 모방’은 우리에게 엄청난 광명을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이 책은 의무를 위해 성스러운 투쟁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또 자비를 베풀고 개인의 의무를 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지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매일의 일상에 자체적인 악이 있다는 것은 그 반대로 선이 있다는 건만큼이나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일의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나아갈수록 매일매일의 악이 증가한다고 볼 때, 삶이 믿음으로 강화되고 위안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려울지.***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세상 모든 일이 더 나아지고, 다시 말해 신성하게 될 것이다.
테오야,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지 못한다면, 내 삶은 얼마나 나쁜 방향으로 빠질지.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나는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터넘 그린에 갔다. 그날은 정말 전형적인 영국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주중에 나는 주일 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흥미있는 내용을 짜내려고 고심한다. 아이들은 충분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정기적으로 불러모으느냐 하는 것이다. 존스 목사님과 자제들과 나는 오후에 차를 마시러 예배당지기 집으로 갔다.
내일 나는 런던에서 가장 외진 두 곳에 가야만 한다.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바로 그 빈민촌인 화이트채플을 먼저 방문한 뒤 작은 기선을 타고 템즈 강을 건너 루이섬으로 가야한다.
지난 주 목요일 존스 목사님은 나더러 그를 대신해서 설교를 하라고 했다.*** 나는 얼마 전 예배당지기 집 유리창에서 본 목초가 많이 자라는 곳인 액턴 그린으로 갔다. 그곳은 매우 땅이 질었으나, 날이 어두워지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들판 복판에 위치한 작은 교회에서 불이 켜지는 광경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몇 주 전 일요일엔 저녁에 감리교 교회가 있는 피터섬에 가야만 했다. 나는 회중에게 서툰 영어를 듣게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설교를 시작할 때 나는 이야기에 나오는 한 인물, ‘참고 기다리세요, 그러면 내 모든 것을 다 베풀어줄테니***’라고 말한 사내를 생각했다.
내 작은 방에 앉아서 너에게 편지를 쓰노라니, 사방이 왜 이다지도 고요한지. 나는 벽에 걸린 네가 보내준 초상화와 복제화를 본다. ‘위로자 예수님’과 ‘성(聖) 금요일’, ‘무덤을 방문하는 여인들’, 그리고 Ary Schffer가 그린 ‘늙은 위그노’와 ‘돌아온 탕아’, 거기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작은 배’ 등등. 그리고 너를 생각하고, 이곳의 모든 것, 터넘 그린이랑, 리치먼드, 피터섬 등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느낀다. ‘주여, 나를 내 아버지의 형제로 만들어 주소서. 주님이 시작하신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끝나게 해주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므로, 우리 가슴에 영원한 기쁨을 안고, 슬프지만 항상 행복하게, 그런 마음으로 우리 두 사람이 언젠가 함께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있을까?
며칠 전 도르드레흐트에서 Braat라는 분이 빈센트 삼촌을 찾아와 두 분은 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셨단다. 삼촌이 Braat씨에게 그가 하는 사업에 내가 원한다면 일할 만한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셨고, Braat씨는 마침 자리가 있다고 하면서, 나더러 한 번 와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랬단다. 그래서 나는 어제 아침 일찍 그곳에 갔다. 그 분과 나는 새해에 일 주일 정도 시험삼아 일을 해본 뒤에 가부간의 결정을 내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일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데, 홀란드로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 가까이에 있을 수 있고, 또 너와 다른 동생들과도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거기다 봉급도 존스 목사님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분명 더 나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더욱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봉급에 신경을 쓰는 것은 개인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있게 되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병이 나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 또 돈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함께 하지 못한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종교적인 일에 헌신하고 싶다는 내 생각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한량없이 넓으시고 여러 측면을 두루 살피시는 분이니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버지의 그런 장점들이 내 안에서도 열려지길 기대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신에 서점에서 일해야 할 모양이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도르드레흐트, 1877년 일월
서점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어가고 있으며 하루하루가 바쁘기 그지없다.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서, 밤 한 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단다. 하지만 그렇게 바쁘다는 것이 나는 기쁘다. 일이란 항상 좋은 것이니까.
때로 우리가 같은 땅에서 살며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면 기쁘기 한량없다.
내 방 창에서 내다보면 소나무와 포플러가 있는 정원과 담쟁이로 뒤덮인 고옥(古屋)들의 후면부가 보인다. 디킨스는 ‘담쟁이덩굴, 그거 오래된 이상한 식물이야’라고 어디선가 말한 적이 있지. 내 방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정경이 대단히 장중하고 다소 음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침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곳의 광경을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그 때는 이 정경이 얼마나 다른 빛을 띠는지.
지난 일요일엔 이곳에 있는 프랑스 교회에 갔었다. 매우 장엄하고 감명적이어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를 본 뒤에 방앗간들이 열지어 있는 제방을 따라 걸었다. 목장 너머에는 눈부신 하늘이 펼쳐져 있었는데, 물웅덩이에도 또 하나의 하늘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들이 있지. 프랑스 디에프 지방의 해안에는 바위들이 푸른 풀로 덮여있고, 바다와 하늘, 낡은 배들이 서있는 항구는 거기다 갈색 그물과 돛만 덧붙인다면 도비니가 그린 한 폭의 그림과 같아. 그리고 가스등이 켜진 비오는 런던의 거리란. 그 광경을 작고 오래된 잿빛 교회의 계단에서 밤을 지새며 본다면. 이 광경은 내가 지난 여름에 램즈게이트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본 것이지만. 다른 나라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것들이 있지. . . 그러나 지난 일요일 혼자 그 제방길을 걸으면서, 나는 내 발아래 홀란드의 흙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을 했고, 또 ‘이제, 우리 주 하느님과의 약속이 내 가슴속에 새겨졌다’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들을 회상하게 되었으니까. 이를테면 2월의 말일 무렵에 아버지와 얼마나 자주 Rysbergen으로 산보를 나갔는지, 그 때 막 싹이 돋아나는 푸른 옥수수가 있는 검은 들판 너머로 지저귀던 종달새 소리, 흰구름 피어오르는 눈부신 푸른 하늘, 그리고 너도밤나무가 늘어선 돌 길, 오 예루살렘, 예루살렘, 아니 오 Zundert, Zundert라고 해야 더 맞겠지.
오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볼일 없는 시시껄렁한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이 의무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집중시킬 수 있을까? 의무감은 모든 것을 성스럽게 하고 그것들을 함께 묶어주는 역할을 하여 많은 작은 의무로부터 하나의 큰 의무를 만들어 낸다.
지난밤에 나는 한 시에 서점에서 나와 성당을 돌아서 운하를 따라 걷다가 새로 생긴 교회의 낡은 문을 지나 집으로 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 집의 이층 창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만이 드문드문 어둠을 밝힐 뿐이었다. 거기다 내리는 눈과 뚜렷이 대비되던 야경꾼의 검은 모습. 만조 때라 그런지 운하와 선박들은 눈을 배경으로 매우 검게 보였다.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것, 그건 좋은 일이다. 브라반트의 농부들의 삶은 얼마나 힘겨운가? 어디서 그들은 힘을 얻을까? 그리고 그 불쌍한 여인들,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가? 그것은 바로 화가가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에서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니?
내가 얼마나 성경을 갈망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암송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 옛날 이야기들을 사랑을 바탕으로 철저히 공부하고, 특히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진 것들을 조사해보고 싶다.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귀찮기 짝이 없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으며, 거기엔 또 얼마간의 진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물리쳐야할 감정이라고 보니, 아니면 이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르므로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겨야 할 ‘하느님을 향한 동경’이라고 보니? 정말 이러한 감정이 우리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하느님을 향한 동경’일까?
우리 용기를 잃지 말고 인내심 있고 온화한 사람이 되도록 애쓰자. 유별나다는 것,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선과 악을 분간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아침에 Cor 삼촌과 함께 Stricker 삼촌댁에 가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집에다 편지를 써서 우리가 암스테르담에서 한 일과 우리가 이야기 한 것들을 두 분께 알렸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지난 일요일에는 아버지가 편찮으셨다는 구나. 나는 아버지의 가슴이 내부로부터 타올라 내가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해줄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서 그걸 기대하셨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리라.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기독교 집안인 우리 집안에는, 기억이 미치는 한, 대를 이어서, 복음을 가르친 사람이 언제나 있었다. 그런 집안에서 누군가가 이제 그 소명을 받았다고 느낀다는 것은 조금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믿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신이 나에게 깃들이기를 바라는 것, 또 내가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 교역자가 되는 것, 내 삶이 더욱 더 위에 든 분들의 삶과 닮는 것(묵은 포도주가 훌륭하고, 거기다 나는 새로운 것을 갈망하지도 않으니까), 이런 것이 나의 열렬한 기도요, 열망이다.
테오야! 내 사랑하는 동생아! 내 갈망은 이다지도 열렬히 타오르는데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오! 신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현재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내 삶을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계속해서 그 길을 찾으려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까 조만간에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 길을 간청한다.
테오야! 이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심한 우울감, 듣고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소나기 같은 비난, 이런 것들이 나로부터 들어올려 진다면. 충분한 성취에 이르고, 그 길로 끈기 있게 나아가는 데 필수적이라 할 기회와 힘, 이 둘 모두가 나에게 주어지기만 한다면. 아버지와 나는 주님께 정말로 열렬히 감사드릴 텐데.
오늘은 너에게 Dore 풍의 또 다른 목판화 한 점과 Brion 풍의 목판화 한 점을 보낸다. 수집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조만간에 훌륭한 작품을 얻을 수 있게 될 테니까. 내 조그만 기부를 받아주기 바란다. 나는 이 작은 것들을 통해 너와의 고리를 더욱 굳건히 하기를 정말로 갈망한다.
네 편지는 뭐라 할까 자신의 아이를 찾은 어머니가 느낀 것과 같은 기쁨을 주었다. Roos 부인이 봄 대청소를 하다가 Koos 고모의 판서용 작은 책상을 찾았다는 소식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를 거다. 암스테르담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꼭 필요할 것이다. 그 책상은 나에게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내가 이토록 진실되게 열망하는 일에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새로운 증거이자 암시처럼 보인다(최근에 나는 그런 것들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내 생각이 확고해지고 내 정신이 새로워 질 거라는 오랜 믿음이 어느 정도 자라나고 있다. 이 일은 내 일생을 위한 선택이 될 것이다.
Braat 씨가 나 대신에 일할 누군가를 구했으므로 오월에는 아마도 내 손으로 쟁기를 쥘 수 있을 것 같다.
들판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희망하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에게도 매일매일 상당한 분량의 악이 닥쳐올 것(대지가 가시와 엉겅퀴를 많이 길러내는 것처럼)이라고 생각하므로, 우리 두 사람이 계속해서 서로를 돕고 형제간의 애정을 돈독히 하자. 미래에는 우리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 같다. “나 결코 절망하지 않으리라”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악마도 결코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검지는 않다”는 Jan 삼촌의 말씀을 가슴 속에 되새기도록 하자.
시간은 쏜살처럼 날아가고 하루하루도 재빨리 지나간다. 우리는 마음이나, 성격, 가슴이 더욱 더 풍요로워 지고 굳건하게 되리라. 그리고 하느님 속에서 더욱 더 풍요로워 지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삶의 찬란한 황금, 또 “아버지가 내 곁에 계시므로, 나는 아직 혼자가 아니어라”라는 느낌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풍요롭게 되리라.
틈 나는 대로 나는 Stricker 삼촌의 교리문답 책에서 그리스도의 전 이야기를 샅샅이 훑고 옮겨 적기도 했다. 그 이야기들은 렘브란트와 다른 화가들의 수많은 그림들을 나에게 떠올리게 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 교역자가 되기로 애쓰겠다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를 기대하고 믿는다. 그렇다, 과거의 모든 일이 이 일에 도움이 되리라. Jules Breton, 밀레, Jacque, 렘브란트, Bosboom과 다른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지식과 사랑 이런 것들이 새로운 생각의 원천이 되리라. 아버지의 일과 생애, 그리고 화가들의 그것에는 유사점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일과 생애를 더욱 고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암스테르담, 1877년 오월
하루도 a line' 없는 날은 없다.*** 매일 읽고, 쓰고, 궁리하고, 연습을 하는 가운데, 끈기있기 달라 붙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공부할 분량이 많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성공하리라는 굳은 신념이 있다. 어쨌거나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누구나 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않니? 코로는 “줄기찬 작업과 생각과 집중의 시간, 사십 년밖에 안 걸렸다는 게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라고 까지 말하지 않았니. 아버지와 Stricker 외삼촌 같은 분의 일을 위해서도, 그림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분량의 공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 사람은 또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 과연 내가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밤이면 몸은 젖은 걸레처럼 무겁고, 아침에 내가 원하는 것만큼 일찍 일어날 수도 없다. 머리도 때로 무겁고 종종 타는 느낌이 들며, 생각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 몇 년간 정서적 격동기를 겪은 후에 단순하고 규칙적인 공부에 익숙해 진다는 것, 거기에 끈기 있게 몰두한다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앞으로의 거의 정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움, 또 내가 싫어하는, 또 내가, 아니 그보다는 내 안의 사악한 내가 피해버리고 싶어하는 난해하고 많은 분량의 공부를 생각해 볼 때, 거기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눈들을 생각해 볼 때, 그 눈들은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실패의 씨앗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안다고 믿으니까 가벼운 비난으로 그치지는 않겠지? 그들은 옳고 고결한 것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마치 그들 얼굴의 표현이기라도 한 양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는 너를 도왔고, 너에게 빛이 되었다. 너는 전심전력을 다했느냐? 이제 우리 노고의 보상과 열매가 도대체 무어냐? 한 번 보아라.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슬픔과, 실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치욕,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신중하게 또 그러한 것들에 저항할 힘을 배양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래서 나를 위협하는 비난들에 뭐라고 응대해야 할 지를 알고, 나에게 적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가 분투하는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과 내 뒤를 이어올 사람들로부터는 애정 어린 눈빛을 받을 수 있으리라.
“축 늘어진 팔과 연약한 무릎을 들어올려라”라는 글이 있다. 또 사도들이 밤새도록 일하고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을 때, 그들은 “깊은 곳으로 나아가 다시 한 번 바다에다 그물을 던져라”라는 말씀을 들었다.
우리가 지쳤다면, 그건 우리가 이미 먼길을 걸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에게는 각자 이 지상에서 싸워나가야 할 전투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기력이 쇠진한 느낌과 머리가 타는 듯한 느낌은 우리가 힘껏 투쟁했다는 징표가 아닐까? 예전에 이처럼 내 온 힘을 바쳤더라면, 정말이지, 나는 지금 더 먼 곳까지 나아갔으리라.
오늘 아침에 교회에서 자그마한 할머니를 보았다. 아마도 발난로(footstove)를 제공하는 분 같은데, 렘브란트의 동판화에 나오는 할머니, 성경을 읽다가 머리를 손에다 묻은 채 잠이 든 할머니를 그대로 빼박은 듯 했다. Ch. 블랑은 그 그림을 두고 정말 아름답게,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 했지. Michelet의 글 ‘늙은 여자는 없다('il n'y a point de vieille femme)'도 그걸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de Genestet가 쓴 시 ‘그녀 생의 마지막 길은 외로움’도 나에게 그걸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 역시도 우리가 깨닫기 전에 우리 삶의 저녁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빨리 더 빨리 우리 곁을 지나 날아간다고 느낀다면, ‘인간은 제안하고, 하느님은 처분한다’는 걸 떠올리며 그렇다고 믿는 것이 나에게는 때로 도움이 된다.
내가 찾던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본을 구해 준 유태인 서점 주인이 복제화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아주 싼값에 몇 장 골랐다. 그걸 내 작은 방에다 옮겨 놓으니 분위기도 밝아지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를 듯 하다.
어제 Stricker 외삼촌 댁에 갔더니 사람들이 런던과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달라고 성화여서 할 수 없이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니 과거가 내 앞에 다시 펼쳐졌다. 정말로 그 두 곳의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 아니, 내가 살았던 곳 어디든지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헤이그의 거리를 걸을 때, 또 예를 들자면 Zundert에서의 추억이란. 과거의 모든 시간들이 현재의 내 공부에 도움이 된다. 커다란 홀란드 개신교 내에서 내가 작은 자리나마 차지하게 될 때 그 회상들은 내 설교의 화젯거리를 많이 제공하리라.
Buitenkant와 철도 근처의 모래 둔덕을 따라 걸었다. 어스름이 깔리 무렵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에게 글로 묘사해 보일 수만 있다면. 렘브란트, Michel, 또 다른 이들이 때로 그 풍경을 그리곤 했지. 땅은 어둑어둑하고, 하늘은 지는 해의 노을 빛으로 여전히 빛나고, 그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선 집들과 첨탑들, 거기다 이 모든 것이 물에 다시 비춰지곤 하는 광경을 말이야. 그런 때면 사람들과 마차들은 작고 검은 물체 같고.
이미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 일과가 끝난 밤이 아니면 이른 아침에만 한다. 비록 다른 공부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고 또 그렇게 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성경 공부야말로 주된 것이 아니겠니. 할 수만 있다면, 테오야, 정말이지, 몇 년을 훌쩍 뛰어넘고 싶다.
우리가 어려운 작업에 몰두하고 선한 것을 향해 힘껏 분투할 때, 우리는 정당한 전투를 하는 셈이다. 그것의 직접적인 보상은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우리가 많은 악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점점 더 어렵게 되지만, 그 어려움과 싸워나가는 가운데 우리 가슴의 내적인 힘은 개발된다. 사실, 인생은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만 한다. 그리고 쾌활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우리는 진보를 향한 계획을 세우고 측량을 해야한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둘 다 지금부터 앞으로 삼십 년이라는 세월의 시간을 애쓰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을 조심해라. 우리는 삶의 전쟁터에 놓여졌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해 싸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아직은 우리 두 사람이 이루지 못한, 그런 경지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미래에는 뭔가 더 위대한 것이 있다.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Aerssen 씨의 시체 옆에 서있노라니까, 죽음의 고요함, 위엄, 장엄한 침묵 등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활동과 극도로 대조되어 우리는 그 분의 따님이 간결하게 “아버지는 우리가 아직도 끌고가야만 하는 삶의 멍에로부터 이제 풀려나셨습니다”라는 말이 진실이라고 느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옛 추억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다. 의기소침한 가운데도, 아침이면 노래를 멈출 줄 모르는 종달새처럼, 가슴과 영혼이 기뻐하는 그런 행복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영혼이 때로는 아래로 가라앉고,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남아 우리 인생의 저녁에 돌아오리라.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이며 그들의 보물을 모으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오늘 아침 다섯 시 십오 분전에 이곳에서는 귀를 찢는 천둥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조선소 작업장과 부두를 내다보고 있자니까, 포플러와 양딱총나무와 다른 관목들이 무서운 폭풍에 휘어지다가, 그 다음 폭우가 목재 더미와 선박의 갑판에 총알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왔다. 조선소의 땅과 재목들은 비에 흠뻑 젖었고,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금빛 찬란하였다. 그리고 이 바로 직후에 일꾼들의 첫 무리가 조선소 문을 지나 나타났다. 크고 작은 검은 모습들이 길다랗게 열을 지어, 태양이 막 엿보고 있는 좁은 길을 지나 조선소 작업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삼천 명 가량이 일하는데,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바다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Dicker 섬에도 조선소가 많이 있었다. 거기에 갈 때면 노동자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은 노동자들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특히 작업장의 모습을 어느 정도 관찰한 경우라면.*** 화가가 여기 부두에서 얼마나 많은 그림 소재를 얻을 수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거다.
글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이따금씩 작은 드로잉을 한다. 오늘 아침에는 폭풍우에 휩싸인 사막을 배경으로 사막에 서 있는 엘리야를 그렸다. 전면부에는 가시나무도 몇 그루 그려 넣고.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내 눈앞에 생생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순간에는 나도 열광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종교 개혁의 역사를 요약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쁘다. 당시 역사는 상당히 극적일 뿐아니라 흥미롭기도 하다. Motley나 디킨스, Gruson 등이 쓴 책을 몇 권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아니면 십자군 원정에 관한 책이라도, 무의식중에 역사 전반에 관한 단순하고도 훌륭한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Mendes 선생님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삼 개월 후면 우리가 처음에 계획했던 만큼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고무적인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심장부, 그것도 유태인 지구 중심부에서, 찌는 듯이 숨막히는 여름 오후에, 매우 학식 있고 노련한 교수들이 출제한 시험이 줄줄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압박감 속에, 그리스어를 배운다는 건, 정말이지, 브라반트의 옥수수밭보다 더 옥죄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옥수수밭은 이런 날이면 아름답기라도 하지만 딱딱한 그리스어 공부란.
집으로부터 네가 Coster 의사의 사십 길더나 되는 진료비 청구서를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십 길더면 상당한 돈인데, 내가 조금이라도 너를 도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알다시피, 나에게는 돈이 될만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이따금씩은 교회 헌금을 위한 돈을 모을 방법을 강구해야 겠다. 예를 들면, 담배가게에서 우표를 페니로 바꾼다든지. 하지만, 테오야, 투쟁해 가면서 견디는 것 아니겠니?
나는 어린아이처럼 수만 가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돈이 있으면 아마 곧 책이나 그 밖의 다른 것, 없어도 되는 것들을 사는데 써버린다. 그런 것들은 내 주의를 정말 필요한 공부로부터 돌려놓기 일쑤이다. 지금도 주의를 흩트리는 것들과 싸우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며 돈이 있다면 상황은 더욱 나쁠 것이다.
그래, 돈을 양서(良書)를 사는데 보다 더 좋은 일에 쓸 시기가 오겠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되고, 또 우리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고 생각해야 할 때가 되면 말이다.
Mendes 선생님은 지난주에 나에게 도시의 매우 흥미로운 지역, 그러니까 Vondel 공원 근처 Leidsche Poort에서 홀란드 기차역에 이르는 교외 지역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 지역은 제분소, 제재소, 작은 정원이 있는 노동자들의 누추한 집, 또 구옥(舊屋), 그 밖의 별의별 것들이 가득하고, 시장통처럼 분잡하며, 배와 온갖 종류의 그림 같은 다리가 떠 있는 수많은 작은 운하와 수로가 이 지역을 분할하고 있단다. 이런 곳에서 성직자 생활을 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일 거야.
이곳 유태인 지구와 다른 곳의 몇 가지를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자주 de Groux를 생각하곤 한다. 그를 기쁘게 할 만한 벌목꾼, 목수, 식료품 가게, 철공소, 약장수 등이 있는 골목***이 있거든.
9월 1일부터 일 주일 동안 Jan 삼촌이 Helvoirt에 갈 예정이다. 그러면 밤늦게까지 거실에서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내 공부에는 도움이 될 듯하다. 침실에서도 앉아서 공부할 수 있긴 하지만 밤이 되면 쉬고 싶다는 유혹이 너무 강하다. 그리고 내 작은 서재는 가스가 없어서 추위 때문에 공부할 수가 없다.
지금 나는 Cor 삼촌에게 빌린 불어 판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을 전부 베껴 쓰고 있는 중이다. 상당히 힘드는 일이지만, 이 책을 공부하는데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 듯하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숭고하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따랐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며칠 전에 나는 이 책을 향한 견디기 힘든 갈망을 느꼈는데, 아마도 내가 자주 Ruyperez를 흉내낸 석판화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Mendes 선생님은 이번 주에는 타지로 가셨다.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 나는 Trippenhuis에서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보러가려던 오래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병자와 죽어 가는 사람을 방문하여, 고통과 고뇌의 밤에서조차도 빛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한밤중에도 등을 들고 자주 먼 거리를 왕래하곤 하는 아버지 같은 분은 어떻게, 렘브란트의 동판화, 이를테면 “밤중에 이집트로 날아감” 같은 작품을 보고 어떻게 느끼실까?
마침내 렘브란트가 살았던 집을 Breestraat에서 발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 주일 내내 Jules Goupil의 ‘서기 5년의 젊은 시민’이라는 그림과, 그 그림을 토대로 그린 동판화를 생각했다. 그것은 런던의 내 방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미술사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이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를 소재로 한 많은 그림들, ‘지롱드 당원’, ‘공포 정치의 마지막 희생자들’, 그리고 Delaroche가 그린 ‘마리 Antoinette' 등은 Michelet, 칼라일의 저작들, 또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일구어 낸다. 이 모든 작품에는 부활과 생명의 정신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책을 많이 읽고 싶구나. 그렇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게다가 책 읽는 것을 그렇게 갈망할 필요도 사실은 없을 듯 하다.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교회에 요청하고, 또 서점에도 매달린다. 그래서 나는 기회만 나면 거기에 갈 심부름거리를 생각해 내곤 한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 전의 암일(暗日)***이 벌써 다 되었구나. 암일이 지나고 나면 크리스마스가, 어두운 밤에 바위에 와 부서지는 파도 그 너머에 있는 집에서 빛나는 친근한 불빛처럼 찾아오겠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한 것과 공부할 것을 한 군데, 잘 정돈해서 두고,*** Mendes 선생님과 모든 것을 의논한 뒤, 선생님이 하신 방식을 따라 공부 계획을 짠다.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라틴 어와 그리스 어 공부는 매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 공부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내가 갈망했던 것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밤에 너무 늦게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을 듯 하다. 삼촌이 엄격하게 그것을 금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렘브란트의 동판화 아래에 쓰여져 있는 말 ‘한 밤중에 빛은 그 광휘를 내뿜는다’라는 말을 명심하고 있다. 그래서 작은 가스등의 심지를 낮추어 밤새도록 타게 하고는 때때로 누워서 그 불빛을 바라보며 다음 날의 공부를 계획하곤 한다.
Stricker 외삼촌댁에 가서 외삼촌, 외숙모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멘데스 선생님이 며칠 전 두 분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가정하는 것보다 천재성이라는 것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천재라든지 천재성을 너무 가볍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Mendes 선생님은 정말로 놀라운 분이시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길 것이다.) 선생님이 나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여긴다는 이야기는 안하셨다고 하니 기쁘지만, 외삼촌은 공부가 퍽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진도를 쫓아가기 위해서 사나이답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도 드렸다. 외삼촌은 용기를 잃지말라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셨다. 아버지도 내가 지금까지 한 것에 만족하시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제 끔찍스러운 대수와 기하가 여전히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그 과목들 수업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대수를 가르쳐 주실 선생님을 찾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Mendes 선생님의 사촌인 Teixeira de Mattos 유태인 빈민 학교 선생님이 나를 가르쳐 주시기로 했다. 내년 시월쯤에 있을 시험 때까지는 공부를 마칠 수 있을 거라고 고무적인 말씀을 하셨다. 기왕 시험에 통과할 거라면,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하고 싶다. 왜냐하면 주변 분들이 첫 네 과목을 통과하는데 최소한 이 년은 걸릴 거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다가 짬을 내서 펜을 든다. 비용이 생각보다 좀 더 들지라도 맹세코 잘 해내야만 한다. 더도 덜도 아니고 이 공부는 내 삶이 달린 경주이고 싸움이다. 이 공부의 과정에 따르는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 인내심 하나로 끝까지 마친 사람은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공부를 해낸다는 것은 가슴에 간직할 뭔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엄청난 어려움과 악전고투의 시기를 이겨나가야만 하리라. 거기다 성공은 사소한 것에 달려 있다. 시험에서 한 단어를 잘못 말하거나 쓰게 되면, 그것 때문에 낙방하기도 하리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지혜를 내려 주시고, 내가 이토록 가슴 타게 열망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또 가능한 한 빨리 공부를 마치고 성직에 임명되어 성직자로서의 실제적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어제 새벽 기도에 가서 ‘나는 영원히 인간과 불화 관계에 있으리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낙담과 슬픔의 시기 이후에 어떻게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갈망과 소망이 성취되는 인생의 시기가 찾아올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어느 작은 교회에서 내가 설교하는 모습을 언제쯤 테오가 볼 수 있을까?
또 일 년이 지나갔구나. 작년 한 해 동안 나에게 많은 일이 있었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되돌아 본다. Braat에서 보낸 시간과 이곳에서 공부에 땀을 쏟은 몇 달간을 생각해볼 때, 전체적으로 정말 좋은 두 가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디킨스는 ‘축복 받은 어스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하고 있는데 정말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음이 잘 맞는 두 명 혹은 세 명의 친구가 유태인 율법학자처럼 보고(寶庫)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끄집어내올 때, 그럴 때 이 축복 받은 어스름이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 렘브란트도 그걸 알았던 게 틀림없어. 자신의 가슴의 풍요로운 보고에서, 다른 많은 것 중에서도 Bethany의 집을 세피아 물감과 목탄, 잉크로 드로잉해서 살려낸 걸 보면.
그리고 내 창으로 내다보이는 들판의 정경은 정말이지 멋지다는 말로서는 부족하다. 포플러가 열 지어 늘어선 작은 길. 가느다란 가지가 늘어진 호리호리한 포플러가 열 지어 선 모습은 잿빛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얼마나 우아하게 두드러지는지. 거기다 물위에까지 나가도록 지어진 오래된 창고 건물. 물은 어찌나 고요한지 구약 ‘이사야 편’에 나오는 ‘오래된 웅덩이의 물’을 연상케 하고, 물 쪽에 있는 창고의 벽면은 푸르른 빛이 짙은 게 풍파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더 멀리 아래쪽으로는 작은 정원과 장미넝쿨로 된 담장이 있고, 들판 어디서나 일꾼들의 검은 모습, 거기다 조그마한 개 한 마리.
형제가 아직 살아있어서 이 지구상에서 같이 호흡하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할 일도 많을 때 우리는 때로 이런 느낌을 받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러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그러나 그런 때 너무나도 친숙한 목소리, 아니 그 보다는 글씨가 나로 하여금 발밑의 단단한 대지를 다시 느끼게 해준다.
아버지께서 다녀가셔서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아버지가 이곳에 와 계신 동안에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내 작은 방에서 아버지가 공부를 검토해 주시고 몇 가지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보낸 아침이다. 아버지가 와 계신 동안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갔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겠지. 그리고 역에서 아버지를 전송하고,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아니 연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내 방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앉았던 의자가, 어제 공부하다가 그대로 둔 책과 과제용 공책이 놓여져 있는 작은 탁자 곁에 여전히 있는 걸 보았을 때, 나는 얼마 안 있어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린애처럼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성 니콜라스 절에 Mendes 선생님이 나에게 Claudius의 저작집을 선물하셨다. 진지하고 심각한 책이다. 나는 선생님께 토마스 켐피스의 ‘예수의 모방’***을 드렸다. 면지에다가 나는 ‘그에게는 유태인도 그리스인도, 하인도 주인도, 남편도 아내도 없고,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 안에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번 주에 나는 ‘자신의 삶을 증오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두고 선생님과 토론을 벌였다. Mendes 선생님은 너무 강한 표현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말이 두 말할 필요 없는 진실이라고 못박았다. 켐피스도 자신을 아는 것과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두고 말할 때 똑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다른 사람,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했고, 우리보다 나은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우리 자신의 삶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어떤 다른 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단순성과 진정성으로 자신의 작은 책을 쓴 토마스 켐피스를 보아라. 아니 다른 분야에서 예를 들자면 밀레의 작품이나 Jules Dupres의 ‘커다란 오크나무’ 등을 보아라. That is the thing.***
오늘 Cor 삼촌이 Gerome의 'Phryne'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으셔서, 나는 차라리 Israels나 밀레가 그린 순박한 여인이나 Eduard Frere가 그린 늙은 여인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Phryne의 것과 같은 아름다운 신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동물도 그런 몸을 가지고 있다. 아니 사람보다 더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혼은, 그러니까 Israels나 밀레나 Frere가 그린 사람들에 깃들이어 있는 영혼은 동물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것은 비록 외부의 모습이 고통을 받더라도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한 것이 아닐까? 나는 Gerome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에 거의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 속에서 나는 영성(靈性)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흔적을 보여주는 양손이 그의 인물의 손보다 더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소녀와, Parker나 토마스 켐피스, 혹은 Meissonier가 그린 인물들 사이의 차이란 훨씬 더 큰 법이다. 그리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그렇게 다른 것을 동시에 사랑하고 공감을 느낄 수는 없다. 그러자 Cor 삼촌이 나에게 아름다운 여인이나 처녀를 보면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않느냐고 물으셔서, 나는 못생기거나, 늙거나, 가난하거나, 무슨 일로 불행한 사람, 그렇지만 경험과 슬픔으로 정신과 영혼을 얻는 사람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지난 주 일요일은 Jan 삼촌과 함께 보냈다. 나에게는 매우 즐거운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프랑스 교회에 갔는데, 리옹 근교에서 온 성직자가 설교를 했다. 그 분은 복음 전파를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는 중이었다. 설교는 그곳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된 부분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 분의 말씀은 효과적이었다. 그건 그 말이 가슴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말만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법이다.
아버지께서 사람을 좀 더 사귀는데 힘쓰라고 충고하셨다. 어제와 그제 아침 매우 일찍 일어나 사도 바울의 순례 행보를 지도로 그리는 작업을 했다. 다 그리면 Gagnebin 목사님께 드릴 작정이다. 그 분은 내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보신다면 나중에 뭔가 좋은 충고를 해주실 매우 학식 있는 분이므로, 가능하다면 그 분을 방문할 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씩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내 말은 내가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렇다.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훨씬 더 쉬웠겠지. 물론 내가 더 오랜 시간 공부할 수 있고, 집중도 더 잘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많을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에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공부한다는 게 나에겐 훨씬 힘이 든다. 그리고 내가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내 흔적을 내 뒤 여기 저기에 남기고 싶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이렇게 물었다. “내 열정이 나를 속일 수도 있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잘못 된 길을 택하고, 또 애시당초 계획을 잘 세우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 이 불확실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러자 한 목소리가 그에게 답했다. “네가 그걸 확실히 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네가 그것을 확실히 아는 것처럼 나아가라. 그러면 더 이상의 혼돈은 없으리라.” 그래서 그 사람은 신념을 가지고 그의 길을 나아갔고, 더 이상 의심하거나 흔들리는 일없이 자신의 일로 되돌아 갔다.
그러니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리라. 가만히 서있거나 되돌아가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일이니까. 만에 하나 그렇게 한다 해도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종국에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하는 불가피한 사태에 봉착하게 될 테니까.
꼭 알아야 만 하는 것들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주변 분들은 나에게 믿음을 주려 애쓰지만 엄청난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공부에 몰두하는 것외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명백한 나의 의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의무에 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어떻게 하면 올바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가를 두고도 의견을 많이 교환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목표는 온몸을 바쳐서 헌신할 수 있는 공고한 지위와 직업을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재빨리 흘러가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전문가가 되어 그 한 가지 일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동시에 다른 많은 것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지게 된다.
개개인은 특히 마음속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개인이 일생 동안의 작업과 노고 후에 얻게 되는 승리는 이른 시기에 얻은 승리보다 더욱 값지다. 진실 되게 살고, 많은 고난과 낙담을 겪으면서도 날개가 꺾이지 않은 사람은 항상 순풍에 돛단 듯이 항해하고 오직 남다른 번영만을 알아온 사람보다 훨씬 더 보배롭다.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계기나 우연을 믿지 않는다.***
나로서는 좋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옳은 것, 세상에 도움이 될 만 한 것을 전해줄 수 있는 성직자. 그러므로 내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을 전달할 위치에 서기 전에 상대적으로 긴 준비 기간을 가지고 철두철미한 신념으로 완전 무장을 한다는 것도 아마 더 나은 일이리라. . . . 우리가 진실 되게 살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비록 진정한 슬픔과 엄청난 낙담을 어쩔 수 없이 겪게 된다고 해도 나중에는 만사가 잘 풀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아마도 엄청난 실패를 하고 그릇된 일을 저지른다 할 지라도, 고양된 정신으로 지내는 것이, 그로 인해 더 많은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편협한 생각으로 너무 따지고 재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것은 명백하다. 진정한 힘은 사랑 안에 있으므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또 사랑을 가지고 한 일은 잘 된 일이다.
개개인이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충실하게 사랑해 나간다면, 그래서 그 사랑을 하찮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에 낭비하는 일이 없다면, 그는 점점 더 많은 빛을 얻고 더욱 강해지리라. 때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도 좋다. 사실 이따금씩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일을 하면서 고요히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단지 극소수의 친구만을 원하는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 사이를 가장 안전하게 헤쳐나갈 것이다. 그리고 가장 세련된 모임이나 최상의 환경과 상황에서조차도, 개개인은 은둔자의 그 독창적인 특징의 일부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신 안에 뿌리를 갖지 못하게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불이 결코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을 택해 그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분명히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느님의 최상의 선물인 그 목소리를 듣고 복종하는 사람은 마침내 그 안에서 친구를 발견하게 되고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파리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자못 궁금하구나. 첫인상이 종종 바뀐다는 건 사실이다. 동터오는 여명이 있지만, 또한 캄캄한 한밤중이 있고 정오의 숨을 막는 타는 듯한 열기가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침 시간이 축복된 시간이 분명한 것처럼 첫인상도 마찬가지이다. 첫인상은 지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데, 때로는 첫인상이 종국에는 옳았음이 드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몽마르트로 이어지는 거리를 걸어가노라면 ‘Un Tonnelier’ 중의 하나를 상기시키는 작업장과 작은 점포를 많이 보게 되는데, 이따금씩 그런 단순한 것을 보는 일은 좋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스러운 모든 것으로부터 일탈해서 그들의 진정한 내적인 삶을 잃어버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또 거기다 비참함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된다. 이들은 저녁이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검은 형체를 하고 거리를 배회하는데, 밤의 공포는 이들에게서 구체화되고, 어떤 언어로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이들의 비참함은 자리한다. ***
오늘 Cor 삼촌댁에 잠시 들렀다. 삼촌은 도비니가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Brion(그의 Benedicte는 내 방에 걸려있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똑같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그러한 사람들의 작품은, 제대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깊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뭔가 진정으로 좋은 것을 했다는 자각하고 죽는 것, 그리고 그 일로 자신이 적어도 몇몇 사람의 기억에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남겼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분명코 좋은 일이다. 훌륭한 작품, 그것은 영속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 안에 표현된 생각은 그러하며, 작품 자체도 확실히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하게 되리라. 그리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선임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으므로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에텐, 1878년 7월
작은 등의 불빛을 받으며 편지를 쓴다. 초의 키가 점점 줄어들어 얼마 안 있어 불이 꺼질 듯 하다. 아버지와 나는 지난 주에 아일워스 시절의 존스 목사님과 함께 브뤼셀로 갔다. 우리는 de Jong 목사님과 플랑드르 연수원의 Bokma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이 학교는 3년 과정으로, 너도 알다시피, 홀란드에서 아무리 짧게 잡아도 6년 이상 걸리는 것과 비교해볼 때 짧다. 그리고 과정을 끝마치기 전에 복음전도사로서 일할 곳을 지원할 수도 있단다. 필요한 것은 흥미롭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만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길고 현학적인 것보다는 짧고 재미있는 설교를 원한다. 이 분들은 실제적인 일에 얼마나 적합한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 등을 더욱 중요시 한다. 그렇지만 극복해야할 장애가 많이 있다.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감정을 넣어서, 그것도 유창하게 막힘없이 말하는 능력은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으며, 또 하고자 하는 말을 명료하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득력있게 전달해서 청자를 일깨우고,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진실에 뿌리내리도록 애쓸 수 있게해야 한다.
브뤼셀에 있는 분들(Ces messieurs)이 좀 더 친숙해 질 수 있게끔 삼 개월 정도 거기에 와 있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하면 경비가 너무 많이 들 것이다. 현재로서는 가능한 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일이므로 나는 에텐에 머물면서 예비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지도 모르니까 최선을 다해 작문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어제는 겨자 씨의 우화를 두고 작문을 했는데, 이십칠 페이지나 되었다. 그 글에 뭔가 좋은 것이 들어있기를. 현재는 루브르에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 ‘목수의 집’에 관해 쓰고 있다.
Zundert로부터 돌아오던 날 저녁에 아버지와 나는 얼마간 산보를 했다. 해는 소나무 뒤에서 빨갛게 저물고, 저녁 하늘이 연못에 되비치고 있었다. 히스와 노랗고 희고 잿빛인 모래는 조화와 정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살아가노라면 모든 것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평화와 정감으로 가득차 있는 듯한 순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 전 인생이 히스 사이로 난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들판은 지금 너무나 아름답다. 농부들은 옥수수를 거둬들이고, 감자는 이파리가 시들기 시작하면서 익어간다. 거기다 메밀은 흰 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 그림같은, 불을 밝힌 저녁 무렵이면 특히 장관인, 온갖 종류의 작업장이 이곳에 있다. 이 작업장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부름을 받은 각자의 일터에서, 역시나 노동자요 일꾼인 우리에게 우리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나름의 방식으로 말한다. ‘낮 동안에 일하라.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찾아오나니.’
거리 청소부가 늙은 흰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더럽고 구역질나는 옷을 입은 청소부들은 de Groux 선생님이 ‘빈자들의 벤치’라는 그림에서 보여준 가난한 사람들의 긴 열, 아니 한 무리의 모습보다 더욱 가라앉고 가난에 훨씬 더 뿌리박힌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필설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황폐함, 고독과 가난과 비참함, 모든 것의 끝, 혹은 그 극단의 이미지를 볼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나를 항상 놀라게 하고, 또 매우 특이한 일이기도 하다.
요 며칠 전에 펜과 잉크와 연필로 Emil Breton의 ‘일요일 아침’을 보고 작은 드로잉을 그렸다. 그의 작품이 내 마음에 얼마나 와닿았는지! 네가 내적인 삶을 살찌우는 것들을 찾았다니 기쁘다. 그것이 위대한 예술이 하는 일이고, 자신의 가슴과, 정신, 영혼을 바친 사람들, 또 말과 행동이 영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사람들의 작품이 그러하다. 예술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사람이 자신이 본 것을 기억할 수만 있다해도, 사람은 결코 게으름을 피우거나, 진정으로 쓸쓸하다거나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오는 중에 본 많은 것 중에서 몇몇은 대강이나마 스케치를 해 두는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진짜 해야할 일을 못할 지도 모르니까, 애시당초 시작하지 않는 게 나을 성 싶다. 그래도 서둘러 ‘Au Charbonnage'의 작은 스케치는 했다. 뭐 그다지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걸 스케치한 까닭은 이곳에서는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을 엄청나게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상당히 특색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집은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다. 그것은 커다란 석탄 창고에 딸린 작은 여인숙으로, 일꾼들이 점심 시간에 빵을 먹고 맥주를 한 잔 마시러 오는 곳이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광산에 있는 광부들을 전도하는 복음 전도사 자리에 지원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적어도 스물다섯 살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뿌리랄까 기반이랄까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빛’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그렇다면 누가 이것을 가장 필요로 하겠느냐? 누가 그걸 들을 귀를 가지고 있단 말이겠느냐? 어두운 탄광에 있는 광부처럼 어둠 속에서 걷는 사람, 지구의 한 가운데서 걷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복음서의 말에 진정으로 감명을 받고, 또 그것을 믿는다는 걸 경험은 가르쳐 준다.
벨기에 남부 Mons 근교에, 프랑스 국경과 맞닿은 곳에 Borinage라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다수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특이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복음 전도사로서 그곳에 간다는 것은 정말로 바라던 일이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가장 필요로 하고, 또 복음이 이들에게 적합한 것이기도 하다. 평일에는 가르치는 일에 헌신할 셈이다. 그런 지역에서 한 삼 년간 고요해 일할 수 있다면, 항상 배우고 관찰하면서 말이다, 그런 다음엔 뭔가 정말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지만 확신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서른 살 가량에 준비가 되기를, 독특한 훈련과 경험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내 일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기를, 지금보다 더 성숙되기를 바란다.
de Jong 목사님과 Pietersen 목사님이 요구한 삼 개월의 수업 기간이 지나갔다. de Jong 목사님, Bokma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두 분은 이곳 플랑드르 토박이 학생들에게 허용해주는 것과 똑같은 조건으로 학교를 다닐 수는 없다는 구나. 학교에 머물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빈털털이 상태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마 Borinage로의 계획을 곧 시도해야 할 듯하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오랜 확신 없이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없다면 사람은 용기를 잃기 마련이다.
Borinage, 1878년 12월
이곳 Borinage에는 그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뭉텅거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림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정말 그림같다. 모든 것이 말을 걸고 하나하나가 특색이 있다. 요사이 땅은 눈으로 덮혀 있어서, 모든 것이 농민 화가인 Breughel의 중세풍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붉은 색과 초록 색, 검은 색과 흰색의 그 독특한 효과를 정말 멋들어지게 표현해내는 법을 알고 있었던 다른 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가시나무가 울타리를 이룬 사이로 우묵한 길이 있고, 그 곁에는 뿌리가 환상적인 혹투성이의 고목들. 이러한 것들은 Durer의 동판화 ‘죽음과 기사’에 나오는 길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광부들이 흰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았는데 퍽이나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이 사람들은 상당히 거멓다. 어두운 탄광에서 햇빛 속으로 나올 때의 그들의 모습은 연상 굴뚝소제부의 모습이다. 광부들의 집은 아주 작아서 차라리 오두막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합할 듯하다. 이 집들은 그 우묵한 길을 따라, 또 숲속에, 아니면 언덕 비탈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여기 저기 이끼 덮힌 지붕도 보이고, 저녁이면 불빛이 다정스레 작은 유리창을 뚫고 빛난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서나 charbonnages라 불리는 탄광의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굴뚝과 엄청나게 높은 석탄 더미가 눈에 띈다. Bosboom의 커다란 드로잉, Chaudfontaine이 이 지역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물론 Chaudfontaine은 철광산 지역이고 이곳에는 모든 게 석탄이긴 하지만.
우리 브라반트 지방에는 오크나무의 총림(叢林)이 있고, 홀란드에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정원과 들판과 목초지 주변에서 산사나무 울타리를 볼 수 있다. 눈이 내린 바로 현재의 광경은 복음서의 페이지 처럼, 흰 종위에 검은 글자가 빼곡히 박혀있는 듯하다.
내 거소로 삼고 싶은 작은 집을 하나 세냈지만, 현재로서는 단지 작업실 아니면 서재로서 밖에 역할을 못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도 Denis 씨 댁에서 하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벽에다 복제화를 몇 장 붙여두었다.
광부들의 말은 이해하기가 그닥 쉬운 편은 아니지만, 그들은 일상적인 프랑스 어를 빨리 유창하게만 말한다면 잘 이해하는 편이다. 그건 물론 그렇게 말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말하는 이 지역의 방언과 자연스럽게 닮기 때문이다.
이미 이곳 회중 앞에서 몇 번 설교를 했다. 특별히 종교적 집회를 위해 준비된 꽤 큰 방에서 뿐만 아니라, 광부들이 그들의 오두막에서 저녁에 가지곤 했던 모임(이 모임은 성경 강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에서 말이다. 거기다 마구간이나 헛간에서 예배를 돕기도 했다. 너도 보다시피 이 모든 일이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이번 주 집회에서 나는 사도행전 16장 9절 ‘그리하여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보이니, 마케도니아 인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를 설교 주제로 골랐다. 내가 그 마케도니아 인이 어떠했는가, 복음의 위안과 유일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지식을 필요로 하고 갈망했던 그를 묘사하려고 애쓸 때 사람들은 나의 말에 귀기울였다. 우리는 어째서 그를 노동자로, 얼굴에 슬픔과 고통과 피로의 주름이 깊게 패인, 광채나 사람을 홀리는 매력은 없지만 불멸의 영혼을 지닌, 그러면서 사라지지 않는 양식, 즉, 하느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노동자로 생각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간은 겸허하게 살고, 공연히 높은 목표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복음서에서 마음의 온순함과 소박함을 배워 자신을 낮은 것에 적응시키면서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
이곳 사람들은 정말 무지하고 배운 게 없어서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사려분별 있고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용감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다. 키는 작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다 눈은 우수를 품은 듯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일에 재주가 있고, 끔찍할 정도로 여심히 일한다. 성격은 약간 신경질적인 데가 있는데, 그건 소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타고난, 뿌리깊은 증오와 깊은 불신을 보인다. 목탄 버너에게는 목탄 버너의 성격과 기질을 가져야지, 젠체하는 자부심이나 지배력 따위를 보였다간 이 사람들과 잘 사귀기는커녕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도 없으리라.
목탄 버너 가족의 늙고 작은 할머니를 방금 전에 심방했다. 그녀는 매우 아프지만, 인내심이 있고 믿음이 깊었다. 할머니와 성경 한 구절을 같이 읽고 그들 모두와 함께 기도를 드렸다. 이곳 사람들은 Zundert와 에텐의 브라반트 사람들처럼 단순함과 선한 본성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타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향수에 젖지만, 반대로 향수에 젖은 외국인들은 이곳에서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곳에서 영구 임명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리라.
장티푸스와 이곳 사람들이 ‘괴상망칙한 열병(la sotte fievre)'이라 부르는 악성 열병이 여러 건 발생했다. 괴상망칙하다고 부르는 것은 열병에 걸리면 악몽같은 나쁜 꿈을 꾸고 정신착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는 전 가족이 열병으로 앓아 누웠는데, 도움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환자들이 환자를 간호하는 형편이다.
광부들은 대부분 열병으로 몸이 마르고 안색이 창백하며, 풍파에 시달리고 피기도 전에 시들어 지치고 쇠약해 보인다. 거기다 여자들은 전체적으로 핏기가 없는 게 진이 빠진 모습이다. 탄광 주변에는 연기로 새카맣게 된 죽은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가난한 광부들의 오두막과, 가시나무 울타리, 똥무더기, 잿더미, 쓸모없는 석탄 더미 등이 보인다. Maris는 이 광경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 나도 조만간 조그만 스케치를 하도록 해야겠다.
근자에 흥미로운 탐험을 했다. 여섯 시간 동안 탄광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위험한 탄광 중의 하나로, Marcass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 탄광은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라진 것으로 악명이 높다. 하강 중이나 상승 중에, 아니면 독가스에 의해, 혹은 가스 폭발로, 땅 속의 물 때문에, 낡은 갱도가 붕괴되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생명들이 이 안에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음침한 장소였다. 첫 눈에도 주변의 모든 것이 황량하고 황폐해 보였다. 나에게는 훌륭한 가이드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삼십삼 년 간이나 일해온 사람으로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분이었다. 모든 걸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 내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칠백 미터 아래로 내려가 지하 세계의 가장 후미진 구석을 탐사했다.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하고 있는 maintenages 혹은 gredins (광부들이 작업을 하는 탄갱)은 caches라 불린다. 누군가 maintenages를 그릴 시도를 한다면, 그건 뭔가 새롭고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아니 그 보다는 본 적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거친 통나무가 받치고 있는 아주 좁고 낮은 갱도 안에 탄갱이 연이어 뚫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라. 이 각각의 탄갱 안에는 검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조악한 아마포 작업복을 입은 광부가 작은 등불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분주히 석탄을 파내는데, 어떤 탄갱에서는 광부가 서서 작업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아예 누워서 작업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지하 감옥의 어둡고 음침한 통로나 직조기가 죽 늘어서 있는 모습, 아니면 농부들이 가지고 있는 빵 오븐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어떤 곳에서는 물이 뚝뚝 새어나오는 데, 광부의 등불의 빛이 이상한 효과를 내 종유석 동굴에서처럼 반사된다. 광부들 중 일부는 maintenages에서 일하고 다른 이들은 캐낸 석탄을 작은 탄차에 실는다. 주로 아이들, 사내 아이들뿐 아니라 계집 아이들도 이 일을 한다. 칠백 미터 지하인 이곳에도 말을 묶어 두는 곳이 있어, 늙은 말 일곱 마리가 대기중이다.
뭍에 오른 수부(水夫)가 바다를 그리워 하듯이, 그들을 위협하는 온갖 위험과 곤경에도 불구하고, 광부들도 마찬가지의 심정이다. 광부들은 지상에 올라와 있기 보다는 지하에 있기를 바란다. 생활이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이곳 마을들은 황폐하고, 버려져 죽은 듯이 보인다. 이곳에서 몇 년을 살더라도 탄광에 내려가보지 않았다면 이곳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질 수 없으리라.
일에 전념하다보니 예전에 흥미를 느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하거나 관심을 지속시킬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구나.
오늘 밤에는 눈이 녹아 내렸다. 눈이 녹아내리는 언덕의 모습이 얼마나 그림같은 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제 눈이 다 녹으며, 다시금 푸른 옥수수가 자라는 검은 들판을 볼 수 있게 되겠지. 외부인에게 이곳 마을은 정말 미로이다. 광부들의 작은 오두막이 위치한 무수히 많은 좁은 길과 골짜기,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게 기적이다. Scheveningen 같은 마을, 특히 뒷골목이나, 우리가 그림에서 익히 보아온 브리타니 의 마을들과 비교해 보면 잘 연상되리라.
며칠 전 밤 열한 시 경에 아주 엄청난 폭풍우를 경험했다. 우리 집 바로 가까이에 Borinage의 상당 부분을 멀리 아래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 서면 굴뚝이며, 석탄 더미며, 광부들의 작은 오두막, 개미굴의 개미처럼 낮 동안에 이리 저리 분주히 왔다갔다 하는 조그만 검은 형체들이며, 또 더 멀리로는 어두운 소나무 숲이며, 그 앞에 윤곽만 어슴푸레 보이는 작고 흰 오두막이며, 교회의 첨탑 몇 개며, 그 뒷편에 서있는 풍차간이며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이 모든 것 위로 전체적으로 옅은 안개가 드리우고, 산의 그림자가 일궈낸 빛과 어둠의 효과가 환상적인 게, 렘브란트나 Michel 혹은 Ruysdael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번 폭풍우 동안에, 번개의 섬광이 칠흑처럼 어두운 밤 가운데 이따금씩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게 만들면서 이상한 광경을 연출해 내었다. 근처에 있는 Marcasse 탄광의 크고 음침한 건물이, 번개의 섬광에 반사되면서, 탁 트인 들판에 고립되어 외따로 서있는 모습이, 정말 대홍수 때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폭우와 어둠 가운데 보였을 그대로의, 노아의 방주의 거대한 선체를 떠올리게 했다. 이 폭풍우의 인상을 가슴에 담고, 오늘 밤 성경 공부 시간에 배가 난파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최근에 나는 작업실에, 그러니까 Pietersen 목사님의 스튜디오에 또 들렀다. 목사님은 Schelfhour나 Hoppenbrouwers 풍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미술에 대한 생각이 훌륭하시다. 목사님은 또 내 스케치 중의 한 장, 광부를 그린 것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종종 밤늦게까지 드로잉을 한다. 뭔가 기념될 만한 것을 남기고, 이곳에서의 일들이 무심결에 불러일으키는 생각을 공고히 하기를 바라면서.
저만치 서있는 봄이 그림의 새로운 소재를 가져오리라. Israels는 이번 겨울에 무엇을 그렸을까? 종형 Mauve와 Maris는? 이곳에 온다면 그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을 수도 없이 찾아낼 텐데. 흰 말이 끄는 수레가 탄광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싣고 집으로 향할 때, 사람들은 Israels의 ‘난파’를 연상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매순간 사람을 강렬하게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Mauve나 Maris나 Israels의 그림은 자연 그 자체보다 더 많이, 더 분명하게 말한다. ‘예술은 자연에다 인간을 더한 것이다(‘L'art c'est l'homme ajoute a la nature.')’*** 나는 아직도 예술이란 단어에 대한 이보다 나은 정의를 찾을 수가 없다. 자연, 진실, 사실. 예술가가 이런 것에서 끄집어 내고, 표현을 부여하고, 얽힌 것을 풀고, 자유롭게 하며, 분명하게 한 중요성과, 개념과, 특성 이런 것이 덧붙여진 것. 그게 바로 예술이리라.
책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 근래 나는 틈나는 대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는데--세상에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노예 제도가 있다--작가는 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책에서 사물에 새로운 빛을 부여하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 중요한 문제를 최대한의 지혜와 열성과 관심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 때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테오 네가 이곳까지 와준걸 고맙게 생각한다. 함께 보내는 가운데, 적어도 우리 둘 다 여전히 인생의 바다에 있다는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너를 다시 만나, 너와 함께 거니노라니, 예전에 가졌던 것과 꼭 같은 감정을 느꼈다. 마치 인생이 우리가 가치있게 여겨야 할 뭔가 좋은 것, 소중한 것이기라도 한 양.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우울했던 것과는 반대로 쾌활하고 생기있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차적으로 삶은 나에게 있어서는 별로 가치도 없고, 중요성도 없으며,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고 우정이나, 애정, 친교의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나 자신이 돌이나 쇠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분별력 있고 정직한 사람이 그러하듯, 이러한 것들의 결핍은 공허함과 달랠 수 없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이곳까지 나를 찾아준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를 네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현재로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고 대신에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는 생각만 강하다. 그렇긴 하지만 아마 상황 파악을 잘 하지 못하는 잘못은 나의 몫이므로, 내 생각에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고, 거기다 가는 길이 어렵긴 하지만, 며칠 동안은 에텐에 갔다와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테오 너의 방문을 고맙게 여기는 가운데, 물론 나는 또 우리 둘이 나눈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네가 한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이 들은 것이다. 개선과 변화를 불러올 계획, 기운을 차리는 것 등등. 하지만--테오야, 내 말에 화내지 말기를--나는 약간 겁이 난다. 나는 이전에 그 말들을 따랐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 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종국에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나고 말았는지 모른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시간들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기 그지없다! 너도 거기에 있었으니까, 어떻게 일을 계획하고, 논의하고, 논쟁을 벌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잘 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혜와 최상의 의도 아래 이루어 졌지만, 결과는 얼마나 비참했는지! 전체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는지! 내가 지금껏 겪어야 했던 최악의 시간이었다.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이 가난한 지역, 이 거칠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힘겨운 업무를 해나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람직하고 매력적으로 되었는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최상의 의도로 한 현명한 충고를 따를 경우 그 결과가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 경험들은 너무나 끔찍스럽다. 그 간의 해악과 슬픔과 역경이 너무나도 커서 이 비싼 대가를 치른 경험에 의해 이제 더 이상 양측이 더 현명해 지려고 애쓰지는 않아야 하리라.*** 이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겠니? 그 당시 표현을 따르자면 ‘내 앞에 놓여진 목표에 도달하려 애쓰는 것’이었는 데, 사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목표이다. 그것을 향한 야망은 두드러지게 줄었고, 당시에는 그것이 그럴 듯해 보이고 또 그렇게 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본다. 물론 그것들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렇다. 내가 존 앤드리 목사의 설교가 로마 카톨릭 사제의 설교보다 더 복음적일 것도 없다고 확언하자, 복음 전도사인 프랭크가 그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목회(牧會 Academy)가 정해 준 견해를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는 철학 책에서보다 풀 베는 사람으로부터 나에게 더 유용한 교훈을 얻기도 했다.
내 인생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것--진정으로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현재의 나보다 훨씬 나은 나였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내가 그걸 갈망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 자체보다 더 나쁜 구제책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계산서 용지나 명함 등을 인쇄하는 조판공(彫版工)이나, 부기원이나, 목수의 도제가 되거나, 아니면 제빵 쪽으로 헌신하든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한 그 밖의 유사한 많은 일(흥미롭게도 조금씩 다른)을 해보라는 테오 너의 충고를 내가 글자그대로 따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래, 너는 이렇게 말했지. ‘나는 형이 나의 충고를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건 아니야. 내 말은 형이 하루하루를 게으름을 피우며 허송하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끝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야.’
우선 나의 ‘게으름’이란 게 이상한 종류의 게으름이라는 걸 밝히고 싶구나. 이 게으름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내 스스로를 변호하기가 다소 어렵긴 하지만, 테오 네가 조만간에 나의 게으름을 다른 각도에서 봐주지 않는다면 유감천만이다. 사람들의 충고, 이를테면 빵장수가 되라는 충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렇게 하는 게 사실 확고한 대답은 되리라(언제나 빵장수나 이발사나, 사서 등의 직업은 번개처럼 재빨리 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지만 그건 동시에 당나귀를 타고 가는 잔인한 인간이라고 사람들이 비난을 하니까 즉시 당나귀에서 내려와 어깨에 당나귀를 매고 끙끙거리며 길을 가던 사람의 행동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어리석은 대답이 아닐까?
이제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나는 진심으로우리 둘의 관계가 두 사람 다에게 있어서 더욱 친근한 것이 되었으면 더욱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또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골치거리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거나, 또 내 자신이 침입자나 부랑자라고 여겨져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정말로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면, 견딜 수 없는 고뇌가 나를 엄습하고 나는 절망감에 대항해 투쟁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은 나를 견딜 수 없이 괴롭이지만, 더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 사이와 또 집에 있어서의 모든 불화와 불행과 문제가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때때로 나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의 구렁텅어리로 몰아넣을 때, 그러면 한참 후에 동시에 이런 생각도 떠오른다. 이건 단지 나쁜 꿈이야. 그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아마도 상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나은 방향에서 지금의 처지를 보게 될 거야.
그러나 현실은 결국엔 모두 사실이고, 더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지나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는 것은 어리석고 미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겨울이면 때때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몰려오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여름이 곧 온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악이 선을 훨씬 능가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허락하든 않든 간에 마침내 살을 에는 추위도 끝이 나고, 어느 날 아침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얼음이 녹는다. 날씨의 상태를 우리 마음의 상태나 상황--변화무쌍한 날씨 같은--에 빗대어 본다면, 나도 아직은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에 대한 약간의 희망은 가져도 좋을 성 싶다.
현재로서는, 편견과 세속적이고 올바르기 짝이 없는 그 밖의 다른 특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전 가족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을 넘어서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긴 하지만, 점차적으로 느리지만 분명이 진정어린 이해가 우리들 사이에 다시 싹트리라는 사실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새들에게는 깃털을 바꾸는 털갈이 시기가 어려운 시기이듯이 사람에게는 역경과 불운이 그러한 시기이다. 인간은 그 안에, 그러니까 털갈이 시기에 머무를 수도 있고, 또한 새롭게 태어나 그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그건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 져서는 안 되고, 거기다 결코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로서는 떠나는 것이,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최선책이고 가장 합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네 앞에서 없어지도록 하겠다.
나는 열정적인 인간이라 나중에는 어쨌거나 뉘우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소간의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하고 또 그런 유혹에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나은 경우에도 이따금씩 나는 너무 빨리 말하고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도 때로는 똑같이 이런 무분별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이 이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자신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험한 인간이라고 여겨야 할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무슨 수를 쓰서라도 그 똑같은 열정을 좋은 쪽으로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책에 대한 열정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거기다 빵을 먹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속적으로 교양을 쌓고 싶다. 또 그림이나 예술적인 것에 둘러쌓여 있을 때 가장 높은 열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격렬한 열정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뉘우치지 않는다. 그 세계에서 멀리 떠난 지금도 나는 종종 그림의 세계에 향수를 느낄 지경이니까.
한 때는 나도 렘브란트를 잘 알았다. 거기다 밀레와 Jules Dupre와 들라크루아와 밀레(Millais)와 M. Maris 등도.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내 주위에서 그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영혼이라 불리는 그것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면서, 언제까지나 영원히 줄기차게 추구해 나갈 따름이다. 따라서 나는 이 그리움에 무릎을 꿇는 대신에 스스로에게 ‘그 땅, 즉 아버지의 땅은 어디든지 있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절망에 굴복하는 대신에 나는 능동적인 우수(憂愁)를 택했다. 정체와 비탄 속애서 절망하는 그런 우수가 아니라 희망하고 열망하고 추구해 나가는 그런 우수. 그래서 나는 내가 기왕 가지고 있는 책과 구할 수 있는 책, 예를 들자면 성서와 Michelet의 ‘프랑스 혁명’, 지난 겨울에는 셰익스피어와 빅토르 위고와 디킨스, 그리고 해리엇 비처 스토와, 근래에는 아이스킬로스, 또 나아가서는 덜 고전적인 몇몇 다른 사람들의 작품과 몇몇 훌륭한 ‘작은 걸작들’을 상당히 진지하게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리고(choquant) 또 그들을 놀라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정해진 격식과 풍습과 사회적 관례에 위배되는 짓을 한다면, 특히나 용인받기 힘든 일을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리라.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종종 내 외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그렇다는 걸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테오야, 가난과 결핍이 그 부분적인 원인이기도 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뿌리깊은 억제도 한 몫을 한다. 거기다 때로 그것은 사람을 사로잡는 어떤 공부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 할 고립을 확보하는 좋은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오 년 이상--정확히 얼마나 오랫 동안 인지는 모르겠지만--뚜렷한 직장없이 이곳 저곳을 헤매었구나. 너는 ‘언제부터인가 형은 세상에 굴복하여 파락호처럼 지내왔어. 해 놓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라고 말한다. 네 말이 정말 사실일까?
이따금씩 내 스스로 생활비를 벌긴 했지만 이따금씩은 친우들이 동정심에서 도움을 주곤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능력껏 살아왔다. 물론 내가 많은 이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 경제적으로 끔찍한 상태에 있다는 것, 미래가 너무나도 음울하다는 것, 더 잘할 수도 있었다는 것,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 이 모두가 사실이긴 하다. 거기다 내 공부도 별반 보잘 것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으며, 내 욕구가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 무한할 정도로 더 크다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것이며,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는 또 아마 이렇게 말하리라. ‘왜 어른들이 원한대로 계속하지 않았지? 어른들은 형이 대학에 들어가서 계속해 나가기를 원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가, 미래마저도 지금 내 앞의 길의 그것보다 별로 나아보이지 않았다.’***
덧붙여 너에게 복음 전도사의 경우도 예술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말만은 해야겠구나. 학교라는 것은 종종 혐오스럽고, 전제 군주처럼 오만하고, 공포가 쌓인 비실용적인 곳이다. 이곳에는 편견과 인습이라는 강철 갑옷과 투구를 입고 쓴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책임자가 되면 자리를 제멋대로 배분하며,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특권을 나눠 먹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의 하느님은 셰익스피어의 술취한 폴스타프의 하느님처럼 ‘교회 안에(le dedans d'une eglise)!’만 있다. 실제로 복음주의자 임을 자청하는 신사분 중의 몇몇은 영적인 것에 있어서 술취한 사람과 똑같은 견해를 같고 있는 것이 우연찮게 드러나곤 한다(그들이 만일 인간적인 감정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 다소나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로서는 학자들을 존경하는 편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믿는 것보다 존경할만한 학자는 훨씬 찾아보기가 힘이든다. 현재 내가 일자리를 잃은 까닭 중의 하나는, 나아가 수 년 동안 내가 일자리를 갖지 못한 까닭 중의 하나는, 자기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리를 주는 이 신사분들과 내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위선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옷차림 따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분명히 밝혀두건 데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너는 또 말한다. ‘종교에 대한 형의 생각은 불가능한 것인데다 형은 어린애처럼 유치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 인간에 있어서나 그가 행한 일에 있어서나 내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이고 숭고한 미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또 인간에 있어서나 그가 행한 일에 있어서나 나쁘고 잘못 된 모든 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는 최선의 길은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친구와 아내와, 그 어떤 것,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되, 고귀하고 진지하며 친근감 넘치는 공감으로, 힘껏 분별력있게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더 깊이, 더 잘, 더 많이 알려고 애쓰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인도한다.
누군가 렘브란트를 진지하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는 그걸 믿게 되리라. 또 누군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한다면, 그도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는 또한 위대한 것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지고한 힘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리라. 누군가 아마도 짧은 기간 동안 비참함이라는 커다한 대학에서 무료 강의를 들었다면, 그 때 그가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리고 그것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면, 그 역시도 믿음에 이르게 되리라. 그리고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거소다 더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 위대한 예술가, 진지한 대가들이 그들의 걸작품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의 진정한 중요성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그것도 우리를 신으로 인도한다. 한 사람은 책에다 그것을 쓰고 말했으며, 다른 사람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많이 생각해라. 한시라도 생각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라. 그것이 무의식 중에 너의 생각을 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 우리는 모두 읽는 법을 아니까, 읽도록 애쓰자!
지난 여름 너의 방문 중에, 우리 둘이 함께 사람들이 La Sorciere라 부르는 버려진 채굴장 근처를 산보할 때, 너는 예전에 우리 둘이 Ryswyk의 오래된 운하와 제분소 근처를 함께 거닐 던 때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지. ‘그 때 형과 나는 많은 것을 약속하였지.’ 그런데 너는 또 ‘그 이후로 형은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더 이상 예전의 형이 아니야’라고 덧붙였지. 그건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바뀐 것은 내 삶이 그 때는 덜 어려웠고, 내 미래가 덜 어두웠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 상태나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사고하는 방식, 이런 것은 바뀌지 않았다. 만일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다면, 그 당시에 이미 생각하고 믿고 사랑했던 것을 지금은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믿고 사랑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렘브란트나, 밀레나, 들라크루아나, 그 밖의 누구든 간에, 좀 덜 열광적으로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테오 네가 믿는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반대가 사실이니까. 하지만, 테오야, 사람이 믿고 사랑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셰익스피어 안에 렘브란트 적인 어떤 것이 있고, 미실레 안에 Correggio 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빅토르 위고 안에는 들라크루아 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 복음서에는 렘브란트 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그 반대로 렘브란트 안에는 복음서 적인 어떤 것이 있다. 또 버니언(Bunyan) 안에는 밀레 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해리엇 비처 스토에는 Ary Scheffer 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제 네가 그림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히 공부한 한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면, 책에 대한 사랑도 렘브란트를 향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신성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 더 나아가 나는 이 두 가지가 상호 보완하여 완전하게 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예전에 너와 내가 Haarlem 미술관에서 오랫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Fabritius의 한 남자의 초상화를 매우 좋아한다. 그래, 그렇지만 나는 마찬가지로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시드니 카턴도 좋아한다. 셰익스피어는 정말 어찌나 아름다운지! 누가 그처럼 신비로울 수 있을까? 그의 언어와 문체는 열병과 감정으로 떨리는 화가의 솔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는 법,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이것저것을 부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자신의 불충실함에 충실하며, 비록 변하긴 했지만 똑같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근심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 쓸모있는 인간이 될까? 뭔가 목적에 봉사하고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더 배울 수 있을까’이다. 테오야, 이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데, 나는 내 자신이 가난에 발목을 잡혀, 어떤 일에 참여를 못하고 배제되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어떤 필요한 일은 내 능력 밖이다. 그것이 우수(憂愁) 없이는 견딜 수 없는 한 이유이고, 그래서 인간은 우정과 강렬하고 진지한 애정이 있어야 할 곳에서 공허감을 느낀다. 인간은 또 끔찍스러운 낙심이 자신의 도덕적인 에너지를 갉아먹는 걸 느낀다. 운명은 애정의 본능에 장애물을 설치한 듯이 보이고, 불쾌감이 물밀 듯이 밀려와 우리를 질식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오 하느님, 얼마나 오래!’ 이렇게 울부짖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 내부의 생각들, 그것들은 바깥으로 드러나기나 하는 것일까? 우리 영혼에는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 있을지라도 아무도 그것에 자신의 몸을 덥히려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은 단지 굴뚝에서 나오는 약간의 연기만을 보고는 그냥 지나쳐 제 갈길을 간다. 테오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내부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살피며 자기 안에 소금을 지니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누군가가 와서 그 근처에 앉아 있을 때, 아마도 그곳에 정착하려 하기라도 한다면,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조바심이 날까?***
현재로서는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이 아주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데, 사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계속해서 그럴 듯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어쩌면 일이 자 풀릴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니.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거기에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에 나는 말하리라. ‘마침내! 보아라, 결국엔 뭔가가 있지 않았느냐’고.
테오가 나를 게으른 놈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기쁜 일이리라. 게으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둘은 엄청난 대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으름과 성격상의 우유부단함과 본성이 비천하기 때문에 게으른 그런 인간이 있다. 나를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보고싶다면 그렇게 보아도 좋다. 그 다음에는 다른 류의 게으른 인간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게으르며, 자신이 어떤 우리에 감금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행동을 하고자 하는 엄청난 갈망으로 내부적으로 소진되고 만다. 공정하게 혹은 공정하지 못하게 망쳐버린 명성, 가난, 치명적인 상황, 역경, 이런 것들이 인간을 죄수로 만든다. 그리고 감옥은 또한 편견과 오해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치명적인 무지, 불신, 거짓 수치라고 불리워 진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가두어 두고, 감금하며, 또 자신을 매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장애물, 벽을 느낀다. 그런 사람이 항상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가를 알지는 못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렇다. 나도 뭔가 쓸모있는 인간이며, 내 삶에도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현저하게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내 내부에는 뭔가가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람을 이러한 속박 상태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그건 깊고 진정한 애정이다. 친구가 있다는 것, 형제가 있다는 것, 사랑, 이런 것들이 최고의 힘으로, 마법의 힘으로 감옥을 열어주는 것이다. 공감이 새롭게 눈뜨는 곳에 삶은 복원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택한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럴 때 비탄은 나의 몫이 되리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러하다. 지속하고, 지속하는 것, 그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너는 또 이렇게 물으리라. ‘형의 분명한 목표가 뭐지?’ 그 목표는 앞으로 점점 더 분명해지리라. 거친 손놀림이 스케치가 되고, 또 그 스케치가 그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그것에 진지하게 몰두하고, 휙휙 지나가고 스쳐가는 생각과 상념을 고착될 때까지 되새김으로써, 느리지만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내가 이 세상에서 영락했다면, 너는 그 반대로 잘 나아가고 있지 않니. 내가 사람들의 공감을 잃어버렸다면, 너는 그 반대로 그걸 얻지 않았니. 그게 나를 정말 기쁘게 한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테오 너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 우리 두 사람은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시간이,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밀레의 커다란 드로잉을 모사하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Le Semeur)’뿐만 아니라 ‘한낮(Les Heures de la Journee)’은 이미 끝낸 상태이다. 테오 네가 그것들을 본다면 전적으로 불만만 표시하지는 않으리라. 이미 밀레의 복제화를 스무 장 넘게 갖고 있긴 하지만, 네가 더 부쳐준다면 기꺼이 모사하리라는 걸 이해하겠지. 그 대가를 정말 진지하게 연구해보고 싶구나. ‘삽질하는 사람(Les Becheurs)’의 커다란 동판화가 귀하다는 건 잘 알지만, 그걸 한 번 찾아봐 주고 가격이 어느 정도 하는 지 나에게 알려주렴.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 나도 광부들의 드로잉으로 몇 페니 정도는 벌게 되지 않겠니. 그 때는 그 그림을 꼭 갖고 싶구나.
이전과 마찬가지의, 아니 오히려 더 가열찬 열성으로 지금 ‘들판에서의 노동(Les Travaux des Champs)’을 모사하고 있다. 열 장이나 스케치를 했다. 더 많이 그렸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Tersteeg 씨가 친절하게도 빌려주신 Bargue의 ‘목탄 습작(Exercices au Fusain)’을 그리느라고 시간이 없었다. 거의 지난 두 주일 동안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작업을 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나는 연필의 움직임에 활력이 샘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밀레나 Breton, Brion, 보그턴 같은 대가들롭터 인물 드로잉을 연구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J. Breton의 복제화 중에서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어둡게 윤곽이 드러나는 ‘이삭줍는 사람들’이 들어 있다.***
새벽에 남자와 여자 광부들이 눈을 맞으며 가시나무 울타리를 따라난 길을 걸어 수갱(竪坑)으로 향하는 모습을 드로잉으로 옮겨 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여명 가운데 흐릿하게 보일 듯 말 듯 지나가는 그림자 같았고, 뒷편으로는 광산의 커다란 구조물과 광재(鑛滓) 더미가 하늘을 배경으로 흐릇하게 솟아 있었다. 지금 그린 것보다 더 잘 그 드로잉을 다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pedant은 광부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 그린 것인데, 결과는 썩 좋지는 못했다. 얼룩덜룩한 석양을 배경으로 빛이 살짝 건드린 갈색 윤곽의 효과를 살리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규칙적으로 Bargue의 ‘데생 강의(Cours de Dessin)’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 책을 먼저 끝마치고 다른 일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 책이 하루하루 내 정신과 내 손을 더욱 유연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본보기로 실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다.*** 틈나는 대로 Tersteeg 씨가 역시 빌려준 해부학에 관한 책과 원근법을 다룬 책을 읽고 있다. 공부는 매우 딱딱하고, 이 책들이 때로는 끔찍할 정도로 짜증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걸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Th. 루소의 ‘광야에 놓인 화덕(Four dans les Landes)***’를 두 번 수채화로 먼저 그린 뒤라서 세피아 물감을 이용한 커다란 드로잉을 끝내기가 훨씬 수월할 듯하다. 또 Ruysdael의 ‘덤불(Le Buisson)’도 정말 모사해 보고 싶구나. 이 두 풍경화는 똑같은 스타일과 정감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 드로잉들을 대강 스케치 하고 있는데, 그다지 잘 되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좀 나아지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더욱 나아지리라는 좋은 희망을 품고 있다. 특히 Tersteeg 씨와 너 역시도 좋은 모델들을 보내주어 나를 돕고 있으니까 말이다. 현재로서는 좋은 작품들을 모사하는 것이 이러한 기초없이 작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제법 큰 크기로, 수갱(竪坑)으로 향하는 광부들의 드로잉 작업을 계속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인물들의 위치를 약간씩 바꿔나가면서. Bargue의 다른 두 일련의 작품 모사를 끝낸 다음에는 남녀 광부들을, 어느 정도는 잘 그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연찮게 특색있는 모델을 찾는다면 더욱 좋겠지. 사실 이곳 사람들 중 특색있는 사람은 많다.
Michel의 동판화가 든 책이 있다면 그 풍경들을 다시 보고 싶구나. 이제 드로잉을 시작하기 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었으니까.
이쯤이면 너도 내가 작업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알겠지. 나 때문에 두려워 하거나 하지는 말아라. 계속해 나가기만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될 거다. 현재로서는 아주 눈부신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적당한 때에 이르면 이 가시들이 하얀 꽃망울을 맺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명백히 소산 없는 투쟁이 사실은 분만의 힘겨움과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먼저 고통이 있고, 그 다음에는 기쁨이 따른다. 너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뭔가 쓸모있는 일을 하기를 바라겠지. 그렇다면 아마도 이 일이 너와 나 사이의 공감대를 복원시키고, 서로서로에게 뭔가 도움이 되도록 해주는 길이 될 지도 모르겠다.
도보 여행을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Courrieres에 가 봐야 돼. M. Jules Breton의 화실도 구경하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화실의 외부는 적지않이 실망시키는 그런 것이었는데, 감리교적 규칙성으로 꽤 최근에 지어진 벽돌 건물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뭔가 삭막하고, 차갑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모습이었다. 화실 내부를 볼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외부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내 자신을 소개할 용기가 나지 않아 얼핏 둘러볼 수도 없었다. Jules Breton와 다른 화가들의 자취나마 찾아보기 위해서 Courrieres 다른 곳을 둘러 보았지만,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관에 놓인 Breton의 그림과 오래된 교회이 어두운 구석에서 본 Titian의 ‘예수의 매장’ 복제품뿐이었다. 그가 그린 것이 맞니? 나는 모르겠다. 서명을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미술 카페(Cafe des Beaux-Arts)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이 건물 역시도 새로 벽돌로 지은 것으로 똑같이 삭막한 느낌을 주었다. 이 건물은 저 유명한 기사, 돈키호테의 삶에서 따온 일화들을 일종의 프레스코 화법의 벽화로 장식했다. 그런데, 그 프레스코 화들이 다소 질이 떨어지는 것이라, 나에게는 그것이 그 건물을 더욱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어쨌거나 Courrieres 주변 지역을 돌아본 셈이다. 건초더미, 갈색 흙과 커피 색깔의 진흙, 이회(泥灰)토가 나타나는 이곳 저곳은 검은 색깔의 흙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아주 유별나 보이는 흰빛을 띠기도 하고. Courrieres 지역에도 charbonnage, 그러니까 광산이 있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낮 근무자들이 광산으로 향하는 걸 보았는데, Borinage처럼 남자 옷을 입은 여자들은 없었고, 단지 남자 광부들뿐이었다. 그들은 석탄가루로 시커멓게 된 치고 비참한 얼굴에다가, 다 떨어진 광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옛날 군인들이 하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이 여행이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찬 것으로, 발바닥은 부르터고 기분도 다소 우울해 진 상태로, 돌아와서는 피로 때문에 녹초가 되다시피 했지만, 흥미로운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한 여행을 통해 비참함 자체의 힘겨운 시련에 대해 다르지만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는 법이다.***
여행 중 이곳 저곳에서 나는 여행용 가방에 넣어둔 드로잉 몇 장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며칠 밤은 한데서 자야만 했다. 한 번은 버려진 마차에서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더라. 휴식처로서는 별로 권할 만한 곳이 못 되지. 또 한 번은 장작 더미를 쌓아둔 곳에서, 그 다음에는 좀 나은 곳으로 건초 더미였다. 다소 편하게 누울 만한 잠자리를 겨우 만들어 놓고 나니까, 비가 뚝뚝 떨어져서 이 날 밤도 망치고 말았지.
그러한 깊은 비참함 가운데서도 내 힘이 되살아 나는 걸 느낄 수 있었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지. ‘어떤 일이 닥쳐 오더라도 나는 다시 일어나리라. 어쩔 수 없었던 낙담의 시기에 버려 버렸던 연필을 다시 쥐고 드로잉을 계속 해 나가리라.’ 그러자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방향 전환을 하는 듯 했어. 출발을 하고 난 지금, 내 연필은 어느 정도 고분고분 해졌고, 매일매일 점점 더 그렇게 되는 듯 하다. 나를 그렇게나 낙담시켰던 것은 길고 긴, 그리고 엄청난 가난으로,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여행 중에 내가 본 다른 것은 베짜는 사람들의 마을들이다. 광부와 베짜는 사람들은 다른 노동자나 장인과는 동떨어진 무리를 형성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갖는다. 언젠가 그들을 그릴 수 있다면,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아니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그러한 유형의 노동자를 사람들의 눈 앞에 내보일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말 기쁜 일이리라. 심연, 그러니까 de profundis의 깊이에서 나온 사람, 그가 바로 광부이고, 다른 쪽은 몽상적 분위기, 약간 멍하고, 거의 몽유병자 같은 사람, 그가 바로 베짜는 사람이다. 나는 이 년간 그들과 함께 생활했으므로, 그들의 고유한 성격을 약간은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특히 광부들의 성격에 관해서는. 그리고 더욱 더 자주 나는 그 가난하고 눈에 띄지 않는 노동자들, 바꾸어 말하자면 최하층 계급이자 가장 멸시당하는 이들에게서 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거의 슬픔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아마도 생생하지만 아주 그릇되고 공평치 못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범죄자와 도둑의 무리로 간주된다.
Meryon의 동판화를 약간은 안다고 자부한다. 재미있는 걸 한 번 볼래? 그의 훌륭하고 멋진 드로잉 중 하나를 뽑아 Viollet-le-Duc나 다른 건축가의 판화와 나란히 놓아 보아라. 그러면 다른 동판화가 Meryon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거나 대조를 이루게 되기 때문에 그가 가진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네가 어느 편을 보게 될지 자못 궁금하구나. Meryon은 벽돌이나, 화강암이나, 철봉이나, 다리의 난간이나 무엇을 그리든 간에 그의 동판화에, 잘은 모르겠지만 내면적 슬픔 같은 것에 동요된 인간 영혼의 어떤 것을 부여한다. Meryon은 엄청난 사랑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서, 디킨스 작품의 시드니 카턴처럼, 특정 장소의 돌 조차도 사랑한다고들 한다.
밀레나 Jules Breton이나, Josef Israels의 작품에서도 역시 우리는 이 귀중한 진주, 인간 영혼이 더 고귀하고, 더 가치있는 색조로, 거기다 덧붙이자면 더 복음주의적으로 표현된 것을 훨씬 더 뚜렷이 발견하게 된다. 테오야, 기다려라. 내가 무얼 해낼 수 있는지는 미리부터 알 수는 없지만, 나 역시도 화가라는 것을 아마 너는 언젠가는 보게 되리라. 인간적인 뭔가가 담긴 드로잉을 몇 장 그려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먼저 Bargue의 작품과 다른 다소간 어려운 것들을 모사해야만 한다. 길은 좁고, 문도 좁을 뿐 아니라, 그걸 찾아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파리에 가는 것은 나의 열렬하고 큰 소망임에 틀림이 없을 거다. 하지만 한 푼도 못 버는 지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그리고 내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점에 다다르려면 아직 얼마 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상 필수적인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달에 백 프랑 정도는 필요하리라. 더 적은 돈으로도 살 수야 있겠지만, 그건 곤궁이고 심지어 결핍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곳에 사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하지만 현재 내가 있는 이 작은 방에서 더 오래 지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말 작은 방으로 침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이들 용이고 하나는 내 것이다. 크기가 제법 큰 Bargue의 작품을 모사하고 있노라니 얼마나 불편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구나. 그렇지만 내 맘대로 방을 옮겨 달라거나 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거기다 이 집 사람들이 이미 나에게 이 집의 다른 방은 아주머니가 빨래하는 데 꼭 필요하므로 아무래로 내어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내가 분별력 있는 훌륭한 화가와 우정을 쌓을 기회가 생긴다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익이 되리라. 하지만 파리로 가는 것은 살아있는 화가의 실례를 만나기를 기대했지만 한 명도 찾지 못했던 Courrieres로의 여행을 더 큰 규모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내 연필과 크레용과 붓을 자유자재로 놀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 해내면 내가 어디에 있든 좋은 작품을 그려낼 수 있게 될 것이고, Borinage는 유서깊은 베니스나 아라비아나 Picardy 못지 않게 그림 소재가 많은 곳이다.
매일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고, 또 새로운 문제가 솟아 나겠지만, 드로잉을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얼마나 행복한 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그걸 생각해 왔지만 나는 항상 그게 불가능한 일이고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비록 많은 것에 있어서의 나의 허약함과 고통스러운 의존성을 자각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나의 정신적인 균형을 회복했고, 매일매일 나의 힘도 증가한다.
그러므로 테오 네가 조만간 어떤 방법이나 기회를 찾게 된다면 나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그 와중에 나는 여기 광부의 작은 오두막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할 수 있는 한 잘 작업을 해나갈 것이다.
브뤼셀, 1880년 10월
너도 보다시피 브뤼셀에서 편지를 쓴다. 현재로서는 거주지를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들자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머무르던 작은 방은 너무 좁고 채광도 너무 나빠, 그곳에서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방을 바꾼다는 건 절박한 필요였다. 동생아, Cuemes에서 한 달 더 있어야 했다면, 비참함 때문에 앓아 눕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풍요롭게 지내고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내 주식은 마른 빵과 약간의 감자와 밤이다. 그렇지만 얼마간 나은 방에서 지내면서, 여유가 있을 때면 이따금씩 식당에서 어느 정도 좋은 음식을 먹다 보면 내 건강도 다시 회복되리라. 거의 이 년동안 나는 벨기에의 ‘검은 지방’에서 비참함 가운데 지냈고, 그 때문에 내 건강도 최근에는 별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그려내는 법을 익혀서 언젠가 성공을 거두기만 한다면, 나는 이 모든 걸 잊을 것이고, 단지 좋은 면만--우리가 찾아보기만 한다면 마찬가지로 찾아낼 수 있는--기억하리라. 하지만 아직은 기운을 회복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내 모든 기력이 필요할 때이니까.
아버지가 편지를 쓰셔서 한 달에 육십 프랑 씩 부쳐주실 수 있다고 하시는 구나. 이곳 생활비는 그 보다는 다소 더 들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드로잉 재료, 해부도 같은 모사할 책자, 이 모든 게 돈이 든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고, 이렇게 해야만 나도 도움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혹시나 내가 과도하게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는 말아라. 실제로는 그 반대가 오히려 내 결점이니까. 그리고 내가 좀 더 돈을 쓸 수 있다면 더 빠르게, 더 많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생활비는, 어디서 살든 간에, 적어도 항상 한 달에 백 프랑은 든다. 그 보다 아래로는 육체적으로건, 아니면 필요한 재료나 도구건, 결핍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문제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길을 걸어가는 것을 돕거나 아니면 가로 막았다. Palissy의 옛 속담을 보면 ‘가난이 성장을 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맞는 면이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와 깊이를 이해한다면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런데 그걸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명의 반 고흐가 엄청나게 부자이고, 두 사람 다, 그러니까 코르 삼촌과 Prinsenhage에 계신 삼촌이 미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 집안에서, 그리고 너와 나 같은 젊은 세대가 분야는 다르지만 똑같은 일을 선택한 상황에서, 내가 드로잉 화가로서 정규적인 일을 구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내야 하는 시기 동안만이라도 이렇게 저렇게 해서 한 달에 백 프랑 정도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걸까?’ 삼 년 전에 나는 C M(주:Cor) 삼촌과 이것과는 상당히 다른 문제로 다퉜지만 그 때문에 삼촌과 영원히 적으로 남아야 할까? 나는 삼촌이 내 적이었던 적은 없었고 다만 오해였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나. 그리고 내 잘못이 진짜로 얼마인가를 따지기 보다--사실 그런 걸 따질 시간도 없지만--잘못은 모두 내 쪽에 있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니겠니?
아무리 알뜰하고 빈한하게 산다고 해도 이곳 브뤼셀에서의 생활이 틀림없이 돈이 더 든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소나마의 배움이 없으면 진보할 수가 없으므로, 내가 열심히 작업을 해나가기만 한다면, 그러고 있긴 하지만, 아마도 빈센트 삼촌과 Cor 삼촌이 나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적어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하지 않을까 한다.
드로잉 공부를 시작한 몇몇 젊은이가 있는데, 그들은 별로 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똑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에게 힘을 주는 건 언제나 혼자 있지 않고, 똑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나도 다른 화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훌륭한 화실에서 드로잉을 계속하고 싶다. 왜냐하면 관찰할 좋은 것들이 있다는 점과 거기에 덧붙여 화가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는 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가 부족한 부분을 더 잘 느끼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나쁜 화가로부터라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Mauve매형이 Verschuur로부터 마구간과 마차의 원근법, 말의 해부 구조에 대해 많은 걸 배운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Mauve 매형은 Verschuur보다 얼마나 뛰어난 화가니!
좋은 그림과 드로잉을 마음껏 본 것도 벌써 오랜 전 일이라 이곳 브뤼셀에서 몇몇 좋은 작품을 대하고 나니까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손으로 직접 그런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솟구치더라.
지금 내가 애를 먹고 있는 원근법의 어려움에 대해 홀란드 화가들로부터 어떤 명백한 지시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의심이 간다. Heyerdahl 같은 사람(아주 다재다능한 사람처럼 보이므로)이 자신의 방법을 설명하거나 꼭 필요한 지침이나 가르침을 줄 능력이 없는 다른 많은 사람보다 나으리라. 너는 Heyerdahl이 드로잉에 있어서의 비례를 찾으려고 상당히 애를 쓴 사람이라고 말했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그거야. 훌륭한 많은 화가들이 드로잉에 있어서의 비례가 무언지, 아름다운 선, 개성적인 구성, 생각이나 시, 이런 것들이 무언지 아무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비례의 법칙, 빛과 음영의 법칙, 원근법 등은 제대로 드로잉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이야.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항상 속 빈 노력을 하는 셈이고, 결국에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말거야.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해부학의 근본을 파헤쳐 볼 작정이다. 더 이상 미루었다가는 시간만 허비하고 비싼 대가를 치른 것으로 판명날지도 모르니까.
Roelofs 씨를 만나 뵈었다. 그 분의 의견은 지금부터는 내가 거의 전적으로 실물, 그러니까 주물이나 모델로부터 드로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걸 잘 아는 사람의 지도 아래서 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그리고 그 분과 다른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해야한다고 어찌나 열심히 충고를 하는지, 나로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입학 허가를 받도록 애를 쓰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브뤼셀에서는 교습이 무료일 뿐 아니라, 난방이 잘 되고 채광이 좋은 방에서 작업을 할 수 있으므로, 겨울에는 특히 좋다고 할 수 있다.
테오 네가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좀 더 예술적인 환경이 나에게 급박하게 필요하다는 걸 더 잘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아무도 그에게 드로잉 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방법을 배울 수 있겠니? 그리고 이 세상 최고의 의도를 모두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앞선 화가의 가르침 없이는 성공할 수가 없다. 발전의 기회 를 갖지 못한다면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다. 이류 화가에 관해서는, 너는 물론 내가 거기에 속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겠지만, 그것 자체의 단순한 중요성에 있어서는 이류 혹은 평범함을 결코 경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평범한 것을 경멸한다고 해서 그 지점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것도 확실히 아니다. 우리는 이류 화가들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존경심을 갖는 것에서 출발 해야 하며, 그것이 뭔가를 의미하며,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밀레의 ‘나무꾼’을 모사한 펜 드로잉을 또 하나 완성했다. 나중에 동판화를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펜 드로잉이 좋은 준비가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펜은 연필 드로잉의 일부분을 강조하는 데에도 아주 유용하다. 그렇지만 한꺼번에 이 모든 걸 통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팔릴 만한 드로잉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내 일로부터 직접적으로 뭔가를 벌어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필화나 수채화나 동판화 기법을 일단 다 익힌 다음엔, 광산 지역이나 베짜는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가 지금보다 더 직접적으로 대상을 두고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기법을 더 익히는 것이 급선무이다.
요 근자에는 이것저것 손댈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 드로잉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럼에도 그걸 해냈다는 게 기쁘기 한량없다. 그건 상당한 크기의 해골로, Ingres지 다섯 장에다 펜으로 그렸다. 나는 존이라는 사람이 쓴 ‘화가를 위한 해부 스케치’라는 연구 책자에서 그걸 그릴 착상을 얻었다. 이 책에는 내가 보기에 아주 훌륭하고 뚜렷한 손과 발의 복제화가 몇 장 더 들어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려는 작업은 토르소와 다리 부분의 근육 드로잉으로, 다른 부분과 합치면 인체 전부가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체의 후면부와 옆면을 그릴 예정이다. 말 안해도 알겠지만 나는 굳건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연필과 펜으로 드로잉이라기 보다는 스케치에 가까운 그림을 적어도 열두 장 끝냈는데, 다소나마 나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그림들은 Lancon이 영국제 목판에다 그린 드로잉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지만, 물론 아직까지는 서투르고 어색하다. 짐꾼, 광부, 눈 치우는 사람, 눈길을 거니는 모습, 늙은 여인들, 늙은 남자 등이 작품의 소재이다. 이 작품들이 좋지 못하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그래도 무엇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늙은 짐꾼이나, 일꾼, 소년 등이 자세를 취해 주기 때문에 거의 매일 모델을 구할 수 있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아마도 군인 한 두 명이 모델 역할을 해줄 듯 하다. 드로잉의 모델들을 입힐 노동자 복을 하나씩 하나씩 구해서 모아 두어야만 될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브라반트 지방의 푸른 작업복, 광부들이 입는 잿빛 아마포 복과 가죽 모자, 그 다음엔 밀짚모자와 나막신, 또 어부들의 복장인 노란 유포(油布)와 폭풍우 용 방수모 등등. 그리고 정말 그림처럼 특색 있는 검정색과 갈색의 코르덴 복도 물론 빼놓을 수 없으며, 거기다 붉은 플란넬 셔츠와 속셔츠. 또 여성용 드레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de Kempen의 것이나, 브라반트의 보넷에다 앤트워프 근교의 것, 그리고 Blankenberg나 Scheveningen이나 Katwyk 지방의 것 등. 정말이지, 꼭 맞는 복장을 한 모델을 그리는 것, 그 길만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이다.
드로잉을 이렇게 진지하고 철저하게 연구하고, 언제나 내가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애쓴 다음에야, 내가 바라는 지점에 근접하게 되고, 그 다음에야 그 간의 필수 불가결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리라. 이곳에서 어떤 영구적인 일을 구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겠지만,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되리라. 중요한 것은 내가 발전해 나가서 내 드로잉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어쨌거나 모든 것이 조만간에 잘 풀려 나가겠지만, 아직까지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모델은 돈이 많이 먹힌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따라서 모델을 자주 부를 정도로 돈이 충분하다면 훨씬 더 잘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화실이 꼭 필요하게 되겠지.
또 한 번 풍경 드로잉을 했다. 이번에 그린 것은 히스로, 오랫동안 그린 적이 없는 것이다. 풍경화를 대단히 좋아하긴 하지만, Gavarni나 Henri Monnier나 도미에나 Henri Pille나, de Groux 등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정말 능수능란하게, 때로는 놀랄만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 낸 작품들을 열 배는 더 좋아한다. 나 자신을 이들 화가들과 비교하려는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려 나가노라면, 언젠가는 신문이나 책의 삽화 일 정도는 할 수 있는 그런 정도는 되기를 바란다. 특히나 모델을 많이, 여자 모델도 포함해서, 쓸 수 있다면 더 많은 진전이 있으리라. 그렇게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또 아마도 초상화 그리는 법도 배워야 하리라.
Cor 삼촌은 다른 드로잉 화가를 빈번히 돕는데, 언젠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삼촌이 너그러이 손을 내미시는 게 그리도 부자연스러운 일일까?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삼촌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기 때문은 아니다. 돈을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삼촌은 나를 도우실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실 수도 있고, 또 다른 예로는 잡지에 정규적인 일을 얻도록 주선해 주실 수도 있으리라.
아버지와 이런 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이렇고 저런 집안의 사람인데 이다지도 곤궁에 처해 있다는 이상하고 해명할 수 없는 사실을 두고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현재 상황이 단지 지나가는 일이고, 얼마 후에는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아버지와 너에게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나을 듯 해서, 나는 Tersteeg 씨에게 먼저 그것에 관해 편지를 썼다. 그런데, Tersteeg 씨는 내 의도를 오해하여 내가 삼촌의 보조로 살아가려 한다는 인상을 받고는, 나에게 아주 낙심천만인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한테 그럴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Roelofs 씨 같은 분은 이러한 삐뚜름한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내가 뭔가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뭔가 잘못 되었거나, 어쨌거나 어딘가에 뭔가가 잘못 되었다고 본다. 게다가 그분은 상당히 몸을 사리는 분이라, 내가 충고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바로 이 순간에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가 끈기를 가지고 작업을 해 나감으로써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활비를 절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이번 여름을 에텐에서 보내는 것이리라. 거기서도 소재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소재에 어울릴 옷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언젠가는 C M 삼촌을 만나리라. 사람들은, 집안 내 사람이든 바깥 사람이든,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나를 판단하고,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고, 따라서 너는 언제나 나에 관해서 가장 다른 평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문에 누구를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술가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하는 까닭을 아니까.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장소와 형상과 인물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온갖 장소와 구석과 구멍을 헤집는 인간은 그가 결코 머리속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많은 나쁜 의도와 악행으로 비난을 받는다.
내가 오래된 나무 줄기를 그리는 걸 보던 농부가, 내가 거기에 한 시간이나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나를 비웃고 만다. 누덕누덕 기운,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노동자라면 마냥 깔보는 젊은 숙녀는 누군가가 왜 Borinage를 찾고, 탄광의 수갱을 내려가는지 물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 역시도 내가 미쳤다고 결론 짓고 만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물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너와 Tersteeg 씨와 C M 삼촌과 아버지와 그리고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아준다면, 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다는 대신에 ‘작업을 하려면 그런 일도 필요하지. 우리는 왜 그런가 이해해’ 이렇게 말해 준다면.
현재 나는 Rappard와 같이 작업을 하고 있다. Rappard는 좋은 작품을 몇 점 그렸는데, 그 중에서 아카데미에서 잘 된 모델을 모사한 두어 점이 특히 괜찮다. 활기와 정열을 좀 더 불어넣는다면 더 나을 것이다. 거기다 자신감과 용기도 덧붙인다면. 펜으로 그린 그의 풍경 드로잉도 매우 재기발랄하긴 하지만, 여기에도 정열을 조금 더 불어 넣는다면.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테오 네가 오랜 기간 동안 나에게 돈을 부쳤더구나. 진심으로 고마움을 보낸다. 네가 그걸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굳게 믿는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점점 더 숙련되어 가고,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거나 한 달에 백 프랑은 벌 수 있게 되겠지.
제대로 드로잉 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힘겹고 어려운 투쟁이다.
에텐, 1881년 4월
이곳에 온지 벌써 며칠이 되었구나. 주위는 정말 멋지다. 그리고 얼마동안 이곳에서 조용히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서 매우 기쁘다. 가능한 한 습작을 많이 할 작정이다. 그 습작들이 나중에 드로잉을 해내는 씨앗이 될 테니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매일 같이 들판으로, 주로 히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 꽤 큰 크기의 습작들을 그리는 데, 그 중에는 히스에 있는 오두막도 있고, 또 Roozendaal로 가는 길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헛간, 이곳 사람들이 개신교 헛간이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엔 목초지 헛간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풍차간과 교회 뜰에 있는 느릅나무들. 그리고 숲의 너른 빈터에서 커다란 소나무를 자르느라고 분주한 벌목꾼의 그림. 거기에 덧붙여 짐마차, 쟁기, 써레, 외바퀴 손수레 등의 농기구 등도 한 번 그려보았다. 벌목꾼을 그린 것이 최고로 잘 되었는데, 아마 너도 그걸 좋아하리라.
Cassagne의 ‘수채화 개론(Traite d'Aquarelle)’을 사서 공부하는 중이다. 수채화를 그릴 단계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 많을 걸 발견할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지금까지 나는 전적으로 연필로 그리고, 거기다 펜이나 때로는 획이 좀 더 두터운 갈대펜으로 강조를 하거나 했기 때문에, 이 책을 보고 나면 세피아 물감이나 잉크에 관해서 좀 더 잘 알게될 것이다. 최근에 그리는 것들은 상당히 많은 드로잉이 필요한 소재이기 때문에 그런 작업 방식이 필요했다. 거기다 예를 들자면 마을의 몇 개의 작업장, 즉 대장간, 목공소, 나막신 집 등을 그리는 데는 원근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필요했다.
Rappard는 나에게 Cassagne의 책은 모조리 살 작정이라고 했다. 그는 원근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나로서는 이 고통에 이보다 더 나은 치료약은 없다고 본다. 적어도 내가 상당히 치료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그 책들 덕분이리라. 그 책들에 담긴 이론을 나는 실지로 시행해 보았다.
꼭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흰 Ingres지이다. 눈처럼 흰색은 아니고, 차라리 표백하지 않은 아마포 빛깔에 가까운 것, 색조도 낡지 않은 걸로 좀 있었으면 좋겠다. 브뤼셀에서 올 때 얼마를 가져와서 즐겁게 작업을 했다. 이 종이는 펜 드로잉, 특히 갈대 펜 드로잉에 아주 적합하다.
Willemien이 이곳을 떠나 유감천만이다. Willemien은 아주 능숙하게 자세를 취해 주었는데. 그녀와 이곳에 머물렀던 또 다른 소녀의 드로잉을 했다. 그 드로잉에다가 재봉틀도 집어넣어 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물레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반 화가나 드로잉 화가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 대신에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빈자리를 메워 주었다.
좋은 모델을 한 명 발견했다. 정원사인 Piet Kaufman 씨로, 삽이나 쟁기나 그런 엇비슷한 것을 들고 그 분에게, 우리 집보다는 뜰이나 그 분 집이나 밭에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자세를 취하는 법을 이해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절망적일 정도로 완강해서, 이 점에서 그들의 양보를 얻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사람들은 자세를 취할 때 곱게 다림질한, 예배보러 갈 때 입는 나들이옷만을 입으려 하기 때문에, 삶의 노역으로 들어가고 툭 튀어나와 그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무릎이나 팔꿈치, 어깻죽지 기타 신체의 다른 부분을 전혀 볼 수가 없다.
Liesbosch에서 드로잉을 또 하나 끝마쳤다. 날이 상당히 무더워져서, 낮 동안에는 히스에서 앉아서 작업하기엔 너무 더워 집에서 작업을 한다. 전에 테오 네가 말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사진에 나온 초상화를 몇 장 모사해 보았는데, 좋은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여기에 다시 와서 아주 즐거웠다. 너랑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고 나누는 재미란. 물론 이제는 많이 좋아졌지만 네가 떠난 다음 날 몸져눕고 말았다. 그 때 의사 Van Gent와 장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은 똑똑하고 실용적인 분이었다. 그렇게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까닭은 내가 이 시시껄렁한 병(malaise)을 뭐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건강이 좋건 나쁘건 간에, 모든 게 괜찮은 지도 알아낼 겸 의사와 이따금씩 이야기를 나누는 걸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건강에 관해 분별 있고 올바른 말을 가끔씩 듣는다면 점차적으로 건강에 대해 훨씬 더 명료한 생각을 갖게 되리라.
그 외에 나는 그 Ingres지에다 ‘목탄화 실습’을 모사하고 있다. 대상을 보고 직접 그리는 것이 Bargue의 책에 실린 표본을 보고 모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책을 모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상을 보고 직접 그릴 때 세세한 부분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큰 것을 간과하는 것은 옳지 못한데, 내 생각에는 이전의 내 드로잉이 너무 많은 경우 그러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므로 나는 Bargue(그는 단지 큰 선과 형태, 단순하고 섬세한 윤곽선만으로 표현한다)의 방법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끝마칠 즈음이면 가을로 들어서겠구나. 그 때가 드로잉 하기엔 가장 유쾌할 때이다.
내가 차츰 획득하기 시작한 능력, 그러니까 어려움 없이 단 시간 내에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강한 인상을 유지하는 능력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한다. 그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의심 없이, 주저 말고, 확신을 가지고 찬탄해야 한다.
헤이그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 화요일에 여기를 떠났는데, 지금은 금요일 밤이다. 헤이그에서 나는 Tersteeg 씨와, Mauve 매형(妹兄)과 de Bock를 보러 갔었다. Tersteeg 씨는 무척 친근하게 나를 맞아주었고, 내가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Mauve 매형과는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 때까지 같이 있으면서, 매형의 화실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았다. 매형은 내 드로잉이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조언을 상당히 많이 해주었으며,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였다. 새로 습작을 한 다음, 그러니까 얼마 안 있어, 매형을 만나 뵈러 다시 오기로 약속을 했다. 매형은 또 자신의 습작들, 드로잉이나 그림을 위한 스케치가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중요성이 없어 보이는 진짜 연습 작품들을 전부 내게 보여주면서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다. 매형은 내가 유화나 수채화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de Bock를 만나 그의 화실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사구(砂丘)를 소재로 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그림에는 멋진 것이 많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도 인물 드로잉을 연습한다면, 훨씬 더 나은 것들을 제작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그가 진정한 예술가 기질을 보유하고 있는 듯이 보이긴 하지만 그가 어떤 방향으로 귀착하게 될 지는 모르겠다. 그는 밀레와 코로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이 두 화가가 인물 작업에 상당히 고심하지 않았니? 코로의 인물화는 그의 풍경화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가 인물화를 그렸다는 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코로는 나무 줄기 하나하나를 그것이 인물이기라도 한 듯 똑같은 헌신과 사랑으로 그리고, 또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코로가 그린 나무는 de Bock이 그린 것과는 상당히 다른 무엇이다. 내가 본 de Bock의 작품 중 최고의 것은 코로를 모사한 것이었다.
몇 가지 전할 소식이 있다. 그건 내 드로잉에 변화가 생긴 것인데, 기법 면에서뿐만 그 결과에서도 변화가 왔다. Mauve 매형이 나에게 말해준 몇 가지를 참고 삼기도 하고 해서, 나는 다시 살아있는 대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목탄화 실습’을 주의 깊게 공부하고, 그걸 다시 또 다시 모사하는 가운데 인물의 드로잉에 보다 나은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유심히 보고 눈썰미 있게 관찰하는 법, 그리고 굵은 선을 찾아내는 법 등을 익혔다. 그래서 이 전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일이, 고맙게도 이제는 점차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가래질하는 남자(Un Becheur)를 다섯 번 넘게, 씨 뿌리는 남자를 두 번, 빗자루를 든 소녀를 두 번 그렸다. 그리고는 흰 모자를 쓰고 감자 껍질을 벗기는 여인, 작대기에 기대고 있는 양치기, 마지막으로는 늙고 병든 농부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팔꿈치는 무릎에 댄 채 난로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물론 나는 거기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양 몇 마리가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양 무리 전체가 따라오듯이, 땅파는 사람, 씨뿌리는 사람, 쟁기질하는 사람, 남자든 여자든, 이것들을 나는 계속해서 그려나가야 한다. 많은 다른 화가들이 이전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듯이, 시골 생활에 속하는 것은 모두 관찰하고 그려야 한다.
예전에 그랬던 것 마냥, 더 이상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지는 않는다. 자연은 항상 예술가에게 저항함으로써 시작을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한 저항 때문에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승리를 향해 더더욱 싸워나가야 할 자극제이다. 밑바닥에서는 자연과 진정한 예술가는 일치한다. 하지만 자연은 확실히 ‘만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붙잡아야, 그것도 있는 힘껏 잡아야 한다. 내가 이미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내 스스로보다는 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점차로 나아지고 있다.
점점 더 나는 인물 드로잉이 간접적으로 풍경 드로잉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좋은 것이라고 느낀다. 만일 버드나무를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실제적으로 따져도 그게 사실이지만, 그린다면, 주위 사물은 적당한 시기에 좇아오기 마련이다. 그 똑같은 나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de Bock에게 말했다시피, 그와 내가 일 년 동안 인물 드로잉에 전념한다면, 종국에 가서는 지금의 우리와는 현저히 달라질 거고, 그런데 만일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고, 새로운 아무것도 배우는 바 없이 단지 지속해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위치에조차 머무르지 못하고,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면, 또 나무를 인물인양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척추 없는, 있더라도 허약한 척추를 가진 인간이다. 그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를 위해 자세를 취해 주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 큰 돈은 아니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이므로, 내가 드로잉을 팔지 못하는 동안에는 추가적으로 드는 비용이다. 그렇지만 인물 드로잉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모델 비용은 바로 얼마 안 있어 상계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만히 보니까 지금 현재 인물의 특성을 포착해서 종이에다 제대로 옮겨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더 필요한 추세니까.
Bosboom이 우연히 내 습작들을 보고 나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기만을 원한다. Bosboom은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능력, 사람들이 그걸 분명하게 깨우치도록 해주는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헤이그에서 연필처럼 나무로 된 크레용을 가져왔는데, 그게 내가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또 작품에다 약간의 세피아 물감과 인디아 잉크를 사용해서 붓과 찰필(擦筆)로, 그리고 이따금씩은 약간의 색조를 넣기도 하면서 마무리하는 방법도 시도하곤 한다. 최근의 드로잉은 이전에 내가 했던 것들과는 거의 닮은 바가 없다는 게 사실이다.
Mauve 매형 말대로 ‘작업이 한창 신나게 진행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 헤이그에 다녀 왔다. 아마 Mauve 매형과 다른 사람들과 보다 진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첫걸음인지도 모르겠다.
내 가슴속에 뭔가 고백할 게 있다.
이번 여름 내 가슴에는 사촌 K를 향한 깊은 사랑이 싹텄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자, 그녀는 자신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남아있기 때문에, 내 감정에 결코 보답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어떻게 해야할 지 나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끔찍스런 혼란이 찾아왔다. 그녀의 ‘안 돼, 절대로, 절대로’를 받아들여야만 할까? 아니면 약간의 희망에 매달리며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인생의 작은 비참함(petites miseres de la vie humaine)’을 숱하게 맛보았다. 그래도 사랑의 작은 비참함조차도 가치가 있긴 하다. 때로는 절망에 빠지고, 지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순간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과 연관된 다른 면, 더 나은 면도 있다.
내 입장이 빈틈없이 윤곽 지어져서, 아무래도 나이든 분들과 엄청난 곤경을 겪을 것 같다. 그 분들은 이 문제를 결정난 것,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는 나더러 포기하라고 강요하실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은혼식이 있을 십이월까지는 나에게 아주 사려 깊게 행동하고, 그럴 듯한 약속으로 시간을 끌겠지만, 그 다음에는 나를 잘라 버릴 단호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까 두렵다.
K 자신도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나이든 분들은 나에게 그녀가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확신시키려 애쓰지만, 그 분들은 실지로는 그런 변화를 겁내고 있는 것이다. 그 분들은 이 사단에 있어서, K가 자신의 마음을 바꿀 때가 아니라, 내가 적어도 일년에 천 프랑은 버는 그런 사람이 될 때에만, 마음을 바꿀 것이다. 내가 사정을 묘사하는데 너무 조악하고 거칠었다면 용서해다오. 아마 너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상황을 강요하려 했다던가, 혹은 그런 유사한 표현을 듣게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강요란 말도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니? 아니, 그런 의도는 나와는 정말, 정말로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K와 내가 서로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편지도 주고받고 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또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맞는 상대인지 아닌지에 대해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지게 하고 싶다는 소망은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욕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일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면 나에게도 사실 기회가 있다라고 말해 준 사람은, 너무 참견조이고 비밀스럽게 한 말이긴 하지만, 내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빈센트 삼촌이었다. 삼촌은 내가 K의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인 게 마음에 든다는 식이었다. 그래,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와중에 작업도 열심히 해나가겠지. 그녀를 만난 이래로 눈에 띨 정도의 진전이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단 한 가지라도 빼놓지 않고 시도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내 의도이다.
그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해서
그녀가 결국에는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내 사랑에 반대하는 사람이 이다지도 많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 때문에 우울해 하거나 용기를 잃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너에게 다소나마 이상한 인상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난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상이 전체 상황의 시각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제시하려는 것이었기를 바란다. 길고 곧은 목탄 획으로 나는 비례와 평면을 나타내려 애썼다. 필수적인 보조 선들의 자취를 찾으면, 그 때 우리는 손수건이나 깃털로 목탄을 털어 버리고, 보다 친밀한 윤곽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 번의 ‘안 돼, 절대로, 절대로’에도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있다는 게 너를 조금이라도 놀라게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구나. 내 생각에는, 너를 놀라게 하기는커녕, 아주 자연스럽고 있을 법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랑은 확고한 그 무엇이고, 너무나도 강렬하고, 너무나도 진실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 감정을 거둬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거둬들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삶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 되었고,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이 나를 정말 기쁘게 한다. 내 삶과 내 사랑은 하나이다. 현재로서는 나는 ‘안 돼, 절대로, 절대로’를 얼음 덩어리라고 생각을 하기에, 내 심장에 갖다 대고 눌러서 그걸 녹이려 한다. 어느 것이 이길까? 얼음 덩어리의 차가움이, 아니면 내 심장의 뜨거움이? 그건 미묘한 질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최상의 의도에서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얼음은 결코 녹지 않을 것’이라든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면 말이다. 물리를 도대체 어디에서 배웠기에 얼음이 녹을 수 없다고 배웠는지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K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라는 생각조차도 그녀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항상 과거를 생각하고 자신을 과거에다 기꺼이 묻어버리고 있는 걸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그녀의 그러한 감정을 내가 존중하고, 그것이 내 마음에 와 닿고 나를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 깊은 슬픔에는 뭔가 숙명론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그것이 내 가슴을 약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키려 애쓸 것이다. 이전의 것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가진 그런, 뭔가 새로운 것을.’
그래서 나는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박하게, 머뭇거리면서, 그러나 확고한 신념으로. 그리고 나는 ‘K,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해’란 말로 끝맺었는데, 그녀는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고 했던 것이다.
이번 여름에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처음에는 사형 선고 같은 끔찍한 충격이었고, 한 동안 나를 땅바닥에다 완전히 짓이겨버렸다. 그리고 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 속에서 밤하늘의 뚜렷한 빛줄기처럼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체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나는 체념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일어섰던 것이다. 내 존재가 처음에는 그녀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더라도 그녀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확고하게 결심을 하고, 그리고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나에게로 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새로워지고, 내 기력도 증대되었다.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고 말하는 걸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것을 말할 때, 그 때 나는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는 걸 내 가슴 전부로, 내 영혼 전부로, 내 마음 전부로 느꼈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리라. ‘당신이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고 말하는 건 허약함과 세상에 대한 무지의 징표다. 당신의 활에다 다른 시위를 걸고,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애를 써라.’ 하지만 그건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이다! 이 나의 허약함이 내 힘이 될 것이다. 나는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에 의지할 것이며, 만일 그녀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할 지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걸 확신을 가지고 조용히 견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데, 내가 성공하고 말리라고 바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더욱 작업에 몰두하게 한다. 성공이라고 해서 내가 특출난 뭔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뭔가가 된다는 말로, 그 말은 내 작품이 건실하고 합당해서,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가 있고, 어떤 목적에 봉사하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보다 인생의 진실을 일깨우는 것은 없는 듯 하다. 그리고 인생의 진실을 진정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잘못된 길 위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그 특이한 감정, 그 특이한 발견, 그걸 어디에다 비유해야 할까? 그럼으로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 . 그리고. . .‘예, 나도 당신을’이 아니라 저 끔찍한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 앞에 서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그녀가 다른 부유한 구혼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곧 듣게 될 거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든지, 내가 ‘남매’ 관계를 넘어서려 한다면 그녀가 나를 정말 싫어하게 될 거라든지, ‘그 와중에(!!!) 내가 더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 . 그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든지 가족들이 이런 불길한 암시를 하는 것이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바로 이번 여름에 테오 네가 나에게 삶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자기 혼자 간직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지. 이 말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비록 그 말에 실제로 공감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또 사람들의 공감이 필요할 때면 빈번히 내 기운을 북돋아주기 보다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걸 구하려 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긴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음으로는 매우 따뜻하지만, 우리의 내면 감정에 대해서는 별로 잘 이해를 못하신다. 두 분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너와 나도 두 분을 실제로 매우 사랑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분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제적인 충고를 주실 수가 없다. 그건 우리의 잘못도 두 분의 잘못도 아니다. 그건 단지 나이와 견해와 상황의 차이이다. . . . 우리 가정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안식처이고, 우리가 그걸 감사히 여겨야 하며, 또 우리측에서 그 가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아마도 너는 나로부터 그런 솔직한 선언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신 우리 가정이, 아무리 좋고,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 보다 더 나은 안식처이자, 더욱 필요하고, 더욱 없어서는 안 될 곳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의 침대이자 가정이다.
사업가 나리, 이게 너에게 전하는 사랑 이야기의 전말이다. 그래, 아주 따분한 데다가 감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므로 내 드로잉에는 진실성이 더 많이 들어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Heike에서 모사한 상당히 많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작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방에서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다. 그래, 현재 나는 ‘내가 드로잉 화가의 주먹을 가지게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비록 아직 말을 잘 듣지 않긴 하지만 그런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매우 기쁘다.
테오 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시켜서, 비관적인 생각은 좀 그만하고 좋은 용기와 인간애를 더 가지도록 한다면 정말로 좋겠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약간 불평을 털어놓긴 했지만, 결국 따지고 보자면, 두 분이 상황을 조금치도 이해를 못하시고, 이번 여름에 내가 한 일을 ‘시의부적절 하고 상스러운’ 짓(두 분께 그런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상당히 단호하게 요청하기 전까지는)이라고 밖에 말할 줄 모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두 분은 나에게 잘 해 주셨고 이 전보다 훨씬 더 상냥하셨다. 하지만 나는 두 분이 그 보다는 여러 가지 것에 있어서 내 생각과 견해를 보다 더 이해해 주실 수 있었으면 한다. 이번 여름에 어머니가 단 한 마디만 해 주었다면, 남 앞에서 공공연히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어머니에게 말할 기회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머니는 그 한 마디 말을 아주 단호히 거절하셨고, 반대로 나에게는 모든 기회를 잘라 버리셨다.
어머니는 연민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위안의 말을 잔뜩 가지고 나에게 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아름다운 기도, 즉 내가 체념할 힘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린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기도는 아무런 효험도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행동할 힘을 받았다.
어떤 충고에 정반대 되는 걸 해보는 것은 종종 아주 실제적인 일이거니와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충고를 구하는 것은 정말 유용하다. 그렇지만, 어떤 충고는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이용할 수 있어서, 뒤집어 엎거나 안의 것을 밖으로 꺼집어 낼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여전히 어떤 특별한 특이성이 있기 때문에 아주 드물고, 아주 바람직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어디서든 지천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시작된 이래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온 정성을 다해, 내 자신을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내게는 눈곱만큼의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런다고 해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거나 크다거나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니? 내 말은, 사랑하는 데 그 따위 걸 고려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아니다, 재고 따질 필요는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 그리고 나서 우리는 정신을 맑게 하고, 우리 마음에 구름이 끼지 않도록 하며, 또 우리의 감정을 감추거나, 불꽃과 빛을 질식시켜도 안 되는 것이다. 다만 ‘고맙게도,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두고 영혼의 투쟁을 벌이기도 전에, 다시 말해, 천둥과 폭풍우 속의 바다에서 높은 파도와 맞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오가기도 전에, 성급하게 ‘그녀는 내 거야’라고 상상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진정한 여성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진정한 여성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리라. 몇 년 전에 나는 한 때 사랑에 빠졌다고 반나마 상상한 적이 있었고, 나머지 반은 진짜로 그랬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여러 해의 굴욕이었다. 이 모든 굴욕이 헛된 것은 아니기를! 나는 ‘밑바닥에 가라앉아 본 사람으로서’ 그 쓰라린 경험과 값비싼 교훈을 바탕으로 말하는 거다.
테오야, 만일 네가 나와 똑같은 그런 사랑에 빠졌다면--하긴 너라고 다른 류의 사랑을 경험해야할 까닭은 없지--그렇다면, 너는 네 안에서 아주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게 되리라. 너와 나 같은 사람들, 일반적으로 주로 남자들과 인간 관계를 맺고, 또 너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나는 좁은 의미에서, 일종의 사업에 종사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일의 대부분을 머리로, 어느 정도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 명철하게 계산을 하면서, 처리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제 사랑에 빠진다면, 이것 좀 보라지, 의외겠지만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또다른 힘이 있다는 걸 너는 깨닫게 되는데, 그건 바로 가슴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걸 조롱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나의 의무를 내 머리에 묻지 않고, 내 가슴에 물으리라’라고 말하는 게 사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지금 현재 정말로 그러하듯,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는 이 때, 다시 말해, 부모님들이 드러내놓고 찬성을 하거나 반대를 하지 않는 이 때엔 더더욱 그렇다. 두 분이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 지 나로서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건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것과 같으며, 거기다 그건 항상 비참한 것이다.
이번 여름에 내가 그걸 아버지께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너무 많이 먹은 사람과 너무 적게 먹은 사람의 일화를 들어 나에게 충고를 하셨다. 그건 나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고, 밑도 끝도 없는 일화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아마도 그걸 예기치 못하셨으니까 초조하셔서 그러시는 거겠지. 하지만,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말하자면, 그녀와 나는 몇 날 며칠을 함께 거닐었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심 없이 보신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주저하고, 마음이 두 갈래로 갈려 안절부절못한다면, 나는 부모님의 견해에 동의하리라.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나의 사랑이 내 마음을 굳건하게 했고, 나는 활력을, 새롭고 건강한 활력을 내 안에서 느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하리라.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은 어떤 특이하고 커다란 숨겨진 힘, 자기 안 깊숙한 곳에 숨겨진 힘을, 빠르든 늦든 간에 누군가를, 그가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고 말할 누군가를 만나 일깨움을 얻을 때까지는,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이다.
스무 살 때 느꼈던 그것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규정 짓기가 쉽지는 않구나. 당시 나의 육체적 열정은 아주 약했다. 그건 아마도 몇 년간의 엄청난 가난과 힘든 일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내 지적인 열정은 강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보답으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는 받는 것은 말고 주기만을 원했다. 어리석고, 그릇되고, 과장되고, 자만심에 찬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기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취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주기도 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른 쪽으로든, 왼 쪽으로든 벗어날 수 있지만, 그 둘 다 나쁘다. 주지도 않고 모든 걸 요구하는 건, 우리가 악한이요, 도둑이요, 고리 대금업자라고 부르는 그러한 사회 구성원을 낳게 되고, 모든 걸 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남자든 여자든 예수회원이나 바리새인을 낳는데, 이들 또한 악한이다. 오른 쪽이든 왼쪽이든 벗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쓰러지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도 쓰러졌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나는 다시 일어났다. 내가 균형을 회복하도록 도운 것은 무엇보다도 육체적 도덕적 질병에 관한 실제적인 책을 읽은 것이다. 내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도 더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을 다시금 사랑하기 시작했고, 한 동안 온갖 종류의 커다란 비참함을 겪는 가운데 시들고, 꺾이고, 피흘리던 내 마음과 영혼은 점점 더 재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더욱 더 진실에 몸 돌리고 사람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나는 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을 더욱 더 느낄 수 있었고, 급기야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사랑보다 돈에 다 더 야망을 두고 또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야망과 탐욕은 사랑에 아주 적대적인 우리 내부의 동업자이다. 이 두 힘의 원천은 시초부터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다. 살아가는 가운데 이 둘은 일반적으로 균등하지 않은 비례로 발전해 나가는데, 한 쪽에서는 사랑이, 다른 쪽에서는 야망과 탐욕이 더욱 커져 나간다. 내 견해로는 사랑이 발전해 가면, 다시 말해 사랑이 완전한 발전에 이르게 되면, 반대되는 열정, 야망과 그 친구 보다 나은 성격을 낳는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만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돈을 버는 지를 모른다면 그에게도 역시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나는 멀리, 멀리 떠나가리라. 또 그녀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돈 때문에 받아들인다면, 내 편에서는 나의 근시안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하리라. ‘Brochart의 그림을 Jules Goupil의 그림으로, 유행하는 복제화를 보그턴과 밀레(Millais)와 Tissot의 인물화로 잘못 보았구나’ 내가 그 정도로 근시일까? 내 눈은 잘 훈련되고 견고한데.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는 그 말은 내가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첫째는 나의 엄청난 무지(無知)이고, 둘째는 여성에겐 그들 자신의 세계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생계의 수단이라는 문제도 있다. 사람들이 만일 (헌법이 ‘모든 인간은 유죄가 밝혀질 때까지는 무죄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 반대의 상황이 밝혀질 때까지는, 누군가 한 인간은 생계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더 사려 깊은 행동이겠니? 그러니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인간이 존재한다. 내가 그를 보고, 그는 나에게 말을 건다. 그의 존재의 증거는 그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겐 그의 존재가 명백하고 확실하니까, 나는 이 존재의 존속이 그가 이러저러하게 얻어내고, 또 일해나가는 어떤 수단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공리로 받아들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가 아무런 생계의 수단도 없이 존재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의 존재를 믿기 위해서 수단을 보려한다.
너에게 드로잉을 몇 장 부쳤다. 그 그림에서 뭔가 브라반트 적인 걸 네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내 드로잉이 팔리지 않는지 말해줄래? 어떻게 하면 팔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기차표를 구입할 약간의 돈을 벌어서, 그 ‘안 돼, 절대로, 절대로’의 깊이를 재보고 싶구나.
그러나 너도 알겠지만 내 의도를 올곧은 J. P. S. 목사님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주 예상 밖으로 찾아가야만 외삼촌이 아마도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눈 감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올곧은 J. P. S. 목사님도 누군가가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아주 달라지고 마는 모양이다. 점점 더 커져서는, 유례없는 크기에 다다르게 되고, 그리고는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을 두고’--외삼촌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내가 어떤 생계 수단을 갖고 있는지 묻거나, 아니 그보다는 (미술 분야에는 문외한이므로) 그러한 것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런 걸 묻지도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현재로서는 외삼촌에게 ‘드로잉 화가의 주먹’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걸로 외삼촌을 공격하겠다거나, 더욱이 그걸로 외삼촌을 위협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드로잉 화가의 주먹’을 잘 사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어떤 분의 딸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는 그 분을 뵈러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배러갈 수 없다는 걸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현관문의 열쇠라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다. 아주 무시무시한 무기로, 베드로와 바울이 하늘의 문을 열 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구가 딸들 각자의 가슴에도 맞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사랑만이 여인의 가슴을 열고 닫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일을 하기 마련이며, 일하는 사람은 빵을 얻기 마련이다. 숙녀의 손을 가진 그녀와 ‘드로잉 화가의 주먹’을 가진 내가 힘써 일한다면,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 우리에게, 그녀의 아들도 포함해서,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테오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한 번 더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암스테르담으로 여행할 돈이 필요하구나. 기차표 값만 마련된다면 갈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두 분을 이 문제에 연계 시키지만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동생아, 네가 경비를 보내준다면 Heike에서나, 아니면 네가 원하는 것에서 드로잉을 많이 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이 녹기 시작하면 드로잉도 점점 나아질 것이다.
때때로 내 감정을 배기통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보일러가 터지듯 터져버리고 말 거다.
너도 잘 알고 있다시피,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쪽 편에 있고, 나는 다른 편에 있어서, 이 ‘안 돼, 절대로, 절대로’를 두고 무엇을 해야하는가 또 무엇은 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얼마 동안 ‘시의부적절하고 상스럽다’는 아주 강한 표현(네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님이 네 사랑을 상스럽다고 말했다고 상상해 보아라)을 들었는데, 이제 또 다른 말을 듣게 되었다. 부모님은 이제 ‘내가 가족간의 유대를 깨트리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부모님에게는 아주 못마땅한 모양이다. 하지만 두 분이 경솔하고 무분별하게 ‘가족의 유대를 깨트린다’는 그러한 끔찍스런 표현을 그칠 줄 모르고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두 분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 두 분은 내 행동에 놀랐고, 그래서 두 분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애정의 유대가 없다면 이렇게 되고 말 거예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존재하고, 그렇게 쉽게 깨어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발, “가족의 유대를 깨트린다”는 표현이 얼마나 끔찍한지 생각해보시고, 그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결과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셔서, 나에게 욕을 퍼부으며 방 밖으로 나가라고 하셨지. 진짜로 욕을 하시진 않았겠지만, 나에겐 꼭 그렇게 들렸다. 아버지가 화를 내시면, 모두가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상례였고. 나도 물론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은 아버지가 화를 내도 꼼짝하지 않고 최악의 경우에는 집을 떠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렇긴 하지만 아버지가 화난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크게 중요성을 두지는 않는다.
이곳에 모델도 있고 화실도 있는데다, 다른 곳에서 살려면 생활비도 더 들고, 작업이 어렵게 될 것이다. 거기다 모델 비용도 더 들거야.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심으로 떠나라고 하신다면, 물론 나는 가야 한다.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 . .
어제 드로잉을 또 한 장 완성했다. 시골 소년인데, 아침 일찍 주전자가 걸려 있는 난로에다 불을 피우는 장면이다. 거기다 난로에다 불붙은 나무를 집어넣는 노인을 그린 것도 있다. 유감스럽지만 내 드로잉에 아직도 뭔가 거칠고 투박한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나는 그녀가, 그녀의 영향력이 그걸 부드럽게 해줄 거라고 믿고 있다. 주위를 둘러볼 때 사방의 벽이 한 가지 주제와 연관된 습작으로 온통 덮혀있다는 걸 알게 되는 데, 그건 바로 ‘브라반트 유형’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내가 시작한 작업이 바로 이건데, 이 환경에서 갑작스럽게 벗어나야만 한다면 나는 다른 걸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고, 이건 반쯤 끝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난 오월부터 이곳에서 작업을 해왔고, 이제서야 모델들을 알고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내 작업도 진일보하고 있는 시점이거든. 이 정도 오는 데도 상당히 많은 역경을 헤쳐 나와야만 했어.
이미 시작된 일을, 그것도 막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런 이유로 그만둔다는 것은 정말 안 좋은 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일이 아닐까? 안 돼,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럴 수 없는 노릇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세가 들어가시고, 그래서 두 분은 편견과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가지고 계셔. 내가 Michelet나 빅토르 위고가 쓴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보시면, 아버지는 도둑이나 살인자나, ‘부도덕함’ 따위를 생각하신다. 하지만 그건 정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아버지께 거듭거듭 말하지. ‘그런 책을 몇 장이라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버지도 감명을 받고 말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완고하게도 그걸 거부하신다. 난 아버지께 Michelet와 아버지의 충고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따라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아버지의 충고보다는 Michelet의 충고에 더욱 가치를 둘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Michelet를 바꾸지 않으리라. 성경이 영속적이고 영구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Michelet는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성급하고 열에 들뜬 현대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아주 실제적이고 명료한 암시를 준다. 그런 식으로 그는 우리가 빠른 진보를 이루는 것을 돕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없이는 이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힘든 것이다. Michelet와 해리엇 비처 스토, 이 두 사람은 복음서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시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특히 Michelet는 복음서가 우리에게 단지 근원을 속삭여주는 것을 큰 소리로 완전하게 표현한다.
최근에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두 사람이 결혼하는 일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구나.’ 내 양심은 그 정반대로 말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다행스럽게도 Michelet는 그런 양심의 가책 따위는 결코 지니지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의 책은 결코 씌어지지 않았겠지. 그리고 Michelet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나중에, 그러니까 빈번히 ‘변죽만 울리는’ 미술가들과 지금보다 더 많이 같이 지내게 될 때,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온 힘을 바치리라는 걸 약속한다.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보다 더 비용이 들 거라고 지레 겁을 내는 화상(畵商)을 위해 덧붙인다면, 아내가 있는 기혼 화가가 정부(情婦)를 둔 미혼 화가보다 돈을 덜 쓰고, 보다 더 생산적이다. 아내가 정부보다 돈이 더 들까? 화상들이여, 어쨌거나, 그대들은 정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 여자들은 그대 등 뒤에서 비웃지 않는가?
그런데 그 다음엔 두 분이 프랑스 사상에 감염된 할아버지 뻘 친척 이야기를 들먹이며, 그 분이 결국엔 술독에 빠졌다고 하면서, 나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거라고 넌지시 암시한다.
현대 문명의 첨단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남자와 여자들, 예를 들면, Michelet와, 해리엇 비처 스토, 칼라일, 조지 엘리옷, 거기다 다른 많은 사람들, 그들은 너에게 소리친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가슴에 심장이 맥박치는 사람이라면, 뭔가 진실 되고, 영속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찾도록 도와 주시오. 한 직업에 헌신하며 한 사람의 여성만을 사랑하시오. 당신의 직업이 현대적인 것이 되도록 힘쓰고, 당신의 아내에게서는 자유롭고 현대적인 영혼을 창조하시오. 그녀를 묶고 있는 끔찍한 편견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하시오.’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완전한 성인이고 우리 세대의 무수히 많은 대중들 속에 서 있다.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 Stricker 외삼촌이 속하던 세대와는 다른 세대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 시대보다 현대적인 것에 더욱 더 충실해야 한다. 구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은 치명적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에 우리가 동요되어서는 안 되며, 그 분들의 뜻에 반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만 한다. 나중에 그 분들은 자진해서 말할 것이다. ‘그래, 결국에는 네가 옳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상당히 애쓰신다. 이 점에서는 두 분 다 나에게 지극 정성이지만--물론 나도 이걸 정말로 감사하게 여긴다--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으로는 인간에게 충분하다 할 수 없으며, 인간은 뭔가 더 고귀하고 고원한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확실히 인간은 그 무엇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고원한 감정이 K를 향한 사랑이다.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을 그만두기보다는 차라리 방금 시작한 작업과, 이 집의 온갖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다. 내 일은 분명코 너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지금까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나에게 준 사람이 바로 너니까. 현재, 나는 나아가고 있고, 일은 진일보하고 있어서, 뭔가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구나. 나는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데, 아버지는 나를 집 밖으로 몰아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오늘 아침엔 그렇게 말했다.
일을 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 정감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것을 그 스스로 느껴야만 하고, 자신의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내 생각에는 내가 도둑도 범죄자도 아니오, 그 반대로 내가 밖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심적으로는 조용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가 이해하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 그녀는 나에 대해 정말로 불쾌한 인상을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에사,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늘이 말다툼과 욕설로 구름 끼고 잔뜩 찌푸린 가운데, 그녀 편으로부터 빛이 솟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의 말씀을 따르면 ‘생계의 수단’이라는 문제를 두고는 돌멩이보다 더욱 견고하다. 즉시 결혼을 해야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달려있다면 나도 분명코 두 분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이건 아주 다른 문제로,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와 나는 서로를 보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야만 한다. 그건 햇빛처럼 분명한 일이고, 단순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두 분이 뜻을 굽히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이가 늙은 사람의 편견 때문에 그의 기력을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거리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문제에 있어서 편견이 심하다.
투쟁하고 땀 흘리지 않은 예술가가 어디에 있으며, 발판을 마련하는 데 투쟁하고 땀 흘리는 외에 다른 길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언제부터 드로잉 화가가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게 되고 말았는가?
나는 다시금 들판에서 부지런히 감자를 파고 있는 남자를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풍경으로 약간 더, 그러니까 뒤편에는 약간의 수풀과 하늘을 띠 모양으로 그려 넣었다. 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돈을 약간 더 벌어서 모델에다 좀 더 쓸 수 있게 된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모델들이 자세를 취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내가 쓰는 사람들은 직업 모델이 아니므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훨씬 더 나으리라.
내 드로잉에 대한 너의 견해는 그럴만한 자격도 없는 데 너무 호의적이었다. 내 작품에 대해 계속해서 편지를 다오. 너의 비평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러한 비평을 아첨보다 천 배는 가치가 있는 공감의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에게 실제적인 것을 이야기 해다오. 너에게서 드로잉의 실제적인 부분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나는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고, 개종할 필요를 크게 느끼고 있으니까, 많은 설교를 해주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찮게 찾게 된다면, 나에 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델에다 좀 더 돈을 써야만 한다. 현재 나는 하루에 이십, 이십오, 혹은 삼십 센트 씩 쓰고 있지만, 그걸로는 정말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약간 더 씀으로써 나는 보다 빠른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해하겠지만 내가 고의적으로 무슨 일에 있어서건 아버지와 어머니를 슬프게 할 그런 인간은 아니다. 부모님의 소망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해야만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이유 없이 두 분을 슬프게 할 때, 나 자신도 그것을 상당히 죄송하게 느낀다. 하지만 최근의 후회스러운 정경이 불 같은 성미 때문에 유발되었다고만은 생각하지 마라. 이전에 내가 암스테르담에서의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Borinage에서, 그곳 성직자들이 나에게 원했던 것을 거부했을 때, 아버지는 유사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사실, 오래된 뿌리깊은 오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깨끗이 정리될 수 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는 너무나 많은 것에서 의견이 일치하므로, 때때로 상당히 다른, 아니,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양측이 서로를 존중할 수 있으리라.
아버지가 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신다면, 아버지에게 때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건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때로 성서의 구절을 아주 다른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아버지의 설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견해가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하셔서, 하나도 받아들이려 하시질 않는다.
테오야, 네가 기차표 값으로 보내준 십 길더는 이제껏 내가 누구로부터 받은 돈 중에서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그런 것이다. 가야만 하는데, 갈 수 없다는 생각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없었으니까. S 외삼촌의 주의를 다소나마 끌어보려고 등기 우편을 보냈는데, 외삼촌이 무시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성직자와 나아가 성직자의 아내보다 사람을 안 믿고, 몰인정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진짜 없을 것이다(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하지만 성직자조차도 세 겹의 강철 갑옷 아래 인간적인 따스함을 때로 간직하고 있으리라.
‘탐욕’은 매우 추악한 어휘이지만, 이 놈의 악마는 아무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그것이 때때로 너와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엄청난 기만이리라. 그래서 지금 당장은 ‘돈이 지배자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건 너와 내가 진정으로 그 놈의 마몬(Mammon) 씨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거나 그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너와 나를 엄청나게 힘들게 한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가난으로 고통을 받았고, 너는 보다 많은 월급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쫓아가야만 했지. 두 가지 경우 모두 돈의 힘에 고개 숙여 절을 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돈이란 악마가 너에게 농간을 부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나에게는 가난에도 약간의 장점은 있다라고 생각하게 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아니, 정말이지, 나처럼 이다지도 돈 버는 것이 느린 것에는 아무런 장점도 없다. 따라서 나는 그걸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테오 네가 도움이 될만한 암시를 되도록 많이 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자신에 있어서 많은 점을 바꾸려고 상당히 애를 쓴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현재로서는 경제적으로 나 자신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최상의 방책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애써야 할 다른 것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소위 ‘땅 밑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 또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이라는 점등이 나쁘진 않으리라. 이제와서 그 심연으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고, 평지를 걸으면서 과거의 모든 우울함은 털어버리고 보다 넓고 쾌활한 인생관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이전부터 맺어온 관계는 가능한 한 새롭게 하고, 새롭게 사람을 사귀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인간 관계를 넓혀 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 저기서 자빡맞기도 하겠지만--그거야 그러라고 하지--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해나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밀고 나가 볼 작정이다.
Mauve 매형에게 들판에서 감자를 파내는 남자를 드로잉한 그림을 보냈다. 매형에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거든.
항상 이곳에서의 이러한 활동 범위와 브라반트 유형을 나의 진정한 일이라고 고려하는 가운데, 얼마 동안 헤이그에 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좋은 일일까 하는 점을 자주 고심해 왔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브라반트를 힘껏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것과 친숙해 졌으므로, 몇 년이고 소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긴 하지만 이 브라반트 유형을 지속해 나간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거나, 얼마 동안 다른 곳에서 사는 것조차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모든 화가와 드로잉 화가들이 그렇게 한다.
헤이그에서 쓴다. Mauve 매형 집 근처의 작은 여인숙에 묵고 있다.
나는 매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매형, 에텐에 와서 나에게 팔레트의 신비를 풀어내 보여 주겠다고 하셨죠.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게 며칠 상관으로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내 말에 찬성하신다면 사 주에서 육 주 정도 머물 겁니다. 더 있으라면 더 있고 그 보다 빨리 끝낼 수 있으면 일찍 돌아가고요. 그 시기가 지나면 그림 그리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작은 비참함(pitites miseres)은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다시 Heike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매형에게 이렇게 많은 걸 요구하는 건 아주 염치없는 일이지만, 매형도 보시다시피 나는 허리에 칼을 차고 있으니까요(j'ai l'epee dans les reins)’ 그러자 매형은 ‘그래 뭔가 좀 가져왔는가?’라고 말했고, ‘여기, 습작을 몇 점’하고 대답했지. 매형은 습작들을 보고는 칭찬은 너무 많이 하고, 비평은 하긴 했지만, 조금 밖에 하지 않았어.
매형은 또 이렇게 말했어. ‘난 항상 네가 투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구만.’ 매형의 이 단순한 말이 예수회 사람의 수만 마디의 교활한 칭찬보다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는 걸 분명하게 밝혀 둔다. 그리고 나서 매형은 곧 나를 낡은 나막신 한 켤레와 다른 물체들 앞에다 놓고는, ‘팔레트는 이렇게 잡아야 한다’라는 말로서 시작했지. 저녁에도 드로잉 하러 매형에게 가곤 한다.
요즈음 Mauve 매형과 Jet 누나가 나에게 어찌나 상냥하고 다정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매형은 나에게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물론 나는 그걸 한꺼번에 할 수는 없지만, 점차적으로 실행에 옮겨볼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정말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
그 와중에 나는 암스테르담에 다녀 왔다. S 외삼촌은 상당히 화가나신 듯 했다. 노여움을 삭이지 못하는 가운데도 ‘빌어먹을 놈’이라는 말은 차마 못 하시고 그 보다는 온화한 말로 꾸짖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암스테르담을 찾아갈 때보다 내 사랑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녀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는 나를 한 동안, 아니 스물네 시간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또 Tersteeg 씨를 찾아뵈러 갔었다. 거기서 (유쾌한) Weissenbruch, Jules Bachhuizen, de Bock 등 화가들도 몇 명 만났다.
유화 습작을 다섯 장 그렸고, 거기다 수채화 두 장, 또 물론 스케치도 몇 장 더 했다. 유화 습작은 정물이고, 수채화는 Scheveningen 소녀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도 벌써 거의 한 달이 다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경비를 엄청나게 썼다. Mauve 매형이 물감이며 기타 등등 몇 가지 것을 나에게 준 게 사실이지만, 다른 여러 가지 많은 것은 내가 직접 구입해야 했으며, 거기다 며칠 동안의 모델료도 지불했다. 또 구두도 한 켤레 필요해서 샀다. 지금까지의 체류가 모두 구십 길더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백 프랑 한계를 차월(借越)하고 말았다. 내가 구십 길더나 썼다니까 아버지는 내가 과도한 지출을 했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이건 터무니없는 낭비는 아니다. 모든 게 생각보다 엄청나게 비쌌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쓴 일 센트까지도 아버지에게 조목조목 설명을 해야만 한다는 건 미칠 노릇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덧붙여 지고 과장되어서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더 그렇다.
여기 좀 더 머무르고 싶구나. 아니 여차하면, 방을 하나 세내어, 예를 들면 Scheveningen에다 몇 달 정도 방을 세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고려해 볼 때 에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마도 나으리라.
그야 어쨌든 간에, Mauve 매형 덕택으로 나는 팔레트와 수채화의 신비에 대해 약간의 통찰력은 얻었다. 그게 이 여행으로 쓴 구십 길더의 값어치는 있으리라.
매형은 나에게도 태양이 뜨긴 하는데 아직 구름 뒤에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거나 할 마음은 전혀 없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팔릴 만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데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이 두 장은 어려울 땐 팔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든다. 특히 매형이 약간 손을 보아준 것은 더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한 동안 간직하고 싶다. 이 작품들이 완성된 방식에 대해 뭔가를 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분위기와 거리를 표현하는 데 수채화는 정말로 멋진 것이다. 대기가 인물을 감싸서 인물이 숨쉬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색채와 붓 사용법에 관해 실제적인 뭔가를 배웠기 때문에 더 나은 진보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다.
헤이그로의 여행은 가슴떨림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Mauve 매형에게 갔을 때 내 가슴은 약간 두근두근 거렸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매형도 그럴 듯한 약속으로 나를 회피하려고 애쓸까? 아니면 나는 이곳에서는 다른 대접을 받을까?’ 그런데 뜻밖에도 매형은 모든 점에서 실제적이고도 다정하게 나에게 도움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말이나 작업 방식 모두를 승인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지만 매형은 ‘이것 혹은 저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때에도, ‘하지만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시도를 해 보아라’라는 말을 동시에 덧붙였다. 그건 단지 비판을 위해 비판을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매형을 떠날 때 내 손에는 유화 습작 몇 장과 수채화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걸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는 뭔가 견고하고 진실된 것이 있다고, 적어도 내가 이전에 만든 작품들보다는 더 그러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기법적인 수단을 몇 가지 더, 그러니까 물감과 붓을 가지게 되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실행에 옮겨야 할 때이다. Mauve 매형이 내 습작들을 보더니만 즉시 이렇게 말했다. ‘모델과 너무 가까운 곳에 앉아서 작업을 하누만.’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비례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확실히 그것은 내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첫 번째 것 중의 하나이다. 어딘가에 큰 방을 하나, 방이 안 된다면 헛간이라도, 세내도록 해야 한다. 게다가 이제 더 나은 물감과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습작과 스케치에는 Ingres지가 탁월하고, 내가 직접 다른 크기의 스케치북을 만드는 것이 기성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
테오야, 색조와 색채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그리고 이 두 가지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Mauve 매형은 내가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보게끔 가르쳐 주었다. 거기다 매형이 돈을 버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해준 걸 생각할 때 내가 어떤 해방감을 맛보았는지 너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내가 지난 수 년 동안 빗나간 위치에서 얼마나 악전고투해야 했는 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런데, 이제, 이제사, 진정으로 동이 터오는 모양이다. 만일 내가 가지고 온 두 장의 수채화를 본다면 다른 여느 수채화와 진배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불완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 내가 그 작품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더 잘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이전에 내가 만든 작품들과는 아주 다르단 말이야. 더욱 밝고 더욱 선명해. 그렇긴 하지만 그 사실이 앞으로 그릴 다른 작품이 더 밝고 더 선명하게 될 거라는 걸 배제하는 건 물론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걸 즉시 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점차적으로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Mauve 매형이 몇 달 간 더 고군분투한 다음에, 자신에게 오라고, 그러니까 삼월쯤에 오라고 그러면서, 그 때쯤이면 팔릴 만한 드로잉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말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현재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모델과 화실, 드로잉과 그림 도구들 비용은 증가하는데, 아직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으니.
그래, 아버지는 필요한 비용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고, Mauve 매형이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아주 흡족에 하신다. 그리고 또 내가 가지고 온 습작과 드로잉에도 만족하신다. 하지만 그 비용을 다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가슴이 아프다. 여기에 온 이래로 나는 문자 그대로 한 푼도 벌질 못한 데다가 아버지는 여러 번 이것저것을, 예를 들자면, 외투와 바지 등을 사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차라리 없었으면 한다. 아버지가 사주신 외투와 바지가 맞지 않아서, 실제로는 거의 쓸모가, 아니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버지도 경제적으로 다소 곤궁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런 것이 인간 삶의 조그만 비참함들 중의 하나이다.
거기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신경질이 난다. 아버지는 예를 들어 내가 너나 혹은 Mauve 매형과 서로 마음이 통하듯,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분은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거나 내가 하는 일에 공감을 하실 수가 없고, 나로서도 아버지의 체계와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그건 나를 억압하고, 나를 숨막히게 한다. 나도 이따금씩 성경을 읽는데, 나는 성경에서 아버지가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볼 뿐더러, 아버지가 정통파 적인 입장에서 끌어내는 것들을 나는 전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책을 읽을 때는--실제로 나는 그렇게 많이 읽지 않고, 단지 몇몇 작가들만 읽을 뿐이지만--그들이 내가 보는 것 보다 사물을 보다 넓고,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들이 삶을 더 잘 알므로, 내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지, 선과 악이라든지, 도덕성과 부도덕성에 관한 온갖 시시껄렁한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정말이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부도덕한가 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이니 부도덕성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K로 귀결되고 만다.
언젠가 저녁에 나는 집을 찾으며 Keizergracht가를 따라 걸었고, 마침내는 그 집을 찾았다. 종을 울리고 난 뒤, 하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K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있었다. S 외삼촌은 성직자요 아버지로서 대화를 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에게 막 편지를 보내려는 참이었는데 잘 되었다면서, 소리내어 편지를 읽으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K는 어디 있나요’하고 물었다(K가 어딘가 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외삼촌은 ‘K는 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집밖으로 나가 버렸다’라고 하셨다. 그녀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냉대와 무례함이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그 때도 몰랐거니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고 말해야 겠구나. 내가 아는 것은 그녀가 나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명백하게 정말로 냉담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한 것은 결코 보지 못했다는 거다.
이윽고 나는 외삼촌에게 이렇게 말했다. ‘편지야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죠. 별 관심도 없는 걸요.’
편지 내용은 아주 경건하고 학식이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가 서신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걸 잊도록 힘찬 노력을 경주하라는 충고였다. 나는 마치 교회에서 목사님이 이리저리 분주히 왔다갔다하다가 ‘아멘’이라고 하는 걸 들은 듯한 기분이었으며, 보통의 설교처럼 나에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침착하고 공손하게 말씀 드렸다. ‘그래요, 전에도 그런 이야기는 이미 들었어요--하지만 지금은?--앞으로는?’ 그러자 외삼촌은 나를 쳐다 보았다. 외삼촌은 외삼촌의 말씀이 인간의 감정과 사고의 포용 범위의 극한에 가닿은 것이라는 걸 내가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데에 대해서 대경실색 하는 듯이 보였다. 외삼촌의 말씀에 따르면 ‘앞으로’ 더 이상의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불쑥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외삼촌도 화를 내셨다. 물론 성직자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였지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또 내 나름으로 아버지와 외삼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약간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이 깊어지자 두 분은 원한다면 자고 가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와서 K가 떠났다면, 내가 여기서 밤을 지낼 때가 아닌 듯 하군요.’ 그러자 두 분이 물었다. ‘그럼 어디서 잘 건데?’ ‘아직은 모르겠군요.’ 내 대답. 그러자 외삼촌과 외숙모는 싸고 좋은 곳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고집하셨다. 그래서, 테오야, 이 두 노인네와 나는 춥고, 안개 끼고, 진흙 투성이인 거리를 걸어 갔다. 그리고 두 분은 정말로 아주 값싸고 좋은 여인숙을 소개해 주셨다.
너도 보다시피 이 모든 것에는 뭔가 인간적인 것이 있었고 그것이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외삼촌과는 다른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K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두 분이 비록 이 문제를 결정난 것, 끝난 것으로 생각하기를 원하시지만, 내 편에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두 분은 확고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면 보다 명료하게 알 게 되겠지.’
살아가려 최선을 다하는 우리, 왜 우리는 더 살지 못하는가? 암스테르담에서 머무는 삼 일 동안 나는 자꾸만 가라앉고 외로웠다.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는 비참함에 빠져버렸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보여준 그런 친절, 그리고 그 모든 대화, 모두가 너무나도 참담했다. 그래서 마침내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다시 우울함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 마지막으로 외삼촌 댁에 가서 말했다. ‘외삼촌, 잠자코 들어보세요. K가 만일 천사라면, 그녀는 나에겐 너무 높은 존재겠지요. 그리고 천사와 사랑을 지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만일 그녀가 악마라면, 나는 그녀와 정말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현재의 그녀는 여인의 정열과 다정다감함을 지닌 진정한 여인이 아닌가요?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게 내 진심이고,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뭔가 대꾸할 게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여인이 정열에 관해 뭐라고 말씀을 했는데, 무슨 말씀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리곤 외삼촌은 교회로 가버렸지.
나는 아직도 뼛골까지 한기를 느낀다. 마치 내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흰 도료를 칠한 차갑고 단단한 교회 벽에 기대어 서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 느낌으로 인해 멍하게 되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사실 그대로 털어놓는다는 건 다소 위험스러운 일이지만, 하지만 테오야, 내가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 말을 끝까지 귀기울여다오. 누군가에게는 내 비밀이 비밀이 아니라고 너에게 말한 적이 있지. 나는 그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 네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내가 저지른 일을 네가 용인하든 안하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여인을 보고 싶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여인 없이도 살 수 없다. 뭔가 무한한 것, 뭔가 깊고, 뭔가 진실된 것이 없다면 나는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혼잣말 했다. ‘너는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고 말해 놓고 이제 다른 여인을 찾아가는 구나. 그건 비합리적이고, 모든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야.’ 그리고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누가 주인인가? 논리인가? 나인가? 논리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내가 논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나의 비합리성과 분별력의 결핍에는 합리성과 분별력이 없단 말인가?’
나는 이제 거의 서른 살이다. 너는 내가 사랑의 필요성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 거기다 K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다. 그녀는 또한 사랑을 경험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녀를 더 사랑한다. 그녀가 그 옛 사랑으로만 살기를 원하고 새로운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건 그녀의 문제이고, 또 그녀가 계속해서 나를 피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녀 때문에 내 모든 기력과 내 모든 정신력을 질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나 자신을 꽁꽁 얼게 만들거나 기력을 잃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불꽃, 자극, 그것이 바로 사랑인데, 그것은 꼭히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단지 남자, 정열을 가진 남자이다. 나는 여인을 찾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꽁꽁 얼어붙거나, 바위가 되거나, 멍하게 되고 말리라. . . 그 빌어먹을 놈의 벽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전투를 벌였고, 그 전투에서는 내가 물리학과 위생학에서 알아낸 것, 또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운 뭔가 의기양양한 것이 남았다. 우리는 여인 없이 무사히 오랫동안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는 절대자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연민도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여자를 한 명 발견했다. 그녀는 다소 키가 큰 데다가 단단한 몸집이었다. K처럼 요조숙녀의 손이 아니라, 노동에 시달린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조악하거나 보잘 것 없지도 않고, 뭔가 아주 여성적인 데가 있었다. 그녀는 Chardin이나 Frere, 아니면 Jan Steen이 그린 흥미로운 인물을 연상시켰다. 그러니까 프랑스인들이 여직공(une ouvriere)이라고 부른 그런 것. 그녀에게 걱정거리가 많다는 건 얼굴에 씌어 있었는데, 삶이 그녀를 고달프게 한 모양이었다. 오, 그녀는 두드러지지도, 유별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테오야, 나는 그 약간의 창백함, 삶이 그 위로 지나간 그런 무엇에서 놀라운 매력을 발견한다. 내가 성직자들이 설교단에서 그토록 저주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는 그런 여인들을 향한 애정의 감정, 아니, 애정과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그런 여인이 모두 사기꾼이라고 보는 사람은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얼마나 몰지각한지! 그 여인은 나에게 매우 잘해 주었다. 매우 잘해 주었고 상냥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꾸밈없고 수수한 작은 방이었다. 빛깔 없는 벽지로 인해 방은 회색조를 띠었지만, 그럼에도 Chardin의 그림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매트와 진홍빛의 낡은 카펫이 깔린 마룻바닥, 흔히 보는 스토브, 서랍장, 장식없는 커다란 침대, 간단히 말해, 진짜 일하는 여성의 방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세면기에 서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온갖 것을 이야기 했다. 그녀의 삶, 근심 걱정, 비참함, 건강, 이 모든 것을. 그리고 나는 우리의 매우 학식 있고, 교수 같은 사촌 보다 그녀와 더욱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약간 감상적이긴 하지만, 어리석게 감상적으로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나갈 수 있도록 생명력을 유지하고, 내 정신을 맑게 하고, 내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걸 네가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른다. 죄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났다는 거지. 흥, 그런 엉터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는 것이 죄일까?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죄일까?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오히려 사랑이 없는 삶이 죄악의 상태이자 부도덕한 상태라고 믿는다.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신비주의적이고 신학적인 관념에 이끌려 너무 은자적인 삶을 산 시기이다. 점차적으로 나는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게 될 때, 아침의 미명 가운데 네 곁에 같은 인간이 누워있다는 걸 볼 때, 세상은 훨씬 더 정겹게 다가오는 법이다.
종종 쓸쓸히 버려진 기분으로, 호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도 없이 거리를 걸어갈 때, 나는 그녀들을 보았고, 그녀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남자들을 부러워했다. 그 때 나는 그 가난한 여인들이 내 누이들만 같았다. 그녀들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험난함 등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랬다.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내 오래된 감정이고, 뿌리가 깊은 것이다. 어릴 적에도 나는 종종 이 반쯤 창백해진 여인의 얼굴을 무한한 동정과 심지어는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 여기에 흔적을 남겼다’라고 씌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성직자의 하느님, 그 하느님은 내게는 대갈못처럼 죽은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가 무신론자인가? 성직자는 나를 그렇게 여기리라--그럼 그러라고 하지.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이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살아 있다면 거기에는 뭔가 신비로운 것이 있다. 그걸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든, 네 편할 대로 어떻게 부르든, 내가 체계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정말로 살아 있고 정말로 존재하는 뭔가가 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고, 그게 아니라면 하느님만큼이나 좋은 것이다. 죽은 것이나 박제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으로,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다시 한 번 사랑으로(aimer encore) 이끈다. 그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의 따스함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또한 내가 다시 이전의 우울하고, 멍하고, 공상에 잠기는 그러한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유화와 수채화를 생각하고, 화실을 찾아야 하는 것 등의 이런 저런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Mauve 매형에게 돌아갈 삼 개월이 다 지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이 삼 개월이 나에게 뭔가 도움을 주긴 할 것이다. 매형이 내게 물감, 붓, 팔레트, 팔레트 나이프, 오일, 테레빈 유 등이 든, 바꿔 말하자면 필요한 모든 것이 든 물감 상자를 보내왔다. 따라서 내가 채색화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건 결정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이만큼 왔다는 것이 나로서는 기쁘다.
최근에 나는 드로잉을 상당히 많이, 특히 인물 습작을 많이 했다. 지금 그것들을 네가 본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Mauve 매형이 뭐라고 할 지에 대해 사뭇 궁금해하고 있다. 요전 날 아이들 드로잉을 몇 장 했는데, 마음에 아주 흡족했다.
요즈음은 색조와 색채가 그지없이 아름다운 날들이다. 채색화에 좀 더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이러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표현해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것에 집중을 해야 한다. 인물 드로잉을 시작했으니까, 상당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야외에서 작업을 할 때는 나무 습작을 드로잉을 하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인물로 보려 애쓴다. 윤곽선, 비례, 구조 등은 특히 더 그러하다. 우리가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형(modelling)과 색채와 주위가 그 다음이다. 이것들에 관해서는 Mauve 매형의 조언과 충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테오야, 나는 물감 상자를 갖게 되어 매우 기쁘다. 그리고, 내가 적어도 일 년 동안 거의 전적으로 드로잉만 한 후에 그것을 갖게 된 것이, 애초에 그걸로 시작한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여기 홀란드에 있으니 마음이 그래도 들뜨지 않고 푸근하구나. 다시금 내 성격뿐만 아니라 나의 드로잉이나 그림의 방식에 있어서도, 아주 완전한 홀란드 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월이면 다시 헤이그로, 암스테르담으로 갈 것이다.
테오야, 채색화와 함께 나의 진정한 이력도 시작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1881년 12월--1883년 9월
*헤이그, 1881년 12월
내 머리와 내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을 드로잉과 그림으로 표현해 내어야만 한다. 앞으로 일 년 후 내 작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성탄절 날,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나더러 집을 떠나라고 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너무도 단호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그날 중으로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원인은 내가 교회에 가지 않았기 때문인데, 거기다 덧붙여 나더러 교회에 가라고 강요한다면 지금까지는 에텐에 있는 동안 거의 매번 빠지지 않고 참석했지만, 더 이상 의례적으로 참석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종교의 전 체계가 끔찍스럽다고 생각하며, 내 인생의 비참한 시기 동안에 그 문제들을 곱씹고 되씹어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을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여러 다른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여름 K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 그 전후 사정이 두드러지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나는 Mauve 매형에게 돌아가서 말했다. ‘매형,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나는 더 이상 에텐에서는 있을 수가 없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서 살아야 하는데, 이곳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러자 매형이 말했다. ‘그럼, 여기 와 있게나.’ 그래서 나는 여기에다 화실을 하나 세냈다. 큰 방이 하나, 거기다 반침(半寢)이 딸려있는 곳으로 작업하기 적당하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위치는 중심가에서 벗어난 변두리 Schenkweg에 있으며, 매형 집에서 십 분밖에 안 걸린다. 방세도 한 달에 칠 길더밖에 안 한다. 빛은 남쪽에서 들어오는데, 유리창은 크고 높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방과 좀 더 친숙하게 되리라. 내가 활기가 넘친다는 건 안 봐도 상상할 수 있겠지.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 스스로 시작해야 할 때, 나는 또 뭐라고 할까? 그건 마음이 편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겠지.
내가 이것저것 근심걱정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는 건 테오 너도 알겠지. 그렇지만 내가 돌아올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만족감을 안겨 준다. 그리고 그 길은 어렵겠지만, 나는 내 눈 앞에 뚜렷하게 그걸 본다.
아버지는 돈이 필요하다면 빌려주시겠다고 하시지만, 이제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념이 서지 않는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두고 말하자면, 아이들이 화해하듯 그렇게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의 견해와 의견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일월 일일 날 새 화실로 들어갈 예정이다. 침대 대신에 마룻바닥에다 담요를 까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하지만 Mauve 매형은 침대와 필요한 가재 도구를 사야만 한다고 고집한다. 매형은 ‘필요하다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덧붙여서 옷도 좀 나은 걸 입고, 너무 다랍게 살지 말라고 충고하신다.
다른 화가들과 너무 많이 접촉을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날이 갈수록 매형이 더욱 현명해 보이고, 더욱 믿음직스럽다. 그런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니! 나는 내가 가야할 방향을 이제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구태여 그들을 찾지도 않으리라.
내가 구입한 가구는 네 말대로 진짜 ‘컨스터블 식’이다. 그 말을 만들어 낸 것은 너이긴 하지만 내 가구가 너의 것보다 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진짜로 튼튼한 식탁과 진짜 식탁용 의자를 갖추게 되었다.
매형이 백 프랑을 빌려주어 나는 방세와 가구 값을 지물하고, 창문과 채광을 맞게 조절하였다. 너도 짐작이 가겠지만 처음에 나는 빚을 진다는 생각에 몹시 두려웠지만, 그렇지만,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듯 가구가 딸린 방에다 항상 돈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는 그게 유일하게 가능한 방편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네가 적어도 일월 달에는 백 프랑을 보내 줄 거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Mauve 매형은 내가 곧 어느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는 아주 희망적인 말을 했다. 그리고 이제 내 자신의 화실을 갖게 되었으니까, 내가 빈둥 된다거나, 아마추어적인 유희에 빠져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다는 걸 불운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온갖 감정의 기복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고요함을 느낀다. 위험의 한 가운데에 안전함이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 볼 아무런 용기도 없다면 인생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겠는가? 나에게는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파도는 거세게 일렁거려, 내 코 바로 밑에까지 밀려온다. 아마도 더 높게 칠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나는 전력으로 싸워 나가리라. 내 삶을 값비싸게 팔리라. 그리하여 끝끝내 승리하고 최상의 것을 얻어내리라.
하지만, 테오야, 현재 내가 진짜 화실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나는 정말 기쁘다. 이렇게 빨리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감히 기대할 수 없었다. 매형 자신은 말이 소형 어선을 사구로 끌어올리는 그림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헤이그에 있다는 걸 기쁘게 여기며 여기에서도 아름다운 걸 너무도 많이 발견한다. 나는 그 무엇을 표현하려 애써야 한다.
모델을 두고 규칙적으로 작업을 하기로 매형과 합의를 보았다. 가장 비싸지만 종국에 가서는 가장 싸게 먹히는 방법이리라. 그런데 최악의 상황은 내 호주머니에 다시 돈이 얼마간 들어올 때까지는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번 시도를 해 보았지만 날씨마저도 옥외에서 그리기에는 너무 나빠 나는 거의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지난 며칠간은 지속되는 불안감 때문에 아뜩함을 느꼈다. 모델을 찾아 헤맨 덕분에 몇 명 찾아 내긴 했지만, 돈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Mauve 매형에게 이 문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매형은 정말로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 해 주었으니까. 매형은 즉시 내 이름을 Pulchri 특별 회원으로 추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일 주일에 두 번 저녁 시간에 거기에 가서 모델을 보고 그릴 수 있고, 또 화가들과도 더 많이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de Bock는 더 지내놓고 봐도 발전이 없다. 그는 아무래도 뼈대가 약한 듯 하다. 거기다 누군가가 단지 초보적인 걸 이야기해도 벌컥 화를 낸다. 그가 풍경에는 다소 흥취를 느끼는 듯 그걸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을 알고 있긴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를 파악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희미하고 가늘다.
절망에 빠져 오늘 구필 상회에 갔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서 Tersteeg 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다. Tersteeg 씨는 너의 편지를 받을 때 까지 쓰라고 이십오 프랑을 주셨다. 우리의 상호 동의 하에 Tersteeg 씨와 어떤 합의가 이루어 진다면 아마 좋은 일일 것이다. 너도 이해하겠지만, 테오야, 나는 내가 무얼 기대해도 좋은 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고, 또 미리 생각을 하고 예상을 해야만 하며, 내가 이것 혹은 저것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Tersteeg 씨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 돈 씀씀이를 관리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지난 삼 주 동안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업을 지속해 나갈 수 없다면 끔찍한 일이리라.
너에게나 나에게나 지금은 역경의 시기, 투쟁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보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형이 Mauve 매형에 흠뻑 빠져 있으니까 마구 과장을 하는 것이야. 형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형과 똑같은 특질만 찾으니까, 매형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은 형의 취향이 아니라고 하지.’
외면적으로는 아버지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내가 화실을 세내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며, 새해에는 결코 다시 다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함으로써, 아버지와 나 사이의 지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못 느낀다.
너는 또 말한다. ‘언젠가는 형이 크게 참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이전에도 그러한 참회를 무수히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놈의 참회가 찾아오는 걸 보고 피하려 애썼다. 그래, 내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기왕지사 지나간 일이 아니냐? 아직도 더 참회를 해야한단 말이냐?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참회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드로잉이 나에겐 점점 더 열정적인 것이 되고 있다. 그건 바다를 그리워하는 수부의 열정과 똑같은 것이다.
이번 겨울을 에텐에서 났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고, 나로서도 훨씬 더 손쉬웠을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나는 다시금 우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이곳에 왔으니 어떻게 하든 꾸려나가야 한다. 이곳에서 나는 내 가슴과 영혼을 내 일에다 불태웠다. 그리고 뭐라 해야 할까? 에텐은 잃어버렸다. Heike도. 하지만 그 대신에 뭔가를 얻으려 애써야 할 것이다.
Mauve 매형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그래, 내가 매형을 정말로 좋아하고 공감을 느낀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거기다 매형에게서 배울 기회를 얻은 것도 나로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을 어떤 체계나 이론에다 구속할 수 없듯이 매형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매형과 매형의 작품 외에, 매형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나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내 자신과 내 작품을 두고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기야 하겠지만, 다른 점도 분명히 있어. 내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는,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때로는 열정과 타오르는 마음으로 좋아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다고 단지 몇몇 사람만이 완벽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가치하다고 벽안시하거나 하지 않아. 그건 사실과는 정말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내 화실이 이제야 화실다운 면모를 지니게 된 듯하다. 언젠가 테오 네가 와서 보았으면 좋겠다. 벽에다가 내 습작품들을 모두 걸어 두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것도 보내 준다면 나에게 뭔가 도움이 될 듯도 하다. 작품들은 아직 팔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점이 여러 군데 있다는 걸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작품들에다 열정을 불어 넣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것들에는 뭔가 본질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꽃도 몇 송이 들여 놓고, 거기다 구근이 든 화분도 몇 개. 그 밖에 다른 것으로 방을 꾸며보았다. 그리고 ‘그래픽’에서 아름다운 목판화를 몇 점 아주 싸게 구입했다. 이것들은 연판(鉛版)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판목(版木) 자체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몇 년 동안이나 구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것이다. 작품들 중에는 아주 훌륭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Fildes의 ‘집없는 떠돌이들’과 Herkomers의 대형 작품이 두 개, ‘아일랜드 이주민들,’ 특히 Frank Holl의 작품 ‘여학교’, 마지막으로 Walker의 ‘낡은 정문’ 등.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것이야.
그리고 이 아름다운 것들을 나는 어느 정도의 평정함을 견지하면서 간직한다. 왜냐하면, 동생아, 비록 내 자신이 완전한 드로잉을 만드는 것으로부터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늙은 농부를 그린 습작 몇 장을 벽에 걸어놓고 보니 이 화가들을 향한 나의 열성이 헛된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사실적이면서도 그 안에 정감이 들어있는 뭔가를 만들려고 분투하고 애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밭에서 감자를 캐내고 있는 열두 명 가량의 사람들을 드로잉하고 있다. 이곳 사구에서는 땅과 하늘이 좋은 배경을 이루므로, 거기다 대담하게 인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습작들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진 않으며, 앞으로 아주 다르면서도 더 훌륭하게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브라반트 유형은 특징적이므로, 그것들로부터 뭔가 좋은 것을 얻어내지 못할 수는 없으리라.
Mauve 매형이 나에게 대상을 그려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건 바로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는 법이다. 나는 이것에 흠뻑 빠져서, 앉아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서투르게 칠하고는 다시 지워 버리곤 하는 일을 되풀이 했다. 나는 즉시 몇 장의 작은 크기의 수채화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큰 크기로도 한 장 그렸다. 하지만, 테오야, 너에게 미리 밝혀 두겠는데, 내가 처음에 펜 드로잉을 들고 Mauve 매형을 찾아갔을 때 매형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니? ‘이제 목탄과 색분필, 붓과 찰필 등으로 그리는 걸 시도해 보지.’ 나는 이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작업하느라고 빌어먹게도 많은 난관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착수 했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목탄을 밟아버리고는 정말 낙담하고 말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너에게 색분필, 목탄, 붓을 사용해서 완성한 드로잉을 보내지 않았니? 그리고 상당히 많은 작품을 가지고 Mauve 매형에게 돌아 왔었지. 물론 매형은 이것저것 합당하게 지적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제 나는 또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러한 시기에 처해 있다. Mauve 매형 자신도 내가 붓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적어도 열 장 가량의 드로잉은 망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보다 나은 미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의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작업을 하고, 실수를 하더라도 낙담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나쁜 일은 날씨가 아주 사납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의 삶은 나에게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즐긴다. 특히 내 자신의 화실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
사람들이 누군가 오늘 나를 찾아 왔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Tersteeg 씬 것 같다. Tersteee 씨와 몇 가지 상의 할 것도 있고 하니까 그 분이었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작은 수채화 중의 하나는 내 화실의 구석을 배경으로 커피를 갈고 있는 어린 소녀를 그린 것이다. 나는 머리와 작은 손에 알맞은 색조를, 그 안에 빛과 생명이 있는 색조를 찾고 있다. 그것은 졸리운 땅거미를 배경으로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과 대담하게 반대되는 색조로 쇠와 돌로 된 굴뚝과 스토브의 일부, 그리고 마룻바닥을 처리하려고 한다. 원하는 대로 그 드로잉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의 사분의 삼은 녹색 비누 색조로 만들고, 어린 소녀가 앉아 있는 구석 부분만 부드럽고, 온화하게, 정감을 담아서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너도 이해하듯이 내가 느끼는 대로 모든 걸 표현할 수는 없으며 문제는 어려움을 공략해 내는 데 있다. 그리고 녹색 비누 부분은 아직도 충분히 푸른 색조를 띠지 못하고, 반면에 부드러움은 충분히 부드럽지 못하다. 어쨌거나 화지에다 스케치를 대충 해놓았으므로, 생각은 표현된 셈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럴 듯 해 보인다.
테오야, 모델 때문에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을 사냥하다시피 찾아 나서는데, 그들을 찾고 나서도 화실까지 데려 오게 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아침에는 대장간 소년을 데려 올 수가 없었는데, 까닭인 즉슨 그 애의 아버지가 한 시간 당 일 길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할 것을 너에게 약속하지만, 모델의 경우에는, 예를 들자면, 내가 전력으로, 아니면 반쯤 속력을 내면서, 그도 아니면 전혀 속도를 못 내면서 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종종 내 호주머니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력으로 질주하기를 바라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도 알 것이다. 내가 보다 더 넓은 시야와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는 고삐를 약간 늦추어야만 하리라.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나니까 이것저것 돈 쓸데가 우후죽순처럼 매일 같이 새롭게 솟아난다. 내 자신의 경비로는 한 달에 백 프랑이면 충분해야 하지만, 꼭 필요한 곳에만 쓰고, 가능한 한 쪼개 쓰고 또 쪼개 쓰지만 (식사는 무료 급식 시설에서 한다) 매일 같이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들의 식사를 신경쓰야 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다. . . .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해 나가는 걸 반대하지는 않겠지.
또 한 주가 지났다. 규칙적으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델을 두고 작업을 했다. 이 모델은 마음에 든다. 수채화로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그것이 점점 더 마음에 들게 되었다. 내일은 할머니가 다시 모델을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작은 펜 드로잉화를 만드는 작업은 지속해 나갈 작정이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 그린 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할 참인데, 어떻게 보면 더 투박하고 더 간소한 형태를 띨 것이다. 외출 할 때면, 무료 급식 시설이나 삼등 대합실, 기타 그런 유사한 곳에서 종종 스케치를 한다. 하지만 밖은 빌어먹게도 춥고, 특히 숙련된 화가처럼 빨리 그리지도 못하고, 스케치가 어느 정도나마 도움이 되게 하려면 세부적인 것까지 다 그려야만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빈둥거리지 않았으며, 이곳에 뿌리를 내리려 애를 썼다는 걸 너도 이해하겠지? Mauve매형이 나를 보러 왔었다. Tersteeg 씨도. 두 분의 방문은 나를 무척 기쁘게 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수채화 그리는 법도 배우 게 되면 머지않은 장래에 내 작품이 팔릴만한 것이 되리라. Tersteeg 씨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고, 작은 작품들 중에 몇 점은 제대로 완성된다면, 아마도 사실 것도 같다. 너에게 스케치를 보낸 작은 할머니 드로잉을 좀 더 손질해서 완성시켰다. 언젠가는 분명히 팔릴 것이다.
테오야, 내가 하루 종일 개미처럼 일한다는 걸,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한다는 걸 믿어다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온 것만큼 열심히, 아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할 수 없다면 정말로 낙심천만 일 것이다. 드로잉의 크기나 소재 문제에 관해서는 Tersteeg 씨나 Mauve 매형의 제안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최근에 다소 큰 작품에 착수했다. 그리고 어젯밤에 매형은 나에게 ‘이제 수채화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군’이라고 했다. 내가 그 정도 성취했다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는 않은 걸로 생각해도 되겠지. 큰 크기의 화지에다 붓 사용법과 색채의 힘을 시도해 보았으니까, 다소 작은 것에도 모험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테오야, 내 안에 힘이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내어 자유롭게 하려고 전심전력을 다한다. 네가 이 모든 걸 다 지불해야 한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황이 지난 겨울에 그랬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 나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리고 내 붓에 힘이 좀 더 실리게 되면, 지금 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기운차게 밀고 나간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될 시기가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 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몸이 좋지 못했다. 너무나 비참한 느낌이 들어서 침대에 누웠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이따금씩은 이가 욱신거렸다. 거기다 걱정으로 열도 있었다. 이번 주에 너무나도 골머리를 앓아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어났지만, 다시 몸저 눕고 말았다. 열병과 신경 과민으로 거의 삼 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온 몸에서 기운이 실 풀리듯 풀려나가는 걸 또렷이 느꼈지만, 그래도 내 열의나 용기는 건재하다.
매일매일 여기저기 푼 돈 들어가는 것이 합쳐져서 내 골머리를 정말로 썩혔다. 드로잉 도구도 몇 개 되지도 않고, 그나마도 결함 투성이라 거의 못 쓰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번 주에는 원래 너무 얇은 것이라서 그렇겠지만 화판이 통처럼 휘어져 버렸고, 화가(畵架)도 운반 중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거기다 때때로 옷을 수선할 필요도 있다. Mauve 매형은 이미 그걸 두고 몇 번 암시를 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 옷들은 주로 네가 입던 것 중에서 낡은 것을 손질한 것이고, 몇 벌은 싸구려 기성품을 산 것이다. 그래서 원래부터 초라하게 보이는데, 특히나 물감이 여기저기 묻어 있으니까 깨끗하게 보이게 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신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속내의도 천쪼가리가 되다시피 했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나는 한 푼도 없이 지냈다.
병이 난 것은 진짜로는 야외에서 모델을 두고 그리기로 한 것에 관해 Mauve 매형과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나에겐 돈이 한 푼도 남아있질 않아서 어쩔 수가 없는데 매형은 내가 그걸 겁내 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종종 아주 쾌활하게 느끼는 바로 그러한 가운데, 순간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울함에 빠져드는 일이 때때로 일어난다. 그러한 순간은 우리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사악한 시간이다.
계속해서 열심히 작업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내가 내 일로 뭔가를 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까지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다른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를 정말 성가시게 한다. 모델 앞에 서서 작업을 하면서도 그에게 모델료를 줄 수 있을지, 다음 날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이런 것도 모르는 형편이니 말이다. 그리고 드로잉은 그 자체로도 어려운 일이므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침착성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드로잉이 성공을 거두느냐 실패하고 마느냐 하는 것은 화가의 기분과 상태에 상당히 크게 좌우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기분을 쾌활하게 하고 머리를 명료하게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때때로,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무거운 우울감이 나를 사로잡고, 그러면 저주받은 듯한 느낌이다. 이 경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Mauve 매형이나 Israels나, 다른 많은 화가들은 기분이 어떠하더라도 그 상태에서 뭔가를 취하는 법을 아니까.
Mauve 매형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헤쳐나가자고 동의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어서 정말로 나 자신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우리는 깊고 어두운 우물의 바닥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완전한 절망에 빠져 누워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몸이 좀 나아졌다. 어제 저녁에는 다시 일어나 물건들을 정리하느라고 이것저것 뒤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모델이 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왔다. 그녀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Mauve 매형과 의논해 둔 상태라, 드로잉을 약간 하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 내내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만 더 쉰다면 병은 끝나고, 또 내가 주의를 한다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몇 년 전처럼 그렇게 몸이 튼튼하지는 않은 듯 하다. 그 때는 하루도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일이 결코 없었다.
내 젊음은 가버렸지만, 삶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의 기력은 아직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 말은 다만 마음이 가볍고 근심걱정이 없던 그런 시기는 가버렸다는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그럼에도 훨씬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내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만 하면, 지금보다는 사정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Mauve 매형은 점차 괜찮아 질 거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린 수채화는 팔릴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내 드로잉이 두텁고, 충충하고, 검고, 무디게 될 때, 매형은 나를 위안하기 위해 다음처럼 말했다. ‘네 작품이 지금 투명하다면, 그건 어떤 세련됨(chic)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야. 그리고 그건 나중에 아마도 도로 흐리터분하게 될 거야. 지금 당장 아무리 악착같이 달라붙어도 흐리터분하다면, 후에 그런 점은 재빨리 사라지고 밝게 될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나로서는 반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보내는 작은 작품에서 그러한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시작한 지 십오 분만에 완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국에 가서는 정말 흐리터분하게 되고만 더 큰 작품을 만들고 난 다음의 일이다. 내가 큰 작품에 그다지도 열심히 작업을 했기 때문에, 모델이 우연히 다시 자세를 취하게 되었을 때, 쓰고 남은 와트만 지에다가 이 작은 것을 스케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수채화로 실험을 하는 것은 상당히 비싸게 먹힌다. 화지(畵紙)와 물감과 붓과 모델과 시간 등등.
그럼에도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지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위해서는 나쁜 시기도 참고 견디어 나가야만 한다. 이번 여름에 네가 에텐에 있을 때, 너는 내가 수채화로 작업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했었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조차도 몰랐다.
작업이 점점 더 나를 끌어 당긴다. 그래서 편지를 쓰거나 필요할 때 누구를 방문하거나 하기 위해 일에서 손을 떼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Tersteeg 씨를 뵈러 갔을 때, 드로잉도 몇 장 가지고 갔었다. Tersteeg 씨는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하시면서, 작은 것들을 몇 장 더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 현재 그걸 제작하느라 바쁘다. 앉아서 뜨개질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새롭게 펜 드로잉으로 만들었다. Tersteeg 씨가 내 드로잉이 다소 나아졌다고 해서 무척이나 기쁘다. 모델에 보다 친숙해 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이유로도 그녀를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마지막 두 습작에서 나는 성격을 훨씬 더 잘 파악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 C M 외삼촌에게 편지를 써, 내가 이곳에 화실을 하나 세내었으니, 혹시라도 헤이그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해 주고 한 번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여름에 빈센트 삼촌도 내게 말하기를 이번 여름에 제작한 것보다 어느 정도 작은 드로잉이나, 수채화는 더욱 더 좋으니까, 완성을 하면 자기에게 보내라, 그러면 사 주겠다고 했다.
잡지사들이 어떤 종류의 드로잉을 원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나에게 꼭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잡지사들이 이런저런 사람들의 유형을 그려놓은 펜 드로잉을 이용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복제에 적합한 어떤 것을 정말로 만들어 보고 싶다.
최근에는 젊은 화가인 Breitner와 이따금씩 드로잉을 하러 야외로 나갔다. 그는 드로잉에 아주 뛰어난데, 나와는 그리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우리는 종종 무료 급식 시설이나 대합실에서 함께 스케치를 하곤 한다. 그리고 틈이 나면 그가 내 화실로 와 목판화들을 보고 나도 그를 보러 가기도 한다.
어제 Mauve 매형으로부터 색채를 투명하게 하면서 손과 얼굴을 그리는 법에 대해 배웠다. 나는 내 스스로 터득한 것 중에서 몇 가지는 잊어버리도록 애쓰면서, 대상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비례에 관해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갖는다는 것은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다음에야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제작한 드로잉들은 이전보다 비례가 훨씬 더 나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지금까지 내 드로잉에 있어서 최악의 결점은 비례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Mauve 매형과 잘 지낸다는 게 늘상 쉽지만은 않다. 매형 쪽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이다. 그건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 다 똑같이 신경질적이고, 매형이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이 들고, 또 나로서는 매형의 말을 이해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마찬가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듯하고, 그건 표면적인 공감보다는 다소 더 깊은 감정이 되었다. 매형은 큰 그림을 완성시키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정말 멋진 그림이다. 그리고 매형은 거기다 겨울 풍경과 멋진 드로잉도 몇 장 동시에 작업을 하고 있다. 매형은 매형의 그림 하나 하나, 드로잉 하나 하나에 자신의 생명의 일부를 바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때로는 녹초가 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이제는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아’라고 말했다. 그 순간에 매형을 본 사람은 누구도 매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이월 십팔일이다. Tersteeg 씨가 나의 작은 드로잉을 십 프랑에 사서, 그걸로 나는 이번 주를 지냈다. 하지만 Tersteeg 씨는 작은 드로잉만, 그것도 수채화로 된 것만을 원한다. 한 번 더 너에게 확언컨대 나는 쉽게 팔릴 만한 것, 그러니까 수채화로 된 것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서 있는 힘껏 열심히 작업한다. 하지만 그건 한 번에 성취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점차적으로 그걸 만들어 내는 데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에 착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 볼 때, 그 때 조차도 상당히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양 한 마리는 다리를 건너갔다.
이번 주에 나는 Tersteeg 씨가 산 것외에도 세 장의 다른 습작품을 만들었다. 내 드로잉이 발전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그건 나에게 용기도 준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드로잉이 가장 주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일 년 이내에 뭔가 팔릴 수 있는 것을 제작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테오야, 동생아,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너도 함께,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그 열매를 따게 될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 오후에 de Bock가 나를 보러 왔다. 마침 내가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할 때였는데, 그는 그녀를 보자, 자기도 인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말뿐이지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인물을 대상으로 작업을 했다는 게 너무 기쁘다. 만일 풍경화만 그렸다면,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쯤은 얼마 안 되는 가격에나마 팔릴 만한 뭔가를 만들 수 있겠지만, 나중에 가서 궁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인물은 시간이 더 걸리고 더 복잡하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종국에 가서는 그것이 더욱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리라고 믿는다.
최근에 Mauve 매형은 나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늘 아침 나는 나를 걷잡을 수 없이 괴롭히던 어떤 것에 대해 여전히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 동안 괜찮을 듯 하다. 매형은 몸이 아주 좋지 못하다--물론 보통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매형이 최근에 나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퉁명스러웠던 것은 단지 매형의 병 때문이었지, 내 그림이 잘못된 길로 들었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매형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항상 너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야. 때로는 너무 피곤하고 그러니까 그럴 때는 제발 인내심을 가지고 좀 기다리도록 해.’
현재로서는 Weissenbruch 씨만이 Mauve 매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분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오늘 그 분의 화실을 찾아 갔다. 그 분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Mauve 이야기를 하러 왔구만.’ 그리고 나서 Weissenbruch 씨는 요전날 나를 찾아온 것은 나의 재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매형이 내 작품에 대해 의견을 듣기 위해 자기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Weissenbruch 씨는 매형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단다. ‘그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그리던데. 내 자신이 그의 습작을 보고 그릴 수 있을 정도인 걸.’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사람들은 나를 “무자비한 칼”이라고 부르지. 그건 맞는 말이야. 그리고 내가 자네의 습작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Mauve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걸세.’ 매형이 아프거나 혹은 큰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거나 하는 동안에는 내가 뭔가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Weissenbruch 씨를 찾아뵈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Weissenbruch 씨는 매형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 다음에 Weissenbruch 씨에게 내 펜 드로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 분은 ‘최고지’라고 말했다.
또 내가 ‘펜 드로잉에 어울리는 대상들이 눈에 들어온다’***라고 하자, 그 분은 ‘그럼 펜으로 그려야만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Tersteeg 씨가 그 드로잉들을 보고 나를 꾸짖었다고 이야기 하니까 ‘그런 말에 신경 쓸 것 없다’고 하면서 ‘Mauve가 자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화가라고 하니까, Tersteeg 씨가 아니라고 그랬고, 그 때 Mauve는 자네 편을 들었지. 그 자리에 나도 있었어.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나도 자네 작품을 보았으니까, 자네 편을 들도록 하겠네.’
나는 ‘내 편을 든다’는 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진 않지만, Tersteeg 씨가 늘상 나를 보기만 하면 ‘자네 스스로 돈을 버는 걸 염두에 둘 때가 되었지’라고 말하는 걸 견딜 수가 없다. 그건 정말 끔찍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입다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있는 힘껏 일하고, 조금치도 나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거야.
Weissenbruch 씨처럼 명석한 분을 이따금씩 찾아 뵙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즉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드로잉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그걸 끝낼 것인가를 설명하는 수고--예를 들자면 그 분이 오늘 아침 그런 것처럼--를 마다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드로잉을 하는 것을 볼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그걸 잘 관찰하도록 해라. 왜냐하면 화상들이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를 안다면 그 그림들을 다르게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잘 설명을 해낼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많은 것에 보다 명료한 통찰력을 갖게 된 것은 화가들이 작업하는 걸 보고, 또 내 스스로 어떤 걸 해봄으로써 였다는 점이다.
오늘은 어린아이를 모델로 썼기 때문에, 삼십 분 동안은 휴식 시간을 주어야 했다. 그 삼십 분 동안에 편지를 쓴다.
테오야, 내 말을 고깝게 듣거나, 내가 너를 책잡는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그런데 너는 아마도 나를 기쁘게 할 거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썼겠지만, 그건 나를 전혀 기쁘게 하지 않았다. 너는 그 작은 수채화가 네가 본 내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라고 했지만, 글쎄, 난 그렇지 않다고 봐. 그건 왜냐하면 네가 갖고 있는 내 습작품들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여름에 제작한 펜 드로잉도 그것보단 낫다. 어쨌거나 그 작은 수채화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내가 그걸 너한테 보낸 이유는 내가 때로 수채화로 작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작품들에는 훨씬 더 많은 공구와 또 더 많은 개성이 들어있다. 그리고 Tersteeg 씨에게 내가 반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똑같은 것으로, 내 자신의 개성과 기질에 따라 모델을 두고 어렵지만 습작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표현해 내는 데 정말이지, 단지 반 정도나 어울릴까 말까한 그런 작업 양식으로 할 것을 그 분이 부추긴다는 점이다.
물론 드로잉을 팔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지만, Weissenbruch 같은 진짜 예술가가 팔릴 수 없는(???) 습작이나 드로잉을 두고 ‘정말 살아있는 그림이군. 내 자신이 이걸 보고 그릴 수도 있겠는 걸’이라고 말해줄 때 더욱 행복하다. 나에게는 돈이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특히 현재는, 내게 주된 것은 뭔가 진지한 것을 만드는 것으로 귀착된다.
Weissenbruch 씨가 잔디밭 풍경을 두고 말한 것과 똑같은 걸 Mauve 매형은 인물화를 두고 이야기 했는데, 매형은 난로가에서 생각에 잠긴 늙은 농부를 두고 마치 과거의 대상이 타오르는 불길이나 연기 속에서 떠오르는 걸 보는 듯이 말했다. 그건 오랫동안 아니면 짧은 시간 지속되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본질 속으로 깊이 꿰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그가 누구이든 간에, 화상이든, 화가이든 간에, 쫓아 다니는 일은 앞으로는 더더욱 없을 거야. 내가 쫓아다녀야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모델이야. 내 생각에는 모델 없이 작업을 하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것이거든.
테오야, 결국 이렇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는 건 기쁜 일이다. 이제 뭔가 빛이 비친다는 걸 뚜렷이 느낀다. 인간을 그린다는 것, 뭔가 살아있는 걸 그린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그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렵지만, 종국에는 멋진 일이다. 네가 곧 홀란드로 올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기쁘기 그지없다. 네가 이곳에 들르면, 화실에서 우리 둘이 좀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네 편지와 돈을 받은 다음부터는 매일 모델을 두고 작업에 완전히 푹 빠져 있다. 현재는 새 모델이다. 새 모델은 한 명이 아니라 같은 가족으로, 벌써 세 명을 그렸다. Frere의 인물화를 닮은 마흔 다섯 살 난 여인, 그 다음에는 여인의 딸로 서른 살 가량 되고, 열 살 혹은 열두 살 난 어린 아이, 이렇게 세 명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으로, 모델 일이라도 하게 된 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여긴다. 젊은 여인은 미인은 아니지만, 몸맵시가 매우 우아하고 뭔가 여성적인 매력이 있다. 옷도 그들에게 잘 어울린다. 검정 메리노, 멋진 보넷과 아름다운 숄. 지금은 정말 조금밖에 줄 수 없지만 나중에 벌충을 해 줄 거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는 그다지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내일은 내가 그리고 있는 두 아이를 위해 파티를 열 작정이다. 이 애들은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재미있게도 해 주어야 한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고아원에서 멋진 아이를 데려올 예정이다.
화실에 뭔가 생명력을 불어 넣어 이웃의 온갖 부류의 사람을 데려오고 싶다. 내가 아주 인습적인 사람들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겠지만, 반면에 가난한 사람, 우리가 흔히 서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는 더 잘 지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한 편을 잃는 대신에 다른 한 편을 얻는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두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로서 내가 이해하고 표현하기를 원하는 영역에서 사는 것이 결국에는 올바르고 정당한 일이다. 모델과의 대화에는 뭔가 아주 즐거운 게 있다. 그들로부터 많은 걸 배운다. 이번 겨울에 나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났다.
다시 새 달이 시작되었구나.
Breitner는 사람들이 가득한 큼지막한 그림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어제 저녁에 나는 그와 함께 적당한 유형의 사람들을 찾으러 거리로 나갔다. 나중에 집에서 모델과 함께 그들을 연구할 심산이었지. 그런 방식으로 나는 정신병자 수용소가 있는 Geest에서 본 할머니를 그렸다.
내 드로잉을 사줄 사람을 구하도록 애써야만 하지만, 만일 나에게 그럴 여유만 있다면, 내가 현재 제작하는 모든 것은 앞으로의 작업을 위해 보관하고 싶다. 내가 개개의 인물을 그릴 때는 항상 더 많은 인물을 구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다. 예를 들자면, 삼등 대합실, 전당포, 실내 등. 하지만 이 더 큰 구성 작품은 서서히 익어갈 것이고, 또 예를 들어, 세 명의 침모가 있는 드로잉을 하나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구십 명의 침모를 그려야 한다.
Tersteeg 씨가 나를 보러 왔었다.
2월 18일자 편지에서 너는 이렇게 말했다. ‘Tersteeg 씨가 이곳에 왔을 때, 우리 두 사람은 물론 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리고 Tersteeg 씨는 형이 뭔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자기를 찾아와도 좋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며칠 전에 내가 십 프랑만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왜 Tersteeg 씨는 그걸 주면서 나에게 자제할 줄을 모른다고 이런저런 비난을 거기다 덧붙였어야 했을까? 내가 쓰야할 돈이었다면 Tersteeg 씨 얼굴에다 집어 던졌을 거야. 하지만 모델에게 돈을 지불해야만 했거든.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가난하고 병든 여자였어. 그래서 나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지. 하지만 앞으로 육 개월 동안은 Tersteeg 씨를 보러가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내 작품을 보여주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테오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Tersteeg 씨와는 잘 지내야 해. 그 분은 우리에게는 거의 맏형과 같은 분이야.’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아, 그 분은 너에게는 다정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몇 년 동안 그의 퉁명스럽고 거친 면만을 보여주었다.
내가 구필을 떠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금와서 하는 말이지만 즉시 시작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시간 사이, 그 모든 시간 동안에, 내가 친구나 도움을 줄 사람도 없이 엄청난 비참함을 겪으면서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 (런던에서 나는 빈번히 한데서 잠을 자야만 했고, Borinage에서는 삼 일 밤을 계속해서 그랬다), 그래, 그 때 Tersteeg 씨가 빵 한 조각이라도 주었니? 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주었니? 그러지 않았다. Bargue 책을 빌려줄 때도 나는 문자그대로 네 번이나 요청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내 첫 번째 드로잉들을 보냈을 때, 그 분은 내게 물감 상자를 보내 주었다. 나도 그 첫 번째 드로잉들이 돈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Tersteeg 같은 분이라면 ‘그를 예전부터 알았으니까, 앞으로 잘 해나가도록 도와야지’라고 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 분은 내가 살아나가기 위해 돈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거다.
브뤼셀에서 ‘내가 얼마 동안 헤이그에서 작업할 수는 없을까요? 화가들을 좀 알고 지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요’라는 편지를 써보냈을 때도, 나를 떨쳐버리려고 그랬는지 ‘안 돼, 물론 안 돼지. 자네는 자네 권리를 잃어버렸어’라고 써보내지 않았겠니? 차라리 영어나 불어를 가르치거나, Smeeton이나 Tilly로부터 모사일을 얻어내려 애쓰는 편이 더 나았지. 비록 후자는 바로 이웃에 있지는 않았지만. 게다가 브뤼셀에서는 이미 몇몇 석판화상들이 나를 거부했거든. 일이 없고, 불경기라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어.
내가 이번 여름에 드로잉을 다시 보여주자 그 분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라고 하면서도, 지난 번에 한 이야기를 철회하지는 않았어. 내가 Tersteeg 씨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결국에는 헤이그로 오자 나를 떨쳐버리려고 애썼어. 내가 화가가 되려는 걸 비웃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Mauve 매형도 나를 풋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고는 상당히 놀랐었지. 나는 매형에게 돈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매형 스스로 이런 말을 하더군. ‘돈이 필요하지. 돈을 벌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자네의 어려운 시절은 끝나고 이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아. 그리고 자네는 그걸 위해 열심히 일했으므로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네.’ 그리고 매형이 처음으로 한 일은 내가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 것이었어.
내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Tersteeg 씨가 나를 나무라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는 실제로는 밭에서 쟁기를 끄는 소처럼 일에 매달리기 때문에 (내가 이다지도 열심히 작업을 하니까 그 분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봐. 그것도 그 분의 잘못된 생각이지), 이처럼 어려운 일에 끈질지게, 열심히,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을 퍼붓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라고 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거야.’
‘자네가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큰 이유네.’
‘자네 밥벌이는 자네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나는 말하지. ‘제발 그만해요.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테오야, 그런 일은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도 온당치 못하다. 그런 말은 나를 슬프게 하고,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 문제가 나를 견딜 수 없이 압박하면,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생각도 하지 않고 세련된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애쓴다. 그러면 결과는 서글플 정도이고, Mauve 매형은 당연히 화를 내면서 말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 딴 건 찢어버리게.’ 하지만 Tersteeg 씨는 화가 나면 내 드로잉의 장점들은 간과하고, ‘팔릴만한’ 것을 만들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Mauve 매형과 Tersteeg 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즉시 알 수 있겠지.
매형이 지금까지 말한 것의 뼈대는 ‘빈센트, 자네가 그림을 그릴 때면, 자네는 화가인 셈이야.’ 그래서 나는 몇 주간이고 드로잉과 비례와 원근법을 두고 작업을 하고 고심을 하지만, Tersteeg 씨는 이런 노고를 치하하기는커녕 ‘안 팔리는 것’ 같은 이야기만 한다. 오랫동안의 찾아 헤매임 끝에 그다지 비싸지 않은 모델을 한 명 발견했는데 ‘모델을 덜 쓰는 것이 싸게 먹히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게’라는 그 분의 말에 대해 화가들이 뭐라고 할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모델을 찾아내는 것도, 그들을 데리고 와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이것이 대부분의 화가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만다. 특히 모델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아껴야 하는 경우에는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모델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인물 화가로서는 파멸이다.
Tersteeg 씨는 내 드로잉을 두고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드로잉은 자네에겐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먹는 일종의 마약과 같아. 하지만 그 대가로 자네는 수채화를 그릴 수 없게 되고 말거야.’ 아주 정묘한 말솜씨이긴 하지만, 그 말은 분별없고, 표면적일 뿐 아니라,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이다. 내가 수채화를 그릴 수 없는 주된 이유는 내가 아직은 비례와 원근법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진지하게 그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Tersteeg 씨가 내 생활비로 일주일 동안 살면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이게 꿈을 꾸거나, 공상을 하거나, 마약을 먹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다지도 많은 어려움과 싸워 나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무(無)가 진짜 무라는 걸, 그리고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지내는 날들이 정말로 힘겹고 어렵다는 걸 이해한다면, 내가 이 고난의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너로부터 받는 얼마 간의 돈에 투덜거리거나, 또 너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비난함으로써 내 기운을 쭉 빠트리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일하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 그 정도의 돈 가치도 없는 놈일까? 나는 단지, 테오야, 네가 이곳에 빠른 시간 내에 와서 내가 너를 속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네 눈으로 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 정도로 그 얘기는 그만 하자. Tersteeg 씨는 내 드로잉을, 거기에는 상당한 장점들이 있는 데도, 비하한다. 나는 Tersteeg 씨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드로잉을 사고 안 사고는, 내 생각에는 아주 다른 문제, 그러니까 개인적인 불화나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는 아주 별개의 문제이다. Tersteeg 씨가 내 드로잉을 사고 안 사고는 나한테 달린 것이 아니라 내 작품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을 사거나 (내가 차츰 나아지고 있으므로) 혹은 사지 않거나 하는 것은 Tersteeg 씨가 그걸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어야 한다. Tersteeg 씨가 직접 그걸 사거나 아니면 다른 애호가에게 그걸 소개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반감이 개인의 판단에 영향을 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어떤 화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그의 작품의 결점을 간과하는 것은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모델을 보고 진지하게 습작을 해 나가는 것이 어떤 것은 팔릴 만한 것이고 또 어떤 것은 팔릴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Tersteeg 씨의 실제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다. 사실 나 자신이 그림과 드로잉을 판매하는 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Tersteeg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것에 대해 많은 가르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Tersteeg 씨가 비하한 나의 마지막 드로잉과 습작들에는 내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Tersteeg 씨의 말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씨와의 우정을 잃는 편을 택할 것이다. 너는 내 말이 너무 심하다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물릴 수가 없다. 그리고 Tersteeg 씨와 나 사이에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나를 슬프게 하고 우울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Tersteeg 씨에게 반대하거나 적대적이라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걸 너에게 밝혀두어야만 하겠다. 어쨌거나, Tersteeg 씨는 Tersteeg 씨이고, 나는 나이다.
벌써 두 시인데 아직도 해야할 일이 있다. 근심거리에 사로잡히는 순간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음이 평정하다. 그리고 내 마음의 평정은 내가 작업하는 진지한 태도와 성실한 성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내 기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음이 평정하다. 예술에 있어서 우리는 인내심을 그다지 많이 지닐 수가 없다. 그 어휘는 비례에 어긋난다.
믿어다오. 예술의 세계에서는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일반 대중에게 사탕발림 식의 멋을 부리기보다는 진지한 습작을 두고 여러 가지 역경을 헤쳐 가는 것. 근심 걱정의 순간에는 때로 그 멋 부리기를 얼마간 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고는 나에게 말하곤 하지. ‘아니야, 내 자신에게 진실해야 해. 그리고 투박하나마 진지하고 거칠지만, 진실된 것을 표현하도록 해야 해.’
아마도, 아마도, 정말 열심히 애를 쓴다면, 지금이라도 수채화를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온실에서 수채화를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Tersteeg 씨와 너는 자연스러운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Tersteeg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머지 안아 수채화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안 돼요. 아직은 때가 아니거든요. 좀 더 여유를 가지세요.’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애호가들이나 화상들을 쫓아다니지 않을 거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오도록 해야지. 우리가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조만간에 수확을 할 수 있을 거야!
Tersteeg 씨가 다녀간 다음부터 나는 고아원 소년이 구두를 닦고 있는 모습을 드로잉에 담고 있다. 내 의지에 잘 복종하지 않는 손으로 그린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소년이 거기에 담겨 졌다. 그리고 아직 내 손이 제멋대로 굴긴 하지만, 그 손은 내 머리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실에 있는 것들, 스토브, 굴뚝, 화가, 발판, 탁자 등도 스케치 했다. 물론 팔릴만한 것들은 아니지만 원근법을 연습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네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공감과 확신을 가지고 내 작품을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참 그리고 올 때, Ingres지를 잊지 마라. 특히 내가 주로 사용하는 두꺼운 걸로, 내 생각에는 그게 수채화 습작에도 좋을 듯 하다.
테오야,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C M 삼촌이 헤이그의 정경을 열두 장정도 자그마한 펜 드로잉화로 만들어 주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
삼촌은 나에게 오기 전에 Tersteeg 씨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삼촌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똑같은 이야기로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대꾸를 하고 말았다. ‘밥값은 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이죠? 밥값을 한다, 아니 먹을 자격이 있다.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먹을 값어치가 없다는 건 확실히 범죄겠죠. 정직한 인간이라면 자신이 먹는 걸 먹을 값어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먹을 자격은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벌 수가 없다면, 그건 불운이겠지요. 따라서 삼촌이 나에게 “넌 먹을 값어치도 없는 놈이야”라고 한다면 그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지만, 삼촌의 말이 내가 그걸 항상 벌지는 못한다는, 때로는 하나도 못 버니까요, 그런 다소 정당한 의도라면, 그건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씀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삼촌의 말씀이 그런 의도 이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달라질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러자 삼촌은 더 이상 ‘밥값은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표현 기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우연찮게 de Groux의 이름을 언급하자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삼촌은 딱 잘라서 말했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de Groux가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느냐?’ 나는 용감한 de Groux 스승(Father***)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가가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때, 그는 자신의 사생활의 내적인 투쟁 (그것은 예술품을 생산해 내는 가운데 수반되는 특이한 어려움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은 혼자 간직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예술가의 작품이 비난의 여지가 없을 때 비평가가 그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건 아주 부당한 일이지요. de Groux도 밀레와 같은 대가이니까요.’
나는 삼촌이 화를 내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사정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좀 작은 습작품과 스케치가 든 작품첩을 끄집어 냈다. 삼촌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않다가 Breitner와 산보를 하다가 밤 열두 시경에 그린 작은 드로잉에 이르자 눈길을 멈추었다. 그건 토탄(土炭) 시장에서 본 Paddemoes (신축 교회 근처의 유태인 지구) 정경을 그린 것으로, 다음 날 아침에 펜으로 다시 작업을 했던 것이다.
‘도시의 이런 정경을 몇 장 더 그려줄 수 있겠니’하고 삼촌이 물었다. ‘그럼요,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하다가 지치곤 하면 때로 기분 전환 삼아 그리곤 하죠. Vleersteeg와 Geest와 수산물 시장 등이 있지요.’ ‘그럼 열두 장정도 만들어 줄 수 있겠니?’ ‘그럼요’하고 나는 대답한 뒤, ‘하지만 이건 사업이니까, 가격을 즉시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 정도 크기의 작은 드로잉은, 연필화든, 펜화든, 이 프랑 오십을 받기로 정해 두었지요. 삼촌, 뭐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니지요’하고 덧붙였다.
삼촌은 ‘아니, 하지만 이게 제대로 되면, 암스테르담의 정경을 담은 그림을 열두 장쯤 그려달라고 요청할 셈이다. 하지만 그 때는 내가 직접 가격을 정하도록 하지. 네가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라고 했다.
나로서는 다소간 겁을 냈었는데, 삼촌의 방문은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최선을 다해 이 작은 드로잉을 제작하고, 거기다 어느 정도의 개성도 부여하도록 애쓸 것이다. 내 생각에는, 동생아, 그런 종류의 일이 더 있을 듯하다. 연습만 좀 한다면 하루에 한 장씩은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보아라, 작품이 잘 되면 매일매일의 빵값과 모델에게 지불할 일 길더를 벌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해가 점점 더 길어지고 여름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 왔다. 무료 급식표를 만들고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빵값과 모델료를 지불하기 위해 드로잉을 하는 걸 이렇게 이름붙여 보았다. 낮 동안에는 모델을 보고 전력을 다해 작업을 한다.
내일 아침에 나는 드로잉에 적당한 소재를 찾으러 나가보아야 겠다.
덧붙여 Mauve 매형을 방금 만났다. 매형은 그 큼지막한 그림을 다행스럽게도 순산해 낸 모양으로 나를 보러 곧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이 나에게 아주 깊은 감명을 주었다. 모델에게 오늘은 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한 여인은 왔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하니까, ‘알아요. 하지만 모델 노릇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녁으로 먹을 게 뭐가 있나 보러 온 거예요’하고 응수했다. 그녀는 콩 한 접시와 감자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결국에는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있는 것이다.
테오야, 밀레가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de Bock에게서 Sensier가 쓴 훌륭한 책을 빌렸다. 너무나도 흥미로워서 나는 밤중에 깨어나 램프를 켜고는 앉아서 읽었다. 낮동안에는 작업을 해야 하니까.
바로 어제 밀레의 다음 말을 읽었다. ‘예술 그것은 전투이다(L'art c'est un combat).'
최근에는 진짜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C M 삼촌이 주문한 열두 장의 드로잉을 막 끝냈는데, 삼촌이 즉시 돈을 지불했으면 하고 바란다. 드로잉은 삼촌이 본 견본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
지금은 머리를 그리고 있는데, 손과 발도 그려야 한다. 그건 아주 급박한 일이다. 그리고 여름이 찾아와 더 이상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누드 습작품을 그려야겠다. 아카데믹한 자세를 원하는 것은 아니고, 예를 들자면, 땅 파는 사람이나 침모를 보다 더 잘 소화해 낼 수 있도록 누드 모델을 기용해 보고 싶은 것이 내 간절한 소망이다. 옷을 통해 신체를 보고 느끼는 법을 배우고, 또 그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는 남자와 여자를 열두 장 정도 습작해 보는 것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될 듯하기 때문이다. 습작 하나를 완성하는데 보통 하루는 걸리는데, 어려움은 또한 이 일을 해줄 모델을 찾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먼저 없애주어야 할 망설임은 사람들이 화가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데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런 일이 적어도 여러 번 있었는데, 심지어는 누드 모델로서는 아마도 Ribera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는 아주 연세가 많은 노인도 그랬다.
저녁에 Pulchri에 가니까 마침 활인화(活人畵)와 Tony Offermans의 일종의 소극(笑劇) 공연이 있었다. 소극은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복잡한 실내의 답답한 공기를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걸 보려고 기다리지야 않았겠지만, 활인화가 보고 싶어서, 특히 내가 Mauve 매형에게 준 Nicholas Maes의 동판화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모방한 활인화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활인화는 색조와 색채는 매우 좋았지만,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한 때 그걸 정말로 본 적이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송아지의 탄생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장면이 어땠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밤 Borinage의 외양간에는 갈색 피부의 작은 소녀가, 잠잘 때 쓰는 흰 모자를 쓴 작은 농가의 소녀가 한 명 있었는데, 불쌍한 암소가 진통으로 상당히 애를 먹는 것을 보고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눈에는 눈물이 글썽 그렸다. 그 장면은 Correggio나 밀레나 Israels의 작품처럼 순수하고 성스럽고 놀라웠다.
Mauve 매형의 그림은 살롱 전에 출품할 예정으로, 사구 위로 끌어올려진 소형 어선을 그린 대작이었다. 한 마디로 그건 걸작이었다. 체념에 관해서는 Mauve 매형의 이 그림과 밀레의 작품보다 더 좋은 설교를 들은 적도 없고, 더 좋은 설교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건 성직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종류의 진정한 체념이었다. 그 늙은 말들, 학대받으며 살아온 불쌍한 검은 색, 흰색, 갈색의 늙은 말들. 그 말들은 거기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인내하며, 유순하게, 뭐라고 불평 한 마디 없이. 말들은 아직도 조금 남은 마지막 지점까지 그 무거운 배를 끌어올려야 했다. 일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으며, 그 중간에 잠시 멈춰선 상태였다. 말들은 온 몸에 땀이 뒤범벅된 채 헉헉거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뭐라 그러거나, 반항을 하거나, 불평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오래 전에, 벌써 햇수로 따져보아도 몇 년전에 이미 극복했던 것이다. 말들은 앞으로 얼마간 더 일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만일 내일이라도 도살장으로 가야한다면 그것도 받아들이리라. 그들은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그림에서 깊고, 실제적이며, 말없이 전해오는 철학을 본다. 그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유일하게 실제적인 것이요, 위대한 앎이고, 깨우쳐야 할 교훈이며, 인생 문제의 해결책이다.’*** 내 생각에는 Mauve 매형의 이 그림이야말로 밀레가 오랜 시간 머물러 있으면서 혼잣말로 ‘Il a du coeur, ce peintre-la'***라고 할 드문 그림 중의 하나이다.
지금 나는 이전의 단조롭고 지루한 일이 어느 정도 기쁨이 된 그런 시기에 있다. 예전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을 이제 매주 그려내고 있어서, 마치 다시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병만 아니라면 아무것도 현재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는 이 힘을 나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뚜렷한 인식이다. 뭔가를 보고, 그것에 찬사를 보내며, 그걸 생각하고는, 마침내 ‘이걸 그릴 거야. 화지에다 그걸 옮겨 놓을 때까지 작업을 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오, 테오야, 왜 모든 걸 포기하고 화가가 되지 않니? 원한다면 너도 될 수 있다고 믿어. 나는 때때로 테오 네가 네 안에 유명한 풍경 화가를 숨겨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지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네가 자작나무나 밭고랑을 훌륭하게 드로잉하고, 눈과 하늘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테오야, 지금까지는 자유로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지만, 구필 상회와 계약을 맺는다면, 그 회사에 죽을 때까지 근무하겠다고 약속하는 셈이 되고,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그렇게 자신을 묶은 것을 후회할 순간이 올 가능성이 농후한 것처럼 보인다. 너는 또 분명히 이렇게 되받아 치겠지. ‘살다보면 자신이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할 그러한 순간이 오리라.’ 그렇지만, 신념과 사랑으로 충만해서 다른 사람들이 따분하다고 여기는 것, 다시 말하자면 해부학, 원근법, 비례 등의 공부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살아 남아 느리지만 확실하게 여물어 간다. 화상으로서의 너의 현재 지위를 존중한다고 해도, 진정한 솜씨가 없고,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제작할 수 없다면, 그 지위는 위협을 받기 마련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Jaap Maris의 사회적 지위가 Tersteeg 씨의 지위보다 더 굳건하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내가 두려워하고 겁을 내야 한단 말이냐? Tersteeg 씨가 내 그림을 두고 ‘팔릴 수 없다’거나 ‘세련되지 못하다’고 하는 말에 왜 귀를 기울여야만 한단 말이냐? 낙담할 때에는 때때로 나는 밀레의 ‘삽질하는 사람’이나 de Groux의 ‘가난한 사람들의 벤치’를 보곤 한다. 그러면 Tersteeg 씨가 그다지도 작고, 그다지도 하찮은 인물이라는 걸 깨닫고, 또 씨가 한 이야기가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어 내 정신은 솟아나고, 나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는 다시 드로잉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테오야, 이러한 것들이 너에게도 적용되는지 물을 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이렇다. ‘테오야, 누가 나에게 빵을 주고 누가 나를 도왔지? 분명히 말하건대 너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이 내게 떠오른다. ‘왜 테오는 화가가 아닐까? 이 “문명”이 결국에는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지 않을까?’
Tersteeg 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그 분을 그 분 인생의 아주 특이한 시기,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그 분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때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그 분은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실제적일 뿐 아니라, 정말로 똑똑하고 쾌활하며, 대소사에 정력이 넘쳤다. 그 분에 대해 그러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 했으며, 그 분이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그러한 생각에 점점 더 의심을 품기 시작했지만, 해부용 메스로 그 분을 속속들이 파헤쳐 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 분이 사업가나 세상 물정을 꿰뚫어 보는 사람의 풍모를 띠지만, 그 철가면 뒤에는 다정다감함을 감추고 있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의 갑옷이 엄청나게 두텁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갑옷이 어찌나 두터운지 나로서는 이 사람이 쇳덩어리로만 이루어져 있는지, 그 쇳덩어리 뒤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인간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는 조그마한 구석이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Tersteeg 씨가 ‘세련됨’이나 ‘팔릴 수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면 나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누군가가 열심히 그리고 끈기 있게 작업을 하고 개성과 정감을 부여하려고 애쓴 작품은 매력적이지 않을 리도 없고, 팔릴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테오야, Tersteeg 씨처럼 물질적인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는 말아라.
날씨가 어찌나 좋은 지 모르겠다! 사방을 둘러보면 봄기운이 완연하다. 인물 드로잉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그것이 첫째니까, 때때로 야외에서 작업을 하는 기쁨도 빠뜨릴 수는 없다.
누드를 마친 다음에는 습작품을 별로 많이 그리지 못했다. 이제 시작을 했으니까 한 서른 장가량 만들고 싶구나. 그런데 몇 장은 Bargue의 작품과 상당히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들은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해야할까? 그 보다는 아마도 Bargue로부터 내가 자연을 이해하는 걸 배웠기 때문이리라. 최근에 나는 인물의 부분, 즉 머리, 목, 가슴, 어깨 등의 습작을 그렸다. 너도 알다시피 ‘목탄화 실습’을 공부하면서 이 모든 걸 예전에 다 그렸다. 하지만 실제 인물에서 그걸 그리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책의 선들은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펜으로 쉽게 그 선들을 따라갈 수 있지만, 모델 앞에 앉게 되면 그 특징적인 주된 선들을 찾아내서 몇 번의 손놀림과 획으로 필수적인 부분을 표현해 내는 것이 관건이 된다.
테오야, 내가 이곳 헤이그로 온 이래로 한 달에 백 프랑 이상씩 썼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어떠한 진전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화가들의 경우에서 나는 그걸 본다. 그들은 모델을 규칙적으로 기용하는 걸 두려워해서, 조금만 그것도 천천히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항상 제대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화가들, 특히 ‘그래픽’ 지의 드로잉 화가들은 거의 매일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한다. 아주 열심히 작업을 하고 해서 수 년간의 경험을 쌓은 사람이 기억으로부터 인물을 그린다면 그거야 괜찮은 일이지만, 무분별하게 기억으로부터 작업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Israels나 Blommers나 Neuhuys조차도 그렇게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오늘 너에게 드로잉을 한 장 부쳤다. 내가 그걸 보내는 까닭은 네가 아니었더라면 어렵기 짝이 없었을 겨울 동안에 네가 나에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지난 여름 네가 밀레의 커다란 목판화 ‘양치는 여인(La Bergere)’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단지 선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니’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내가 윤곽선 하나로 밀레만큼 많은 걸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인물에다 약간이나마 정감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나는 다만 이 드로잉이 너를 기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슬픔’은 내 판단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드로잉한 것 중에서 가장 잘 된 인물화이므로, 너에게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 드로잉은 단순한 잿빛 대지(臺紙)에 놓으면 잘 어울릴 거라고 본다.
물론 내가 항상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영국 드로잉을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므로, 내가 그걸 한 번 시도해 보았다는 게 놀랄 일이나 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런 걸 잘 이해하는 너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소 우수를 띠게 했다. 드로잉을 고정시키지 않아서 눈에 거슬리게 번쩍거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유나, 물과 우유를 섞은 것을 큰 컵으로 한 컵 드로잉 위에다 부은 뒤에 말리도록 해라. 그러면 드로잉이 포화도에 이른 독특한 검은 색깔을 띠게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필 드로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네가 몇몇 드로잉의 양상을 두고 eauforte non ebarbe에 가장 적절히 비유될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나는 드로잉에 있어서의 이 독특한 효과가, 내 생각에는 애호가들이 올바르게 감상하고 있다고 보는데, 개인이 사용하는 도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떤 감흥을 느끼며 작업을 하는 손의 독특한 떨림에 의해 유발된다고 믿는다(물론 동판화의 경우는 다르다. 그 경우에는 동판의 barbe에 의해 유발된다). 내 습작품들 중에도 몇 개는 내가 non ebarbe라고 불러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이 독특한 양상, non ebarbe를 얻기 위해서는 백악이 아니라 기름에 적신 목탄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기름에 적신 목탄으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해낼 수 있다. 나는 Weissenbruch 씨가 그걸 이용하는 것을 보았다. 기름은 목탄을 고정시키는 동시에 검정색을 더욱 따뜻하고 깊이를 띠게 한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지금 그걸 하는 것보다는 일 년 후에 하는 것이 낫다.’ 재료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솟아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좀 더 진보한 다음에는 이따금씩 멋지게 꾸미기도 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때에는 좀 더 효과적인 드로잉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내 내부에 힘을 지니고 있기만 한다면, 일은 두 배로 잘 풀려나갈 것이고 결과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이 있기 전에 먼저 자연의 사물들과 직접적인 투쟁을 벌여야만 한다.
C M 삼촌이 드로잉 값을 주면서 새로운 주문도 했다. 그런데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도시의 특정한 세부 장면을 여섯 장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힘써 제작할 것이다. 삼촌 말을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이 여섯 장 값으로 처음에 그린 열 두 장 값을 받을 테니까.
그림도 우리가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어엿한 직업이다. 화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화가와 대장장이나 의사 사이에는 유사성이 더 많이 있다. 테오 네가 나더러 화가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이야기 했을 때 나는 그게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다고 한 걸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원근법을 명료하게 설명한 Cassagne의 ‘초심자를 위한 드로잉 입문서’를 읽은 이후였다. 그리고 일 주일 후에 나는 스토브와 의자, 식탁, 유리창 등이 있는 부엌 내부를 제 위치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드로잉을 하면서 깊이와 올바른 원근법을 표현해 내는 것이 나에게는 마법이요 순전한 우연처럼 보였다. 하나의 대상을 제대로 그려내기만 하면 수천 가지의 다른 대상을 그리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일 년 동안 계속해서 드로잉을 하려고 한다. 아니 내 손이 제대로 말을 듣고 내 눈이 공고해질 때까지 적어도 몇 개월간이라도 지속해 나가리라. 그런 다음에는 팔릴 것을 많이 제작해내는 데 어떠한 장애에도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이 몇 개월의 시간뿐이다. 그 보다 더 빨리 전진해 나갈 수는 없다. 약간의 인내심만 갖는다면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 내 작품첩을 습작으로 가득 채운다면 나중에 그게 다 돈이 되어 돌아오리라. 다시 말해 나는 작은 드로잉을 누군가가 동정심에서 사주기를 기대하면서 허겁지겁 서두르기보다는 내 직업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그림은 모르겠지만 드로잉은 꽤 하는구만 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때 나는 아마도 갑작스럽게 그림을 들고 나오리라. 그림, 다시 말해, 채색화를 고려할 때는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두 가지 길이 있다. 정도는 드로잉을 많이 하고 색채는 조금 쓰는 것이고, 사도는 색채는 많이 쓰지만 드로잉은 조금밖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왜냐하면 드로잉에서 그림으로 나아가는 것이 대상에 대한 필수적인 습작 드로잉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드로잉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는 걸 인지하기 바란다. 내부의 정확한 원근법이 그렇고, 풍경화에서는 중요한 선들이 또 그러하다. 그 다음 내 자신의 경험으로 보자면 누드를 연구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드로잉이다. 일단 이것들을 제대로 익히고 나면 나아갈 길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은 조용히 그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래, 나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걸 안다. 그 밖에 다른 많은 슬픈 일들도, 우리 가족이든 다른 사람이든,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그러한 것에 무감각하지는 않으며, 만일 내가 뭔가를 느끼지 못했다면 ‘슬픔’을 그려낼 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여름 이래로 아버지, 어머니와 나 자신 사이의 불화가 고질적인 악이 되고 말았다는 게 나에게는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그건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부모님과 나 사이에 오해와 소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님이나 나나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말아야 할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님이나 나나 서로 부모와 자식은 하나로 남아야 한다는 걸 항상 명심하면서, 오래 전에 좀 더 친밀한 이해 가운데 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려고 애썼다면, 서로를 더욱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부모님이나 나나 고의로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며, 상당 부분에 있어서는 어려운 상황과 쫓기는 생활로 인한 불가항력(force majeure) 탓이라고 보아야만 하리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신들의 일에서 위안을 찾고, 나는 내 일에서 위안을 찾는다. 한 개인과 그가 하는 일 사이에는 유사성이랄까 친밀감이랄까 뭐 그런 것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유사성이나 친밀감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쉽지는 않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두고 상당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동생아, 이 모든 자질구레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기왕성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은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의 인물 누드 습작품을 또 한 장 제작했으며, 어제는 소녀가 바느질하는 걸 한 장 그렸는데, 그것 역시도 누드화였다. ‘슬픔’과 같은 여인의 인물 드로잉을, 좀 더 큰 크기로 완성했다. 내 생각에는 첫 번째 것보다 더 나은 듯하다. 그리고 현재는 나는 사람들이 하수도인지 수도관인지를 매설하기 위해 땅을 파고 있는 거리를 담은 드로잉을 제작하는 중이다. ‘구덩이 속의 땅파는 사람들’이라고 이름을 붙여 두었다. 그건 비 내리는 Geest 가에서 온갖 소음과 사람들의 뒤엉킴 가운데 진흙 속에 서서 그린 것이다. 스케치북을 보니까 당시의 인상을 포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건 C M 삼촌을 위한 것이다.
풍경화도 몇 장 그리고 있다. 여기 Schenkweg에 있는 탁아소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테오야, 나는 아무래도 풍경화가는 아닌 모양이다. 풍경화를 그릴 때에도 거기에는 항상 인물화적인 면이 스며든다.
오늘 너에게 Laan van Meerdervoort의 채소밭을 담은 드로잉을 보냈다. 이 작품이 ‘흑백에 지나지’ 않고, ‘팔릴 수 없으며’(??), ‘세련됨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거기에 뭔가 개성이 담겨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화가더러 그의 기법이나 관점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 있게 되었는가, 아니면 강요하려 애쓰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정말로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런 태도는 정말로 뻔뻔스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드로잉을 하면서 자신의 드로잉이 팔릴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며, 뭔가 가치 있고 진지한 것을 만들어 낸다는 태도로 제작에 임하는 것이 의무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낙담하더라도 경솔하거나 아무래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매우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상당히 걱정이 된다. C M 삼촌에게 보낼 도시의 정경을 담은 드로잉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온화한 날씨가 분명 찾아오겠지.
나는 때때로 ‘내 인생이 지금보다 다소나마 쉽다면,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훨씬 더 잘 작업을 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냥 작업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도 내 마지막 드로잉을 보고 알아차렸겠지만 나는 어려움을 정복할 빛을 보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드로잉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외에도 그 자체로도 견디기 힘든 이런 저런 어려움이 솟아나지 않는 날은 거의 하루도 없다.
Mauve 매형이나 Tersteeg 씨처럼 나에게 공감을 해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적의를 보이거나, 심지어 악의를 품는 경우에는 나는 걱정으로 무너져 내릴 지경이 되고 만다. 일월 말 무렵부터 나에 대한 Mauve 매형의 태도가 급작스럽게 변해서, 이전에 다정했던 것 이상으로 무뚝뚝해졌다. 나는 그게 매형이 내 작품이 불만스러워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그걸 두고 어찌나 고민하고 고심을 했는지 내 속을 뒤집어 놓고는 급기야 병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Mauve 매형은 나를 찾아와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주고, 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런데, 그러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저녁에, 매형은 나에게 다시 한 번 아주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마치 내 앞에 아주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생각했다. ‘친애하는 매형, 사람들이 매형의 귀를 중상모략으로 더럽혀 놓은 것 같군요.’ 하지만 나는 그 사악한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에 대해서는 캄캄했다. Mauve 매형은 내 말투와 행동거지를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네 얼굴은 이렇게 생겼지. . . 네 말투는 이렇고.’ 이 모두가 악의를 담고 있었지만, 매형은 그러한 것에 아주 뛰어나서, 나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혐오감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친애하는 매형, 매형도 런던의 거리에서 비오는 밤을 지샜다면, 아니 Borinage에서 추운 밤을 보냈다면, 굶주린 채, 집도 없이, 열에 들떠서 말입니다, 아마 얼굴에는 추악한 주름살이 생기고 목소리도 거칠어 질 겁니다.’
거기다 매형은 Tersteeg 씨만이 나를 두고 하던 말을 몇 가지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나는 매형에게 물었다. ‘매형, 최근에 Tersteeg 씨를 보았나요?’ ‘아니’하고 매형이 대답을 해서,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십 분쯤 후에 매형은 Tersteeg 씨가 그 날 매형을 보러 왔었다는 걸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Tersteeg 씨,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당신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내가 여전히 Mauve 매형을 이따금 찾아갔지만, 매형은 침울하고 다소 무뚝뚝했다. 그리고 몇 번은 집에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매형을 점점 덜 찾아가게 되었으며, 매형은 다시는 내 집으로는 오지 않았다.
매형은 또 이야기하는 내용에 있어서도 이전에 포용력이 있었던 것 이상으로 편견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석고 모형을 보고 그리게, 그게 주된 것이야, 하고 매형은 말했다. 내 화실에도 석고 손과 발이 몇 개 걸려 있긴 하지만, 석고 모형을 보고 그리는 건 딱 질색이다. 매형이 아카데미의 가장 질이 떨어지는 선생이라도 하지 않을 그런 식으로 나에게 이야기하는 걸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하지만 집에 왔을 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 불쌍한 석고 모형을 석탄통에다 처박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들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살아있는 손과 발이 없어서 드로잉을 할 수 없을 때에만 석고 모형을 보고 그릴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매형에게 말했다. ‘매형, 다시는 석고 모형이야기는 내게 하지 마세요. 참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자 Mauve 매형이 두 달 동안은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하지만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석고 모형을 보고 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에 빈둥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섭을 받지 않으니까 더욱 더 원기왕성하게 열성적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달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 나는 매형에게 그 대작을 끝낸 것을 축하한다는 전갈을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 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매형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Tersteeg 씨와 일이 있고 난 뒤에, 나는 매형에게 편지를 썼다. ‘매형, 서로 화해하고, 서로에 대해 악감정이나 나쁜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해요. 하지만 매형이 말하는 모든 것에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면, 매형으로서도 나를 가르치기가 너무 힘겹게 될 뿐 아니라, 나로서도 매형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고 하는 것이 끝나고 말죠. 그렇다고 할지라도 매형을 향한 저의 감사와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매형은 여기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며 그 뒤로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다.
내가 매형에게 ‘우리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은 Tersteeg 씨가 진짜로 매형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한 뒤였다. Tersteeg 씨는 네가 나에게 돈을 보내는 걸 그만 두게 하고야 말겠다면서, ‘Mauve 씨와 내가 이 일을 끝내도록 하고야 말겠다’라고 했을 때, 그 순간에 의문은 걷히고 나는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Tersteeg 씨가 나를 배반하는 구나.’ 왜냐하면 Mauve 매형은 네가 부쳐주는 돈에 대해서 적어도 일 년 동안은 그 돈을 더 받는 것이 나에게 아주 유익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테오야, 나는 단점도 많고 실수도 잘하는 다혈질적인 인간이긴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의 양식이나 친구를 빼앗으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인 적은 있지만, 견해의 차이 때문에 한 인간의 생명을 뺏으려 드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면 할 일이 아니고, 적어도 정직한 무기는 아니라고 본다. 네가 만일 한 인간을 차버리고는 그의 양식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건 사려 깊은 행동도 품위 있는 행동도 아니다. 그건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인간인가? 일하려 애쓰지만 어려움밖에는 없는 인간 아닌가? 필요한 것은 고요와 평화와 약간의 공감뿐인데, 그 마저도 얻을 수 없다면 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 겨울 동안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분투했다. 하지만 이 일이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때로는 심장이 깨어질 것 같았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니? 왜냐하면--너도 이걸 잘 알 거다--나는 Mauve 매형을 사랑하며, 매형이 내게 그려 보였던 모든 행복이 무(無)가 되고 말거라는 건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Tersteeg 씨가 나에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도 실패했고, 지금도 또 실패하고 말 걸세. 백 번 천 번해도 똑같은 이야기지.’ 그만,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다르며, 그 추론은 정말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 사업이나 전문 분야의 공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화가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성직자나 화상이 될 수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드로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표를 내거나 해고를 묵묵히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드로잉 화가의 주먹’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로잉 하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거기다 내가 드로잉을 시작한 이후로 의심을 하거나 주저하거나 갈팡질팡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니? 내가 쭉 앞으로 전진해 왔음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물론 조금씩이긴 하지만 나는 이 전투에서 점점 더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너에게 보낸 두 장의 드로잉을 보았지? 그것들은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며, 그런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 낼 수 있는 데다가 앞으로 갈수록 발전하리라. 따라서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면 그것이 마치 자선의 양식인양 항상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해 두어야 한다고 고집 하는 게 비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빵과 옷과 집세와 모델과 드로잉 재료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맞도록 해 두었고, 그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사람들이 내 드로잉을 원하기만 한다면 그걸 만들어 줄 수 있다. 일꾼은 품삯의 값어치는 하는 법이다.
내 드로잉이 점점 더 나아지면 질수록 더 많은 어려움과 반대에 직면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나는 고생을 많이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특히 나로서는 바꿀 도리가 없는 몇몇 특이함 때문에 더욱 그러하리라. 우선 첫째로는 내 외모와 말하는 투와 옷이 사람들에게 거슬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돈을 좀 더 벌게 될 때라도, 나는 언제나 대다수의 화가들과는 다른 영역에서 활동할 것이다. 사물에 대한 나의 개념이나 내가 제작하고자 하는 제재 등이 어쩔 도리 없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Tersteeg 씨 자신이 일꾼들이 분주히 수도관이나 가스관을 매설하고 있는 Geest 가의 모래 구덩이 앞에 서있다고 가정해 보자. 씨가 어떤 표정을 띨 지, 그 장면을 보고 어떤 스케치를 할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부두나 뒷골목, 가로를 거닐고, 집 안이나 대합실, 심지어 호텔 로비에 서있는 일은 화가가 아니라면 즐겁게 할 수 있는 소일거리가 아니다. 사정이 이렇게 때문에 매력적인 숙녀들과 차를 마시기보다는(물론 숙녀들을 그리고 싶을 때는 예외겠지만) 뭔가 그릴 것이 있는 가장 더러운 장소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소재를 찾아 다니고 막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대상을 보고 그린다는 것 등은 거칠 뿐 아니라 때로는 더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판매원 식의 옷차림과 나긋나긋한 태도는 실제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볼 수는 없으며, 나아가 세련된 숙녀와 부유한 신사에게 비싼 물건을 팔아 이익을 챙기기 위해 감언이설로 구워삶을 필요가 없으며, 예를 들어, Geest 가의 구덩이에 있는 인부들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Tersteeg 씨의 옷차림이나 태도를 내가 따라할 수 있다면, 그게 나에게 어울린다면, 나는 내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직업에 있어서는 현재 그대로의 내가 더 낫다.
나는 고급 상점에서 고급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지금에와 서는 특히나 더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을 따분하다고 느끼며 또 동시에 그 사람을 따분하게 만들기만 하지만, Geest 가에서나, 히스에서, 아니면 사구에서 작업을 할 때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된다. 내 추악한 얼굴과 초라한 외투가 주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나는 나 자신이 되며 기쁜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만일 고급 외투를 걸치고 있다면, 내가 모델로 원하는 노동자들은 나를 두려워 하거나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나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헤이그에는 더 이상 모델이 없다’고 불평하는 그런 류의 사람에는 속하지 않는다. ‘그래픽’지나 ‘펀치’지에 소속된 드로잉 화가들은 어디서 모델을 구하는가? 그들은 몸소 런던의 가장 빈한한 뒷골목을 모델을 찾아 헤집지 않니? 그게 사실이 아니냐?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이냐?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점차적으로 습득한 것이냐? 그리고 내가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이냐?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 그들을 내 화실로 맞아들이는 일이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이냐?
그러므로 내 습성, 다시 말해 옷이나 얼굴, 말투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다른 의미에서 내가 뻔뻔스럽거나 상스럽다고 할 정도로 행동거지가 형편 없을까? 테오야, 내 생각으로는 공손함이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 모두를 향한 호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가슴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다른 사람을 돕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하는 필요성과,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려 하고 혼자 있기를 싫어하는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부언하자면 누구나가 알지는 못하지만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게 하려 애쓰는 것이다.
테오야, 나는 내 자신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마땅한, Tersteeg 씨의 말에 따르자면 ‘헤이그에 머무르는 걸 허용해서는 안 될’ 정도로 뻔뻔스럽고 무례한 그런 괴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Mauve 매형이나 Tersteeg 씨를 찾아뵐 때 내가 원하는 만큼 나 자신을 표현해 낼 수가 없다. 그러니 네가 그 분들에게 내 이름으로 정황을 말해 주렴. 그 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어휘를 선택하고, 필요한 만큼의 격식과 우아함을 갖추어서, 두 분이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말해 주렴. 두 분이 그걸 모른다는 걸, 두 분은 내가 무감각하고 무관심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두 분에게 꼭 상기시키도록 해 주렴. 그렇게 해준다면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나는 두 분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를 소망한다. Mauve 매형은 내게 상냥했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 주셨다. 하지만 그건 단지 보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작업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관해 너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다. 하지만 먼저 네가 여기로 와야만 한다.
오늘 사구에서 Mauve 매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주 고통스러운 내용이었다. 매형과 내가 영원히 갈라섰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내용이었다. 매형은 되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만 것이다. 내가 매형에게 작품을 보러 오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니까, 매형은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했다. ‘절대로 자네를 보러 가지 않겠네. 모든 게 다 끝났어.’
마지막으로 매형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부도덕한 놈이야.’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려 집으로 혼자 걸어왔다.
매형은 내가 한 말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예술가입니다. 나는 이 말을 철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 말은 물론 항상 찾아 헤매지만 절대적으로 발견하지는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아는 한 이 말은 “나는 찾아 헤매이고, 분투하고,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이 말은 “나는 안다. 나는 찾아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말입니다.’
테오야 나도 귀가 달린 인간이다. 누군가가 ‘자네는 부도덕한 놈이야’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니?
그분들은 내가 뭔가를 뒤에 감추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 기미를 느낄 수 있다.
빈센트는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뭔가를 감추고 있다.
신사 여러분, 예의 범절과 교양을 높이 평가하는 여러분에게 제가 감히 말씀 드립니다. 물론 그게 진실된 것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하지만 여자를 버리는 것과 버림받은 여자 곁에 있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품위 있고, 세련되고, 남자다운 행동입니까? 내가 한 행동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누구에게 알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유사한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 했으리라고 본다.
이번 겨울에 나는 임신한 여자를 한 명 만났다. 그녀는 아기를 임신시킨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먹을 걸 벌기 위해 추운 겨울에 거리에서 몸을 팔아야만 하는 임신한 여자, 너도 이러한 여자들의 사정이 어떤지는 잘 알겠지? 나는 그 여자를 모델로 삼아 겨울 내내 작업을 했다. 그녀에게 모델료를 꼬박꼬박 제대로 지급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집세를 낼 정도는 되었으며, 다행스럽게도, 내 먹을 것을 그녀와 나눔으로써, 그녀와 그녀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로부터 어느 정도나마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건 계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왔고 내가 그걸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K를 향한 내 감정을 표현하면서, 나는 단호하게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 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도 내가 그녀를 포기하게 할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내 사랑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항상 침묵을 지키고 거기다 한 마디 답장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암스테르담으로 갔고, 삼촌 내외분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라는 말에, 딸애는 “그만은 결코”라고 대답하는 구나. 너의 끈질김이 이제는 역겹다.’ 나는 내 손을 램프 불꽃에다 집어넣고 말했다. ‘내가 불꽃 속에 손을 집어 넣고 있을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보게 해주세요.’ 나중에 Tersteeg 씨가 내 손을 이상하게 쳐다본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데 내 생각에는 삼촌 내외 분이 램프를 끄고 ‘딸애를 절대 볼 수 없네’라고 했던 것 같다. 그건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두 분의 말씀은 내 마음을 짓이겨 뭐라고 반박할 수 없게 하여 결국 나의 ‘그녀 외엔 어느 누구도’도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즉시는 아니었지만, 얼마 후에 곧, 나는 내 안에서 사랑이 죽어가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그 빈자리에 공허감이, 무한한 공허감이 몰려왔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너도 잘 아는 사실이다. 나는 사랑의 힘을 그 때까지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 때 나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당신은 저를 버리시나이까’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모든 게 텅 비고 말았다. 내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 . ‘오 하느님, 아니 하느님은 없다!’ 내 안의 공백감,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함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그렇다, 자신의 몸을 던져 죽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스승 밀레의 남자다운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나에겐 언제나 자살은 부정직한 사람의 행동처럼 보였다(Il m'a toujours semble que le suicide etait une action de malhonnete homme).’
나는 Mauve 매형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고 기분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내 일에 전심전력으로 매달렸다. 일월 말 경, 매형에게서 쫓겨난 뒤 며칠 동안 앓아 누웠을 때, Christine을 발견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토록 진실되고, 꾸밈없고, 강렬했던 내 사랑이 글자그대로 죽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죽음 다음에는 부활이 있는 법이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이 여인은 길들인 비둘기처럼 유순하게 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저렇게 강요를 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내가 거친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그걸 이해하고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돈이 별로 많지 않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돈이 거의 없다 할지라도, 당신이 내 곁에 있어주고, 내가 당신 곁에 있게만 해준다면, 모든 걸 참고 견뎌 나갈 거예요. 너무나도 당신과 가까워지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혼자 있을 수 없어요.’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모든 것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보여준다면, 그녀 앞에서 내가 그토록 오래 간직해 온, 거칠음이라고 할만한 두터운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리라.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어서 이 여인은 더 나쁜 지경이 되고, 나도 더 나빠지고 말았는가? 나는 그녀가 매일매일 점점 더 밝아지고 쾌활하게 되는 걸 보고 깜짝깜짝 놀란다. 그녀는 완전히 변해서 이번 겨울에 만난 병들고 창백한 여인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하지만 내가 그녀를 위해서 많이 한 것은 없다. 나는 다만 그녀에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아라. 그러면 건강이 좋아 질 것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충고를 바람결에 날려버리지 않았으며, 그녀가 내 충고를 따르지 않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그녀를 도우려 더 애를 썼던 것이다. 이번 겨울 그녀는 아주 허약했다. 이 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가 내 주의를 끈 것은 아파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간소한 식사를 하고, 야외에서 자주 산보를 하고, 목욕도 하고 해서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신 시기는 누구에게나 힘겨운 때이다.
우리가 Zundert에 있었을 때의 옛날 그 유모, Leen Veerman이 기억나니? Sien은 그녀와 비슷한 부류야. 그녀의 두상과 옆모습의 윤곽은 Landelle의 ‘수난에 빠진 천사(L'Ange de la Passion)’를 닮았으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인물과는 아주 다르고, 분명 고상한 데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눈을 단박에 잡아 끌지는 않는 그런 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녀가 꼭 이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녀 얼굴의 윤곽을 네가 다소나마 그려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는 거다. 그녀에게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어서 더 이상 아름답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녀 옆모습의 윤곽은 단순하고 우아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Frank Holl의 대형 드로잉 ‘이탈자’를 본 적이 있니? 그 그림에 나오는 여인을 닮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그녀를 고맙게 여기는 점은 그녀가 나에게 교태를 부리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절약하고, 호의를 가지고 상황에 맞춰나가려 애쓰며,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녀가 내 작업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무수히 많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본다. 그건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불쾌감을 줄지도 모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녀의 말투는 병을 앓아서 그런지 매우 추악하다. 그리고 종종 그녀는, 예를 들자면 누이 Willemien처럼 다른 환경에서 자란 여자라면 결코 쓰지 않을 그런 것을 말하고 또 그런 표현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세련되게 말하지만 무정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투박하게 말하더라도 선량한 채로 있는 것을 바란다. 바로 그거다. 그녀는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그녀의 성질로, 안절부절못하는 성향 때문인지, 불끈 성을 내곤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잘 이해하기 때문에 내 신경에 그다지 거슬리지 않으며, 지금까지는 이럭저럭 다루어 낼 수 있었다. 그녀로서도 내 자신의 성질을 이해한다. 내가 자세를 취하는 것이나 혹은 다른 것을 두고 벼락 같이 화를 내거나 하면, 그녀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러한 순간은 지나간다는 걸 보았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는 일로 내가 걱정하거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녀는 종종 내 마음을 풀어주곤 하는데, 그건 내 스스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트집을 잡거나 하지는 말자는 묵계 같은 것이 성립되어 있는 듯하다.
그녀가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젊지도 않고, 교태를 부리지도 않으며,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게 바로 그녀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이다.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방해가 되거나 하지 않고, 나와 함께 작업을 한다. 그녀는 이런 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조르지 않으며 빵과 커피밖에 없을 때에도 묵묵히 견디면서 불평을 하지 않는다. 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으나 매일매일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며, 나에게는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좋은 모델이 있기 때문에 내 드로잉은 이전보다 더욱 좋아졌다. 너에게 습작품을 몇 장 보냈는데, 그걸 보면 그녀가 자세를 취해줌으로써 나를 상당히 많이 도와준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흰 보넷을 쓰고 있는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이다. 그 습작들은 다소 딱딱한 기법으로 그렸다. 효과만을 노리고 작업을 했더라면, 나중에 가서는 별로 소용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너에게 그녀에 관해서 다소 안 좋은 이야기도 하는 것은, 내 자신이 장미 정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서 있다는 걸 처음부터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행동이 감상적인 동기라고 그러실 것이 틀림없으므로 사전에 그걸 방지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네가 그 첫 번째 단계라도 배웠는지 궁금하구나. 내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내 말은 우리가 사랑을 가장 잘 느낄 때는 때로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병상 머리맡에 앉아 있을 때라는 거다. 그건 봄날에 딸기를 따 모으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의 시간은 잿빛이고 우울하다. 하지만 그 우울함 가운데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테오야, 나는 이 여인과 결혼할 작정이다. 나도 그녀를 무척이나 가깝게 여기고, 그녀 역시도 나와 떨어질 수 없다. 가정 생활의 기쁨과 슬픔을 겪어 나가면서, 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걸 그리고 싶다. 세상의 편견이 어떠한 지는 잘 알고 있으므로 나는 내가 내 자신이 속해 있던 계급으로부터 물러나야만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사실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은 나를 쫓아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이번 일로 더욱 깊은 틈이 만들어지리라. 나는 그들이 말해온 것처럼 나 자신을 단호히 ‘낮출’ 셈이다. 세상은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노동자이므로 노동자로서 살아가련다. 노동자 계급 가운데에서 나는 평온함을 찾는다. 전에 이렇게 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에는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테오 네가 언젠가 ‘누군가가 어떤 한 계급보다 다른 한 계급을 절대적으로 편애한다면, 그 사람은 도량이 좁거나 편견에 찬 사람이 틀림없다’라고 한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며, 인간 내부의 ‘인간성’을 보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단지 개인이 이승에 있을 동안만 가질 수 있는 재산에만 더 큰 가치를 두고 추구한다. 세상은 저승, 즉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은 세속적인 판단 내에서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반대로 나 자신은 인간을 그 인간 자체로서 공감하기도 하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지, 그의 주변 환경이라는 것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내가 Christine과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라면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나로서는 더 인간적인 행동이다. 그게 그녀를 돕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둔다면 곤궁 때문에 그녀는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옛날의 그 길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사회에서는, 약한 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짓밟아 뭉개버리는 이런 사회에서는, 여인은 홀로 내버려져서는 안 된다. 나는 무수히 많은 약한 자들이 짓밟히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진보와 문명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도 문명을 믿긴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진정한 인간성에 기초한 그런 종류의 것뿐이다. 인간의 생명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잔인하며, 나로서는 그것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일이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진짜로 심각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반 사람들의 견해나 자신의 열정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도덕의 기초인 ‘하느님에게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명언(明言)을 준수해야 한다. Christine의 첫 번째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그녀에게 아주 다정하긴 했지만,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에도,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지위와 가족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Christine은 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녀가 지금 같았으면 알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이 인간의 행동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악이었으나,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녀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와 같은 그러한 인간과는 반대되는 나와 같은 인물도 있는 것이다. 그가 옳은 행동이 무엇인가에 신경을 쓰지 않은 이상으로 나는 세상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럴 듯한 타협점을 찾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인을 속이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Christine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결혼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더 잘 알게 되자, 내가 그녀를 돕고 싶다면 진지하게 행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명료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대한 내 식견은 이러저러하고, 당신과 나의 입장은 이러저러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 나는 가난하긴 하지만 여자를 후리거나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랑 참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면 지금 끝을 내자.’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당신 곁에 있겠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다.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아끼고 다랍게 살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나도 이 여인과 함께 살 수 있을 정도는 벌 수 있게 되리라.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주급을 정해놓고, 그 주급에 값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일하는 것이다. 나는 서른 살이고 그녀는 서른두 살이니, 두 사람 다 더 이상 철부지 어린애는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데, 그녀는 아이에 매달려 꼼짝달싹 할 수가 없다. 어머니인 여성들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나는 그녀의 과거를 받아들였으며 그녀도 내 과거를 받아들였다. 누구나가 다 화가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의지가 있고, 매일매일 배워나가고 있다. 나로서는 단지 한 번밖에 결혼할 수가 없는 노릇이니,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가 아니겠니?
그렇지만 Christine에게 불성실하지 않는 한에서는 무엇이든지 군말 없이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게될 거다. 만일 내가 헤이그에 머무는 것에 반대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헤이그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네가 원하는 곳에서 작업의 장을 펼칠 수 있다. 우연찮게 맞닥뜨리게 되는 인물이든 풍경이든 내게는 언제나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그릴 수 있다. 하지만 Christine에게 진실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문제는 ‘나는 결혼의 언약을 깨지 않겠습니다’라고 느끼는 그런 것이다.
지난 여름 K가 내 말을 들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나를 그렇게 황급하게 암스테르담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사정은 아주 달라졌겠지. 삶의 분주함이 나를 밀고 나아갈 것을 강요하며,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내가 이 치열한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것을 보고 찾아내어 굳건하게 붙잡아야만 한다. 수동적인 기다림의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내 일과 내 직업을 찾아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드로잉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서도 우리는 때때로 재빨리 단호하게 행동하고, 대상을 활기차게 공략하고, 번개처럼 빠르게 윤곽선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은 주저하거나 의심할 순간이 아니다. 손을 떨거나 눈이 갈팡질팡 해서는 안 되며, 자기 앞에 있는 것에 고정된 채로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에 심혈을 기울일 때에만 짧은 시간 내에 전에는 없었던 것을 종이 위에 옮겨 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그것이 제작되었는가조차도 거의 알 수 없다.
재빨리 행동을 하는 것은 개인의 기능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것을 겪어보아야만 한다. 항해사는 때때로 폭풍우에 배를 침몰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걸 이용하여 진항(進航)하기도 한다. 이번 경우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매인 것이 아니라,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걸 잡았을 따름이다.
매일 나는 나의 선택이 드로잉과 모델을 얻는 데 있어서 공히 흥미로운 장을 열 거라는 걸 보다 뚜렷이 본다. 나를 판단하는 데에는 그것도 또한 고려에 넣어야만 한다. 내 직업이 내가 다른 위치에 있었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이번 결혼을 용이하게 한다.
아무도 그녀를 돌보지 않았으며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혼자였고 버려진 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받아들여, 내 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그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그걸 느꼈으며, 그녀는 활기를 되찾았다. 아니 활기를 되찾아 가는 중이다.
나는 한 가지, 즉 드로잉만 알 것이고, 그녀는 한 가지 규칙적인 일, 즉 자세를 취하는 일만 할 것이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 나도 물론 그렇다. 가난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가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험을 걸 것이다. 어부는 바다가 위험하며 폭풍우가 끔직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위험 때문에 결코 해변에 죽치고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왜냐고 따지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몫인 것이다. 폭풍우가 일어나고 밤이 찾아오라지. 위험과 위험에 대한 두려움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쁘냐? 나로서는 현실, 즉 위험 자체를 선호한다.
저녁 늦은 시각에 편지를 쓰고 있다. Christine은 몸이 좋지 않으며 산과 병원이 있는 Leyden으로 가야할 때가 임박했다.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나는 Christine에게 이야기 했다. ‘이 봐, 당신이 Leyden으로 갈 때까지는 내가 도와줄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이 Leyden에서 돌아올 때에는 내가 어떤 상황일지 모르겠구려. 먹을 게 있을지, 없을지. 어쨌거나 나한테 무엇이라도 있다면 당신과 아이와 나눠 먹도록 하겠어.’ 적어도 처음 일 년 동안은 나와 그녀는 너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암울한 두려움 속에서 지낸다. 또 나는 지불할 수 있는 이상으로 드로잉 재료나 물감 등속을 주문하거나 하지 않고 하루하루 조심조심 일 해 나간다.
테오야, 이러한 일이 너와 나 사이의 관계에 변화나 이별을 불러오느냐? ‘세상’이 반대하는 그런 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 우리가 서로의 손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굳게 잡을 것이라면, 나아가 네가 지속적으로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예상치 않은, 아니 기대치 못한 구원이자 축복이리라. 아마도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리라. 그래서 나는 나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어 편지를 쓰면서도 그 생각을 있는 힘껏 물리쳤다.
불행하게도 이 일이 나에 대한 너의 감정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오더라도, 네가 얼마간의 유예 기간도 주지 않고 도움을 끊어버리지 말기를 바라며, 네가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으면 한다.
나에게 뭔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테오가 도움을 끊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아마도 쓸데없을 지도 모를 가능성이랄까 기미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테오야,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너무나 빈번하게 보았으므로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너를 폄하하거나 화를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들이 모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이지 악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 겨울 Mauve 매형과의 일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매형이 처음에 말한 것을 글자그대로 받아들이고, 잠시 동안이나마 Tersteeg 씨가,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곤란을 겪었다는 걸 기억해 주리라고 기대한 것은 내 쪽의 실수이자 선견지명이 부족했던 탓이다. 내 생각에는 매형이 나를 방문하기를 거절한 진짜 이유는 사람이 돈이 없으면,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인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강자의 권리였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돈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반박을 하는 건 치명적으로, 만일 누군가가 그랬다면, 상대방이 그 말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답으로 주먹 세례를 받게된다는 것이다. 글자그대로 주먹을 날린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시는 그의 작품을 사지 않겠다’거나 ‘다시는 그를 돕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나는 내 머리를 걸고 너의 말에 반대를 하는 셈이다. 너의 도움에 내 인생은 달려있다. 내 드로잉이 네게 가 있는 것은 내가 전심전력으로 일하고, 내 안에 드로잉할 능력이, 거기다 그림을 그릴 능력도, 있으며, 점차 시간이 갈수록 저절로 드러날 것이라는 걸 네가 보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개의 불꽃 사이에 있다. 만일 내가 ‘Christine을 포기하겠어’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사정을 숨기는 것은 나에게는 부정직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내 머리를 떨쳐버리는’ 그런 끔찍스러운 운명이 나에게 떨어진다면, 그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는 않다. 드로잉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하므로.
나에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들이 내 행동이 사랑을 향한 깊은 감정과 필요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또 무분별함이나 자만심이나 무관심함 등이 나라는 개체를 이끌어온 원천이 아니라는 것도. 더 나아가 내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도 내가 대지에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보다 높은 직위를 목표로 삼거나 내 성격을 바꾸려 애쓴다고 해봐야 나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심장 가운데 놓여 있으며, 인생을 그 뿌리에서부터 거머쥐어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달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달리 어떻게 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길을 이해할 수도 없다. 테오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한다면, Christine과 그녀의 아이와 나 자신은 안전할 것이다.
부쳐준 백 프랑은 잘 받았으며 정말 고맙게 쓰도록 하겠다. 네 편지를 사실은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아마 너 자신도 조만간에 아이가 딸린 여자와 있으면 하루가 한 주 같고, 한 주가 한 달보다 더 길어 보인다는 걸 알게 되리라. 네 말을 내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일에 대해 걱정하거나 골머리를 앓거나 하지 말고 조용히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 일로 골머리를 썩힐 때면, 테오 네가 말했다시피 원근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풍경을 보면서 명멸하는 선들을 포착해내고 그걸 해명하려 애쓸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그런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걸 잊기 위해 나는 한 그루 고목이 서있는 모래밭에 몸을 뉘이기도 하며, 때로는 아마포 작업복을 입고 담뱃대를 빨면서 그 나무를 그리기도 한다. 깊고 푸른 하늘, 이끼, 풀 등을 보면서 작업을 해나가노라면 마음이 평온해 진다. 그리고 Christine이나 그녀 어머니로 하여금 자세를 취하게 한 뒤 비례를 재고 그들의 검정 드레스 아래 길게 물결치는 선을 따라 인체의 굴곡을 나타내려 애쓸 때도 마찬가지 고요함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근심걱정으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드로잉을 두 점 막 마쳤다. 첫 번째 작품은 ‘슬픔’으로 지난 번 보다 더 크게 배경은 생략하고 인물만 그렸다. 자세도 약간 바뀌었는데, 부분적으로 땋은 채로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떨어지도록 했으며, 인물도 보다 세심하게 그렸다. 다른 작품 ‘뿌리’는 모래밭 위로 나온 나무 뿌리를 그린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풍경에다 인물에서와 똑같은 정감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폭풍우에 반쯤 찢겨나갔으면서도 대지에 격렬하게, 열정적으로 달라붙는 뿌리. 검게 옹이지고 우둘투둘한 뿌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 창백하고 가냘픈 여인의 모습에서도 나는 삶을 향한 투쟁이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나는 내 앞에 놓인 대상에다 어떤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내가 본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해 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힘찬 투쟁이라고 할 그런 것이 저절로 드러났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뿌리’는 단지 연필 드로잉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채색화를 그리기라도 하는 듯이 연필로 그것을 붓질하듯 한 뒤 다시 문질러서 닦아내었다.
이 드로잉들이 테오 네 마음에 든다면, 새로 이주한 집에다 걸어두는 것도 괜찮으리라. 애초에 이것들은 네 생일 선물로 제작한 것이니까.
너에게 재촉하거나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만, 네 생각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나의 드로잉들을 네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내 드로잉을 파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니? 같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 여러 장, 그것도 다른 특색이 있는 것으로, 한 자리에 있으면, 더욱 나아 보이며, 한 그림이 다른 그림을 설명하고 완성시켜 준다. 네가 생각하기에 최고라고 생각되는 것은 회색 대지(臺紙)에 붙여 두도록 해라.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도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너의 공감이다.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작품을 파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나리라. 하지만 공감이라는 것은 너로서나 나로서나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네 생각에 작품이 아직 숙성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나는 그걸 보내지 않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가겠다. 경험도 훨씬 더 쌓아야 하고,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하리라. 이러한 것은 시간과 인내의 문제이다. 어쨌거나 내 생각에는 매달 몇 장씩이라도 드로잉을 네가 받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하루에 다섯 장을 만드는 날도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 스무 장을 그리면 그 중에 하나 정도가 성공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매주 한 작품 정도는 내가 보기에 괜찮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힘쓰고 있는 셈이다.
Weissenbruch 씨가 새로 그린 크기가 큰 ‘슬픔’을 보고는 나를 기쁘게 한 말을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을 두고는 과감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기법을 비판하지만, 영국 드로잉을 두고도 그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일쑤이다. 나도 처음에는 영국 드로잉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과 친숙해 지려고 상당히 애를 썼다. 내가 보기에 미술의 가장 고원하고 고상한 표현은 언제나 영국 작가, 예를 들자면 밀레(Millais)나 Herkomer나 Frank Holl의 작품에 나타난 표현이다.
나는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도나 사사’를 받지 못했다. 내 스스로 독학을 했기 때문에, 내 기법이 얼핏 보아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 작품이 팔릴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내 앞에는 검정 메리노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을 담은 드로잉이 놓여 있는데, 나는 네가 그걸 며칠만 두고 본다면 그 기법에 상당히 수긍을 하게 되어서 다른 식으로 그렸더라면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리라는 걸 안다. 그리고 크게 그린 ‘슬픔’이나 ‘Geest 가의 할머니,’ ‘노인’ 등등은 언젠가는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걸 확신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을 거절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걸 모르면서도 나를 도와주었다. 네가 한 행동이 바보 짓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그걸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나로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열심히 작업할 것을 부추긴다.
테오야,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길을 잃어 버렸어’라고 한다고 해서, 내 앞길이 곧지 못하고 비뚤어지게 되는 걸까? C M 삼촌은 언제나 Tersteeg 씨나 성직자들이 하는 이야기 그대로 정도(正道)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삼촌은 de Groux를 나쁜 인간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내 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신에 내 드로잉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면 몇 갑절 나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너는 삼촌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겠지만, 왜 삼촌이 주문한 드로잉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지 이야기 해 주마.
Mauve 매형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네 삼촌이 주문을 한 것은 그 분이 자네 화실에 딱 한 번 들렀기 때문이야. 자네는 그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이해해야 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걸세. 그 뒤에는 자네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걸세.’ 테오야, 내가 그런 말을 견딜 수 없다는 걸 너도 이해할 수 있겠지. 내 손은 마치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C M 삼촌이 진작에 전통적인 기법이 이러니저러니 하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다. 나는 삼십 프랑을 받고 열두 장의 드로잉을 제작해 주었다. 그 작품들에는 삼십 프랑 값어치 이상의 노동이 들어가 있으며, 내가 그걸 자선으로 간주해야만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새로운 작품의 곤란한 점들은 이미 실마리가 풀렸으므로, 게으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드로잉을 위한 습작들을 만든 상태에서 중단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화가들 간에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현재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며, 별장이나 구해 두고 보신(保身)에 여념이 없는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Geest 가나, 아니면 다른 어떤 잿빛의 비참하기 짝이 없는 뒷골목, 진흙 투성이의 우중충한 골목에 서 있고 싶다. 거기서는 결코 따분함을 느끼지 않지만, 고급 주택에 들어가 있을 때는 그렇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따분함을 느낀다는 건 어딘가 잘못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더 이상 거기에 가지 않으리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Mauve 매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매형이 내 일에 처음부터 간섭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으리라.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일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어려움은 거기에 있다. 내 생각에는 내 작품에 내가 실패할 거라는 걸 나타내는 징후는 없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설렁설렁 일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드로잉은 나에게 있어서는 열정이 되었으며, 나는 내 자신을 그것에다 점점 더 쏟아 붓는다. 내가 미래에 대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순간이라도 근심걱정이 없는 삶이나 유복함에 대한 욕구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곤경과 근심걱정으로, 힘든 일로 가득찬 삶으로 기꺼이 돌아가 ‘이것이 더 낫다. 이것으로부터 더 많이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리라’라고 생각한다. 이 길은 우리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길이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곤경과 근심걱정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이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이마에 흘린 땀으로 벌어 먹고 살아가듯이, 나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지난 이 주 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 며칠 밤 동안은 열에 들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는 작업을 해나갔다. 지금은 아프다고 드러누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Christine과 그녀 어머니가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Christine이 Leyden에서 돌아오면 내가 어디 있든지 간에 내게로 와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은 안뜰이 있는 아담한 집으로 이번 주에 드로잉을 할 예정이다.
삼월에는 의사도 그녀의 입원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유월말 경이라고 한다. 의사는 이번에는 그녀가 누구와 함께 지냈는가에 관해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으며, 전에부터 추측은 한 것이지만, 그의 이야기로부터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다시 거리로 나가게 된다면 죽을 거라는 것과 지난 겨울에 그녀를 만났을 때가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에 적절한 때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녀가 삼월보다 나아졌다고 했다. 아기 옷도, 물론 가장 간소한 것으로, 준비했다.
나는 공중 누각이 아니라 굳건하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 명백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올해에 매달 백오십 프랑 씩 받을 수 있다면, 용기를 가지고 일을 꾸려나가리라. 그리고 테오 네가 도움을 끊을 거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건 비참함을 불러오리라. 그런다고 한들 너와 다른 누구에게 어떤 만족감을 줄 수 있겠니? 나는 낙심천만하게 될 것이며, Christine도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리라.
삼일 밤 동안 폭풍우가 무섭게 몰아쳤다. 지난 토요일 밤, 내 화실의 창문이 망가지고 말았다. 원래 내가 사는 집이 아주 허술해서 폭풍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커다란 유리창이 네 개 박살났으며, 창틀은 뜯겨져 나가버렸다. 너른 목초지를 건너온 바람이 내 유리창에 그대로 와 부딪혀서, 벽에 붙여둔 드로잉은 찢겨지고, 화가는 엎어지고, 아래층의 난간도 쓰러져 버렸다.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창문은 그럭저럭 묶어 두었으며, 적어도 삼 평방 피트는 될 유리창이 날아간 자리에는 담요를 못박아 두었다. 다음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창문을 수리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거기다 집주인은 악당 같은 놈으로, 유리창 값은 지불했으나, 노임은 나더러 내라고 했다.
바로 옆집을 세낼 수 있다면 좋겠다. 크기도 적당한다데가 다락을 침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화실도 더 크고 채광도 잘 되어서 지금 현재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낫다. 주인도 내가 그곳으로 이사왔으면 하고 바라는 지 내게 그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 냈다. 집세는 한 달에 십이 프랑 오십으로,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다. 집세가 그렇게 싼 이유는 이 집이 ‘단지 Schenkweg’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원래 기대했던 부유한 사람들은 그곳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무엇에 있어서든지 내가 명령조로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네가 나에게 이전과 마찬가지 상태로 머물러 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힘겨운 이 주간이었다. 오월 중순인 현재 빵 값을 지불하고 나면 삼 프랑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마른 검정 빵에다 약간의 커피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Sien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고 그녀가 Leyden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유월 일일에는 집세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러면 나는 정말이지, 글자 그대로 무일푼이 되고 말 것이다. 주인은 집세를 하루도 늦추어 주려 하지 않는다. 여차하면 내 가구를 경매에 부쳐 곧바로 팔아버릴 심산이다. 어떤 경우라도 이런 공개적인 수치는 피해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정겨운 편지를 받았다. 이러한 감정이 지속되리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 편지는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으리라. 하지만 두 분이 그간의 사정을 알게될 때도 여전히 정겹게 이야기 하실까? 도덕적 문제를 판단하는 두 분의 역량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이 거부하신다면 나를 슬프게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막거나 내 태도를 돌이키지는 못하리라.
네 편지와 함께 동봉한 것 고맙게 잘 받았다. 네가 나에게 Sien에 대한 너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서 기쁘다. 그녀가 술책을 부리고, 나는 내 자신이 그녀에게 바보처럼 속아 넘어가도록 수수방관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니까, 네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너는 덧붙여 Christine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로 꼭 그녀와 결혼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이 보기에는 이렇다. 우리는 둘 다 가정 생활을 갈망하고, 우리는 매일 우리 일에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래서 매일 함께 지낸다.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되었다,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은 위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결혼을 하면, 우리는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올곧고 정직한 것이다.
Sien과 나와의 관계를 두고 보자면 나는 정말로 그녀를 내 몸처럼 여기고, 그녀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은 작년에 내가 K에게 느꼈던 그런 감정보다는 덜 열정적이지만, Sien을 향하는 그런 사랑만이 내가 아직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그녀와 나는 불행한 두 인간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인생의 짐도 함께 진다. 이렇게 해서 불행은 기쁨으로 바뀌고 견딜 수 없는 것이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녀 어머니는 Frere가 그린 여인들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작은 할머니이다. 활기가 넘치는 분으로 여덟 명의 아이를 길러내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의존하기를 원치 않으며, 지금도 파출부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네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충실하기만 하다면, 거기다 가족이 결혼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결혼이라는 형식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이 문제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아버지는 내가 그녀와 결혼하는 걸 승낙하시지 않으시겠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그녀와 사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실 거다. 두 분은 말씀하시겠지. ‘너는 너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과 결혼하는 데다, 가난하기 짝이 없구나.’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품위를 갖추고 살려고 한다거나 하면 결과가 아주 나쁠 겁니다. 하지만 내 생활 방식은 아주 간소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살면 한 사람보다 돈이 덜 들게도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충고는 보나마나 기다리라는 걸 거다. 나는 이미 서른 줄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마는 주름살 투성이고 얼굴은 쭈글쭈글한 게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마흔은 되었다고 볼 거다. 거기다 손도 얼마나 깊게 고랑이 파였는지. 그런데 아버지는 당신의 안경너머로 마치 어린 소년을 보듯 나를 보신다. ‘너는 이제 첫 번째 젊음을 만끽할 때다’라고 쓰신 것이 바로 일년 반 전이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교육시키느라고 다른 누구에게보다도 돈을 많이 썼다고 말씀 하셨다. 따라서 이번 일로 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요청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Sien과 나는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것은 갖추고 있다. 내가 작품을 팔지 못하는 동안에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것은 네가 부쳐주는 백오십 프랑이다. 그 돈은 집세와 빵 값, 구두, 드로잉 재료, 간단히 말하자면 매일의 경비로 꼭 필요하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딱 한 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와 내 아내를 갈라놓거나, 방해하거나, 상처를 주는 일없이, 가난하고, 허약하며, 학대 받은 내 작은 아내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것뿐이다.
나도 종종 집 생각을 한다는 건 너에게 확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이번 일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일을 시작해 놓고 볼 일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두 분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이 끝났을 때에는 그걸 훨씬 더 좋아할 수 있지만, 네가 이곳에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대략의 스케치가 두 분에게는 현기증을 불러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두 분이 이 일을 조용히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의 사분의 삼 정도는 네가 두 분에게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는 유산을 물려받을 걸 숙고해 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까닭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집에는 글자 그대로 한 푼도 없다. 사정이 지금과 달랐더라면 유산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을 유일한 사람은 빈센트 삼촌으로 내가 그 분의 이름을 땄기 때문인데, 하지만 몇 년 동안이나 삼촌과 나는 정말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테오야, 동생아, 나는 ‘극적인’ 장면은 모두 피하고 싶구나. 사람들이 별로 적절하지도 못한 지혜를 가지고 내가 그녀와 사는 걸 막으려고 간섭을 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Christine을 향한 내 행동에 뭔가 선한 게 있다면 그건 궁극에는 나보다 네가 보답을 받아야 한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도구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무런 힘도 없었을 테니까.
너는 또 말하리라. ‘형, 이제 그만 원근법과 “물고기 건조 창고”를 생각해야지.’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사랑하는 동생아.’ 그리고는 드로잉을 하러 달려가리라. 그리고 내가 자연과 예술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건 없다는 증거로 너는 곧 드로잉을 받게 될 것이다.
네가 내 드로잉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이야기 할 때, 나는 C M 삼촌에게 주문 받은 걸 확실히 끝낼 것이다. 좋은 작품을 여섯 점 얻으려면 내가 이미 제작한 것 외에도 여섯 장 이상을 만들어야만 하리라. 그림 값으로 얼마나 받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유월 중에는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Sien과 나는 진짜 보헤미안처럼 며칠 밤낮을 연달아 사구에서 야영을 하면서 보냈다. 우리는 빵과 작은 커피 부대를 가지고 갔으며, Scheveningen의 작은 가게에 있는 여자한테서 뜨거운 물을 약간 얻었다. 그 여자와 그녀의 작은 가게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처럼 멋졌다. 나는 거리 청소부들이 커피를 마시러 들르는 새벽 다섯 시에 거기에 들르기도 했다. 동생아, 그걸 드로잉 한다면 멋진 것이 되리라!!! 거기의 사람들 모두를 모델로 쓴다면 비용이야 엄청나게 들겠지만, 한 번 그래보고 싶다.
요즘은 새벽 네 시만 되면 밖으로 나가서 작업을 한다. 낮 동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의 장난꾸러기들 때문에 거리에서 작업을 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 때가 또 모든 게 색조가 찾 가라앉아 있어서 굵은 윤곽선을 보기에 가장 좋은 때이다. 오늘은 너에게 드로잉을 두 장 보낸다. 첫 번째 것은 Scheveningen의 사구에 있는 ‘물고기 건조 창고’이고 그 다음 것은 내 화실 유리창에서 내다본 ‘목공소와 세탁소’이다.
내 앞에는 디킨스의 책이 한 권 놓여 있는데, 삽화가 정말 멋지다. Barnard와 Fildes가 그린 것이다. 그 중에는 구(舊) 런던의 일부 지역도 있는데 특이한 목판술 때문인지 나의 ‘목공소와 세탁소’와는 상당히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강렬함과 힘을 획득하는 길은 충직하게 관찰하는 걸 조용히 지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너도 보게 되겠지만 이 드로잉에는 이미 몇 개의 평면(plane)***이 있으며, 모든 구석과 구멍에서 그걸 둘러보거나 꿰뚫어 볼 수 있다.***아직도 부족한 것은 활력이다. 적어도 그 삽화들이 보여주는 그러한 정도의 자질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때가 되면 나타나리라.
지난 겨울 동안 내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물감 값으로 돈을 쓸 일이 적었던 게 사실이긴 하지만, 비례와 원근법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만드느라고 돈이 더 들어갔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이 도구는 Albert Durer가 쓴 책에 나오는 데 홀란드의 옛 대가들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을 이용하면 근처 물체의 비례와 좀 더 떨어진 평면(plane)에 있는 대상의 비례를 비교하기가 용이하다. 다시 말해 원근법에 따른 구성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에 있어서 아주 효과적이다. 그리고 눈으로만 그 작업을 하려고 할 경우에는--보통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숙련자가 아니라면--언제나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이 도구를 한 번에 단박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목수와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해 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노력을 기울인 덕택에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네 옷장에 네가 더 이상 입지 않는 외투나 바지가 한 벌 나에게 맞을 만한 걸로 있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뭔가를 살 때는 사구나 집에서 작업을 하는 데 적합한 실용적인 것으로만 사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외출복이 너무 많이 낡아 버렸다. 작업을 하러 갈 때는 평상복을 입고 나가는 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점잖아야 할 신사복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건 정말이지 나로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작업복은 Sien이 곁에서 세탁을 해 주고, 이것저것 수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손을 보아주기 때문에 말쑥하다.
Sien이 너에게 어떤 인상을 줄 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녀에겐 놀랄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녀는 나에게는 뭔가 숭고한 것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단지 보통 여인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평범한 인물을 사랑하고 또 그녀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인생의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이미 행복한 것이다.
내가 Sien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무관심하고 회의적인 인물이 되었겠지만, 내 일과 그녀가 나를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만 더 덧붙여야 겠다. 그녀가 화가의 삶에 따라오는 온갖 곤경과 근심걱정을 잘 견디어 내고 기꺼이 자세를 취해 주기 때문에 K와 결혼했을 경우보다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써 더 나은 화가가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 드로잉 몇 장은 건질 수 있게 되었으며, C M 삼촌이 주문한 것도 거의 끝나가지 않느냐?
토요일에는 Rappard가 나를 찾아왔다. 이곳으로 그가 나를 찾아주었다는 게 기쁘다. 그는 내 의도를 잘 이해하고, 갖가지 어려움에 공감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는 C M 삼촌을 위해 제작한 드로잉을 보고는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특히 Sien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뜰을 담은 큰 드로잉에는 아주 만족해 했다. 너도 그걸 보았으면 좋으련만. 거기다 작은 인물들이 분주한 목공소와 뜰을 그린 것도 마음에 들거다. 그는 드로잉 중 하나가 찢어진 걸 보고는 나에게 이 프랑 오십을 주면서 말했다. ‘저건 손을 봐야 겠군요.’ ‘맞아요. 하지만 돈이 없어서’라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기꺼이 필요한 비용을 대겠다고 막바로 응답했다. 그는 돈을 더 주려고 했으나 나는 받지 않았으며, 그 대가로 그에게 목판화 여러 장과 드로잉을 주었다.
손상을 입은 드로잉은 C M 삼촌에게 보낼 것이었는데, 그 중에 가장 잘 된 작품이었으므로, 손을 볼 돈이 마침 필요하던 차였다. 이 드로잉은 아마도 나중에 오십 프랑은 받을 수 있으리라.
C M 삼촌에게 해 준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뭔가를 제작할 사람이 몇 명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그리고 특히나 삼촌이 계속 주문을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 드로잉들은 첫 번째 것보다 훨씬 더 나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잘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촌이 현재 주는 가격이라면 삼촌으로서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다.
Heyerdahl이 ‘슬픔’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드로잉 화가, 예를 들자면 Henri Pille 같은 사람이 내가 마지막으로 그린 세 장의 드로잉을 보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것들이 그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그로서 공감을 할 만한 지를 무척이나 알고 싶다.
목수용 연필을 사용한 까닭을 설명하마. 옛날의 대가들이 드로잉에 무얼 사용했는지 아니? 분명 흑연 조각을 그대로 사용했지, 페이버 B나, BB, BBB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 미켈란젤로나 Durer가 사용한 도구는 목수용 연필과 어느 정도 닮았으리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목수용 연필을 이용하면 가늘고 비싼 페이버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천연 그대로의 흑연을 아주 정교하게 잘라놓은 것보다 더 선호한다. 그리고 번쩍거림은 그 위에다 우유를 부으면 사라진다. 야외에서 콘테 크레용으로 작업을 하다보면 강한 빛 때문에 자신이 뭘 하고 있는 지를 뚜렷하게 보기 힘들게 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검게 칠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흑연은 검정색이라기보다는 거의 잿빛에 가까우며, 색조를 좀 더 올리고 싶을 때면 펜으로 다시 작업을 하면 된다. 그래서 가장 강렬한 흑연의 효과도 잉크와 대조될 때는 다시 가벼운 색을 띤다.
목탄은 좋은 재료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것으로 작업을 하다보면 신선함이 사라지게 되며, 터치의 섬세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즉시 그것을 고정시켜야 한다. 풍경화에 있어서도 드로잉 화가들, 예를 들자면 Ruysdael과 Van Goyen, 그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 중에서는 Roelofs 등이 종종 그걸 사용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야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펜을, 잉크병이 딸린 걸로, 발명한다면, 아마 더 많은 펜 드로잉이 제작되리라.
오늘 C M 삼촌이 우편환으로 이십 프랑을 부쳐왔는데,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래서 드로잉이 삼촌 마음에 들었는지, 새로 주문을 할 것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첫 번째 제작한 것의 가격 삼십 프랑과 비교해 보고, 이번 것이 첫 번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고려해 볼 때, 삼촌이 이 드로잉들을 받았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런 저런 이유로 삼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하다. 수채화에만 배타적으로 길들여진 눈에는 펜으로 긁듯이 작업을 해 나가고, 빛깔을 지웠다가 다시 농후(濃厚) 색소로 집어넣곤 하는 드로잉이 어딘가 투박하게 비칠 거라는 걸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 폭풍우 속에서 산책을 하는 게 때로는 유쾌하고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투박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일례로 Weissenbruch 씨는 이 두 드로잉이 불쾌하다거나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C M 삼촌이 이 드로잉 값으로 지난 번 것보다 십 프랑이나 덜 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삼촌이 나더러 드로잉을 여섯 장이나 열 두 장 더 그려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할 것이다. 뭔가를 팔 수 있는 기회를 눈 뜨고 그냥 지나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삼촌 마음에 들도록 전심전력을 다 할 것이다. 그걸로 집세만 지불할 수 있더라도, 나로서는 숨 쉴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까,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테오 네 생각을 거듭거듭 하곤 한다. 오래 전에 네가 헤이그로 나를 찾아왔던 일, 그리고 또 Ryswyk 로를 따라 걷다가 풍차간에서 우유를 마신 일 등은 눈앞에 선하다. 이 드로잉들을 제작할 때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 앞에 있는 대상들을 본 그대로 가능한 한 소박하게 그리려고 애썼다.
풍차간에서의 날들을 돌이켜 볼 때면 언제나 그 때 느꼈던 일체감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보고 느꼈던 것을 종이에다 옮겨 놓는 것이 불가능했으리라. 그래서 나는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가 내 가슴속의 감정들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그것들이 단지 다른 형태로 발전될 뿐인 듯하다. 내 삶은 그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햇빛이 빛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지도 않으리라. 바로 그러한 곤경과 역경을 헤쳐나오는 가운데 나는 뭔가 선한 것이 솟아나는 걸 보았으니까. 바꾸어 말하자면 그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해 내는 것이리라.***
유월말 경에 테오 네가 올 때쯤에는 다시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당분간은 어쨌거나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이 주 정도만 입원하면 될 듯하다. 지난 삼 주 동안 나는 불면증과 미열, 방광 통증 등으로 상당히 고생을 했다. 그래서 나는 병원 침대에 가만히 누워 퀴닌 알약을 주는 대로 삼키고, 이따금씩 증류수 아니면 명반(明礬)수 주사를 맞아야만 한다. 보시다시피 내 상태가 전혀 심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건 방치해서는 안 되며, 즉시 진료를 받고 치료를 해야한다는 걸 너도 잘 알 거다. 방치했다간 문제가 더 악화되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과장을 하고, 또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다보면 침소봉대되기 마련이므로, 이것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테오 너에게만 뭐가 문제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너에게 직접적으로 물을 때에도 비밀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너무 걱정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Sien은 방문일에는 나를 보러 오고, 화실도 돌본다. 그녀는 Leyden에 갈 준비를 하는데, 내 생각에도 이제는 병원에 있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나를 위해 여기에 머무르려고 했지만 내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를 자주 생각한다. 그녀가 무사히 일을 치를 수 있기를.
나는 할 수 있는 한 힘껏 병과 싸우면서 작업을 계속해 나갔지만, 결국에는 의사의 검진을 받는 것이 시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주일 치 입원비, 부대비용 포함해서 십 프랑 오십을 선금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병동에는 모두 열 명의 환자가 있는데, 치료는 어떤 측면으로 보나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전혀 따분하지는 않으며, 철저하고 실용적인 치료가 상당한 도움을 준다.
내가 입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가 나를 문병 오셨다. 아버지는 얼마 계시지도 않고 뭔가 허둥대는 듯 하시다가 갔기 때문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때에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셨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 때 일은 내가 이곳에 병으로 누워있는 이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아주 이상하고 어딘지 모르게 꿈과 같아 보인다. 최근에 집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일만큼 나를 기쁘게 한 일은 없다. 나에 대한 가족들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었는지. 가족들은 속옷과 겉옷, 담배 등등이 든 소포꾸러미를 보냈으며, 거기다 십 프랑도 동봉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 이상이어서, 정말 얼마나 감격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 테오야, 나는 허약하고 기운이 없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하므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 외에는 손댈 수가 없구나.
그렇긴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몸이 좋지 못했으며, 오늘 아침에 의사가 곧 괜찮아 질 거라는 이야기를 다시 했다.
이곳에 오기 전날 C M 삼촌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삼촌은 나에 대한 삼촌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걸 거듭거듭 강조하면서, 또 Tersteeg 씨가 나에게 보여준 관심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그러면서 Tersteeg 씨가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었는데도 내가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라고 꾸짖으셨다. 나는 여기에 조용히 침착하게 누워있지만, 테오야, 내가 분명히 밝혀 두는데 Tersteeg 씨가 지난 번과 같은 경우에 나에게 보여준 그런 관심을 갖고 누군가 혹은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성질을 부리고 말 것이다.
원근법을 다룬 책을 몇 권 여기에 가져 왔다. 디킨스 작품도 몇 권, 그 중에는 ‘에드윈 드루드’도 있다. 디킨스 작품에도 원근법이 들어 있다. 정말,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인지! 이번 휴식이 내 드로잉에 좋은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하던 일을 얼마간 중단할 때 대상을 더 나은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을 다시 볼 때, 그 대상이 신선하고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병동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멋지다. 감자를 가득 실은 배들이 떠있는 운하 위의 조선소, 인부들이 철거 작업을 하는 집들의 후면부, 뜰의 일부, 그리고 멀리에는 나무와 가로등이 열을 지어 늘어선 선창, 정원과 연결된 아주 복잡하면서도 아담한 저택, 마지막으로 가지각색의 지붕들. 전체 풍경은 조감도 전경을 이루지만, 특히 저녁이나 아침 무렵 햇살이 내려 앉을 때 보면 Ruysdael이나 Van der Meer의 작품처럼 신비롭다. 화폭에 담을 수는 없지만,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자리에서 일어나 그걸 보지 않을 수 없다.
휴식은 회복에 도움을 주며, 나는 훨씬 더 침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나를 견딜 수 없이 괴롭히던 초조함도 사라졌다. 게다가 이곳 병동은 삼등 대합실만큼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초록빛을 보고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라는 것은 밝혀두고 싶구나. 이미 이곳에서 이 주일을 머물렀는데, 이제 또 다음 이 주일 치를 선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물론 제대로 회복이 된다면 팔 일이나 십 일 이후에는 떠날 수 있으리라. 의사가 기대한 만큼 내 회복 속도가 빠르지는 못하다. 오늘 아침에 의사에게 병세가 악화될 만한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병원에 있으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구나.
책은 읽어도 괜찮지만,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하루가 공허하게 지나가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만 한다는 게 나에게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Sien은 Leyden에 있다. 그녀가 떠나야만 했을 때 나는 너무나 초조해져서, 병이 악화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우리는 침착하게 있을 수가 없다. 그녀는 그곳에 혼자 외로이 있다.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힘겨울 것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정말로 그녀에게 가 그녀 곁에 머무르고 싶다. 우리 남자들의 고통이라는 건 여자들이 아기를 놓을 때 이겨내야만 하는 그 끔찍한 고통과 비교해볼 때는 별 게 아니다. 고통을 인내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은 우리보다 한 수 위다. 마지막 날까지 그녀는 규칙적으로 병문안을 왔으며, 그 때마다 훈제 소고기와 설탕이나 빵 등을 가지고 왔다. 이제는 그런 것 없이 지내야 하는데, 그 때문에 몸이 아주 약해진 듯하다. 이제 내가 그녀가 필요로 할 것들을 이것저것 들고--그곳 음식이 특히 좋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Leyden으로 그녀를 찾아가야 할 차례인데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안타깝다.
Sien과 그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사실 그게 가장 좋은 일이리라. 그런데 뜻밖에도 Tersteeg 씨가 병문안 와서, 한편으로는 나를 엄청 기쁘게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이것저것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며칠 후에는 Iterson이 또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 일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Jan 삼촌도 나를 찾아왔다. 부지중에 나는 종종 지난 겨울에 처음으로 Mauve 매형을 찾아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고는, 사정이 얼마나 한층 더 우울하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 모든 생각이 쓸모없는 밸러스트 같으므로 뱃전너머로 던져버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럼에도 내 가슴은 칼에 찔린 듯 하고 나는 심한 압박감을 느낀다.
Rappard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물론 나는 그에게 이 프랑 오십을 즉시 돌려보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답장을 보내 내 드로잉을 두고 화실에서 이미 한 말을 반복했다. 그는 드로잉 양식이나 정감, 개성 등이 마음에 들고 공감이 간다고 했으며, 자기 생각에는 살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새로 드로잉을 한 게 있으며 자신에게 보내라는 제안을 했다. 아무에게서도 ‘이것과 저것은 괜찮군. 정감과 개성이 넘쳐’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기운이 꺾이고 우울감을 벗기가 힘이 드는데, 그의 말은 나에게 상당한 힘을 주었다. 내가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을 다른 누군가가 느낀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며칠 동안 자리에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처음으로 다시 앉게 되었다. 몸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이곳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면 병동에서 습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련만! 병동에는 멋진 성 Gerome이 될 만한 노인이 한 분 있다. 그 분은 가늘고 호리호리하면서도 근육이 툭툭 불거진 갈색의 쭈글쭈글한 몸에다가 아주 특징적이고 두드러진 관절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분을 모델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할 정도이다. 의사는 내가 바라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렘브란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을 닮았는데, 멋진 이마에다 아주 사람의 마음을 끄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가 환자를 다루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도 그가 환자를 다루는 것처럼 모델을 다루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환자들의 망설임을 밀어내고 그가 원하는 대로 정확히 그들을 위치시키는 법에 통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병동의 의사는 좀 더 비싼 병동의 의사들보다 약간 더 괄괄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들은 환자를 약간 아프게 하는 걸 덜 두려워하리라. 내 생각에는 그게 더 낫다고 본다.
내가 의사에게 정원을 산책하는 대신에 짧은 외출을 허락해 줄 수 없느냐고 물은 건 특별히 Sien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막 화실로 돌아왔다.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것이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말로 이루 표현을 다할 수가 없구나. 정말이지, 햇살은 얼마나 더 눈부시고, 우주는 얼마나 더 무한하고, 하나하나의 대상과 인물이 얼마나 더 중요하게 보였는지. 하지만 내가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실 중에서 가장 기쁜 일은 드로잉을 향한 내 사랑과, 오랫동안 거의 소멸되었던 것처럼 보여, 커다란 공허감을 남겼던 내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내 감정 또한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의 한 달 동안 담배 파이프를 물지 못했는데, 이제 옛 친구를 다시 얻은 듯이 보인다. 병원도 아름다웠지만, 특히나 회복기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 남자, 여자, 어린애들이 있는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병상용 변기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렇게 화실에 앉아 있으니까 얼마나 행복한지 그것도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그건 다음 주 화요일에 의사를 찾아가 몸 상태가 어떤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의사는 병원에서 이 주 정도 더 입원을 해야만 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했었다. 이 모두가 인생의 작은 비참함들이다. 어쨌거나, 내가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행운을 하나 잡은 셈이리라.
Leyden에 다녀 왔다. Sien의 어머니, 어린 여식애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갔던 것이다. 무슨 말을 들을 지 몰랐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러다가 ‘어제 밤에 출산을 했습니다. . . 하지만 한 동안은 산모와 이야기할 수 없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너도 상상이 갈 거다. 그리고 ‘산모와 이야기해도 좋습니다’라는 말은 정말이지 결코 잊지 못할 거다. 그 말은 ‘산모와 다시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겁니다’였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를 보았을 때 정말 기뻤다. 그녀는 햇빛과 초록이 가득한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누워 있었다. 그녀도 우리를 보고는 정말 기뻐했으며, 한 순간에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출산 후 정확히 열두 시간 이후에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문병 할 수 있는 시간은 일 주일에 단 한 시간이거든. 아기는 아주 멋진 조그만 사내아이였는데, 세상물정을 다 아는 듯이 요람에 천연스레 누워 있었다.
그녀는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아주 위험천만한 경우였던 것이다. 의사들은 얼마나 똑똑한지! 하지만 그녀는 우리를 보자 모든 걸 잊어버리고는 나에게 곧 드로잉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녀의 예측이 곧장 실현된다고 해도 나로서는 걸릴 게 전혀 없다. 거기에 아픈 곳 하나 없이 서 있는 것보다는 나도 약간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는 것이 유감스럽지 않은 그런 때가 있었다. 나 혼자 멀쩡히 있었더라면 고통이 너무나 불공평하게 나뉜 셈이 되니까. 그거야 어쨌든, 나는 정말 감사드리고 있다. 하지만 음울한 그림자가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거장 Albert Durer는 자신의 아름다운 동판화에서 젊은 부부 뒤에 사신(死神)을 놓아둠으로써, 그걸 잘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테오야, 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Sien은 아마도 살아있는 사람들 축에 있지 못했을 거다. 불안과 근심걱정에 지친 삶을 살아오느라 그녀의 몸은 아주 망가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 필요가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잘 되리라. 그녀가 그 모든 비참함을 없앨 때면 그녀 인생에 아주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되리라. 그리고 비록 그녀의 청춘으로 돌아갈 수야 없지만, 게다가 그 청춘은 황폐하기 짝이 없게 지나가 버렸지만, 그녀의 세례 요한의 젊음***은 더욱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 한 여름의 가장 무더운 열기가 지나가고 나면 나무에 새롭고 생생한 어린 순이, 그러니까 낡고 시든 것 위로 새롭게 어린 초록빛이 솟아나는 걸 본 적이 있겠지.
Sien 어머니의 집, 안뜰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나는 그걸 두 번이나 그렸는데, C M 삼촌이 그걸 가지고 있다. 네가 삼촌을 찾아뵈러 갈 때 그걸 보기를 바란다. 네 의견이 어떤지 듣고 싶구나.
이곳 Schenkweg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내 친구인 목수로, 그는 이미 이런저런 작은 일에 여러 번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사장은, 내가 살고 있는 집 옆집의 주인으로, 마침 목공소에 있다가, 나더러 자기들을 따라 오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앞으로 내 화실이 될 방을 보여주면서 내가 결정만 내리면 벽지를 바를 것이라고 했다. 나는 현재는 나뿐만 아니라 Sien도 아프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괜찮다, 여러 종류의 다른 벽지 중에서 내가 원하는 걸 고를 수 있으며, 그걸로 바르겠다. 그러니 무엇을 고르든 간에 자기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갖다 놓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자, 화요일 이전에 일을 끝내려고 나에게 보여줄 셈으로 갖다놓은 거라고 했다.***
이 집은 정말로 편안하고, 아주 깔끔한데다가, 튼튼하게 지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다락방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정경은 꼭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우리 두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이 집을 세 낼 작정이다. 게다가 공간이 널찍해서 환기도 잘 될 뿐더러, 작업하기도 쾌적하고, 위생적이다. 빛은 북쪽에서 들어오는데, 다른 방은 남쪽에서 들어온다. 그리고, 작은 부엌, 나는 이 부엌을 앞으로 종종 그릴 작정인데, 이 부엌에도 작은 창이 하나 나있어 안뜰을 볼 수 있다.
Sien은 입원한 지 이 주 후에는 병원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에, 이 새 집을 세내는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서, 그녀가 그렇게 고통을 겪은 후 돌아올 때에는 따뜻한 보금자리에 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과 몇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는 내가 즉시 이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오후 동안 목공소의 인부들을 몇 명 보내 가구를 나르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무거운 것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긴요한 일이다. 둘째, Sien이 나보다 먼저 병원에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나나 그녀가 이 집에 확실하게 기거하기 전까지는 세를 물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나 스스로 이 집을 설계해서 특별히 화실이 들어가도록 꾸몄다고 해도, 현재 상태보다 더 낫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리에 있는 집 중에서, 외부 구조야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내부가 이런 집은 없다.
오랫동안 몸이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곧 완전하게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작업에 착수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하다.
동생아, 이사를 하는 가운데 나는 드로잉을 또 한 장 힘겹게 완성했다. 이번에는 수채화로, 병 때문에 끝내지 못한 채로 둔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제 서서히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이번 그림은 해변에 놓인 고기잡이 배인데, 배의 커다란 몸체는 뜨거운 모래 속에 누워 있고, 햇살이 내려쬐는 가운데 멀리 바다가 푸른 이내에 휩싸여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내가 태양을 등지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몇 군데 드리워진 그림자와 모래 위 뜨거운 대기의 흔들림 등으로만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인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정확한 것이라고 본다.
화실은 내 눈에는 정말 그럴 듯 해 보인다. 평범한 회색 빛이 도는 갈색 벽지, 문질러서 윤이나는 마룻바닥, 흰 모슬린 커튼을 친 유리창, 모든 게 깨끗했다. 그리고 벽에는 물론 습작품들을 걸어두었다. 내 화실이 골동품이나 태피스트리 등으로 장식하지 않고도 벽에 걸린 습작품들만으로도 멋지게 보이게 하고 싶구나. 방 양끝에는 화가가 놓여 있으며, 그리고, 제재목으로 만든 커다란 흰 작업용 테이블. 화실 옆에는 일종의 반침이 있어서 나는 화판, 작품첩, 상자 등을 모두 거기에 둔다. 그리고 목판도 그곳에 보관한다. 구석에는 벽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병과 그릇, 내 책 모두를 넣어 두었다.
그 다음 자그마한 거실에는 식탁과 식탁용 의자 몇 개, 석유 난로, 그리고 구석에는 여성용의 대형 고리 버들 안락 의자, 이 의자는 창가에 있어서 네가 드로잉에서 본 부두와 목초지를 내다볼 수 있다. 그 밖에는 녹색 커버가 달린 자그만 철제 요람. 남자는 자기가 바로 옆 요람에 아기를 두고 사랑하는 여인 곁에 앉을 때면 힘차고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 같다. 나는 요람 위에다 렘브란트의 훌륭한 동판화, 두 여인이 요람 곁에 있는데, 그 중 한 여인은 커다란 그림자가 방 전체에 깊은 명암(clair-obscur)를 드리우는 가운데 촛불 빛에 의지하여 성경을 읽고 있는 그 그림을 걸어 두었다. 다른 복제화들도 거기에 걸어 두었는데, 모두 정말 아름다운 것들이다. Scheffer의 ‘위로자 그리스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과 ‘땅 파는 사람들,’ 또 Ruysdael이 ‘관목 숲,’ 이 밖에 Herkomer와 Frank Holl의 아름다운 대형 목판화, de Groux의 ‘가난한 사람들의 벤치.’
부엌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앉을 창가에는 꽃을 놓아 두었다. 다락에는 우리 두 사람이 사용할 큰 침대와 아이용으로는 내가 쓰던 것을 준비했다. 우리는, 그러니까 그녀 어머니와 나는 며칠 바쁘게 지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침구를 꾸미는 일로 우리는 손수 모든 걸 만들고 고쳐 짓고 했다. 그리고 밀짚과 해초, 요껍데기 등을 사 가지고 다락에서 매트리스를 채워 넣었다. 그냥 만들어 놓은 걸 샀다면 돈이 훨씬 더 들었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나 어머니의 충고나 의견을 물을 생각은 없다. 보아라, 테오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나쁜 점이건 좋은 자질이건 이해할 분들이 아니다. 두 분은 내 감정이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하신다. 내 청원은 이렇다. 돈을 이렇게저렇게 절약을 해서, 다음 달에는 십 길더나 십오 길더 정도 남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돈을 아버지에게 보내 다시 이곳으로 오셔서, 나와 며칠 같이 지내도록 간청할 작정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의 새로운 미래에 대해 생생하고도 명료한 인상을 얻어서 용기를 지니시기를, 더 나아가 아버지를 향한 나의 감정을 확인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테오야, 나는 아버지와 나 사이의 이해를 재빨리 실제적으로 회복하는 데 이보다 더 빠르고, 더 정직한 길이나 수단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께 Sien과 그녀의 어린 아기를, 아버지로서는 예기치 못한 일이겠지만, 보여드릴 것이다. 그리고 이 깔끔한 집과 현재 내가 작업하는 것들로 가득찬 화실도. 몇 마디 말로 나는 아버지께 Sien과 내가 지난 겨울 힘들었던 그녀의 임신 시기를 어떻게 싸워나갔는가를 이야기하고, 또 네가 우리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것도 빼먹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그녀가 첫째는 그간의 상황이 우리 둘 사이에 공고하게 해 준 사랑과 애정으로 인해서, 둘째는 그녀가 성심성의껏 상당한 선의와 상식으로 내 일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도 말씀 드릴 것이다. 그녀와 나는 아버지께서 내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걸 허락해 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맞이한다’라고 말하는 외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그건 결혼식이 그녀를 내 아내로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상호간의 애정이라는 강한 유대와 우리가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주는 도움으로 한 몸처럼 묶여 있다. 너에게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Sien과 결혼하고 싶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결혼 문제를 두고 너는 ‘그녀와 결혼하지마’라고 했지. 그리고 너는 Sien이 나를 속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너도 Sien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그 당시에 그렇게 믿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네 말을 딱 잘라서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결혼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그녀를 정부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저냥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이 결혼 약속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민법상 결혼 약속이요, 둘째는 모든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돕겠다는 약속이다. 가족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민법상 결혼이 가장 중요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와 나에게 있어서는 그건 이차적이다.
민법상 결혼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어느 정도 시기를, 아니면 내가 작품을 팔아 한 달에 백 오십 프랑은 벌게될 때까지는, 그러니까 너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는 덮어둘 것을 제안한다. 테오 너와, 단지 너와만, 당분간은 민법상으로 결혼하지 않을 것을 동의한다. 테오야,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너에게 모든 일에 있어서 내 고집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할 수 있는 한은 너의 뜻에 따르려고 한다는 걸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Sien과 그녀의 두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끔찍한 병과 비참함의 상태로 그녀가 되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버림받았으며 혼자라는 느낌을 다시는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까, 계속해 나가야 한다.
Sien과 함께 있으면 가정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그녀가 내 자신의 따뜻함이 되어 주고, 우리 두 사람의 삶은 뒤섞여 있다는 그런 느낌으로, 가슴에 새겨지는 진지하고 깊은 감정이다. 그렇지만 마치 어떠한 사악함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그녀와 나의 음울한 과거가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어서, 우리는 일생 동안 대항해 싸워나가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생각할 때면 커다란 고요와 밝음과 쾌활함을 느끼며, 내 앞에 놓인 곧은 길을 보게 된다.
작년에 경험했던 나의 사랑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하듯이 미망이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운, 정말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라고 말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일이 미망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견해가 달랐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K가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 하는 것과 나의 부모님이나 그녀의 부모님이나 왜 그다지도 단호하고 험악하게 반대를 했느냐 하는 것뿐이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든가 공감이라는 걸 조금치도 보여주지 않았지. 이제는 만사가 원래 그렇듯이 치유되긴 했지만 깊은 상처 자국을 남기고 말아서, 언제 재발할 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겨울에 새로운 ‘사랑’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던가? 그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인 감정들이 꺼져버리거나 죽지 않았으며, 나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공감의 필요성을 일깨웠다면, 그게 잘못된 것일까? 그래서 처음에 Sien은 나에게 단지 내 자신처럼 외롭고 불행한 동류의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낙담만 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이 일은 내가 물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떠있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우리의 감정은 서로를 향한 필요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헤어지는 걸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그 때에는 이미 사랑이었다. Sien과 나 사이의 감정은 현실적인 것이다. 꿈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다. 네가 이곳에 오면 낙담한 채로 우울하게 있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너에게도 공감이 가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새로운 화실과 활기차게 돌아가는 새로운 가정.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그런 화실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화실. 요람과 아기용 높은 의자가 있는 화실. 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모든 게 활기를 부추기는 그런 곳. 비용은, 그래, 더도 덜도 아니고 든 만큼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네 도움이 없이는 해나갈 수가 없지만, 네 돈을 헛군 데 내던진 것은 아니다. 그 돈이 더욱 더 많은 드로잉을 생산해 낼 것이다.
병원에 얼마간 있었으며, 다시 작업에 착수했는 데 아기가 딸린 여인이 자세를 취해 주었다. 누군가가 가족 생활을 친밀하게 표현하고 싶다면,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든, 세탁부이든, 침모든 간에, 가족 생활의 현실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대낮처럼 명백한 일이다. 꾸준한 노력으로 자기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향한 이러한 감정에 손이 복종하는 걸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감정을 죽이려고 하는 건 자살과 마찬가지 짓거리다. 화실과 가족 생활이 하나로 뒤섞인다는 것은 특히나 인물화를 그리고자 하는 화가에게는 불리한 점이 아니다. 나는 Ostade가 그린 화실 내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자신의 집 구석 부분을 그린 듯한 작은 펜 드로잉들이었다. 그 드로잉들은 그의 화실이 우리가 흔히 동양의 무기나 자기, 페르시아 융단 등을 발견하곤 하는 그런 아주 작은 집들과 흡사하다는 걸 잘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두운 그림자와 근심걱정, 어려움 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은 종종 간섭과 추문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나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한다거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함께 하기 힘든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의 결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상상하지는 마라. 나는 종종 끔찍스러울 정도로 우울하고, 성마르며, 공감을 갈망한다. 그래서 공감을 얻지 못할 때면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거칠게 말하기도 한다. 종종 나는 활활 타는 불꽃에다 기름을 끼얹기도 한다. 사람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때로는 사람을 사귀고, 그들과 이야기를 하는 게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지라도, 상당 부분이 어디서 기인한 지 아니? 그건 단순히 불안감이다. 도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원래부터 끔찍하게 예민한 나는 내 건강을 망쳐버린 그 비참한 시기를 보내는 가운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의사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차가운 거리에서 보낸 밤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시달리고, 또 실직에 따른 지속적인 긴장,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것 등등이 나의 특이한 기질의 적어도 사분의 삼은 원인이며, 함께 하기 힘든 나의 분위기나 우울기는 그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걸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면도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 점을 취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니?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벌써 시간이 많이 되었구나. 여기 화실 안은 고요하지만, 밖에는 폭풍이 불고 비가 내린다. 그래서 이 안의 고요함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동생아, 이 고요한 시간에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너에게 보여줄 게 얼마나 많은지!
테오야, 요즘에는 네 생각을 얼마나 자주하는지,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첫째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내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너의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현재 나는 너의 도움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내 자신의 기력과 인생에 대한 사랑조차도 너의 것이며, 나는 일하고자 하는 힘이 내 내부에서 솟구치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가 너를 이다지도 자주 생각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진정한 가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도 없으며, 아이도 없었다. 테오 너는 홀로 있는 순간 순간에 ‘하느님, 내 아내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 내 아이는? 혼자 산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는 신음 소리나 탄식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마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이곳에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으며, 그런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느낀다. 그것은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황아래서는 남자는 혼자 살지 않고 아내와 아이와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걸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그래서 나는 기꺼이 이러한 순수한 믿음을 표시한다)이다.
테오 네가 내가 한 일을 이해하고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테오야, Sien이 어머니이자 평범한 주부일 뿐 그 밖의 다른 어떤 인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건 그녀가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 생각에는 그녀가 ‘인생의 이면’을 보았기 때문에 인생을 더 잘 안다.
나는 테오 너를 믿으며, 나의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 사람의 성격에는 그 근저에는 평정함--흔들리지 않는 평정함이랄까(quand bien meme)이 있다는 걸 안다. 평정함은 우리의 직업과 일을 향한 우리 자신의 진실 되고 순수한 사랑에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 두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으며, 미술은 우리 마음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인생을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내가 구입한 것은 접시 몇 개와 포크, 스푼, 나이프 등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테오와 아버지가 찾아올 때는 또 따로 한 벌씩 마련을 해야지. 그러므로 창가의 네 자리와 식탁의 네 자리는 이제 준비를 다 갖추고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분명 올 거지?
동생아, 네가 이곳에 와서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집을 보고, 또 네가 이 모든 것의 창립자라는 걸 깨닫는다면, 네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니? 내 삶이 항상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너의 도움으로 내 젊음이 다시 찾아왔고 내 진정한 자아도 발전해나간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네가 나를 여전히 돕는 게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생각할 때에도 이러한 커다란 변화를 명심해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네가 앞으로도 현재의 드로잉에서 다음 드로잉의 맹아를 보아주었으면 한다.
병원에 이사를 보러 갔었는데, 그는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늘 오후에 나는 내 고마움을 담아서 드로잉을 한 장 보냈다. 그 그림은 뜨개질을 하는 Scheveningen 소녀로 Mauve 매형의 화실에서 제작한 것인데, 매형이 몇 군데 손을 보아주었고, 내가 그리는 걸 지켜보다가 이런 저런 점을 지적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수채화 중에서는 정말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마차로 Scheveningen으로 가 해변에서 그림을 좀 그리고 싶다. 나는 쉽사리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는데, 그건 침대에 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기묘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는 지난 겨울보다 심신 상태가 더 나은 편이며, 여러 가지 일이 나를 아주 유쾌하고 감사하게 만든다. 벌써 시간이 많이 되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드로잉 재료들을 챙겨서 길을 나서리라. 지난 번에 마지막으로 Scheveningen 사구에 앉아있을 때와 현재 사이에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파리의 밤을 묘사한 네 편지의 일부를 읽고는 아주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짙은 잿빛의 파리(Paris tout gris)를 보았을 때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병원에 있는 동안 한 예술가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바로 에밀 졸라로 ‘사랑의 한 페이지(Une Page d'Amour)’에서 대가다운 솜씨로 그러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도시의 몇 군데 정경을 노련하게 스케치하고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책은 그 때까지 단지 몇몇 짧은 단편들밖에는 몰랐던 졸라의 모든 책을 읽게 만들었다. 그는 현명한 예술가이다.
너에겐 터무니없을 정도로 예술적인 뭔가가 있다, 동생아. 그걸 잘 경작하고,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가지를 내뻗어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주려하지말고, 네 스스로 진지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한 가지 덧붙이자면 너의 그 짧은 묘사에는 ‘색깔’이 있어서 내가 분별해 내어 그 감촉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네 인상을 보다 더 감칠맛 나는 형태를 띄게 해 누구나가 거기에서 분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밀고 나가지 못한 게 흠이긴 하지만. 네가 묘사를 멈춘 그 지점에서 창조의 진정한 격통과 고뇌가 시작된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 창조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가지고 있다.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예술이라 마치 푸르고 잿빛인 자그마한 연기가 히스에 불이 난 것을 암시하듯 때로는 잠자고 있는 숨겨진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걸 아니?
Sien이 집으로 와서, 지금은 이곳 Schenkweg에 있다. 지금까지는 그녀나 그녀의 아기 모두 건강하게 잘 있다. 그녀가 아기를 돌보는데, 아기는 잠잠하다. 그녀가 비싼 걸 먹어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병원에서 권유한 음식은 정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우리가 한 달에 백 오십 프랑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날씨는 상당히 따뜻한 데다 쾌청하다. 진짜 유쾌한 귀향이었으며 Sien은 모든 것에 흡족해 했다. 하지만 그녀는 특히 어린 딸을 다시 보게 되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 날을 위해 목이 긴 구두를 한 켤레 사주었는데, 그녀는 매우 이뻐보였다.
오늘 네가 Sien을 보았더라면! 지난 겨울 이래 그녀 외모가 상당히 바뀌었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완전한 변환이랄 할 수 있을 정도다. 이건 상당 부분 그녀를 돌 본 의사 덕택이다. 하지만 그가 애쓴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강한 애착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리라. 여성은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때 바뀐다.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녀는 생기를 잃고 매력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그녀 내부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며, 그녀의 발전은 결정적으로 사랑에 기대고 있다. 자연은 자유롭게 흘러가야 한다. 자연은 통상적인 길을 가야 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한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남자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그건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연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그녀의 표정은 아주 다르다. 눈빛도 달라 보이고, 시선은 조용하고 침착하다. 그리고 얼굴에는 행복의 표정이 감돈다. 그녀 표정에 느껴지는 평화와 고요함은 그녀가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로 더욱 더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그녀에겐 활기와 예민함이 넘치는데, 고통과 어려운 시기가 그녀를 품위 있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그녀를 돌본 의사와 수간호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테오 너도 그녀가 진지한 사람이라면 공감을 느끼게 될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그들이 그녀를 그다지도 정성껏 돌봤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네가 그녀를 알게 된다는 사실에 아무런 주저함도 가지지 말았으면 한다.
이제 이곳에 ‘가정,’ 바꿔 말하자면 ‘자신의 보금자리’란 분위기가 충만하게 되니까 나는 Michelet가 ‘여자는 종교(La femme c'est une religion)’라고 말한 걸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에 대해서 좀 더 단호히 말하자면, 나는 때때로 유화***를 다시 시작하고픈 커다란 갈망을 느낀다. 화실은 더 커졌고, 채광도 더 낫다. Sien과 내가 함께 살기 때문에 두 집 살림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백 오십 프랑 중에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그림 재료를 사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건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달려 있지만, 재발할 위험이 없게 되면 즉시 야외로 나가서 채색화를 시작할까 한다. 거기다 좀 힘을 실을 계획이다. 그리고 Sien이 건강을 회복하면 그 즉시 그녀는 다시 진지하게 자세를 취해 줄 것이다. 분명히 밝혀두는데 그녀의 몸매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녀가 괜찮아지면 누드 습작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동안 지속적으로 야외에 나가서 작업을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집에서도 제재를 찾던지 해야지, 앉아서 빈둥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 제작한 드로잉 두 개는 모두 수채화이다. 뭔가 시도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화와 수채화를 포기한 것은 Mauve 매형이 나를 버린 게 얼마나 가슴을 상하게 했던지 붓을 쳐다볼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이제 진짜 드로잉에 도전하여 더욱 더 열심히 작업해야만 할 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갈 것이다.***건강을 회복하는 즉시 Harding지에다 과단성 있게 수채화를 제작해 보고 싶구나. 이 화지를 사용하면 처음으로 시도할 때***수채화의 특성을 망치는 일없이, (와트만지보다 더) 견고한 검정과 흰색의 바탕칠 물감을 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전 날 Mesdag와 Post 전시실에서 프랑스 미술 전람회를 관람했다***. 아름다운 그림이 많이 있었다. 내가 특히 찬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Th. 루소가 알프스의 암소 떼를 커다란 스케치로 담아낸 것과 쿠르베의 풍경화였다. Dupre 형제도 훌륭했고, 산비탈을 배경으로 이엉으로 엮은 커다란 지붕을 그린 도비니의 작품(이 그림은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볼 수 없었다)과 또 여름 새벽 네 시나 그 부근의 연못과 숲 가장자리(lisiere de bois)를 옮긴 코로의 작은 작품도 멋있었다. 코로의 작품에는 작은 분홍빛 구름 하나가 태양이 곧 솟아오를 거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는데, 그 정적과 고요와 평화가 사람을 사로잡았다. 이 모든 걸 보았다는 게 무척이나 기쁘다.
오늘 아침 Tersteeg 씨가 이곳에 와서 Sien과 아이들을 보았다. 나는 씨가 막 아이를 출산한 엄마에게 다소나마 다정한 얼굴을 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씨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테오야, 씨는 아마 너도 짐작이 갈만한 그런 말을 했다.
저 여자와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군가?
어떻게 여자에다, 거기 덧붙여 애들과 함께 사는 걸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자네가 4두 마차를 끌고 도시를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일 아닌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가?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씨보다 더욱 유능한 사람, 즉 병원의 의사로부터 내 심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내 신체 상태에 대해서도 힘겨운 일을 이겨낼 정도로 튼튼하다는 분명한 언질을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씨는 이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훌쩍 뛰어 넘더니만, 아버지를 끌어들이고는, 심지어 Prisenhage에 계신 삼촌까지 끌어들였다는 걸 한 번 상상해 보아라.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나는 씨에게 집에 계신 분들이 씨로부터 분개한 편지를 받은 직후에, 나로부터 똑같은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그러니 나를 찾아달라는 상냥한 요청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비용도 내가 되겠다는 편지를 받는다면, 그거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씨는 내가 집에다 편지를 쓰려고 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럴 작정이었다고 하자*** 씨는 그렇다면 당연히 편지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씨가 드로잉에 관심을 갖도록 애를 썼으나, 씨는 그냥 쓱 한 번 훑어보더니, ‘아! 저것들은 옛날에 그린 것들이군’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버렸다. 새로운 것도 몇 장 있었는데, 씨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새로운 드로잉 대부분은 사실 너에게 가있고, C M 삼촌도 몇 장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테오야, 내 생각에는 Tersteeg 씨가 쓸데없이 간섭을 해서 온갖 불행을 가져올 것 같다. 집과 Prinsenhage(Prinsenhage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에 불화와 근심 걱정을 불러일으킬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걸 막을 방도가 없을까? 현재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잘 지내고 있는데, 씨가 또 이 모든 걸 망쳐 버린다면? 나는 야비한 짓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씨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씨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한 가지, 단 한 가지, 즉 돈이 문제일 뿐이다. 씨는 다른 신은 알지도 숭배하지도 않는다. 나 자신도 아직까지는 다른 때만큼 나 자신을 방어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다. 정말로 나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것과 같은 방문은 견디어 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생아, Tersteeg 씨나 그 어느 누구의 간섭 때문에 헤어지거나 하는 대신에 너와 나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켜 주고,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오늘 아침의 일을 화만 내지는 않으리라.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나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며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꼭 필요한 것뿐이고, 그 비용은 돈을 더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절약을 함으로써 충당해야만 한다. 이러한 절약은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성가신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쁜 일이리라. 내가 다시 작업에 착수하여 거기에 몰두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흥분을 감출 수 없듯이, 그녀도 건강을 회복한다는 느낌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병원에서 돌아온 이래 처음으로 Sien과 나에게 아픔을 안겨다 주었다. Sien은 나무에 매달린 이파리처럼 변했다. 그녀가 Tersteeg 씨가 나에게 하는 말 몇 마디를 들었을 때, 그녀 얼굴에는 아픔으로 인한 추한 주름살이,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니, 나타났다.
여인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 용기가 난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네가 부쳐주는 돈으로 나는 좋은 화가가 되리라. Sien은 작은 어머니가 되었는데, Feyen Perrin의 동판화나 드로잉, 아니면 유화처럼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에게 자세를 취하게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녀와 내가 회복되기를. 그리고 고요와 평화를.
지난 겨울 너는 내 작품에 대해 Tersteeg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이야기를 Heyerdahl에게서 들었다. 현재 나는 새로운 활기로 충만 되어 있으므로 이번 가을에는 뭔가 진보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마 크리스마스 경에는, 그러니까 내가 내 자신에게 허용한 한 해가 끝날 무렵에는 작은 수채화를 몇 점 보내리라. 이미 갈색과 붉은 색, 회색의 터치를 가미한 가장 최근의 작은 드로잉들을 그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때때로 나는 유화를 하고 싶은 커다란 갈망도 느낀다. 엄청나게 커다란 갈망이자 야망이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데 네가 오는 걸 정말로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공감과 애정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와 다시 한 번 길을 거닐고만 싶구나. 비록 Ryswyk의 풍차간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지만.
동생아, 풍차간도 가버리고, 내 젊음과 시간도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렸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삶에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며, 삶은 힘을 바쳐 애를 쓰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다시 샘솟는다. 이전에 내가 세상 경험이 적었을 때 그런 것보다, 아마도, 아니 그 보다는 확실히, 이 느낌은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듯 하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 당시의 시정신을 내 드로잉에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병이--아니 그 보다는 병의 여파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지--없다고 치부하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예술은 질투심이 강해서, 자기는 내 버려두고 병을 선택하는 걸 허락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셈이다. 시간이 벌써 많이 흘러갔다. 손도 너무 하얗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지속적으로 드로잉을 해나가고 있다. 누군가가 다시 나에게 ‘아! 저것들은 옛날에 그린 것들이군’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원치 않는다.
더더욱 다른 것들은 흥미가 없어진다. 최근에는 다른 화가들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그림이 나빠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화가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이다. 이제와서야 육 개월 전에 마우베 매형이 ‘Dupre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하지 말고, 저 개천의 둔덕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라고 한 걸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백 퍼센트 진실인 이야기다. 대상 그 자체, 사실에 대한 감정이 그림에 대한 감정보다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이제 나는 예술과 인생 자체--예술이 그 핵심이다--에 대해 폭넓고 풍부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나를 위축시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새되고 잘못된 것으로 들린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너무 높은 곳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드로잉을 제작하고 싶다. ‘슬픔’이 소박하나마 그 출발이며, 거기다 아마 ‘Meerdervoort 가’나, ‘Ryswyk 목초지,’ ‘어류 건조 창고’ 등과 같은 작은 풍경화들도 변변찮지만 출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로잉들에는 적어도 내 가슴에서 직접 샘솟은 무언가가 있다.
인물화를 통해서건, 풍경화를 통해서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인 우수가 아니라 진지한 슬픔이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이 내 작품을 두고 ‘이 사람은 깊게 그리고 온화하게 느낀다’라고 말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의 거칠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 때문에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런 경지.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은 허세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있는 힘껏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 나는 무엇인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 괴짜, 함께 하기 힘든 인물, 사회적으로 아무런 지위도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인간. 좋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지라도, 나는 내 작품으로 그런 괴짜,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내 야망이다. 이 야망은 분노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열정보다는 평정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가 종종 견딜 수 없는 비참함에 빠졌다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 안에는 고요하고 순수한 조화와 음악이 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더러움으로 구역질 나는 지역에서도 나는 드로잉과 그림을 본다.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내 마음은 이러한 것들에 이끌린다.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 하나도 관련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악행이나 괴상망측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나 의심하기 때문에, 내가 때때로 껄껄거리며 웃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니? 나는 실제로는 단지 자연과, 특히 사람들의 친구이고, 조사와 작업에 몰두할 뿐인데.
많은 현대 그림에서 이전의 대가들이 보유하지 못한 독특한 매력 같은 걸 발견한다. 내가 이전의 대가와 현대 화가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현대 화가들이 더 깊이 있는 사상가라는 점이리라. 밀레(Millais)의 ‘추운 시월’과 Ruysdael의 ‘Overveen의 표백공장,’ 그리고 또 Holl의 ‘아일랜드 이주민들’과 렘브란트의 ‘성경 강독,’ 이 그림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렘브란트와 Ruysdael은 그들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숭고하지만, 현대 화가에게는 우리에게 보다 더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호소하는 뭔가가 있다.
최근에 ‘나나’를 읽었다. 졸라는 정말 발작의 뒤를 잇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발작은 1815년부터 1848년까지의 사회를 묘사해 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졸라는 발작이 중단한 곳에서 시작해서 Sedan까지, 아니 그 보다 현재까지 나아간다. 내 생각에는 정말 훌륭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졸라 작품을 많이 읽도록 해라. 그는 우리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그가 Halles를 그려낸 부분은 정말! Francois 부인이라는 인물은 책 전체를 통해 Halles를 배경으로 다른 여성들의 잔인무도한 이기주의와 대조되면서, 정말로 고요하고, 고귀하고, 동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선다. 나는 Francois 부인이 진정으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Sien을 두고 볼 때 내 생각에는 Francois 부인 같은 누군가가 Florent을 위해 했을 그런 일을 나는 했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테오야, 명념해라, 이러한 인간애가 인생의 소금이라는 걸. 그게 없이는 정말이지 살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인간애라는 걸 누군가가 보유하고 있는 그런 것으로 앞서 말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모두를 돕기 위한 박애적인 구상이나 계획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자신이 항상 누군가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으며 앞으로도 느낄 거라고 말하는 걸 (비록 인도주의라는 말이 악취를 풍긴다는 걸 잘 알긴 하지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한 때 나는 화상을 입은 불쌍하고 비참한 광부를 육 준가 두 달 동안 간호했다. 나는 겨울 내내 그 불쌍한 노인과 내 음식과 그 밖의 많은 것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 Sien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어리석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옳게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일반적으로 그다지도 무심하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덧붙여 한 마디 하자면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네가 나를 이다지도 충실하게 돕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건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니?
동생아, 지난 겨울에 일 년 안에 수채화를 보게될 거라고 한 이야기가 기억나니?
나는 Scheveningen 풍경을 담은 수채화를 세 장 그렸다. 거기다 아주 세세하게 그린 ‘어류 건조 창고’도. 이번에 그 어류 건조 창고로 돌아가 보니, 사구로부터 모래가 바람에 날려드는 걸 막기 위해 창고 앞에다 갖다 놓은 모래가 가득 든 바구니에서 정말 눈부시게 생생한 순무의 어린잎이 돋아나고 올리브 씨앗이 싹을 틔웠더라. 두 달 전만 해도 작은 뜰의 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황량했었는데, 이제 이 거칠고, 야생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자라난 이 식물들은 나머지 부분의 황량함과 대조를 이루어 아주 멋진 효과를 낸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먼 수평선, 작은 교회 첨탑이 있는 마을 지붕들 너머로 보이는 정경, 사구들, 이 모든 게 너무 멋졌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정말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가지를 친 버드나무의 오래된 whopper를 공략해 보았는데, 내 생각에는 지금까지 그린 수채화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이 되었다. 갈대가 뒤덮인 악취를 풍기는 웅덩이 근처의 죽은 나무, 철로와 철로가 서로 겹쳐지는 곳에 위치한 Ryn 철도의 객차고(庫), 떠도는 구름으로 덮인 하늘은 잿빛 일색으로 단 한 곳만 밝은 흰색 경계선을 이루고, 그러다 갈라지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한없이 깊은 푸르름. 우중충한 풍경이었다. 나는 이 그림을 신호수, 덧옷을 입고 손에는 작은 붉은 색 기를 든 신호수가 ‘제기랄 오늘은 정말 우중충한 날이군’이라고 생각했을 때 보고 느낀 그대로 그려내려고 했다.
Ryswyk 목초지를 두 번째로 드로잉에 담아 보았는데, 똑같은 소재가 시점의 변화로 아주 다른 양상을 띈다. 그리고 Scheveningen 표백 공장도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주 조잡한 torchon 지(표백하지 않는 아마포 색)에다 한 자리에 앉아서 그대로 그려내었다.
이것들은 아주 복잡한 원근법을 포함한 풍경으로 그리기가 매우 어렵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안에는 진정한 홀란드 적인 특성과 정감이 들어있다. 이것들은 지난 번에 내가 너에게 보낸 것과 유사하지만, 색채가 가미되었다. 붉은 기와 지붕과 대비되는 목초지의 부드러운 녹색, 젖은 목재와 모래가 가득한 뜰이 있는 전면의 침침한 색조와 더욱 강렬하게 대비되는 하늘의 빛깔.
내가 밝은 녹색이나 부드러운 파란색, 그리고 수천 가지의 다른 회색--어떤 색이든 회색 빛을 띠지 않은 색깔은 없으니까, 예를 들면 빨강-회색, 노랑-회색, 초록-회색, 파랑-회색 등등--을 주저함 없이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연은 검정과도 물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백 퍼센트 검정색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흰색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색깔에 들어있어서, 색조나 농도에서는 차이를 보이면서 회색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색조나 음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기본적인 색깔은 빨강, 노랑, 파랑 세 색깔뿐이다. ‘혼합’색은 주황, 초록, 자주색이다. 여기가 검정과 약간의 흰색을 더하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회색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초록-회색이 있는 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정도 이다.
그렇긴 하지만 색채의 전체 배합은 이 몇 가지 단순한 규칙보다 더 복잡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료하게 인지하는 것은 칠십 가지 다른 색깔의 물감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건 이 세 가지 기본 색과 검정, 흰색으로 칠십 가지 이상의 색조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채색화가는 자연에서 색채를 볼 때 그것을 어떻게 분석해야할 지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예를 들자면 ‘이 초록-회색은 노랑에다 검정이 섞인 것으로, 파랑은 거의 들어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자연의 회색들을 자신의 팔레트 위에서 어떻게 찾아내어야 하는지를 안다.
내가 지금 제작한 것들은 단순히 내가 드로잉을, 즉 올바른 원근법과 비례를 익힌다면, 그것이 동시에 수채화에서도 전진해 나가는 것을 용이하게 해준다는 걸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나는 육 개월 동안 전적으로 드로잉에 전념한 뒤에 시험삼아 이것들을 제작했으며, 두 번째로는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있다고 할 만한 기본적인 드로잉과 관련해서 더 열심히 공구해야할 부분이 어딘가를 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너는 내 수채화에서 잘못된 점들을 보게 되겠지만, 그러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의 체계에 매달린다거나 뭔가 하나에 속박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안심해도 좋다. 그러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예를 들면 Tersteeg 씨의 상상 속에 더 많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내가 아는 몇몇 화가들이 자신들의 수채화나 유화를 두고 걱정하는 걸 볼 때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친구여, 문제는 자네 드로잉에 있네.’
처음에 내가 수채화나 유화부터 시작하지 않은 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지 열심히 작업을 하여 드로잉에 있어서나 원근법에 있어서나 내 손이 머뭇거리거나 하지 않으면 그 점은 충분히 보충되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젊은 화가들이 기억에 의지하여 구성을 하고 드로잉 한 다음, 또 다시 기억에 의지하여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칠하고는, 멀찍이 떼어놓고, 아주 신비롭고 우울한 얼굴빛을 하고는 자기가 그린 것이 도대체 무엇처럼 보이는지 고심을 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마침내 언제나 그렇듯 기억에 의지하여 뭔가 대단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건, 정말이지 때때로 나를 넌더리 나게 한다. 이 모든 게 나를 구역질 나게 한다! 그런데 이 신사분들은 오히려 나에게 안 됐다는 식으로 ‘아직 유화를 시작하지 않았느냐’고 거듭 묻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운명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드로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걸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드로잉에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걸 이해해주기 바란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드로잉에 관해서는 확고함을 얻기를 원하고, 두 번째로는 유화와 수채화를 하려면 처음에는 아무런 대가도 돌려주지 않는 상당히 많은 경비가 드는 데다, 잘못된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업을 할 량이면, 그 경비가 두 배 아니 몇 배나 더 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빚을 지거나 덕지덕지 칠한 캔버스와 화지가 화실에 나뒹굴게 되면, 화실은 곧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전에 그런 화실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기쁜 마음으로 화실에 들어가 그곳에서 활기차게 작업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춤거리고 있다고 의구심을 품거나 할 필요는 없다.
Mauve 매형 자신도 나중에는 매형이 나에게 속지 않았다는 걸, 내가 주춤거리거나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내가 다른 어떤 것을 하기 이전에 보다 양심껏 드로잉하라고 가르친 사람도 바로 매형 자신이었다.
테오야, 채색화가 흑백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는 않다는 걸 너도 알리라고 확신한다. 아마 실제로는 그 반대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따르면, 사분의 삼은 원래 스케치에 달려 있으며, 수채화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그것의 질에 의존하고 있다. 대략(a peu pres)의 효과만 부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드로잉을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 이전의 나의 목표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흑백의 ‘어류 건조 창고’를 보면 너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고, 전체 구성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감지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동생아, 나는 이전의 나를 회복했으니 마음을 놓아라. 어쨌든 화실에서 작업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새로운 화실은 이전 것에 비해 엄청나게 개선되었다.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하며, 특히 모델과 상당히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포즈를 취하고 하는 데는 훨씬 낫다. 집세를 더 많이 지불하면 그 대가로 더 나은 작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비가 와서 야외에서 작업을 할 수 없을 때 언젠가는 아기 요람을 수채화에 담아 보아야겠다. 하지만 네가 올 때 그 밖에는 풍경 수채화를 보여주고 싶구나. 인물 수채화는 이곳에 온지 일 년이 되는 이번 겨울에 제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선 누드를 더 많이 그려야만 한다. 거기다 파랑과 흰색을 사용한 그림도 많이.***
Sien은 머지 않아 포즈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먹고 살 것은 벌게 될 것이다. 나의 가장 뛰어난 드로잉 ‘슬픔’--적어도 나는 이것이 내가 지금껏 그린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은 그녀가 포즈를 취해준 것이다. 그리고 일년 이내에 나는 인물화 드로잉을 규칙적으로 제작해 낼 것이다. 너에게 그것은 약속한다. 풍경화를 상당히 사랑하긴 하지만 인물 드로잉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걸 잊지 말아다오.
자연에서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고, 바꿔 말해 작은 스케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윤곽선에 대한 고도로 발달된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중에 그것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옮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감각을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첫째는 관찰, 그 다음에는 꾸준한 작업과 조사, 다음으로는 해부학과 원근법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내 곁에는 Roelofs의 풍경화 습작이 걸려 있는데, 그 단순한 윤곽선이 얼마나 표현적인지 너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모든 게 그 안에 있다. 또 다른 훨씬 더 놀라운 예는 밀레의 대형 목판화 ‘양치기 여인’이다. 그런 결과를 볼 때 나는 윤곽선의 엄청난 중요성을 더욱 더 강렬하게 느낀다. 그리고 너도 ‘슬픔’이라는 작품을 통해 알다시피, 나는 이 부분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엄청나게 애를 쓴다. 하지만 윤곽선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색채의 힘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걸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수채화를 그리는 걸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의 기반은 드로잉이다. 드로잉으로부터 수채화 외에 다른 많은 부분들이 자라나오게 되며, 이것들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면 내 안에서 점차 발전해 나갈 것이다.
어제 나는 Th. de Bock의 아주 아름다운 작은 목탄화를 보았다. 아주 훌륭한 솜씨로 하늘은 흰색과 섬세한 파랑의 터치를 가미했는데, 그의 그림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동생아, 네가 오겠다니 정말 기쁘다. 내 생각에는 몇 가지 이유로 내가 너와 함께 Tersteeg 씨나 Mauve 매형을 보러 가지 않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낫다고 본다. 거기다 나는 내 작업복에 너무나 익숙해 져서, 내 마음대로 모래나 풀 위에 눕거나 앉거나 (사구에서는 절대로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이따금씩 단지 낡은 고기 바구니만 이용하기 때문이다) 한 결과, 내 옷은 로빈슨 크루소의 그것과 같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너와 누구를 방문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그 외에는 네가 쪼갤 수 있는 시간이란 시간은 모두 마지막 삼십 분까지도 열렬히 갈망한다는 걸 알겠지.
그렇다면 진짜 함께 목초지를 산보할까? 좋아. 그리고 바다와 해변은? 거기다 옛날의 Scheveningen은? 멋질 거야. 목초지를 가로지는 아름다운 길을 몇 개 알고 있다. 정말로 고요하고 평온한 곳이라 너도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노동자들의 낡은 오두막과 새 오두막, 그리고 다른 집들을 발견했는데, 물가에 작은 정원이 딸린 아주 예쁘고 특색 있는 것이다. 그 길은 Schenkweg의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길이다.
Tersteeg 씨는 나와 내 행동을 평가할 때면 언제나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고정 관념에서 출발한다. 나는 씨가 직접 그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오, 자네 그림도 자네가 지금껏 해온 모든 일과 마찬가지가 되고 말 걸세. 두고보게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그를 쫓아가 ‘Tersteeg 씨, Tersteeg 씨, 당신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화가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내가 뼛골 깊은 곳까지 예술적 감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목초지나 사구에서 잠자코 야영을 하든지, 화실에서 모델을 보면서 작업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새벽 네 시만 되면 다락방 유리창 앞에 앉아 원근 측정 기구로, 사람들이 작은 오두막에서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고, 일찍 일어난 일꾼이 천천히 거니는 목초지와 뜰을 연구한다는 걸 떠올려 볼 수 있겠니? 붉은 기와 지붕 위로 한 무리의 흰 비둘기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 사이로 날아오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뒤로는 부드럽고 다사로운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또 수 마일이나 되는 평평한 목초지, 그 너머에는 코로나 Van Goyen의 그림에 나오는 듯한 차분하고 평화로운 잿빛 하늘. 낙수 홈통에 잡풀이 자라난 박공 지붕 너머로 보이는 이른 아침의 이런 정경, 그리고 생활이 깨어나는 첫 번째 표시들, 날아가는 새, 연기를 내뿜는 굴뚝, 그 아래에서 뜰을 천천히 거니는 인물, 이런 것들이 내 수채화의 소재이다.
내가 앞으로 성공을 거두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내 작업--자연의 사물들을 유리창을 통해 찬찬히 관찰하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에 상당 부분 좌우되리라.
너에게 보여줄 드로잉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단지 이것만 생각한다. ‘이 드로잉들이 너에게 내가 한 자리에 정체해 있지 않고,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를.’ 내 작품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본다면, 차차로 내 작품이 다른 사람의 작품들만큼 팔리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 외에는 덧붙일 게 없다. 지금 당장에 그렇게 될지 아니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지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실패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연을 보고 기운차게 작업해 나가는 것이다. 자연을 향한 열의와 사랑은 이르든 늦든 간에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얻기 마련이다. 자연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자신의 지성을 모두 사용하여 작품에 정감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것이 화가의 의무이며,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판매를 목적으로 일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꼭 옳은 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아마추어들을 속이는 일이 된다. 진정한 화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얼마 안 있어 얻게 된 공감은 그들의 진정성에서 온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며, 더 이상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사랑할 사람을 찾으려 애쓴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너의 호의를 남용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내 드로잉들을 팔기 이해 조만간 있는 힘껏 노력을 할 거라는 점이다. 동생아, 몇 년 안에, 아마 그 보다 더 빨리, 차츰차츰 너는 너의 희생의 대가로 어느 정도 만족을 안겨다 줄 나의 작품들을 보게 되리라.
점점 더 나는 예술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매도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직업과 일이 나에게 새롭고 더욱 활기찬 관계를 열어줄 거라는 건, 이 관계는 오랜 편견으로 얼어붙거나 딱딱해지거나, 불모 상태에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거듭 말하거니와 사랑과 지성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과 예술을 향한 자신의 사랑의 바로 그 진정성 안에서 다른 사람의 평판에 대항할 수 있는 갑옷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 또한 엄격하며, 흔히 말하듯 다루기 힘들지만, 자연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우리를 도와서 헤쳐나가도록 한다. 이런 모든 것이 나를 보다 쾌활하고 기운 나게 한다.
테오야, 그 와중에 내 드로잉이 다 말랐구나. 마무리 손질을 좀 해야겠다. 지붕과 홈통의 선들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저 멀리로 쏘아졌다. 그것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그린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아직도 나는 네가 여기에 와있던 동안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빈번히 유화를 그리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네가 나에게 준 것으로 나에게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네가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나는 수천의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화가들이 비용 때문에 계속해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다. 너에 대한 나의 감사의 마음을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므로, 그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두 배로 열심히 작업해야만 한다. 나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중단해야만 했으리라. 근심 없이 일 년을 작업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나는 먼저 열두 개의 수채 물감 튜브가 들어있는 커다란 수채 물감 상자를 구입했다. 커버도 두 개 들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팔레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붓을 여섯 개 넣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건 야외에서 작업할 때 아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정말 절대적인 필수품이긴 하지만, 너무 비싸서 구입을 항상 뒤로 미루고, 지금까지는 그 대신에 포장하지 않은 낱개 튜브를 사서 접시 위에다 놓고 작업을 했다. 이번 참에 수채 물감도 좀 더 사고, 붓도 새로 장만했다.
그 다음으로 유화를 그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다 갖춘 셈이다. 큰 물감 튜브(작은 것보다 큰 것이 훨씬 더 싸다)도 여러 개. 하지만 내가 수채 물감이든 유화 물감이든 단순한 색깔만으로 제한했다는 건 너도 쉽사리 짐작이 가겠지. 황토 (빨강-노랑-갈색), 코발트, 감청, 나폴리 노랑, terra sienna**, 검정과 흰색, 거기다 양홍, 세피아, 진사, 군청, 자황 등은 작은 것으로. 하지만 스스로 혼합해야 하는 색깔은 고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좋은 색깔을 갖춘 실용적인 팔레트가 되리라고 믿는다. 군청, 양홍 등의 색깔은 꼭 필요할 때를 대비해 덧붙여 구입했다. 수채 물감 상자는 유화 물감 상자에 들어가기 때문에, 수채화와 유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한 군데에 넣고 다닐 수가 있다.
우선 작은 것부터 시작하리라.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커다랗게 스케치를 하는 연습을 한 다음에 물감으로 다소 큰 크기로 그릴 작정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원근 측정 기구를 주문했는데, 사구의 평평하지 않은 곳에서도 고정시킬 수 있는 보다 나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대장장이에게 갔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이다. 그는 막대에다가는 강철 눈금을 넣고 틀에다가는 강철로 구석 부분을 보강해 주었다. *****이 기구는 두 개의 긴 작대기로 되어 있는데, 이 작대기에다 튼튼한 나무못으로 가로 세로로 틀을 박아 두었다. 그래서 해변에 있든, 목초지에 있든, 들판에 있든, 창을 통해 보듯이 이걸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틀과 수직 방향의 선들과 수평 방향의 선들, 대각선과 십자선, 그 밖의 사각형들로 분할되는 것 등은 몇 가지 주요한 지점들을 틀림없이 보여 주므로, 이것의 도움으로 굵은 선이 드러나고 균형 잡힌 탄탄한 드로잉을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근법에 대해 약간의 감각을 갖추고 있고, 원근법이 선들의 방향에 명백한 변화와 평면과*** 전체 사물에 있어서의 크기에 변화를 불러오는 까닭과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이 기구는 별로 쓸모가 없으며, 그걸 통해 들여다보면 괜히 어지럽기만 할 뿐이다.
이 기구로 계속 끈질기게 훈련을 하다보면 번개처럼 재빨리 드로잉을 할 수 있으며, 일단 드로잉이 고정이 되면, 번개처럼 재빨리 물감으로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물감으로 그리는 데 있어서는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다. 원근 측정 기구는 정말이지 멋진 제작품이다. 비용은 꽤 들었지만,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작업할 때는 좋은 도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 기구를 바다에, 아니면 푸른 목초지에, 겨울에 눈 덮인 들판에, 아니면 가을에 가늘고 두터운 나뭇가지와 줄기가 환상적으로 뒤엉켜 있는 곳에, 아니면 폭풍우 치는 하늘에다 갖다 대어놓고 작업을 하는 게 얼마나 즐거울지 너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함께 Scheveningen에서 본 것, 모래와 바다와 하늘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는 틀림없이 화폭에 담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것이다.
어제 오후 나는 Laan의 Smulders 종이 도매상의 다락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나는 torchon 지라고 적힌 곳 아래에서 더블 Ingres 지를 발견했는데, 결이 캔버스만큼이나 거칠었다. 상당한 분량으로 오래되어 누렇긴 했지만 질도 아주 좋고 거기다 아주 쌌다. 배달이 안 되어 남은 재고로 목탄화 드로잉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크기도 상당히 큰 축이다.
물론 내가 준 걸 모두 한꺼번에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의 가격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비쌌으며,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따뜻하고 질긴 바지를 한 벌 샀다. 그리고 네가 오기 직전에 튼튼한 신발도 한 켤레 구입했기 때문에, 이제 폭풍우가 몰아쳐도 걱정할 게 없다. 그래서 오는 월요일에는 새로운 기구를 이용하여 커다란 목탄화를 제작에 착수하고, 유화로 작은 습작들을 시작하려 한다. 일 월에 한 번 시도해보았으나 중단해야만 했다. 이유는 드로잉에 너무 머뭇거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육 개월 동안 드로잉에 헌신을 했으니까 뭔가 변화가 있겠지.
내 목표는 이 풍경화 그림으로부터 인물화를 그리는 데 필요하다고 느끼는 몇 가지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재료를 표현하는 것, 그리고 색조와 색채, 한 마디로, 대상의 주요 부분--몸체--을 표현하는 것이다. 네가 와 주어서 그것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네가 오기 이전에도 그것에 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전적으로 흑백과 윤곽선에 좀 더 오랫동안 몰두해야만 했으리라. 그렇지만 이제 나는 배를 진수시켰다.
네가 떠나고 난 뒤 며칠 동안 나는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세 장의 유화 습작을 했는데, 첫 번째는 목초지에 가지를 친 버드나무가 늘어선 장면이고, 그 다음은 이 근처에 있는 석탄재를 깐 길의 습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Meerdervoort 가에 있는 남새밭에 다시 가서 도랑을 낀 감자밭을 보았다. 푸른 덧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감자를 캐고 있어서, 그 사람들도 그림에 포함시켰다. 흰모래로 된 그 밭은 일부는 파헤쳐졌으며, 아직 일부는 열 지어 늘어선 말라빠진 줄기로 덮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푸른 잡초가 나있으며, 멀리에는 암녹색 나무와 지붕이 몇 개.
이 남새밭은 옛날 홀란드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항상 내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다. 이 마지막 습작은 특히 아주 즐겁게 제작했다. 네가 혹 추측하는 것만큼 유화로 그리는 일이 나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것과 굉장한 일체감 같은 것을 느끼는데, 그건 유화가 아주 강렬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화로 부드러운 것을 표현할 수도 있으며, 부드러운 회색이나 녹색도 온갖 울퉁불퉁함 가운데 목소리를 내도록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사구 지면의 거대한 몸체도 유화로 끈적끈적하고 두텁게 칠해 보았다.
이 습작품들은 중간 크기이다. 유화로 더 크게 그리기 전에 더 크게 드로잉을 하거나,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grisailles(잿빛으로만 그리는 장식 화법) 화를 만들 것이다. 어떻게 알아낼 수도 있을 듯 한데.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상당히 많은 유화 습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한 뒤에 화실에다 걸어두는 게 최선책이 아닌가 한다. 내가 그린 유화를 보고 누군가가 의아해 할 때 이렇게 말하리라. ‘아니, 나에게 이런 걸 그릴 정감이 없다고 생각을 했단 말인가요? 내가 그걸 못하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하지만 나는 드로잉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드로잉이야말로 그림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테오야, 유화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그러나 비용 때문에 그리고 싶은 욕구를 그냥 내버려 두기 보다는 억눌러야만 할 실정이다. 물감을 아껴서 쓰지 않으면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동생아, 새롭고 훌륭한 재료를 이다지도 많이 갖게 되었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거듭 거듭 고마움을 표한다. 네가 너의 관대함을 후회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있는 힘껏 애를 쓰리라.
오늘 아침에 해변까지 걸어갔다가, 모래와 바다, 하늘, 작은 어선 몇 척, 해변에 서 있는 두 사람 등을 담은 꽤 큰 크기의 유화 습작을 끝내고 방금 전에 돌아왔다. 그림에는 사구의 모래가 좀 묻었다.
지난 토요일 밤에는 내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것을 화폭에 옮겨 보았다. 원뿔형 건초더미가 놓인 평평한 초록 목초지의 광경이었다. 도랑을 따라 나있는 석탄재 길이 목초지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그림 중앙에 놓인 수평선에서는 태양이 타는 듯이 붉게 지고 있다. 이 그림은 순수하게 색채와 색조의 문제였다. 석양 무렵 하늘의 형형색색의 변화,*** 첫째로 아련한 보랏빛, 그 가운데 붉은 태양은 암자주색 구름으로 반쯤 뒤덮여 있고, 경계 부분은 눈부신 섬세한 붉은 빛, 그리고 태양 근처에는 진사빛의 반영, 그러나 그 위에는 노란 색의 띠, 이것이 녹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우리가 흔히 cerulean blue라고 부르는 푸는 색으로 바뀌고, 거기다 여기저기 구름들은 태양빛을 받아 보라색과 회색을 띄고. 대지는 초록과 회색과 갈색의 융단 같은 느낌을 주는데, 빛의 떨림과 진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색색의 토양 곁에서 도랑의 물은 번쩍이고. 이 모든 광경은 예를 들자면 Emile Breton이 그렸음직한 그런 것이었다.
바다 풍경과 감자밭을 그린 이 작은 두 작품을 두고 아무도 그것이 내 첫 번째 유화 습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는 걸 확신한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이 그림들은 나를 약간은 놀라게 한다. 나는 첫 번째 것들은 실패작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자화자찬 같지만, 이것들은 결코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가 만족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하지만 이 첫 번째 작품들에서 이미 너는 뭔가 가능성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내가 자연을 사랑하고 내 안에 화가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물감과 붓을 산 이래로 일곱 개의 습작품에 매달려 쉬지 않고 있는 힘껏 작업을 했더니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 중에는 인물이 들어간 작품도 있는데, 커다란 나무 그늘에 어머니가 아이와 있는 것으로,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빛나고 있는 사구를 배경으로 삼았다. 거의 이탈리아 적인 분위기를 띈다고나 할까? 정말 내 자신을 억제할 수도, 그림에서 손을 뗄 수도, 쉴 수도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일이 한창 달아올랐을 때는 자신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 극도로 피로한 순간이 온다해도 그건 곧 지나가기 마련이며, 농부가 자신의 곡식을 거둬들이듯이, 자신의 습작품을 거둬들일 때 많은 수확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흑백 협회(the Society of Black and White)의 전시회가 열렸다. Mauve 매형의 드로잉도 전시되었는데, 베틀 앞에 앉은 여인--아마도 Drenthe 지방인 듯--을 그린 것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Israels가 그린 멋진 작품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입에다 파이프를 물고 손에는 팔레트를 든 Weissenbruch의 초상화가 특히 눈에 띄었다. Weissenbruch 씨 자신도 풍경화와 바다 정경을 그린 아름다운 작품을 선보였다. J. Maris는 아주 큰 드로잉에다 도시 정경을 멋지게 담았다. 이런 작품들을 보는 것은 내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걸 배워야 하는 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아주 좋은 자극이 된다.
하지만 나도 이 만큼은 너에게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유화를 그리는 동안에 나는 내 안에서 전에는 갖지 못했던 색채에 대한 힘, 그리고 폭과 농도에 대한 감각을 느낀다.’ 이러한 것은 나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어, 전에는 획득할 수 없었던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효과들이 결국에는 나에게 가장 울림을 주던 바로 그런 것들이다. 앞으로 자연의 뭔가가 나에게 영감을 줄 때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그걸 표현할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나를 아주 기쁘게 한다.
Borinage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이제 꼭 이 년이 되는구나.
일 주일 내내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그런 날씨였다. 그 가운데도 나는 몇 번이나 Scheveningen에 그림을 그리러 갔다. 거기서 두 장의 작은 바다 정경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모래가 약간 묻은 정도이지만, 다른 하나는 바다가 진짜 사구 바로 근처까지 접근할 정도로 폭풍이 몰아칠 때 그린 것이라, 모래가 층을 이룰 정도로 두텁게 묻어 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땅에 다리를 붙이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으며, 날리는 모래 때문에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사구 뒷부분에 있는 작은 여인숙에 들어가 그림을 고정시키려 애썼다. 거기서 일단 모래를 긁어낸 뒤, 생생한 인상을 얻기 위해 이따금씩 해변에 돌아가기도 하면서, 그림을 곧바로 다시 색칠했다.
폭풍 전의 바다가 사실은 분노하는 동안의 바다보다 한층 더 인상적이었다. 폭풍이 치는 동안에는 물결을 그다지 잘 볼 수가 없으며, 그 효과도 이랑을 이룬 밭보다 덜하다. 어쨌거나 이번의 폭풍은 격렬한 것으로, 그렇게 격렬한 데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게 신비로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바다는 더러운 비누 거품 빛깔이었다.
나는 또 숲에서 상당히 큰 습작도 몇 점 그렸는데, 첫 번째 것들보다 좀 더 나아가고 완성도도 높이려고 힘썼다. 내 생각에 가장 잘 된 것은 파헤쳐 놓은 한 무더기의 흙무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억수처럼 비가 온 뒤의 흰색, 검정, 갈색의 모래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원래 자리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큼직한 나무 뒤로 가서 일단 비를 피했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까마귀가 날기 시작하자, 기다린 보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비는 대지에 아름답고 깊은 색조를 부여했던 것이다.
비가 오기 전에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시점을 낮게 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흙에다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해서 쉽사리 버려지지 않는 평범한 작업복을 입는 것이 낫다고 본다. 이 노고의 결과로 나는 그 땅의 한 조각을 화실로 가져올 수 있었다. Mauve 매형이 한 때 자신의 습작품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흙더미를 그리면서 원근감을 살린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고 한 건 맞는 말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이제 매형이 일 월달에 나에게 이야기해 준 걸 실행에 옮긴 셈이다.
숲을 그린 다른 습작은 마른 잎사귀가 덮여 있는 땅 위에 커다란 녹색 너도밤나무 몇 그루에다, 흰옷을 입은 작은 소녀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림을 밝게 유지하면서, 일정하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줄기 사이에 분위기를 연출해내고(나무 줄기들의 위치와 상대적인 크기는 원근에 따라 변한다), 그 안에서 우리가 숨을 쉬고 걸어다니며, 나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녹색의 너도밤나무 줄기가 그다지도 두드러지게 서 있고, 거기다 소녀의 모습도 눈에 확 들어오는 가운데, 노란 잎사귀들이 주는 그 색채감이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가을이 오기를 갈망한다. 그 때 쯤이면 유화와 그 밖의 다른 작품들을 다수 갖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 습작들은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Scheveningen에서 본 것--비가 온 다음 날 아침 사구의 한 부분--도 똑같이 나를 기쁘게 했다. 풀은 짙푸른 빛을 띄고 있었으며, 그 위에 검정 그물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펼쳐져서, 흙빛은 붉은 기가 도는 깊은 검정에다 초록빛이 도는 잿빛 색조를 띄었다. 그 우중충한 땅 위에 그물을 펼쳐 손질을 하는 흰 모자를 쓴 여자와, 남자들이, 어둡고 환상적인 유령처럼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정경 위로는 단색의 잿빛 하늘이 수평선 바로 위에서 밝은 색 띠를 이루며 있었다. 소나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름을 먹인 torchon 지에다 그 광경을 담아보았다.
비가 와서 모든 게 젖어 있을 때 바깥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소나기 하나라도 그냥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되리라.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와 닿는 자연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기념품을 몇 점 갖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감기가 들어 이제 며칠 동안은 집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집에서 방금 전에 좋은 소식을 들었다. 네가 여기에 온 일과, 나와 나의 작업에 대해 네가 가족들에게 말한 것이 가족들에게는 적지않이 안심이 되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의 장점과 단점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럴, 분들이라는 너의 의견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유형이 더 나은 건 결코 아니리라. 나 자신 진심으로 두 분에 감사한다.
이제 두 분은 ‘유화’를 기대하는 눈치인 모양이지. 마침내 그 시기가 된 것도 같다. 하지만 아, 부모님이 그걸 보시면 얼마나 실망할지 두렵기 짝이 없다. 부모님은 물감을 덕지덕지 칠해 놓은 것이라고 밖에는 보지 않으실 거다. 그 밖에, 부모님은 또 데생을 일종의 ‘준비 작업’--나는 이 표현을 요 몇 년 동안에 증오하게 되었다--이라고 여기시면서 어떻게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릇되게 생각하시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은 내가 아직도 전과 마찬가지로 그걸 하는 걸 보면 내가 영원히 그 준비 작업 단계에 답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 내가 작품에 매달려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걸--문질러 지우고, 대상과 비교해 보다가, 또 어떤 지점이나 인물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저렇게 약간씩 되풀이 해 가며 바꾸고 하면서--부모님이 앞으로 볼 때마다, 두 분은 이렇게 생각하시겠지. ‘얘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나 봐. 진짜 화가라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할 텐데.’
어쨌거나 나는 어떠한 착각도 함부로 품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정으로 나의 예술을 이해하는 일은 결코 없지 않을까 하는 게 두렵다. 하지만 그건 부모님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눈으로 똑같은 대상을 보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똑같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부모님은 그림이 무엇인가를 결코 이해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두 분은 노동자의 모습이나, 쟁기질한 밭의 이랑, 모래 언덕, 바다, 하늘의 일부가 진지한 소재이며, 매우 어렵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 뒤에 숨어있는 시정(詩情)을 표현해 내는 일에 진정으로 일생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이해하실 수가 없으리라.
사정이 이렇지 않다면 하고 바라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사정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건, 내 생각으로는, 현명하지 못하다.
가족이 새로 정착한 곳에 관한 너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오래된 작은 교회와, 모래 둔덕과 오래된 나무 십자가가 있는 교회의 안뜰 등을 정말 그리고 싶다. Willemien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녀는 Nuenen 근처의 시골 정경을 아주 깜찍하게 묘사했다. 나는 평소 관심이 아주 많던 베짜는 사람들에 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Pas de Calais에 있을 때 그들을 보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네 편지에는 근처에 히스와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히스와 소나무를 떠올릴 때면 특징적인 인물들, 이를테면 땔감을 모으는 작은 아낙네, 땅을 파는 농부와 함께, 나는 영구적인 향수 같은 걸 느낀다. 간단히 말해 그 단순한 정경에는 뭔가 바다의 장엄함 같은 것이 있다. 나한테 기회가 주어지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시골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나는 한 시도 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도 소재는 많다. 숲과 해변과 근처의 Ryswyk 목초지 등등.
최근에 나는 ‘Gerald Bilders의 편지와 일기’를 읽었다. 그가 불행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종종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는 그에게서 커다란 결점을 본다. 그는 성격상 뭔가 음침한 데가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은 점은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끔찍한 따분함이나 게으름에 관해 불평을 한다는 거다. 그는 너무나 자주 ‘이번 주에는 우울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저런 콘서트에, 아니면 극장에 갔었는데, 갈 때보다 더욱 비참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그는 공감이 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스승 밀레나 Th. 루소, 혹은 도비니의 전기를 읽는 편이 나으리라. 밀레에 있어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어쨌거나,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만 한다’라는 단순한 말이다. Sensier가 쓴 밀레의 책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반면 Bilders의 책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는 내가 시작했을 때 죽었다. 그의 글을 읽으니까 내가 늦게 시작했다는 게 안타깝지가 않다. Gerald Bilders의 인생관은 낭만적이며 결코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sues)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내가 낭만적 환상을 뒤로하고 난 뒤에 출발을 했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해야만 한다. 따라서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환상을 뒤로하는 그 순간에 일은 필수적인 것, 남아있는 몇 안되는 기쁨 중의 하나가 된다. 이것이 나에게 커다란 고요와 침착함을 가져다 준다.
오늘 아침에 나의 유화 습작품을 모두 벽에다 붙여 보았다. 나는 화실에다 그런 걸 두는 걸 좋아한다. 매일 아침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그 그림의 정경을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 나는 즉시 그날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게 되며, 뭔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단번에 생기게 된다. 그리고는 이곳과 저곳 가볼 곳을 떠올리게 된다. 그림들 중 몇 점에는 작은 인물들도 들어있다. 큰 인물화에도 손을 대었는데, 두 번이나 닦아내 버렸다. 네가 그 효과를 보았다면 너는 아마 너무 서두른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이건 성급함 때문이 아니라, 좀 더 갈고 닦으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 잘해서 성공을 거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리라.
유화는 지금까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색조와 형태, 재료 등의 여러 다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유화에는 뭔가 무한한 것이 있어서, 너에게 그다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느낀 인상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 색채에는 조화 혹은 대비의 숨겨진 효과가 있기 때문에 부지중에 결합하여 함께 작용을 하는 데, 다른 식으로 했더라면 그런 건 가능하지 않으리라.
짧은 시간에 이다지도 많은 습작품을 그리게 된 것은 지난 이 주일 동안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네가 내 그림들을 본다면 작업을 지속해 나가리라고 말하리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이 타오를 때뿐만 아니라, 꾸준히 그려나가는 것이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너는 말하리라. 나 자신도 그러고 싶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해 나간다면 작품을 팔지 못하는 동안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게 든다.
내 유화 습작품이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내 데생보다 보다 더 유쾌하게 보인다. 나로서는 더 유쾌하다는 점에 큰 가치를 두지는 않으며,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더 엄격하고 웅건한 대상을 표현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엄청나게 땀을 흘려야만 하리라. 나는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원칙적인 측면에서 잘못되고, 진실에 어긋나며, 그릇된 개념의 작품을 제작하려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보다 더 높고 나은 뭔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습작을 많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이 습작들을 데생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유화로 하는 것이?
데생에 들이는 것만큼의 공을 들인다면, 우리가 보기에 훨씬 더 낫고 훨씬 더 호감이 가며, 동시에 더 정확한 인상을 담은 뭔가를 얻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유화는 데생보다 더 많은 보답을 주는 작업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어쨌거나 당분간은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데생을 한다면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으며, 느리지만 탄탄한 진전을 볼 수 있다. 거기다 나는 이 작업도 마찬가지의 즐거움으로 한다. 너는 작은 드로잉을 수채화로 끝내라고 나에게 이야기했었지. 그렇지만 유화 작업을 함으로써 이전보다 나은 수채화를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목탄으로도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것 같다. 하지만 네가 나의 유화를 보고 그 쪽에서 더 나은 기회를 본다면, 나는 내 야망을 바쳐 유화에 몰두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구나.
경제적인 성공을 가늠하는데 있어서는 네가 아무래도 나보다는 보다 유능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 문제는 나보다 네가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전적으로 너의 결정을 따르겠다. 전에는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지금보다 더 잘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날이 갈수록 더 이상 그런 문제는 모론다는 걸 깨닫는다.
제발 내가 돈을 버는 일에는 무관심하다고 의심하지는 마라. 나는 그 목적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그 길이 진실 되고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나에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에 내 온 힘을 쏟아 붓는 것이 더 나으리라. 특별히 붓놀림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그럼에도 모르겠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숲은 이제 가을로 접어 들었다. 부드러워진 빛이 숲을 밝히고, 사물들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쭉 뻗은 가지의 우아함 속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에는 때때로 부드러운 우수 같은 것이 깃든다. 하지만 나는 보다 억세고 노골적인 측면도 사랑한다. 예를 들면 한낮의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땅을 파고 있는 사람 위에 쏟아지는 강렬한 빛의 효과 같은 것. 일 년 중 이맘때면 해변은 이중적으로 아름답다. 바다의 정경에는 가볍고 부드러운 효과가, 숲에는 보다 음울하고 심각한 색조가 깃드는 것이다. 인생에 이 두 가지가 다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다.
홀란드 그림에서는 내가 아주 드물게 밖에 보지 못하는 색채 효과가 있다. 어제 저녁에 나는 숲속에서 변색되고 말라버린 너도밤나무 잎사귀로 뒤덮인 약간 경사진 땅을 정신없이 그렸다. 나무를 지나느라 한층 부드러워진 가을 저녁의 햇살이 그 갈색을 띈 심홍색 위에 떨어질 때 어떤 양탄자도 그보다 멋질 수는 없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 거이다. 문제는--진짜로 어려운 것 중의 하나였는데--어떻게 하면 그 색깔이 깊이를 얻을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 지면의 엄청난 힘과 탄탄함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그려나가는 동안에 나는 처음으로 그 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빛이 있는가를 인지했다. 어떻게 하면 빛깔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그 풍부한 색채의 작열과 깊이를 보유할 수 있을까? 땅으로부터는 어린 너도밤나무가 솟아나고 있는데, 한쪽은 빛을 받아 눈부신 초록인 반면 그늘 진 쪽은 따뜻하고 짙은 검은 빛을 띤 초록이다.
이 묘목들 뒤, 그리고 갈색이 도는 붉은 색 토양 뒤에는 아주 섬세하고 푸른 빛을 띤 잿빛의 따스한 하늘이 타오르고 있다. 땔감을 줍는 사람들이 몇 명 신비로운 그림자의 어두운 덩어리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마른 가지를 줍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는 흰 모자의 여인이 갑작스럽게 대지의 깊은 붉은 빛을 띤 갈색과 대비되어 두드러진다. 치마 위에 빛이 쏟아진다. 관목 위로 한 남자의 어두운 실루엣이 나타난다. 여인의 흰 보넷, 모자, 어깨, 가슴 등이 하늘을 배경으로 주조한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인물들, 그들은 커다랗고 시정(詩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깊고, 어렴풋한 색조의 박명 가운데 그들은 화실에서 주조한 커다란 terres cuites처럼 보인다.
너에게 자연을 묘사해 보았다. 내가 스케치의 효과를 얼마만큼이나 표현해 내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초록, 빨강, 검정, 노랑, 파랑, 갈색, 회색의 조화에 놀라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de Groux의 작품을 연상시켰다.
유화로 그걸 그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지면을 그리느라 흰 색 튜브를 큰 것으로 하나 반 썼는데도, 지면은 아주 어둡다. 그 밖에 빨강, 노랑, 갈색, 황토, 검정, terra sienna, 고동색 등을 사용한 결과,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색은 고동색에서 짙은 포도주 빛 붉은 색으로, 심지어는 엷은 금빛이 도는 불그스레한 빛깔로 변하는 그런 것이다. 지면에는 또 이끼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는 싱싱한 풀밭도 있는데, 이것도 그려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마침내 네 앞에 스케치가 한 장 놓이게 된다. 이 그림은 얼마간 중요성을 띠고 있으며, 누가 이 그림을 두고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뭔가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림에 뭔가 가을 저녁이라는 느낌, 뭔가 신비롭고, 뭔가 진지한 느낌을 담기 전에는 떠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효과는 머무르지 않으므로 재빨리 그려야만 한다. 그래서 인물들은 몇 번의 강한 붓놀림으로 즉시 그려 넣어졌다. 그리고 그 작은 줄기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나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일단 그것들을 붓으로 칠하기 시작했는데, 칠해놓은 지면이 이미 너무 끈적끈적했기 때문에 붓질로는 뿌리와 나무 줄기를 남기기가 힘이 들어서, 튜브에서 막바로 짜내 그린 뒤에 붓으로 약간 손질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제 나무들은 지면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 솟아올라 서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유화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기쁘다. 유화를 배웠더라면 이런 효과는 지나치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까. 이제 나는 말한다. ‘아니,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요. 어떻게 해야할 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는 해볼 겁니다.’ 정말 어떻게 칠해야할 지 나 자신도 모른다. 흰 화판을 들고 나에게 뭔가를 던져주는 지점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는 내 앞에 놓인 것을 보면서 나에게 다짐을 한다. ‘이 흰 화판은 뭔가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실망해서는 돌아와 그것을 치워버린다. 약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두려움을 안고 다시 그것을 본다. 내 마음속에는 자연의 그 멋진 장면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숨쉬기 때문에, 여전히 실망 스럽다.
하지만 종국에는 내 작품에서 자연이 나에게 뭔가를 던져준 것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자연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며, 내가 그걸 속기로 받아 적었다는 걸 본다. 내 속기에는 판독할 수 없는 단어도 있으리라. 실수와 간극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안에는 숲과 나무와 인물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습득한 방법이나 체계에서 나오는 길들여지고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자체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내 자신이 높은 파도를 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내 있는 힘을 다 바쳐서 유화를 지속해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색채에 대해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더 그 감각이 발전해 나가리라는 것, 또 유화가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뚜렷이 본다. 내 안에서는 엄청난 창조력이 타오르고 있어서 흔히 말하듯, 뭔가 좋은 작품을 매일 같이 꾸준히 제작해낼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올 거라는 것도 감지된다.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으리라. 어쨌거나 내가 뭔가를 그리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거의 없다.
네가 나를 이다지도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있다는 것에 거듭거듭 고마움을 표한다.
화판이나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면 비용은 다시 증가한다. 모든 게 돈이 너무 들며, 물감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 좋은 그림은 많은 물감을 사용하는 데 달려있는 건 아니지만, 힘차게 땅을 그리거나 하늘을 맑게 보이게 하려면 때로는 물감 튜브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소재가 섬세함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또 이따금씩은 대상 자체의 특성상 두텁게 칠할 필요도 있다. Mauve 매형은 J. Maris와 비교해볼 때, 아니 나아가 밀레나 Jules Dupre와 비교해 볼 때도, 아주 수수하게 그리지만, 매형의 화실 구석에 있는 담배통에는 빈 물감 튜브로 가득 차 있다. 그게 어느 정돈지 예를 들자면 졸라가 묘사한 만찬이나 야회(soiree)가 끝난 방 한 구석에 놓인 빈 병의 개수를 능가할 정도이다.
그거야 어찌 보면 모든 화가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이다. 뭔가를 표현해내려면 얼마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지! 하지만 바로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박차를 가한다.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어쨌거나 유화가 내 안의 다른 것들도 간접적으로 불러 일으킨다는 걸 느낀다.
테오 너는 여기에 와있는 동안에, 내가 언젠가는 소위 ‘팔릴만한’ 그런 종류의 작은 드로잉을 너에게 보내는 데 힘쓰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한 무리의 고아들이 그들의 영혼의 목자와 함께 있는 것을 수채화에 담아 보았다. 이 그림은 내가 때로는 유쾌하고 호감이 가는 것, 우울한 정감을 담은 것보다 수집가의 눈을 끌만한 그런 소재를 택하는 데에도 반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Mauve 매형과 다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이런 수채화를 그릴 때 매형은 나에게 몇 가지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해 주었으리라. 그러면 그림은 ‘팔릴만한’ 것이 되고, 아주 다른 분위기를 띠게 되었겠지. 많은 화가의 수채화와 유화를 정말로 다른 화가가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바꿔놓을 수도 있으리라. 나는 종종 여러 가지 다른 의문을 놓고 누군가의 충고를 구하고자 하는 필요와 갈망을 느낀다. 하지만 Mauve 매형과의 일이 있고 나서는 나는 그러한 갈망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내 작품에 관해서 화가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똑하겠지만, 그가 작업을 하는 매개와 어떤 점에서 다르게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매형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화가들도 거의 언제나 실체 색을 사용하여 최상의 결과를 얻으면서도, 매형은 ‘어떤 경우에도 실체 색은 사용하지 말게’라고 말하는 데, 그러지 말고 실체 색의 사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더라면 하고 바란다.
혼자서 투쟁한다는 것이 꼭히 불운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럼 점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데생은 글쓰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어린애가 쓰기를 배울 때, 자신이 그걸 배운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아이들은 배우게 된다. 나는 정말로 데생이 글쓰기처럼 쉬워질 정도가 되도록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아, 동생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큰 규모의 유화에 착수할 것이다. 그리고 모델을 좀 더 두고 싶기도 하다.
오늘은 매주 열리는 월요 시장에 다시 가서, 사람들이 장을 철수하는 동안에 스케치를 몇 장하려 했다. 사람들 때문에 거기에서 유화를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 집에나 자유로이 들어가 창가에 앉아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게 내 뒤에 있던 누군가가, 아니면 아마도 창에서, 내 화지 위에다 씹고 난 담배 즙을 뱉았다. 정말 희한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헤이그 시민들이 화가들에게 보이는 공손함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때때로 영문도 모를 사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리라. 사람들의 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니까. 내가 그들로서는 도무지 뭔지 알 수 없는 커다랗고 괴상망측한 기구를 들고 데생을 하는 걸 보고는 아마도 미치광이라고 생각 했겠지.
북벽(North Wall)에서 감자 시장을 조그만 스케치에 담아 보았다. 배에 실린 바구니를 내리느라 분주한 남녀 일꾼들의 모습은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다. Geest와 Ledig Erf, 그 밖에 인근의 여기저기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왔다. 거기에선 항상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한 번은 토탄을 실은 배이고, 그 다음에는 물고기를 실은 배, 그 다음에는 석탄, 이런 식이다.
이것들이 내가 기운차게 데생하고 유화로 그리고 싶은 그런 것이다. 그런 장면에 넘치는 삶과 움직임, 그리고 사람들의 유형. 그걸 그리려면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이 필요한데, 나는 그것을 커다란 인물 습작 데생을 통해 습득하려 한다.
최근에는 또 말을 데생하느라 아주 바쁘다. 때로는 정말 말을 모델로 삼고 싶다. 어제 내 뒤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저 사람은 이상한 화가구먼. 말을 앞에서 그리지 않고 뒷다리 부분을 그리다니.’ 그 지적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거리에서 이런 스케치를 하는 게 내 적성에 딱맞다. 스케치를 통해 완전함 같은 것에 도달하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욕구는 아름다운 것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전심전력으로 작업하려 무한히 애를 쓴다.
‘월간 하퍼(Harper's Monthly)’라는 미국 잡지를 본 적이 있니? 이 잡지에는 훌륭한 스케치들이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리 작업장’과 ‘강철 작업장’은 진짜 그 솜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두 장면 모두 공장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 밖에 Howard Pyle의 옛날 퀘이커 교도 마을 스케치도 굉장하였다. 나 자신도 그러한 것에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을 제작하리라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새로운 즐거움으로 본다. 조만간 습작을 좀 더 하고 난 다음에는 삽화용 데생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작업을 하다 보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중요한 것은 꾸준히 작업을 한다는 거다.
하루하루가 쏜살처럼 지나가 다시 일요일이다. 산야는 지금이 한창 아름다울 때이다. 나뭇잎들은 초록과 노랑, 붉은 빛 등 가지각색의 청동 빛을 띠고, 모든 게 따뜻하고 풍성하다. 이 며칠 동안 나는 자주 Scheveningen에도 갔다. 바다 풍경을 담은 습작을 하나 그렸는데, 잿빛을 띤 쓸쓸한 모래사장과 바다와 하늘의 일부 만을 담은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러한 고요를 갈망한다. 잿빛 바다에 외로운 바다새가 홀로 날으고, 그 밖에는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소리밖에 없는 그런 고요는 Geest가나 감자 시장의 시끄러운 웅성거림으로부터 변화를 가져다 준다.
하루 저녁에는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는 흥미로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기념비 근처의 작은 목조 건물에서는 한 남자가 앉아서 망을 보고 있었다. 배가 시야에 들어오자 마자, 이 사내는 커다란 푸른색 깃발을 들고 나타났고, 그 뒤를 한 무리의 작은 아이들이 따랐다. 아이들에게는 깃발을 든 남자 근처에 서 있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는 걸 돕고 있다는 상상에 빠진 듯 보였다. 이 남자가 깃발을 흔들고 난지 몇 분 후에, 늙은 말을 탄 사내가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가 그의 임무는 배 곁으로 가서 닻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남자와 여자들이--그 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도 있었다--이들과 합류하여 어부들을 환영했다. 배가 해변 가까이 들어오자, 말을 탄 사내는 물로 들어가 닻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서 어부들은 긴 고무 장화를 신을 사내들의 등에 업혀 해변에 내려졌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도착할 때마다 커다란 환영의 갈채가 있었다. 모두 해변에 다 내려오자, 사람들은 전부 다 양떼나 대상(隊商)처럼 집으로 향했다. 낙타 등에 탄 남자--내 말은 말 위에 탄 남자--는 키 큰 유령처럼 그들 위로 우뚝 솟아있고.
물론 나는 그 여러 사건들을 아주 세심하게 스케치하려 애썼으며, 그 중 일부는 유화로 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단(一團)을 화폭에 옮겨보고 싶다. 하지만 인물들에 생명력과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 또 인물들을 다른 각각의 사람들과 분리되게 제 위치시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건 moutonner이라는 그 큰 문제이다.*** 여러 인물의 일단이 하나를 형성하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머리와 어깨가 다른 사람 위로 솟구치고, 반면에 전면에서는 첫 번째 인물들의 다리가 강하게 두드러지며, 그 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는 다시 치마와 바지가, 선들은 그런 대로 보이는 가운데, 일종의 혼란을 불러오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구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인물이 들어있는 온갖 종류의 장면--시장이든, 아니면 배의 도착이든, 무료 급식소, 역의 대합실, 병원, 전당포 등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든, 거리에서 이야기하거나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든--은 양떼를 그릴 때의 원칙과 똑같은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moutonner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거기에서 차용한 것이리라. ***모든 것이 빛과 갈색과 원근이라는 똑같은 문제에 달려 있다.
마지막 남은 길더마저 달랑달랑한다. 금요일 오후에는 모델을 한 명 썼다. 구빈원 사람인데, 모델료를 주지 않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물감 상자가 부러져서 가욋돈이 좀 더 들어갔다. 석탄 하역 작업을 하는 Rhine 역에서 말 한 마리가 밖으로 뛰쳐나와, 그 말을 피하느라고 높은 둔덕에서 뛰어내린 뒤 소지품을 허겁지겁 챙기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석탄 더미와 그 곁에 있는 말과 짐마차를 그렸다. 그 작은 뜰과 석탄 더미가 너무나도 멋있어서, 물감 비용 때문에 이번 주에는 데생을 할 작정이었지만,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곳은 공공 장소가 아니라서 그림을 그리는데도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그곳에서 종종 작업을 하고 싶다.
너에게 유화 습작을 보내는 문제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이 몇 가지 점에 합의를 보아야만 한다. Mauve 매형 같은 사람--아니 어떤 다른 화가라도--은 자신의 고유한 색채 배합 방식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그러나 누구도 그걸 단 한 번에 획득하진 못한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최근에 그린 바다 풍경은 내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그린 것과 색채가 상당히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너에게 보내는 것으로부터 내 팔레트를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한다. 그림의 색채는 물론 구성도 상당히 바뀔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야외에서 제작한 습작들은 대중에게 보여줄 운명을 타고난 그림들과는 다르다. 후자는, 내 생각으로는, 습작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습작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아니 달라야만 한다. 왜냐하면 습작에서의 화가의 목표는 단지 자연의 일부를 분석하는 것, 바꿔 말해 자신의 생각과 개념을 보다 올바르게 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찾는 것이지만, 그림에서는 화가들이 오히려 개인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Mauve 매형의 습작들도 그것들이 너무나도 성실하게 그려졌다는 것과 수수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습작을 토대로 그린 그림들에 넘쳐흐르는 그런 어떤 매력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일어난 생각이 우리가 그 대상에서 어떤 사실을 찾아내겠다는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볼 때보다 더 건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색채 배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놀라울 정도로 잘 조화를 이루는 색깔이 있지만, 나는 대상을 느낀 대로 제작하는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그걸 본 그대로 그림으로 담아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느낌이라는 것은 엄청난 것이며, 그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습작은 대중의 것이라기 보다는 화실에 더 속한다.
때때로 나는 수확기를 갈망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자연의 연구에 깊이 감화되어 내 스스로가 그림으로 뭔가를 창조해내는 그런 시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상을 분석하는 일은 나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도 아니다.
현재 이곳의 날씨는 좋지 않으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비, 바람과, 천둥을 동반한 날씨가 멋진 효과를 불러온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그 밖에는 다소 쌀쌀하다. 야외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기가 거의 끝나간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겨울이 오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화실을 깨끗이 정리할 것이다. 모델을 두고 작업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벽에 붙여둔 습작들을 떼어내고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다 치워버릴 작정이다. 유화로 인물을 그리는 일은 내 취향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지만, 좀 더 성숙되어야 한다. 기법--때때로 ‘예술의 요리법(la cuisine de l'art)’이라 불리는--을 정확히 익혀야 한다. 처음에는 문질러 닦아내는 일이 많을 것이다. 때로는 새로 시작하기도 해야겠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으리라.
네가 다시 돈을 보내주면 좋은 담비 붓을 몇 자루 구입해야겠다. 내가 알아낸 바로는 그게 손이나 옆모습을 그리는 데는 최적의 데생용 붓이다. Lyon 붓은 아무리 가는 것이라 할 지라도 줄과 획이 너무 넓게 되고 만다. 또 아주 섬세한 나뭇가지를 그리는 데에도 담비 붓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물화 습작품을 상당히 많이 그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대상을 더 많이 그리면 그릴수록, 나중에 진짜 그림이나 데생을 제작할 때 좀 더 수월하게 작업을 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나는 습작을 씨앗이라고 보니까, 더 많이 뿌리면 뿌릴수록, 더 많이 수확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벌써 밤이 깊었다. 지난 며칠 밤 동안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이전처럼 야외에 나가 작업할 수도 없고 그림 그리는 것도 그다지 즐겁지가 않으면, 곧 우울하게 되고 말리라. 하지만 야외에서 활기차게 작업을 하는 것은 기력을 새롭게 하고 유지시켜 주는 비결이다. 내가 견딜 수 없이 비참하게 느끼는 것은 지나치게 과로한 그런 순간뿐이다. 그 밖의 경우에는 내 건강을 되찾으리라고 믿는다.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은 저 모든 아름다운 가을의 정경과 그것에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욕구이다. 하지만 나는 잠잘 시간이 되었을 때는 잘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전혀 뜻밖에도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나를 아주 기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아버지가 직접 오셔서 보시는 게 몇백 배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를 뵙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Ryswyk 로를 아버지와 산책을 했는데,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오래된 십자가가 있는 교회 안뜰하며, Nuenen 이야기를 이번에도 상당히 많이 들었다. 그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무 십자가가 있는 눈 덮인 교회 안뜰을 그리고 싶다. 농부의 매장이나 그와 비슷한 것, 간단히 말해 그러한 장면의 효과를 담고 싶다.
지난 며칠 동안은 수채화밖에 그리지 않았다. Spinstraat 입구에 있는 Moormon 전국 복권 사무소가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비오는 날 아침에 그 앞을 지나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권을 사려고 서서 기다리는 걸 보게 되었다. 대부분은 나이든 여자들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피상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오늘의 당첨 번호’에 그렇게 목을 매는 사람들이 너와 나에게는 다소나마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은 일단의 사람들--기다리는 그들의 표정--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으며, 그걸 스케치해 나가는 동안, 더 크고 깊은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돈’이라는 해묵은 주제를 보게 된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함과 복권을 구입함--아마도 그들은 먹을 것을 사야할 마지막 한 푼까지도 탈탈 털었으리라--으로써 그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그 광적인 노력을 비교해볼 때야 비로소, 복권을 사든 그들의 환상은 심각성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장면을 커다란 수채화에 담고 있다. 그리고 구빈원 사람들(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고아 남자’와 ‘고아 여자’라고 부른다. 아주 인상적인 표현 아니니?)이 자주 가는 Geest 가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본 벤치도 그리는 중이다. 내 생각에는 나들이옷과 평상복을 입고 있는 노인들을 그린 그림들이 네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한다.
고아 남자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모델이 와서 편지를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모델과 함께 작업을 했다. 그는 커다랗고 낡은 오버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이상야릇하게 펑퍼짐한 인상을 주었다. 그가 담배 파이프를 물고 앉아 있는 모습도 그렸다. 귀머거리로, 머리는 벗겨져 이상야릇하고, 커다란 귀에다, 하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내가 현재하고 있는 것들을 네가 좋아하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즉시 내가 인물 습작을 많이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될 거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일 모델을 고용하여 전력으로 작업을 한다. 또 습작품들을 모델 가까이 두는 게 얼마나 유용하고 필수적인 일인가도 점점 더 인식하게 된다. 습작품을 제작한 사람은 그 안에서 모델을 재발견하고, 그것들은 그에게 그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준다. 이번 주에는 수용소에서 여자를 한 명 데려올 것도 기대하고 있지만 돈에 몹시 쪼들리고 있다. 와트먼 지 얼마와 붓을 몇 자루 사야만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때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즈음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중 얼마만이라도 화지에 옮겨야만 될 것 같다는 당위성을 느낀다. 비가 오고 춥지만 정감으로 가득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하늘이 되비치는 젖은 거리나 도로 위에, 두드러지는 색조의 인물들은 특히나 멋지다.
우리가 때로는 자연에 귀먹은 것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자연이 우리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때가 있다는 너의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는다. 때때로 우리는 그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많은 경우 나는 제재를 바꿈으로써 그런 무감각의 상태를 쫓아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나는 점점 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가 전에는 빛의 효과나 풍경의 정감을 잘 드러낸 유화나 데생에 더 감동 받곤 했다는 걸 지금도 기억한다. 인물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따뜻한 공감이라기보다는 차가운 존경심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샹젤리제 거리의 밤나무 아래에 있는 노인을 담은 도미에의 데생(발작 소설의 삽화였다)은 뚜렷이 기억한다. 그 데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나는 도미에의 착상이 정말 힘차고 남성적인 어떤 것이라는 데 너무나도 감명을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저렇게 생각하고 느낀다는 건 틀림없이 좋은 일이야. 생각에 양식을 제공하고, 목초지나 구름보다 인간으로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런 대상들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지나쳐야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항상 영국 데생 화가나 영국 작가들이 그려내는 인물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그건 그들의 월요일 아침 같은 침착함, 심사 숙고한 간결성, 절제와 분석력 때문이리라. 그들에게선 우리가 허약함을 느낄 때, 우리에게 힘을 주는 뭔가 굳건하고 힘찬 것을 느낀다. 프랑스 작가들 중에는 발작과 졸라의 경우에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
도미에의 싼 복제화를 어디서 구할 수 없겠니? 최근에 내가 발견한 ‘술꾼의 다섯 시기(Les Cinq Ages d'un Buveur)’ 복제화나 노인을 그린 그 인물화만큼 아름다운 작품이 더 있다면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다. 우리 두 사람이 작년에 Prinenhage로 가는 길에 그 문제를 두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 너는 Garvarni보다 도미에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지. 요즈음 나는 그의 작품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내가 모르는 부분이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화실의 창 밖으로 방금 전에 아름다운 현상을 보았다. 빛의 지평선을 배경으로 종루와 지붕, 연기를 내뿜는 굴뚝으로 가득한 도시가 어둡고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 두드러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빛은 단지 널따란 띠로서, 그 위에는 어두운 구름이 걸려있었는데, 아래 부분은 말끔했으나, 꼭대기 부분은 가을 바람에 날리어 커다란 장식 술처럼 갈가리 찢기어졌다. 그런데 이 빛의 띠 때문에 도시의 어두운 덩어리 속에서 젖은 지붕들이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토탄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느라 오후 내내 바쁘지만 않았다면, 그걸 그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리려는 시도는 했으리라.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들로 가득 차 있어서 새로운 소재를 그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네 생각을 한다. 여자들과 살고 있는 몇몇 파리 화가들의 특성에 관해 네가 나에게 이야기 해 준 것,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편협된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아니며, 아마도 젊은 분위기를 유지하느라 절망적으로 애쓰는 것이라는 네 말은 내 생각에는 정말 정확한 관찰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가정 생활에서 어느 정도나마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곳이 이곳보다 아마도 더욱 더 어려운 일이리라. 그곳에서는 삶이 더욱 더 급류를 거슬러 노를 젓는 그런 것일 테니까. 파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는지--침착하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절망에 빠졌겠지!
성공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이곳 저곳에서 패배하더라도 낙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쇠퇴의 기미를 느낄 때나,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될 지라도, 마음을 다잡아 먹고 새로 용기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위대한 것은 충동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작은 것들이 함께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대한 것은 우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의 소산이다. 데생이 무엇이냐?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걸 배우지?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듯한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고 지나가는 작업이다.
우리 두 사람은 연극의 장면 뒤를 보고자 하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대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경향이 유화--유화에 있어서든, 데생에 있어서든 화가는 그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를 그리는데 필요한 그런 자질이 아닌가 한다. 어느 정도는 자연이 우리에게 그러한 재능을 선사한 듯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브라반트에서 소년기를 보낸 덕분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우리를 생각하게끔 이끈 주위 환경 덕택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예술적인 감수성이 계발되고 성숙하게 된 것은 이후 일을 해나가면서가 아닐까?
내일 몇 시간 정도 모델을 쓸 예정이다. 가래를 든 소년으로 직업이 호드(주: 벽돌, 회반죽 따위를 담아 나르는 나무통)를 나르는 일인데, 아주 이상야릇한 형이다. 납작코에다 두터운 입술, 거기다 머리칼은 뻣뻣한 직모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움직일 때마다 그 자태에 우아함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양식과 특색이 있다.
나는 재빨리 작업을 하려 하는데, 그게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Scheveningen 해변에서 나는 소년이나 남자에게 잠시 동안 서 있어 달라고--그들에겐 내 말이 그렇게 들리는 모양이다--했다. 결과는 항상 좀 더 포즈를 취하게 할 수는 없는가 하는 커다란 갈망으로 끝났다. 거기다 사람이든, 말이든 단순히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습작이 되려면 적어도 삼십 분 정도는 포즈를 취해 주어야 하는데.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본다. 내 마음속에는 두 가지 것이 진실된 것으로 남아 있으며 서로를 완성시켜 준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억누를 수 없지만, 상상력은 지속적으로 자연을 연구하고 그것과 씨름함으로써 더욱 예리하고 더욱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디킨스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델이 여러분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여러분의 생각과 영감에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수단임에는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번 겨울에는 좋은 모델을 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불경기 때 흔히 그러듯 누군가 일거리를 구하러 오면 나에게로 보내겠다고 목공소 주인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오후나 아침나절을 모델 노릇을 하면 나는 약간의 돈을 기꺼이 주리라.
다시 일요일이 찾아 왔다. 늘상 그렇듯 또 비가 내린다. 이번 주에도 또 폭풍우가 몰아쳐서 이제 나무에 남아있는 이파리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Rhine 역은 그 좋은 예가 되리라. 역위에는 약간 노르스름한 빛을 띤 그럼에도 여전히 잿빛인 하늘, 겨울 색이 완연한 하늘이 낮게 깔리고, 이따금씩은 비가 쏟아져 내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굶주린 까마귀 떼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도 하고. 냉기가 집안으로까지 파고들기 때문에 난로가 작동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리고 담배 파이프에다 불을 붙이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에 축축해 진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날이면 공허감이 밀려와 친구를 보러가고 싶어지지만 실제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고 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 때 나는 사람들의 승인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일이 나에게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삶에 색조를 부여하는지를 깨닫는다. 더 나아가 목표가 있다는 것이 기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날에는 우울하게 되고 말았으리라. 누군가가 인물화를 제작하기를 원한다면 ‘펀치’지의 크리스마스 그림 아래 쓰여진 ‘모두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란 말과 같은 따뜻한 마음씨를 지녀야만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같은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인물화를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가능한 한 그런 마음을 가지려 있는 힘껏 노력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화가들과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화롯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데생이나 동판화를 보면서 서로에게 이런 저런 자극도 주고 할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럽다.
야외에서 일할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겨울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한다. 겨울은 규칙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계절인 것이다. 계속해서 잘 해나가리라는 희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하지만 봄과 여름은 오는 듯 하더니 가버렸다! 아니 때로는 작년 가을과 이번 가을 사이에 시간이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드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 사이 내가 병을 앓았기 때문이리라. 아주 피곤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제는 괜찮다. 몸이 안 좋을 때는 Scheveningen이나 다른 곳으로 장시간 산보를 하는 것이 종종 도움이 된다.
이번 주에 집에서 보낸 소포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상상이 되니? 소포에는 겨울 외투와 따뜻한 바지가 한 벌, 거기다 따뜻한 여자용 외투도 들어 있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르겠다.
벤치를 그린 작은 데생에 대해 네가 한 말, 그게 옛날 방식을 더 많이 차용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다. 섬세한 회색빛 조화로운 색채와 국지적 색조에 대해 단호한 입장 아래 제작된 많은 그림이나 데생들을 내가 열렬히 찬탄하긴 하지만, 이러한 것의 추구에 관심을 덜 두고, 그래서 구식이라 불리는 많은 화가들은, 그들의 방법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지녀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선하고 생기 있게 남을 것이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옛날 방식이나 새로운 방식이나 어느 것 하나라도 배척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아름다운 작품들이 양쪽 방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전적으로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선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가 예술에 미친 변화들이 모든 점에서 나은 방향은 아니다. 작품이나 예술가들 자신에 있어서도 모든 게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출발점과 목표를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많은 새로운 것들이 처음에는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옛날 것보다 오히려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걸 사람들은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러한 것들을 시정할 강력한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스스로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침내 빅토르 위고의 ‘구십 삼’을 다 읽었다. 이 작품은 Decamps나 Jules Dupre처럼 그려졌다, 아니 쓰여졌다.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정감은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새로운 것 가운데에서는 고귀한 어떤 것을 정말 찾아보지 못한다.
Mesdag가, Murillo나 렘브란트 양식으로 그린 Heyerdahl의 어떤 그림을 보고, 테오 너한테서 그 그림을 사는 것이 싫어서, ‘아, 저건 옛날 방식이군요. 이제 더 이상 저런 건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하는 것이, 그 옛날 방식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정도로 좋은 것으로 대체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리라. 그리고 요 근래에 들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Mesdag가 그랬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장하는 까닭에, 누군가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뭔가를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부수기 위해서인가 하는 점을 반추해보는 것도 해될 것은 없으리라 본다. ‘이제 더 이상 저런 건 필요하지 않아요’라는 표현, 그 표현을 얼마나 무심코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 표현은 얼마나 어리석고 추악한 것인지! 안데르센은 그의 동화 어딘가에서 그 표현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사람의 입이 아니라, 동물의 입을 통해 말하게 했다.
춤을 춘 사람은 반드시 악사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테오야, 새로운 것을 위해 옛것을 희생한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해 크게 눈물 흘리지 않을까 두렵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단합을 했던 화가와 작가와 예술가들의 일단이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의 세력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걷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히 안다는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코로와 밀레, 도비니, Jacque, Breton등이 젊었던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홀란드에는 Israels, Mauve, Maris 등이 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뒤에서 받쳐 주었으며, 뭔가 강한 끈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화랑도 더 작았다. 그리고 화실에는 지금보다 아마 더 큰 풍요로움이 흘렀으리라. 꽉꽉 들어찬 화실들, 작은 가게 유리창,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의 ‘목탄의 성실성(la foi de charbonnier),’ 그들의 따뜻함과, 불꽃과 열성, 그들이 정말 얼마나 숭고했는지!
너도 나도 그걸 직접적으로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거기에 한 발 더 다가서게 한다. 그 시기를 잊어서는 안 되리라.
테오 너를 더 자주 보고 내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제작할 수 있으리라. 그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습작들로부터 나아가리라는 게 분명하다. 현재 수채화를 열두 장 가량 제작하고 있는데, 때때로 너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걸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고, 그것들을 더욱 더 직접적으로 유용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요즈음에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그 결과로 너를 기쁘게 할 작품이 몇 점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번 주에는 Rappard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도 모델을 보고 직접 작업을 하는 걸 너무 게을리 하는 많은 화가들의 행동에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의 그림이 Arti 전시회에 거절 당했다. 그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 것이 너는 공평한 일이라고 보니?
동생아, 너에게 한 가지는 약속을 할 수 있다. 다음에 네가 이곳에 올 때는 수채화와 유화 습작품 외에도, 작품첩에 든 백여 장의 데생을 검토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오늘 아침에 우연찮게 데생을 정리하다가, 그러니까 네가 이곳을 찾은 이래로 모델을 보고 그린 습작품들(이전의 습작품들과 스케치북에다 그린 것은 제외하고)을 헤어보니 백여 장이나 되었다. 화가들이 모두, 내 작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는 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작품을 멸시하는 그런 화가들도 포함하여, 나보다 더 열심히 작업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지난 며칠 동안 Herkomer가 현대 목판화에 관해 쓴 강화(講話)의 요약이 머리 속을 뱅뱅 맴돌았다. Herkomer에 따르면 발행자들이 정확하고 정직한 데생은 더 이상 원하지 않고, 효과를 내기 위해 제작된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책 페이지의 볼썽사나운 구석을 덮어주는 ‘약간’만이 필요한 전부라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공공 사건이나 그에 준하는 일을 재현해 줄 것을 요구하므로, 그것이 정확하고 흥미롭기만 하면 예술적인 수준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만족한다고 발행인들은 공언한다. 그 다음 Herkomer는 예술가들에게도 일침을 놓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페이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데생 화가의 몫이 아니라 목각사(木刻師)의 몫이 되어버리고 마는 일이 너무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한다. 그는 화가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재삼 강조한다. 화가가 간결하고 힘차게 데생을 하면 목각사는 자신의 본분에 남아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목각사는 데생 화가의 작품을 옮기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 그의 스승은 아닌 것이다.
이곳에 일반 대중에게 가장 적합한 미술에 대한 열의가 거의 아니 전혀 없다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가들이 합심하여 그들의 작품(내 생각으로는 작품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가장 고원하고, 고귀한 소명이라고 믿는다)이 모든 사람의 손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그래픽’ 지가 초창기 몇 년 동안에 실었던 것과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래픽’ 지는 독자적으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겼을 때, 집을 하나 세내어, 여섯 대의 기계로 인쇄를 시작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전적인 존경심을 표명하며, 뭔가 신성스러운 느낌을 가진다. 나아가 안개낀 런던과 그 작은 작업장의 분주함을 생각해 본다. 더욱이, 몇 개의 화실에 나뉘어져 있는 데생 화가들이 최고의 열의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는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 선하다.
밀레(Millais)가 ‘그래픽’ 첫 번째 발행본을 들고 찰스 디킨스에게 달려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 당시 디킨스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었다. 밀레는 Luke Fildes의 ‘굶주리고 집 없는 사람들’--야간 수용시설 앞에 서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뜨내기--이란 데생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의 “에드윈 드루드” 삽화를 이 사람에게 맡기지요’하니까, 디킨스가 답하기를 ‘그거 좋지’라고 했다.
‘에드윈 드루드’는 디킨스의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그 작은 삽화들을 그리면서 그를 알게된 Fildes는 그가 죽는 날 그의 방으로 들어가다가 그의 빈 의자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해서 ‘그래픽’ 지의 옛날 발행본 중의 하나에는 그 감동적인 데생 ‘빈 의자’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빈 의자들은 지금도 많이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에 Herkomer와 Luke Fildes, Frank Holl, William Small 등이 있던 자리에는 빈 의자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발행인이나 판매상들은 계속해서 모든 것이 괜찮으며, 이전처럼 잘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려 하리라.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재료의 웅대함이 도덕적인 웅대함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후자 없이도 어떤 일이 성취될 수 있다는 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 그들은 얼마나 무감각하고, 얼마나 큰 실수를 하는 것인지! ‘그래픽’ 지의 경우가 그러하듯, 예술의 영역에서는 다른 많은 것들도 그러하다. 도덕적 웅대함이 쇠퇴하고, 재료의 웅대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던 변화가 올 것인가?
그리고 내 생각에는 화가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심하지 않는 듯하다. ‘목판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여기 홀란드의 많은 인쇄업자들이 내리는 정의는 ‘Sough 홀란드 카페의 메뉴 중의 하나’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들은 목판화를 술 종류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목판화를 제작하는 사람을 아마도 술꾼들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몇몇 화가들이 그들이 삽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Garvarni나 Herkomer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흥미롭다.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정보’에 따르면 그 질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 자랑이기라도 한 것처럼!
위대한 데생 화가들, 현재 활동 중인 사람뿐만 아니라 Garvarni 시기의 화가들을 향한 나의 사랑과 존경심은 그들의 작품을 더 많이 알게됨에 따라 증대되었다. 특히 내 자신이 거리에서 매일 같이 보게 되는 장면을 화지에 담아 뭔가 인상적인 것으로 남기려는 시도를 한 뒤부터는 더더욱. 그리고 내가 Herkomer와, Fildes, Holl, 그 밖의 ‘그래픽’ 지의 창립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Garvarni와 도미에보다 나에게 훨씬 더 와 닿는 이유는 후자(後者)가 사회를 사악한 것으로 본 반면에, 그들은 밀레나 Breton, de Groux, Israels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Garvarni나 도미에가 선택한 소재만큼 진실 되면서도, 보다 더 진지한 정감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감은 특히나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성직자나 교회지기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같은 인간을 향해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작품에 사상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것은 나에게는 화가의 의무처럼 보이며, ‘그래픽’지가 겨울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을 일깨우려 뭔가를 했다는 게 내 생각에는 아주 고귀한 일이다.
미술의 영역을 두고 보자면 최고봉에 이미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도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리라는 건 분명하지만, 우리가 이미 본 것보다 더 숭고한 것은 보지 못하리라.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으며, 또 우리 곁을 떠날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밀레, Brion, 루소, 도비니, 코로, 그리고 그 보다 좀 이전의 사람들로는 Leys, Garvarni, de Groux, 또 이들보다 더 이전의 사람들 Ingres, 들라크루아, Gericault 등등. 그리고 현대 미술이라는 것도 이미 얼마나 낡았는지도 생각해 보아라. 나로서는 아마 몇 년 안에 이 분야에 일종의 위기가 닥치지 않을까 두렵다. 밀레 이후로 엄청나게 퇴보했던 것이다. 밀레와 Jules Breton까지는 내 생각으로는 항상 진보를 거듭해왔다. 이전이든, 현재든, 앞으로든 그들의 천재성과 동등한 수준까지는 오를 수 있겠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높은 지대에는 동등한 천재성이야 있지만, 산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에서는 요즈음 아침 일찍 어떤 광경을 보는지 아니? Brion이 Luxembourg에서 그린 그림 ‘홍수의 끝(La Fin du Deluge)’처럼 지평선에 빛이 붉은 띠를 이루고 그 위에는 비구름이 덮여 있는 장면이 정말 멋지다.
이 장면은 나를 풍경 화가에게로 인도한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것들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긴 하지만, 옛날의 풍경화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나를 즐겁게 한다. 일례를 들자면 Schelfout의 작품을 보고 ‘그다지 뛰어난 것 같진 않은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적 방식은 궁극적으로 그런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며, 새로운 것을 오랫동안 보노라면 Sege나 Jules Backhuizer의 소박한 그림을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진보라는 것에 대해 다소간 환멸감을 느끼게 된 것은 정말로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생각 속에 그러한 느낌이 부지중에 싹텄다. 그건 내가 현재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잡지에 실리는 많은 스케치를 보면 상당히 인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우아함이 예전의 Jacque의 스케치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는 그 전형적이고, 진정한 소박함을 대체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것의 원인이 예술가의 삶과 인간성에도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리고 흐린 날 산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니? 또 누군가 화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대부분의 경우 대화가 흥미롭지 못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Mauve 매형의 경우는 때때로 말로써 어떤 것을 생생하게 그려보여 마치 그걸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화가에게 이야기 할 때 받는 그 독특한 탁 트인 느낌 같은 것, 네 생각에는 그러한 느낌이 예전처럼 지금도 강하다고 생각하니?
이곳 헤이그에 명석하고 위대한 인물이 있다는 걸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사정이 얼마나 비참한지! 술책이 난무하고, 그 밖에도 다툼과 시기심이란! 그리고 Mesdag를 필두로 그러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성공적인 예술가들의 인간성에는 도덕적 웅대함을 재료의 웅대함으로 대체하는 그런 것이 분명히 있다. 요즈음에는 모든 것이 성급하고 분주하기만 해 나를 불쾌하게 하고, 대부분의 것에서 생명력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바라던 변화가 올 거’라는 너의 기대가 실현되기를 바라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무리 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제 오늘 팔꿈치를 무릎에다 괴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을 두 장 그렸다. 오래 전에 Schuitemaker가 앉은 포즈를 취해준 적이 있는데, 언젠가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 데생을 지금껏 보관해 왔다. 군데군데 기운 퍼스티언 천의 옷을 입고, 머리는 대머리가 되고만 그런 늙은 일꾼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오늘 아침에는 Blok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Binnenhof에 있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유태인 서적상으로, 그에게 아주 고마움을 느낀다. 그는 벌써 몇 년도 더 지난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때때로 나는 다시 런던에 가고픈 마음이 강하게 일곤 한다. 인쇄와 목판화에 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안에 있는 힘을 힘써 계발해 나가고, 또 불꽃도 꺼트리지 않고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으며, 그 결과가 우울한 것일지라도 놀라지는 말아야 하리라. 이런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그리고 상대적으로나마 보다 더 행복한 운명은 어떤 것일까?
땅 파는 인부들을 데생하느라 바빴다. 뭔가 되기를 바란다. 이곳에는 로테르담의 Elsevier가 발행하는 ‘제비’라는 일반 신문이 하나 있는데, 최근에 나는 땅 파는 인부를 담은 데생 같은 걸 그 신문에 실을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해 보았다. 한 달에 한 페이지는 그렇게 발행되었다. 하지만 로테르담까지 가는 경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집에다 ‘요즈음은 워낙 불경기라서’라는 소식을 안고 가야만 하는 건 아닌가 두렵기 짝이 없다. 그 밖에, 내가 일련의 좋은 작품을 갖게 될 때까지 좀 더 오래 작업을 하고 싶은 것이 내 바램이다. 하지만 돈에 쪼들리는 일이 너무나 빈번하므로, 종종 돈을 벌 궁리를 한다. 어떻게(Que faire)? 앞으로 얼마 안 있어 삽화가에 대한 수요가 현재보다 더 늘어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난 오육 일 동안은 글자그대로 돈 한 푼 없이 지냈다. 나는 내 지갑이 허락하는 한에서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한다. 여기저기에서 구한 모델들을 보고 그린 습작들로 작품첩을 가득 채운다면, 일거리를 구할 때 도움이 될 장구를 어느 정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일례로 Morin, Renouard, Jules Ferat처럼 삽화 일을 지속해나가려면, 상당히 많은 탄약이 필요하다.
브뤼셀에 있을 때 나는 석판 인쇄소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결과는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Simmonneau와 Fouvey는 그나마 문전박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새로 가르친 젊은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또 경기가 너무 나빠서 현재 있는 직원도 남아돌 지경이라고 했다. 내가 de Groux와 Rops의 석판화를 언급하자, 그들은 그 사람들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데생 화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과 다른 시설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석판화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발명은 사람들이 그걸 부활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에 이러한 경과를 몰랐다는 게 매우 안타깝다.
이 새로운 석판 화지는 그 위에다 데생을 하기만 하면, 두 번째 데생 화가나 조각사나 석판공이 다시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이 이 데생 자체를 돌에다 그대로 옮기거나, 그것으로 연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복제화를 그려낼 수 있을 뿐더러, 나중에 제작된 것도 원래 데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게 과연 맞는 말인지? 테오 네가 ‘현대 생활(Vie Moderne)’에 대해 쓴 것, 아니 그 보다는 Buhot가 너에게 약속한 그런 종류의 화지가 나에겐 무척이나 흥미롭다.
Van der Weele라는 화가를 길에서 만났는데, 우리 집까지 나를 보러 왔었다. 나도 그를 보러 가기도 했다. 이 사람 화실에는 좋은 것이 많이 있었다. 그는 나더러 노인들의 많은 습작으로 구성을 해보기를 원했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곳 날씨는 아주 추웠다. 서리에다 눈까지 내렸다. 지금은 어둡고, 잿빛에다, 우울함이 감돌지만, 그게 오히려 모든 것에 non ebarbe의 거친 느낌을 준다.***
오늘은 에텐 시절에 그렸던 옛날 드로잉들을 다시 작업했다. 들판에서 가지를 친 버드나무를 다시 보았는데, 이파리 하나 달려있지 않은 게 작년에 내가 본 것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원기를 되찾고 싶을 때 오래 산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듯이 때로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자연 속의 모든 것에서 표정과 영혼을 본다. 열지어 늘어선 가지 친 버드나무는 때때로 사설 구빈원에 수용된 사람들의 행렬을 닮은 듯하며, 어린 옥수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수하고 부드러운 어떤 것이 있어서 잠자는 아기의 표정을 볼 때와 똑같은 정서를 일깨운다. 거기다 길가의 짓밟힌 풀들은 빈민가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먼지투성이이다. 며칠 전 비가 올 때 나는 얼어붙어서 퍼석퍼석해진 채 뿌리를 박고 있는 흰 양배추들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아침 일찍 커피 판매대 근처에서 보곤 했던 얇은 페티코트에다 낡은 숄을 걸친 한 무리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기분이 우중충할 때, 황량한 해변가를 거닐며, 파도가 기다란 하얀 띠를 이루며 몰려드는, 잿빛을 띤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 웅장한 것, 뭔가 무한하고,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뭔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걸 발견하려고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에는 어린 아기가 아침에 깨어나 요람에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는 목을 울리며 까르르 거릴 때, 그 때 아기의 눈의 표정에서 바다보다 더 깊고, 더 무한하며, 더 영원한 뭔가를 볼 수 있으므로.
우리 둘에게는 언제까지나 브라반트의 들판과 히스의 뭔가가 남아있기를 바란다. 몇 년간의 도시 생활도 그걸 쓸어내지는 못할 것이며, 예술이 그것을 새롭게 강화하기 때문에 더욱더 어려우리라.
Smulders 씨의 인쇄기를 이용하여 작은 노인의 석판화를 만들었다. 지금보다 미술의 이 분파에 대해 전체적으로 보다 많은 열성이 있던 그 시기의 옛날 석판화를 상기시키는 뭔가가 그 안에 담겨져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것은 네가 그 화지에 대해 써보낸 것을 내가 Smulders 씨에게 이야기를 하자, 그 분이 자기가 그 화지를 얼마 가지고 있다고 한 결과로써 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약 삼십 명되는 일련의 인물화를 그리고 싶다. 우리가 우리 경비로 인쇄한 삼십 페이지 정도를, 그것도 밍기적밍기적 거리며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단번에 해낸(sabre)***걸로, 보여줄 수 있다면, 잡지의 발행인의 눈에는 우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데생을 제작하는 것 외에 그런 일에 뛰어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석판화에 더 이상의 실험을 하기에 앞서 현금이 좀 더 생길 때를 기다려야만 하리라. 하지만 그것에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성공을 거둔다면 정말 좋은 일 아니겠니?
이 이야기를 하면 너는 내가 잰 체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Laan 가에 있는 다른 가게에서 일하는 Smulders의 직공들이 노인을 담은 석판화를 보고는, 인쇄공에게 벽에 걸에 두게 복제화를 한 장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단다. 일반 노동자들이 집이나 일터에 그런 복제화를 걸어 두는 것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다. 여러분--대중 여러분을 위해, 진정 이것은 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Herkomer가 진심으로 한 말이다. 물론 데생은 예술적인 가치를 지녀야만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말이 거리에서 흔히 보는 사람이 그것에서 뭔가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걸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첫 번째 인쇄화는 아직 그렇게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지난 주에는 남아있는 인쇄지로 다른 몇 가지 시도를 했다. 며칠 안에 ‘슬픔’의 첫 번째 인쇄화를 우편으로 받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파는 사람’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석판화 첫 시험쇄도 받아보게 될 것이다. 열심히 작업을 했지만, 데생들을 석판에다 옮기고, 인쇄를 하는 와중에 뭔가가 사라져 버려, 원래 데상만은 못했다. 하지만 이 인쇄화를 놓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원했던 뭔가 거칠고 비인습적인 것이 거기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데생에는 있었으나 손실되어 버린 것을 부분적으로는 보충을 해주지 않는가 한다. 이 데생들은 석판화 백묵만 가지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잉크로 마무리 손질을 보았다.
일련의 멋진 작품을 제작해 낼 수 있다면 나로서는 커다란 기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다시 일요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Ryswyk 로를 산책했다. 목초지는 부분적으로 홍수가 져서, 초록과 은빛 색조가 뒤엉킨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면에는 바람에 찢기운 오래된 나무의 거친 검정과 회색 초록의 줄기와 가지, 또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뾰족탑이 솟아있는 작은 마을의 실루엣, 후면 이쪽 똥더미에서는 까마귀 떼가 뭔가를 쪼고 있고, 저쪽에는 커다란 문이 하나. 정말 근사한 광경이라고 생각지 않니?
오늘 아침은 특별히 더 아름다웠으며, 이번 주 내내 데생과 석판화 일을 하느라고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서 오랫동안 산책을 한 것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석판화 일이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오늘 아침에는 인쇄소에 가야만 했다. 이제는 석판에다 옮기는 작업, 석판 준비 과정, 인쇄 등의 전 과정을 다 지켜본 셈이다. 인쇄 자체를 배우고 싶기도 하다. 인쇄 과정은 나에겐 언제나 기적으로 여겨졌다. 꼭 조그만 한 알의 씨앗이 성장하여 이삭이 되는 것과 같은 그런 기적이라고나 할까? 거기다 이것은 매일같이 일어나므로 더욱 위대한 일상의 기적이다. 석판이나 동판에다 하나의 데생을 씨 뿌려두면, 그것으로부터 수확을 거둬들이게 된다.
홀란드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인쇄화를 제작할 수 없다는 말이 늘상 있어 왔다. 나는 결코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으며, 이제는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을 본다. 이 모든 것은 ‘형, 석판화를 잘 아는 Buhot 씨를 만났어. Buhot 씨가 보내주는 화지에다 몇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겠어?’라는 너의 말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동자의 다양한 유형을 담은, 그러니까, 한 삼십 페이지 되는 데생과 인쇄화를 제작하는 그런 기획에 누군가가 착수할 수 있지 않을까? 데생, 석판, 인쇄, 종이 비용 등은 상대적으로 보자면 적은 것이다. 일례로 내가 지난번에 너에게 보낸 데생이나 지난밤에 끝낸 새로운 작품 등은 내 생각에, 특히 이곳 홀란드에서는 필요불가결 하달 수 있는 염가 보급판에 진짜 적당한 것이라고 본다.
내가 재산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리리라. 몸을 사리거나 하는 일도 없으리라. 끈기와 인내가 있으면 이건 정말로 도움이 될 만한 유용한 일이 되리라는 걸 본다. 일반인을 위한 인쇄화 문제를 두고 Rappard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토론을 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관심을 표명하는 범위 내에서 이긴 했지만, 그는 자진해서 ‘필요하면 도움을 주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이 불확실한 기획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를 포함시켜 진행시켜도 되는 것일까?
홀란드 데생이 제작, 인쇄되어, 노동자와 농부들의 가정으로 전파된다는 것은 쓸모 있고 필요한 일이므로, 이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전력을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몇몇 사람이 합심해야만 한다. 협회가 필요한 이유는 데생 화가들만이 이 일에 참여한다면, 그들이 전적으로 경비와 작업 등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므로, 착수한 일이 반도 끝나기 전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은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만 한다.
이 협회는 될 수 있는 한 실용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인쇄화의 가격은 십 센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가장 비싼 것도 십오 센트를 넘어서는 안 된다. 삼십 페이지를 제작, 인쇄한 뒤, 석판, 임금, 용지 가격 등을 지불한 시점에서 발행을 시작하면 될 것이다. 이 삼십 페이지는 함께 발행되겠지만, 낱장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간단한 설명을 담은 아마포 표지 안에 한 묶음이 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판매 수익은 일단 투자를 한 사람들의 돈을 갚은 뒤, 그 다음에는 각각의 데생 화가들에게 지불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면, 그 나머지 돈은 작업을 지속해나가 새로 발행을 하는데 사용될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의무나 유익한 일로 생각을 해야지, 자신들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리라.
돈을 낼 수 없는 회원들은 첫 번째 데생들을 제공하여야 한다. 나 외에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일을 나 혼자서 해낼 것이다. 이 첫 삼십 페이지를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화가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으리라. 나는 나보다 뛰어난 화가들이 스스로 이 일을 맡았으면 하고 바란다.
일반인을 위해서 일반인 가운데 노동자의 유형을 데생으로 옮긴다는 생각, 그리고 이 전체 일이 사랑과, 자비의 일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염가 보급판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러한 생각은 그것이 즉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은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진실되고, 내일도 진실될 그런 것’이라고 인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있어서 첫 번째 의무는 데생에 나의 최선을 다 하는 것이라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고, 그래서 새로운 걸 몇 장 제작했다. 첫 번째는 씨 뿌리는 사람으로, 어두운 대지에다 길다랗고 어두운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는 키가 큰 늙은 사내이다. 이 남자는 깨끗이 면도한 얼굴에다, 코와 턱은 약간 날카롭고, 눈은 작으며, 입은 움푹 들어간 수탉 유형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씨 뿌리는 사람은 밝은 갈색 퍼스티언 상의에다 바지를 입고 있어서, 일렬로 죽 늘어선 가지친 버드나무와 경계를 이룬 흑빛 들판을 배경으로 그 모습이 밝게 두드러진다. 이 인물은 상당히 다른 유형으로 턱수염은 잘랐고, 어깨가 딱 벌어진 게 땅딸막한 편이다. 그의 전체 골격이 들판 노동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어딘지 모르게 소와 닮아 있다. 그 다음에는 목초지에서 커다란 낫을 들고 서 있는 풀 베는 사람이다. 또 사구에서 때때로 만나게 되는 짧은 상의에다, 오래된 높은 실크 모자를 쓰고 있는 작은 노인네 들 중 한 명, 이 분은 토탄을 한 통 집으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활동중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소재를 선택할 때 이 점을 특히 명심해야만 한다고 본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수많은 인물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활동 중인 인물들보다 훨씬 더 자주 그려지곤 하지. 휴식하고 있는 인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항상 우리를 유혹하는 반면에, 인물의 활동을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전자의 효과가 많은 사람의 눈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유쾌’하다. 하지만 이 ‘유쾌’한 측면이 사실을 손상시켜서는 안되며, 사실은 뭐냐하면 인생에는 휴식보다 단조롭고 고된 일이 더욱 많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 특집호로 하퍼 지는 스스로를 ‘타일 클럽’이라 부르는 화가들이 삽화를 넣은 잡지를 발행하였다. 데생 중 가장 뛰어난 것은 Abbey가 제작한 것으로, 주로 예전에 홀란드 인들이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을 세울 당시의 장면을 담은 것이다. 보그턴도 클럽의 회원이거나 아니면 명에 회원인데, 내 생각에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진지하면서도 그렇게 과시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Abbey는 정말 아름답다. 그에게는 그만의 양식이랄까 그런 게 있는데, 그건 부러워할 만한 그런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미국인이라고 모두 나쁘지는 않다는 말에 너도 동의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양 극단(極端)은 만나기 마련이며, 가장 혐오스럽고 구제불능인 수많은 허풍선이와 환쟁이들 외에도, 가시나무 사이에 있는 백합이나 아네모네의 인상을 풍기는 인물들도 있는 것이다. 이 미국인들의 데생을 ‘현대 생활’에 실린 그림과 비교해 보아야 겠다.
어제 우연히 Murger의 책 ‘금주가(Les Buveurs d'Eau)를 읽게 되었다. 그 책은 자유분방한 시기의 정취를 갖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 점이 흥미로웠지만, 독창성과 성실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긴 하지만, 작가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등장 인물로 삼은 화가들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듯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발작(그의 화가들은 별로 흥미를 주지 못한다)과 졸라. 졸라의 Claude Lantier는 생생하기는 하지만, 그가 Lantier보다는 차라리 다른 종류의 화가를 묘사했더라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Lantier는 내 기억에 인상주의라 불리는 그 유파의 누군가의 삶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미술 군단의 핵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진짜 풍경화에다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종종 멋지다고 생각하는 광경을 보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저런 것이 저렇게 그려진 걸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그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무시해야만 한다.
많은 풍경 화가들이 어릴 적부터 들판을 보고 커 온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런 세세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많은 풍경 화가들은 인간으로서는(예술가로서의 그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너나 나에게 만족스러운 어떤 것을 주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어릴 적부터 풍경과 인물을 보아오지 않았느냐고 너는 반박하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린아이일 때에도 마찬가지로 사려 깊었던가 하는 점이다. 또 그것들을 본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히스와 들판과 목초지와 숲과 눈과 비와 폭풍을 사랑했던가? 모든 사람이 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는 않았다. 자연에 대한 그런 지식을 부여해 주었던 것은 그 독특한 환경과 상황이었다. 또한 그것이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준 것은 그 독특한 기질과 성격 덕택이었다.
사실, 풍경화 속의 들판에는 엄청난 간극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명석함이 자신들의 소명의 위엄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한다’라는 Herkomer의 말을 적용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이 ‘우리를 예술적인 배합에서 구해주시오. 우리에게 단순한 들판을 돌려주시오’라고 말하기 시작할 거라고 믿는다. 진실성과 정직성을 유지하려 애쓰며 작업한 루소의 아름다운 작품을 볼 때 얼마나 좋은 느낌을 받는가! 진정한 작품은 자연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그걸 생생하고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많은 화가들에게 결핍된 것이다.
정직한 사람들이 예술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 한 일이라는 걸 아니? 아름다운 작품의 비밀이 상당 부분 진실과 순수한 정감에 놓여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재바름--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며 아주 빈번히 사용된다--내 자신은 그 말의 진정한 중요성을 알 수가 없으며, 아주 무의미한 것에도 적용되는 걸 보았다--이 재바름이 예술을 구해줄 그런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밀레의 자화상이 한 장 있다. 양치기 모자와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머리를 그린 것뿐이지만, 그 눈빛, 반쯤 감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가의 강렬한 눈빛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거기다 이렇게 불러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수탉의 눈처럼 꿰뚫는 듯한 번득임.
‘자신의 일을 찾은 사람은 축복 받았도다’라는 칼라일의 말은 맞는 말이다. 내 생각에는 화가는 자신이 보는 것의 일부를 표현해 낼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리고 소재야 지천으로 널려 있으므로 자신이 무얼 해야할 지를 안다는 건 위대한 것이다. 밀레의 경우에 그랬듯이 일을 향한 분투가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건 더군다나 고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생각을 하기 때문에 혼자라는 느낌도 덜 든다. 내가 이곳에 외롭게 앉아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이곳에 잠자코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는 달리, 내 작품은 아마도 내 친구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무정한 사람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쁜 작품에 대한 불만, 일의 실패, 기법의 어려움 등은 사람을 끔찍스러울 정도로 우울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밝혀두건대 밀레, de Groux, Breton, Dupre와 그 밖의 많은 화가들을 생각할 때 때로는 엄청나게 낙담하고 만다. 이 작자들의 작품의 진가를 실감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직접 작업을 할 때이다. 그리고는 수천 가지의 단점과 결점과, 그것들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과 우울을 꿀꺽 삼키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분투해 나가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귀기울이는 것, 이 모든 것이 화가가 행복하지만도 않은 이유들이다.
자신과의 투쟁,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노력, 기운을 새롭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재료의 어려움들과 뒤엉켜 복잡하게 된다. 도미에의 그 그림은 아름다울 것이 틀림없다. 그다지도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너로서는 낮은 가격에도 그 그림의 구입자를 구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다는 그런 상황이 수수께끼이다. 이것 또한 많은 화가에겐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
사람은 정직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또 정직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다. 일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가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이 쓰지 않고는 일을 해나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두려워 진다. 늙은 문둥이처럼, 멀리서 소리를 치게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와 사귀게 되면 당신은 슬픔과 손실만 얻게될 테니까. 좋은 사업을 제안하러 왔다거나, 커다란 이익을 안겨줄 계획을 지닌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도. 오히려 그 반대로 일이 적자로 끝나고 말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힘을 느낀다. 그는 일을 해야만 하고, 끝을 맺어야만 한다. 그는 침착하고 일상적인 얼굴로 일을 해나가고, 일상적인 삶을 살고, 모델이건 집세를 받으러 온 사람이건 사실 그 누구건 간에 잘 지내야 한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일례로 Borinage를 그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느 정도는 삶을 휴식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들 위험조차 따른다. 그럼에도 할 수 있다면 그 일에 착수하리라. 다시 말해 경비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걸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기획에 흥미를 표명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모험을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단지 너 혼자뿐이므로, 그 일은 뒤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다. 내가 몸을 사리거나 해서 그 일을 포기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잡지들이 피상적인 흐름을 따라 표류하고 있다는 걸 점점 더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잡지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을 만들어 내려 애쓰지 않는 듯하다. 시간도 힘도 들지 않는 것들로 잡지를 채우고, 가끔씩 좋은 것을 실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값싼 기계적인 방법으로 복제를 하고, 나아가 될 수 있는 한 많은 이윤을 챙기려는 것, 그것이 현재 잡지들의 작태이다. 그러한 방법이 현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머지않아 그들은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 와중에 힘겨웠지만 당당하던 시대에는 결코 채용된 적이 없는 인물들이 일거리를 맡고 있다. 졸라가 말한 ‘이류의 승리(le triomphe de la mediocrite)’인 것이다. 속물과 무능력자가 일꾼과 사상가와 예술가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
대중은 한편으로 불만스럽지만, 재료의 위대함이 또한 갈채를 받는다. ‘그래픽’ 지는 요강에서 밝히고 있듯 ‘미의 유형(여인들의 커다란 머리통)’을 실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들이 Herkomer, Small, Ridley 등이 그린 일반인들의 머리를 밀어내고 말리라. 나는 갖가지 일을 존중하며, Obach나 Mesdag도 경멸하진 않지만, 그런 종류의 기력보다 무한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뭔가 좀 더 간결하고, 단순하며, 진지한 것이다. 영혼과 사랑과 따뜻함이 좀 더 들어있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협력하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할 때인가? 아니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잠이 들어 있으며, 그 상태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계속 잘 수 있도록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혼자 책임지면서 힘써 해나가는 것이 더 나은가?
사정이 이렇다고 내가 고함을 지르거나, 그것에 저항하거나 하지는 않으리라는 건 확신해도 좋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이 내 마음을 산란케 해 나 스스로도 무얼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를 지경이다. 때때로 나를 슬프게 하는 건 다음과 같은 점이다. 전에 내가 그림을 시작했을 때는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기만 하면, 이곳 어디에선가 일할 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리라. 그러면 순탄한 길을 밟으며, 생활을 해나갈 방도를 찾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일자리 대신에 일종의 감옥,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오히려 바라기도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요, 당신 작품의 어떤 점은 꽤 마음에 드는 군요. 하지만, 보세요, 당신이 그린 그런 작품은 우리에겐 쓸모가 없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실제 사실입니다.’ (‘그래픽’ 지를 예로 든다면 ‘우리는 목요일에 있었던 일을 토요일에 인쇄하죠’라고 하겠지.) 실제 사실이란 말이 왕의 생일을 위한 삽화 같은 걸 의미한다면 나로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하지만 발행인들이 일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장면 같은 진짜 실제 사실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나는 기꺼이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제작하리라.
예를 들어 영국으로 간다면, 더 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만한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이상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 동안의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이런 희망이었다. 하지만 일이 흘러가는 꼴을 생각할 때면 때로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가능성이 없지 않은 많은 일자리들은 내가 목표로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나를 끌고 가 버리리라. 이런 자리를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채용이 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나를 택한 사람들이 나에게 만족하지 못해 나를 해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진해서 떠나버릴 것이다.
내 안에는 힘이 있지만, 상황이 그걸 제대로 계발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고 만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두고 내 내부에서는 심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데생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편집자들과, 내 자신이 그들 앞에 서야만 한다는 사실--오,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테오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초창기 ‘그래픽’ 지의 사람들이 한 것과 같은 그런 일이다. 거리에서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화실로 데리고 와서, 그들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전광(電光)으로 다색 석판 인쇄를 제작할 수 있나요’라고 묻겠지?
물론 사업상의 그런 사정은 그것이 내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쉽게 만드는가 하는 점에서만 직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지만, 내 생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데생을 제작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울한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더 깊이 빠져들수록 더욱 더 흥미로와 지는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유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할 수는 없지만--그건 내가 그 일을 할 돈이 일을 경우에만 가능하리라--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태를 고맙게 여기고 있지 않다거나, 불만스럽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몇 년 전에 Rappard와 함께 브뤼셀 교외, 사람들이 la Vallee Josaphat라고 부르는 곳을 걸은 적이 있다. 그 지역은 Roelofs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인부들이 한창 작업 중인 모래 채굴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여자들은 푸성귀를 캐고, 농부 한 사람이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그걸 모두 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거의 절망에 빠졌다. 내가 이다지도 찬탄하는 걸 언젠가는 그려낼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그 농부들과 여자들을 즉각적으로 더 잘 그려낼 수 있으며, 끈기를 갖고 작업을 하면 그 당시에 원했던 것을 이제는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Breitner는 로테르담에 있는 고등 학교에 자리를 얻었다. 얼마 전에 나는 그의 정말 뛰어난 미완성 데생을 보았다. 아마 그 작품은 끝나지 않기가 십상이리라. 그런 자리에 취직을 하는 것에는 뭔가 치명적인 것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예술가의 삶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근심과 걱정, 어둡고 칙칙한 측면이리라.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도 위험스러운 일이며, 또 다르게 말하는 순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근심걱정 때문에 사라져 버리기도 하니까.
지난 여름에 겪어야만 했던 곤란은 이제 정말로 사라졌지만, 이즈음엔 심한 치통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때로는 오른쪽 눈과 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신경도 아마 잘못된 듯 하다. 치통이 생기면 여러 가지 것에 무심하게 되는데, 도미에의 데생들은 어찌나 좋은 지 치통마저 거의 잊게 할 정도라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Van der Weele의 화실에 들렀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있는 그 작은 노인의 그림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나는 이 석판화에서 밀레가 믿었던 ‘저 높은 곳에 무언가가(quelque chose la-haut)’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신과 내세가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의 하나로 보인 것을 표현하려 애썼다(하지만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아니 그렇게 생생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했다. 이 작품은 실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의 어렴풋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작은 노인이 화롯가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아마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우리를 무한히 감동시키는 그 표정에는, 썩어 문드러질 수만은 없는 뭔가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 있다.
‘톰 아저씨네 오두막’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아마도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아는 불쌍한 노예가 다음 말을 읊조리는 부분이리라.
걱정은 걷잡을 수 없는 홍수처럼 몰려오고
슬픔의 폭풍우 몰아쳐도
나는 안전하게 나의 집에 다다르리.
나의 하느님, 나의 천국, 내 모든 것.
이건 신학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나무꾼이든, 히스에 거주하는 농부든, 광부든 자기 곁에 영원한 집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감동과 영감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Israeles는 그것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린 적이 있다.
지금은 데생을 두 장 제작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책을 읽고 있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식탁 위에 음식을 두고 식전 기도를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두 장 다 네가 구식 정감이라고 부를 그런 게 뚜렷하다. ‘감사 기도(The Benedicte)’***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두 작품은 상호보완적이다. 한 작품에는 창 너머로 눈 덮인 들판이 내다 보인다. 이 두 작품을 제작한 내 의도는 크리스마스와 한 해가 지나갈 때의 그 독특한 정감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홀란드와 영국 모두, 그리고 브르타뉴와 알자스도, 이러한 정감은 언제나 다소간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러한 종교적 정감의 형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우리가 존중해야할 그런 감정이다. 나로서는 형식이야 변할 지라도 그것은 물론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전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사실 변화는 봄에 이파리가 새로 돋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 데생이 정감이나 표정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내 스스로가 그걸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틀 동안의 크리스마스 기간동안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한 번 이 화실에 있는 너를 볼 수 있다면! 최근에는 열심히 작업에 몰두했다. 앞서 말한 크리스마스 정감이 나를 가득 채웠기 때문인데, 그러한 정감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걸 작품으로 표현해내야만 한다.
현재는 구빈원에서 온 노인의 두상을 두 장 크게 그리는 중이다. 노인은 텁수룩한 턱수염에다 구식 실크 모자를 걸치고 있는데,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인데도 재치가 흘러 아늑한 크리스마스 화롯가에 같이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두상을 크게 그리는 이유는 두개골의 구조를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하고, 관상을 해석해 볼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무척 흥미로우며, 최근에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찾던 것을 몇 가지 발견했다.
이즈음의 자연을 다소나마 즐기기를 바란다. 짧은 겨울 낮의 분위기에서건, 아니면 겨울 풍경에서건.
한 해가 가기 전에 그간의 너의 모든 도움과 우애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구나. 올해가 가기 전에 팔릴만한 데생을 제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말이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새해에는 팔릴만한 데생을 제작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삽화를 싣는 잡지에 일자리라도 구할 수 있을까?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려운 점들을 극복해낼 수 있을 지 없을 지 미리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의 가망성이 닫히면, 아마 다른 가망성이 저절로 열리겠지. 우리로서는 그 가망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 어떤 가망성도, 미래도 있겠지. 정도를 따라가다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오리라. 양심은 인간의 나침반이므로, 침이 때로는 빗나가고, 그것을 따라 길을 가다보면 종종 불규칙적인 어떤 것도 인지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의 방향을 따르려 애써야 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자연과 씨름하는 것은 무익한 일은 아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분명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다.
네가 다시 한 번 화실로 들러 준다면. 네가 혹 내가 답보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두렵기 때문에 특히 더 그렇다. 내 작업은 천천히 발전해 나가고 있으며, 내 목표도 높다는 걸 보게 되리라. 동생아, 너의 변함없는 우애에 고마움을 보낸다. 너의 도움으로 이 한 해도 넘길 수 있었다. 내 쪽에서도 너에게 다소나마 즐거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언젠가는 그렇게 하리라.
지금 현재 여인과 아이들은 내 곁에 앉아 있다. 작년과 비교해볼 때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인은 더 튼실해졌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성미도 많이 사라졌다. 아기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건강하며, 쾌활하기 짝이 없는 작은 녀석이다. 그리고 그 불쌍한 여식애--네가 데생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녀의 이전의 뿌리 깊은 비참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종종 그녀를 걱정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작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아주 상태가 좋지 못했다. 지금은 다소 어린애처럼 보인다.
여자는, 천성적으로 아무리 선하고 고귀할 지라도, 재산이 없거나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현재와 같은 사회에서는 매춘의 늪에 빠지고 말 즉각적이고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런 여인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우리의 삶은 여인과의 관계에 상당 부분 달려있으므로--물론 그 반대도 사실이다--결코 그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성과 추량의 냉정한 빛 아래서는 많은 것들이 불가해하고 어두컴컴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진실된 것이라 우리가 느끼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런 행동을 분별없다거나 무모하다거나 그 밖의 다른 말로 일축해 버리지만, 일단 숨겨진 공감과 사랑의 힘들이 우리 안에서 일깨워질 때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또 감정에 이끌리고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일반적으로 들이대는 잣대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반박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어떤 민감한 신경, 합쳐져서, 특히 양심이라고 불리는 그런 것을 소진시켰다는 결론에 거의 도달하고 만다. 나는 그런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 그들은 내 생각으로는 나침반 하나 없이 인생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조우를 하게 되면, 우리는 갈등에, 특히 우리 자신과의 갈등에 휩싸이게 되고 말 거라는 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과 우리가 저지르고 마는 실수조차도 우리가 감정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달아나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를 더욱 발전시키지는 않는가? 내 생각에, 회피하는 행동은 실제로는 강한 정신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을 나약자로 만들고 만다. 생명을 구하는 것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집없는 사람에게 집을 만들어 주는 것은 선한 일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틀린 일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꼭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황은 작년에 내가 감히 희망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내 가슴은 뿌듯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생각한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여인이 포즈를 취한 데생을 또 하나 제작했다.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올해의 나의 경험은 근심과 걱정으로 힘겨운, 아주 힘겨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사는 것이 없이 지내는 것보다 잴 수 없을 정도로 낫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나가는 것, 그것이 더욱 더 분별 있고 신중한 태도이다. 그러므로 결혼이 가능했더라도***나는 지금과 똑같이 했으리라. 사랑이 그렇게 무르익을 때는 결혼이 부차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더 안전할 뿐더러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겐 나의 집 외에는 다른 집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도 고려에 넣어야만 하리라.***
삶은 정말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사랑은 수수께끼 안의 수수께끼이다. Michelet는 흥미롭게도 ‘사랑은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부서지기 쉽지만, 굵은 밧줄만큼이나 튼튼하게 된다. 물론 서로에게 충실함이 있을 때에만’이라는 말을 했다. 다양함을 원하는 사람은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많은 여자를 알고자 하는 남자는 동일한 한 여자에게 매달려야 한다. 하나의 사랑에도 다른 많은 국면과 변형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이 책도 예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다지도 그녀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진실된 것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의 유대감도 강해지리라.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이들 때문에 짬을 낼 수가 없다.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녀는 실제와 접하게 되고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배우는 것이다. 책과 실제와 예술은 나에게는 거의 같은 것이다. 현실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나를 따분하게 하지만, 현실 바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깨닫고 느낀다.
내가 실제에서 예술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녀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리라. 사정이 달랐더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들었겠지만, 나는 종국에는 있는 그대로에 만족한다. 반추와 분석을 목표로 삼는 남자의 기력과 융통성을 여성들이 생각이라는 측면에서 항상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런데,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고통을 인내하는데 우리들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쏟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고통받으며, 그래서 더 민감하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생각을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 지라도, 누군가가 그들에게 선하게 행동할 때면 때때로 이해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은 기꺼이 그러려고 한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때로 흥미롭게도 선한 면이 있다.
최근에 처음에 여인과 산책을 하던 Geest 가의 그 거리와 뒷골목을 종종 산책하곤 했다. 모든 것이 그 당시 그곳에서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게 작년과 똑같아.’ 너는 환멸을 이야기 했지.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싹이 트고 시드는 시기가 있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완전히 죽지는 않으니까 그렇진 않으리라. 밀물과 썰물이 있지만 바다는 그대로 바다이다. 그리고 여인을 향한 사랑이든 예술을 향한 사랑이든 기진맥진하고 무력한 시간이 있다. 나는 우정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감정일 뿐만 아니라 행동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힘씀과 활동을 요구하며, 그 결과로 기진맥진함과 성마름도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명료하게 생각하는 걸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아주 명료하게 생각하고 이전보다 활동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전과 사랑에 빠진 후의 차이는 불을 켜지 않은 등불과 타오르고 있는 등불 사이의 차이와 똑 같다. 등불은 원래 거기에 있었고, 좋은 등불이긴 하지만, 이제는 빛도 내뿜는다. 등불의 참된 기능은 바로 그것 아니겠니? 그리고 사랑은 여러 가지 것에 있어서 사람을 좀 더 침착하게 만들므로,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데 더욱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Heyerdahl이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의 일상에서 뭔가 아름다운 걸 찾아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도미에라는 분명 찾아낼 수 있으리라.
요 며칠 간 이곳 날씨는 아주 사나웠다. 어제 밤에는 특히 더 심했는데, 바다에는 파도가 몰아쳤으리라.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정체 상태에 빠져있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고, 내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다. 이곳에는 내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현재로선 한 명도 없다. 물론 믿을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은 아니라--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불행하게도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흑백으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목수용 연필로 데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석판화용 백묵으로 그 안쪽과 위에다 작업을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는 노인의 데생을 제작했으며, 그의 벗겨진 머리와 손과 책에 빛이 떨어지도록 했다. 찬탄하는 인물이라면 똑같은 인물이라도 아마 열 가지 다른 포즈로 작업을 해도 괜찮은 어떤 용이함 같은 것이 데생에는 있다. 반면에 예를 들어 수채화나 유화라면 한 인물을 두고 하나의 포즈밖에 그리지 못하리라.
흑백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은 검정으로 칠하는 것이다--‘칠한다’는 용어를 쓴 것은 데생에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인상의 깊이와 색조 가치의 풍부함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색채 화가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 척도가 있다. 흑백의 경우도 그러하다. 가장 밝은 빛에서부터 가장 짙은 어두움까지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단지 몇 가지의 단순한 성분으로. 몇몇 화가들은 데생을 할 때 손이 신경과민에라도 걸리는지, 그들의 기법은 바이올린의 독특한 소리 같은 분위기를 낸다. 예를 들자면 Lancon, Lemud, 도미에가 그렇다. Garvani와 Bodmer는 피아노를 치는 걸 상기시키고, 밀레는 장중한 오르간과 흡사하다.
영국의 많은 것을 싫어한 적도 있지만, 그들의 흑백과 디킨스는 그것들을 모두 벌충하고도 남는다. 현재의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그것과는 거리가 멀지만--그럼에도 지켜졌어야만 하는 그 당시의 좋은 정신의 어떤 것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처럼 보인다. 특히 예술이 그러하고, 삶 자체도 그러하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흑백만이 방향을 바꾸고, 건강하고 고귀한 시작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 모든 분주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회의와 무관심과 냉담함 같은 것이 감돈다.
때때로 나는 일 년전 내가 이곳 헤이그로 왔을 때를 생각하곤 한다. 나는 화가들이 따뜻함과 온정과 무너뜨리기 힘든 조화가 넘치는 동아리나 협회 같은 것을 형성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이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다를 수 있다고는 가정하지 않았다. 그 당시 가졌던 생각들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그 생각들을 수정하고, 현재의 상태와 바람직한 상태를 구분해야만 하겠지만.
이렇게 화합이 안 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화가라면 다른 사회적 야망을 버리고, Voorhout, Willemspark에 사는 사람들의 풍조를 따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낡고, 담배 연기 자욱하며, 어두운 화실에는 아늑함과 독창성이 넘치는 그러한 분위기가 그 대신에 자리를 차지하려 위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았다.
이곳 화가들의 어리석은 짓거리 중의 하나는 그들이 Thys Maris를 비웃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자살 만큼이냐고? 그것은 Thys Maris가 모든 고원하고 고귀한 것의 권화이므로 화가라면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서는 그를 조롱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Maris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안타깝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에게 애도를 표할 것이며, 그런 사람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걸 유감스럽게 생각하리라.
de Bock을 몇 달간 보지 못했는데, 며칠 전에 만났다. 그의 모피 코트로 판단컨대, 아주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이 진짜 잘되어 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네가 보기에 불행해 보이는 사람에게 때때로 연민을 느낀 적은 있겠지? 하지만 잘 나가는 것처럼 가장하고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그런 적이 있니? 그리고 내가 그와 친구와 되려고 애쓴다면, 그는 내가 그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의 신뢰를 얻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리라. 아니 내가 그렇게 되었다 할 지라도, 그는 ‘나는 나의 방향을 선택했으니까, 거기에 전념해야 하네’라고 말하리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겠지. 이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겠니? 그를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에 대해 진짜 연민을 느끼고 그의 많은 작품에 찬사를 보내기는 하지만, 그와 내가 서로 어울린다고 해서 이득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에 대한 견해가 특히나 정반대이고,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정을 포기한다는 건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화실로 돌아와, 쓰잘 데 없는 이야기나 주고 받으며 예술에 대한 진정한 느낌 따위는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칠 때면, 그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 나를 더 우울하게 한다. 진정한 우정을 찾아내 유지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인습이 있는 곳에는 불신이 있으며, 불신은 온갖 종류의 술책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자유롭다고 느낄 수 없다는 바로 그런 이유로 쓰라림이 솟아난다는 건 피할 방법이 거의 없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현존하는 상태에 익숙해지지만, 삼십 년 전이나, 사십 년 전, 오십 년 전의 시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생각에는 마음이 좀 더 편안하리라. 다시 말해, 너와 나 같은 사람은 그 안에서 좀 더 마음이 편안하리라. 앞으로 오십 년 후에는 아무도 이 시기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혹 지쳐 빠진 쇠퇴기나 우리가 흔히 말하듯 ‘가발(perukes)과 크리놀린의 시기’가 그 뒤를 잇는다면, 사람들은 너무나 무신경해져서 그걸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리라. 그와 달리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온다면, 그거야 바라던 바라고 할 수 있겠지(tant mieux).
홀란드의 역사를 살펴볼 때 흔히 ‘가발과 크리놀린의 시기’라 불리던 때도 그 기원을 살펴보면 원칙들을 포기하고, 인습적인 것이 독창적인 것을 대체한데서 왔기 때문에, 그러한 정체의 시기가 오리라고 예상하는 것도 터무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홀란드 사람들은 융성기에는 ‘평의원(Syndics)’이었다. 하지만 소금이 그 향을 잃으면 정체와 ‘가발’의 시기가 오는 것이다.
대략 오십 년이라는 기간이 모든 것이 뒤바뀔 정도의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는 게 나로서는 믿기 어려운 때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일별해 보기만 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르고 지속적인 변화를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얼마되지 않는 힘이나마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전투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지만, 진실되게 참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이 진실되고 굳건하다면, 모든 시기가 좋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활기차게는 될 것이다.
진리는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같은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그러한 일치가 힘을 만들며, 그들이 합쳐질 때, 그들의 서로 다른 기력이 제각각의 방향에서 분투할 때보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개성까지 지울 필요는 없겠지만,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Rappard가 이전처럼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실제로 함께 작업을 하지는 않지만, 많은 것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병을 앓고 난 후 첫 번째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목판화에 대해, 그 중에서도 특히 Lancon의 작품 몇 점에 대해, 또 다시 아주 기운차게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작품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반대로 매우 열성을 보이고 있으니까, 내가 그를 부추기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가 습작을 하러 맹인 수용소에 갔다는 사실은, Herkomer나 Frank Holl 같은 데생 화가를 그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인 결과이다.
올해에 아무것도 팔릴만한 것을 제작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심란해 하거나 하지말기를 바란다. 네가 한 때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지. 지금 내가 그 말을 다시 한다면, 그건 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몇 가지 것에 앞으로는 도달할 것이라는 걸 보기 때문이다. 화상이나 미술 애호가들을 다루는 일에 내가 얼마나 서투른지, 그리고 그게 내 천성과 얼마나 맞지 않은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나로서는 우리가 현재 해왔듯이, 그렇게 계속해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너에게 항상 짐이 되어야 한다는 게 종종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아주 단순한 생활을 좋아하므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집에 빵이 있고 호주머니에는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있으면, 더 이상 뭘 바라겠니? 내 일이 차츰 발전해 나가는 것, 그것이 내 기쁨이다. 거기다 나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더 큰 일을 할 량이면, 경비도 훨씬 더 많이 들게 되리라. 나는 언제까지나, 정말 언제, 언제까지나,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조만간에 내 작품에 관심을 가진 누군가를 네가 발견하게 되고, 그가 정말 어려운 시기에 네 스스로 져야만 했던 짐을 네 어깨에서 내려줄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니?
그 노인의 두상이 전형적이라고 생각한다니 무척이나 기쁘다. 사실 모델이 정말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이번 주에는 두상을, 특히 여자의 두상을 그리느라 여전히 바빴다. 내 의도는 ‘사람들의 두상’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런 습작을 많이 모아두려는 것이다. 습작들은 완성된 작품도 아니고, 신경을 쓰지도 않은 부분도 많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구성된 데생보다 그것이 나로서는 더 마음에 든다. 습작들이 대상 자체를 더욱 더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진짜 습작들에는 뭔가 생명력이 있으며,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대상을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우리가 후에 습작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보다 습작을 더 선호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여러 습작들의 최종적인 결과, 즉 여러 개개 인물로부터 집적된 유형의 경우는 아주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예술이 지향하는 최상의 것이고, 그 경우에 예술은 자연을 넘어선다. 일례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들판에 있는 보통 씨 뿌리는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오늘 폭풍우용 방수모를 하나 구입했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어부의 두상을 오랫동안 생각을 해왔으며, 이미 몇 점은 그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 방수모를 구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서야 하나 구하게 된 것이다. 낡은 것으로, 폭풍우와 파도를 숱하게 겪었으리라. 네가 이 어부들의 두상에서 뭔가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이번 주에 마지막으로 제작한 것은 잘라낸 흰 턱수염이 두드러지는 사내다. 오늘은 석판화 백묵으로 작업을 하다가, 데생 위에다 물을 한 통 부은 뒤, 축축한 그 위에다 연필로 형태를 그려 나갔다.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성공을 거둔다면 그 결과는 동판화와 상당히 유사한 검정의 non ebarbe하고 섬세한 색조를 띠게 되리라.
두상이 다섯 장 든 두루말이를 보낸다. 얼마간 시간을 두고 보면, 그 그림들에서 첫 번째 보낸 두 장과 같은 것을 발견 하리라고 생각한다. 글자 그대로 그 그림들은 대상에서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델을 보고 작업을 했으므로, 그림에는 뭔가 대상의 특징이 들어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도시로 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Geest와 그 주변 지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서히 내 머리 속에서 어떤 형상으로 자리잡아 갔다--그러나 그런 것을 끌어낸다는 게 어찌나 힘든지! 열심히 작업을 해나가 뭔가 좋은 것을 제작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다소 빚을 지게 되고, 돈을 받으면 그 돈의 반 이상을 곧바로 빚을 갚는 데 쓰야한다. 현재보다 더 절약하며 살 수는 없다. 가능한 한 돈을 쪼개어 쓰지만, 특히 지난 몇 주간은 작업이 더 진척되고,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쓰기가 힘이 든다. 다시 말해 그 비용을 감당할 방도가 없다.
다시 눈이 내렸는데, 지금은 녹고 있다. 이 해동기의 겨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유리창 사이로 뜰을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든지 시정(詩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게 그걸 화지에 쓱싹 옮겨놓고 싶은 그런 갈망을 주는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지에 그걸 옮겨놓는 일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 해묵은 추억을 일깨우고, 늘상 보는 것들마저 대형 마차와 4륜 역마차 시절의 이야기들 중의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날씨이다. 대지의 눈과 야릇한 하늘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다. 자연이 모두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흑백’이다.
눈이 녹는 가운데 오늘은 저 멀리서 봄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날씨다. 머지 않아 목초지에서는 종달새가 다시 노래하리라. 봄바람이 실내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작업하느라 생긴 피로감을 날려버려 주었으면 한다. 몇 주 휴식을 취하고, 생각도 바꿀 겸 가능한 한 많이 야외에 나가 있을 작정이다. 습작품들을 수채화에 이용하려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요근래 아주 기운이 없다. 감기에 걸려서 그런 듯 한데, 과로한 것은 아닌가 두렵다.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날 수도 있다는 아주 무서운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때로 눈도 너무나 피곤하지만 그것에는 신경을 쓰지는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눈물샘에서 상당히 강한 분비액이 나와서 눈거풀이 달라붙어 버렸으며, 눈도 침침한 게 좋지 않았다. 눈과 얼굴을 보니 마치 술을 진탕 마시고 논 듯한 모습이다. 물론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정반대이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내가 방탕의 길로 들어선 게 틀림없다고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니? 십이월 중순 이래로 두상을 붙들고 쉬임 없이 씨름하였다. 목욕을 하고, 찬물로 얼굴을 자주 씻어야 겠다.
일의 ‘앙금,’ 과도한 작업 뒤에 따르는 우울은 얼마나 비참한지! 그 때 삶은 개숫물 색깔에서, 잿더미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날에는 친구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때로는 그것이 납빛 안개를 씻어내 준다. 하지만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Schenkweg에서 땅 파는 사람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을 스케치에 담는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좋지 못하다. 또 몇몇 인물을 크레용으로 그린 뒤, 전체를 스펀지로 닦아 내고, 그림자를 좀 더 부드럽게 하고, 밝은 부분도 손을 좀 보고 했더니 좀 나아진 듯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화가의 삶에 있어서 첫 번째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작업에 통달할 수 없을 거라는 느낌과, 통달할 수 있을 지 없을 지에 대한 불확실성, 발전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커다란 야심 등등으로 부지중에 그 시기를 아주 어렵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화가는 초조감 같은 것을 떨쳐 버릴 수 없으며, 서두르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서두르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겪고 지나가야 할 시기이다.
습작품에서도 화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침착하고, 폭넓은 붓놀림과는 정반대로 신경과민과 메마름 같은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화가가 붓놀림의 폭넓음을 획득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해도 별 성과는 없다. 초기에 화가가 안게 되는 이러한 난점들이 습작품들을 어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른 화가들이 나중에 이것을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것을 보아왔음으로, 이것에 너무 낙심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때로 어떤 화가는 일생 동안 고통스럽게 작업을 해나가기도 하지만,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거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때로는 실험을 하고,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좀 더 과감하게, 작업을 해보려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모델로부터 직접 인물을 좀 더 연구하는 게 급선무리라.
아버지께 데생을 한 장 보내 드렸다. 노인을 담은 첫 번째 석판화 스케치에 대한 아버지의 몇 가지 제안에 따라 제작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아버지가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취향을 아니까,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일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봄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며칠은 진짜 봄날 같았다. 일례로 지난 월요일은 아주 유쾌하게 보냈다. 내 생각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화가들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이런 느낌을 공히 갖는 듯 하다. Geest와 같은 동네와 구빈원이라 불리는 그러한 건물들에는, 겨울이 언제나 어렵고, 사람을 옥죄고 불안하게 하는 그런 시기인 반면 봄은 구원의 시기인 것이다. 주의를 기울이면 이러한 봄의 첫날이 복음과 같다는 걸 알게 되리라.
그리고 그렇게나 많은 잿빛 시든 얼굴들이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문 밖으로 나와 봄이 거기에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려는 듯 한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도 하다. 그래서 시장에는 온갖 사람들이, 예상치 않은 사람들까지도, *** 크로커스와 모닝 스타와 다른 구근식물을 파는 장소 주위에 모여든다. 때로 나는 정부의 말라빠진 말단 서기도 보곤 한다. 기름때가 꼬장꼬장한 옷깃에다 실이 다 드러나 보이는 검정 코트를 입은 Jusserand***가 틀림없는 이러한 사람이 아네모네를 볼 때의 반응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봄을 느끼긴 하지만, 잘사는 중산 계급에게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마음가짐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막노동을 하는 인부라면 어떻게 이야기 했을까? ‘겨울 동안 나는 겨울 옥수수만큼이나 추위로 엄청 고생을 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석양 무렵에 Bezuidenhout나 숲가를 따라 걷노라면 은빛 테두리에 둘러싸인 어두운 구름을 보게 되는데, 정말 멋지다. 너도 아주 오래 전에 그걸 본 기억이 날 것이다. 화실의 유리창에서 보아도 아름답다. 그리고 이따금씩 대기 중에 뭔가 향기로운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쉬어야만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쉴 수가 없다.
목초지의 색깔은 Michel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노란빛을 띤 갈색의 토양, 여기 저기 웅덩이가 있는 진창길에는 시든 풀들이 자리하고, 검은 나무 줄기, 잿빛의 흰 하늘, 그리고 멀리 있는 집들은 제 색조인데, 다만 지붕의 빨간 색에는 약간 색채를 가미하기만 한다면. 이즈음엔 몽마르트도 Michel이 그린 이러한 이상야릇한 인상을 풍기리라. 이러한 인상은 놀라운 것으로, Michel의 비밀은 (Weissenbruch와 같이) 정확히 측정을 하고, 후면부에 대해 올바른 전면부의 비례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원근법에서 선이 진행되는 정확한 방향을 느끼는 것 등이다.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아주 값진 과학적 방법이 놓여 있다. 이 보다 훨씬 단순해 보이는 작품들, 예를 들자면 도미에의 작품들, 뒤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내 생각에는 Michel도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당황하고 실망한 적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눈이 좋아지지 않으면, 찻물로 씻어보아야 겠다. 하지만 점차 나아지는 듯도 하니까, 현재로서는 그냥 두고 있다. 눈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냥 두고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하다. 최근에 들어서는 사실, 처음보다는 오랜 시간 데생을 해도 눈이 그다지 피로하지 않았다. 물론 지난 여름에 치통 때문에 고생한 때는 제외해야겠지. 그래서 나는 이게 과로와 긴장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이번 주에는 규칙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몇 주전에 Fritz Reuter의 ‘감옥에서’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는 성에 감금된 Fritz Reuter와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될 수 있는 한 안락하게 하고, 그들을 지키고 있는 소령으로부터 몇 가지 특권을 얻어내는 방식이 재치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책은 집주인을 독촉해 몇 가지 개선책을 얻어낼 묘안을 나에게 제시했다.
화실에는 창이 세 개 있어서, 판지로 덮어도 빛이 너무 많이 들어 온다.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집주인은 내가 돈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방법을 달리한 결과, 셔터 여섯 개와 길다란 판지 여섯 개를 얻게 되었다. 셔터는 완전히 톱질을 해서, 위쪽 반과 아래쪽 반이 공히 열렸다 닫혔다 할 수 있으므로, 빛이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들어오게도 못 들어오게도 할 수 있다. 판지는 반침에 있는 커다란 벽장에 사용할 것인데, 데생과 인쇄화, 책 등을 따로 넣고, 다른 블라우스와 재킷, 낡은 코트, 상의 모자 등을 거는 데 요긴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구입할 때 붙어있던 고기 비늘이 아직도 남아있는 방수모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즈음 신식 주택들은 건축가들이 조금만 더 아늑하게 지으려고 애를 썼더라면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볼품이 없다. 매력은 점점 더 사라지고, 뭔가 차갑고, 기계적이고, 조직적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떤 여인이 작은 방에서 뭔가를 뒤적이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뭔가 전형적이고 신비로운 것이 있어서, 그 동일한 여인을 화실로 데리고 오면 그러한 느낌이 사라져 버릴 때, 정말 망막함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노인도 내 화실보다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훨씬 더 아름다운 인상을 풍긴다. 정말이지 울화통 터지게 하는 일이다.
이제는 아주 다른 빛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유리창 1번은 아래쪽은 닫고, 나머지는 구빈원에 있는 작은 방의 문처럼 부분적으로 닫는다. 유리창 2번은 위쪽은 닫혀진 상태로, 이 유리창 앞에 인물이 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왼쪽 배경은 어두운데, 그것은 유리창 3번을 완전히 닫았기 때문이다. 셔터가 없어서 세 개의 유리창이 이 순간에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것과, 지금 현재의 상태의 차이점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내가 얼마나 더 잘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너도 상상이 될 거다. 거기다 예전에는, 반사광이 너무 지나쳐서, 모든 효과를 중화시켜 버리곤 했다. 이제 다른 집에서 어떤 인물을 한 명 보게 되면, 집에서도 그 인물을 쉽사리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전에 사용하던 차양을 많이 손 보아야만 했기 때문에 비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더 들었다. 화실이 상당히 바뀌었다는 게 짐작이 가겠지. 정말로 기쁘다. 어떻게 손을 쓰야할 지를 몰라서 상당히 걱정했었는데.
오늘밤에는 방수모에다 방수포를 입은 어부들을 꿈꿀 듯 하다. 빛이 그 위에 떨어져서 그 부분을 두드러지게 해, 형태가 선명해 지리라.
어제 오후에 대충 그린 듯한 수채화 한 점을 너에게 보냈다. 하지만 몇 달 전에 그걸 시작했다. 그 이후로, 상당히 많은 수의 인물 습작을, 특히 두상을 중심으로, 제작했는데, 너에게 보낸 수채화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장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작품은 두상과 손과 다리 부분에 개성과 어떤 효과를 부여할 수 있으면 끝나게 될 것이다. 내가 그걸 보내는 까닭은 내가 제작한 다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이 작품에서 내가 색채에 대해 예리하고 뛰어난 눈--잿빛 흐릿함 사이로 그것을 신선하게 볼 수 있는--을 갖고 있다는 걸 보다 명료하게 네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완성이고 결점 투성이이긴 하겠지만, 내가 Geest나 유태인 지역에서 표현해 보이고자 했던 거리의 일부이다. 내가 보는 모든 장면을 그렇게 끝낼 수 있고, 색채와 색조의 상당히 강한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두상을 그린 커다란 습작품들은 이런 작품과 같은 구성에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수채화의 많은 부분이 붓놀림이 얼마나 재빠르고 숙달되었는가에 달려 있으므로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조화를 얻어내려면 작품이 마르기 전에 작업을 마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렇기 때문에 반추하거나 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주된 관건은 각각의 습작을 그 때마다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능력을 좀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십 혹은 삼십 명의 두상을 재빨리 하나씩 차례로 화판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Whistler는 ‘그래요, 이 그림을 두 시간만에 끝냈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몇 년간이나 매달렸는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했지.
수채화를 지속적으로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걸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전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달 동안 데생을 한 뒤에 내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낚싯봉을 던지듯이 이따금씩 수채화를 몇 점 제작했다. 매번 나는 몇 가지 장애물을 극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 화실을 개조한 후 명암(clair--obscur)의 효과를 이제 더 잘 연구할 수 있으며, 앞으로는 흑백 데생의 경우도 붓으로 더 많이 작업을 할 작정이다. 어두운 부분은 중간 색조, 세피아, 인디아 잉크, Cassel earth 등으로 덧칠하고, 밝은 부분은 아연백으로 강조할까 한다. 하지만 봄이 오고 있으므로 유화에 다시 착수하고 싶은 마음도 인다. 그런데 물감을 정말 다 써버렸고, 돈을 꽤 많이 쓸 데가 있어서 현재는 정말 한 푼도 없는 상태이다.
작년에 네가 단단한 크레용 한 자루를 갖다준 게 기억나니? 그 크레용에는 영혼과 생명이 있다. 반면에 Conte 연필은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바이올린 두 대가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연주를 해보면 우리는 때로 한 쪽 바이올린에서 다른 쪽에서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음색을 듣게 된다.
오늘 조금 남은 그 크레용으로 스케치를 또 하나 한 뒤, 그걸 세피아로 덧칠했다. 이 데생들을 제작할 때 네가 준 암시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이 작은 작품들이 네 취향이 아니더라도 실망하거나 하지는 마라. 크레용에서 자연의 대상들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방편이 될 만한 갖가지의 자질을 찾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에는 시 바깥 Maris가 처음에 살았고, 쓰레기 하치장이 있는 Zuidbuitensingel너머 목초지로 산책을 갔다. 거기서 나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중에서 가장 형편없이 뒤틀리고, 옹이 지고, 초라하게 보이는 가지친 버드나무들이 열을 이루고 있는 걸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바라다 보았다. 이 나무들은 금방 파일군 야채 밭뙈기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더러운, 아주 더러운 작은 도랑이 이 나무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도랑에도 봄의 풀잎들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친 갈색의 나무 껍질과 비옥함이 느껴지는 금방 가래질한 흙, 이 모든 것에는 어둡고 깊은 색조 가운데 뭔가 강렬한 풍요로움이 있었는데, 그게 또 크레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걸 좀 더 손에 넣게 된다면 풍경화를 한 번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더 이상 석판화로 노동자 유형을 제작하려던 계획에 대해 전처럼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그걸 마음에 품고 있다. 최근에 Smulders 씨와 석판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거리를 가다가 그를 만났는데, 석판화를 다시 제작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기는 하지만은 Rappard와 그 문제를 상의해야만 한다. 그가 나를 보러 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와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는 건에 합의를 하고, 작품이 괜찮으면 석판화로 만들었으면 한다. 하지만 먼저 그가 내 습작들을 보아야 한다. 나는 씨 뿌리는 사람, 풀 베는 사람, 빨래통 곁의 여자, 여자 광부, 침모, 구빈원 남자, 거름이 가득한 외바퀴 손수레를 밀고 있는 사내 등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데생으로 옮긴다고 해서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게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래, 그 똑같은 것을, 하지만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나은 걸로’하고 말한다.
밀레, 코로, 도비니의 작품을 모사한 Emile Vernier의 석판화에서는 내가 높이 평가하는 자질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을 단순히 복제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고, 석판화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잘 이해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물리가 트인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있다. Brion이 그린 삽화들은 아주 뛰어나고 적합하다. 이런 좋은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여러모로 좋다. 정감이나 생각, 특히 인류를 향한 사랑의 감정, 그리고 뭔가 더 높은 것, 간단히 말해 저 높은 곳의 뭔가(quelque chose la-haut)에 대한 믿음과 의식을 살아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기반은 인류를 향한 사랑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것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것들에 별반 관심이 없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옳다고 판명된 그 오래된 기반이 나에게는 충분하다.
오늘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그 책에 빠져 있었다. 그리곤 해가 질 무렵에 화실로 들어왔다. 나는 창으로 어두워가는 널찍한 전면을 내려다 보았다. 파일군 뜰과 밭에서는 아주 짙은 빛깔의 따스한 검은 흙이 빛을 발하고, 그것과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지른 곳에서는 좁다란 누러스럼한 모랫길이 초록빛 풀과 늘씬하다 못해 홀쭉한 포플러와 경계를 이루고, 그 너머에는 역의 둥근 지붕과 첨탑들과 굴뚝들이 눈에 띄는 도시의 잿빛 실루엣, 그리고 바로 그 위, 지평선과 맞닿은 곳에는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정말 위고 소설의 한 페이지를 보는 듯 했다.
어제 아침에 Van der Weele에게 들렀다. 그는 땅 파는 사람, 말, 모래 짐마차 등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잿빛 아침의 어렴풋함을 담은 색조와 색채 모두 아름다웠다. 데생과 구성은 남성적인데다가, 스타일과 개성이 넘쳤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그의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로 강렬한 작품이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게 뭔지 아니? 너도 기억하겠지만 Van der Veele가 지난 겨울에 나를 보러 왔었다. 그 당시 나는 땅 파는 사람 습작들을 제작하던 중이었다. 그가 그것들을 보긴 했지만, 별로 흥미를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큰 그림을 제작할 때 땅 파는 사람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그들이 작업 중일 때 그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땅 파는 사람들을 직접 세밀하게 연구했던 것이다. 이제 내 습작들을 보다가 땅 파는 사람들에 이르자 그가 몇 달 전에 이야기 한 것과는 아주 다르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도 이런 저런 점이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더욱 더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직해지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생각을 철회해야만 한다.
그림의 위대성과 통일성을 습작품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습작품은 두드러지지도, 제자리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내 습작품을 볼 때 이러한 점을 명념해 주기를 바란다. 내 말은 내가 대상을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Van der Weele나 다른 누구와 다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는 거다.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 그런 측면이 가장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내 습작품이 훌륭하다면, 나머지 부분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내가 공간, 분위기, 폭넓음 등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니? 첫째는 기반을 닦는 것이고, 그러면 머지 않아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지 않겠니?
생일을 축하해 주어서 고맙다. 우연찮게도 그날은 아주 유쾌한 날이었다. 그날 훌륭한 모델감이 될만한 땅 파는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때로는 내가 단지 서른 살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로 본다는 것, 그리고 뭔가 눈에 띌만한 좋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할 때면, 내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든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엔, 그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져, 정말 그런 것처럼 낙담하고 만다. 보통의 좀 더 침착한 상태에서는, 삼십 년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때때로 기쁘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미래와 관련해서 뭔가를 배웠다는 것도. 앞으로 삼십 년은, 만일 내가 그렇게 오래 산다면, 지속해 나갈 힘과 기력을 느끼며, 진지하게 작업을 해나가야 할 내 앞에 놓인 세월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 후반의 삼십 년은 첫 번째 삼십 년보다 행복하리라. 실제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만 달려있지는 않다. 세상과 상황이 또한 협조해 주어야만 하리라.
노동자에게 있어서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안정된 시기의 시작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고 활기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의 한 시기가 지나가 버렸고, 어떤 것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 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회한을 느끼는 것은 싸구려 감상이 아니다. 하지만 삶이 줄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것을 삶으로부터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삶은 단지 씨를 뿌리는 시기일 뿐이며, 수확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명료하게 보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견해에 무심해 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확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일이 점점 더 활기를 띠고,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듯, 나를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거기다 나는 능동성도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능동성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일이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경우에도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 일의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기운을 두 배는 북돋우리라. 너는 편지에다 ‘때로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썼다. 나도 종종 너와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 가지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도 그렇고, 전반적인 삶도 그렇다. 너의 그러한 느낌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기개와 기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순간들에 맞닥뜨리게 된다고 생각지 않니?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고뇌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들. 그것은 모든 의식 있는 인간 삶의 조건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갖고 있는 사람이 불행한 것은 아니며,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너의 충실한 도움에 내가 안고 있는 이 엄청난 빚을 얼마나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지 너는 모르리라.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어려운 일이다. 내 데생이 아직 내가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나에게는 항구적인 실망의 원인으로 남는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실을 조작하여 짜 넣어야 하는 직조공은 그걸 심사숙고할 시간이 없다. 그는 그걸 설명하기보다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더 많이 느낀다. 너도 나도 함께 이야기를 해 어떤 확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 뭔가가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서로 강화해야 하리라. 그리고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매우 따뜻하고 쾌활한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이십오 길더도 동봉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던 돈을 받게 되어서 나와 나누고 싶었다고 쓰셨다. 그런데 부지중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누군가로부터 내가 매우 어렵다는 걸 들은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돈을 보내신 동기가 이게 아니길 바란다. 내 상황에 대한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종 내가 크리서스만큼이나 부유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 일에서 내 심장과 영혼을 바칠 수 있는 뭔가, 또 삶에 영감과 열의를 주는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기분이 변한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의 평균적인 평정심을 유지한다. 나는 예술에 어느 정도의 믿음, 확신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강한 흐름이 되어 사람을 항구로 들어오게 해준다. 물론 그도 그의 몫은 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내 삶에 우울한 날도 있으나, 자신의 일을 발견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므로 나 자신을 불행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델과 식대와 집세에서 시작해서 물감과 붓까지--그것은 다른 실은 따로 분리해 두어야 하는 베틀과도 같다--비용이 너무나 들기 때문에, 착수할 의욕이 생기는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에 비해서 나는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것을 견뎌 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데생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는 그 이유 때문이라면, 그리고 혼자인 경우에는 그 아래로 거의 가라앉기 십상이라면, 왜 화가들은 군대의 일반 사병들처럼 함께 작업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지 않는 걸까? 거기다 왜 비용이 가장 적게 되는 미술의 그 두 분야가 특히 그렇게나 많이 경멸을 받아야 하는 걸까? Israels의 대형 동판화 두 점,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남자와 노동자의 집 실내를 그린 두 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Israels가 동판화를 계속해 나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포기를 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스승 Israels는 희끗희끗한 머릿결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엄청난 발전을 지속할 정도로 아직도 젊다. 나로서는 이것이 진정한 젊음이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기력이다. 제기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해냈더라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홀란드 동판화로 가득할 텐데!
이십오 길더로 수채화 도구들을 재정비하는 데 쓸 작정이다. 최근에는 인쇄용 잉크로 작업을 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먼저 테레빈 유와 섞어 묽게 한 다음 붓으로 칠하는데, 아주 짙은 색조의 검정을 띤다. 그것에 아연백을 섞으면 훌륭한 회색을 띤다. 그리고 테레빈 유를 좀 더 첨가하면, 아주 얇게 덧칠할 수조차도 있다. 재료 가격이 끔찍스러울 정도로 껑충 뛰곤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걸 포기하게 하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든다. Leurs에게도 돈을 지불해야 하며, 화실의 여러 가지 것을 정렬하여 좀 더 실용적으로 만들도록 해야겠다. 수부가 자신의 배를 사랑하듯 나는 내 화실을 사랑한다.
네가 보내 준 크레용과 석판화용 백묵을 이용하여 커다란 데생을 제작했다. 땅을 파는 사람으로, 모델은 구빈원에서 온 작은 노인이었다. 검은 대지를 향하고 있는 그의 벗겨진 머리는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너는 네 얼굴에 흘러 내린 땀으로 빵을 먹으리라’ 같은 것. 가래를 들고 있는 여인과 이 땅 파는 사람의 데생에는 이 작품들을 보는 사람이 어떤 교묘한 수법으로 제작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런 측면이 있다. 아니 이 작품들을 보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잿빛 색조와, 검정색이 풍기는 풍부함과 힘 등으로 일반적인 Conte 연필을 사용할 때 드러나는 둔중하고 금속적인 측면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품들은 크레용이나 석판화용 백묵 등과 같은 재료를 찾는 수고를 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오늘 아침에 화가가 이 두 데생을 보았다. Nakken이라는 사람으로 원래 나를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거리에 사는 Van Deventer가 여기에 산다고 생각을 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면서, 들어와서 화실을 둘러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기꺼이 응했다. 마침 땅 파는 사람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화가(畵架)에서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그는 ‘잘 그렸네요. 진지하게 공구한 흔적이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지라도, 그럼에도 나를 기쁘게 했다. Nakken이 잘 그리지도 않은 인물을 보고 잘 그렸다고 말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Van der Weele가 다시 나를 보러 왔다. 어쩌면 그를 통해 Piet Van der Velden과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너도 그의 농부나 어부를 그린 인물화는 알고 있겠지? 예전에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겐 뭔가 호방하고 거친 면이 있는데 그게 상당히 내 마음에 든다--torchon지의 거칠거칠함이라고나 할까? 그는 외부적인 것에서 교양을 구하는 그런 사람은 분명 아니나, 내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조지 엘리엇의 작품에 나오는 급진주의적 인물 필릭스 홀트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그를 알게 된다면! 그를 신뢰하고 있고, 그로부터 많을 걸 배울 게 틀림없는데.
이번 주에는 히스에서 토탄을 줍고 있는 여인의 모습과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인물의 표정을 얻어내려면 인물의 골격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야만 한다. 나로서는 그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Edelfelt는 인물의 표정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의 그러한 효과는 인물의 얼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전체 자세도 상당히 중요하다. 지난 며칠 동안, 아니 몇 주 동안, 데생을 해보려는 젊은 토지 측량사와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의 데생을 보여주었고, 나는 왜 그것들이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는 지를 이야기 해주었다. 하루는 그가 다시 나를 보러왔다. 이제 시간이 많이 나므로 나와 같이 야외로 작업을 하러 가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테오야, 이 친구는 풍경화 데생에 아주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 현재는 목초지와 사구를 담은 진짜 멋진 스케치를 가져 온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데생에 시간을 빼앗기는 걸 원치 않으나, 내 생각에는 그가 데생과 토지 측량사로서의 자기 직업을 잘 결합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는 내가 Rappard를 처음 알았을 때와 흡사한 그런 사내다.
네 생일이 돌아왔구나. 나도 너에게 축하의 말을 보낸다. 행복한 한 해가 되고 하는 일이 성공을 거두기를. 네가 이곳에 왔다간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었구나. 그렇다. 나는 네가 와 주기를 정말로 갈망하고 있다. 일년 내내 작업한 작품들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고, 작품을 보면서 앞으로의 방향성 등도 너와 이야기 해야만 한다. 너는 현재의 작품은 꼭 그렇다고 보기 힘들지만, 조만간에 나의 작품을 구입할 애호가가 나설 지도 모른다고 썼지.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내 작품에 따뜻함과 사랑을 좀 더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을 좋아해줄 사람도 나서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일해나가는 것이다.
습작품의 수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 습작품들로부터 새로인 것이 분명히 나오게 되리라. 우리가 그것들에 좀 더 기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가 이제 왔다. 당분간은 몇몇 모델에만 한정해서 작업을 하고 있으나, 나의 이상은 더욱더 많은 모델과 작업을 하는 것이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화실이 겨울 동안이나, 실직했을 때에는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불과 음식과 마실 것이 있는 곳, 거기다 약간의 돈도 벌 수 있는 곳. 아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지금도 하실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내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내가 쓰야만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머리를 이리저리 쥐어짜도 더 이상 절약할 수가 없다. 돈을 더 아껴쓴다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비용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저런 것을 제작해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건 우울한 일이다. 질식시켜 버리지 않고 사용하기를 바라는 힘이 불만스럽게 남게 된다. 하지만 불평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네가 사정을 좀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또 내 마음의 짐을 벗기 위해서이다. 영국 속담을 보면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있는데, 때로 내게 돈이 있었더라면 해낼 수도 있었을 것들이 시간 속에 그냥 흘러가는 걸 지켜보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다.
유화 재료를 구입하는데 더 많은 돈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 습작품들 중 단 하나라도 팔지 못하더라도, 그 작품들은 내가 그것들을 제작하는 데 든 비용의 값어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화실이 훨씬 더 나아지고 더 편리하게 되었지만, 내가 가진 증기로는 ‘절반의 속력’밖에 낼 수 없다. 나는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싶다. 너도 네 힘이 견뎌낼 수 이상의 짐을 지고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인내로써 버텨 나가 제풀에 누그러뜨려지도록 해야 한다.
나에게 박차를 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뭔가 하면 Rappard가 전에 했던 이상으로 전속력으로 작업을 한다는 거다. 따라서 나도 그와 보조를 맞춰나가 우리 두 사람 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야겠다. 그는 유화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그렸으며, 데생도 더 오래했지만, 우리 둘 다 얼추 비슷한 수준이다. 유화에서는 그와 경쟁을 하고 싶지 않으나, 데생에서 나를 앞지르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는 암스테르담 전시회에 커다란 그림을 보낼 모양이다. 탁자를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타일 화가를 그린 것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아주 칭찬을 하는 걸 들었다. 전시회 등에 보낼 커다란 그림을 제작하는 것이 내 의도는 아니지만, 내가 Rappard보다 그런 일을 덜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한 사람이 한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다른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해나간다는 것, 그럼에도 각각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것 등에 생각이 미칠 때면 뭔가 활기를 느끼기도 한다. 질투로부터 유발되는 경쟁심은 상호 존중심으로 바탕으로 최상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질투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정을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측의 어느 정도의 분투를 요청하지 않는 우정은 나는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나는 붓과 인쇄용 잉크로만 계속 작업을 해왔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돈에 아주 쪼들린다. Rappard가 편지로는 언제 오겠다고 해놓고 오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지난 겨울에 그 스스로 그런 제안을 한 걸로 봐서는. 그러다가 그는 몸져 앓아 누웠다. 그의 아버님께서 ‘아들이 아프다. 그런데 자네 이야기를 들었네. 형편이 어렵다면, 돈을 좀 빌려주겠네’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그 때 나는 Rappard의 아버님이 너무나 자상하다는 생각을 했으며, 그래서 그 순간에 아버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아버님. 일단 아드님이 회복될 때를 기다리지요’라고 썼던 것이다.
오늘 아침 너의 돈이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일 주일 동안 정말 땡전 한 푼 없이 지내왔다. 거기다, 데생 재료도 모두 다 써버린 상태였다. 현재로서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지만, Smulders 씨와 상당한 분량의 데생 지를 두고 흥정을 한 뒤 구입했다. 그게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조판공용 인쇄 잉크와 석판화용 백묵도 함께 구입했다. 그리고는 가계에 필요한 몇 가지 비용과 식료품 값을 지불해야만 했으며,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그 동안에 외상으로 고용했던 모델들에게도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지금 내 수중에는 실행해 나가야만 하는 몇 가지 일이 있다. 네가 십 프랑만 더 보내준다면, 이번 주는 별 지장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쾌하지 못한 손해가 따르리라. 하지만 나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 다오. 나로서는 피할 도리가 없는 모두 꼭 필요한 경비가 여기저기 들어갔던 것이다. 네가 못 보내준다해도, 뭐, 그게 우리를 죽이지야 않겠지. 작은 문제, 이를테면 얼마 안 되는 돈에 따라오는 어려움도 때로는 정말 머리가 빠개질 지경으로 몰고 간다. 그런데 이번이 그런 경우다.
다음 주에는 Van der Weele와 사구에 가서 유화를 그리기로 약속을 했다. 그는 내가 아직 모르는 몇 가지를 보여줄 것이다. 며칠 간 사구에서 작업을 해왔으나, 모델이 있으면 하고 바란다. 모델 없이는 작업을 계속 해나갈 수가 없다.
이 여자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당히 걱정이 된다.
Michelet가 ‘여성은 병자다(Une femme est une malade)’라고 한 말은 맞다. 테오야, 그들은 변한다. 그들은 날씨처럼 변한다. 감식안이 있는 사람은 어떤 날씨든 간에 뭔가 아름답고 좋은 걸 발견한다. 그는 눈뿐만 아니라 작열하는 태양도 아름답다는 걸 발견하고, 고요뿐만 아니라 폭풍우도 아름답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더위뿐만 아니라 추위도 좋아하고, 매계절을 사랑하며, 일년 중 어느 하루도 빼놓을 수 없다.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것들에 만족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날씨와 변화하는 계절을 이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감내하고, 그 수수께끼에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내심 믿으면서, 변화하는 여자의 본성을 날씨와 계절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성격과 견해가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의 그것과 언제나 그리고 매순간 조화와 공감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용기와 믿음과 평정심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불만족, 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입원했을 때 그녀를 돌봤던 의사가 나에게 말했듯이, 이 여인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려면 몇 년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신경 조직이 아직도 아주 예민하다. 큰 위험은 그녀가 이전의 실수에 다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지속적으로 심각하게 괴롭힌다. 그녀의 성깔은 때때로 너무나 나빠서 나로서도 거의 견디어 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사악하다. 정말이지, 나는 때때로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가, ‘그런 땐 내가 무엇을 하는 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요’라고 나중에 말하곤 한다.
때로는 위기감마저 감돈다. 특히 내가 몇 번이나 눈여겨 본 것, 예를 들자면 아이들 옷을 수리하고 만드는 일 등에서 그녀가 잘못한 점을 지적하거나 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지금까지의 결과를 두고 볼 때 그녀는 많이 발전을 했다. 하지만 그녀 성격의 결함들--태만한 버릇, 무관심, 능동성과 적극성의 부족,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들--은 고쳐져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나쁜 교육, 오랫동안 지녀온 아주 잘못된 인생관, 주위의 나쁜 사람들의 사악한 영향.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니?
너도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실망감 때문에 마구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니까 털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이 장미밭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처럼 우중충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겠지. 나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바꿔나가, 그녀가 나에게서 근면과 인내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동생아, 그런데 그것--간접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모범이 되도록 행동한다는 것--은 빌어먹게도 어려운 일이며, 때로는 나도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녀 내부에 새로운 충동을 일깨울 수 있도록 내 노력을 더 높은 단계에까지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여자하고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전 가족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유효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때때로 그 가족이 질이 나쁜 경우에는 상황을 거북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에 어두운 측면이 있어서, 그녀를 사랑하며 빛을 추구하는 남자가 그 때문에 치명적인 좌절감을 느낀다는 건, 정말이지, 슬프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영향과 친구들과의 대화가 때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자들에게 사고와 행동의 변혁--때로는 아주 절박할 정도로 필수적인 것인데--을 방해하는 퇴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여자와 나 사이의 어려움의 열에 아홉은 거기에서 기인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어머니들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얼하는 지를 모를 뿐이다. 쉰 살 정도된 여인들은 종종 믿질 않는다. 여자들은 모두 나이가 들어가면 자신의 딸들을 통제하여, 꼭 그릇된 방향으로만 이끄는 지는 모르겠다. 몇몇 경우에는 그들의 방식에도 어떤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있으리라. 그렇다고 그들이 남자들은 모두 사기꾼이고 바보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들을 속여야 하며, 나아가 모든 일을 더 잘 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걸 하나의 원칙으로 못박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어머니의 방식이 정직하고 선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 적용될 때 그는 정말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만다.
양심(la conscience)이라는 의미에서의 이성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그런 시대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시대를 앞당기는 데 공헌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인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인간성이 요구하는 첫 번째 것 중의 하나는 현재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의 내부적 삶보다는 외부적 삶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그렇게 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장모는 경우에 따라서는 성가시고, 비방하고, 분통터지게 하는 가족의 대표자이므로, 비록 장모 자신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지라도 정말로 상처를 입히고 적대적인 존재일 수가 있는 것이다.
여자와 그녀 어머니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내 경우에는 정말 나쁜 결과를 낳고 있는데--나는 어머니가, 즉 장모가 곧바로 우리에게 와서 함께 사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장모는 너무도 자주 잔인하게 속아넘어가고 간계에 부추김을 당하고 하므로 다른 가족의 집에 있는 것보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장모가 지난 겨울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을 때 그걸 제안했다. ‘딸을 향한 정이 그다지도 강하다면, 와서 함께 살지 그래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장모는 그렇게도 쪼들리는 형편이면서도, 내가 세워놓은 원칙과 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검소한 생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작은 놈은 기적적인 생명력을 보이고 있으며, 이미 모든 사회적인 제도와 인습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듯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아기들은 모두 빵죽 같은 걸 먹고 크지만, 이 애는 그걸 정말 기운차게 거부했다. 아직 이빨이 없는 데도 빵 조각을 단호히 씹으며 까르르 거리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삼킨다. 그런데 죽만 갖다대면 입을 굳게 다물고 만다. 아기는 나와 함께 마루 구석자리나 자루를 몇 장 놓아둔 곳에 앉기도 한다. 데생을 보고는 환성을 올리고, 화실에서는 벽에 걸린 작품들을 보느라 언제나 조용하다. 정말 이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귀여운지!
Rappard가 이곳을 다녀갔다. 나는 가을에 갚기로 약속하고 그에게서 이십오 길더를 빌렸다. 그를 만나서 매우 기뻤다. 우리는 하루 종일 습작품과 데생들을 보면서 보냈다. 내일은 그의 작품과 화실을 보러 그에게로 가기로 했다. 정말 유쾌한 하루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전보다 현재 그를 훨씬 더 좋아한다. 그는 어깨가 더 넓어졌는데, 많은 것들에 대한 그의 시야도 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보낸 그의 그림이 받아들여 졌다고 하는구나.
그가 나에게 빌려준 돈으로 절박하게 필요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야외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커다란 데생용 스케치북을 하나, 거기다 수채화용도 주문했다. 그리고는 구입한 즉시 수채화를 시도했다. 사구에 있는 오두막으로, 전면에는 외바퀴 손수레가 있었고, 후면에는 땅을 파는 사람의 조그마한 모습이 보였다. 테오야, 언젠가는 꼭 수채화를 그려내는 법을 내 손안에 넣고야 말겠다.
아버지가 찾아오셨다가 금방 가신 일도 나에겐 의외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제작하던 인부의 모습이 다소 마음에 드신 듯 했다.
1883년판 ‘살롱(Le Salon)’지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새로운 방식으로 복제된 삽화들의 첫 번째 작품들로서, 나는 다른 모든 비용들에도 불구하고 구독을 했다. 인쇄용 잉크와 석판화용 백묵으로 내가 현재 제작하고 있는 것이 이 새로운 방식과 맞아 떨어질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작품들 중 몇 개는 이 방식으로 복제해도 괜찮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살롱전이 개최되었구나. 조만간에 Tersteeg 씨와 C M 삼촌이 너를 찾아가겠지. Tersteeg 씨와 사이가 멀어진 지도 이제 거의 일년이 되었다. 내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Tersteeg 씨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Tersteeg 씨와의 다툼 때문에 내가 구필 화랑을 언제나 신중하게 피해야만 한다는 건 나에게는 다소 불유쾌한 일이다. 테오야, 작년 오월부터 한 번 회상을 해보니까, 꼭 쉬웠다거나 걱정이 없었던 그런 해는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네가 나에게 보내 준 것은 적은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이긴 하나, 내 일을 지속해 발전을 이루고, 집안을 꾸려나간다는 건 여자에게나 나에게나 어린애 장난은 아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런 뒤틀린 관계 때문에 내 일을 위해서 직, 간접으로 접촉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피해야만 한다는 건 때때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나로서는 사정을 바꿀 수 없다.
방금 전에 위트레흐트에 있는 Rappard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우리는 새로운 계획에 대해 많이 이야기 했다. 나는 커다란 인물 목탄화를 몇 장 시작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있다. 나의 작품 몇 점을 Rappard가 마음에 들어했다는 사실이 나를 분명 쾌활하게 했으며, 그 자신의 작품이 어떤가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이 내 작품 중 몇 점이 그를 즐겁게 했다는 게 기쁘다. Rappard의 화실은 아주 훌륭한 데다가, 아주 안락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종종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다시 인식한다. 내가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일을 못하는 것이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목표로 삼는 것도 그것이다. 때로는 광적인 격정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내 습작품 중의 얼마는 내 화실 외에 다른 곳에 보관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끝내기나 한 것인지 나 스스로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Rappard에게 갔다가 돌아온 지금은 계획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거기서 그의 습작품의 열매, 즉 보다 중요한 구성에 있어서 다른 인물들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걸 기대할 수 있다. 용기를 가지고 계속 힘써 나가자.
내일 아침 일찍 Van der Weele와 작업하러 나가리라.
오늘은 일요일이다. 맹렬히 일에 매달렸다가, 이제는 차분히 자리에 앉아서 편지를 쓴다.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보낸 스케치들, ‘겨울 이야기,’와 ‘지나가는 그림자’ 등이 기억나니? 그 당시 너는 인물의 움직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말했지. 지난 몇 년 동안 인물의 움직임과 구조를 포착하기 위해 그걸 물고 늘어지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물을 형성해 낸다는 건 지독하게 어렵다. 정말이지, 쇠를 가지고 작업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하고, 또 작업을 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마침내 그것은 부드럽게 되고, 인물이 달아오른 쇠처럼 말랑말랑하게 되어있는 걸 보게된다. 그 때 그걸 가지고 계속 작업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너무 그렇게 물고 늘어지다 보니까 나는 구성을 하고, 상상력이 활동할 수 있는 자극을 도중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Rappard와 자리를 같이 했을 때, 그가 따스한 목소리로 ‘너의 저 첫 번째 데생들은 훌륭해. 똑같은 방식으로 몇 점 더 제작해 보지’라고 했을 때, 내 욕구는 깨어났다.
이번 주에는 커다란 데생에 열심히 매달렸다. 이 작품에는 초기의 열의의 어떤 면이 좀 더 활발한 움직임 속에 반복되어 있는 걸 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사구에서 토탄을 파내는 사람들이다. 이곳은 정말 멋진 정경들이 많이 있어서 무수히 많은 대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그곳에 자주 가서 갖가지 습작들을 제작했다. Rappard도 그것들을 보았는데, 그가 이곳에 있을 때에는 우리 두 사람 다 그것들을 어떻게 합쳐야 할지를 아직 몰랐다. 그 이후에 나는 어떻게 구성을 해야할지를 알아내었고, 일단 방식을 발견하고 나니까, 작품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 네 시만 되면 다락방에서 작업을 했다. 이제 데생은 거의 끝이났다. 처음에는 목탄으로 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붓과 인쇄용 잉크로 덧칠을 했기 때문에, 작품에는 뭔가 심지같은 게 있다. 네가 이곳에 오면, 스케치의 첫 번째 도안으로는 그 인물 습작들이 얼마나 공들인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나는 그것들을 야외 묘상(苗床)이 있는 모래 더미에서 그렸다. 네가 이 데생을 두 번째로 들여다볼 때 첫 번째보다 그 안에서 더 많은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뭔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사람들로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을 제작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 작품이 완성되면 네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삽화일을 맡아 보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또 이 작품이 하나 하나의 습작품들보다 그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구성을 시작하였으므로, 그걸 계속해나갈 의도이다. Dikker 사구에 Van der Weele와 같이 갔는데, 거기서 모래를 파는 광경을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그곳에 가 모델을 보고 작업을 했다. 그 결과로 이제 두 번째 데생도 단숨에 해치웠다. 외바퀴 손수레를 미는 사람과 모래를 파는 사람으로 작품은 구성되었다. 이 작품들을 복제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 두 데생은 내 가슴 속에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것인데, 그것에 착수할 돈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이제 Rappard의 돈으로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또 숲에서 벌목하는 장면이나, 청소부들이 타고 있는 쓰레기 수거용 마차나, 사구에서 감자를 캐는 장면 등도 담아보고 싶다.
나는 이것을 위한 예비 단계로 화포(畵布)틀과 커다란 나무틀도 주문을 했다. 이 커다란 구성들은 이 작품들을 꼼꼼하게 다루려면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해야 하며, 습작품들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모델을 보고 다시 손질을 해야만 한다. 모델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다면 구성을 훨씬 더 잘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동생아,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네가 보내 주는 돈이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오늘 내가 제작한 작품을 두고 보더라도 내가 받은 그만큼 지불해야만 한다.
내 앞에는 두 장의 빈 화지가 놓여있다. 새로 구성을 하고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다시 모델을 매일 고용하여 그들을 스케치할 때까지 열심히 분투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Quand bien meme), 나는 시작하리라. 하지만 이삼 일 이내에 한 푼도 없게 되어, 십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끔찍스러운 팔 일이라는 긴 기간이 따를 거라는 걸 너도 알아야 한다.
오, 동생아, 내 데생을 사줄 누군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나에게 있어서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걸 미뤄둘 수가 없다.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것에서 오는 즐거움은 즉시 중단되고, 내가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없을 땐 우울하게 되고 만다. 그 때의 내 기분은 베짜는 사람이 실이 마구 엉키고, 베틀에 만들어 둔 패턴도 엉망이 되어 버려, 자신의 노력과 숙고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볼 때의 그 기분과 똑같다.
C M 삼촌에게 두 장의 데생의 조그만 스케치들을 보냈다. 그 결과로 삼촌이 사구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장면을 담은 일련의 데생을 제작하고자 하는 내 계획을 수행해 나가도록 도움을 주게 되기를 바란다. 너는 우리의 친구인 Wisselingh에게 스케치들을 보여주지 않겠니? 그리고 나무틀에 끼우면 멋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주지 않겠니? 어쨌거나 그가 헤이그에 들를 일이 있으면 내 화실을 한 번 찾도록 종용해라. 그가 작품들이 이러한 목적에 부합된다고 본다면, 그와 협의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헤이그에서 네가 머물던 때를 놓고 볼 때 내 작품을 보여줄 만한 사람이 누구있니? 나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떠올릴 수가 없다. 그 사람은 바로 Lantsheer 씨인데, 그 분에게는 작품이 정말 좋아야만 한다. 나중에 그 분에게 뭔가를 팔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 열등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Lansheer 씨는 Rappard의 삼촌인가 뭐 그런 친척이다. Rappard는 언젠가 나의 작은 스케치를 한 점 그 분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좋아했다고, 편지에 쓴 적이 있다.
오늘 저녁에는 Van der Weele가 나의 데생을 보러 왔었다. 그의 평은 호의적이었으며, 나는 매우 기뻤다. 내 작품도 실패작은 아니므로, 네가 내 작품을 추천하는 단계를 밟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Tersteeg 씨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이 커다란 데생들을 제작했다고 몇 마디 언질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너의 방문을 끔찍히 고대하고 있다는 걸 알아라. 동생아, 너는 나를 향한 너의 충실한 도움과 너의 희생이 얼마간 열매를 맺었고, 앞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걸 보게 될 거라고 믿는다.
네가 홀란드에 올 때면 다시 Rappard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화실과 마찬가지로 그의 화실에서도, 너는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화실이 아니라 과거에 위가 보곤 했던 그런 것을 상기시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도 흥미를 느낄 것이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내가 그와 같이 있을 때, 그는 나와 함께 하면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오늘 아침엔 네 시에 벌써 밖에 나와 있었다. 나는 chiffoniers***(쓰레기 수거용 마차?)를 공략해 볼 의도이다. 아니 그보다는 공략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구나. 이 데생을 하려면 먼저 말을 습작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Rhine 역 마굿간에서 두 장을 그렸다. 이 쓰레기 수거용 마차는 멋진 것이지만,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며, 힘을 엄청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아침 일찍 스케치를 몇 장 했다. 내 생각에는 싱그러운 풀밭의 눈부신 어느 지점을 담은 정경이 최고인 듯 하다. 모든 것이, 전면에 있는 여자들과 후면의 흰말 조차도, 그 위에 자리잡은 띠를 이룬 하늘과 함께 풀밭의 그 작은 부분을 배경으로 두드러져야만 한다. 명암의 배합에 있어서는 여인들의 무리와 말이 밝은 부분을 이루고, 청소부와 거름 더미가 어두운 부분이 될 것이다. 전면에는 갖가지 깨어지고 버려진 물건, 낡은 바구니들의 편린들, 녹슨 가로등, 깨진 단지 등등이 가득하다.
돈이 다 떨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이 새로운 데생을 위해 모델들과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돈으로는 오늘 Scheveningen 보넷과 어깨 망토를 구입할 예정이다. 기운 어깨 망토를 구하게 되면, 동생아, 쓰레기 장 데생의 첫 번째 plane에 이용할 여자의 형상을 갖게 되는 셈이다. ***난 그걸 확신한다.
테오야, 용기를 가지고 앞을 보며 기운차게 일해나가도록 하자꾸나. 때로는 쪼들리기도 하고, 어떻게 헤쳐나갈지도 모르게 되지만, 그건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 아침에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을 보러 구빈원에 갔었다(이 여인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기 위해서 사전에 합의를 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딸의 두 사생아를 양육해 왔던 것이다. 딸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남자들의 ‘노리개’였다. 나는 이 작은 할머니의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이든 여인이 그러한 것을 주름진 손으로 감싸 안을 때, 우리 남자도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를 스쳤다. 나는 잠시 들른 친 어머니도 보았는데, 말쑥하지 못한 찢어진 옷에다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은 채 부스스했다. 그리고, 동생아, 나는 같이 살고 있는 여인의 현재의 모습과 내가 일 년전에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 그리고 집에 있는 아이들과 구분원의 아이들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했다. 오, 우리가 기본적인 것만 명심한다면, 말라서 푸석푸석 해지고 급기야 시들어 버리게 될 그런 사람을 돌보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건 햇빛처럼 명료하게 될텐데.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나로부터 그녀를 떼내려고 한다. 그들의 말은 그녀와 어머니가 오빠의 집을 꾸려나갈 거라는 거다. 그런데 그녀 오빠란 사람은 아내와 이혼한 불한당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들이 그녀에게 나를 떠나라고 충고하는 이유는 내 돈벌이라는 게 보잘 것 없고 그녀에게 잘해 주지도 않는데다가, 내가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은 모델로 이용하기 위해서 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녀를 궁지에 빠트리고 말 거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은(Nota bene), 그녀는 아기 때문에 일년 내내 포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런 모든 이야기가 내 등 뒤에서 비밀스럽게 오고 갔으며, 마침내 여인이 그 이야기를 나한테 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구려, 하지만 당신이 이전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테오야,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가 이따금씩 쪼들리곤 하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여인을 충동질하고, 그 악당 같은 오빠 놈은 그녀를 이전 생활로 몰고가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밎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들 누구와도 상대하지 않았다. 내가 여인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은 내 생각에는 그녀가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절연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분별있고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녀더러 거기에 가지말라고 설득을 하지만, 그녀가 가고 싶어할 때는 가게 내버려 둔다.
집에서 편지를 받았다. 아주 정겨운 것으로 여자 외투와 모자, 담배 한 묶음, 케이크, 약간의 돈 등이 든 소포도 같이 배달되었다.
오늘은 노인들 보호 수용소에 갔었다. 유리창에서 뒤틀린 사과나무 근처에 있는 늙은 정원사와 두 명의 구빈원 노인들과 차를 마신 수용소 목공소를 스케치했다. 남자들이 있는 동은 방문자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말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일례로 환자용 의자에 앉은 가늘고 목이 긴 작은 사내는 으뜸이었다. 그리고 시원한 초록 정원이 내다보이는 목공소에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있는 광경은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광경은 두 사람이 식탁에 앉아서 목을 축이고 있는 장면을 담은 Meissonier의 작은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여자들이 있는 동과 정원을 스케치할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럴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지난 겨울 Voorburg에 있는 오래된 구빈원을 보았다. 이곳보다 훨씬 작았으나, 더 전형적이라고 할 만했다. 어스름이 막 깔릴 무렵에 거기에 도착했는데, 노인분들이 낡은 난로 주위의 벤치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작고 오래된 구빈원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것들을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Israels가 완벽하게 그려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극소수만이 이것들을 작품으로 담아냈다는 건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헤이그에서 나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세상을 보며, 그것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담아내는 것과도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내가 인물 화가들조차도 진짜 그걸 그냥 지나친다는 걸 경험으로 알지 못했다면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인물 화가들과 함께 걸어가다가 나에게 뭔가를 던져주는 인물을 만났을 때 그들이 ‘오, 저들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야!’라거나 ‘저런 류의 사람들이란!’하고 말하는 걸 누차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간단히 말해 화가에게서 들으리라고는 기대치 않는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다, 그런 일이 종종 나를 의아하게 하는 것이다. Henkes와 그런 대화를 나눈 게 기억이 나는구나. 그 사람은 종종 뛰어난 감식안을 보이는 데도 그런 말을 하더라. 그들이 고의적으로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 재갈을 물리고, 자신들의 날개를 잘라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Scheveningen 어깨 망토를 구했다. 훌륭한 것으로, 즉시 그것에 작업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수거용 마차의 스케치는 상당히 진전이 되어서 옥외와 우중충한 창고 아래의 빛과 대조되는 옥내의 양(羊)우리 같은 효과를 포착해 내었으며, 쓰레기 통을 비우는 한 무리의 여인들도 점차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외바퀴 손수레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 거름 젖는 쇠스랑을 든 남자들, 창고아래서 뒤적이는 모습 등을 전체적인 빛과 갈색의 효과를 상실하지 않고, 아니 그 반대로 그러한 효과를 강화하면서 표현해내는 것은 아직 풀어야할 숙제이다.
이 데생을 내가 얼마나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정말 멋진 것이다. 첫 번째 시도는 이미 많은 수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흰색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다른 지점들에 검정을 넣었다. 그리고 난 뒤 첫 번째 것이 너무 닳아버렸기 때문에 두 번째 화지에다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새롭게 작업을 하는 중이다. 내가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만 한다.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대로 화지에 옮겨 놓을 수 있다면! Mauve 매형과 상의를 할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무엇이 최선책인지 모르겠다. 첫째는 유화는 내 주된 목표가 아니므로,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충고를 듣는 것보다는 내 혼자 힘으로 하는 게 더 빨리 일러스트레이션 준비가 되리라.
화가들과 너무 많은 의견을 나누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너의 지적이 상당 부분 옳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정말 도움이 된다. 사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아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싶은 뿌리 깊은 갈망을 느낀다. 두 사람이 똑같은 정신으로 작업을 하고 추구를 할 때면 특히나 서로에게 굉장히 힘을 주고 활기를 북돋울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국을 떠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국이라는 것은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느끼는 인간의 가슴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때라야먄 고국은완전하고, 사람은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런 까닭에 Van der Weele가 온다는 게 기쁘다. 하지만 나는 Rappard와 마음이 가장 잘 맞는 듯하다.
어느 날엔가 Scheveningen에도 가서, 남자들이 사구에 펼쳐져 있던 그물을 가득 실은 수레를 운반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내 Scheveningen 어깨 망토는 멋진 물건이다. 언젠가는 깃이 빳빳하고 소매가 짧은 어부의 윗도리와 여자 보넷도 구하게 되길 기대한다. Scheveningen 데생도 제작해야만 하리라. 그것도 조만간에.
수용소는 나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내가 거기에서 그리는 걸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봄 청소를 하고 있으며 마룻바닥을 새로 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구빈원도 있으니까 신경 쓸 건 없다. 하지만 이 구빈원에서 정기적으로 포즈를 취해 줄 남자를 한 명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두 장의 커다란 빈 화지 앞에 앉아 있는데, 그 위에다 뭔가를 어떻게 채워야할 지 모르겠다’라고 썼었지. 그 이후로 나는 한 장에다가는 쓰레기 수거용 마차를 제작했고, 지난 며칠 동안에는 두 번째 장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것은 화실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Rhine 역의 마당에 놓여 있는 석탄 더미를 담은 것이다. 석탄 더미가 여기저기 놓여 있고 남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외바퀴 손수레를 밀고와 부대에 담은 석탄을 사간다. 어떤 날에는 사러 오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지난 해 눈이 내릴 때에는 특히나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나는 그걸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도 멋있어서 어느 날 저녁에는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일꾼들 중 한 명을 모델로 삼아 석탄 더미 위로 올라가게도 하고 다른 지점에 서 있게도 하면서, 다른 장소에서의 인물의 비례를 보려고 시도했다.
이 습작들을 제작하는 가운데 보다 더 큰 데생에 대한 계획, 즉 감자를 캐는 장면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내 마음 속에 너무나도 확고히 자리하고 있어서 네가 그것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데생을 며칠 안에 시작하고 싶다. 너에게 커다란 습작 속의 인물들을 보여줄 수 있으며, 괜찮은 감자밭을 천천히 선정을 해서 풍경의 외곽선들을 위한 습작들을 제작하리라. 가을 무렵에, 그러니까 사람들이 감자를 캘 때를 전후해서, 데생은 끝이 나, 끝손질만 좀 더 하면 되리라. 인물들은 데생이 단순히 의복의 연구에 그치지 않고 어디서든 실제와 어긋남이 없는 그런 것이 됭야 할 것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감자를 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전해에는 브라반트에서 그걸 지켜보았으며(그곳의 광경도 멋있었다), 그 전전해에는 Borinage에서 광부들이 감자를 캐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광경을 온전하고도 정확하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일렬로 늘어선 감자 캐는 사람들은 멀리서만 바라본 그런 어두운 인물들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움직임이나 유형은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흰색 바탕에 갈색의 기운 옷에다 낡은 실크모를 쓴 그 전형적인 Scheveningen 노인들 곁에는 순박한 젊은이를 배치하고, 흰 바지, 연푸른 코트에다 밀짚 모자를 쓴 키가 큰 풀베는 사람 옆에는 검정색의 단정한 옷을 입은 땅딸막한 여인을 위치하고 하는 식으로.
요즈음에는 활기차게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일이 너무나 흥미롭기 때문에 작업을 오래 해도 그다지 피곤함을 못 느낀다. 오랫동안 구성을 하는 걸 억제해 왔지만,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인지 내 안에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내 위에 씌운 굴레를 느슨하게 하고 나니까 숨 쉬기도 한결 편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습작을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것이 잘한 일이라고 믿는다. Mauve 매형은 그 간의 작업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나는 암소의 관절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이 아주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이맘 때에는 나는 병원에 있었다. 작년 여름에 그린 유화 습작이 나쁘다는 걸 이제 본다. 왜 그런 생각을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 당시에는 내가 어떻게 작업을 했는가 보기 위해 석탄 더미를 그린 옛날의 유화 습작을 방금 찾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보기에는 너무 되는 대로 그렸다. 그 이후로 나는 인물 데생에 새롭게 집중했으며, 유화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생각을 했다.
작년에 누군가에게 했던 이야기와 거의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나에게 ‘채색화는 색깔을 넣은 데생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고 말고, 흑백의 데생은 사실은 흑백의 채색화이지’라고 응답했고, 그들은 ‘채색화가 데생이다’라고 했으며, 나는 ‘데생이 채색화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기법에 있어서 너무 미약했기 때문에 말로 하는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말은 덜하고, 묵묵히 내 작품에서 더 많이 표현한다.
Rappard에게서 특색있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감자캐는 사람들을 담은 커다란 데생에 관한 내 계획을 이야기 했었다. Rappard의 편지가 나를 고무했기 때문에, 나는 바로 그날 시작을 했다. 그런데 데생이 어찌나 나를 끌어 당기는 지 거의 밤새도록 작업을 했다. 그것이 내 눈 앞에 생생하게 보이므로, 끝까지 옮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제작한 것 중에서 가장 강렬한 데생이 될 것이다. 나는 몇몇 영국 화가들의 방식에 접근했다. 비록 그들을 모방한다는 생각은 없으나, 아마도 천성적으로 똑같은 것에 이끌리기 때문이리라.
이다지도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데생을 제작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데생을 구성하는 데에는 유화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 혹은 그 이상으로 생각과 집중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내가 이번 작품에서 그런 것처럼 하루 낮과 밤의 상당한 시간 동안 끈질기게 매달려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걸 발견한다. 작업에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빼앗길 때는 나가 떨어질 때까지 껏에 달라붙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본 Butin의 첫 번째 그림(그의 후기 작품 중의 하나)이 나에게 남긴 강렬한 인상을 언제나 기억한다. 그 작품은 제목이 ‘방파제’였던 것 같은데, 여인들이 폭풍우가 몰아 치는 밤에 들어오기로 예정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Luxembourg에 있는 작품과 다른 몇 개를 보았다. 나는 Butin이 매우 정직하고 진지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서둘러 그린 것이 명백한 경우조차도 그의 데생은 종국에는(apres tout) 마찬가지로 합당하고 올바르다는 걸 보게 되었다. 그는 내가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볼 때 그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상을 할 수 있다. 그 간의 힘겨운 작업을 통해 내 손도 좀 더 능숙하게 되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데생 때문에 오늘 밤에도 조금밖에 못 잘 듯 하다. 모든 것이 고요한 밤에 담배 파이프를 피우면 아주 아늑한 느낌이 든다. 거기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해가 돋는 광경도 멋지다.
아직 네 시가 안 되었다. 어제 저녁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밤에는 비가 내렸다. 이제 비는 멈췄지만, 모든 것이 비에 젖어 축축하며 하늘은 잿빛이다. 그렇지만 하늘 이 편에서 저 편으로 움직여가는 중간 색조나 노란빛을 띤 흰 색의 더 어둡거나 밝은 구름 덩어리 사이 사이로 깨어진 틈이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이른 까닭에 잎사귀들도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으며,*** 젖은 길을 따라 푸른 작업복을 걸친 농부가 목초지에서 데려온 갈색 말을 타고 온다.
뒷편으로 보이는 도시는 잿빛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데, 역시 착 가라앉아 있은 가운데 젖은 지붕이 강렬하게 두드러 진다. 대지와 풀밭의 다양한 색상, 모든 것의 밝음 등은 코로 보다는 도비니의 작품과 더 흡사하게 보인다. 이른 아침의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좋은 시간을 보내거라 동생아. 나도 여러 가지 경제적 걱정과 여러 가지 근심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쨌거나 내 작업에 있어서는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 아주 즐거운 마음과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고한 느낌으로 작업을 해나간다.
그렇다, 동생아, 다른 것에는 괘념치 않고 끈기를 가지고 작업을 해나간다면, 정직하고 자유스럽게 자연의 깊이를 재려 애쓴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건 간에 자신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고요와 확신을 느끼며, 미래를 침착하게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실수를 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서 과장을 하기도 하겠지만, 제작된 작품은 독창적인 것이 되리라. Rappard의 편지에 쓰여진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은 기억이 나니? ‘나는 충분한 개성도 없이 한 번은 이런 식으로 또 한 번은 저런 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곤 했다. 하지만 이 최근의 데생들은 적어도 그들 나름의 특성이 있으며, 나는 나의 길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나는 거의 똑같은 것을 느낀다.
기쁜 마음으로 네 편지를 받았다. 거듭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이번에는 정말 어려웠다. 정말 땡전 한 푼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여인은 아기에게 먹일 우유조차도 없었으며, 나 역시도 어지러움을 느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 시도로 나는 Tersteeg씨에게 갔다. ‘아무것도 잃을 건 없어. 사실 이 시도가 사정을 보다 낫게 해 줄 길이 될 수도 있잖아’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스케치를 한 장 가지고 거기에 갔다. 스케치는 남자와 여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전면에는 흙더미들이, 뒷배경으로는 작은 마을의 지붕들이 몇 채 어렴풋이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Tersteeg씨에게 이 스케치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는 걸 내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에게 가져와 보여주는 까닭은 그가 내 작품을 본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으며, 작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아무런 악의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Tersteeg씨도 아무런 악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했으며, 데생에 대해서는 작년에 자신이 내가 수채화를 제작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그걸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따금씩 수채화를 시도했으며 내 화실에는 몇 점 있긴 하지만, 수채화보다는 데생에 더 마음이 끌리며, 강렬하게 그려진 인물화에 더욱더 열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Tersteeg씨는 그래도 내가 일하고 있는 걸 보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으며, 나는 내가 일하고 있다는 걸 그가 의심할 어떤 까닭이 있는지 물었다. 그 때 그에게 전보가 와서 나는 그곳을 떠났다. 여하튼, 나는 데생이 Tersteeg씨의 마음에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진짜 알지 못한다. 어제는 하루 종일 그 작품에 다시 매달려 인물들을 좀 더 낫게 고쳐 보았다.
Tersteeg씨가 그 작품을 전적으로 엉터리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으리라. 하지만 Tersteeg시가 그것을 미친 짓거리로 본다고 할 지라도, 나는 그 말이 나를 분통터지게 하거나, 그의 견해를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Tersteeg씨가 나에 대해, 그리고 지금과 지난 해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될 때가 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시간에 맡겨 두리라. 그리고 Tersteeg씨가 계속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트집만 잡으려 한다면, 그럴 땐, 나는 그걸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의 길을 나아가리라. 나는 Tersteeg씨에게 Mauve 매형과 다시 잘 지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이야기 했더니, 그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 가서도 몇몇 사람들이 내가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그걸 계획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엄청나게 놀라고 말 것이다.
감자를 캐는 장면을 담은 습작품을 지금까지 네 장 완성했다. 땅에다 쇠스랑을 꽂은 남자 (첫 번째 움직임),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 바구니에다 감자를 던져 넣고 있는 다른 남자 등을 담아냈다. 그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손잡이가 짧은 쇠스랑으로 무릎을 꿇은 채 감자를 캐내고 있다. 저녁 무렵에 평평한 밭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작업을 하는 이 인물들로 멋진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헌신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뭔가로.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세밀하게 고찰했다.
이제, 이 데생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테오야, 나는 그것들을 팔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Israels가 Van der Weele의 커다란 그림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는 구나. ‘자네가 이걸 팔지 못할거라는 건 분명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을 하진 말게나. 이 작품으로 자네는 새로운 친구들을 얻게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을 팔 수 있게 해줄 테니까.’
C M 삼촌으로부터는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테오야, 너도 보다시피 내가 뭔가를 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거기다 분명히 밝혀 두지만 Tersteeg씨에게 가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Tersteeg씨가 서로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용서하고 잊으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아직도 네가 그 당시 아주 잘 묘사한--‘때때로 Tersteeg씨는 내가 그와 악수하는 방식에도 짜증을 낸다’였지 아마--그대로라고 보여진다.
너는 이따금씩 내 작품에서 뭔가를 발견했다고 써 보내곤 했다. 나도 네가 잘못 보았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Tersteeg씨가 적개심으로 인해 나에 대해 절대적이라 할만큼 무관심한 것은 옳지 않다는 말에도 동감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것은 그런 것이다. 처음부터 내 작업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해준 네가 계속해서 그것에서 뭔가 좋은 걸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다면, 한 해 동안의 모든 근심을 잊으리라.
편지를 쓰면서 나는 그 때--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너도 기억을 하리라--너와 네가 Mauve 매형 댁에서 저녁을 보낼 때, 그 때까지도 매형은 병영 근처에 살고 있었지, 매형이 자신의 데생인 쟁기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던 때를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내 자신이 데생 화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그리고 Mauve 매형과 나 사이가 불편한 관계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지. 나는 언제나 이 불편한 관계가 저절로 녹아 없어지지 않는 걸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매형과 나 사이에는 의견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의아하다.
그렇지만 그건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고, 내 작업을 놓고 볼 때 나는 상당한 활력과 종국에는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믿음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그간의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한 사람들이 승인을 하지 않거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때면 부지중에 마음이 동요되고 우울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만다.
처음과 비교해 볼 때 이곳이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를 사로잡는 일이 너무도 많으며, 아이디어와 계획들이 넘쳐 흐린다. 목탄 작업에 대해 이전에 가졌던 혐오감이 매일 줄어든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목탄을 고정시키고 그걸 인쇄용 잉크로 재작업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럴 여유가 생기면 현재 내가 화지에다 제작하고 있는 그런 공들인 스케치를 캔버스에다 제닥을 하리라. 그리고 유화에 다시 손을 대리라. 유화로 잘 그려낼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
내가 때때로 갈망하는 것이 뭔지 아니? 브라반트로 여행하는 것이다. Nuenen에 있는 그 오래된 교회 안뜰과 베짜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한 달 정도 브라반트 지방을 스케치로 하나 가득 담아 가지고 돌아와서는, 그걸 바탕으로 커다란 데생, 이를테면 농부의 장례식 같은 걸 제작해 보고 싶다.
‘백대 걸작전(Les Cent Chefs-d'Oeuvre)’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내 주었으면 한다. 그런 전시회를 본다는 건 흡족한 일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당시 대중의 견해에 의하면 그 인물들이 성격이나 의도, 천재성을 의심 받았으며, 그들에 대해 정말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밀레, 코로, 도비니 등은 경관이 떠돌이 개나 여권 없는 부랑자를 보는 것과 똑같은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백대 걸작전이라니(voici 'Les Cent Chefs-d'Oeuvre). 그리고 백대로 충분하지 않기라도 한 듯이 우리는 무수히 많은 걸작들(chefs-d'oeuvre)을 갖고 있다. 거기다 경관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들에 대해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지. 흥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영장 꾸러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그게 위인의 역사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 경관을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시점엔 이미 죽은 경우가 보통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따른 장애와 어려움으로부터 지속적인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저런 사람의 장점에 대해 사람들이 공인하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친구도 거의 없는 그 사람들의 조용하고, 다소 흐릿한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린다. 그들의 소박함 가운데 나는 더 위대하고 더 애처러운 그들을 발견한다.
테오 네가 오면 현대 미술가들의 목판화 주요작이라고 불릴 만한 그런 수집품을 보여줄 수 있을 듯하다. 아무 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수집품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대부분의 감식가들에게 조차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들의 작품들이 들어 있다. Buckmann이나, Green 형제를 누가 알까? 또 Regamey의 데생은? 극소수만이 알리라. 이들을 함께 보면 이들 데생의 확고함과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 그리고 거리나 시장, 병원 혹은 구빈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인물이나 소재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착상과 통찰력, 마무리 등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감자를 캐는 사람들에 매달려 좀 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늙은 남자 혼자만 있는 똑같은 제재에 대해 두 번째 습작에 착수했다. 더 나아가 넓은 들판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에도 손을 대고 있다. 그 다음에 잡초를 태우는 장면과, 등에 감자 부대를 짊어진 남자를 담은 습작도 있다. 수채화를 제작해야만 한다는 Tersteeg씨의 견해를 생각하고, 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가정 아래, 내 마음을 바꾸려 무진 애를 쓰도, 부대를 짊어진 남자나, 씨 뿌리는 사람, 감자를 캐는 노인 등의 인물들을 수채화로 제작할 경우, 그들의 개성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결과는 아주 평범한 그런 것이 되리라. 결과가 고작 그런 평범함이라면 착수하고 싶지가 않다. 내 작품에는 어쨌거나 특징, 예를 들자면 Lhermitte가 추구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그런 것이 있다. Lhermitte의 비밀은 내 생각에는 인물--즉, 건장하고 진지한 일꾼의 모습--에 대해 완전한 총체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과 까 그의 소재를 사람들의 바로 심장부에서 구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임물들의 대담함, 활력, 거대함을 표현하기를 원하는 그에게 있어서 수채화가 가장 적당한 수단은 아니다.
물론 색조와 색채를 배타적으로 추구할 때는 다른 문제이다. 그 때는 수채화가 탁월한 수단이다. 이 똑같은 인물들로부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색조와 색채의 관점에서 다른 습작품들을 제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리라.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내 정감과 개인적인 느낌이 애초에 나를 인물의 성격과 구조와 행동으로 이끌기 때문에, 내가 이 감정을 따라 수채화로 표현을 하지 않고, 검정과 갈색으로만 그린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수 있는 노릇일까?
윤곽선이 아주 강렬하게 표현된 수채화들, 예를 들자면, Regamey의 작품, Pinwell과 Walker, Herkomer 등의 작품--Herkomer의 작품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그리고 벨기에의 Meunier의 작품 등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걸 시도한다 해도 Tersteeg씨는 만족하지 않으리라. 그는 언제나 ‘팔릴 만한 작품이 아니야. 판매 가능성이 제일 중요한 점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네’라고 말하겠지. 그의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자네는 이류야. 그런데도 자네는 오만하게도 뜻을 굽히거나 그저 고만고만한 작품을 제작하려 하지 않는군. 자네의 소위 “추구”라는 것 때문에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라고 할 수 있으리라. Tersteeg씨가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영구적인 부정’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뒤나 옆에서 영구적으로 낙심시키는 그런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제작한 대중적인 유형의 인물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연코 정감에서 뿐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구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몇 점 있다. 일례로 땅 파는 사람은 현재의 데생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고딕 교회의 신도식에 목재로 얕게 부조(浮彫)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과 흡사하다. 자주 나는 브라반트 유형을 생각하고, 그것들이 나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제재인가를 떠올려본다. 가을에는 브라반트에 다시 가서 습작품을 제작하고 싶다. 브라반트 쟁기, 베짜는 사람, Nuenen에 있는 마을 교회의 안뜰 등을 습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돈이 들리라.
정말로 내가 제작하기를 바라며, 제작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히스로 통하는 길 위에 서 계신 아버지 모습이다.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게 끔 진지하게 담아내고, 거기다 갈색 히스의 일부분, 그 가운데로는 좁고, 흰 모랫길이 나있으며, 하늘은 섬세한 색조로 엷게 물들어 있는데, 그럼에도 어딘가 정열적으로 붓질된 그런 장면. 그 다음에는 가을 풍경이나 이파리가 시들어가는 너도밤나무 울타리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팔짱을 낀 장면.
내가 마음 속에 꼭 품고 있는 농부의 장례식을 그릴 때엔 아버지의 모습도 담고 싶다. 종교적 견해의 차이점은 논외로 할 때, 가난한 시골 목사의 모습은 유행에서든 성격에서든 나에게는 내가 아는 것 중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것이며, 언젠가 그걸 시도해 보지 않는다면 내 자신에 충실한 것이 아니리라. 내가 제작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데생은 아니다. 인물은 필연적으로 단순화 되어서,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세부는 단호하게 무시할 것이다. 그 작품은 아버지의 초상화라기보다는 병자를 심방가는 가난한 마을 목사의 유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팔짱을 낀 부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작품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기를 원하긴 하지만, 두 분의 초상화라기보다는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늙어가는 남녀의 유형이 되리라. 하지만 두 분은 이 작품이 진지한 것이라는 걸 알아야 만 한다. 물론 두 분은 작품이 자신들을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아마 보지 못하시겠지만.
인물을 단순화하는 작업은 나를 상당히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인물의 표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것이 얼굴의 생김새보다는 전체 분위기에서 발견된다는 결론에 점점 더 다가가게 된다. 대부분의 아카데미적인 tetes d'expression***보다 더 진심으로 혐오하는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미켈란젤로의 ‘밤’이나, 도미에의 술취한 사람, 아니면 심지어 Mauve 매형의 늙은 말을 보고 싶다.
최근에는 시골로, 예를 들자면 바닷가나 들에서 일하는 것이 전형적인 어떤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게 돈을 절약할 수 있는 방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인물화에서는 발전을 이루고 있으나, 재정적인 면에서는 토대를 잃고 있으며, 지속해 나갈 수가 없다. 일을 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따라서 일이 헤쳐나가는 걸 도와주므로 더 열심히 일을 하면 어려움과 비용 문제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빚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곳의 잇점은 내 화실이 훌륭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이곳은 예술계에서 아주 벗어난 곳은 아니다. 이따금씩 뭔가를 듣거나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을 사랑하긴 하지만, 나를 도시에 묶는 것도 많이 있다. 잡지나 복제화를 제작할 수 있는 점 등이 그 일례다. 증기 기관을 못 보게 된다는 건 나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인쇄기를 결코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건 문제이다. 그리고 너도 나 같은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너도 이따금씩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知人)을 보고 싶은 갑작스런 갈망을 가지리라.
de Bock에 대해서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의 화실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본 것은 아주 큰 스케치로, 눈덮인 엄청나게 큰 풍차를 반쯤은 낭만적으로 또 반은 사실적으로 담은 것이다. 그 결합된 양식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듯하고 강렬한 효과로 기운차게 그린 것이긴 하지만 아직 손질할 데가 많은 미완성품이었다. 그 다음에는 섬세하게 붓질한 그림들과 깜찍한 습작품이 몇 점 있었다. 몇몇 스케치는 작년보다 색조와 색채에 있어서 좀 더 성숙해졌고 좀 더 정확했으며, 배경도 확고해 졌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평면(plane)과 부피의 상대적인 비례를 언제나 너무 애매모호하게 내버려 두어서, 코로와 루소, Dias, 도비니, Dupre 등의 전형적인 자질인 비례의 정확성이 결핍되어 있다. 이 화가들은 모두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했다. 그들은 모두 비례에 대해서는 아주 주의를 기울였으며, 배경도 또한 아주 표현적이지 그렇게 피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de Bock의 작품에는 아주 좋은 점들이 있으며, 대상들이 좀 덜 환상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더라면 더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가 왜 제재에 좀 더 변화를 주지 않는지도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점이다. 일례로 내가 이 번주에 한 풍경 습작은, 하나는 어제 그린 것으로 de Bock과 내가 발견한 등대 뒤에 있는 사구의 멋진 감자밭이고, 그 전날에는 밤나무 아래 부분을, 또 다른 것은 석탄 더미가 놓여져 있는 땅을 담은 것이다. 내가 풍경을 그리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그걸 그릴 때에는 보다시피 세 개의 다른 제재를 동시에 담았던 것이다. De Bock의 경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풍경 화가인데, 언제나 작은 나무와 해변의 작은 풀이 있는 사구를 그리는 대신에, 왜 더 많은 것을 택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칠월 일일로 우리의 어린 녀석이 한 살이 되었다. 그 놈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쾌활하고 명랑한 아기다. 이 어린 놈이 잘 자라고 여자를 바쁘게 한다는 게 그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 밖에, 나는 때때로 도시와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에 가서 얼마간 사는 것이 그녀에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녀를 완전히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는 사실 우리가 흔히 ‘속세의 자식(enfant du siecle)’이라 부르는 그런 존재이고, 그녀의 성격은 상황에 너무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낙담이나 무관심,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결핍이라는 형태로 그녀에게 그 흔적이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될 것이다.
Scheveningen의 집들에 관해 de Bock와 이야기를 했는데, 내 화실의 세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을 하지 않는 게 나을 듯하다. de Bock는 일 년 집세로 사백 프랑을 지불하는 반면 나는 백 칠십을 지불하고 있으니까! 바다 근처에 살기를 원한다 해도 Scheveningen은 고려해 볼 여지가 없다. 나는 좀 더 외진 곳, 아마 홀란드의 Hook나, Maarken으로 가야만 하리라.
정말 해변에서 작업을 했으면 한다. 그런데 de Bock에게 그의 다락방 구석에다 데생 도구를 놓아둘 수 있게 부탁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렇게 해준다면 매번 그걸 힘겹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 모든 걸 들고 거기까지 가노라면 도착하기도 전에 피곤해져서, 작업은 느슨하게 되고, 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막바로 작업을 할 필요가 없으면 약간 피곤한 것은 물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de Bock의 화실에서 잠시 머무르고(pied-a-terre), 기차를 더 자주 이용한다면, 지금까지 그래온 것보다 좀 더 집중해서 바다와 Scheveningen의 습작을 제작할 수 있으리라.
지난 일요일에는 Van der Weele에 갔다. 그는 이미 습작을 몇 점 한, 개울가에 있는 암소들을 한창 그리는 중이었다. 그는 당분간 시골에 가있을 모양이다.
루소의 ‘숲가에서’(A Lisiere de Bois)***를 아니? 비가 온 뒤의 가을을 담은 것으로, 질퍽질퍽한 목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 가운데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으며, 전면은 착 가라앉은 색조였지. 나에겐 이 그림이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이다. 자연 이상의 것이며, 일종의 계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완전한 존경심을 느껴야만 하며, 그 작품이 과장되었다거나, 단순한 매너리즘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제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Breitner가 나타났다.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와 함께 유형이나 흥미로운 모델을 찾기 위해 나서곤 했던 일--시골이 아니라 도시에서--이 아주 즐거웠기 때문에, 그를 만나서 매우 기뻤다. 내가 헤이그에서 이 일을 한 사람은 그 외에는 없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도시가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는 매우 아름답다. 일례로 어제 나는 Noordeinde에서 궁전 반대편 부분을 철거하느라 분주한 일꾼들을 보았다. 짐마차와 말을 대동한 사내들은 모두 백악으로 하얬다. 서늘하고 바람이 부는 날씨에, 하늘은 잿빛이었는데, 그 장소가 아주 특색이 있었다.
Van der Weele는 Breitner의 다소 흥미가 가는 작은 수채화를 두 장 갖고 있는데, 세련됨이랄까, ‘뭔가 말할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 아니면 영국 사람들이 ‘야릇하다’고 하는 그런 것이 느껴졌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두고 지켜봐야 겠지. Breitner는 상당히 이지적인 인물이지만, 그가 시도하는 것은 괴퍅함에 대한 사랑이다. 때때로 나는 호프만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환상 이야기,’ ‘갈가마귀’)을 좋아하지만 Breitner의 이 작품은 가망이 없다. 그것의 공상은 둔중하고 의미가 없으며, 실제와는 아무런 접합점도 없다. 나는 그것이 매우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착수한 Van der Weele의 초상화도 나쁘다.
Rappard는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는 나에게 편지로 종국에는 자기도 내가 그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인쇄용 잉크를 테레빈 유에 섞어서 사용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훨씬 좋은 효과를 얻었다고 알려왔다.
내가 편지를 보냈음에도 C M 삼촌이 한 마디 응답도 안한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쪽에서 화해를 하려고 했음에도, Tersteeg씨가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Mauve 매형은 나뿐만 아니라 Zilcken과도 다투었다.
데생을 몇 장 사진으로 찍으려고 한다. 먼저 ‘씨 뿌리는 사람’과 ‘토탄을 캐는 사람’들로 시작을 할 작정이다. 앞에 것은 작은 인물들이 여러 명 있는 것이고, 뒤에 것은 한 사람을 크게 그린 것이다. 이게 제대로 나오면, 내가 제작한 데생들의 사진을 너에게 언제나 보내줄 수 있으리라. 그걸 누군가에게, 아마 Buhot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어 살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면 되겠지. 우리는 Buhot와 함께 그 점에 매달려야 한다. 새로운 것에 착수할 수 있도록 돈을 좀 벌어야 겠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적절한 때라는 느낌이 들므로 유화에도 손을 대야할 것 같다.
de Bock이 나를 보러 왔다. 다소 유쾌한 방문이었다. 그는 작년에 그린 유화 습작품을 몇 점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으나, 그것들은 점점 더 내 마음에서는 멀어진다. 올해에는 좀 더 나은 것들을 제작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de Bock과도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으면 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 두 사람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서로서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으리라. 전에 이야기한 문제를 다시 그와 의논한 결과, Scheveningen에 습작을 하러 갈 때는 내 물건을 그의 집에 나둘 수 있게 되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Bloomers도 보러 갈까 한다.
얼마 동안은 주로 Scheveningen에서 작업을 할 작정이다. 아침 일찍 그곳에 가서 하루 종일 머물거나, 집에 있어야만 하는 경우에는 너무 더운 정오에 집에 올 것이고, 그 외에는 저녁에 오면 될 것이다. 태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몰두하는 일의 변화를 기폭제로 이 번일이 새로운 착상과 휴식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손이 미치는 껏 물감 재료들을 정돈하고, 이전부터 필요한 것은 보충을 했으며, 기관차 표도 얼마 구입을 했다. 이 비용을 다 지불하고 나니--이것들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들이다--벌써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 Scheveningen을 조금 둘러본 다음에는, 이따금씩 여자를 데리고 가 포즈를 취하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장소나 인물의 크기 등을 지적하게 해야 겠다. 모델이 한 명 생겼다. 농가의 소년으로 그에게 유화 습작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주 이른 아침이라도 나와 함께 갈 수 있다고 했으며, 필요하다면 사구의 상당히 깊은 곳까지 상관 없단다.
어제 저녁에 두 명의 토지 측량사에게서(너에게 지난 번에 편지를 쓴 다음에 두 번째 측량사가 도착했다) 나를 엄청나게 기쁘게 한 선물을 받았다. 흔히 보는 Scheveningen 재킷으로 깃이 빳빳한 데다가, 색깔은 바래고, 여기저기 기운 자국도 있어서 그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명랑하고 쾌활한 사나이들이다.
첫 번째 토지 측량사의 아버지는 물감을 취급한다. 그는 Paillard 물감을 쌓아 두고 있는데, Mauve 매형도 고객 중의 한 명이다. 아들에게 교습을 한 대가로 나는 아버지로부터 호의에 감사한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받은 적이 없다. 이러한 정황을 이용하여, 나는 그에게 그가 오래된 물감 튜브를 얼마 쌓아두고 있는 게 틀림없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Paillard 정가로 구입을 할 테니, 앞으로도 새로운 물감 튜브를 같은 가격, 그러니까 삼분의 일 할인한 가격에 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재고를 살펴보고는 내 제안에 찬성 했다. 그리고 나는 이 할인 혜택을 유화뿐만 아니라 수채화에서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유화를 지속해 나가기가 조금이나마 용이하게 될테니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네 편지를 받았는데, ‘앞으로는 형에게 거의 희망을 줄 수 없을 듯해’라는 너의 말에 슬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네 말이 재정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 달전에 네가 시기가 나쁘다고 썼던 걸 기억하겠지. 그 때 내 대답이 뭐였니? ‘좋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양측에서 서로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는 나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보내고, 나는 발전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아마도 잡지사에다 뭔가를 팔 수도 있으리라.’ 그 이후로 나는 한 인물 습작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소재를 담고 있는 커다란 구성을 몇 점 시작했다.
하지만 네 말이 내 일에 관한 것이라면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너의 그 표현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니? 전혀 뜻밖에 그 말은 내 심장을 강타했다. 내가 발전해 나가고 있지 않다는 걸 네가 보았는지 어쨌는지 알고 싶다. 분명 예술가들에게 보여주라고 너에게 보낸 내 첫 번째 사진들 때문에 ‘앞으로는 형에게 거의 희망을 줄 수 없을 듯해’라고 말하는 거니? 무슨 일이 있었니?
나를 걱정하게 만든 뭔가를 네가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동생아, 이렇게 우울하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너는 ‘좀 더 나은 시기를 기대하자’라고 한다. 그 말은 우리가 조심해야만 하는 그런 한 것 중의 하나처럼 보인다. 좀 더 나은 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현재에서의 행동이어야만 한다. 좀 더 나은 시기를 향한 기대를 내가 강렬히 느끼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일이 그 대가를 가져오리라는 믿음 외에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일에 내 온 힘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Scheveningen에서 나는 ‘그물 수선’(Scheveningen 여자 고기잡이들)이라는 작품을 제작 중이었으며, 사구의 노동자들을 담은 두 장의 다른 커다란 구성도 진행 주이었다. 이것들은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지만 내가 정말로 완성해보고 싶은 것이다. 파내야만 하는 모래 땅 앞에 일렬로 길게 늘어선 일꾼들--이들은 시 당국이 고용한 빈들들이다--은 옮기기가 끔찍스럽게 어렵다.
Scheveningen으로 유화를 그리러 간다는 문제가 대두되었을 대 나는 ‘좋아,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걸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 지경이다. 동생아, 비용은 엄청난 데 그걸 맞춰나갈 재간이 없다. 그럼에도 유화를 너무도 사랑한다!
지난 여름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너는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라고 돈을 주었으며, 그래서 나는 일에 착수했다. 얼마 후에 너는 돈이 좀 들어올 듯하므로, 돈이 들어오면 물감과 유화 상자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썼다. 하지만 그 이후로 너 자신에게 불운이 따랐으므로 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그렇긴 하나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나는 여분의 돈을 받았다. 그럼에도, Leurs에게 다시 지불해야 할 돈이 있었다. 가을 내내 Scheveningen에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하지만 겨울에 코앞에 다가 왔고, 석탄값을 지불해야 하므로 새로운 경비가 갑자기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모델을 고용했고, 그 이후로 인물화에서는 발전을 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인물 습작들을 제작해 나가는 동안에는 물감을 사거나 수채화를 그리는 일이 진짜 불가능했다. 때때로 나는 그렇게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꾸려 나가려 애썼다. Rappard에게 돈을 빌렸으며, 아버지로부터 여분의 송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실에 묶여 있는 투구벌레 같은 입장이었다. 조금 기어나갈 수야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멈춰야만 하는. 그래서 나는 내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도 자리하고 있는 것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막 시작한 것은, 정말 다른 무엇보다도 더 필요한 것인데, 유화 인물 습작이다. 하지만 어떻게 비용을 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걱정과 근심, 절약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매번 비용은 내가 꾸려나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든다. 그런 상황이 근래에 와서는 몇 주고 몇 달이고 반복되었다. 네 돈이 도착하면 그 돈으로 나는 십 일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즉시 지불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 남아 있는 십일 동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지내야 한다. 거기다 여인은 아기를 양육해야 하는데, 우유조차도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도 충분히 먹지를 못해서 때로는 고픈 배 때문에 아뜩한 느낌을 들때는 사구나 다른 곳에서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런 때에는 사구 사이로 난 길이 사막과 같은 양상을 띤다. 가족들의 신발은 누덕누덕 기운 자국 투성이인데다 닳아 빠졌다. 그 밖에도 주름살이 늘어나게 만드는 조그만 비참함들이 숱하게 많다.
테오야, 일이 결국에는 잘 풀려나갈 거라는 생각에 매달릴 수만 있다면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너의 그 말은 나에게는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와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Scheveningen에서 Blommers를 두 번 보았으며 그와 이야기도 나눴다. 그리고 그는 내 작품 몇 점을 보았으며 나더러 자신을 보러 오라고 했다. 거기서 나는 유화 습작을 몇 점, 바다의 일부를 담은 것과 그물을 수선하는 사람들이 들판 등, 제작했고, 이곳 화실에서는 감자밭에서 감자와 감자 사이 빈 공간에 배추를 심고 있는 사람을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그물을 수선하는 장면을 담은 커다란 데생에 손을 대고 있다. 이 작업을 하는 중에 작년의 어떤 것들이 내 상상을 다시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는 다른 유화 습작들을 제작해 화실에다 걸어 두었다. 감자 캐는 사람들을 유화로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이 꼭 알맞은 시기이다. 내 생각에는 괜찮은 작품이 될 듯하며, 이미 습작도 몇 점 했다. 하지만 모델을 충분히 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해나갈 수 있다면, 가을이 끝날 때쯤이면 그 감자를 캐는 사람들의 제작을 끝마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바다는 유화로 붓질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걸 포착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열의가 식는 걸 느낀다. 사람은 어딘가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에 희망을 가지자’라는 너의 말은 마치 너 자신이 나에 대해 신뢰가 없는 것처럼 들니다. 정말 그렇니? 나에게는 너 외에는 친구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기분이 울적해지고 가라앉을 때는 언제나 너를 생각한다.
테오야, 맨 처음에 네가 나에게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가 오늘의 내 작품을 예견할 수 있었다면, 내가 화가--아니면 데생 화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니?--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 결정을 주저하거나 했겠니? 나는 우리가 일례로 그 사진들을 예견할 수 있었더라면 주저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구에서 그런 장면을 창작해 내기 위해서는 화가의 손과 눈이 필요함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하면 너무도 낙담해서 용기를 모두 잃고 마는 일이 종종 생기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기운을 내어 내 일로 돌아가서는 그걸 웃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현재 작업을 하고 있으며 하루도 일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는 날은 없으므로, 비록 내가 그걸 느끼지는 않지만, 진짜로 미래에는 내게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그걸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나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것이든 화나게 하기 위한 것이든 내 머리 속에는 미래에 관해 철학적으로 고찰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너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에 집중하고 그것에서 뭔가 잇점을 이끌어 내지 않고는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무인 것이다. 너도 나에 관해서는 현재에 집중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보다는 오늘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한 인내하도록 하자.
최근에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준 것은 이 전에 내가 몇 달 동안 유화를 그리지 않았지만 오늘의 유화 습작은 작년의 것과 비교해 볼 때 나아졌음을 보여준다. 그 당시 나는 반복해서 인물 습작을 그리려 했으나, 너무나 볼품 없이 되고 말아 나를 절망하게 했다. 이제 다시 시작을 하고 보니 지속해 나가는 것을 막을 것은 없어 보인다. 내가 아주 애를 먹곤 했던 데생과 비례의 문제가 이제는 다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 앞에 앉아 있을 때, 두 가지 것을, 즉 데생과 유화를, 동시에 생각할 필요가 없이, 유화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사진으로 본 작품들의 인상은 별로 보잘 것 없다고 하는구나. 사람의 체력이 그의 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 볼 때는 조금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정말이지, 테오야, 일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식사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숨쉴 수 없다면 상황은 언제나 그럴 것이다. 내 생각에는 사진을 찍은 데생들이 색조에 있어서 아직 충분한 깊이가 없다고 본다. 그것들은 자연이 불러 일으킨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제작한 것과 그 데생들을 비교해 보면 내가 발전했다고 느끼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테오야, 나는 받는 것 이상으로 지출하는 걸 허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파업이냐 계속 일을 해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때에는 나는 전력으로 일을 하는 쪽에 손을 든다. 밀레와 다른 전임자들은 치안관들이 그들을 체포할 때가지 일을 해나갔다. 몇몇은 수감되었으며, 이곳 저곳으로 전전해야만 했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일을 포기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다 나는 단지 시작 단계이다. 하지만 멀리서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기도 해 때로는 내 작품을 우중충하게 만든다.
그렇다, 테오야, 단지 돈이 문제라면, 그리고 동생이자 친구로서 팔릴 수 있는 것이든 팔릴 수 없는 것이든 작품에 대해 약간의 공감을 가지고 있다면, 나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 너의 공감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나머지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방도와 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재정적인 면에서 앞으로 희망이 있을 경우에는 집세를 반으로 아낄 겸 외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할까 한다. 거기다 이곳에서 나쁜 음식에 쓰는 돈이면,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사실 나에게도 필요한 건강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동시에 모델을 구하는 데도 유리하리라.
때때로 나는 영국에 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런던에서는 ‘런던 뉴스’와 ‘그래픽’ 지에 버금가는 중요한 잡지 ‘픽토리얼 뉴스’를 창간했다. 아마도 거기에 일자리와 급료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런던의 화가들과 접촉하게 되면 거기서 상당히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템즈 강의 조선소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을 제작할 수 있을까!
지난 여름에 그린 습작품 중 몇 점을 벽에 걸어 두었다. 새로운 것들을 제작하는 가운데 결국 그것들에도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그 유화들은 겨울과 봄 동안의 내 데생에 도움을 주었으며, 이 마지막 데생을 할 때까지 이걸 지속해 나갔다. ***그렇지만 이제 한동안은 유화를 그리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풀밭에 앉아서 그물을 수선하는 여인들을 다소 큰 크기의 유화로 그릴 작정이었으나, 너를 볼 때까지는 포기할 것이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수반될 비용 때문에 감히 계속해 나가야 하는 지도 의문이다. 현재는 여름 풍경을 담은 수채화를 일곱 점 제작했다.
감자를 캐는 사람들을 담은 커다란 그림을 제작할 계획을 끊임없이 세우고 있다. 이번 계절에는 반밖에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년까지는 끝낼 수 없겠지만. Van der Weele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자주 찾아가 볼 생각이다. 그의 그림 ‘모래를 선적하는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감자를 캐는 사람에 그가 관심을 보이리라 믿으며, 아마 내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데 뭔가 도움이 될만한 암시를 주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많은 습작들을 해야만 하며, 데생보다 그게 더 애를 먹일 거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므로 올해에는 더욱 많이 그림(painting)을 그려야만 한다. 그러면 서광이 따르리라. 오, 테오야, 돈을 좀 더 쓸 수만 있다면 훨씬 더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 * *
열병이거나 신경 과민,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겠지만--나는 잘 모르겠다--몸이 좋지 못하다. 다른 것과 관련해서 네 편지에 적힌 그 표현, 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기대를 한다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지난 밤에는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오늘 아침에는 이른 시각부터 온갖 걱정거리가 나를 때려눕히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한꺼번에 갑작스럽게 몰아닥쳤다. 집주인, 화구상, 빵장수, 식료품 장수, 그 밖에 잡다하게 이것 저것 지불해야만 했고, 그러고 나니 거의 한 푼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그러한 일이 몇 주고 계속 되다보니 저항할 힘이 점차 줄어들고, 피로감만 엄청나게 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순간에는 차라리 피와 살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졌더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더 이상 미래를 명료하게 바라볼 수도 없으므로 그러한 일은 나로서는 감당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말로서 그걸 표현할 수가 없으며, 거기다 왜 내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내 온몸을 거기에 바쳤다. 그래서 적어도 어느 순간에는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동생아, 하지만 인간은 실제적인 삶에서 어떤 것에 자신의 힘과 생각과 기력을 바쳐야 하니? 인간은 뭔가 선택을 한 뒤 ‘나는 이것을 하리라.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리라’라고 하지 않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나쁠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그는 벽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말해서, 그는 그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니?
돌이켜보니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Borinage에서 병에 걸려 죽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게 짝이 없다. 이렇게 너에게 짐만 되고 있으니. 그렇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은 여러 시기를 겪어내야 하며, 그가 최선을 다 쏟아부어 넣는다면 그 와중에 제작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의 노력을 연관성과 경향, 목표 등의 점에서 고려하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현재로서는 사정이 안 좋다. 내 혼자만이라면! 하지만 여자와 아이들 생각도 해야한다. 누군가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걱정거리를 토로할 수는 없지만, 정말 오늘 같은 경우엔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일만이 유일한 구제책이다.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네가 이제 사진들을 갖고 있으니까, 그 사진들을 보면 내 심리 상태가 어떠한 지 더 잘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내가 현재 제작하고 있는 데생은 단지 내 의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그림자는 이미 확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고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정말 진정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끈기있고 규칙적인 작업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따금 생각이 난 듯이 작업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악몽이다. 가능한 한 돈을 적게 쓰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을 정말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우울하게 하리라.
문제는 작업의 가능성이 작품을 파는 데 달려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팔지 못할 뿐더러, 다른 수입이 없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점차적으로 따라올 발전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안감과 초조감이 가중된다.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장 시간 산책이라도 해서 이 모든 걸 떨쳐 버려야 겠다.
오, 테오야, 일은 곤란과 걱정거리를 불러오지만, 아무런 활동도 없는 삶의 비참함과 비교할 때 그게 뭐 대수겠니?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괴롭히거나 낙담시키지 말고 서로를 위안하도록 하자.
Blommers와 유화 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내가 지속 해나가기를 바란다. 나 역시도 지난 번 열 점 혹은 열두 점의 데생을 끝마친 뒤로, 똑같은 방식으로 제작을 하는 대신에, 내 방향을 바꾸어야 할 지점에 이제 도달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만성적인 질환이 되지 않도록 먼저 우울증부터 정복을 해야 한다. 그걸 극복하는 수단과 방법을 생각해 왔으나, 내 기력과 덧붙여 내 육체적 힘을 새롭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몸이 나빠져 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돈이 몹시 필요하다. 당장에 건강을 회복하고 물감 상자도 고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나중에는 손 쓰기가 더욱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나와 유사하게 우울증의 시기를 겪고 그걸 완전히 정복한 많은 사람들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 로마 학교(Ecole de Rome)***를 거쳐갔거나 한 동안 인물화에 매달려 끈질기게 분투한 사람들 거의 대다수는 과정이 끝날 무렵에는 비교적 숙련되고, 상당히 정확하게 그린 그림을 보여주지만, 거기에는 ‘고통에 찬 영혼(une ame en peine)’의 뭔가가 있어서 보기에 그다지 즐겁지가 않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은 그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쉴수 있게 되면 곧바로 사라지게 된다. 확고한 과정의 구속 아래 놓이는 일 없이, 그리고 단지 내 데생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열성껏 인물을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부었다. 바로 그러한 긴장과 과로로 나는 이러한 우울증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작업에 매달린다. Weissenbruch가 한 것처럼 하라는 너의 생각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자그대로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주일 동안 간척지에 가는 것은 이 주일 동안 집에 머무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집에 있다고 해도 이 이 주일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제재와 양식을 바꿈으로서 변화를 꾀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물 습작을 마친 다음부터는 바다와, 청동빛 감자잎, 그루터기만 남은 들판, 혹은 쟁기질한 땅 등을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인물이 항상 나를 끌어당긴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네가 볼 수 있도록 유화 습작을 몇 점 여전히 계속해서 그렸다. 마지막으로 그린 습작들은 내가 보기엔 색깔이 좀 더 확고하고 견실하다. 그래서 일례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제작한 몇 점, 진창길에 서 있는 남자를 그린 것은 정감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대부분은 풍경에 대한 인상인데, 내 생각에는 그것들에도 뭔가가 있다.
유화를 그려나가는 가운데 나는 최근에 색채에 대한 어떤 감각 같은 것이 내 안에서 깨어나는 걸 느꼈다. 이전에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다르며, 더욱 강렬하다. 나의 현재의 신경 과민이 내가 오랫동안 추구하고 생각해 왔던 작업 방식에 일종의 혁명을 불러온 듯하다.
나는 종종 좀 덜 건조하게 작품을 제작하려 했으나 몇 번이고 거듭거듭 항상 똑같은 방식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제 대상의 관절을 찾고 구조를 분석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조금 느슨하게 하고 속눈썹을 통해 좀 더 보려고 하니까, 서로서로 대비되는 색채의 부분처럼 대상들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게 된다.***
너에게 숲의 몇 그루 나무 줄기를 그린 작년의 유화 습작이 있지. 그게 색채화가의 습작품에서 보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진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몇 색채는 정확하다. 하지만 색채가 정확할 지라도 그 색채들은 당연히 주어야 할 그런 효과를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기 저기 물감을 두텁게 칠했지만 효과는 너무 보잘 것 없다. 나는 그 습작이 하나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지금 막 끝마친 작품들을 생각해 볼 때, 두텁게 칠하지는 않았으나, 색채가 보다 더 섞여져서 색채가 좀 더 견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붓질이 서로를 덮어주기 때문에 그 결과 좀 더 부드럽고, 풀밭이나 구름의 푹신함에 좀 더 가까워졌다.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어떻게 발전될 지 궁금하다. 나는 때때로 내가 외 좀 더 색채화가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겨왔다. 내 기질은 그러한 면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데도, 이 점에 있어서는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이제 나의 가장 최근의 습작품들은 다르다는 걸 분명히 본다. 네가 그것들을 보았더라면 하고 바라는데, 너 역시도 뭔가 변화가 오고 있다는 걸 본다면, 나는 우리가 올바른 도정에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감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일례로 이 두 장의 습작품들은 비가 내리는 동안에 제작한 것으로, 그걸 볼 때 나는 그 우울한 비오는 날의 정감이 되살아 나는 걸 본다. 그리고 인물에는, 그게 몇 가지 색깔을 칠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데생의 정확함으로는 불러올 수 없는--하긴 거기에는 데생이 없다--생명력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 습작들에는 대상을 속눈썹을 통해 볼 때 윤곽선이 색채의 얼룩덜룩함으로 단순화되면서 나타나는 그런한 신비감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
시간만이 말해주겠지. 하지만 현재 나는 색채와 색조에 있어서 뭔가 다른 것을 본다.
배가 때로는 벼랑과 모래 둑을 넘어서는 파도에 휩쓸리지만, 폭풍우로 인해 난파되는 것을 피하는 경우처럼, ***혹 광적으로 맹렬히 일에 몰두하는 것이 나를 나아가게 해주지는 않을까 하고 바라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실패한다해도, 내가 잃어버릴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삶이 그대로 시들기 보다는 결실을 맺기를 추구한다.
동생아, 곧 와줄 수 있겠니? 내가 얼마나 지탱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정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며, 기운이 점점 더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분주한 동안에는 허약함을 그다지 느끼지 않으나, 화가 앞에 서 있지 않는 사이사이에는, 힘겨움이 이따금씩 나를 사로잡는다. 때로는 현기증이 일어나고, 두통도 있다. 조금밖에, 예를 들자면 우리 집에서 우체국까지, 걷지 않았는데도 피곤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오, 물론 나는 포기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힘을 얻도록 애쓰야 겠다. 오랫동안 끼니를 건너 뛰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내 몸은 건강하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끼니를 건너 뛰든지 아니면 일을 덜 하든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난 가능한 한 전자를 선택했다.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테오야. 몇몇 사람들은 사정을 알게되면 ‘오, 물론이지. 우리는 오래 전에 이미 이렇게 될 걸 예견하고 예고했었지’라고 말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끈기있게 힘을 회복하고 두 다리로 다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잘라버릴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데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인한 쇠약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질병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한 사람들은 다시 그럴 것이며, 그건 가장 질이 나쁜 중상이다.
지금 막 Scheveningen에서 돌아왔는데, 네 편지가 와 있구나. 편지의 내용 중 여러 가지가 나를 즐겁게 한다. 첫 번째로 미래의 어두움이 우리의 우애를 바꾸거나 방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기쁘다. 더 나아가 네가 내 작품에서 발전을 본다는 것도 기쁘다. 너의 수입을, 직간접적으로, 적어도 여섯 명이 나눈다는 건 분명 놀랄만한 일이다. 하지만 나의 백 오십 프랑을 네 명이서 다시 나눈다는 것도, 거기에 모델 비용과 데생과 유화 재료 비용도 포함된다는 걸 고려해 볼 때, 상당히 놀라운 일 아니곘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다. 오늘 아침 삼 주 전에 램프를 수리해 준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그의 강요에 못이겨 그 때 토기도 몇 점 샀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외상을 막 갚으면서 그에게는 갚지 않았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리러 왔던 것이다. 그는 시끄럽게 욕을 하고 저주를 마구 퍼부어 댔다. 나는 그에게 지금 당장은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돈을 받는 대로 갚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에게 집을 나가달라고 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어 마침내 그를 문 밖으로 밀어냈는데, 아마 그는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내 멱살을 잡고는 벽에다 집어 던져 나는 마룻바닥에다 벌러덩 눕고 말았다.
너도 보다시피 이러한 일이 우리가 직면해야만 하는 작은 비참함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 사내는 나보다 건장하므로, 두려운 것이 없다. 상대 해야하는 소 상인들은 모두 그런 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르지 않아도 제 발로 오지만, 불행하게도 지불이 한 주 이상 늦어지면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하지만 어떡하겠니? 그들 자신들도 때로는 어려운 지경에 있곤 하는데.
동생아, 괴로움으로 어쩔 줄 모르겠다. 이곳에서의 삶은 부족한 바로 그 작은 것 때문에 불가능하다. 포기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두렵다. 최근에 들어 상황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으며, 성심성의껏 분별력 있게 일을 해나가 이전의 친구들을 다시 얻겠다는 나의 계획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자꾸만 허약해 진다는 나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이전에도 가끔씩 그러곤 했는데 이제 양어깨 사이와 핏줄에 고통으로 자리하고 말았다. 경험으로 보건대 조심하지 않으면 그렇게 쉽사리 극복할 수 없게 되고 말리라. 거기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있다. 심장도 마침내 영향을 받고 말았다고 판명이 나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내 병이 신체적인 원인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신경의 과도한 긴장의 결과인지 나로선느 구분할 능력이 없다.
부지중에 나는 종종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 덧붙인다. 내가 그림을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오랫 동안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에 대해 확정적인 뭔가를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우연찮게 그 사람의 삶을 알게 되었거나, 우리가 자신과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두고 보자면, 내 생각에는 내 몸이 몇 년간은, 그러니까 육 년에서 십 년간은, 버텨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경솔한 짓은 아닌 듯 하다. 이것이 내가 기대하는 시기이다. 그 나머지 시기는, 많은 것이, 첫 십 년에, 그래 십 년이라고 해두자, 달려있을 것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뭔가를 말한다는 건 순수한 추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시기에 우리 자신의 기력을 다 써버린다면, 마흔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내 자신을 아낄 의도는 없다. 행동이나 어려움을 피하지도 않으리라. 더 오래 살든 더 짧은 기간을 살든 별로 관심이 없다. 거기다 의사들이 하는 것처럼 내 신체를 돌볼 능력도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목표가 건강을 보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Rappard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일과 먹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차라리 전자를 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작업은 작품으로 남지만 우리는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삶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그걸 잃을 것이오. 그러나 나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잃고자 하는 자는 그걸 발견하게 되리라’라는 신비스러운 말에는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 때 Rappard에게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 한 가지 ‘몇 년 내에 나는 어떤 작품을 끝마쳐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지속해 나간다. 부적절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래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고요와 평정심 가운데,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집중해서, 또 가능한 한 간단명료하게 작업을 해야만 한다. 나는 세상을 향해 내가 빚과 의무감을 느끼는 측면에서만 관심을 갖는다. 나는 삼십 년 동안 그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아왔으므로, 그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데생이나 그림의 형태로 기념물 같은 것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 데생이나 그림은 미술의 어떤 유파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리라. 따라서 이 일이 목표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가운데, 해나가는 모든 일은 단순화 된다. 현재는 작업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본다. 내가 더 오래 산다면, 그거야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tant mieux), 그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테오야, 우리가 결정을 봐야 할 것이 있다. 그런 일이 즉시 일어나리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앞으로 더 암담해 질 수도 있다. 화실에 있는 내 습작품과 모든 작품들은 분명 너의 소유물이다. 그런데 내가 세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내 물건을 파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 경우에 나는 내 작품을 집 밖으로 안전하게 빼내고 싶다. 이후의 작업을 위해 필요한 습작들이나 제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들, 이런 것을 그냥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거리에서는, 각자 자기 몫의 세금이 책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세금을 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나도 그렇다. 세금 평가원들이 두 번 집으로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식탁용 의자 네 개와 거친 제제목 탁자를 보여주면서, 집에는 사치품(articles de luxe)이 하나도 없고 아이들뿐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습작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다. 네가 화실에 올 때 비록 정해진 시장 가격은 없지만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을 늘 느낀다. de Bock의 화실에 두 점의 바다 풍경을 두었는데, 하나는 폭풍이 부는 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고요한 바다이다. 그런 종류의 것을 지속해 나가고 싶다. 내 있는 힘껏 그것에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하리라. 오늘 아침의 사건은 나갈 길을 찾는 것, 시골로 가 좀 더 작은 집에서 사는 것이 내 의무라는 걸 분명히 암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바다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걸린다.
잘 있거라, 동생아. 기분이 상당히 울적하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작은 충돌에 관한 내 이야기에서 보다시피 사람들은 나에게 조금치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실크 모자를 쓰거나 그와 유사한 옷차림을 했더라면, 좀 더 거리를 두었으리라. 사람은누구나 자존심이 있으므로 그런 일은 유쾌할 리가 없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 덜 서투르다면 미래를 덜 어둡게 보리라.
너에게 솔직히 이야기 하는데 내가 구필 화랑에서 근무하던 중에 익히게 된 미술에 대한 모든 생각 중에서--비록 내 취향은 바뀌지 않았지만--실제 제작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작품들은 화상들이 이러 저러 하리라라고 생각하는 대로 제작되지 않으며, 화가들의 삶도 다르고, 습작도 다르다.
일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용기를 잃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남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부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남을 것이며 우리의 우애가 식지않고 지속되어 갈 거라는 점이다. 불운이 닥치면 우리는 용감하게 헤쳐 나가리라. 하지만, 동생아, 일심으로 하나가 되자. 그리고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나이다. 네가 없었더라면 지금 나의 위치에까지 도달하지도 못하였을 테니까. 너는 아무런 경력도 갖지 못했을 사람을 도와 뭔가를 하게 했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무엇을 성취할 지는 누가 알겠니?***
우리가 벌 받지 않고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우리가 보기에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을 경우에도, 선한 행동을 해 그러한 선행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갈등에 대해 너는 이야기한다.*** 나도 그런 갈등을 안다. 우리가 양심을 따를 경우--양심은 나에게는 최상의 이성, 이성 속의 이성이다--우리보다 피상적인 사람들이 훨씬 더 현명하고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조롱할 때 우리가 그릇되게 혹은 어리석게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렇다. 그건 때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려움이 넘치는 파도처럼 솟구치는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지경이며 덜 양심적이었더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일을 할 때는 예술에 무한정한 신뢰를 느낀다. 그리고 내가 성공할 것이라는 걸 확신한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쇠약한 날에는 그러한 신뢰가 줄어들며, 의심이 나를 사로잡는다. 물론 나는즉시 다시 일에 착수함으로써 그걸 정복하려 한다. 여자와 아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그 작은 놈이 기쁨으로 까르르 거리며 내 앞으로 아장아장 기어올 때, 나는 모든 게 잘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 아기가 얼마나 자주 나에게 위안을 안겨다 주었는지! 집에 있을 때는 아기는 한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내 코트를 잡아 당기거나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 무릎에 앉히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는 언제나 행복하다. 일생 동안 이러한 기질을 간직할 수 있다면, 아이는 나보다 더 명석하다고 봐야겠지.
좋은 사람이 잘못되고, 나쁜 사람이 잘 되는 그러한 불가피성이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때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한 생각을 부분적으로는 신경을 지나치게 혹사한 결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면, 사정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실제로는 암담하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미치고 말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체력을 강화하고, 나중에 사나이답게 일에 착수해, 그러한 우울을 치명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한층 나으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 두 가지 방편을 계속해서 이용해야 한다. 궁극에 가서는 우리는 우리의 기력이 증가하는 걸 느낄 수 있으면 곤경을 견뎌나가게 되리라. 수수께끼는 남고, 슬픔과 우울도 남지만, 그 영구한 부정은 결국에는 성취되는 긍정적인 일에 의해 균형을 이루리라. 삶이 단순하고, 사정이 옛날 이야기나 보통 성직자의 진부한 설교처럼 아무런 복잡성도 없다면, 길을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가 않으리라.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사정은 무한하다 할 정도로 복잡하면, 옳고 그른 것은 자연에서 흑과 백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투명하고, 검고, 계획적인 잘못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회반죽을 칠한 벽과 같은 흰빛은 더욱 더 피해야만 한다. 그것은 위선과 영구적인 바리새주의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따르고 정직성을 견지하려 애쓰는 사람은, 내 생각에, 비록 실수와 실책, 실패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완성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그에게 성직자의 특별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는 속좁음보다 한층 폭넓은 연민과 자비심을 가져다 주리라.
우리는 이류 중의 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절감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종국에는 우리는 결국 침착한 평정심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발전된 단계로 끌어 올려 그것이 보다 너 나은, 더 고원한 자아의 목소리가 되도록 할 수 있으리라. 그 때 우리의 평범한 자아는 그것의 하인이 되고. 그리고 회의주의나 냉소주의로 돌아가지 않으며, 사악한 조롱꾼에 속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와 똑같은 것을 예수님에게서도 본다. 그도 처음에는 평범한 목수였으나 자신을 다른 무언가로,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끌어 올렸다. 그는 연민과 사랑과 선함과 진지함으로 가득한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에 이끌린다. 일반적으로 목수의 도제는 속좁고, 무미 건조하며, 인색한 목수가 된다. 예수에 관해 뭐라고 하든 간에, 그는 화실 뒤뜰에 있는 목공소의 주인과는 세상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가졌다. 목공소 주인은 자수성가 해서 집도 가지게 되었지만, 예수보다 훨씬 더 허영심이 강하며, 자신이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내 힘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건강과 힘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를 바란다. 사실 야외에 오랜 시간 나가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갖고 있을 때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내 힘이 돌아오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착상을 얻게 되고, 작품의 무미건조함도 극복하게 되리라. 내 전 작품이 하나같이 빈약하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게 나에게는 대낮처럼 명료하게 되었으며, 철저하고 광범위한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걸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런던이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다면, 나는 거기에서 시도를 해보리라. 어딘가에는 분명 내가 다른 사람들만큼 잘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겠지.
어제와 그저께 나는 Loosduinen 근처를 산보했다. 나는 마을에서 해변까지 걸어갔는데, 거기서 옥수수밭을 많이 발견했다. 브라반트에 있는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올해에는 보지 못하고 지나친 풀베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등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도 있으리라.
전에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해변에는 울타리, 아니 우리가 둑이니 잔교니 방파제니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풍파에 시들린 돌과 뒤틀린 가지들로 만든 몇몇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것들 중 하나에 앉아 밀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내 코 앞까지 다가와 내 물건을 챙겨 서둘러 빠져 나와야만 했다.
헤이그와 Scheveningen 부근의 사구들은 지난 십 년 내에 전형적인 특성을 상당히 손실했으며, 매년 다른 좀 더 경박한 특성을 더욱 더 띠게 되었다. 십년이 아니라, 삼십 년, 심지어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화가들이 진정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구를 그리기 시작한 시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 당시에는 이것들이 지금보다는 Ruysdael적이었다. 도비니적인 것이나 코로의 정감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보다 더 이전 시기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때에는 입욕객들이 이 토양을 밟지 않았었다. Scheveningen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곳의 자연은 더 이상 처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자연의 처녀성이 내가 Loosduinen 근처를 산보하는 가운데 나에게 엄청나게 다가왔다.
최근에 고요와 자연만이 나에게 그런 식의 인상을 준 적은 거의 없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은 완전히 뒤에 남겨진 바로 그러한 지점이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필요한 그런 것이다.
이 주변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힘으로 가득차 있음을 본다. 네가 올 때 함께 그곳에 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흰 길 위에 남아있는 초라하고 다 부서져 가는 조가비 운반용 수레 한 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관목 숲으로, 우리 주위에 문명이라고는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곳. 우리가 거기에 함께 있게 되면, 너와 나는 일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가에 대해 확고한 결심을 느끼게 될 그런 분위기로 휘말려 들리라.
그런 느낌은 그곳의 주변 환경이 나의 다소 암울한 분위기와 우연찮게 조화를 이루어서 일까? 아니면 앞으로도 똑같은 인상을 받게 될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현재를 잊고, 미술에서의 커다란 혁명이 시작된 시기, 밀레와 도비니, Breton, Troyon, 코로 등이 선두 주자로 나서던 그 시기를 생각할 필요성을 느낄 때면, 그곳에 다시 가 보리라.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할 것이 있다. 내 의도가 너의 의도와 같다는 걸 보여줄 그런 것으로, 우리가 당장에 결정을 지을 수 없는 몇 가지 것에 있어서는 결정하는데 시간도 필요하고 하니까 나를 성급하게 몰아부치지 말았으면 한다. 너와 나 사이에는 끈이 하나 있는 데 그건 바로 미술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계속해서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또 우리가 서로를 어릴 때부터 알아왔으며, 수천 가지의 다른 것들이 우리를 점점 더 일치시켜 줄 거란 걸 잊지 말자.
너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미안하다. 아마도 일이 잘 풀려 나가겠지. 하지만 상황이 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면, 나에게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렴. 너의 양어깨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짐을 올려놓느니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할 것이다. 상황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나는 물건을 나르는 일이든 다른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라도(n'importe quoi) 즉시 하러 갈 것이다. 그리고 미술은 좀 더 나은 시기가 올 때까지 잠시 중단하리라. 적어도 유화를 그리거나 화실을 갖는 것 등은. 돈 문제에 있어서 네가 나를 덜 돕는다 해도 우리의 우애는 그대로 유지 하도록 하자. 이따금씩 투덜거리기도 하리라. 하지만 그건 너니까 거리낌 없이 털어 놓는 것으로, 네가 모든 것을 해주기를 바라서라기 보다는,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런 걸 바래서는 안 되지 않겠니, 동생아, 내 답답한 심정을 발산시키기 위해서이다.
작품에 대해 내가 다르게 말했어야 할 뭔가를 너에게 말하지 않았나 두려우며, 어렴풋이 너에게 상처를 준 느낌이 든다. 네가 떠났을 때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를 평범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는 평범한 화가라는 것외에 다른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그게 유별난 것이라고 보지도 말고, 미래를 암흑이라고도 또는 눈부신 빛이라고도 생각하지 말아라. 회색빛이라고 믿는 것이 더 나으리라.
내 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문제는 내 화법의 무미건조함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로는 점점 더 명료해졌다. 나는 또 내 육체적 상태가 그렇게 되고만 한 요인이라는 걸 요 근래에 너무도 명료하게 보게 되었다. 결점이 너무도 지속적이므로 그걸 수정하는 게 급박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평정하게 해줄 그런 조처를 취해야만 한다. 그게 첫 번째 해야할 일이다. 한 가지는 네가 분명히 해두기를 바란다. 즉, 식품, 옷, 안락함이나 필수품 이런 것들을 아끼는 외에 다른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서 절약 했다면, 나쁜 뜻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 아니겠니? 그리고 작업이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식품이나 다른 필수품에 돈을 좀 더 쓸 수 있어야만 하지만, 더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결국, 내 삶은 돈의 가치가 없을 지도 모르는 데, 왜 그것에 대해 걱정해야 하겠니?
옷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이 내게 준 걸 입는다. 아버지와 네가 준 것은 치수가 달라서 때로는 생각처럼 맞지 않는 것을 입어 왔다. 옷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느니 네가 그런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너에게 그걸 상기시키고, ‘테오야, 내가 아버지의 목사용 긴 코트를 입고 걸어다니던 때가 기억나니?’라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나로서는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 다투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성공을 거둔 뒤에 함께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웃어버리는 것이 몇 갑절 더 나은 듯이 보인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은 나의 호의와 열성이다. 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 주길 바라며 내가 뭔가 부조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까 의심하지는 마라. 그리고 내 방식대로 조용히 살도록 해다오. Mauve 매형이나 Herkomer가 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앞을 내다보고 충실하게 작업을 해나가다 보면 조만간에 화가들 중에서 평생 친구가 될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갈구하거나, 사람들을 찾거나--이건 나의 기이함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 적다--하기 보다는 조용히 작업을 해나가는 가운데 더 빨리 찾아 오리라. 내 행동이나 복장의 기이함은 나 자신도 이따금씩 알아차리긴 하지만, 네가 나 보다도 더욱 더 주목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공명하지 않는다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작품을 파는 문제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걸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고 싶구나. 내 생각에는 애호가들이 스스로 내 작품에 호감을 느낄 때까지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본다. 내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은 도움이 되기 보다는 해가 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걸 두려워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걸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돈을 버는 문제에 대한 내 관념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건 일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해나가게 해다오. 사정이 그렇지 않거나, 내가 작품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 보기를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아, 인간의 두뇌가 모든 걸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뇌막염에 걸린 Rappard의 경우를 보아도, 회복하기 위해서 독일까지 여행해야만 하지 않았니? 내가 내 작품을 놓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기 보다는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지금까지 결과가 어땠니? 거절이 아니면, 그럴 듯한 약속으로 미루는 것 아니었니? 분명히 밝혀두건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나는 내 일에 대해 기력이 주는 느낌이다. 우리가 이제 그런 일로 시간을 잃지 앟는다면 느리지만 확실한 진보를 이룰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길은 너무 멀리 보거나 너무 높이 열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런던을 생각할 때면, 활기를 돋구는 생각이긴 하지만, 문제는 다만 ‘지금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 순간이 과연 옳은 시기인가? 사실 내 자신에게 “너는 충분히 무르익지가 않았어. 네가 말하려는 것은 아직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그것에 다소 겁을 내고 있어. 지속해 나가는 것이야. 자연을 보고 충실하고 확고히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야. 다시 한 번 그걸 히스와 사구에서 찾도록 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하는 것이다.
내 작품을 두고 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모두 잘 정돈이 되고 확고하여 내가 하는 말, 즉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지속해 나간다 하더라도 내 데생이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받아들여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구필 회랑을 떠날 때의 내 행동 때문에 내 진정한 성격을 오해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사업이 나에게 있어서 현재 미술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면 나는 보다 확고하게 행동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나의 길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으며, 거기다 나는 보다 수동적이었다. 사람들이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했을 때, 나는 ‘여러분들이 내가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갑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었다. 신중함이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고 벌써 너에게 이야기를 했었지. 내 작품에 결점이 있다는 걸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잘못 된 것은 아니며, 오랜 추구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 할 지라도 내가 성공하리라는 것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성공을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믿는다.
오늘 날의 미술 감상과 이전의 감상에는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미술 작품의 제작과 판단 양측 모두에 열정이 더 있었다. 이 작품 혹은 저 작품이 신중하게 선택되었으며, 한 쪽 혹은 다른 쪽을 기운차게 받아들였다. 활기가 더 넘쳐 흘렀다. 현재는 내 생각에는 변덕과 포만감의 정신이 있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더 느슨해졌다. 얼마 전에 나는 밀레 이후로 마치 정상에 도달한 후 쇠미가 시작된 것처럼 뚜렷한 퇴보가 눈에 보인다고 썼었다. 이것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조금만 더 진보한 상태라서, 내 작품이 더 팔릴 만하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리라. ‘사업 부분은 너에게 맡겨 두겠다. 판매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치도 관여하지 않겠다. 나는 그 영역 바깥에서 살아가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이건 너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을 위하고, 평화를 위해서, 좀 더 인내해 주기를 진정 바란다. 끝나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의심하지 말기를. 우리가 이 점을 고수해 나간다면, 어느 정도 재정적인 성공을 거둘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언제나 화합과 조화 속에서 살게 될 거라는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낀다. 때로는 아무것도 팔지 못해 어려운 시기를 겪겠지만, 또 다른 시기에는 작품을 팔아 좀 더 편안하게 살기도 하면서.
나에게는 분별력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방편이 있다.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풍경에 특색이 있는 시골 어딘가로 가서 좀 더 생활비가 적게 들게 사는 것이다.
현재 나는 또 다시 작업에 상당히 몰두하고 있다.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해라. 그리고 우링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나 우리의 성공을 앞당길 것을 생각해 보렴. 나너의 호의와 우애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네가 이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내 감정에 공감을 하는지 몹시 알고 싶구나. 우리가 그녀를 거리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진정한 용서와 잊어줌으로 자신을 개선하겠다는 그녀의 약속에 답했으면 한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이 그녀를 파멸시키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이전에 내가 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않아요.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그걸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떠나야 한다면, 아이들 생활비도 있고 하니 그 정도로 충분히 벌지 못할 거라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경우에 내가 밤거리에 나가더라도, 그건 내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지, 내가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좀 더 말쑥하고 열심히 살 것, 포즈를 더 잘 취할 것, 어머니에게 가지 말 것 등 몇 가지 약속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 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세 가지 측면에서 당신이 그곳에 가는 것은 일종의 매춘이라고 할 수 있어. 첫 째 당신은 과거에 어머니와 살았는데,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밤거리에 나가도록 했다는 점이고, 둘 째는 당신 어머니가 아주 질이 낮은 지역에 살고 있으므로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은 그곳을 피하는 게 나으며, 마지막으로는 당신 오빠의 정부가 같은 집에서 산다는 점이야.’
그래서 이제 나는 아무런 꿍꿍이속 없이 완전히 용서하고 잊어버렸으며,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편을 들 것이다. 가슴 속에 들어있는 연민이 너무나도 상해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한풀 꺽이고 만다. 작년에 내가 병원에서 그랬던 것과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때 말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지금도 말한다. ‘내게 빵 한 조각이라도 있고, 나를 덮어줄 지붕이 있는 한은, 그건 당신 것이야. 그 당시에도 열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지금도 열정으로 그런 것은 아니야.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인지하기 때문이지.’
테오야, 지금 형편으로는 그녀는 개선되고 있으나, 그녀에게 거듭 거듭 확신시켜야 하며, 그럼에도 그녀는 실망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의도하고 생각한 것을 말하려 애쓸 때--드물 긴 하지만--그녀가 한 때 매춘을 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얼마나 순수한지 놀라울 정도이다. 마치 그녀의 망가진 영혼과 심장과 마음의 아주 깊은 곳에 뭔가가 남겨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가 자신을 표현하는 그 드문 순간은 들라크루아의 ‘Mater Dolorosa’의 그것이나 Ary Scheffer의 어떤 두상들을 닮았다. 그것이 내가 믿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다시 보았으므로, 나는 그녀의 깊은 감정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낀대로 확고하고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실수도 하고 기만과 만나게도 되겠지만,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묻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잘 행해야 할 일을 한다면, 커다란 악이나 절망으로부터는 구제될 수 있의라. 가장 고원한 의미에서 의무와 사랑 이 둘 사이에 처한 영혼의 투쟁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내가 의무를 택한다는 걸 너에게 말한다면 너는 모든 걸 이해하리라.
이 여자와 앞으로 행복할 것인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그렇지 못하리라--분명히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행복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순간에 너는 Nuenen에 있구나. 동생아, 내가 그곳에 없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마을의 낡은 교회 안뜰에게 함께 거닐거나 베짜는 사람들의 집을 들여다 보거나 한다면 하고 바란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너도 나와 단지 함께 걷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는 걸 정말 이해할 수가 없으면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한다. 내 가슴은 너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지만 나로서는 거리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심중 유보 없이 너나 아버지를 보는 그 짧은 순간도 할애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우리의 확고한 유대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만날 때 예의 범절이나 옷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다시 이야기 하지 말았으면 한다. 너도 보다시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내 고집을 피우는 대신에 가능한 한 물러서려고 한다. 그런데 예법이 총체적인 소원함을 불러온다든지 하는 일은 없도록 하다. 일 년에 한 번 서로를 보는 그 눈부신 한 순간이 어둠에 휩싸이도록 하지는 말자.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그 고요하고, 조용한 시골 너머로 아름답게 해가 지는 모습을 몇 번 보기를 바란다.
Rappard가 나를 찾아왔는데, 커다란 데생들을 보고는 호의적인 평을 해주었다. 내가 다소 몸이 약한 걸 느끼는데, 그게 데생의 제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의심하는 듯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함께 Drenthe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며칠 내에 그곳에 다시 갈 작정이다.
나도 거기로 가고 싶다. 어느 정도로 가고 싶은가 하면 그곳으로 가구를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인지 벌써 정보를 수집해 두었을 정도있다. 이 가구들은 별 가치가 없거나 한 푼도 못 받겠지만, 다시 다 구입하려면 경비가 엄청나게 들 것이기 때문이다. 내 계획은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일단 거기에 가면, 히스와 황무지 둘러싸인 그곳에, 점점 더 많은 화가들이 정착하는 그곳에 영원히 머무를 생각이다. 지금 추세로 보아서는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종의 화가들의 부락이 생겨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일 년에 백오십에서 이백 길더는 절약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모델비도 거기서는 다를 것이다. 같은 돈이면 더 나은 모델들을 더 많이 쓸 수 있고, 않으면 적은 돈으로 지금과 똑같은 수의 모델을 고용할 수 있으리라.
오늘 아침에는 Van der Weele에게 들러서 그가 Gelderland에서 가져온 습작품들을 보았다. 그리고 Drenthe로 가고 싶은 갈망은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더욱 더 커졌다. 운 좋게도 그는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마을들 중의 하나를 알았다. 그곳의 풍경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특색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올해에 유화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지 못해서 유감이라고 다시 말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오, 그것에 신경쓰지 마.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갖고 있지. 그가 다른 누구에게서 뭔가를 배운다면, 결과는 종종 자신의 결점에다가 스승의 결점까지 합쳐서 얻게 되지. 그러니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조용히 자네 길을 가게.’ 마음속으로 나도 그와 똑같이 생각한다.
오늘 C M에게 습작품을 여러 장 보낸다.
작품에 관한 너의 수정된 견해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너에게 이루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구나. 그건 Rappard의 견해와 일치하며, Van der Weele도 그것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은 모든 화가의 삶에는 엉터리 없는 것을 제작하는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내 경우에 있어서는 그 단계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는 내가 발전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에는 이미 진정성과 단순성이 있으며, 너 자신이 표현한 대로 남성적인 개념과 정감이 있다.
작년에 Weissenbruch 씨는 나에게 이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 ‘조용히 자네 자신의 길을 가게. 나이가 든 다음에 자네의 첫 번째 습작들을 만족스럽게 보게 될 걸세.’
유화를 많이 그리는 것이 현재로는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외근직을 현명치 못한 일이라고 네가 생각한다니 기쁘다. 그건 인간을 반쪽으로 만드는 반쪽 수단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여자의 성격이 얼마나 안정적이지 못한지! 그녀의 어머니를 다시 보러 가지 않겠다던 최근의 확고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거기에 가고 말았다. ‘그런 약속을 삼 일동안도 지키지 못하는데, 당신이 신뢰의 약속을 영원히 지켜나가리라고 내가 믿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나보다 그 사람들에게 더 속해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거의 그런 가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녀는 다시 그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오, 아니예요’라고 한다.
그녀가 그 가족 모두와 떨어져 얼마 동안 시골에서 산다면 그녀가 곧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도 않으리라. 하지만 그 너머에서 그녀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촌구석이군! 왜 나를 이곳에다 데려 왔어요?’라고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나에게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녀를 떠나는 극단책을피하려고 최대한으로 애쓸 때에도, 그녀는 그런 걸 두려워 하게 만든다.
여자가 전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현재로서는 나보다 더 나은 친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만 해준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신뢰를 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그녀의 적인 사람들을 믿음으로써 나를 진짜 힘도 못쓰게 한다. 그녀가 나쁘게 행동한다는 걸 보지 못한다는 데 놀라움을 느낀다. 어쩌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떠난다면 그게 그녀에게는 나을 거라고 믿는다는 너의 말은 나 자신도 그녀가 그녀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나에게 애착을 갖고 있으나, 그녀가 나와 그녀의 사이를 어떻게 소원하게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질 못한다. 그리고 내가 그걸 이야기 하면 그녀는 ‘그래요, 나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그건 그래도 그녀가 기분이 괜찮을 때의 대답이다. 기분이 나쁠 때의 대답은 더욱 사람을 분통 터지게 한다. 그럴 때는 대놓고 ‘그래요, 난 무관심하고 게을러요. 항상 그래왔죠.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에요’라거나 ‘그래요, 내가 버림받은 여자라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물에 빠져 죽는 걸 거예요’라고 한다.
그녀의 결점들이 나를 화나게 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러한 시기는 작년에 다 거쳤다. 이제 그녀가 똑같은 실수에 빠져드는 걸 볼 때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면 나는 그녀의 그러한 점을 참고 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나의 견해는 그녀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녀는 선한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선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녀를 정말로 구하고 싶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을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리라는 걸 너는 이해 하리라.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구해줄까?
현재 상황에서 네가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정말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고, 즉시 Drenthe로 가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내 의도이다. 여자가 나와 함께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녀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녀가 어머니와 그 문제를 상의한다는 걸 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며, 알아보려 묻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오려 한다면 그렇게 하리라. 그녀를 떠나는 것은 그녀를 매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어떻게 그녀를 그것으로부터 구하려 애쓰던 똑같은 손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니?
나는 Van der Weele와 모든 문제를 다시 이야기 했다. 그는 오후 한 나절을 내 화실에 머물면서 내 습작들을 하나 하나 보았다. 그 중 몇 개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다시 칠하기도 했다. Weissenbruch 씨도 어느 날 아침 나를 보러 왔다.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그 분은 내가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진보했다고 이야기 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옛날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은 상당히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Van der Weele도 그랬다. 하지만 유화를 많이 그려야 한다. 나는--탁 털어놓고 말한다면--백 장 정도 진지한 습작을 유화로 그려야만 한다. 꼭 그걸 해나가리라. 그리고 그 습작들은 실제적인 제재, 즉 특색있는 자연의 일부도 갖게 될 것이다. Wisselingh는 얼마 안 있어, 아마도 조만간에, 나에게서 뭔가를 살 것이다. 그리고 이번 가을이나 겨울 초입에 그러니까 내가 시골에 어느 정도 머문 다음에 그에게 뭔가를 보내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로 합이를 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가 내 작품을 사든 안 사든 그는 나와 계속해서 접촉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작품에 대해 평을 해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생각할 때 가장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선상에서 나는 계속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늘은 여자와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녀에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으며, 현재 나의 사정이 어떤가를 충분히 설명했다. 즉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너무 벅찼던 지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 앞으로 일년 동안은 경비를 절감해야 하며, 내가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녀를 더 이상 도울 수 없게 될 것이고, 이곳에서는 다시 빚에 빠져들게 되어,빠져 나갈 구멍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 그녀와 내가 친구로서 헤어지는 것이 현명하게 대처하는 길이다. 따라서 그녀 가족들로 하여금 아이들이 있을 장소를 물색하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어서 그녀도 그걸 이해한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당신은 곧은 길을 갈 수만은 없겠지. 하지만 가능한 한 곧은 길을 가도록 해. 나도 그렇게 하도록 애쓸테니. 당신이 최선을 다하고 사물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아는 한,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아이들에게 잘 해준 것처럼 그 애들에게 그렇게 해 준다면, 또 비록 당신이 망할 놈의 결점 투성이인 보잘 것 없는 하인이고, 단지 보잘 것 없는 창녀이지만, 아이들이 당신에게서 어머니의 정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만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걸 내가 아는 한은, 당신은 언제나 내 눈에는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거야.’
오 동생아, 사정이 어떤지 알겠지?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헤어지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서로의 결점을 매번 용서하고 다시 화해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악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인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풀어 버릴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 다음에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멀리 시골로 갔다. 먼저 Voorburg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Leidschendam까지 갔다. 너도 그곳 풍경은 알고 있지. 끔찍스러운 초록빛 장난감 같은 여름 집들과 나란히 서있는 위엄있고 침착한 멋진 나무들, 그리고 은퇴한 홀란드인들의 무거운 공상이 화분, 정자, 현관의 형태로 상상해 낸 기괴한 것들. 대부분의 집들은 아주 추악하지만, 그 중 몇 채는 고풍당당하다. 바로 그 때, 사막처럼 끝이 없는 목초지 저 너머로 구름 한 덩어리가 다른 덩어리가 밀려 왔으며, 바람은 운하 저편 나무 수풀이 있는 일렬로 늘어선 시골 집에 부딪혀 깨어졌다. 그 나무들은 정말 훌륭했다. 각각의 인물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말은 각각의 나무에는 드라마가 있었다. 하지만 합쳐진 전체 풍경이 따로 떼어 본 그 응징받은 나무들보다 더욱 더 아름다웠다. 그 순간에는 그 기괴한 작은 여름 집들조차도 비에 젖어 산발한 채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므로.
그것은 나에게는 마치 기괴한 행동 양식이나 버릇을 가진 사람이나 엉뚱함이나 변덕으로 가득찬 사람도 진정한 슬픔이 그를 덮치기만 하면--재앙이 그를 닥쳐오면--어떻게 독특한 양식의 극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가하는 상징처럼 보였다. 그리고 와해되어 가는 현재의 사회가 재생의 빛에 비춰진 순간에 어떻게 거대하고 우중충한 실루엣으로 드러날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로 질러갔다.
그렇다. 내게는 자연에서는 폭풍의 드라마, 인생에서는 슬픔의 드라마가 가장 인상적이다. 오,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단지 그 정도, 실루엣의 가장자리가 두드러질 정도의 약간의 빛과, 약간의 행복이 있고, 그 나머지는 어둡게 하라.
나는 힘차게, 곧바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 그녀나 나나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혼자서 길을 닦아나갈 때 작업이 더 나아지리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그녀에게 친구로서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별은 최종적인 것이고, 결국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체념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아직도 뭔가 선한 면이 잠재해 있다고 믿지만, 문제는 그것이 벌써 일깨워 졌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네가 내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내가 내 일부를 여인에게 얼마나 헌신했는지, 다른 모든 것은 잊고, 그녀를 구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내가 환상이 아니라 ‘슬픔의 숭배’에 얼마나 내 믿음을 심었는지를 네가 느낄 수 있다면, 그러면 아마도, 너에게 조차도, 동생아,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내 내부의 영혼이 삶과 다르고 더욱 더 떨어져 있으리라. ***
얼마 전에 너는 나에게 이렇게 썼다. ‘아마도 형의 의무가 형을 다르게 행동하게 할 거야.’ 그 문제는 내가 직접적으로 곰곰히 생각해 본 것이다. 그리고 내 일이 내가 떠나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이 요구하고 있으므로, 내 생각은 내 일이 여자보다도 더욱 더 직접적으로 내 의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가 후자 때문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작년에는 문제가 달랐다. 이제 나는 Drenthe에 갈 준비가 막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나뉘기 마련이다.
일단 결정을 내렸으므로, 나는 이곳을 가능한 한 빨리 떠나고 싶다. 운임을 지불할 수 있으면 그 즉시 가리라. 짐이나, 동반자 없이, 습작을 향한 길을.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이미 그곳에는 와 있으며, 나는 그 중 얼마를 화폭에 담고 싶다.
헤이그로 돌아올 작정이냐고 묻겠지. 아니, 하지만 반 년이나, 일 년 후에는 이곳에 있는 몇몇 화가들을 만나 봐야만 하리라. 헤이그가 아주 독특한 장소라는 것에는 너도 동의를 하겠지. 사실 홀란드 미술 계의 중심지이다. 내 의도는 Drenthe에서 유화에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서 돌아올 때는 ‘화가 협회’(Society of Draughtsmen)에 입회할 자격을 인정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십이 개월 동안 유효한 여권을 준비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어디든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권리가 있으며,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Drenthe의 농부는 숙식료로 하루에 일 길더를 청구한다는 구나. 처음에는 여자에게 돈을 약간 부치고 싶다. 물론 나머지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Loosduinen 뒷편에 있는 사구로 부터 돌아와 보니 네 편지가 도착해 있더구나.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세 시간이나 앉아 있어서 흠뻑 젖고 말았다. 하지만 그 성과로 뒤틀리고 옹이진 작은 나무를 그린 습작과, 비온 뒤의 농장을 그린 다른 습작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청동빛을 띠었다. 모든 것이 일 년의 이맘 때에만, 아니면 Dupre의 몇몇 그림을 볼 때에,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정말 너무도 아름다워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테오야, 떠나려고 하니 아주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여자가 기운을 차릴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고, 그녀의 선의가 그렇게 의심스럽지 않다면 이다지도 우울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더 멀리 데려가지도 못하고 나는 이 우울함으로 망가지고 말리라.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이다지도 사랑하는 아이들은? 그들을 위해 모든 걸 다해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기꺼이 하려고만 했더라면.
Drenthe의 작은 지도가 내 앞에 놓여있다. 그 위에 마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커다란 흰 부분을 본다. 그 지역은 Hoogeveen 운하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끝이나고, 빈 공간을 가로질러 ‘토탄 들판’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는 걸 본다. 그 주위에는 마을 이름이 적인 검은 점들이 여러 개 있고, Hoogeveen이 작은 읍을 나타내는 빨간 점이 하나 있다. 국경 근처에는 호수가 하나--검정 호수--뭔가를 잔뜩 암시하는 이름이다. 둑에 온갖 종류의 준설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내일 출발이다.
<제 3권> 1883년 9월--1886년 3월
Drenthe, 1883년 9월
역에서 상당히 가까운 마을 여인숙에 머무르고 있다. 기차에서 Veluwe의 아주 아름다운 부분을 보았는데, 이 지역에 도착할 무렵에는 모든 게 어두웠다. 지금은 브라반트에 있는 것과 흡사한 넓다란 여인숙 거실에 앉아 있다. 한 쪽에서는 여인이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꽤 예쁘장하게 생긴 자그마한 여자이다.
마을 포구에서 아주 전형적인 토탄 너벅선과 건초밭에 있는 것처럼 옷을 입고 있는 너벅선 인부의 아내들의 모습도 보았는데, 아주 그림 같았다. 마을에는 네다섯 개의 운하가 있다. 배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여기저기서 야릇하게 생긴 오래된 풍차, 농가의 마당, 부두, 수문 등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항상 토탄 너벅선이 분주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장면과 부딪히게 된다.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봤는데, 나도 조만간에 너벅선을 타고 토탄 들판을 지나 Hoogeveen 운하 끝까지 내려가서 프러시아 국경과 검정 호수까지 가볼까 한다. 마을과 작은 읍은 포구를 따라 집들이 길게 늘어선 것에 불과하다.
오늘 아침에는 매우 일찍 일어났다. 너도 상상할 수 있겠지만 모든 걸 보고 싶은 강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멋지고, 브라반트처럼 대기는 맑고 상쾌하다. 이 지방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목초지로 여기 저기에 작은 나무들이 서 있을 따름이다. 북쪽으로는 아센 근처까지 아름다운 히스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감을 좀 더 구입한 다음에는 즉각 회유를 시작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볼 것이다. 하지만 Hoogeveen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온지도 며칠 되었고, 다른 방향으로 거닐었으므로, 이제 공격을 시작한다. 첫 번째 유화 습작은 히스에 있는 오두막으로, 이 집은 뗏장과 나뭇가지로만 지은 것이다. 그걸 그리는 동안에 양 두 마리와 염소 한 마리가 지붕 위로 구경을 나왔다. 염소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굴뚝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걸 듣고 한 여자가 뛰쳐 나와서는 빗자루를 염소에게 던지자, 염소는 샤무아처럼 뛰어내렸다. 동굴처럼 어두운 이 오두막들의 안은 아주 아름다웠다. 이런 종류의 오두막 내부를 여섯 채 정도 보았는데, 곧 습작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찾아간 두 부락은 ‘유사’(流砂)와 ‘검정 양’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Hoogeveen이 명색이 읍인데도, 바로 근처에는 양치기와 그릇굽는 가마, 토탄 움막 등이 있는 걸로 봐 너는 이곳의 고유성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유회 중에 나에게 새로운 놀라움과 느낌을 주는 많은 것 중의 하나는 히스 한 중간에서 토탄 너벅선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홀란드와 Ryswyk의 배끄는 길에서 보듯,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과, 백마와 흑마가 끌어다 놓은 것이다.
건강이 별로 좋아보이지 모사는 얼굴들을 많이 보게 되는 데, 아마도 그건 음용수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름답고 젊음이 넘치는 열일곱 살, 혹은 더 어린 소녀를 몇 명 보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곧 이울어 버린다. 하지만 이미 아주 이운 몇몇의 경우에도 그 모습에서 고귀한 측면을 지우지는 못한다. 남자들은 다리의 형태를 뚜렷이 보여주는 짧은 바지를 입기 때문에 움직임이 보다 인상적이다.
테오야, 히스에서 아기를 자신의 팔에, 아니 자신의 가슴에 안은 불쌍한 여인을 만날 때, 내 눈은 젖어 든다. 저절로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여인의 부실한 몸, 단정치 못한 옷차림 등도 두 사람의 흡사함을 더욱 강하게 한다.
헤이그에서의 일은 모두 잘 결말이 났다. 그 토지 측량사는 역으로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물론 여인과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있었으며, 마지막 이별은 정말 쉽지 않았다.
종종 여인과 아이들을 생각할 때면 우울하게 된다. 그들이 먹고 살 것만 있다해도! 오, 그건 여인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녀의 불운이 그녀의 결점보다 더 크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녀의 성격이 망쳐졌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으며, 내가 그녀에게서 본 몇 가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더욱 더 그녀는 개선되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내 연민의 정을 더욱 크게 하며, 내 힘으로는 그걸 교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울감이 된다.
나는 내가 행동한 대로 할 완전한 권리가 있으며, 그녀와 거기에 함께 머물 수 없다는 것, 또 실제적으로는 그녀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는 것, 내가 한 행동이 분멸벽 있고 현명했다는 걸 알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쌍하고 자그마한 인물, 열에 들뜨고 비참한 인물을 볼 때 창으로 나를 찌르는 고통을 느끼며, 심장이 내 안에서 녹는 듯하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는지! 그럼에도 우울해져서는 안 된다. 다른 것으로 마음을 돌려야 하며, 적당한 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운이 나도 남겨두지는 않으리라’라는 믿음에서만 안식을 찾는 그런 순간이 있다.
어제는 내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기묘한 묘지를 발견했다. 히스가 있는 들판을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그 주위에는 두텁게 자라난 작은 소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어서, 그게 단지 평범한 작은 소나무 숲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리라. 그런데, 거기에 입구가 있고 풀과 헤더가 덮여 있는 다수의 무덤을 보게 된다. 그 무덤 중 상당수는 이름이 쓰여진 하얀 푯말로 표시되어 있었다. 무덤 위에서 진짜 헤더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다. 테레빈 유의 향내에는 뭔가 신비로운 게 있다. 묘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어둡게 펼쳐진 소나무들이 울퉁불퉁한 대지와 번득이는 하늘을 갈라 놓고 있었다.
그걸 그림으로 담아내긴 쉽지 않았다. 그것에다 효과를 좀 더 시도해야 하리라. 예를 들어 눈이 덮인 모습은 아주 기묘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아름다운 잿빛 날씨였다.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해가 나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그럼에도 마찬가지로 좋을 것이므로, 나는 출발하였다.
히스는 브라반트 지방보다 훨씬 더 광활 했으며, 오후에 접어들자 약간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해가 빛날 때는. 하지만 나는 바로 그 효과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몇 번 그려보려 했지만 결과는 헛되었다. 바다도 항상 그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자연의 진정한 특징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순간과 인상도 연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더운 한낮 시간에는 히스가 때로는 아주 성가시고, 사막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무뚝뚝하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 그 타오르는 빛 가운데에서 그걸 그리고, 무한 가운데 평면이 사라지는 느낌을 주는 것은***그걸 시도하는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그 똑같은 분통 터지게 하고 단조로운 지점이--저녁에 불쌍한 자그마한 인물이 어스름 사이로 지나갈 때--그 태양에 익어버린 광활한 대지의 지각이 저녁 하늘의 섬세한 라일락 빛깔에 대비되어 어둡게 드러나거나 지평선의 바로 그 마지막 작고 어두운 푸른 선이 대지와 하늘을 갈라놓을 때--그것은 Jules Dupre의 그림만큼이나 장엄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든 여자는 인물들은 바로 그와 똑같은 특징을 지닌다. 그들이 항상 흥미로운 것은 아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밀레와 같은 측면을 발견한다.
나는 하얀 저녁 이내가 솟아오르는 질척한 목초지에 있는 작은 자작나무 사이의 붉은 태양을 습작하고 있다. 목초지 너머로는 지평선에서 나무들이 푸르스럼한 잿빛 선을 이루고 있는 것과 지붕을 몇 채 볼 수 있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데생을 하고 있는데, 유화가 가능한 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거라. 물감을 약간 더 구입하고 다른 재료들도 들여놓을 생각이었으나, 돈이 거의 다 바닥나 버렸다. 네가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C M 삼촌에게 편지를 써 내가 Drenthe에 혼자 있다는 걸 알려 주겠니? 현재 상황은 내가 Drenthe의 남동부의 회유로부터 어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린 습작들을 너에게 곧 보냈으면 한다. 그 중 어떤 게 Wisselingh에게 보낼만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줄래?***
수채화도 몇 점 시작했다. 펜 데생도 시작했는데, 오로지 유화를 그리기 위한 방편이다. 펜으로는 유화 습작으로는 불가능한 그런 세부를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는 오로지 구성을 위해 데생으로, 다른 것은 색채를 담기 위해 물감으로 이렇게 두 개의 습작을 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모델을 구하는 데 운이 좀 나빴다.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조롱했으며, 돈을 충분히 지불 했는데도 시작한 인물 습작을 그들의 악의 때문에 끝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으며, 한 가족에 전념했다. 그 결과 늙은여인과, 소녀와 남자를 모델로 쓸 수 있게 되었다.
Rappard가 서 Terschelling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아주 열심히 작업 중이라고 했다. Terschelling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이번 겨울에 그를 보러 가리라. 그리고 거기서 습작도 좀 하리라. 내가 알아낸 바로는 거기에 갔다가 돌아오는 비용은 삼 길더 정도라고 한다. 육 개월 내에 그 정도는 저금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그 와중에는 이곳 근처에서 머무리라. 헤이그에서보다 이곳에 있으니까 확실히 돈이 덜 든다는 걸 느낀다. 필요한 예방책을 취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다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리라,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Rappard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 하지만 다시 화가와 같이 있게 된다는 것은 분명 그 돈만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며, 내 고독도 덜어주리라.
이곳 시골의 대기와 생활은 나에게 상당한 도움을 준다. 내가 같이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다. 남자는 정거장에서 일하는 데, 이 사내의 얼굴은 때로는 빨간 배추빛깔을 띤다. 진짜 노무자이다. 여자는 매우 활동적이고 단정하다. 애가 세 명이다. 그들은 아마도 나에게 뒷 다락방을 화실로 쓰게 할 듯 하다. 지난 주에는 토탄 들판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나는 이곳이 점점 더 아름답게 여겨진다. 아주 공들인 작업만이 있는 그대로의 풍경, 그 진지하고 수수한 특색에 대한 정확한 아이디어를 줄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우울하여 너 한테서 소식을 듣고 싶다. 나는 낙담과 절망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구나. 사정이 그렇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쳐지는 인상에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민감하다. 그래서 불신을 받거나, 나 홀로 서야할 때는, 내 창의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 않은 지적인 진정성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추구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서로의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내가 전반적으로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상당히 걸린다. 내 일을 실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공의 상당 부분이 그러한 만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은 나를 상당히 걱정스럽게 한다.
내 주변을 둘러 볼 때, 모든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황폐한 듯이 보인다. 현재는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들이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잡은 다락방의 구석은 기묘하게도 우울한데, 거기다 하나뿐인 유리창을 통해 빛이 빈 물감 상자와 털이 거의 닳아 빠진 붓 꾸러미 위에 떨어진다. 그러한 정황이 너무나 이상하게 우울해서, 다행스럽게도, 거의 희극적인 측면을 띤다. 그래서 울지 않고 견뎌낼만 하다.
작년은 너에게 이야기 한 것보다 더 큰 적자로 끝났다. 그리고 현재는 조금도 급박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걸 다 갚고 나니, 물감을 살 수가 없다. 외상으로는 아무것도 구입할 엄두가 안 나는데, 얼마 지난 다음에는 외상값이 또 다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찾아 왔을 때는, 우리가 꼭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제 너에게 단언하노니 헤이그는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내 적자도 거의 다 메꾸었다. 그리고 이곳의 자연은 아름답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잘 있다거나, 자리를 잡았다거나, 편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너에게 묘사한 내 작은 다락의 정경은 사실 그대로 이니까.
그럴 여유만 있다면, 헤이그에서 내 물건들을 이곳으로 보내게 해서, 이 다락방을 채광이 좀 더 잘 되게 해서 화실로 꾸밀 것이다. 모델들은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포즈를 취하려 하지 앟는다. 따라서 화실은 필수적이다. 헛간에서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하는데 채광이 아주 좋지 않다. 그리고 내 재료들을 모두 새롭게 보충하고도 싶다. 이걸 한꺼번에 말끔히 해치우고 싶은데, 누군가 그렇게 하는 걸 도와 준다면, 나의 가장 큰 근심은 해소될 것이다. 화가는 신용이 없이는 해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화가의 직업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목수나 대장장이도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그런 것이다.
이곳에 올 때 너무 서둘러 왔으며, 이제서야 뭐가 부족한지, 또 내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가 그 밖에 무얼할 수 있었겠니? 작년에 여자가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이곳으로 왔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적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었으리라. 결국에는 그녀와 헤어져야만 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육 개월 전에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자에게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을 동고동락 했다는 것이 기쁘다.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떠나올 때 옆집 목수에게 내 주소를 보내겠다고 말했는데. 곤란한 지경이라면 나에게 편지를 썼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내 걱정거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으니까. 하지만 몇 개월이나 지속될 거로 보이는 이 우기에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곳에서 꼼짝 달싹 할 수 없게 되었는지, 내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본다.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좀 좋아져서, 나는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감이 네 다섯 색깔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비참한 기분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네가 보낸 돈으로 빚을 갚았다는 게 요즈음에는 유감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자신의 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필요한 습작품을 다 그리지 못할 듯 한데, 그러면 누가 그걸 고맙게 생각할 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Borinage에 있을 때 상황이 어땠는지 아마 너도 기억하리라. 기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다시 되풀이 되는 건 아닌지 상당히 두렵다. 나는 당시의 궁핍과, 실제로 내 머리를 덮어줄 지붕도 없으며, 일할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휴식이나 음식도 구하지 못하고 방랑해야 하고, 부랑아처럼 그 방랑을 영원히 이어가는 그런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에 아무런 좋은 점을 볼 수 없었으며,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동생아, 아무런 대비책 없이 이런 먼 시골에서 모험을 할 경우 내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극단이다.
<나는 과감히 뛰어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말로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증거이다--그리하여 이곳 Drenthe까지 왔지만, 다음 단계를 취하는 것으로부터는 움츠리고 만다. 내가 해보고 싶은 탐험은 불가능하며, 지원 없이 착수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대비한 준비된 잉여 자금 없이는 아주 위험스럽다. 어디에서도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완전한 믿음 없이는 그것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 모든 여인숙에서 불신을받을 것이라고 예측해서도 안 된다.***따라서 그 궁극에 시정이 있는 계획에 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이 산문적이고, 모든 것이 계산이다. ***>
거기다 여자의 운명과 내 불쌍한 어린 녀석과 다른 아이의 운명이 내 가슴을 칼로 도려낸다. 그들을 계속해서 돕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아버지가 편지를 쓰셔서 뭔가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물으셨으나 나는 내 모든 근심을 다른 누구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너도 아버지께는 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기 바란다. 아버지도 당신 자신의 문제가 있다.
나는 신용과 신뢰와 따뜻함이 필요한 그런 지점에 와 있다. 하지만 신뢰를 찾을 수가 없구나. 모든 게 너에게로 가고 만다. 내 생각은 원안에서 뱅뱅 맴돌고 있다. ‘나는 일을 하고 절약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빚에 빠지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여자에게 충실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떠나야만 했다. 나는 술책을 혐오해 왔지만, 그럼에도 나를 믿어줄 사람을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다.’ 너에게 이런 말을 해야할 지 어떨 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를 내 운명에 맡겨 버려라.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데,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것이 우리가 포기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아닐까?’
오, 동생아, 나는 정말 우울하다. 나는 현재 멋진 시골에 있다. 일하고 싶다. 절대적으로 그게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Drenthe, 뉴 암스테르담의 가장 외진 곳에서 편지를 쓴다. 이곳에는 너벅선을 타고 황무지를 지나 끝없이 항해한 끝에 도달했다. 이곳 정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힘이 내게는 없다. 말로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Michel이나 Th. 루소의 그림에 나오는 운하의 둑이 몇 마일이고 펼쳐져 있는 정경을 상상해 보아라.
다른 색조의 평평한 면***과 띠가 지평선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면서 여기 저기서 뗏장 헛간이나 작은 농장, 아니면 빈약한 자작나무, 포플라, 오크나무 두 세 그루에 의해 강조된다.***그리고 어디를 가던지 토탄 더미를 볼 수 있었으며, 습지에서 꺽은 큰고랭이를 실은 너벅선을 연이어 지나게 된다.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때때로 절묘한 매력을 지닌다. 돼지나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골상을 지닌 Ostade 그림의 유형들이 많이 있지만, 이따금씩은 가시나무 사이에 핀 백합과 같은 작은 인물들도 있다.
오늘은 너벅선 안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을 보았는데, 아주 이상 야릇한 정경이었다. 배 안에는 외투를 걸친 여섯 명의 여인이 있었고, 히스 사이로 난 운하를 따라 남자들이 그 배를 끌고 있었으며, 삼각모를 쓰고 짧은 바지를 입은 성직자가 다른 쪽에서 따르고 있었다.
이번 회유에 대단히 만족한다. 내 머리 속에는 내가 본 것으로 가득차 있으니까. 오늘 저녁에는 히스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늘은 섬세한 라일락빛 흰색이었으며, 한 군데 구멍난 곳으로 푸른 색이 내비치고 있었다. 지평선에는 붉게 물든 띠, 그 아래에는 갈색 황야가 어둡게 펼쳐져 있고, 그걸 배경으로 다수의 ‘기이하고 야릇한’ 낮은 지붕의 작은 오두막들과, 돈키호테 식의 풍차, 거기다 이상하게 커다란 몸체의 도개교 등이 떨리는 저녁 하늘의 환상적인 실루엣 가운데 두드러지고. 이러한 마을의 저녁은 물이나 웅덩이에 불밝힌 유리창이 반사되는 가운데 때로는 매우 아늑해 보인다. 흑백이, 그러니까 칠흑 같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흰 모래 둔덕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경우가 빈번하다. 여기서는 아직도 마굿간과 거실 사이에 칸막이벽조차 없는 크고, 아주 오래된 뗏장 오두막도 찾아볼 수 있다.
너벅선에서 습작을 몇 장 그렸으나, 이곳에서 얼마간 머무르면서 그 중 얼마를 유화로 담아보았다.
Hoogeveen에서 출발하기 전에 나는 Furnoe에게서 물감을 좀 보내달라고 했다. 일에 몰두한다면 기분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벌써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아버지가 우편환으로 십 길더를 보내주셨다. 그 돈과 네가 보내준 돈을 합치니까 이제 그림을 약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네가 미국으로 갈까 생각하는 그러한 때--나는 인도 용병으로 입대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상황이 나를 압도하는 그런 비참하고 우울한 때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고요한 황야를 보았으면 한다. 그런 것이 사람을 침착하게 하고, 더 많은 신념과 체념과, 노동의 꾸준함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을 함께 거닐고,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에게는 이곳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곳에 평화가 있다는 점이다.
내 작은 왕국을 발견한 느낌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니?
사랑하는 동생아, 자루에 들어있는 옥수수를 냄새만 맡고 알갱이 수를 셀 수는 없으며, 축사 문의 널빤지를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전체적으로 자루 안에 감자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옥수수 자루인지 볼 수 있으며, 또 축사 문이 닫혀 있더라도 돼지가 도살될 때는 그 꽥꽥거리는 소리로 사정을 짚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항만으로 네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판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려 한다. 몇 가지 증세를 바탕으로 때때로 큰 기업에서 발생하는 그런 심각한 위기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고 결론을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우울한 시간에 네가 친구 하나 없다고 느끼진 않길 바란다. 내 사랑하는 동생아, 너도 내 사정이 어떻지는 알겠지만, 이런 저런 문제로 비참하다면 외톨이라고 느끼진 마라. 절망하지도 말거라. 네가 나를 믿을 수 있다는 점은 내가 확신할 수 있다.
그 동안 네가 미국행에 대해 써놓은 것을 숙고해 보았는데, 나로서는 그 계획을 승인할 수가 없다. 네가 예를 들어 Knoedler 같은 최상의 연줄을 갖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구필 상회에서 아주 불쾌하다는 걸 정말 잘 이해할 수 있다. 너는 놀랍게도 ‘이번 주에 상사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사정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어’라고 편지에 썼더구나. 빈센트 삼촌이 여전히 동업자였을 때의 상회와 현재의 상회 사이에는 분명히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최하급 직원의 한 사람이었던 나는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내 마음의 일부가 얼마나 거기에 있는가를 느낀다. 그 이후로 직원의 숫자는 늘었지만, 진정으로 이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정말로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빈센트 삼촌이 있을 때는 몇 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다. 그 당시에는 진정한 협력이 있었다. 너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정말로 특히나 어려우리라. 네 마음을 거기에 헌신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더 충실하니까.
어떤 것들은 내게는 너무나 기묘하게 보여 사업이 어딘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공식 비공식의 그 모든 부서들, 그 모든 회계--그것은 무의미하고, 사업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을 한다는 건 분명히 하나의 활동이고, 개인적인 통찰력과 기력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그러므로 불평이 따른다. 그림이 충분치 않다. 그리고 개인적인 활동력, 개인적인 기력, Tersteeg 씨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너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너는 직위도 갖고 있지만, 변화의 경우에는 그것이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너는 이류의 승리(le triomphe de la mediocrite)와 맞서느라 어디에서던 너 자신을 멍들게 하리라.
아마도 너는 이렇게 말하리라. ‘맞는 말이야. 하지만 화가라는 직업은 더욱 더 비참하고 불안정하며, 거기서도 개인적인 기력이나 활동력이 모든 걸 다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일례로 얼마간의 기간 동안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을 들 수 있겠지.’ 그래, 하지만 내가 조금만 운이 좋다면, 내 작품에 호감을 가진 사람을 몇 명 갖게 된다면--그 경우, 그 경우에는 다르게 말하리라.
내가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이 네 덕택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네가 수작업을 하는 것을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리라는 걸 한 시라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으며, 그것이 처음에는 삶에 있어서의 너의 진짜 위치와 가장 불가능한 관계로 너를 몰아갈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너에게 미래를 안겨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미래라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활동력에 달려 있지는 않지만, 사업보다는 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너를 상당히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네가 미술계에서 갓 나왔다는 점이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랜 기간 동안 그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왔었다.
그리고 너는 ‘나는 미술가가 아니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력과 지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놓고 볼 때, 네가 그것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 런던에 있을 때 저녁에 Southampton 가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템즈 강 제방에 서서 얼마나 자주 데생을 했는지. 원근법이 무엇인지를 말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비참함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며, 또 내가 지금에는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갔을지!
너는 ‘이전에는 내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고 느끼곤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구나. 동생아, 내 자신이 네가 말하는 것을, 정말로 깊이, 정말 정말로 깊이 경험했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너를 그렇게 만들고 만 것은 거리와 사무실과 신경과민 등이다.
자연에 대해서 민감해 지는 대신에 둔감해지는 것뿐 아니라 훨씬 더 사정이 나쁜 것은 내 경우에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정말 똑같이 느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했으나, 나는 내 자신의 병을 내 안 깊숙한 곳에서 느끼고 그것을 고쳐보려 애썼다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희망없는 노력을 계속했다--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관점을 다시 획득하겠다는 그 일념으로 내 자신의 절망적인 행동을 오해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느꼈다. ‘뭔가를 해나가자. 나는 그 위로 솟아오르리라. 사정을 시정할 인내심을 갖추도록 하자.’ 나는 종종 부지런히 일하던 그 시절을 숙고해 보지만, 그 상황에서 그 당시 내가 그랬던 것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던 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누구든 간에 그러한 상황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지도 생각해 보아라. 나는 육 년간 구필에 있었다. 나는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을 떠난다면 성실하게 일했던 그 육 년간을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며, 다른 곳에서 면접을 보거나 할 때에는 확신을 가지고 내 과거를 언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단지 ‘직업을 잃은 사람’이었다. 즉시, 갑작스럽게, 치명적으로, 어디에서든지, 그 당시 사정은 그랬다. 쟁기에 손을 얹을 확고한 결심을 하고 새로운 자리에 지원을 하지만, 직업을 잃은 사람은 점차적으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너는 영국으로 갈 수도 있고, 미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디를 가든 너는 뿌리를 뽑힌 나무와 같다.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뿌리를 내려왔던 구필 상회, 소년 때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최고, 최상이며,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너를 슬픔으로 몰고 가겠지만--네가 상회로 돌아간다면, 상회는 너에게 매정하게 등을 돌리리라.
그 소용돌이를 멀찍히 거리를 두고 항해하거라. 내가 감히 ‘너 자신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이루도록 네 방향을 충분히 바꾸라’고 말한다면 나를 어리석다고 생각하겠니? 이러한 기분에 네가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너는 너와 나의 지속적인 적인 신경과민을 더욱더 양육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얄궂은 짓을 할지에 대해서는 너보다는 내가 더 많은 경험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 네 영혼이 병들어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라. 그게 사실이다. 너와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시정해라. 그리고 그것이 네가 화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면, 온갖 반대와 장애를 무릅쓰고 그렇게 하거라.
정말이지, 동생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다는 다시 풍차에서 즐거움을 얻고 있다. 특히 이곳 드렌테에서, 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을 당시에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걸 평상적인 상태라고 하는 것에 대해 너도 반대하지 않겠지? 자연의 대상들을 참미하고, 침착하고 그것들을 데생하고, 유화에 닮는 그런 상태.
최근에 나에게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다소 이상 야릇하게 다가온다. 내 자신이 전적으로 나를 매혹시키고, 규제하며, 규정하고, 새롭게 하여서 내가 그 안에 둘러싸이고 마는 그런 주위 환경에 있다는 걸 보게 된다. 지금까지는 해보지 않았던 온갖 종류의 것들을 해보고 싶다. 상황이 워낙 유동적이라 내가 여기에 머무를 것인가 하는 점은 막연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다르게 결말이 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너와 내가 화가로서, 이 황야에서 동지로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미래를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나는 네 안에, 인간으로서, 파리와는 대조되는 뭔가를 본다. 그 위로 몇 년 간의 파리 생활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래, 네 마음의 일부는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뭔가--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는 여전히 동정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예술적인 요소이다. 네가 화가가 된다면, 처음으로 너는 동료와 우정과, 뚜렷한 발판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화상들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네가 아직 떨쳐버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가고 보는데, 특히 그림을 그린ㄴ 것은 타고난다는 개념이다. 그렇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손을 내밀어 그것을 움켜 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움켜진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발견되어야 할 뭔가가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정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화가가 되는 것이다.
전체 미술 사업은 썩어빠졌다--나는 이 엄청난 가격이, 걸작의 경우에도, 지속될 지 의심스럽다. 가격이 이다지도 높게 상승하는 시기는 소위, 미래에 ***. 빈센트 삼촌만큼 명석한 너는 삼촌이 했던 일을 해낼 수는 없는데 그것은 세상에 아놀드와 Tripp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물릴 줄 모르고 돈을 쫓는 늑대들로 그에 비하면 너는 한 마리 양에 지나지 않는다. 늑대가 되는 것보다는 양이 되는 것이 나으며, 살육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살육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나도 늑대가 아니기를 바란다--아니 그보다는 확신한다.
이것이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위대한 미술가들은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들이 이미 유명하게 된 그들의 마지막 시기의 이 과도한 가격으로부터 이익을 거의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밀레와 코로--그 엄청난 선수금이 없었더라도 덜 그림을 그리거나, 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다른 직위에서, 화상의 경우라 하더라도, 한 달에 천오백 프랑을 받기 보다는 화가로서 한 달에 백오십 프랑을 받고 싶다. 화가로서 나는 투기에 기반을 두고 인습을 따라야만 하는 삶에서보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더 인간다움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Barbizon의 화가들을 생각해보자. 내가 그들을 인간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가장 작은 것, 가장 밀접한 세부 사항까지, 유머와 생명력으로 번쩍인다. ‘화가의 가족 생활’에는 그 재난과, 슬픔과 비탄에도 붉하고, 호의와 진실성과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잇점이 있다. 거기다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바로 그것.*** 소위 문명화된 진보의 세계를 떠난다는 것 ***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문명을 경멸하기 때문인가? 아니 그 반대이다. 나는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 즉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존중한다. 나는 ‘무엇이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가’하고 물어본다.
A 사촌의 죽음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그녀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고 종종 생각했다. 은행원의 아내로서는, 적어도 현재와 같은 시기에는, 행복해지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리라--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바뀌기 어려울 정도로 고정되었다. 내 생각에는 회피하는 것이 나은 그런 영역이 있다.
도시에 사는 주민들과 이곳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히스의 주민들과 소택지의 일꾼들이 더 나아보인다고 말하리라. 최근에 나는 내가 기식하고 있는 곳의 남자와, 그 자신도 농부인데, 이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우연찮게 그가 런던의 사정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로, 그는 그것에 대해 너무나 많이 들었던 것이다.***나는 그에게 현명하게 일하는 순박한 농부가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그래왔고,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것도 덧붙였다. 도시에서는 아주 드물게 최상의 사람들 중에서 사뭇 다르지만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고귀한 사람을 몇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도시에서보다 시골에서 분별 있는 인간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욱 많다. 그리고 대도시 가까이로 오면 올수록 사람은 퇴보와 우행과 사악함의 어두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단지 원자라를 걸 깨닫지 못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어느 정도의 계급을 유지하고 관습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어릴 적에 우리에게 각인 된 그런 개념을 떨쳐버리는 것이 손실일까? 내 자신은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않는다. 그 관습들과, 갖가지 일부러 꾸민 그 작은 예의 범절과 생각들이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종종 치명적이고 판연하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경험만으로도 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동시에 이 삶이 너무나 신비로운 것이라 ‘관례’의 체계는 분명히 너무나 편협되다는 걸 확실히 느낀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당신이 목표도 없고, 열망하는 바도 없을 때는 무원칙적으로 되고 말지요.’ 내 대답은 ‘내가 목표도 없고, 열망하는 바도 없다고말하지는 않았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도록 사람을 강요하는 것은 최고로 무익하다’는 것이다. 사는 것--뭔가를 하는 것--그것이 보다 긍정적이다. 사람은 사회에 진 책무를 해야하지만, 자신이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느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이성’을 따르는 차원에서 이다. 내 판단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이성은 신성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다.
너와 내가 우리 동류의 창조물 중에서 진짜로 양과 같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가 언젠가 잡아먹힐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다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만드는 자질과 지식과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지라도, 가난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자신의 평정심을 상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돈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늑대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사람의 영혼의 투쟁을 알고 있다. ‘내가 화가인가 아닌가?’하는. 그 두 사람은 Rappard와 나 자신이다. 때때로 투쟁은 힘겹다. 그것은 사정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차이를 낳는다. 우리는 때로 비참함에 빠지지만, 각각의 우울의 발작은 약간의 빛과 약간의 진보를 가져오며, 개성이 계발된다. 진정한 단순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도 상당히 단순하며, 그들의 삶의 관점은 힘겨운 시기에조차도 호의와 용기로 가득차 있다.
내가 항상 찬탄해 마지 않는 Gustave Dore의 말이 있다. ‘나는 황소의 인내를 가지고 있다(J'ai la patience d'un boeuf).’ 나는 그 말에서 어떤 미덕, 어떤 확고한 정직성을 발견한다. 그 말은 진정한 예술가의 말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인내를 배워야만 하지 않을까? 옥수수가 천천히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 또 사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인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로 정말 죽어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자신의 발전을 고의로 저지하려 해야 하는가?
하루도 이것 아니면 저것을 제작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없다. 나는 진보를 이루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 하나의 완성된 데생과 하나 하나의 유화 습작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길 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길 끝에서 교회의 첨탑을 본다. 하지만 땅이 굽이치므로, 우리가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는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길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 진다. 조만간에 나는 작품을 팔기 시작하는 지점에 도달하리라. 그리고, 일단 내가 그 정도까지 나아간다면, 내가 지금껏 엉성하게 일해오지 않았으므로, 그 지점은 중동무이는 아닐 것이다.
테오야, 나는 너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현대의 대가든 과거의 대가든 간에, 두 형제가 화가인 그런 똑같은 예를 보게 되며, 그들의 그림에는 차이점 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이 있다--Ostade 형제, Van Eycks 형제, Jules Breton과 Emile Breton.
테오야, 편지를 쓰고 난 후에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Brabant가 더 이상 나에게 닫혀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집을 떠난 까닭을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건 근본적으로는 거의 모든 것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오해였다. 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가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파국이 닥칠 경우에는 집으로 간다면 집세는 들지 않으리라. 그런 경우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래야만 한다면 얼마 동안은 그럴 수 있으리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네가 아무런 제약 없이 행동해야할 상황이 닥칠 경우, 그리고 내가 한 동안 집에 머무는 것이 그것에 좀 더 도움이 된다면, 아버지와 나는 즉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맑은 가을 날들과 폭풍우치는 날들이 번갈아 가며 오락가락한다. 날씨가 나쁠 때는 야외에서 걷는 것이 어려우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나는 내 자신을 잘 돌보고 있어서, 헤이그에 있을 때 내가 신경과민으로 상당히 고통을 받았던 그 마지막 몇 달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현재는 스토브가 설치된 커다란 방에 머물고 있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발코니가 딸려 있어서 군데 군데 오두막이 있는 히스와 그 너머 먼 곳에 있는 아주 이상 야릇하게 생긴 도개교를 볼 수 있다.
아래층은 숙소이고, 한 쪽에는 화로에 토탄 불이 활활 타는 농부의 부엌이 있다. 그러한 난롯가가, 그 곁에는 아기 요람이 있는, 명상하기에는 최상의 장소이다. 우울하거나 뭔가 걱정되는 것이 있으면, 아래 층으로 달려가 잠시 거기에 머문다.
간접적으로 나는 여자에 대해서 뭔가를 들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편지를 하지 않았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목수에게 편지를 써 여자가 내 주소를 물으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악당놈이 ‘오 왔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당신의 주소를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모르는 척 했지요’라고 답장을 하지 않았겠니? 나는 즉시 편지를 썼다. 나는 숨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녀 가족의 주소로 편지를 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돈도 약간 보냈다. 그게 나쁜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감자 밭을 쟁기질 하는 사람들을 뒤따라 걸었다. 여자들은 남겨진 감자 몇 알을 줍기 위해 그 뒤에서 터벅거리고 있었다. 이 밭은 어제 내가 다녔던 밭과는 상당히 다른 곳이다. 하지만 그 점이 이 지역의 재미있는 점이다. 항상 똑같지만, 그럼에도 다양함이 충분히 들어 있다. 같은 장르에서 작업을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화가의 그림과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잡초를 불태우는 농부에 그림을 작업하는 중이다. 이 작품은 먼저 유화 습작으로 담아 보았는데 평원의 광활함과, 어스름이 깔리는 장면, 약간의 연기가 피어 오르는 불꽃이 유일하게 빛이 있는 장소 등등의 개념을 보다 더 잘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저녁에는 거듭해서 그걸 보러 갔다.
경치는 멋지다. 진짜 멋지다. 모든 것이 ‘그려주오!’라고 소리친다. 너무나 전형적인 동시에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동생아,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항상 있으며, 도대체 투쟁의 시기가 좀 더 뚜렷한 평화--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커다란 평화--로 어떻게 이끌 수가 있을까?
나로 말하자면 단순한 계획뿐이다. 밖으로 나가 히스의 향그러운 대기에 내 자신을 빠트리며서, 나에게 뭔가를 던져주는 것을 그린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내가 좀 더 신선하고, 새롭고,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동생아, 이곳으로 와 히스에서, 아니면 감자 밭에서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자. 이곳으로 와 쟁기와 양치기를 뒤따르며 나와 함께 거닐자. 이곳으로 와 난롯가에 같이 앉아 있자--히스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폭풍이 너를 꿰뚫고 지나가도록 하자.
너를 묶고 있는 굴레를 끊어버려라. 나는 미래는 모른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달라질 지도 모른다. 아니 만사가 별탈 없이 잘 흘러갈 지도. 하지만 파리에서 행복을 구하지는 마라. 미국에서 그걸 구하지도 마라. 그것은 언제나 같다. 영원히 똑같을 것이다. 완전한 변화를 시도해 보아라. 히스를 한 번 시도해 보아라.
오늘 아침에 네 편지를 받았다. 사업에 대한 나의 보잘 것 없는 식견에 네가 수긍을 해서 나는 약간 놀랐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나를 몽상가로 치부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너는 ‘내가 구필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않는지도 숙고해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지.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생각을 하고 있다.
동생아, 네가 부쳐주는 돈이 계속 송금도어야 하므로 네가 구필 화랑에 머물러야 한다고 유도한다면 그건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야비한 일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면 나는 정말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너에게 힘주어서 경고하나니, 화상일이 결국에는 너를 배반하리라.
물론 내 자신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위기는 있었다. 우리는 너의 보호와 지원으로 글자그대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 상황은 특히 위태로웠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을 구필에 영구히 속박해버리고 만다면 네가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말하게 될 그런 위치에 놓이게 되리라. 동시에 너는 ‘왜 형과 부모님은 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을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나 때문에 낙오자가 되고 만다면 나로서도 번영을 누리고 싶지 않다. 네가 나를 위해 너의 그 예술적인 재능을 억눌러야만 한다면 나로서도 내 안의 예술적 자질을 계발하고 싶지가 않다.
내 말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혹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일단 직장을 얻으려 시도를 해볼 것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데생과 유화를 팔려고 힘쓸 것이며, 그런 뒤에는 Drenthe로 돌아오도록 하리라.
사람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도 인정한다. 사회에서 돈은 잔인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림이 우리의 진정한 기력을 자유롭게 하고, 처음 몇 년간은 아주 힘겹겠지만, 우리를 떠있게 할 것이라는 생생한 희망을 느낀다. 내 정책은 항상 너무 적게 모험을 거는 것보다는 너무 많이 모험을 거는 것이다. 너무 많이 모험을 걸어서 패배를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내 필요 때문에 내가 머물러 있기를 원치는 않는다. 머무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나를 위해서 그러지는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전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네 앞길을 나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물론 나는 파리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정말로 바란다. 거기에는 내가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쇄소에서 일거리를 좀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방해라기 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특히 생계비를 벌 수 있는 일로, 기꺼이 해보고 싶다. 하지만 파리가 나를 끌어들이는 가장 큰 장점은, 그리고 내 발전을 가장 많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림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 시도의 까닭을 이해하는 누군가와 생각을 부대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네가 파리에 있기 때문에, 나는 파리를 용인하지만, 이 아름다운 황야에서는 파리를 향한 동경을 조금치도 느끼지 않는다. 이곳은 멋지기 한량 없으며, 그림을 그리면서 더 잘 그리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마음은 그 안에 있다. 너에게 그걸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네가 생각하기에 파리에 가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 때라면 언제라도 그렇게 하는 것에는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걸 명심해라. 나는 어디에서든지 그릴 것을 발견하리라.
얼마 전에 너는 우리 두 사람의 관상에 있어서의 어떤 차이점에 대해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그 때 너의 결론은 내가 좀 더 사상가로 보인다는 것이었지. 거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내 안에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느끼긴 하지만 그 능력이 내 안에 특별히 조직화 되어있다고 느끼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이 근본적으로 사상가라기보다는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생각해볼 때, 아주 많은 정감과 진정한 사고가 동반된 매우 특징적인 행동을 본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질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청교도와 우리 자신들 사이에 공언된 유사성을 발견한다. 내 말은 소박한 삶을 살겠다고 확고히 결심한 크롬웰 시기의 사람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구 대륙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에 정착한 소수의 남녀 집단을 가리킨다.
시대는 다르다. 그들은 나무를 잘랐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림에서 구한다. 역사상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그 조그마한 집단이 내디딘 발걸음은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는 걸 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결과에 대해서는 별달리 철학적으로 사색하지 않고 삶을 여행해나갈 가능한 한 곧은 길을 추구할 따름이다. 결과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우리의 길은 아니다.
내가 필그림 파더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관상 때문으로 너에게 붉은 머리를 한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마가 사각으로 각진 이들은 사상가이거나 행동가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를 결합해서 지니고 있다. Boughton의 그림 중 하나에는, 내 생각에 네가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만한 작은 인물이 한 명 청교도들 가운데 있는 걸 보았다. 너에게 나 자신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옆모습은 그다지 특징이 없다.
사상가가 된다는 문제를 고려해 보았으나 그것이 내 천직은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철학적으로 사고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실제적이지 않다는, 그리고 단지 몽상가의 한 부류일 뿐이라는 그릇된 신념--하지만 사회에서는 아주 존중되는 그런 신념-- 때문에, 나는 종종 내 생각을 내 안에 가만히 간직하고 있지 않아서 머리를 부딪힌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크롬웰과 칼라일이 보여준 것과 같이 청교도의 역사가 나로하여금 사고와 행동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게 해주었다.
고백하건대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그와 동시에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삶에 있어서의 목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그리고 제대로 그림을 그리고 데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랑과 은근한 후회로 과거를 돌아보면서, ‘아, 내가 더 그릴 그림들!’이라고 생각하며 이 세상을 떠나가기를 바란다. 테오야, 내 자신이 어느 정도는 화가인가 아닌가 하는 것보다는 팔과 다리와 머리가 어떻게 몸통에 붙어있는가를 생각하고 싶다는 걸 밝혀둔다.
이곳에서는 오늘 커다란 우박의 형태로 눈이 내렸다. 그걸 눈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준 인상 때문이다.
Zweeloo로 여행을 갔다왔는데, 그 마을은 Lieberman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세탁부(婦)가 있는 지난 살롱에 출품한 그림의 습작을 제작한 곳이다. 그리고 Termeulen과 Jules Backhuyzen도 이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다.
새벽 세 시에 달구지를 타고 이곳 사람들이 'diek'라고 부르는 길을 따라 히스를 가로질러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렴(주인이 Assen의 장에 들럴 일이 있어서 그와 함께 갔었다). 그런데 이 diek는 모래 대신에 진흙으로 둑을 쌓았는데, 너벅선을 타고 가는 것보다 더 흥미로웠다. 새벽이 처음으로 눈을 뜨자 히스 전체에 퍼져 있는 헛간, 교회 뜰안에 있는 오래된 땅딸막한 건물--이것들은 흙벽이나 너도밤나무 울타리로 둘러쌓여 있었다--히스와 옥수수밭의 평평한 풍경--이 모든 것들, 모든 것들이 코로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빼다 박은 듯 했다. 그만이 그려내었던 고요함과 신비.
아침 여섯 시에 Zweeloo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상당히 어두웠다. 마을의 입구는 멋졌다. 커다란 이끼낀 지붕들, 마굿간, 양우리, 헛간들. 그렇지만 Zweeloo에서 나는 화가를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겨울에는 여태껏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바로 이번 겨울에 그곳에 가기를 바란다.
화가가 한 명도 없었으므로, 나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서 돌아오면서 도중에 데생을 좀 하기로 결정했다.
Zweeloo 주변의 전 지역은 현재는 눈이 미치는 한 내가 아는 가장 부드러운 초록빛인 어린 옥수수로 완전히 덮여 있다. 거기다 무한한 검은 땅, 그 땅으로부터 어린 옥수수가 싹을 내민다. 옥수수가 자라나고 있으니까 땅은 거의 mouldy***하게 보인다. 그 ㅈ역을 몇 시간이고 걷다보면 거기에는 정말이지 그 흙과, 옥수수와 헤더, 그리고 무한한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주 분주하게 쟁기질을 하는 사람과, 모래 짐마차, 양치기, 도로 수리공, 퇴비 마차 등도 보았다. 말과 사람은 벼룩보다 별반 커 보이지 않았다. 노상에 있는 작은 여인숙에서는 베틀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그렸는데,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둡고 작은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스름이 깔렸다! 오른 편에는 무한한 히스요, 왼쪽에도 히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널다란 진흙 길, 검은 진흙 길을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작은 창에서는 작은 불의 붉은 불빛이 빛나는 뗏장 오두막의 몇몇 검은 삼각 실루엣도. 또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의 웅덩이, 그 위에는 하얀 하늘이 있어서, 모든 곳이 흑과 백의 대조를 이루고, 웅덩이에는 양치기와, 서로를 밀치는, 반쯤은 면이고 반쯤은 진흙인 타원형 덩어리의 무리--양떼가 어렴풋이 형태를 드러내고. 양떼들이 오는 걸 보다보면 어느새 양떼 중간에 있게 되고, 그 다음에는 몸을 돌려 그들을 쫓아간다. 양떼는 천천히 그리고 마지못해 진창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렇지만 멀리에 농장이 어렴풋이 빛난다.
양우리도 어두운 삼각형의 실루엣과 같다. 문은 어두운 동굴의 입구처럼 활짝 열려져 있다. 뒤편에 있는 널빤지의 틈으로 하늘의 빛이 어렴풋이 빛난다. 전체 대상(隊商)이 이 동굴로 사라진다. 양치기와 등불을 든 여인이 양떼 뒤에서 문을 닫는다.
양떼가 어스름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내가 어제 들은 교향곡의 피날레였다. 어제는 꿈처럼 지나갔다. 그 애처러운 음악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나는 정말로 먹고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베틀을 그린 작은 여인숙에서 갈색 빵 한 덩어리와 커피를 한 잔 마셨을 뿐이다. 새벽부터 어스름까지, 아니 그 보다는 한 밤에서 그 다음 반까지 그 교향곡에 내 자신을 잊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불곁에 앉아 있으니 허기를 느꼈다. 정말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이제 너도 이곳이 어떤지 알겠지? 그런 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단지 수다한 낙서 뿐이지.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도 가져온다. 그것은 일을 향한 조용한 열의이다.
* * *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제 끝났다. 요근래에는 너무 춥다. 나는 도개교를 담은 커다란 유화 습작과 커다란 스케치를 제작했으며, 다른 효과를 얻기 위해서 두 번째 유화 습작도 해보았다. 눈이 내리는 즉시 이 습작들을 눈의 인상을 보다 정확하게 옮기는데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똑같은 선과 구조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려 한다.***
그 불쌍한 여인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앞뒤가 맞지 않고, 글씨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편지를 써준데 대해 기쁨을 표시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걱정하고 있으며, 파출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 불쌍한 여자. 그리고 그녀는 과거의 몇몇 일에 대해 미안해 하는 듯 보인다. 그녀를 향한 내 연민과 애정은 죽은 것은 아니지만, 함께 살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렇게 해봐야 좋을 것도 없다. 연민은 아마도 사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깊이 뿌리를 내릴 수는 있다.
어제 집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는데 가족들이 너로부터 좋은 편지를 받았다는구나. 그 말로 나는 위기를 모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네가 나에게 ‘현재로서는 사정을 그대로 두어도 좋을 듯하다’는 말에 대한 확언이 되리라.
‘네가 머무른다면, 나는 너의 경제적인 도움을 거절하리라’라는 나의 최후통첩은 네가 ‘집에 있는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므로, 현재 내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을께’라는 말을 가리킨 것이었다. 너는 내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부양해야할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 그건 너의 세심함이지만 나는 ‘그러한 희생은 원치 않는다’라고 응답하지 않을 수 없구나. 진정한 의미는, 내 희망으로는, 번영이든 ‘고뇌’에서건, 항상 내 신념으로 남으리라.
네가 아주 우울해서 나에게 ‘고용주들이 상황을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떠나기 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나를 해고 했으면 하는 생각조차 해(내 경우에는 그 당시 떠나고 말았다)’라고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림이 적어도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뭔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말이지만 ‘너의 삭구를 갖춘 배가 제자리를 잡았다면, 거기에 머물러라. 네가“거기서 새로운 기쁨을 얻기 때문에 거기에 머문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다.’ 내 생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네가 너의 상사로부터 더 인정을 받는 것이고, 네가 생각할 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너에게 보다 더 많은 재량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결국에는 수공에 대한 지식이 가장 단단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너의 침묵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것을 상사측에서의 가능한 새로운 어려움과 연결 시켰기 때문에;, 그리고 내 자신이 절망적으로 곤경에 처했으므로, 나는 아버지에게 짤막한 편지를 썼다. 이 번에 처음으로 너는 돈을 건너 뛰었지만, 이십오 길더의 차이가 나를 육 주나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네가 이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손쉽게 믿을 수 있다.--각각의 어려움, 그 자체로는 아주 작은 것이 상황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너로서는 알 수가 없다.
지난 주에 전 주인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물품 보관을 위해 다락방을 사용한 값과 여자의 빚으로 십 길더를 보내지 않으면 내가 남긴 것들을 (그 중에는 내 습작품 모두와 판화, 책 등이 있다) 압류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가 후자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내 물품을 보관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새해 무렵에는 Rappard에게 진 빚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값아야 할 빚이 있다. 이곳에 온 이래로 그림 재료들을 제대로 갖추고, 물감을 구입하고, 여행을 해야만 했다. 거기다 하숙비를 지불하고, 여자에게 돈을 좀 보내고, 빚을 갚아야만 했다.
여기다 외로움이라는 요상한 고문이 덧붙여 진다.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내 말은 잘 알지 못하는 지역에 와 있을 때 화가가 모두로부터 미치광이, 살인자, 부랑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에 견디어 내야만 하는 외로움이다. 이건 자그마한 비참함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슬픔이다--이 지역은 정말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고양시키지만, 특히나 이상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버려진 자라는 그런 느낌이다.
네가 Serret라는 화가에 대해 쓴 것이 나에게 상당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구나. 힘겹고 어려운 삶의 결실로 마침내 페이소스가 담긴 어떤 것을 제작해낸 그런 사람은 검정 산사나무처럼, 아니 그보다는 어느 순간에 태양 아래 가장 우아하고 가장 신선한 것 중의 하나인 그런 꽃을 피운 늙어 굽은 사과나무처럼, 하나의 경이이다.
고생한 사람이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만개할 때--그렇다, 그건 정말 아름다운 정경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그는 엄청난 겨울 추위를 견디어 내야만 했으리라. 나중에 그에게 공감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는 것 이상의 추위를. 예술가의 삶, 그리고 예술가라는 존재는 아주 야릇하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무한할 정도로 깊은지!
Drenthe가 마음껏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나는 그것에 다소 다르게 착수할 수 있어야만 하리라. 당분간은 내가 여기서 지속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그런 시점에 다다랐다.
Nuenen, 1883, 12월
내가 얼마간 집에 와 있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아마도 네가 다소 놀랐겠지. 이 일은 나도 아주 싫어하는 일이지만, 지난 삼 주 동안 별로 몸이 좋지 않았다--감기에 걸리고 거기다 신경과민 때문에 자질구레하게 온갖 통증으로 시달렸다. 그런 상황을 깨어 버리려 애쓰지 않을 수 없으며, 그리고 나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악화될 거라고 느꼈다.
내 여행은 비가 오다가 눈이 오다가 하는 바람부는 오후에 족히 여섯 시간 동안 히스를 가로질러 Hoogeveen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도보 여행이 내 기분을 엄청나게 상쾌하게 해주었다. 아니 그보다는, 내 기분이 자연과 공감을 이루고 있ㅇ서 그것이 나를 고요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가에 관한 문제들에 좀 더 명확한 통찰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Drenthe는 멋진 곳이긴 하나, 그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야 하며, 특히나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제 이 년 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서의 환대는 모든 점에서 상냥하고 충심어린 것이라는 걸 보지만, 그 밑바탕에는 우리의 상호 입장에 대해서는 내가 맹목이나 무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조금치의,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언짢고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탁트인 이해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나는 주저함과 망설임을 느끼며, 그것은 납빛 대깇럼 내 자신의 열의와 기력을 막아 버린다. 네가 하는 모든 것은 그것들 때문에 사분의 삼은 쓸모 없게 된다. 그건 어리석음이다, 동생아.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본능적으로--나는 분별력 있게라고 말하지 않는다--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감지한다. 두 분은 나를 받아들일 때 크고 거친 개를 받아들일 때와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느낀다. 이 개가 젖은 발로 방안에 뛰어 들겠지. 모든 사람의 길을 방해하겠지. 게다가 얼마나 크게 짖어되는지. 개는 자기를 ‘이 집’에 두는 것은 단지 그를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걸 느낀다.
좋다, 하지만 이 짐승은 인간의 이력을 지니고 있으며, 단지 개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의 영혼을, 그것도 아주 예민한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느낀다. 이 개는 사실 아버지의 아들인데, 지나칠 정도로 거리에 너무 많이 남겨진 까닭에 점점 더 거칠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걸 오래 전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야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
너는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아버지 편을 들어 나를 심하게 비난한다. 비록 네가 아버지의 적도 그렇다고 너 자신의 적도 아닌 누군가와 싸우고 있지만 나는 너에게서 이걸 감지한다. 아버지와 너와 나는 평화와 화해를 이루고자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걸 실현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실현되기를 바리지만, 너나 가족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네가 결코 언제까지나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그렇긴 하지만 네가 내 인생을 구해주었다는 걸 명심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 결코 그걸 잊지 않으리라. 나는 너의 형이자 친구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너에게 무한한 감자의 정도 지니고 있다. 돈은 갚을 수 있으나, 네가 베푼 친절은 갚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인물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위해 나는 지난 여름에 어떠했는가를 한 번 짚어 본다. 두 형제가 헤이그를 걸어가는 게 보인다.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일정한 기준을 유지해야만 해. 그래서 나는 사업을 계속해야만 해. 내가 화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다른 사람이 말한다. ‘나는 개처럼 되어가고 있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추해지고 거칠어 질 거라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가난”은 내 운명이라는 걸 예견해. 하지만--하지만--나는 화가가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그 형제의 이전의 시기를 본다. 네가 미술계에 막 뛰어들었을 때, 또 네가 막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이 Ryswyk 풍차 근처나, 아니면 아침 일찍 눈덮인 히스를 가로 질러 겨울에 Chaam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걸 본다--두 사람은 너무나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내 자신에게 묻는다. 이들이 똑같은 형제인가? 문제는 ‘사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영원히 갈라설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같은 길을 갈 것인가?’이다.
보아라, 나는 그것을 사 년 동안 너보다 더 심사숙고했다. 내가 다다른 결론은 이전에 나에게 의무로 보여졌던 것은 의무의 환영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돈을 벌어라 그러면 네 삶은 곧바르게 되리라.’ 밀레는 나에게 말한다. ‘네 삶을 곧바르게 해라(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애쓰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맞서 싸우도록 애쓰라), 그러면 돈을 버는 일조차도 적당한 시기가 되면 따라 오게 될 것이며, 부정직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나 Tersteeg 씨나 내 양심이 쉴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며, 두 분은 나를 자요롭게 하지도 않았고, 자유와 명백한 사실에 대한 나의 결핍니나 무지와 어둠에 대한 내 감정조차도 용인하지 않으셨다. 나 혼자 있게 된 지금, 나는 아직도 빛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하지만 나는 내 열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희망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가 백색 광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부드러운 빛을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보게 될 것이다. 내 실패에 대해 가졌을 지도 모르는 영혼의 고뇌가 무엇이든, 어둠이 검다는 걸 알았고 내가 그것을 피했다는 걸 말했다는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과거의 모든 영향은 나를 더욱 더 자연으로부터 떼 놓았다. 내 젊음은 어둠의 영향아래서 우중충하고 춥고 메말랐다--그리고, 동생아, 너의 젊음도 그러했다.
내가 제멋대로 혹은 무모하게 행동했다는 것이 지나치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나 보다도 네가 더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어떤 상황에 강요되었으며, 달리 행동할 방도가 없었다. 낮 동안, 일상 생활에서는, 내가 멧돼지처럼 거친 피부를 가진 것으로 보이고, 사람들이 나를 조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정말 잘 이해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상황이 우연이나, 조그만 것들이나, 아무런 이유도 없는 오해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는 그걸 점점 더 다르게 느끼게 되었고, 좀 더 깊은 동기를 보게 되었다.
내 견해는 때때로 균형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특성이나 행위, 방향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음에 틀림없다. 풍향계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견해가 기본적인 진실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풍향계가 바람을 동쪽이나 북쪽으로 불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견해가 진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인류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있으며, 그것들은 이제껏 사라지지 않는다.
Mauve 매형이 한 번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계속 그림을 그려나간다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걸세. 자네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보다 더 깊이 예술을 꿰뚫고 들어간다면 말일세.’ 매형은 이 년 전에 이말을 나에게 했다. 그런데 최근에 매형의 이 말을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나를 믿어다오, 동생아, 그리고 내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의심하지 말아라. 내 자신이 내가 여러 면에 있어서 같이 하기 매우 힘든 사람이라는 걸 제대로 잘 알고 있다는 걸 나에게 지적할 것이다. 그렇다,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핑계거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말 지녀야만 하는 열정과 빈번한 몰입이다.
내 견해를 누그러뜨린다. 그래서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겟지만,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노년과 그 유약함을 존중한다. 나는 또 Michelet의 말도 생각해본다 (그는 그걸 과학자에게 배웠다.) ‘남자는 아주 야만적이다(Le male est tres sauvage).’ 그리고 내 인생의 이 시점에서 나는 내가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그러한 열정을 지닌다는 것이 권리라고 생각한다--나 자신을 사실 ‘야만인’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내 열정은 나약한 사람 앞에 서면 수그러들며, 그러면 나는 싸우지 않는다.***
동생아, 내가 너에게 너무나 큰 짐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갚지 못할 수도 있는 기획을 내세워 돈을 받는 것은 너의 우애를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겨우며, 내 양심에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다. 내가 아주 명석하게 되더라도(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 내가 항상 아주 가난하리라는 것, 그리고 내가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빚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굳게 확신한다.
내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지 알겠지. 한 순간 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끔찍한 현실이며, 우리 자신은 무한히 쫓기운다. 사정은 있는 그대로 이며 우리가 그것을 다소 우울하게 받아들이든 않든 어떤 식으로든 그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 나는 밤에 깨어있을 때 누워서 그걸 생각한다. 아니면 바람이 몰아치는 히스에서, 아니면 침침한 어스름 속 저녁에.
모든 친절에도 불구하고, 히스에서는 이 집에서만큼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내 결심이 거의 받아들여졌으나,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온지 이제 이 주가 지났지만, 내가 처음 삼십 분에 느꼈던 것에서 조금치도 나아졌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했더라면, 지금쯤은 뭔가 자리가 잡혔어야 할 겁니다. 나는 허비할 시간이 없으므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문은 열리든 닫히든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나는 쉽사리 비울 수 있는 방을 내 물건을 보관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너를 위한 화실로 이용될 수 있으며, 내가 얼마간 집에서 일하는 것이 필요하며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업은 사업이다. 그리고 너에게나 나에게나 이것이 잘된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방은 우리에게 다른 곳에 있을 돈이 없을 때 내 화실이 될 것이다.
결과는 탈수기가 있는 집의 작은 방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너와 Rappard 모두가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용인해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 내 자신이 절망적으로 낙담하고 깊이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 시점에 나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Rappard는 한 때 나에게 말했다. ‘사람은 토탄 덩어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다락방에 던져진 채로 잊어져 버리는 것을 견딜 수 없다’--그리고 그는 내가 집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 커다란 불운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로 하여금 나를 받아들이게 하고, 심지어 이곳에 내 화실을 내어달라고 까지 했지만 그게 우선적으로 내 자신만을 생각해서 한 행동은 아니다. 아버지와 내가 여러 가지 것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너와 아버지와 나 자신 사이에는 조화로운 호의가 언제든지 아니면 간헐적으로라도 있게 될 거라는 걸 본다. 나는 내 자신의 길을 조용히 갈 것이고, 몇 가지 것에서는 아버지와 이야기 하지 말라는 너의 충고를 따를 것이다--네 안에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내가 상당히 고립되었던 것 같다는 너의 말에 대해 말하자면, 삶이 견딜 수 있을 정도라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내가 누려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걸 공언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다른 인간과 하나라고 느낄 권리를 상실하게 할 만한 어떤 것도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므로.
나는 종종 세상을 알지조차도 못하는 사람들, 이를 테면 농부나 베짜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한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운이 따랐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후로 베짜는 사람들에 몰두해 왔다.
베짜는 사람들의 데생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을 세 장의 수채화에 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그리기가 매우 힘이 드는데, 그것은 작은 방에서 베틀을 그릴 만한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그걸 할 수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 베틀들을 그려내려면 상당히 고된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이것들은 멋진 소재이다--회색 벽을 배경으로 놓여있는 그 모든 오래된 오크 나무. 하지만 이것들을 담아 내는데 힘써 다른 홀란드 그림들과 색채와 색조에 있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할 것이다.
베짜는 사람이 베틀 뒤가 아니라 천의 실을 손보고 있는 장면을 담은 수채화를 곧 시작하고 싶다. 그들이 저녁에는 등불 아래서 베를 짜는 모습을 보았는데, 렘브란트의 그림이 주는 인상과 흡사한 인상을 풍겼다. 근래에 들어서 그들은 일종의 매다는 등을 사용하지만, 나는 베짜는 사람으로부터 밀레의 ‘철야(La Veillee)’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작은 등을 얻었다. 베짜는 사람들은 그런 등불 아래에서 일했었다.
요전 날 나는 저녁에 색 천 조각이 짜여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은 실을 손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불빛을 배경으로 그 어둡고 몸을 구부린 인물들은 천의 색깔과 대비되어 두드러지면서 베틀의 욋가지와 거둥, 흰벽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세탁실을 화실과 물건 보관 장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헤이그로 가 내 습작과, 판화와 그림 도구들을 싸서 부쳤으며, 이미 이 새로운 화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기를 바란다.
여자를 보았다. 내가 엄청나게 갈망했던 일이다. 한 번 헤어진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남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중도를 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지금은 그 길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그것이 보다 인간적이고 덜 잔인했으리라.
여자는 처신을 잘 했다. 그녀는 세탁부로 일하면서 자신과 아이들의 생계를 꾸려 왔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상당히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나의 집으로 데려온 것은 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 Leyden의 의사가 조용한 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를 했기 대문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빈혈 증세가 있었고, 결핵 초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녀는 더 악화되지 않았으며, 여러 면에서 튼튼하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추악한 증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나쁜 쪽으로 바뀌고 말았으며, 그녀의 생명마저 걱정이 된다. 그리고, 내가 내 아이인 것처럼 돌보았던 그 불쌍한 작은 아기도 더 이상 예전 같지는 못하다.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그녀가 현재 걸어가는 길을 굳세게 나아가도록 위안하려 애썼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녀를 향한 연민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난하고, 버려지고, 병든 사람을 돕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어느 선까지 해야하는가에 대한 내 견해를 말하자면, 나는 이미 너에게 말한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끝없이 도와야 하는 것이다.
‘83년 올해는 나에게는 힘겹고 슬픈 한 해 였다. 특히 끝이 쓰라릴 정도로 슬펐다.
어머니가 다리를 다치셨다. 관절 바로 아래 넓적다리 뼈가 부러진 것이다. 농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나에게 소식을 전해왔으며, 그래서 내가 고정하는 것을 보조했는데 대체로 잘 되었다. 의사는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우리에게 확언하지만, 어머니의 연세를 고려해볼 때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사실 커다란 불운이다.
이곳에 온 이래로 경비가 들지 않아서, 내 옷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사신 옷값을 지불했으며, 그와 동시에 Rappard에게는 이십오 길더를 부쳤다. 사고가 나기 전에 나는 아버지와 얼마 동안은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기로 결정을 보았으므로 새해와 일 월 중순에 네가 보내준 돈은 빚을 갚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여러 다른 경비가 들어갈 곳이 많을 듯해서, 내가 아버지에게 그 돈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아직 돈을 부치지 않았으며, 다른 것들은 좀 더 시간을 두고 해결하면 된다.
테오야, 내가 뭔가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잘 숙고해 보아라. 그리고 우리는 또 내 작품을 팔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돈이 필요하게 될 것이며, 작품 활동에 드는 경비를 내 스스로 지불할 수만 있다면, 현재로서는 네가 나에게 주는 것을 어머니에게 줄 수 있으리라.
지금은 글을 쓸 정신도 아니고, 글을 쓸 시간도 없다. 어머니 곁에 있지 않을 때면 베짜는 사람들 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이 기쁘며, 이번 사고가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와 견해 차이를 보이는 몇몇 문제를 저 뒷전으로 몰아부쳐 버렸으므로, 모두 상당히 잘 지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처음에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오래 Nuenen에 머무를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중에 어머니가 더 자주 옮겨 다녀야 할 때는 특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힘겨운 처지를 생각해 볼 때, 그럼에도 어머니의 영혼이 아주 평정하고 밝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어머니는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 한다. 요전 날에는 어머니를 위해 울타리와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교회를 그려 드렸다.
처음 얼마간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뒤로 나는 꽤 규칙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베짜는 사람들의 일상 습작을 그리느라 바쁜데, 내 생각으로는 Drenthe에서 제작한 유화 습작보다 기술적으로 낫다. 내가 제작한 마지막 습작은 오래되고, 푸르스름한 빛깔을 띤 갈색 오크나무로 만든 베틀에 앉아있는 남자를 담은 것이다. 베틀에는 1730년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그 베틀 근처, 작은 창 앞에는, 아기용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아기가 앉아서 몇 시간이고 북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걸 보고 있다. 나는 바닥에 흙을 깐 비참한 작은 방안에 베짜는 작은 사람이 앉아 있는 베틀과, 유리창과 아기용 의자,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렸다.
오늘은 너에게 세 장의 작은 패널화와 아홉 장의 수채화를 보냈다. 그 중에 너를 훨씬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언제라도 네가 오면 베짜든 사람들의 작은 집으로 데려고 가리라. 그들과 실을 감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분명 너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이 베틀이라는 소재는, 꽤나 복잡한 기게 구조와 그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 등으로, 펜 데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그래서 너의 제안대로 몇 장 데생을 해 볼 작정이다.
마네 전시회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적어 주겠니? 그의 그림을 거의 본 적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나는 특히 그의 여자 나체화를 보고 싶구나. 항상 그의 그림이 매우 독창적이라고 평가해 왔으며, 졸라와 같은 몇몇 사람들이 그를 두고 침이 마를 정도로 격찬하는 것이 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나로서는 마네가 미술의 현대적 사고에 새로운 미래를 연 사람이라고 보는 듯한 졸라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마네가 아니라 밀레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연 핵심적인 현대 화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네가 이 세기의 바로 첫 번째 사람 중의 하나로 평가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그의 능력도 분명 그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지니고 있는 그런 것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
펜과 잉크 데생을 언급한 너의 편지에 대한 대답으로 유화 습작 다음에 그린 다섯 명의 베짜는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약간 다르다--지금까지 네가 보아온 나의 펜 데생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더 활기가 넘친다고 생각한다. 유화 습작과 펜과 잉크 데생 외에도 베짜는 사람을 다음 새로운 수채화가 화가에 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아침 일찍 그리고 밤 늦게 제작했다.
네가 말하는 것, 즉 내 작품이 여전히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이 팔릴 수 있다거나 팔릴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는 내가 그 때문에 내 이빨을 무디게 하고 싶지는 않은 지나간 서류철과 같다--하지만 동시에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는데 작품을 팔려는 너의 노력도 좀 더 경주되어야 할 듯하다. 너는 한 작품도 팔지 않았다--비싼 값이건 헐 값이건 간에. 사실 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너에게 새 작품을 보내고, 또 아주 기꺼이 계속 그렇게 해 나갈 것이다--더 이상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에 정당한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네 쪽에서는 또한 계속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겠지만 앞으로는 네가 내 작품에 흥미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너의 권위가 그걸 허용하지 않는지를 정말 솔직하게 나에게 이야기 해주었으면 한다. 과거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나는 미래를 직면해야 하며, 정말로 팔려고 애를 쓸 작정이다. 내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테오야. 너에게 있어서는 나는 몇 년 전에 있었던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네가 지금 내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 ‘거의 팔릴 만한 것이긴 한데--’는 글자그대로 Etten에서 내가 처음으로 브라반트 스케치를 보냈을 때 네가 나에게 써보낸 말과 같다.
화상은 화가를 두고 중립적일 수는 없다. 칭찬을 하든 하지 않든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정말 똑같은 인상을 준다. 아니 그렇게 칭찬하는 어조로 말하기 때문에 더욱 더 안달나게 한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충분히 진보하지 않았다고 보아서 내가 진보를 이룰 수 있도록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볼 수만 있다면. 예를 들어, Mauve 매형과는 이제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네가 다른 견실한 화가와 접촉할 수 있게 해 준다면--간단히 말해 네가 나의 진보를 진심으로 믿고 있으며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입증할 만한 표식이면 무엇이든지. 그 대신에--돈뿐이다, 그렇다, 그 나머지는 ‘혼자 힘으로 헤치고 나가라’이다. 다른 화상들도 네가 하는 것과 똑같이 나를 취급하리라고 답하리라. 너는 나에게 돈을 지불하지만 다른 화상들은 분명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돈 없이는 나는 아직 살아갈 수 없다고. 실지에 있어서는, 사정이 그렇게 예리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Drenthe에서 그린 습작들은 그렇게나 나쁘더냐? 너는 대상을 소박하고 침착하게 담아낸 그 작품들을, 내가 본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은 그 작품들을 비난한다. 너는 ‘Michel에 너무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말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스름 가운데 있는 작은 집과, 전면에 녹색 부분이 있는 뗏장 오두막을 담은 가장 큰 습작이다.) 오래된 교회 안뜰을 그린 작품에 대해서도 분명 너는 정말 똑같이 말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 안뜰 앞에 섰을 때든 뗏장 오두막 앞에 섰을 때든 나는 Michel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대상만을 생각했다--사실 Michel이 지나다가 우뚝 섰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대상이다. 하지만 Michel을 모방하는 것은 내가 결단코 하지 않을 그런 것이다.
‘내가 이러 저러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건 어찌된 영문이냐고 네가 묻는다면, ‘내가 이러 저러 했으면 좋겠다’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자신을 개정하려 조금도 애를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관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그걸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는 베짜는 사람을 그린 수채화와 펜과 잉크 데생, 그리고 지금 작업 중인 마지막 펜과 잉크 데생 가치가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무미건조 하지는 않은 것으로 비춰진다.
이 점에 대해 내가 말하는 걸 두고 불쾌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동생아. 내 작품에 뭔가 수수하고 개성적인 것을 원한다. 나는 내 작품이 일급 화랑에서 금빛 액자에 넣어져 전시되는 걸 원치 않는 것처럼 그것이 무시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동봉한 백 프랑과 함께 너의 편지를 받았다. 현재 나는 작년의 내 적자를 메울 수 있는 그런 시점에 있다. 이제 지불하지 않은 청구서가 없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나는 물감과 다른 도구의 공급자들 모두에게 정직하게 대했으며 다 지불을 했다. 내가 이 문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업에서의 부주의함을 혐오한다는 걸 네가 보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해야할 책무를 꼭 수행하려 한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그렇지만, 너에게는 나는 커다란 빚을 지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앞으로도 똑같이 해나간다면 사정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나는 너에게 미래를 위해 제안을 하려 한다. 너에게 내 작품을 보낼 테니, 네가 좋아하는 것은 네가 알아서 갖도록 해라. 하지만 삼 월 이후 너로부터 받는 돈은 내가 번 돈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걸 주장한다. 그리고 그 돈이 지금까지 내가 받아온 것보다 처음에는 더 적더라도 괜찮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너로부터 받는 돈이 첫 번째는 모험으로, 두 번째는 바보에게 베푸는 보시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견해는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이 지역의 존경받는 유지들에게 조차도 이야기가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일 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전혀 낯선 사람들에게 ‘당신은 작품을 팔지 못하고 있다는데 어찌된 노릇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언제나 내가 잘못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매우 거북한 일이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리고 특히 집에 있을 때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내 작품을 어떻게 하는지, 돈을 받는지 어떤지를 감시한다.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후자를 살펴보고, 그것에 관해서는 모든 걸 알려고 안다. 그런 상황 아래에서 매일의 생활이 얼마나 유쾌할 수 있는지, 그 결정은 너에게 맡겨 두겠다.
지금으로서는 오 프랑을 버는 것이 후원 조로 십 프랑을 받는 것보다 나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친구로서 그리고 상호 존중심으로 출발을 했다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의 관계가 후원을 주고 받는 관계로 퇴보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숙고해 보아라, 동생아. 나는 너에게 내 가장 깊은 생각도 감추지 않는다--나는 한 면만 아니라 다른 면도 저울질 하고 갸늠해 본다. 네가 아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을 줄 수도 없다. 돈, 그렇다, 돈은 줄 수 있다. 하지만 네 돈은 내가 언제나 원해왔던 그런 식으로, 즉 가정을 위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헛된 것이다. 필요하다면 노동자의 가정이라도 괜찮지만, 자기 자신의 가정을 꾸린다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예술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어릴 적에 내가 너에게 명백하게 이야기 했듯이, 좋은 아내를 얻을 수 없다면, 나쁜 아내라도 얻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쁜 아내라도 있는 것이 낫다.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이를 가질까봐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사정이 여러 번 안 좋은 쪽으로 귀착하더라도 나는 쉽사리 원칙을 포기 하지 않는다.
내 작품에 좀 더 생기를 불어넣기를 원하게 된다면 내 삶은 좀 더 활기를 띠게 되리라. 나는 혼자 있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한다. 나도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몇 년 간, 그러니까 종교적 생각--일종의 신비주의--으로 혼돈을 일으켰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따뜻함과 함께 살았다. 이제 내 주위는 점점 더 침울하고, 춥고, 공허하고, 무미건조하게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이후로는 너로부터 받는 돈에 상응하는 작품을 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가능한 한 정말 돈을 받지 않을 작정이다. 간단히 말해,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아무런 ‘수입원’이 없다고 비난할 때 그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라도, 나는 너로부터 받는 돈을 내가 번 돈으로 생각하고 싶다! 매달 너에게 내 작품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너의 소유물이며, 그걸로 네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나로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저 데생은 치워버리고 싶소’라거나 ‘그걸 불속에 던져버리고 싶은데’라고 말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현 상황에서는 나는 ‘좋아요, 하지만 내게 돈을 주시오. 나에겐 해나가야할 일이 있으니까요’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너로부터 받은 것은 내가 갚아야 하는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정말 단호하게 말한다. 현재로서는 거기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또 내가 당분간은 집의 탈수기가 놓여있는 작은 방을 화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너와 아버지가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작품이 내가 다시 집을 빌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면 나는 아버지와 더 오래 같이 있지 않을 것이다.
며칠 내로 베짜는 사람을 담은 또 다른 펜과 잉크 데생을 보내도록 하마--다른 다섯 장보다 더 큰 것으로 정면에서 본 베틀도 함께 들어있다. 이 작품은 이 작은 데생 연작을 보대 완전하게 해 줄 것이다. 이 작은 베짜는 사람들을 네가 돌려보낸다면 나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리라. 그리고 네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이 작품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제작하고 싶은 브라반트 장인들에 대한 펜과 잉크 데생 수집품의 시작으로 네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월 경에는 수채화를 몇 점 보낼 작정이다. 네가 그걸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가지고 가겠다. 이 수채화들은 결점이 있겠지만, 내 작품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이, 대중 앞에 내놓는 일이 어리석은 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내 작품을 살롱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때 살롱의 심사 위원들이 어떻게 내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느냐고 네가 나에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는 사람들, 특히 Buhot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너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지만, 내 쪽에서 얼마 동안 열심히 작업을 한 다음에는 네가 내 데생을 보여주려 애쓸 것이라는 것이 진심이라면 나는 우리가 정말로 좋은 작품을 얻게 될 때까지는 대중 앞에 내놓지 않겠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내 작품이 현재는 아니더라도 나중에 구매자가 될 그런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도록 애써 줄 수 있겠니? 그렇다면 좋다. 나는 단지 그림에 몰두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베짜는 사람을 그린 아홉 번째 유화 습작을 집으로 가져왔다. 이곳에 온 이래로 아침부터 밤까지 베짜는 사람이나 농부들을 두고 작업을 하지 않고 보낸 날이 하루도 없다.
현재에 파묻혀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 자신이 우연찮게 처하게 된 그런 주위 환경에 도취되고 영감을 받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니?
결단코 내가 내 작품의 진가에 대해 커다란 환상을 품고 있다고 가정하거나 하지는 말아라. 몇 사람에게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의 진지함을 확신시키는 것 그리고 발림말 따위는 없이 그들로부터 이해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나머지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생각하지 말아먀 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보여져야만 한다고 믿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로 그 물결 가운데, 소수의 친구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는 펜과 잉크 데생을 몇 장 너에게 보내겠다. Rappard가 이것들을 보고 모두 다 좋아했다. 특히 ‘울타리 뒤에서’와 ‘물총새’와 ‘겨울 정원’ 등에 담긴 정서에 감탄했다. 이것들 외에도 너의 소유물이라 할 수 있는 유화 습작이 몇 점 있는데, 네가 워난다면 보내 주겠다. 하지만 이것들을 갖고 싶지 않다면, 내 작업에 필요하므로 내가 얼마간 보관했으면 한다. 하나는 붉은 천을 짜고 있는 사람을 담은 큰 것이고, 그 밖에 옥수수 밭에 있는 작은 교회, 이 근처에 있는 오래된 작은 마을의 정경 등이다. 그리고 교회 건물도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 세를 낸 널찍한 새 화실의 정돈을 막 마쳤다. 큰 방과 이웃한 작은 방, 이렇게 방이 두 개로, 큰 데다가 잘 말라 있었다. 지난 이 주일 동안은 이 일 때문에 상당히 바빴다. 집의 작은 방에서보다 거기서 훨씬 더 일을 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또 다시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숙식비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물론 커다란 잇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근에 그린만큼 그렇게 많이 그릴 수는 없었으리라. 네가 화실을 볼 때 내가 해놓은 걸 용인하기를 바란다.
어제는 어머니가 내 새 화실을 보러 작은 마차를 타고 왔다. 최근에 들어서는 처음에 그랬던 것보다 이곳 사람들과 더 잘 지내고 있는데, 기분 전환이 정말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너무 고독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나 작업이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상당히 낙관적이다. 아마도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작년의 변화가 내 입장을 개선시켰다는, 다시 말해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였다는 너의 견해에 동의하게 되리라. 브라반트는 꿈꾸던 그런 장소이다--때때로 현실이 바로 그 곁에 다가선다! 하지만 내가 지속해 나가기를 원했던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언제나 후회하리라.
화가 협회(the Society of Draughtmen)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다지 열망하지도 않으며, 너에게 말했듯이, 설사 회원 신청을 한다 하더라도 거절될 게 뻔하다. 내 수중에는 수채화가 하나도 없으며 서둘러서 새로운 작품들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베짜는 사람의 집 내부를 담은 두 장의 새로운 대형 습작 현재 막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착수할 기분이 아니라는 건 너도 이해하겠지.
지금 막 베틀 앞에 서 있는 베짜는 사람의 인물화를 끝마쳤다. 베틀을 뒷배경으로 배치시켰다. 그리고 우리 집 뜰 뒷편에 있는 연못의 정경을 담고 있다. 지난 겨울에 너는 당시 내 수채화에서 이전보다 색채와 색조에 있어서 만족할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있다고 편지를 썼지. 네가 올 때 내 그림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
내 팔레트에 관해 말하자면, 이곳에서의 내 작품에서는 은빛 색조보다는 갈색 색조(예를 들자면 역청과 고동색)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색조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오야, 현재의 몇몇 화가들이 고동색과 역청색을 뺏아간 사실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 왔다. 사실 그 색조로 멋진 것들이 무수히 많이 그려져 왔으며, 적절히 사용하면, 색채를 숙성하고 온화하고 비옥하게 한다.
암갈색(drab) 색깔들에 관해 말하자면, 내 생각에는 그림의 색깔을 분리해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암갈색은 강렬한 갈색을 띤 붉은 색, 암청색, 올리브-녹색과 나란히 사용하면 초지나 옥수수밭의 아주 섬세하고 신선한 녹색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준다. 몇몇 색깔을 ‘암갈색’이라고 명명한 de Bock도 분명 이것을 반박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한 때 그가 코로가 그린 몇몇 그림들에는, 예를 들자면 저녁 하늘에는, 그림에서 아주 빛나는 색채들이 있는데, 떼어 놓고 생각해보면 사실 오히려 어두운 회색조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첫 째로, 어두운 색깔이 밝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히려 색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짜 색깔에 관해서도, 붉은 색을 띤 회색, 상대적으로 붉다고 할 수 없는 색깔도 이웃하는 색깔에 따라 다소 붉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랑과 노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색채에다 아주 약간의 노랑만 넣어도 그 색깔을 바이올렛이나 라일락 색조 곁에 그 색깔을 놓으면 아주 노랗게 보이게 만들 수 있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색깔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실제로는 색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는 색채화가 보다 색조화가가 더 많은 듯하다.
Fromentin이 쓴 ‘옛 대가들(Les Maitres d'Autrefois)’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내가 헤이그에 있을 때 Israels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깔을 밝게 보이게 만드는 것에 관해 말했던 것을 간접적으로 들은 이래로 최근에 나를 엄청나게 사로잡고 있는 문제들이 빈번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간단히 말해, 검정색과 대립 시킴으로써 밝은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 ‘너무 검다’는 것에 대해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안다. 하지만 동시에, 예를 들어, 잿빛 하늘이 언제나 지엽적인 색조로 칠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완전히 확신을 할 수가 없다. Mauve 매형은 그렇게 하지만, Ruysdael은 그렇게 하지 않고, Dupre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물화의 경우도 풍경화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Israels는 흰 벽을 Regnault나 Fortuny와는 아주 다르게 색칠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은 아주 다르게 보인다.
실을 잣는 여인의 인물화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어두운 색조로 칠했다. 인물은 푸른 색 옷에다 쥐색 숄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베틀의 북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노인의 그림도 있다. 검정 색에 관해 말하자면, 이 습작들에서는 검정 색보다 더 강렬한 효과가 필요했기 때문인지 우연찮게도 그 색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terra sienna를 첨가한 남색, burnt sienna를 첨가한 감청이 순수한 검정 색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깊은 색조를 준다. 사람들이 ‘자연에는 검정 색이 없다’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면, 나는 때때로 ‘색깔에도 사실 검정 색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습작을 또 하나 착수했는데, 그것은 누르스럼한 녹색 바깥이 내다보이는 작은 창이 세 개 있는 실내로, 베틀에서 짜여지고 있는 푸른 천과 베짜는 사람의 상의가, 그것 또한 푸른 색으로, 대비되고 있는 그런 것이다.
색채의 법칙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좋은 책과 마주치게 될 때 그걸 구입해 준다면 나로서는 정말 기쁘기 그지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 이론을 철저히 공부하고 싶다.
실을 잣는 여인과 실을 감는 노인에서 내가 시도했던 것과 같은 것을 나중에 더 잘 해보려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그린 이 두 습작품에서는 다른 대부분의 습작품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보다 좀 더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몇몇 데생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지만.
요 근래에는 충고를 하는 법을 아는 사람과 이야기할 필요를 충족시키기가 종종 매우 어렵다는 너의 말에 나도 상당히 공감을 한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가 상당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것이다.
Rappard가 여기에 십 일 정도 와 있었는데, 네가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고 그랬다. 너도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베짜는 사람들의 집을 여러 번 찾아갔으며, 온갖 아름다운 장소도 여러 번 나들이 했다. 네가 Rappard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작품은 보지 않고, 내가 너에게 말해주는 것 외에는 그가 무엇을 제작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한 번 생각해 보렴.
최근에 내가 자연에서 가장 감명을 받은 것들을 아직 나는 화폭에 옮기지를 않고 있다. 반쯤 익은 옥수수밭은 현재 어두운 금빛 색조, 붉으스레하거나 금빛을 띤 청동색이다. 그러한 배경에 매우 거칠고, 매우 활기에 넘치는 여인들의 모습, 태양에 구리빛으로 탄 얼굴과 팔과 다리를 하고, 먼지 투성이의 조잡한 남색 옷에다 짧은 머리 위에는 베레 모 형식으로 아무 장식도 없는 보넷을 쓴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아라. 일하러 갈때면 그들은 어깨에 갈퀴를 걸치거나 겨드랑이에다 검은 빵 한 덩이를 끼고 초록 잡초들이 자라난 붉으스레한 보랏빛 먼지낀 길을 따라 옥수수밭 사이로 지나간다. 아주 풍요롭고, 동시에 매우 수수하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예술적이다. 나는 그 장면에 아주 빠지고 만다.
하지만 내 물감 값이 엄청나게 치솟아 올라 큰 크기로 새로운 것을 제작하는 것은 주의를 해야 겠다. 그 경우 모델 비용도 많이 들어갈 것이므로 더더욱 주의를 해야 한다. 적당한 모델, 내가 원하는 바로 그런 유형을 얻을 수만 있다면(낮은 이마에다 두터운 입술, 예리하지는 않지만 풍만하고 밀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입술을 한 거칠고 편편한 얼굴에다, 밀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옷을 입은 그런 모델). 엄청난 엄밀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렇다. 복장의 색깔로부터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여름에다 훌륭한 인상을 주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내 생각에 여름은 표현하기 쉽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여름의 인상은 종종 표현하기가 불가능하거나 추악하다. 봄은 부드럽다--녹색의 어린 옥수수와 분홍빛 사과 꽃 등. 가을은 보랏빛 색조를 배경으로 노란 잎들이 대비를 이룬다. 겨울은 검정 실루엣을 띤 눈의 계절이다. 하지만 여름이 옥수수의 금빛 청동색에 있는 오렌지색 요소를 배경으로한 파란 색의 반대라면, 우리는 상보적인 색깔(빨강과 녹색, 파랑과 오렌지, 노랑과 보라, 흰색과 검정)의 각각의 대비 가운데 계절의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는 추수하는 동안에 매일 같이 들판에 나가, 그 장면을 구성해 보았다. Eindhoven에 사는 누가 자신의 식당을 장식하고 싶어해서 그를 위해 제작을 한 것이다. 그는 전직 금세공가로 세 번에 걸쳐 아주 중요한 골동품들을 수집했다가 팔아버렸다. 지금은 아주 부유한 사람으로 골동품으로 가득찬 집을 지었으며, 아주 아름다운 오크나무 가구들을 들여다 놓았다.
그는 식당에사 ‘그림’을 놓고 싶어 한다 그는 다양한 성인들로 구성하려는 의도였으나, 나는 식탁에 앉아야만 하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식욕이 Meierij의 농부들의 삶을 담은 여섯 장의 삽화--동시에 사 계절을 상징하는--에 더 잘 돋구어 지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보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화실을 방문한 다음에는 그것에 상당히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는 그 패널화를 스스로 색칠하기를 원하지만, 나는 할인해서 구성을 디자인하고 색칠할 예정이다. 나는 그에게 씨 뿌리는 사람, 쟁기질 하는 사람, 양치기, 추수, 감자 수확, 눈 속의 우차 등의 예비적인 스케치를 그에게 주었다.
끔찍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테오야.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거의 아무도 모르고, 의심스러워 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너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려면 책 한 권을 채워야 할 것이다--그렇게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X 양이 그녀 가족과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 가족들이 그녀와 나를 중상한 그 절망의 순간에 독약을 먹었다.
나는 이미 삼 일 전에 그녀의 특정한 증상에 대해 의사와 상의를 했으며, 그녀의 오빠에게 비밀리에 그녀가 뇌막염에 걸릴 지도 모르며, 내 눈에는 X 양의 가족이 그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말함으로써 정말 신중치 못하게 행동을 했다는 걸 말하게 되어 유감이라고 경고를 했었다. 그런데 내말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으며, 그들은 이 년을 기다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단호히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으며, 결혼 문제가 달려있다면 곧바로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지 않든지 해야한다고 말했다.
테오야, 너도 ‘마담 보바리’를 읽어보았을 테니까, 신경 발작으로 죽은 첫 번째 마담 보바리를 기억하겠구나? 상황은 그와 비슷하지만, 여자가 독약을 먹어서 복잡하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조용히 거닐 때면 그녀는 종종 ‘지금 죽을 수 있다면’하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처음에 나는 그게 단지 허약함 대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녀가 먹은 것은 스트리크닌이었는데, 용량이 너무 적었거나, 그것과 함께 진통제로 아마도 클로로포름이나 아편제를 먹은 듯 하다. 그런데 이 둘은 스트리크닌에 꼭 맞는 해독제였다.
그녀는 즉시 위트레흐트에 있는 의사에게 보내졌다. 그녀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신경 질환으로 오래도록 고통받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므로, 내 생각에는 그녀가 상당히 겁에 질려서 쉽사리 두 번째로 시도를 하지는 않을 듯 하다. 하지만 그녀가 뇌막염이나 신경열에 걸린다면, 그 때는. . . . 그녀의 주위 환경과 가족들에 많은 것이 달려 있는데, 가족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상냥하게 대하는 것 외에는 사실 더 나은 방도가 없다. 그녀는 지금은 잘 돌보아 지고 있다.
이 사고로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너도 이해할 것이다. 동생아, 정말 끔찍스럽고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 때 우리는 단 둘이 들판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절망의 원인은 그들이 그녀를 비난한 방식에 있다. 그들은 그녀가 너무 나이가 많다거나 뭐 그런 말로 그녀를 비난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 지켜나가는 그러한 사회적 지위나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 그것들은 정말로 부조리한 것으로, 사회를 일종의 정신병자 수용소로, 완전히 뒤죽박죽인 세상으로 만들고 만다!
단기간 내에, 아마도 이 주나 삼 주 내에, 위험한 신경병이 나타날지 않을지 알게 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다른 모든 것은 내 마음을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이 슬픈 이야기에 너무나 정신이 나갔었다. 테오야, 동생아, 그 때문에 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다. 이곳에 있는 누구에게도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환자를 병문안하기 위해 위트레흐트에 다녀왔는데, 거의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보냈다.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와 면담을 했는데, 나로서는 그녀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서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해서 의사의 충고 외에는 다른 누구의 충고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우리의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깨트려 버려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항상 신체가 아주 연약했으며,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몸이 너무 약해 결혼 할 수가 없지만, 동시에 이별 또한 위험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결정을 내릴려면 시간이 좀 흘러야 한다. 물론 나는 항상 그녀의 친구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집착하게 된 듯하다.
이 여인이 (다른 다섯 혹은 여섯 명의 여자로 인해 너무나도 허약하게 되고 패배자가 되어 독약을 먹기는 했지만) 일종의 의기양양함 가운데, 마치 승리를 얻고 휴식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마침내 사랑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애처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전에는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십 년 전에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그녀는 엉성한 수리공이 망가뜨려 놓은 Cremona 바이올린의 인상을 풍기며,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상태는 너무나도 손상을 입을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원래는 커다란 가치를 지닌 드문 인물이었다.
나는 권태 가운데 죽기 보다는, 열정 가운데 죽고 싶다(Je prefere crever de passion, que de crever d'ennui).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 아니다. 그녀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서 뭔가 고귀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그녀가 실망감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다--그녀의 인습적인 가족은 그녀의 활동적이고, 상냥한 요소를 억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그녀를 극도로 수동적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점에서 지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들이 그녀를 망쳐버리지 않았더라도. 아니 그들이 그들이 그녀를 억압하는 걸 그만두었더라면, 그리고 그녀 한 명을 두고 싸우는 대여섯 명의 여인이 그녀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데 이제 나에게 ‘왜 그녀 일에 관여를 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녀에게 ‘왜 그의 일에 관여를 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와 나는 두 사람다 충분한 슬픔과 걱정거리를 안고 있지만, 두 사람 중 아무도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동생아,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확실히 믿을 뿐 아니라 알고 있다.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 감정은 진지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아마 그럴 지도 모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일은 결코 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들이 내가 그들의 눈에 어리석게 비치는 것보다 내 눈에 더 어리석게 비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나의 답은 그렇다.
일이 어떻게 끝날지는 나로서는 미지수이지만 그녀나 나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전 고려이지만***나는 항상 그녀가 사회적으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할 수도 있는 어떤 점을 고려하는 걸 존중해 왔다(내가 그걸 원했다면, 나는 그녀를 내 권한 안에 끌어들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지위를 완전히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뿌리 깊은 완미함이 오래 전에 그녀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빌어먹을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그녀를 다시 무감각하게 하고 얼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오, 나는 현재 기독교의 친구가 아니다. 비록 그 창시자는 숭엄하지만. 나는 현재의 기독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젊은 시절의 나를 홀리게 했다.
내가 다시 K를 본 것은 단지 일 년 후에 찍은 사진을 통해서 이다. 그녀는 더 나빠졌는가? 아니, 그 반대로 그녀는 더욱 더 흥미로웠다. 성직자 들이 여성의 평정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지럽히는 것은 때때로 많은 사람들에게 슬금슬금 모르는 사이에 엄습하고 죽음 자체보다도 나쁜 정체와 우울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들을 생명과 사랑으로 되던지는 것이 몇몇 사람들은 끔찍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교적이고 악마적이다.
오, 테오야, 왜 내가 나를 바꾸어야 하느냐? 나는 이전에는 매우 수동적이고 마음이 부드럽고 조용했다. 나는 더 이상 그렇지 않지만, 내가 더 이상 애가 아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요즈음은 풀어버릴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는 고뇌로 가득차 있다. 너에게 밝혀 두건데, 능동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하고, 실수하는 것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며, 너 자신도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곤 했다. 그 경우 사람은 정체되고 별볼일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너는 내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나는 별반 관심이 없다. 정복을 하든 정복 당하든 어떤 경우라도 정신적으로 깨어있고 활동적이다--그리고 그 두 가지는 보기와는 달리 아주 흡사한 것이다. 텅 빈 화판이 멍하니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는 그냥 재빨리 뭐라도 그려라. 그것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텅 빈 캔버스가 화가를 노려보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라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화가들이 텅 빈 캔버스를 두려워 하지만 텅 빈 캔버스는 과감히 달려드는 진정으로 정열적인 화가를 두려워 한다.
삶 역시도 언제나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무한히 공허하고, 낙심천만이고, 절망적인 텅 빈 측면을 인간을 향해 돌려놓는다. 그러나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헛되고 죽은 그런 면을 보여준다 할 지라도, 신념과 기력과 따뜻함을 지닌 사람, 뭔가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발을 들여다 놓고, 행동을 하고, 쌓아 올린다--사람들은 망가뜨린다고 하리라. 인정미라고는 없는 신학자들이야 그렇게 말하라고 하지.
최근에 나는 아주 열심히 작업을 했다. 이것과 다른 감정들 사이에서도 과로했다고 믿는다.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도 잘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몸이 허약해 졌다. 아직 그녀에 관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지만, 위트레히트로부터 상당히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라도 그걸 극복해 내야 한다. 그녀 편지의 어조는 훨씬 더 자의식적이고, 훨씬 평상심을 찾은 듯하다. 동시에 둥지를 도둑 맞은 새의 울음 같은 뭔가가 들어 있다. 사회에 대해서 그녀는 아마도 나보다는 덜 분개하는 듯 하지만, 그녀 역시도 사회에는 재미로 ‘둥지를 훔쳐가는 소년들이 있음’을 본다.
이번 겨울, 아마도 다음 달에는, 얼마 동안 떠나가 있을 작정이다. 앤트워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만 일년 이상을 Drenthe와 Nuenen에 있었으므로 도시 생활이나 , 환경의 변화를 원한다. 나는 그게 나를 위해서나 내 정신을 위해서나 좋은 전환이 될 거라고 믿는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내 정신은 내가 원하는 만큼 쾌활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너는 내가 언제나 고립되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러는 것보다 덜 열정적으로 생각하고 살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퇴짜를 맞기도 하고, 종종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잘못되기도 하리라--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까지이리라. 근본적으로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결점이 없는 위대한 그림도, 위대한 인물도 없다.
네가 아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사람들이 편한 대로 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도록 내버려 둔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어라. 어떤 일이 잘못 된 것으로 판명이 난 경우, 그것이 내가 그걸 시작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아니라는 점이다. 여러 번 실패를 한다면 나로서는 다시 시도해야 할 이유이다. 똑같은 것이 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내 관점은 세심히 고려하고 계산한 것이며, 그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똑같은 방향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다.
미래가 나에게는 언제나 매우 힘겨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하며, 내 일이나 내 자신이 많은 반대에 부딪힐 것이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에 나쁜 인상을 줄거라는 것도 안다. 젊은 사람들은 현재 나를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괘념치 않는다. 인간으로서건 화가로서건 나는 ’84년의 세대보다 ’48년 세대를 더 좋아한다. ’84년 세대 중에서도 Guizots가 아니라, 혁명파--Michelet와 Barbizon의 농민 화가들을 좋아한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단정적인 의견의 차이가 있을 때는 그것이 순연한 의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숙명이라는 걸 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느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치거나, 아버지가 때때로 내 바로 앞에 서 있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테오야, 내가 방책의 이쪽에 서 있고 네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안타깝다. 이 방책은 도로 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분명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내 작업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매일 매일 점점 더 힘을 쏟아 붓고 있다. 현재는 큼지막한 망토를 두른 양치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그 외에 가지를 친 버드나무 두 그루를 담은 습작을 제작하고 있는데 뒷 배경으로 노란 이파리가 달린 포플러를 넣고 들판도 얼핏 보이게 했다. 가을이 완연한 이곳은 현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며칠 내로 나무에 달린 이파리들이 모두 떨어지고, 이 주일만 지나면 진짜 낙엽(chute des feuilles)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양치기 그림은 운이 좋으면, 아주 오래된브라반트의 뭔가가 들어 있는 인물화가 될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데생을 몇 장--일련의 브라반트 풍경을 담은 걸로--해서 ‘런던 뉴스’에다 보낼 작정이다. ‘런던 뉴스’는 이제 종종 ‘그래픽’보다 더 나으며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프랭크 홀의 작품을 싣기도 했다.
Hermans 씨의 일을 한 대가로 아무 것도 받지 않았으며, 요구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기쁘게 했으므로 나는 충분히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만족한 바로 그런 경우에 가격을 올리기보다는 내려야 한다. 내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건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 더 싸게 일을 하고, 화상들로서도 수월하게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Hermans 씨는 아주 쾌활하고 유쾌한 분이다. 그리고 육십 세나 된 분이 마치 스무 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똑같은 젊은 열성으로 그림을 배우려고 하는 걸 보면 정말 코끝이 찡할 정도이다. 그가 부유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항상 활수하다기 보다는 인색한 편이었다.
Hermans 씨는 아름답고 오래된 그릇과 다른 골동품들이 상당히 많이 있어서 이것들 중에 몇몇으로 예를 들면 고딕 물품 같은 것으로 네 방에다 걸 정물화를 그려도 될 지 물어보고 싶구나. 바로 오늘, Hermans 씨는 원한다면 몇 가지를 화실로 가지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
현재 Eindhoven 출신의 세 사람에게 정물화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주에는 그들과 함께 매일 그림을 그렸다. 이 곳에서의 작업으로 내가 아무런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귀고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좀 더 활기 있게 작업을 하므로, 경제적인 성공을 못 거두었다고 해서 패배자라고 보지는 않는다.
Rappard가 이곳에 다시 왔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까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작업을 해나가야 할 듯 하다. 내 마음 속에는 제작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작업에 착수하는 걸 늦출 수가 없다. 거기다 새해가 되기 전에 물감 값을 다 지불하기를 원하므로 여분의 경비를 지출할 여유가 없다. 앤트워프에 간다면 거기서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며, 모델도 필요하게 될 텐데 현재로서는 너무 비싸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산보를 하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으며, 새로운 모델을 몇 명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년에는 더 많은 화가들이 이 지역을 찾을 듯하다.
우리는 인상주의를 두고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 홀란드에서는 인상주의가 진정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Rappard와 나는 둘 대 현재의 경향에 매우 관심이 깊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새로운 개념이 솟아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며, 그림은 몇 년 전과는 상당히 다른 색조로 칠해지고 있다.
내가 방금 제작한 것은 오란 가을 나뭇잎이 깔린 포플러 거리를 담은 커다란 습작으로 태양이 대지의 낙엽 위 여기 저기에 번쩍거리는 부분을 만들고 있는데, 그 밝은 부분이 가지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와 대조된다. 길 끝에는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그 위에는 온통 푸른 하늘이다. 네가 이곳에 온 이후로 내 색채에 변화가 찾아 왔는데, 너도 두어 달 내에 끝나게 될 습작품들에서 그걸 보게 되리라. 그것들은 단순히 색채의 문제에서는 내가 뭔가를 성취했다는 걸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일 년 내에, 내가 그 기간 동안에 유화를 꾸준하게 많이 그려나간다면, 그림 그리는 방식에서나 색채에 있어서 더욱 더 변화하게 되겠지만, 나는 더 밝게 되기 보다는 더 어둡게 될 것이다.
이번 하반기도 별로 좋지 못하다고 네가 편지에 쓸 때, 그건 너로서는 쓰기에 유쾌한 소식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나로서도 받아 보기에 유쾌하지 못하다. 우리는 그 상황을 구제하도록 애쓰야 한다. 상황이 우리 두 사람 다를 위해서 더 나아지도록 애쓰야 한다. 나는 이미 네가 용인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Mauve 매형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려고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Tersteeg 씨와의 관계도. Tersteeg 씨에게는 최대한도로 강하게 말했다. ‘Mauve 매형의 화실에서 습작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시오!’ 나는 새로운 것들으 배웠지만, Mauve 매형이나 정말 명석한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일이 질질 끌리다 보면 용기가 점점 사라져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일 년 이상을 미술계와는 거의 아무런 연락도 엇이 지냈다. 물론 Mauve 매형이나 Tersteeg 씨로부터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가능성도 농후하다.
작년에 내가 작업에 썼던 것보다 올해 더 많이 썼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내가 얻은 소득은 아침의 몇 시간이면 나는 이제 모델의 두상을 쉽게 붓질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색채는 점점 더 확고하고, 정확해 지고 있으며, 내 기교에도 개성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다. 물감 값으로 내가 받는 돈의 상당 부분을 지출한다. 나를 위해서는 오버코트를 하나 사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내가 전보다 옷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돈이 부족한 것은 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재 돈을 더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신중하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게 내 성미에 더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Tersteeg 씨와 Mauve 매형이 내 색채에 넘어오기를 바란다.
너에게 힘겨운 시기라는 걸 알지만 우리는 나아가야 하며, 분명히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가 올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예술가는 후원가의 고뇌이다(L'artiste est la desolation du financier)’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반대의 말 ‘후원가는 예술가의 고뇌이다(Le financier est la desolation de l'artiste)’라는 말도 가능하다.
내가 좋은 그림을 제작한다면 그것이 혁명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통해서 보다 뭔가를 성취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는 네 말은 정말 옳다. 하지만 네 편지에서는 이 문장 뒤에 너는 나에게 미술품 판매를 개혁할 새로운 착상을 몇 가지 지적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너에게, 나뿐만 아니라 너 개인에게도 이익이 될 만한 것을 한 가지 지적해 줄까? Mauve 매형과 Tersteeg 씨를 향한 나의 노력을 지원해다오. 단지 돈을 보냄으로써만이 아니라 너의 영향력을 발휘해 내가 수월하게 해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다오. 나에게는 뭔가를 성취하고 돈도 벌 힘이 있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미술품 판매를 개혁하는 그 문제에 관해 화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직접 나온 몇 가지 참신한 힌트를 너에게 기꺼이 주게 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이곳은 날씨가 살을 에는 듯 했지만, 나는 여전히 Eindhoven의 반대 편 Gennep에 있는 오래된 수차의 커다란 습작을 야외에서 제작하고 있다. 이것이 올해 야외에서 그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겨울 동안에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온갖 종류의 모델을 구할 수 있으므로 오십 여개의 두상을 그려야만 한다. 지금은 모델에게 줄 돈이 있는 한에서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그림을 그린다.
초창기에 내가 계속해서 de Groux 스승의 작품에 대한 나의 커다란 존경심과 공감을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이전보다도 더 많이 그를 생각한다. 우리는 그의 역사화만을 보아서는 안 되며, 그의 ‘빈자들의 벤치(Le Banc des Pauvres)’를 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브라반트 유형을 보아야 한다. 그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당시 de Groux가 자신의 브라반트 인물들을 중세 복장으로 갖추게 했더라면, 그는 Leys와 우열을 다툴만큼 부를 쌓았으리라.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당시의 중세주의에 대한 상당한 반발이 있다. 당시에는 원치 않았던 사실주의가 지금은 요청되고 있으며,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그 필요성이 더 많다--개성과 진지한 정감을 갖춘 사실주의가 요구된다. de Groux가 망치질을 하던 것과 똑같은 그 오래된 모루 위에서 다시금 망치질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너에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위대한 대가들을 주의깊게 따르려 애쓴다면, 어느 순간에는 그들 모두가 사실로 돌아와 있음을 보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들의 창조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똑같은 눈과 똑같은 정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사실 속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와 감식가들이 자연과 좀 더 친숙하다면 그들의 감식안이라는 것이 단지 그림 가운데 살고, 그것들을 상호 비교하는 지금보다는 그 평가가 더 정확하게 되었으리라. 그 자체로는 좋은 질문의 한 면처럼,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을 잊어버릴 때는 확고한 기반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너의 경우에도 농가의 이 작은 집들에 어쩌다가 한 번 찾거나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다는 점, 또 이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는 것, 네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에 그려진 풍경속에 들어있는 그러한 정감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성 니콜라스 절 때 보내준 것들을 고맙게 받앗다. 한 달이 끝나는 이 며칠, 끝내기를 원하는 작품들을 때로 중단해야만 할 때, 그게 나를 얼마나 안달나게 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제 나는 Gennep의 수차를 담은 내 습작품을 집으로 가져왔다. 나는 그 작품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렸으며, 그 작품으로 인해 Eindhoven에 새로운 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해서, 내가 그를 찾아가 막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Anton Kerssemakers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마흔 살 가량 된 제혁업자이다. 나는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뭔가를, 돈이 아니라 물감으로, 지불하게 할 작정이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으니까.
Hermans 씨가 마침내 내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앤트워프에 가기를 원한다면 그 분에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겠지만 이번 겨울에는 그곳에서 연줄을 만들려고 시도를 할 것이다. 내가 내 작품의 판로를 스스로 찾아보고, 스스로 화상이 되는 것이 낫다는 너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Mauve 매형과 Tersteeg 씨는 나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아주 ‘적절하게’ 거부했다. 그게 나를 낙담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그게 전시회에 그림을 보냈다가 거절 당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은 거의 기쁘다고 할 만하다.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그건 내가 결국에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힘이 내 안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싸움에서 나는 내 힘이 커 나가는 걸 느낄 것이고, 비판이나, 악의, 심지어 반대를 통해서 나는 더 많이 배울 것이다.
이삼 일 안에 너는 두상을 습작한 열두 장의 작은 펜과 잉크 데생을 받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인물화 작업을 할 때 내 적성에 가장 잘 맞음을 느낀다. 하지만 인물은 언제나 주위 환경 안에 서 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그 주위 환경도 재생하게 되고 만다. 이 두상으로 무얼 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인물 그 자체로부터 구성을 이끌어 내게 되리라.
네가 좋은 한 해를 보냈으며, 한 달에 천 프랑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는데 그걸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집에서 들었다. 일단 구필 화랑에 몸 담기로 했으므로 거기에 머무려고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한 해를 이보다 더 우울한 상황에서, 아니면 더 우울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적은 거의 엇었다. 바깥은 황량하다. 들판은 검은 흙 더미와 눈 투성이이며, 낮에도 대체로 안개가 낀 것이 눅진하기 짝이 없다. 저녁의 붉은 해, 아침 나절의 까마귀, 시든 풀잎, 빛바래고, 썩어가는 초지, 검은 관목 숲, 침침한 하늘을 배경으로 철사처럼 뻣벗한 포플러와 버드나무의 가지들. 이것들이 내가 지나치면서 보는 것들이고, 실내는 이 우중충하고 어두운 겨울 날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정경은 또 농부와 베짜는 사람들의 골상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들에게도 지금은 힘겨운 시기이다. 꾸준히 작업을 하면 육십 야드 짜리 천을 하나 잘 수 있는데,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 여자가 그 천을 감아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업에는 두 사람이 필요한데, 그들이 작업한 것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그 천 하나로 그는 일 주일에 총 사 프랑 오십의 수익을 올리는데, 요즈음에는 그것을 가지고 제조자에게 가면 다음 작업 분량을 받으려면 일 주일이나 이 주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임금이 낮을 뿐만 아니라, 일 자체도 별로 없는 편이다.
이곳의 형편은 종종 애처럽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어디에서도 반항적인 연설을 닮은 어떤 것을 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증기선에 태워져 영국으로 이송되는 삯마차의 말이나 양처럼 쾌활함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가 파업과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던 일 년간 함께 지냈던 광부들(charbonniers)의 정신보다는 더 나아 보인다. 그곳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1884년 10월 24일 자 ‘일러스트레이션’ 지에는 Lyons에서의 베짜는 사람들의 파업을 담은 Paul Renouard의 데생이 실렸다. 노인과 여인 몇 명, 그리고 아이가 베짜는 사람의 집에 가만히 앉아 있고, 베틀은 멈추어 서 있었다. 그 그림은 생명이 넘쳐 흐르고 깊이가 있어서 밀레나 도미에, Leparge의 곁에 두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Renouard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모방하지 않고 자연에서 작업을 하여 그런 경지에 오른 점, 그리고 그가 처음부터 자신의 양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기교에서조차, 매우 명석한 사람들과 조하를 이루는 점 등을 생각할 때 나는 진정으로 자연을 추구할 때 화가의 작품은 매년 발전하게 된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하루하루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나는 또 몇 장 더 그렸다. 너는 그 그림들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나로서는 다른 길을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나중에는 지금 제작한 것들조차도 찬탄하게 되지 않을까 해’라는 너의 말은 이해 할 수가 없다. 내가 너라면 나는 자부심과 독립된 견해를 적절히 갖추고 어떤 것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현재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 것이다.***
내가 나중에 더 나은 작품을 제작할 거라면 나는 분명 다른 식으로 작업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잘 익을 지는 몰라도 같은 사과일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에 대해 내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며, 나로서는 ‘현재 좋지 못하다면, 나중에도 좋지 못할 것이며, 나중에 좋을 거라면 지금도 좋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도시 사람들은 처음에 옥수수를 풀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옥수수는 어디까지나 옥수수이니까.
한 달이 지나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내 지갑은 거의 비었다. 그리고 남은 돈도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무 열심히 그리고 너무 많이 작업을 하기 때문인데, 의존적인 입장에 놓이지 않고 내 경비를 다 지불해버리는 지경에까지는 적어도 도달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내 그림을 위해서는 아직 좀 더 이곳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곳에 화실을 정착시키고 나니까 그림 그리는데 충분히 돈을 쓰는 것이 가능해 졌다. 사정이 달랐더라면 내가 색채와 색조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에는 적어도 삼 년을 꾸준히 정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도 단지 경비 문제 때문에. 여러 정황 때문에 이곳에 온지도 이제 꼭 일 년이 되는 구나. 내가 집엣 사는 것은 내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준비가 되면 그걸 살롱 전에 보내보도록 하겠다고 너는 편지에 썼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너의 태도에 고마움을 보낸다. 현재로서는 보내고 싶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 최근에 나는 거의 전적으로 두상만 그렸고, 그것들은 글자 그대로 습작품들이다. 그렇긴 하지만, 네가 살롱 전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을 만날 때, 뭔가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습작에 지나지 않더라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장 보내도록 하겠다. 만 일 년 이상을 나는 거으 전적으로 유화에 힘을 쏟아 부었다. 나는 이것들이 내가 처음으로 보낸 유화 습작들과는 다소 다르다고 감히 말한다. 젊은 여인의 두상을 받게 될 것이다. 육 주 정도 더 빨리 살롱 전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나는 그걸로 실을 잣는 여인상이나 실을 감는 여인상 등 전신 인물화를 제작했을 것이다.
두상에 담긴 다양한 개념에 대한 너의 느낌에 대해 말하자면, 이끼 낀 초가로부터 막바로 나온 이 그림들이 너에게 정말 어색하게 보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누이들 같은 처녀들의 두상을 그리는 화가들이 있다는 것도 나는 정말 잘 이해하고 있다. Whistler가 몇 번 그랬고, 밀레(Millais)와 보그턴도 그랬다. 문제는 화가가 자신이 그리는 인물에 얼마만큼의 생명력과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생명력이 있다면, Alfred Stevens의 숙녀의 인물화나 Tissots의 몇몇 그림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류의 처녀들과 스스럼없이 친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해 줄리도 없다--특히 내 누이들과도 친하게 진지 못한다. 아마 나도 드레스를 입는 여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영역은 재킷과 페티코트를 입는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녀들도 정말 잘 그려낼 수 있다는 네 말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Chardin은 프랑스 여인(Francaises)을 그린 프랑스 인이지만, 존중할 만한 홀랜드 여인들은 내 생각에는 프랑스 여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흔히 보는 존중할 만한 홀란드 여인 계층은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하기에 특히 매력적이지가 않다. 그 반면에 평범한 하녀들은 정말 Chardin의 그림과 같다.
눈이 내렸을 때 우리 정원의 습작을 몇 점 그렸다. 그 이후로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저녁 하늘은 농가의 어두운 실루엣 너머로 금빛을 띤 라일락 빛깔이며, 검은 포플러가 드문드문 농가 위로 솟아 올라 와 있고, 앞 부분은 색바랜 초록빛 인데, 도랑가를 따라 검은 흙이 띠를 이루며 색깔에 변화를 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본다--그리고 그것이 다른 어떤 사람에 못지 않게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인물의 비례나, 두상의 타원형의 분할 등에 훨씬 더 흥미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인물을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기 전에는 다른 것에 집중할 수가 없다. 물론, 나는 절대적으로 억제할 도리 없이 풍경 그 자체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 도비니와 Harpignies와 Ruysdael 같은 사람들과 다른 많은 화가들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과 대지와 물 웅덩이와 관목 숲에 만족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우리를 전적으로 만족시킨다.
나는 언제나 파란 색을 찾는다. 이곳의 농부들은 대체적으로 파란 색을 입는다. 그 파란 색은 익은 옥수수 가운데나 너도 밤나무 울타리의 시든 이파리를 배경 가운데 있을 때 정말 아름다우며,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내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란 색을 입는다. 그것은 그들이 직접 짠 조악한 아마포로, 날줄은 검은 색이고, 씨줄은 파란 색으로 짜넣은 것이라 검정과 파랑이 교차하는 패턴이다. 이 색이 풍파로 인해 바래고 다소 변색이 되면, 그 색은 살색이 나타나는 무한히 고요하고, 섬세한 색조가 된다.
지금은 빛이 있을 때까지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농가의 등불에 의존하여 저녁 늦게까지 그린다. 그 때 쯤이면 팔레트에 있는 것을 거의 분간할 수조차 없지만, 가능하다면 등불의 야릇한 효과가 주는 뭔가를 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Lhermittte의 멋진 목판화를 보내주어서 고맙다. 이곳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는데, 정말이지, 가끔씩은 아름다운 것을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그런 것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내 작업의 외도나 방식, 즉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직접 아니면 연기로 더럽혀진, 지저분한 오두막에서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이 용기를 준다. Lhemitte 같은 화가들이 농부의 인물을 그들이 자신있게 쉽사리 창조를 해내고 구성을 하고 그럴 때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연구했는가 하는 걸 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상상을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나는 회상할 따름이다(On croit j'imagine. Ce n'est pas vrai--je me souviens).’
이제,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아직 한 장의 그림도 보여줄 수 없다. 데생도 보여줄 만한 건 거의 한 장 없다. 하지만 나는 습작을 제작하고 있으며, 그래서 나는 나 역시도 손쉽게 구성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가망이 있다는 걸 뚜렷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어디서부터 습작이 끝나고 그림이 시작되는 지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좀 더 크고, 정교한 것으로 두어 장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 인상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얻게 된다면 착수할 것이다.
아직도 그 일이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그 날들은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인상은 끔찍스럽지 않으며, 단지 엄숙할 따름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길지 않으며, 문제는 그것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느냐 하는 것***뿐이다.
테오 네가 첫 며칠 동안 일할 수 없었다고 썼을 때 그랬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정직하게 정물화를 작업하였으며, 오늘은 다시 더 잘 그릴 수 있었다. 전면에는 아버지의 담배 쌈지와 파이프가 놓여 있도록 배치했다. 갖고 싶다면 가져도 좋다. 나는 기꺼이 그러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네가 가외로 돈을 많이 써야 했으므로, 내가 매년 봄과 여름이면 받곤 하던 가욋돈을 네가 줄 수 없다면, 그런데 나는 그 돈이 없으면 안 되므로, 내가 유산 중 얼마 간 예를 들자면 이백 길더를 나의 몫으로 받는다면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머지는 나는 기꺼이 동생들에게 양도할 것이며, 네가 계속해서 나를 도와 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내가 내 몫을 동생들에게 양도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동생들이 내 몫을 받도록 해준 것은 너라고 생각한다.
매년 이맘 때이면 나는 빚을 갚고 새 그림 재료들을 얼마간 구입할 수가 있었다. 올해에는 지난 몇 달 동안 그림을 너무나 많이 그려서 여느 때보다도 더욱 더 절실히 그것들이 필요하다. 이월에도 삼월에도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달도 나에게는 쉬운 달은 아니었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잘 지내고 있지만, 화실로 가서 지낼 작정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결국에가서는 함께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이 문제를 놓고 그들을 탓하거나 내 자신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그런 것에 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는 농민 화가 사이의 생각의 부조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사정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더 낫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오월 일일 경에 옮길까 한다. 어머니는 아마도 내년에 Leyden으로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 중에서 브라반트에 머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그리고 내가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내 자신을 농민 화가라고 부를 때, 그건 진정한 사실이며, 앞으로 너에게도 더욱 더 분명해 질 것이다. 나는 시골에 있을 때 마음이 푸근해 지며, 내가 수없이 많은 저녁을 광부와 토탄 채굴꾼, 베짜는 사람, 농부들과 화롯가에서 생각에 잠긴 채--너무 열심히 작업을 하느라 생각할 틈이 없을 경우가 아니라면--보낸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다. 농부의 생활을 하루 종일 계속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에 너무나 몰두하게 되어서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시골의 심장부 깊숙한 곳에서 살며서 시골 생활을 그리고 싶은 소원 외에는 다른 소원이 없다. 내 일이 거기에 놓여 있다는 걸 느끼므로, 나는 내 손을 쟁기에서 떼지 않고, 꾸준히 내 고랑을 파나갈 것이다.
네가 그 문제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내가 다른 경로를 택했으면 하고 바란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그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Mauve 매형이 언제나 Bloemendaal 머무르지 않은 것처럼 나도 이곳에 언제까지나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너는 말했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게 뭐가 좋은 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경비가 적게 덜기 때문에 더 많이 작업을 할 수 있다.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에 테오 네가 더 가치를 두는 것과는 달리 나는 그 반대로 자신이 그리는 것 바로 한 가운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이따금씩 추론해 본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 것이나, 그럼에도 낙담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들라크루아에 대해 읽은 글 중에서 어떻게 그의 그림 열일곱 점이 거절당했는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얼마나 빌어먹게도 용감한 사람들이었는지! 그 선구자들은! 하지만 현재에조차도 계속 전투를 수행해 나가야 하며, 아무리 내가 보잘 것 없을 지라도 나는 내 자신의 싸움을 수행해 나가리라.
밀레의 작품에 대한 무관심이 화가에게 있어서나, 그림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고무적인 일은 아니라고 너는 썼다. 밀레 자신도 그걸 느꼈고 알고 있었다. 도시 출신의 사람들이 농부를 그릴 때, 그들의 외양이 멋지게 그려지긴 했어도, 부지중에 파리 근교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라고 너는 말한다. 그건 화가들이 개인적으로 농촌 생활의 정수 속으로 충분히 깊숙하게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De Groux는 진짜 농부들을 그렸다. 그는 밀레와 같은 양식의 진정한 대가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일반 대중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도미에나 Tassaert처럼 배후에 남아 있지만, 현재 그와 같은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Mellery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일반적인 공감에 관해 말하자면, 몇 년전에 르낭의 글에서 진정으로 훌륭하고 유용한 뭔가를 성취하고 싶은 사람은 일반 대중의 승인이나 인정을 기대하서는 안 되며, 그와 반대로 아마 극소수의 가슴만이 그것에 공감하고 동참하기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라는 걸 읽었다.
내 경우에 있어서는 나는 도시에 이끌려 거기에 자리를 잡은 몇몇 사람들은 퇴색되지 않는 시골의 인상을 여전히 지니고, 일생 동안 들판과 농부를 향한 향수를 느끼며 산다는 걸 굳게 확신한다. 도시에 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골의 일부라도 흘낏 보기 위해 진열장을 지나 몇 시간이나 걷곤 하던 걸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테오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새롭게 시작한 것을 양쪽에서 지속해 나가기를 바란다. 보다 중요한 구성에 몰두하는 가운데, 농가에서 그린 습작들을 곧바로 너에게 보낸다. 지금부터 이번 여름 네가 다시 올 때까지는 삼 개월의 시간이 있다. 매일 열심히 일을 한다면, 그 때까지는 습작을 스무 장 제작할 수 있으며, 네가 원한다면 언젠가는 앤트워프에 가지고 갈 것으로 스무 장 더 제작할 수 있다.
시간이 헛되어 흘러가 버리도록 하지 마라. 가능한 한 많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다오. 가능한 한 많이 그림을 그리고 생산적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결점과 자질에 상관 없이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자. 내가 우리라고 한 이유는 네가 보내준 돈, 나에게 조달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돈이 내 작품에 뭔가 훌륭한 점이 있을 때 그것의 반은 네 자신의 창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너에게 주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습작품들을 모두 함께 모아라. 아직 그 어느 것에도 서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들이 그림으로 통용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습작품들을 수집하려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점차적으로 그것들이 너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기를 바란다.
이번 주에는 저녁에 감자가 담긴 접시를 둘러싸고 있는 농부들의 구성을 시작했다. 방금 전에 이 농가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등불에 의지하여 그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나는 삼 일을 계속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 작품을 작업하고 있는 중이다. 토요일 밤에는 물감이 다소나마 마르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작업을 금하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나는 이 사생화를 상당히 큰 캔버스에다가 제작했다. C M 삼촌이 데생에 험을 잡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확고한 논점이 무언지 아니? 그것은 자연에 있어서 빛의 아름다운 효과는 데생을 할 때 아주 재빠른 손놀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대가들은 어떻게 마무리를 정교하게 하는가 하는 점과, 그와 동시에 대상에 넘치는 생명력을 어떻게 그대로 유지하는가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로서는 분명 내 능력 이상이다. 그렇긴 하지만, 현재 내 능력의 한도내에서는 내가 본 것의 진정한 인상을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그것은 언제나 글자그대로 똑같은 것은 아니며, 아니 결코 똑같지는 않은데,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기질을 통해서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획득하고자 애쓰는 것은 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동작을 그려내는 것이며, 수학적인 정확성으로 두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표정을 포착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인부가 고개를 들고 공기를 들이 마쉬거나 말을 할 때의 표정. 간단히 말해 생명력을 포착하는 것이다.
농가에서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사생화에다 몇 가지를 수정해서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 그림은 Portier 씨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것이 될 지도 모르며 아니면 전시회에 보낼 수도 있으리라. 내 작품에 대한 Portier 씨의 견해를 듣게 되어 매우 기쁘다. 특히 내 작품에서 ‘개성’을 발견했다고 하니. 나는 사람들이 승인하든 승인하지 않는 그런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내 자신이 되려고 점점 더 애를 쓴다. 내 말은 Portier 씨가 자신의 좋은 견해를 견지하든 않든 내가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의 견해를 강화해 줄 그런 것을 제작하려 애쓰겠다는 것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사생화로 석판화를 제작하였다. Portier 씨가 원하는 만큼 많이 판화를 주기 바란다. 그것은 Dou나 van Schendel의 등불과는 다르다. 그에게 이 나라의 화가들이 그린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가 그 안에 빛이 들어 있는 검 정 그림이었다는 걸 지적해 주는 것이 아마 불필요한 일은 아니리라.
인상파 화가군이 있다는 걸 듣고 있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누가 독창적이고 누가 더 중요한 대가인지는 안다. 풍경 화가와 농민 화가들은 마치 축 주위를 도는 것처럼 들라크루아와 코로, 밀레, 그리고 그 외 화가들의 주위를 돌고 있다. 내 말은 사람들이라기 보다, 색채뿐만 아니라 데생에도 규칙 혹은 원칙 혹은 기초적인 사실이 있어서 우리가 실제로 사실을 알아내게 될 때는 그것을 기반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Portier 씨에게 외젠 들라크루아와 당시의 사람들에 대한 나의 확고한 신념을 말하고 싶다.
밀레의 인물화에 대한 다음 말은 얼마나 전형적인가! ‘밀레의 농부는 그가 씨를 뿌리는 흙으로 칠해진 듯이 보인다(Son paysan semble peint avec la terre qu'il ensemence).’ 얼마나 정확하고 얼마나 맞는 말인지! 그리고 이름은 없지만 모든 것의 진정한 기초라 할 수 있는 그 색깔들을 팔레트 위에서 섞는 법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화상들은 그것에 대해 너무나도 애매하게 자의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도, 만일 Henri Pille가 결정을 해야만 했다면 ‘검정 고양이(Le Chat Noir)’는 아마도 이 사생화를 거절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제작한 작품이 정감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리고 본질에 진실되면 될 수록, 그 작품은 더 많이 비판을 받고, 더 많은 적개심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비평을 이겨낸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느낌을 받은 제재이다. 나는 그 작품의 약점 뿐만 아니라 금방 눈에 띠는 실수들도 지적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생명력이 있다. 아마도 정말 결점 하나 없는 몇몇 그림들보다 더 많은 생명력이 들어 있으리라.
시골 생활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것들에 통달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아무리 힘겨운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 할 지라도, 우리가 그런 정도의 고요함--평정심이라는 의미에서--을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내 말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정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향수를 느끼지 않으며, 나는 문명에 대한 권태에 넌더리가 난다. 우리는 더욱 행복하며-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정말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겨울에는 눈 깊은 곳에 파묻히고, 가을에는 노란 이파리 속에 파묻히고, 여름에는 익은 옥수수 사이에, 봄에는 풀 가운데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좋은 일이다. 항상 풀베는 사람과 농가의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름이면 머리 위에는 커다란 하늘을 이고, 겨울에는 난롯가에 있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라고 느낀다는 것. 짚북데기 위에 자고 검은 빵을 먹더라도--사람은 더 건강해 질 따름이다.
오늘은 몇 시간 동안 산보를 했는데 정말 멋있었다. 나는 Brittany나 Katwijk나 Borinage나, 그곳의 자연이 더 두드러지거나 극적이지 않다는 걸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의 황야와 마을들도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답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다시 작업하는 중이다. 두상들의 새로운 습작들을 그렸으며, 특히 손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이 작품이 완성 되었을 때 Portier 씨가 뭐라고 할 지 궁금하다. 이 작품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나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가고 있으며 이 작품에는 네가 내 작품에서 여태껏 볼 수 있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렇게 뚜렷하게는 보지 못했으리라. 내가 중점을 두는 것은 특히 생명력이다. 아마도 너는 이 작품에서 네가 얼마 전에 썼던 것을 이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개인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화가들을 상기시킬 정도로 흡사한 면모를 띤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네 생일에 맞춰 그림을 보내고 싶었다. 실제 그림은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그려 졌으나, 겨울 내내 두상과 손의 습작을 그리면서 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그리는 동안의 며칠은 정규전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내가 활기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등불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접시에 넣고 있는 바로 그 손으로 땅을 일구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려 애를 썼던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육체 노동과, 그들이 자신들의 양식을 어떻게 정직하게 벌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나가 즉시 이 작품을 좋아한다든가 찬탄한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바라지 않는다.
겨울 내내, 나는 이 직물의 실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분명한 패턴을 탐색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거칠고, 조악한 면을 띠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실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주의깊게 선택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농민화라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그렇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들이 옷으로 차려 입은 농부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그들에게 인습적인 매력을 부여하는 것보다 그들의 거친 특성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고 확신한다. 농가의 처녀는 먼지 투성이에다 여기저기 기운 푸른 페티코트와 보디스를 입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 옷들이 날씨와 바람과 태양 등에 바래 가장 섬세한 빛깔을 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숙녀의 드레스를 걸친다면 그녀는 자신의 전형적인 매력을 잃게 되고 만다. 들판에서 퍼스티언 천의 옷을 입고 있는 농부가 일요일 날 예복을 입고 교회에 갈 때보다 더 전형적이다.
같은 이유로 농민화에 일정한 인습적인 유연함을 부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민화에 베이컨 연기나 감자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김 따위의 냄새가 난다면,그건 괜찮은 일이며, 건강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축 우리에 똥 냄새가 난다면, 그건 우리에 속하는 것이며, 들판에 익은 옥수수나 감자, 아니면 구아노나 거름 냄새가 난다면 그건 건강한 것이다. 특히 도시에서 온 사람에게는 더군다나 그렇다. 그런 그림은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리라. 농부의 생활을 그린다는 건 진지한 일이며, 예술과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그림을 제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내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롱’화 중에는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결점도 없이 데생하고 그린 것임에도, 가슴에도 정신에도 나에게 아무런 양식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끔찍스러울 정도로 권태롭게 만드는 작품들이 무수히 많음을 본다.
그림에 있어서는 마지막 며칠이 위험한 때이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림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때에는 그걸 망칠 가능성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큰 붓으로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수정을 할 때에는 작은 붓으로 조심스럽게 침착하게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걸 Eindhoven에 있는 친구에게 갖다 주면서 내가 그런 식으로 그림을 망치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방편을 취했다. 그리고 삼일 정도 지난 다음에 그 곳에 가서 달걀 흰자위로 그림을 닦고 마무리 손질을 할 작정이다. 이 사람은 내가 석판화를 만들어 낸 습작품도 보았는데, 내가 데생과 색채화를 동시에 그런 속도로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매우 어둡다. 그리고 흰 부분도 흰색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단지 중간 색깔을 이용했다. 색깔은 그 자체로는 상당히 어두운 회색이지만, 그림에서는 희게 보인다. 왜 내가 그것을 그렇게 했는지 이야기 해주마.
그림의 대상은 작은 등불이 켜진 잿빛 실내이다. 더러운 아마포 식탁보, 연기에 그을린 벽, 여자들이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쓰던 더러운 모자, 이 모든 것을 등불 아래서 속눈썹을 통해 볼 경우 매우 어두운 회색으로 보이며, 등은 노랗고 붉은 색은 불타오르고 있지만, 다른 흰 부분보다 더, 훨씬 더 밝다.
피부색을 놓고 볼 경우, 피상적으로 볼 때 우리가 흔히 피부색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으로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처음에 그릴 때에는 노란 황토색과 붉은 황토색, 흰색으로 피부색을 칠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밝았고 완전히 잘못 되었다. 어떻게 해야만 할까? 머리 부분을 모두 끝냈다. 그것도 상당히 애를 써서 끝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무자비하게 다시 칠했다. 그래서 지금 칠해진 색깔은 흙이 묻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좋은 감자의 빛깔과 같다.
나는 그림 자체에 대한 기억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그림에서 나는 생각이나 상상이라는 의미에서 내 자신의 머리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습작의 경우에는 창조적 과정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림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습작에서 실제 개인의 상상력을 위한 양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 번에 두 번째로 들라크루아의 말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첫 번째는 색채와 관련된 그의 이론이었다. 지금은 그림의 창조와 관련된 그이 이론이다. 그는 최고의 그림들은 기억으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워서(Par coeur!)’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두상을 도대체 몇 번이나 그렸던가! 그리고 나서도 즉석에서 세부 사항을 그리기 위해 나는 매일 밤 달려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 대상을 직접 보고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기 위해 그림을 그 집으로 가지고 갔다. 이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언제나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내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뭔가 너를 기쁘게 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그러기를 바란다. 이 그림을 보고 네가 나에게도 대상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방식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 이를 테면 벨기에 화가들에 순응하는 면도 있음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따라서, 옛날 홀란드의 대가들--그 중 한 명을 들자면 Ostade--과는 다른 세기에 다른 양식으로 그리긴 했지만, 이 작품 또한 농부의 삶의 심장부에서 나온 것이며, 독창적인 것이다.
Portier 씨가 자신이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그가 그 첫 번째 습작들을 걸어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그림을 보낸다면, 그는 그걸 전시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걸 받을 수 있다. Duran Ruel 씨는 데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그림을 보여주어라. 그는 그걸 보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꼭 보여주어라. 우리의 작품에 뭔가 기력이 있다는 걸 보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니니. ‘이런 서투른 그림을(Quelle croute)’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건 분명한 일이리라. 그렇지만 우리는 뭔가 전형적이고 정직한 것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금빛 액자에 넣으면 잘 어울리는 그런 그림이다. 하지만 익은 옥수수의 깊은 색깔의 벽지를 바른 벽에도 마찬가지로 잘 어울릴 것이다. 어두운 배경에서는 보잘 것 없이 보이고, 무미건조한 배경과는 전혀 맞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림이 잿빛의 실내를 들여다 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이 장면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황금빛 액자 안에 들어있다. 실제 관찰자를 향해 흰 벽 위에 난로와 불빛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그림 바깥에 자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반사하고 있다. 이 모는 것과 금빛 색조의 결합은 동시에 예기치 않은 장소를 빛나게 하고, 불운하게 무미건조하고 검은 배경에 놓았을 때 생기게 되는 얼룩덜룩한 양상을 없애 준다. 그림자는 푸른 색으로 칠했는데, 금빛이 이걸 자극하리라.
이 그림에 너무나도 몰두해 있어서 이사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결국에는 신경을 쓰야만 하리라.
나중의 작품과 관련지어 볼 때 ,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유지할 것이며, 이 그림에서 내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테오 네가 보게 되리라고 감히 주장한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활기를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 이 작품은 나에게 지겨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지겨운 느낌을 주지 않으리라. 이걸 믿기 때문에 작품을 너에게 보낸다.
* * *
내가 바로 얼마 전에 수채화를 끝냈던, 들판에 있는 오래된 교회 건물을 사람들이 철거하고 있었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농부들이 수 세기에 걸쳐 살아 있을 때 자신들이 파일구던 바로 그 들판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죽음과 매장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가을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닌가 하는 걸 말하고 싶었다--단지 약간의 땅을 파고, 거기다 나무 십자가 하나. 교회 안뜰의 풀밭이 끝나는 들판은 지평선을 배경으로 마지막 선을 이루고 있다. 이 오래된 교회 건물에 뭔가 훌륭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일까?
나중에 십자가가 포함된 재목과 낡은 강철의 경매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겨진 폐허는 한 때 튼튼한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신앙과 종교가 어떻게 쇠락해 갔는가, 하지만 반대로 농부의 삶과 죽음은 그 교회의 안뜰에서 자라는 풀과 꽃처럼, 주기적으로 피어났다가 이울면서, 영구히 그대로라는 걸 말해준다.
교회 안뜰을 담은 커다란 수채화를 한 장 더 시작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두 장의 실패작을 해면으로 닦아내 버렸는데--아마도 세 번째 장에서 내가 원하는 걸 얻게 되리라.
그럴 수만 있다면 앤트워프 전시회에 참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껏 작업을 하고 있다. 아주 급박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과 그림 둘 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거기에서 보여줄 작품을 가지고 가고 싶다.
이사는 이제 끝이났다. 집에 있는 가족들은 네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내가 ‘내 자신의 고집을 따랐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신경 쓸 건 없다. 이 문제는 차라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하다.
Portier 씨와 Serret 씨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 그 작품에서 좋은 점들을 발견했다는 말이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한다. 네가 Portier 씨에 관해 ‘그 분은 상인이라기보다는 열광자인 듯하다’라는 것과, 그 분이 내 작품의 판매에 도움을 줄 지 의심스럽다고 쓴 부분을 놓고, 너도, 나도, 혹은 그 분도 즉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미래와 경험이 언젠가는 내가 적당한 어휘를 찾을 수는 없지만 그걸 반복할 것이다. 즉 자신들이 ‘계산 따위를 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는 냉정한 머리보다는 때로는 열의가 더 잘 계산을 한다.*****
유일하게 우리가 해야할 것은 자신의 길을 따르고, 대상에 생명감이 넘쳐 흐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수 만 가지 두려움’을 안고서 작업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색채와 색조를 포착해 내려고 마음 조마조마하는 많은 이들이 이같은 실수를 범해, 바로 이런 근심 때문에 색채와 색조가 미지근한 물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색깔을 일단 칠해 봐’라고 말한다. 열의는 남겨 두도록 해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과감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야 우리는 지혜의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파리 대중의 일부는 아무리 재래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할 지라도 언제까지나 그것에 얼뜨기처럼 속고 있지는 않을 것이며, 그 반대로 농가와 들판의 먼지가 덮힌 것들에 아주 충직한 친구들이 나타날 것--왜 그런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이라고 보는 게 내 생각이라는 걸 Portier 씨에게 말해 주어라.
그 분이 내 작품의 판매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현재 우리로서는 어쨌거나 그 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믿는 것이다. 일 년 정도 작업을 한 뒤에는 상당한 분량을 갖게 될 것이며, 작품의 양이 많아지면 질수록 작품이 더 낫게 보이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를 상당히 기쁘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은 개인의 작품 전시회가 점점 더 많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함께 속하는 소수의 작품의 전시회가. 이 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미술계에 있어서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해주는 사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것을 파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네 말에 Serret 씨도 동의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사실이 아니다. 마침내 대중이 밀레의 모든 작품을 한 자리에 보게 되었을 때 파리와 런던 두 군데에서 모두 다 열광적이었다. 그런데 밀레를 방해하고 그의 작품을 거절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화상들, 소위 전문가들 아니었던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인물들에 관해 네가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인물 습작들처럼 그 인물들은 사실 그대로의 머리가 아니다. 그 때문에 나는 머리 대신에 토르소부터 시작하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걸 제작하는 걸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이 작품은 아주 다른 것이 되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들의 앉은 자세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카페 Duval에서 사람들이 의자에 앉는 것처럼 그렇게 앉지는 않는다는 걸 잊지 마라.
매일 인물 데생에 열심히 몰두하고 있다. 직접 유화로 그리기 전에 백 장은 그릴 작정인데, 이렇게 하면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처음보다 더 유연해지고 충만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경비를 늘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델을 구하고 필요한 그림 재료를 사는 걸 망설이다 보면 진지한 작품은 하나도 그릴 수 없게 되고 만다.
다음 번에 보내는 작품 중에 졸라의 ‘제르미날’을 읽고 나도 모르게 그리고 만 두상을 하나 보게 될 것이다. 한 때 나도 작품 속에 나오는 지역을 도보로 여행한 적이 있다. 일이 잘 풀린다면--돈을 좀 더 벌어서, 좀 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나는 언젠가는 광산촌으로 가서 광부의 두상을 그리기를 바란다. 우리가 돈을 벌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진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나는 만족하리라. 중요한 것은 개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제르미날’이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다른 마을의 어떤 장소를 그리려고 한다. 너무나도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것이어서 작품으로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 채의 반쯤 쇠락한 농가가 이엉을 얹은 똑같은 하나의 지붕 아래 있는 모습으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노쇠한 늙은 부부가 하나가 되어 가면서도 서로를 부축하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집은 두 채이 며 이중 굴뚝이었다. 지난 일요일 굴뚝새의 둥지를 찾으려고 농가의 소년을 대동하여 긴 원정에 나섰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둥지를 여섯 개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린 새가 날아가 버린 것으로, 별다른 망설임 없이 가져올 수 있었다.
이 농가를 화폭에 담는 가운데--너는 이 그림이 Michel을 모방한 것이라고 부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정말 멋진 오두막들을 발견해 ‘농부’의 둥지의 변형을 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오두막들은 굴뚝새의 둥지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데, 훨씬 더 아름답다. 오두막 내부도 멋지며, 그곳 사람들 중 몇 명과 친하게 되어 언제나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다. 내부가 넓은 곳 네 곳, 좀 더 작은 곳 몇 곳. 밀레가 살았던 작은 집을 내가 본 적은 없지만, 이 작은 네 개의 인간의 둥지도 같은 종류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하나는 ‘상(喪) 중인 농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사의 거주지이다. 다른 하나에는 ‘착한 여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내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감자 밭을 일구는 것외에는 아무런 신기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도 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그녀는 ‘마녀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히스 먼 곳에 아름다운 오두막이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소년과 내가 오랫동안 거닐었을 때 네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우리는 삼십 분 가량을 물을 튀기며 개울을 걸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냥처럼 나에게는 흥미진진한 일이다--사실 그것은 모델과 아름다운 지점을 사냥하는 것이다.
벌써 시간이 많이 되었으며, 아침 다섯 시에는 작업을 하러 출발해야 한다. 매일 히스를 가로질러 아주 먼 곳까지 가야만 하기 때문에 녹초가 될 지경이다.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내던 Van Rappard가 삼 개월 정도 침묵을 지키더니 거만하기 짝이 없고 모욕적인 언사로 가득찬 편지를 보내왔으며, 헤이그에 다녀온 후에는 너무도 분명한 어조로 편지를 보내와, 그를 친구로서는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오늘은 그의 친구인 위트레흐트 출신의 화가 Wenkebach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Rappard와 같은 시기에 런던에서 메달을 수상했다. 나는 그에게 Rappard와 나 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걸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게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가 헤이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 작품을 희롱하고 있었다라고 밖에는 달리 딴 방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Wenkebach에게 Rappard가 이전에 좋아하던 인물화와 함께 새로운 작품들도 보여주면서, 사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변화했고, 앞으로도 훨씬 더 변화해 나갈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제 제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 했다. 그는 Rappard가 자신이 썼던 걸 철회할 걸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나는 그에게 색채의 측면에 있어서 내가 언제나 어둡게 칠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니며--농가를 그린 몇 장은 상당히 투명하다--내 목표는 회색이 아니라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에서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내가 빛나는 색채를 사용하는 화가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지는 않니? 그들은 강렬하고 채색된 빛에 반하는 효과나 드리워진 모든 그림자를 이단시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 일찍 혹은 저녁 일몰 무렵에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그들은 가득한 일광이나, 가스등, 더 나아가 심지어 전기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런 모든 효과는 때때로 내 자신에게서 고(故) Leys나 Dias의 작품을 보고자 하는 갈망을 탐지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너는 이것이 늘상 반대편에 서는 내 버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리라.
현재의 ‘눈부신’ 그림들을 두고 볼 때, 너는 무수히 많은 그런 그림을 보고, 나는 하나도 보지 않지만, 매일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한다. 코로와 밀레, 도비니, Israles, Dupre 등은 그 범위(the gamut)가 아주 깊긴 하지만, 눈부신 그림을 그렸다. Mauve 매형--밝게 그림을 그릴 때--과 빛나는 색채를 사용하는 다른 훌륭한 Dutch 화가들은 현재 프랑스 화가들이 사용하는 색깔 외에는 다른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여기 홀란드에서는 흰색을 더 많이 사용한다.
포도주는 물 입자를 포함하고 있다. 포도주가 건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흰색을 사용하지 않고 밝은 부분을 칠할 수 있으며 칠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맑고 밝은 날을 표현하고자 할 때, 효과가 너무 유약하게 되거나 전체를 약화시키지 않으려 한다면, 색깔의 포도주에 너무나 많은 흰색을 섞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밝은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마라--분명히 밝혀두건대 나는 밝은 그림을 좋아한다. Bastien Lepage의 작품을 하나 아는데, 작은 갈색의 얼굴에다 흰색 위에 흰색을(blanc sur blanc) 덧칠한 신부의 그림은 멋지더라. 그리고 눈과 안개와 하늘을 담은 무수히 많은 Dutch 그림들도 멋지다. 나는 단지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때때로 아주 빛나는 색채를 사용하는 Jaap Maris는 그 다음 날 가장 어두운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린다.
나는 항상 의심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몇몇 사람들은 아주 강렬하게 신뢰한다. 내가 Lhermitte에 대해 비관적으로 의심을 품은 말을 내뱉는 걸 들은 적이 없다. 테오야, Uhde의 그림에 대해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의 그림에 새로 지은 벽돌집이나 감리교도의 학교나 교회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 개성있는 걸 몇 점 내놓은 다음에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은 바로 그 기교이다.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정확해지지만 점점 더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Uhde의 ‘예수’는 정말 보잘 것 없다. Uhde가 그 작은 학교에서 그린 그런 산타클로스는 견딜 수가 없다. Uhde 자신도 그걸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그가 사는 시골의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생각할 만한 뭔가(인습적인)와 소재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굶주려야만 했으리라.
Uhde의 은회색이 정말 아름다우며, 내가 만일 그 그림을 보았더라면 다르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동생아, 나는 지금까지 회색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으며, 따라서 약간의 그런 은회색이 쉽사리 나를 설득시킬 수 없다. 체계적으로 회색을 칠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으며, 우리는 분명 문제의 다른 일면 보게 된다. 빛나는 색채를 많이 사용하는 화가들이 나중에 백악질이 되거나 기름투성이가 되는 예가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기를 원하며,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걸 너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현재 회색 그림을 제작하고 있다.
Wenkebach는 오래된 교회 건물 그림의 색깔과 기교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그 작품이 상당히 독창적이라고 했다. 수차, 소가 끄는 쟁기, 가을의 정취를 담은 길 등의 작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그가 인물화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사실이다.
Rappard에게 편지를 써서 사실 우리는 서로서로 싸우기 보다는 다른 것에 맞서 싸워야 하며, 결속이 큰 힘이 되므로 시골 생활과 그 사람들을 그리는 화가들은 이 순간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 달 말까지 어떻게 지탱해 나갈 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글자그대로 돈이 한 푼도 없다. 그리고 지금이 추수할 무렵이므로 옥수수를 거둬들이고 감자를 캐내는 장면 둘 다를 담아내기 위해서, 모델을 구하려 분투해야만 한다. 이 시기에는 모델을 구하기가 두 배나 힘이 들지만 필수적이다. 이곳 사람들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포즈를 취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며, 돈이 아니라면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가난에 찌들어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모델을 구할 수는 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리고, 또 특히 인물을 개선시키는 문제는 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내 신체가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 농부의 몸과 같은 것이 되지 않았더라면 견뎌낼 수 없었을 거라는 걸 밝혀 둔다. 내 자신의 안락함을 위한 것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농부들이 그들의 생활 양식을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안락함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물감과, 특히 모델을 위한 것이다.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이번 달 사정이 좀 더 낫다면, 그래서 여분의 돈을 보내줄 수 있다면, 큰 그림을 몇 점 보내도록 하겠다. 나에게는 그걸 부칠 돈이 없고, 또 네가 경제적으로 곤란한 때에 수취인 부담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오래 갖고 있다보면 다시 칠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들판이나 농가를 그린 그림을 곧바로 부치게 되면, 이따금씩 그 중에는 좋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차곡차고 모아둘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꾸만 다시 칠하게 되면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다.
네가 돈 때문에 그다지도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구나. 너 혼자만 해도 지탱하기가 힘겨운데, 나로서도 도무지 경비를 줄일 방도가 없구나. 오히려 그 반대로 모델을 더 많이 쓸 수 있다면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과가 항상 ‘팔릴 수 없다’는 것이 때로는 나를 아주 우울하게 한다. 계속해 나가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나, 그렇다고 싸움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었 듯 우리도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적절하게도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불리우던 들라크루아와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이해하지도 사려고 하지도 않은 감식가들 앞에 놓여졌을 때에도 싸움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려나갔던 것이다. 우리가 그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아직도 많이 그려야만 한다. 나는 가장 탐탁치 않은 사람이 되고 말 입장에 처해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돈 부탁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작품의 판매 문제에 있어서는 사정이 즉시 나은 쪽으로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유감천만이다.
테오야, 내가 미래를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영원한 법칙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이 하는 일은 남는다. 그리고 시골 생활을 그리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시골 생활에서 따온 제재로 시청 등을 장식한다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니다. 더 나은 소식은 농부를 그린 그림이 잡지사나 다른 인쇄물에 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낙담하고 하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징후이다. 나는 사람들이 수 야드나 되는 캔버스로 어떻게 살롱을 채워내는 지 모르겠다.
Portier 씨와 Serret 씨에게 그 문제를 상의했으면 한다. 내 형편이 상당히 어렵다는 걸 말하고, 그 분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자극도 해라. 그리고 내 쪽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보내려 애쓰고 있다는 걸 분명히 해주었으면 한다. 홀란드로 건너올 기회가 있으면 Tersteeg 씨를 다시 한 번 만나보는 게 최선책이 아닐까?
요즈음에는 햇빛 속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집으로 오면 편지를 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이렇게 펜을 들었다.
내 앞에는 인물화가 몇 장 놓여 있다. 가래를 들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 몸을 숙여 옥수수 열매를 따는 여인, 다른 하나는 앞모습인데, 당근을 캐내느라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듯하며, 또 곡식 다발을 짓고 있는 여인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일 년 반 이상을 이 농부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특히 그들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 동작에 주의를 기울였다.
인물이 겉모습만 인습적으로 정확하기만 해서 충분한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아니 그 보다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걸 원하고 있지만, 그 반작용이 오고 있다. 예술가는 개성을 요청하고 있으며, 일반 대중도 똑같이 그럴 것이다.
무어인 양식이나 스페인 양식의 것들, 추기경들, 그리고 이 모든 역사화들, 사람들이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그려내는 이 그림들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 그리고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몇 년이 지나면 그 그림들은 케케 묵고 무미건조하게 되어, 점저 더 흥미를 잃게 된다. 그래, 잘 그린 것이기야 하겠지. 그걸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비평가가 Benjamin Constant의 작품이나 이름도 모르는 스페인 화가가 그린 추기경의 수위식(受位式) 같은 그림 앞에 설 때면 짐짓 심오한 표정을 띠면서 ‘뛰어난 기교’ 운운 하는 것이 관례이다.
나는 이탈리아 화가나 스페인 화가들의 매우 높이 칭송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스럽게 무미건조한 기교에 관해서는 점점 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너에게 한 번 물어보자. 그 기교가 칭송의 대상이 되는 그림들 뒤에는 어떤 인간이, 어떤 예언자, 철학자, 관찰자, 어떤 인간적인 특성이 있느냐? 사실, 빈번히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거의 무명이다시피한 화가의 많은 그림들 앞에 서 있노라면 그 그림들이 의지와, 감정과, 열정과 사랑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느낀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고려해 볼 때, 너무나도 빈번하게 잘못 사용되고 있는 어휘인 ‘기교’에 대해 요 근래에 들어 허위를 늘어놓는 그 비평가들의 비평을 비판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바로 이 비평가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시골 생활을 담은 그림 앞에 서서는 ‘기교’를 비판할 것이다.
시골 생활을 담은 그림이나 Raffaelli의 그림처럼 도시 노동자의 가슴을 담아낸 그림의 기교에는 Jacquet나 Benjamin Constant의 유연한 그림이나 포즈를 담아내는 기교와는 상당히 다른 어려움이 따른다. 파리에서는 돈만 지불한다면 온갖 부류의 아라비아, 스페인, 무어 모델들을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파리의 넝마주이를, 그것도 그들의 거주 지역에서 그리고자 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그의 작품도 더 진지하다.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아마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모든 이국 풍의 그림들이 화실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야외로 나가 즉석에서 그려라! 그러면 온갖 일이 일어난다. 네가 받게 될 이 네 장의 그림의 경우에도, 먼지나 모래는 말할 것도 없이 백 마리 이상의 하루살이들을 닦아내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들고 몇 시간 동안 울타리를 지나 히스를 가로지르노라면, 가시에 긁히기 마련이며, 이런 날씨에 몇 시간이나 걸어서 히스에 도착할 때 쯤이면 열기로 지쳐 녹초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인물들은 직업 모델 처럼 가만히 서 있지를 않고, 날이 저물어 감에 따라 포착하고자 했던 인상도 바뀌기 일쑤있다.
삶으로부터 직접 그린다는 것은 매일 농가에서 살고, 농부들처럼 들판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실내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여름이면 태양의 열기를 견디어 내고, 겨울에는 눈과 추위로 고생해야 한다. 그것도 단지 걷는 동안만이 아니라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매일 그렇게 해야 한다.
분명 농부나 넝마주이, 온갖 부류의 노동자들을 그리는 것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지만--그림에 있어서 어떠한 제재도 이 일상의 인물들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땅 파는 사람이나 씨 뿌리는 사람, 불 위에다 주전자를 올려놓는 여인, 재봉부 등을 데생하고 그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는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도시마다 역사상의 인물, 아라비아 인, 루이 15세 등--이들 중 누구도 실존 인물은 아니다--다양한 모델을 갖춘 아카데미가 있다.
너와 Serret 씨에게 땅 파는 사람이나 잡초를 제거하거나 이삭을 줍는 농촌 여인의 습작을 보낼 때 너나 Serret 씨가 작품의 결점을 찾아내 준다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아카데미적인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책망할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카데미에서 데생을 배운 파리 출신의 화가가 그린 농촌 여인이 데생은 사지와 신체 구조가 늘상 똑같은 방식이리라. 비례와 해부의 측면에서는 정확해서 때로는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Israels나 도미에, Lhermitte, 특히 들라크루아 등이 인물을 그릴 때는, 인물의 모양이 훨씬 더 많이 느껴지지만, 비례는 때로 거의 자의적이며, 해부와 구조는 종종 ‘아카데미 출신의 눈으로 볼 때는’ 상당히 잘못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물은 살아 있다.
땅을 파는 사람에게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보다, 농부는 농부여야 하고, 땅을 파는 사람을 땅을 파야 한다는 말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그러면 거기에는 뭔가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그러면 그 인물은 무용지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는 인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인물, 현대 예술의 핵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 인들도,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도, 옛날 Dutch 유파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옛날 Dutch 유파에서 땅 파는 사람이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 걸 본 적이 있느냐? 그들이 노동자를 그리려 한 적이 있느냐? 아니다. 옛날 대가의 그림에 있는 인물들은 일하지 않는다. 심지어 Ostade나 Terburg가 그린 인물들도 요즈음 그린 그림들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농부와 노동자 인물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Henner와 Lefevre가 재개한 것과 같은 단순한 나체이면서도 현대적인 인물. 하지만 농부와 노동자는 궁극적으로 나체는 아니다.
사실, 이 세기에 있어서조차도 무수히 많은 화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극소수만이 움직임을 위해 움직임을 그림으로써, 그림이나 데생이 인물을 위한 인물화가 되도록 하고, 인간 육체의 형상이 선과 모델링에 있어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눈 가운데에서 당근을 뽑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가 말이다.
들판에서는 옥수수를 베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상당히 바쁘다. 이 광경은 단지 며칠만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다.
시골 생활이나 민중의 삶을 그리는 사람들은, 잘 나가는 사람들 축에 속하지는 못할 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이국적인 하렘이나 추기경의 수위식을 그리는 화가들보다는 더 오래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현대 미술에 우리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내 자신은 확신한다. 내가 미술에 대해 확정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내 자신의 작품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주며, 내 자신의 생명을 걸어서라도 그것에 도달하려 힘쓸 것이다.
최근에 나에게 쓴 편지에서 너는 Serret 씨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인물 구조에는 어떤 결점이 있다는 걸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여러 날 저녁 침침한 등불 아래서 이들을 보고, 마흔 장의 두상을 그린 뒤의 인상이므로, 내가 다른 관점에서 출발했다는 건 분명하다는 걸 밝혀 둔다.
Serret 씨에게 말해 주어라. 인물들이 인습적으로 정확하다면 절망하고 말았을 거라고. 그리고 땅 파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다 해서 그가 분명 땅을 파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그 분에게 말해 주어라. 미켈란젤로의 인물들은 다리가 의심할 여지 없이 길고, 엉덩이가 후부가 엄청나게 크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인물들을 찬미한다는 걸. 나에게는 밀레와 Lhermitte가 진정한 예술가라는 걸 이야기 해주어라. 왜냐하면 그들은 대상을 무미건조하고 해부적인 방식으로 쫓으면서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밀레, Lhermitte, 미켈란젤로--은 대상을 느낀다. 내가 힘껏 갈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정확하게 그리고, 일탈하고, 모델을 재구성하고, 실제를 바꾸는 걸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상은 진실되지 않게 될 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욱 진실되다.
지난 이 주일 간 사제 때문에 걱정거리가 많이 생겼다. 분명 좋은 의도였으나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너무 친하게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나에게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다른 어조를 사용했는데, 그들에게는 그림의 모델이 되는 걸 금했다.
내가 종종 그리곤 하던 처녀가 애를 가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나를 의심했다. 나는 그 처녀로부터 직접 진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들었다. 상황은 사제의 회중 중의 한 명이 아주 몹쓸 노릇을 한 그런 사건이었다.
나는 이장(里長)에게 그 문제를 즉시 이야기를 했으며, 사제는 자신의 영역, 즉 좀 더 추상적인 문제에 매달려야지 이와 같은 문제에 그가 관여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느냐는 점을 지적했다. 너는 ‘형 스스로 논쟁을 불러 일으켜봐야 이로울 게 뭐 있어?’라고 하겠지. 하지만 때로는 피할 도리가 없다. 만일 내가 이 사제와 차근차근 논의를 했더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 작업을 방해할 때에는 때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대적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는 걸 거절하면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방편을 취하기까지 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서 돈을 구걸하느니 보다는 나로부터 돈을 버는 걸 원한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너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공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지금은 반대를 그만 두었다. 물론 마을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의심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토박이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제가 그 처녀 사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나에게 덮어씌울 것이라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점점 더 사람들의 신망을 잃어간다는 점이며, 이번 겨울에도 옛 브라반트 종족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똑같은 모델들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 데생을 몇 장 더 했는데, 첫 며칠 간은 포즈를 취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정말이지 불가능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나는 옮겨가야만 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가정의 농부들과는, 이곳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여전히 사이가 좋으며, 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영을 받는다.
어제 Rappard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우리의 다툼은 막을 내렸다. 그는 Wenkebach를 보았으며, 그가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런 어조는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재 자신이 그리고 있는 커다란 벽돌 그림의 스케치를 나에게 보냈다. Rappard가 뭔가를 팔았는지 내게 물었지. 내가 아는 바로는 그는 얼마 동안 매일 누드 모델를 고용했으며, 최근에는 벽돌 공장 그림을 제작하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작은 집을 하나 빌린 뒤 채광창을 내어 훌륭하게 꾸몄다고 한다. 그리고 Drenthe를 지나는 여행을 했으며 다시 Terschelling으로 갈 작정이라고 하는구나. 자기 수중에 돈이 얼마간 있겠지만, 그런 돈은 어딘가에서 나오는 게 틀림없다. 아마 가족이 대 주거나, 아니면 친구겠지.
물감 판매상인 Leurs 씨가 편지를 써서 그림을 좀 보내도 좋다고 하면서, 현재 헤이그에는 외국인이 많이 있으니까 가능한 한 빨리 보내주었으면 한다는구나. 그는 한 장 이상 보내기를 원하는 데 그래야 팔 기회를 한 번 이상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진열장 두 개를 주겠다고 했으며, 그 자신도 상당히 곤궁한 처지이므로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란다. 그래서 너한테서 이십 프랑을 받아가지고는 나는 그에게 농가를 담은 것 몇 점, 오래된 교회 건물 그림, 인물을 담은 작은 습작 몇 점을 보냈다. Wisselingh 씨에게도 편지를 써서 이 그림들을 보냈으니 가서 한 번 보라고 부탁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 그림들이 너에게 가지 못한 것, 그리고 Leurs 씨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네가 한 종류의 그림을 여러 장 갖고 잇다면, 각각 다른 시기에 보낸 것에서 몇 점을 뽑아 홀랜드에서 전시를 할 수도 있으며,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최상의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네 말처럼, 이미 엎질러 진 물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니?
최근에는 정물화를 그리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고 그것에 정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것들은 팔기 어렵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 실습은 빌어먹게도 귀중한 것이며, 이번 겨울에는 그걸 계속할 것이다. 감자를 그린 커다란 정물화를 보냈다. 그 그림에서 나는 그 감자들이 무겁고 단단한 덩어리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애썼다. 그 밖에 과일 정물화, 놋쇠 주전자 등도 부쳤는데, 특히 놋쇠 주전자는 다른 색깔로 모델링(modelling)을 하는 색다른 관점에서 칠했다. 그리고 새 둥지도 있다--자연을 면밀히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끼와, 마른 나뭇잎과 풀 등의 색채 때문에 그 그림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Portier 씨가 색채 연구라 할 수 있는 이 정물화들을 보았으면 하고 바란다. 얼마 도안은 점점 더 어두워지다가, 완전히 마르게 되면 견고한 광택을 띠게 된다. 습작품들을 여러 장, 새로운 것이든 옛날 것이든, 네 방 벽에다 걸어두면 그 그림들 사이에 연관성, 즉 다른 색깔이 조화를 이룬다는 걸 보게 되리라고 본다. 무심한 어린애 같은 시각(gamut)에서 이 그림들을 보면 볼수록 내 습작들이 너무나 검게 보인다는 것이 더욱 더 기쁘다. 아마도 네 자신이 차츰 미술 연구를 해 나감에 따라--네가 연구에 다시 착수했다는 게 나는 기쁘다--너도 바뀌게 되리라.
이번 주에 암스테르담에 갔다 왔다. 거기서 삼일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므로 미술관 외에 다른 것은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거기에 갔다는 사실이 아주 흡족하며, 그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앞으로 다시 오랫동안 찾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옛 대가들의 그림을 볼 때, 이제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잘 그 기교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대화를 나눌 필요는 거의 없다.
거기에서 나는 황급히 자그마한 패널화를 두 장 그렸다. 한 장은 기차 시간보다 너무 일찍 갔을 때 역 대합실에서 그린 것이고, 다른 한 장은 열 시에 미술관에 가기 전에 아침에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너에게 보내는데, 그것은 한 시간 내에 인상을 재빨리 담기를 원할 경우, 자신들의 인상을 분석하고, 그들이 본 것을 설명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서둘러서 뭔가를 화지에다 옮긴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한 번에 그린다는 것--한 번에 가능한 한 많이 그린다는 것! 옛 Dutch 그림들을 다시 보고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그림 대부분이 재빨리 그려졌다는 점이다. Frans Hals, 렘브란트, Ruysdael은 한 번 붓놀림으로 대상을 재빨리 포착하고, 그것에 재손질을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리고--그게 맞는 말이라면, 그들은 그걸 그냥 그대로 둔 것이다. Frans Hals의 그림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그 그림은 얼굴, 손, 눈 등을 부드럽게 손질한 그 그림들--그러한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지--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색채화가 중 으뜸가는 색채화가이다. Veronese, 루벤스, 들라크루아, Velasquez와 같은 색채화가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Jules Dupre를 진정 좋아해 왔으며, 그는 현재보다도 앞으로 더 진가를 인정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진정한 색채화가인데, 언제나 흥미롭고, 폭발할 정도로 힘이 넘치고 극적이기 때문이다. 밀레와 렘브란트, 그리고 일례로 Israels는 색채화가라기 보다는 harmonists라고 말들 하는데, 진짜 맞는 말이다.
루벤스의 스케치와 Diaz의 스케치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그들은 제대로 사용하고 조화를 이루면 색채가 형태를 표현한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최고의 그림들과 기교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한 그림들은 가까이서 볼 때 색깔의 편린들이 곁에 곁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효과가 드러난다. 그것이 온갖 문제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그것에 끝까지 매달렸다.
점점 더 그 수를 더해가는 현재의 일정한 그림들에 대해 한 번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십 년 혹은 십오 년 전쯤에 사람들은 ‘명료함’과 ‘빛’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이 말이 옳았다. 아름다운 작품들이 그러한 체제로 제작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말이 캔버스 전체, 구석구석에까지 똑같은 빛을 지닌 그림들의 과잉생산으로 퇴보할 때에도--사람들은 그걸 낮의 색조, 지역 색채(local colour)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다--옳은 것일까? 사람들이 명료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경우에 활기없는 도시 화실의 추악한 화실의 색조이다. 아침의 신새벽이나 저녁의 황혼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한낮, 그러니까 열한 시부터 세 시까지만 있는 듯하다--사실 아주 진중한 시기이긴 하지만 때로는 우유죽(milksop)처럼 맥빠진 때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두드러진’ 빛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을 색칠하는 화가들을 위해, 그들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순수한 흰 색을 섞은 판매용 물감을 내놓기조차 한다.
옛 Dutch 대가들의 가르침 중에서 위대한 교훈은 데생과 색채를 하나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많은 화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건강한 색깔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으로 그린다.
사람들이 나에게 ‘기교가 없다’라고 말할 때 그건 나에게는 나쁜 일이다. 화가들 중에서 새로 사람을 사귀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지나갈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기교에 관해서 가장 열렬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가장 약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홀랜드에서 내 작품을 몇 점 전시할 때, 나는 무슨 말이 있을 지, 어떤 류의 비판이 쏟아질 지 미리 알고 있다. 그 와중에 나는 옛 Dutch 대가들과, Israels의 그림 ‘Zandvoort의 어부’와 그의 가장 최근작 중의 하나인 남편의 시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넝마 꾸러미처럼 웅크리고 있는 늙은 여자의 그림에 침잠한다. 두 그림 다 걸작이다. 멋진 명암의 배합이 돋보이는 ‘Zandvoort의 어부에는’ 언제 어디서나 그 냉담한 색채가 부드럽고, 밋밋하며, 두드러지는 그런 사람들의 기교보다 건강하고 생생한 기교가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허례에 찬 공허하고 위선적인 용어로 기교에 대해 나불 거릴 때, 진정한 화가는 정감이라 불리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그의 영혼과 두뇌는 연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연필이 그의 두뇌에 종속된다. 이러한 것이 내가 믿는 것이다.
‘평의원’이라는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도 언제나처럼 그는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긴 하지만, 본질을 정확히 포착해내고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렘브란트이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그보다 더 잘 할 수가 있었다--만일 그가 초상화에서처럼 글자그대로 착실하게 재현해내어야 한다는 강요되지 않았더라면, 시인이 되어 자유롭게 이상화해 낼 수 있었더라면. 그는 ‘유태인 신부’에서는 그걸 해내고 있다--그다지 높이 평가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그림은 무한한 공감대를 자아내는 그림이며, 불의 손으로(d'une main de feu) 그린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제재에 대한 루벤스의 개념과 정감이 연극적이라는 내 생각에 반대하니? 미켈란젤로의 ‘펜세로소(penseroso)’를 한 번 생각해보자. 그 그림은 사상가를 나타내지만 발은 작고 민첩하며, 손은 사자의 앞발의 번개 같은 재빠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그 사상가는 동시에 행동가인 것이다. 우리의 그의 생각이 집중력과 민활함을 결합시킨 것이라는 걸 본다. 렘브란트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한다. 특히 ‘Emmaus 순례자들’ 속의 예수는 신체 속에 더 많은 영혼을 보여준다.*** 하지만--설득의 몸짓에는 뭔가 강력한 것이 있다.
그 곁에 루벤스를 놓아 보아라--명상에 잠긴 사람들을 담은 그의 여러 인물화 중 하나를--그러면 그 사람은 소화를 시키기 위해 구석으로 물러한 사람이 되고 만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은 모두 그렇게 되고 만다. 거기에서는 그는 밋밋하고 공허하다. 하지만 그가 그릴 줄 알았던 것은--여인이다. 거기서 특히 그는 우리로 하여금 진중히 생각해 보게 하고 또 가장 깊이를 띤다. 색채의 결합으르 그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여왕이나 정치가를 있는 그대로 잘 분석해서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것--마법이 시작되는 곳--은 해낼 수 없었다. 그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여인의 표정에 뭔가 무한한 것을 부여하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것은 극적이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에, 간접적으로 미술업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여기 저기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네가 정말로 그림들에 압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렇지 않니? 사실 지나친 용기와 열성이 오늘날의 과실은 아니다.
오늘 네 편지를 받았다. 사과가 든 바구니 습작에 대해 네가 쓴 부분이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다. 정말 정확한 관찰이었다! 이 관찰이 너에게서 나온 것이니? 너는 예전에는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다--우리 두 사람은 색채에 대해 일치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 습작을 어떻게 그렸는지 설명해주마. 초록과 빨강은 보색이다. 그런데 이제 사과에는 그 자체로는 매우 속된 빨간 색이 있고, 그 곁에는 초록빛을 띤 것이 있다. 하지만 다른 색깔, 즉 분홍색인 사과가 한두 개 있다. 그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해준다. 그 분홍색은 빨강과 초록을 섞어서 얻어낸 broke 색깔이다. 그래서 색깔들 사이에 조화가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개인적 느낌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간접적인 느낌이든 네가 색깔의 결합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나는 끔찍히도 기쁘다.
새 둥지는 일부로 배경을 검은 색으로 해서 그렸는데, 그 이유는 이 습작들에서 대상들이 자연적인 환경에 놓인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배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는 살아있는 둥지라면 상당히 달랐으리라. 사람들은 사실 둥지 자체는 거의 보지 않고 새를 본다.
너는 음영이 어두우면, 아니, 검정이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Zandvoort의 어부’나 들라크루아의 ‘단테’ 등도 잘못된 것일 테니까. 왜냐하면 이 작품들의 최대 강점은 푸른빛과 보라빛을 띤 검정에 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와 Hals도 검정을 사용하지 않았느냐? Velasquez는? 단지 한 가지 검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스물 일곱 가지 검정을 사용했다는 걸 분명히 밝혀 둔다. 그러니까 ‘검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잘 심사숙고 해보기 바란다. 네가 이 색조 문제를 상당히 잘못 이해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다소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들라크루아와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결국에는 너를 좀 더 잘 가르쳐 줄 것이다.
색채 이론을 다룬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 보내다오. 색채의 법칙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위대한 대가들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에서 우리가 찬탄하는 이유--우리가 찬탄하는 것--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자기 멋대로 또 피상적으로 비평하는가를 깨닫게 되는 현재와 같은 시기에는 사실 그건 필수적이다.
이제 막 내 팔레트는 해빙을 맞이하고 있으며 첫 시작의 냉담함은 사라졌다. 어떤 대상에 착수할 때 아직도 종종 실수를 한다는 건 사실이지만, 색채는 저절로 따르며, 한 가지 색채를 출발점으로 삼아 나는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 또 그것에 어떻게 생명을 부여할 것인가를 내 머리 속에 명료히 그려 낼 수 있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팔레트에 색채를 분해(break)할 때, 그 색채가 형성하는 아름다운 색조를 언제나 지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건 왜냐하면 개인의 팔레트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색채의 조화에 대한 개인의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은 자연을 기계적으로 엄격하게 따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색조를 위치시키는 데 있어서 일정한 연속성과 일정한 정확성을 보유하고 있다.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말해 충실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연을 연구한다. 그렇긴 하지만 내 색채가 캔버스 위에서 아름답게--자연에서 보이는 것만큼 아름답게--보이기만 한다면, 내 색채가 정말 똑같은가 하는 문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노란 이파리를 단 나무들이 있는 가을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내가 이 그림을 노랑의 교향곡으로 간주할 때, 노랑의 기본 색깔이 이파리의 그것과 같은지 같지 않은지가 과연 문제가 될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부분, 아니 모든 것이 일군의 색채 내에서의 무한한 색조의 다양함에 대한 나의 지각에 달려있다.
이걸 너는 낭만주의에 대한 위험한 경도라고 하겠지? 아니면 ‘리얼리즘’에 대한 불충실? 자연보다는 색채화가의 팔레트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que soit.*** 들라크루아, 밀레, 코로, Dupre, 도비니, Breton, 거기다 삼십 명 더, 이들이 이 세기 회화의 심장부가 아니니? 그리고 그들이 낭만주의를 능가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모두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니? 로맨스와 낭만주의는 우리 시대와 합치하는 것이며, 화가는 상상력과 정감을 지녀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졸라는 대상에다 거울을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니다. 그는 훌륭하게 창조한다. 아니 창조할 뿐 아니라 시화(詩化)한다. 그래서 그 결과가 그다지도 아름다운 것이다. 인물화이건 풍경화이건 화가들은 항상 그림이 거울에 비친 자연과는 다른 그 무엇, 모방과는 다른 재창조라는 걸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려 애써왔다. 밀레나 Lhermitte의 작품에서 보자면 사실(reality)은 동시에 상징적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은 ‘리얼리스트’라고 알려진 사람들과는 다르다.
쿠르베의 초상화의 경우는 훨씬 더 맞는 말이다--정(repoussoir) 처럼 검정 음영에 적갈색, 금빛, 차가운 보라색 등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깊은 색조에다 눈에 휴식을 주는 흰 아마색을 약간 가미하여 남성적이고 자유롭게 그린 초상화--그의 초상화는 네가 좋아하는 어떤 화가의 초상화보다, 얼굴 색깔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재현해낸 화가의 초상화보다도 멋지다. 제대로 시간을 두고 고찰한 남자나 여자의 두상은 신성할 정도로 아름답다. 자연 대상에 있어서의 색조의 전체적인 조화는 고통스럽게 그대로 재현하려고 애쓸 경우 사라지고 만다. 유사한 색채 범위(gamut) 내에서 재창조할 때 그것은 유지되지만, 결과는 모델과 꼭 그대로 이지는 않을 것이다.
Veronese는 ‘Cana의 혼례’(Noces de Cana)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세상(beau monde)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 그림에다 팔레트의 온갖 풍요로움을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아련한 담청색과 진주빛 흰색을 생각했던 것이다. 배경에다 그 색깔을 맹렬히 칠했으며--그것이 적중했던 것이다. 서서히 그것은 대리석 궁전과 하늘의 주위 환경으로 섞여들었다. 그 배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그것은 색채 계산에서 저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창조자가 동시에 궁전과 인물을 하나의 전체로서 생각했을 경우에 그려졌을 결과와 다른 방식으로 칠해지지 않았느냐? 모든 건축물과 하늘은 통상적이고 인물에 종속된다. 그것은 인물이 아름답게 두드러지도록 계산되었다. 분명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림이다. 한 가지를 생각하여 주위 환경이 그것에 속하고, 그것으로부터 따라나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자연을 연구하는 것, 실제와 씨름하는 것--몇 년이고 그것을 빼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 실수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자연을 따르고자 하는 아무런 희망 없는 투쟁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게 잘못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팔레트로부터 차분히 창조하는 것에서 끝을 낸다. 그러면 자연은 거기에 동의하고 따른다. 하지만 이 대조되는 두 가지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헛수고처럼 보이지만 이 고된 노고가 자연과 친숙할 기회를 주며, 사물에 대한 좀 더 생생한 지식을 얻게 된다.
나는 집 정원에 있는 연못의 가을 정경도 습작으로 담아 보았다. 그 지점에는 정말이지 그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검고 너무 어둡다고 볼 거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두운 습작을 제작할 시간은 언제나 너무 짧다.
습작에 내가 붓자국을 남긴다고 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림의 색채를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밝은 부분을 특히 견실하게 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 년 정도 나둔 뒤에 면도칼로 재빨리 긁어내면, 얄팍하게 칠한 경우보다 훨씬 더 견실한 색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긁어내는 것은 옛 대가들뿐 아니라 현재 프랑스 화가들도 해 온 수법이다.
너 자신도 내 습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채 문제에 있어서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아지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았느냐? 유화는 일 년이 지나면 포함하고 있던 약간의 기름은 증발하고, 견고한 부분은 남는다. 색채가 지속되도록 한다는 이 문제는 유화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 코발트 색 같은 오래가는 색깔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색깔이 좋지 않은 이유는 물감의 잘못이다. 내가 그걸 상기하게 된 까닭은 유사한 색조를 추구한 커다란 정물화를 그렸기 때문인데, 그것에 만족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그렸다. 이 경험으로 볼 때 그 작품은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광물성 파랑으로 그렸더라면 훨씬 더 나았으리라.
크롬산 염이나 짙은 양홍색을 어떻게 생각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크롬산 염의 비스듬함(glacis)?를 이용함으로써 얻어지는 미국 석양 그림은 특히나 극도로 짧은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어제 밤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나는 삼 일 동안 집 정원의 아래쪽에서 가지 친 오크나무 세 그루를 담고 있었다. 어려움은 하바나 잎 덤불로, 어떻게 그것을 모델화하고, 형태와 색채와 색깔을 부여하는가였다. 네 번에 걸쳐서 그걸 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저녁에는 그 작품을 Eindhoven에 있는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로 가지고 갔는데, 그 사람 집에는 상당히 세련된 거실이 있어서 작품을 거실 벽에다 걸었다. 전에는 결코 그렇게 제대로 된 작품을 제작하고, 색채를 계산하여 효과를 이루어 내는데 성공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었다. 부드러운 녹색과 흰색, 그리고 튜브에서 직접 짜낸 흰색 마저도 하바나를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내가 검정을 이야기 하지만 다른 극단적인 색채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다는 걸 볼 수 있겠지.)
이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이 좋으며, 거기에 그렇게 걸려 있으니까 그 색채의 결합에 따른 부드럽고, 은은한 조화가 분위기를 창조해낸다는 걸 보았을 때 너무나도 큰 뿌듯함을 느꼈기 때문에 팔 수가 없었다. 그도 그 작품을 대단히 좋아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그걸 주었으며, 그는 내가 의도한 대로 몇 마디 말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단지 ‘우라지게도 좋구만’이라고 했을 뿐이다. 명료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 정물화를 그리고, 매일 야외에서 작업을 한다면, 한 일 년 간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독창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 미술 비평가가 되거나 자신이 화가라고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붓으로 작업을 하고, 목탄으로 스케치를 하는 대신에 그것으로 데생도 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마음에 드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린 것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텅 빈 히스 가운데 자리 잡은 오래된 풍차의 상당히 큰 데생이다.
요전 날 Leurs 씨에게서 내 그림을 언급한 편지를 받았다. 그는 Tersteeg 씨와 Wisselingh 씨가 그 그림들을 보았는데, 별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너에게 보낸 두상 중에는 좋은 작품이 있다는 걸 거의 확신한다.
이번 달에 화실을 떠날 거라고 통지를 해두었다. 사제와 교회당지기 바로 곁에 있는 이 화실에서는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그건 명백한 일이다. 이웃 때문에 커다란 곤란을 겪고 있으며, 사람들은 사제를 두려워 한다. 최선의 방책은 급격한 변화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과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영원히 떠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내 짐을 넣어둘 수 있는 방을 하나 세내어 둔다면 시골에 대해 향수를 느낄 때 안전할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를 칭하는 별명은 ‘작은 화가’(‘t schildermenneke)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내가 지나칠 수 없는 악의의 냄새가 배어 있다.
다음 두 달, 십이월과 일월을 앤트워프에서 보내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책이 아닐까? 현재로서는 이곳에서의 작업이 다소 곤경에 처해있다. 밖의 날씨는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거기다 내가 이 집에 사는 동안은 모델을 아예 고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미술상의 주소를 여섯 군데 알고 있으므로 그림을 몇 점 가져갈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도시 정경을 몇 점 그려서 즉시 전시할 작정이다. 물론 Drenthe도 생각해 보았으나,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가 그곳에서는 더욱 어렵다. 이곳에서의 작품들이 조만간에 성공을 거둔다면 Drenthe에서 했던 것과 같은 류의 것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앤트워프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화가의 세계와 미술계의 바깥에 있다는 점이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빌어먹을 정도로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연기된 것이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내가 몇 년 동안 완전히 혼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를 원하며 그럴 수 있지만, 그리고 기교적인 부분을 베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의 눈으로 볼 것이고 대상을 독창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올 겨울 그곳은 아름다울 거라고 상상한다. 특히 눈 내리는 선창은. 내가 직접 분말로 만든(rub) 물감을 많이 가져가겠지만, 거기서 질이 더 좋은 물감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바랄 만한 일이다. 데생 재료와 화지도 가져갈 작정이므로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나는 언제나 뭔가 할 게 있으리라.
암스테르담에서는 오십 센트하는 싸구려 호스텔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도 그럴 작정이다. 보통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그들이 지불하는만큼 지불하면서 가난에 익숙해 지고, 군인이나 노동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바람과 혹독한 날씨를 어떻게 견뎌나가는지를 보는 것은 일 주일에 몇 길더를 더 버는 것만큼이나 실제적인 일이다. 그리고 내가 천성적으로 우울증 환자는 아니라는 걸 잊지 마라.
그림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곤궁하게 살아가는 걸 견뎌야만 한다할 지라도 그럴 작정이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이웃 사람보다 더 잘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젊음의 날들이 우리 곁을 미끄러져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물질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젊다는 것이고,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현 시대의 제 3계급(tiers etat) 아래에 있을 때 강인함을 유지하고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많이 누린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나는 옆길로 빠지는 일 없이, 그림에서 나의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
뭔가 좀 벌기를 원한다면 초상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낫다. 도시에서는 존경할만한 시민들이, 그리고 그들의 정부(cocottes)?들도 그에 못지 초상화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밀레는 선장들이 자신들을 그리는 법을 아는 사람들을 ‘존경’하기조차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이 초상화들은 육지에 있는 그들의 정부에게로 가게 되어있었겠지.) Havre에서 밀레는 이런 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유사함’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미리부터 그 점에 대해 나에 대해 확신한다고 감히 말하지는 않으련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곳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으니까. 농부들과 마을 사람들은 실수를 하지 않고 곧바로 말한다. ‘이건 Reinie de Greef군요. 저건 Toen de Groot고.’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뒷모습을 그린 인물을 알아차리기조차 한다.
‘부업’에 관해서는 Tersteeg 씨가 애시당초부터 나를 괴롭혔었다. 그리고 그건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그게 어떤 종류의 일이여야 하는 지를 결정할 수 없다. 내가 ‘부업’을 택해야 한다면, 그건 그림과 관련이 있는 일이어야만 한다. 그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직업이라면 예외겠지만, 일반적으로 화가는 단지 화가이어야만 한다.
앤트워프에서는 화실 없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렇다,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의 일 없는 화실과 그곳의 화실 없이 일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모델을 많이 쓸 수가 없지 않을까 염려가 되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다른 것들, 그러니까 풍경화나 도시의 정경, 초상화, 아니면 심지어 간판이나 장식물이라도 제작해서 돈을 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곳에는 누드 모델을 고용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므로, 경비를 분담하게끔 조종해 볼 수도 있으리라.
그 와중에 내 힘이 다소 무르익었으므로 나는 내가 좀 더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헤이그에 있을 때만 해도, 붓으로 그리는 데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부족했으며--데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사람들이 단지 유화와 색채만을 물어 왔으므로, 나는 지금과는 달리 쉽사리 압도당하고 말았다.
내가 가지고 가는 풍경화--노란 잎이 있는 것--를 좋아하리라고 믿는다. 지평선은 하늘의 희고 푸른 밝은 띠를 배경으로 어두운 띠를 이루고 있다. 그 어두운 띠 가운데는 붉고, 푸른 빛을 띤, 그리고 초록 혹은 갈색의 작은 부분들이 지붕과 과수원의 실루엣을 이루고 있다. 들판은 초록 빛이고, 높은 곳의 하늘은 잿빛인데, 그걸 배경으로 검은 묘목과 노란 이파리. 앞부분은 완전히 노란 이파리로 덮여 있는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인물이 두명, 푸른 옷을 입은 인물이 한 명 있다. 오른 쪽으로는 희고 검은 자작나무 한 그루와 적갈색 이파리를 단 초록 나무가 또 한그루.
다음 주 화요일에 떠날 것이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다. 모델 문제로 말썽만 없었더라면 겨울을 이곳에서 낫을 거지만, 내가 굳건히 내 자리를 지킨다 해도 사람들은 망설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겁에 질렸다. 그리고 그들이 겁을 내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기 전에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을 작정이다. 두어 달 가량 떠나 있는 것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시간은 점점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상황은 쏜살같이 휙휙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나는 종종 심각한 장애들에 맞서 싸워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외부 환경이 점점 더 불리해지면 질수록 내적인 힘--즉, 일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 증가한다.
앤트워프, 1885년 11월
앤트워프에 와 있다. Images 가 194번지, 화구점 위에 있는 작은 방을 한 달에 이십오 프랑을 주기로 하고 세내었다.
앤트워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도시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선창과 부두는 이미 몇 번이나 거닐었다. 특히 사구나 히스, 농촌 마을의 고요한 곳으로부터 온 사람에게는, 그래서 오랫동안 주위가 고요한 곳에서만 지내온 사람에게는, 그 대조가 흥미롭다. 너와 함께 그곳을 거닐면서, 우리가 똑같이 보는지 한 번 알아보고 싶구나. 정말 깊이를 알 수 없는 미궁이다. 매 순간 흥미로운 대조가 불쑥 솟아난다.
우아한 영국식 바의 창문으로는 더럽기 짝이 없는 수렁이나, 선창의 몸집 좋은 인부들과 외국 선원들이 가죽과 버팔로 뿔 같은 물품을 하역하는 배가 내다보인다. 우미하고 젊은 영국 처녀가 창가에 서서 그걸 내다보고 있다.
한 곳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혈색이 건강한 플랑드르 선원들--떡 벌어진 어깨에다 강인하고 몸집이 좋은 전형적인 앤트워프 사내들--이 홍합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시끄러운 소음과 분주함이 넘치는 가운데, 그와 대조적으로 손을 몸에다 받친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인물이 잿빛 벽을 따라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살금살금 다가오고. 갈가마귀 빛의 검은 머리칼에다 작은 타원형 얼굴--갈색?--오렌지 빛 황색?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일순간 그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흑옥처럼 검은 눈으로 곁눈질을 한다. 그녀는 중국 소녀로, 신비롭고, 조용하며, 작은 곤충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는 이제 건강미가 넘치는, 충직하고 단순하며 쾌활한 처녀를 본다. 그 다음에는 다시 간교하고 기만으로 가득 차 두려움에 떨게되는 얼굴을 보게된다--천연두에 손상되어 끓인 새우 빛깔인 얼굴은 말할 것도 없다. 눈썹도 없는 창백한 잿빛 눈에다, 돼지의 강모 빛깔인 매끄럽고 가는 머리칼.
온갖 국가의 술집에다 식품 가게, 뱃사람의 옷가게--각양각생으로 분주하고. 아주 좁은 도로를 지나기도 한다. 이 도로는 길다란데, 좌우를 살피면서 걷노라면, 갑작스럽게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고함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벌건 대낮에 여자들이 선원 한 명을 술집에서 끌어 내팽개치자, 곧이어 분노한 사내와 여자들이 따라나온다. 그는 그녀들을 다소 무서워하는 듯 했다--그는 자루 더미 위로 기어오르더니 가게 창문으로 사라졌다.
그곳에서 작업하는 건 멋진 일이리라.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이 모든 소동을 실컷 구영하고 나면 Harwich와 Harvre 증기선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잔교의 끝에서 편편하고, 반쯤 범람된 들판을 들판이 무한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을 보게 된다. 끔찍할 정도로 황량하고 축축하며, 흔들리는 마른 골풀들과, 진흙. 강에는 작고 검은 배가 한 척. 하늘은 안개끼고 차갑고 잿빛--사막처럼 고요하고.
한 순간 그 장면은 가시 울타리보다 더 엉키고 환상적이다. 너무나도 혼동스럽기 짝이 없어서 눈이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며, 색채와 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음에는 여기, 다음에는 저기,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 내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가운데, 보도록 강요되는데, 그 다음에는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선을 보게 되는 지점에 서게 된다.
나는 아무런 모험과 만나지 않고 상당히 많은 거리와 뒷골목을 건넜으며 나를 선장 쯤으로 여기는 듯이 보이는 여러 처녀들과 상당히 유쾌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모델을 구해 초상화를 그리고 그것으로 포즈를 취하는데 대해 지불한다는 생각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앤트워프는 화가에게 아주 흥미로우며 멋진 곳이다.
오늘 아침에는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세관에서 내 물건을 찾기 위해 걸었다. 내 화실은 나쁘지 않다. 특히 벽에다 작은 일본 그림들을 핀으로 꽂아두었더니 잘 어울린다. 이 일본 그림들이 아주 내 마음에 든다. 정원이나 해변에 있는 작은 여인의 모습, 기수, 꽃, 옹이진 가시나무 가지. 이 며칠 뭐 꼭 사치스럽게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날씨가 나쁠 때면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은 굴을 갖게 되어 안심이 된다. 몇 프랑 더 투자하여 스토브와 등도 구했다. 이번 겨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기를 바란다.
공원도 멋지다. 며칠 전 아침에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난 주에는 습작을 세 장 그렸는데, 하나는 유리창에서 본 오래된 집들의 후면부이고 두 장은 공원에서 그린 것이다. 이 중 하나를 화랑에다 전시하였다. 화상은 거리로 진열창이 나 있지 않은 사저에 살고 있었다. 거기다 나는 시골에서 가져온 그림들을 두 화상에게 수수료조로 주었으며, 다른 곳에서는 부두의 정경을 날씨가 좋아져 제작을 하는 데로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화랑들은 앤트워프에서 가장 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은 많은 것 중에서 각각 장소에서 나를 즐겁게 한 것들을 보았다. 이 신사분들은 모두 사업이 너무 안 된다는 걸 신랄하게 불평했지만, 그건 뭐 새로운 것도 아니다. 사업에 있어서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이 항상 문가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 말라’는 오래된 좋은 Dutch 속담이 있다.
즉시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은 만일 조만간에 네가 스스로 (구필과는 독립해서) 출발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앤트워프가 해 볼만한 그런 곳이다. 좋은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다른 회사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그런 것으로. 가격이든, 대중이든, 모든 게 혁신이 필요하며, 미래는 일반 사람들을 위해 값싸게 일하는 데 놓여 있다.
Leys의 거실을 보러 갔다 왔다. ‘누벽(壘壁) 위의 산보,’ ‘수위식,’ ‘현대 미술관’(the Musee Moderne). 현대 그림을 모아 놓은 두 곳에서는 Henri de Braekeleer의 좋은 작품을 몇 점 보았다. 그는 적어도 마네만큼 독창적이다. 나는 그가 모든 곳에서 진주층의 효과를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는 간주하지 않는데, 그의 작품은 글자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아주 흥미진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이들과는 따로 떨어져 있다. 초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잘 기억하는 것은 Frans Hals의 ‘고기잡는 소년’과 렘브란트의 ‘Saskia,’ 그 밖에 루벤스의 여러 웃고 우는 얼굴들이다.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면--왜 단순하게 그리지 않는 걸까? 나는 삶 그 자체를 들여다 볼 때, 똑같은 류의 인상을 받는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그렇다, 나는 종종 신사들보다 일꾼들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그 평범한 인물들에서 힘과 생명력을 발견한다. 그들의 독특한 특성을 표현하고 싶다면, 단순한 기교로 확고한 붓놀림으로 그려야만 한다.
미술관에 상당히 자주 가는데 거기서 나는 루벤스와 Jordaens의 몇 점의 두상과 손 외 다른 것은 별로 보지 않는다. 나는 다른 색을 섞지 않은 빨강을 일필휘지 하여 얼굴을 선을 그리고 그와 똑같은 일필휘지로 손에 달린 손가락을 모델링하는 루벤스의 방식에 상당히 경도되었다. 그가 Hals나 렘브란트만큼 친밀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의 작품들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아 그 두상들! 루벤스는 색깔의 결합으로 쾌활함과 평정함, 슬픔의 분위기를 표현하려 애쓴, 그래서 그러한 표현에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비록 그의 인물들은 때로는 공허할 수도 있지만.
도시에서 제작한 내 유화 습작이 시골에서 제작한 것보다 어둡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도시의 도처에 있는 빛이 그다지 밝지 않기 때문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첫눈에 말하는 것보다는 더 큰 차이점을 나으리라. 네가 갖고 있는 작품들이 시골에서 그렇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어둡게 보인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작품들이 그 때문에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이곳의 최고 물감 제조업자인 Tyck 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몇몇 색채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정보를 주었다. 질이 더 좋은 붓으로 작업을 하고, 코발트와 양홍, 제대로 된 눈부신 노랑, 주홍 등을 보유하게 된 것은 진짜 기쁜 일이다. 가장 비싼 색채는 사실 가장 싼 것이다. 색채의 질이 그림에 있어서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오늘은 Eindhoven에서 나에게 부쳐온 물감을 받았는데--그 때문에 오십 프랑 넘게 지불해야만 하다. 그림을 팔지 못하면서 계속 작업을 해나가는 것은 힘겨운, 끔찍스럽게 힘겨운 일이며, 머리를 쥐어 짜내어 계산을 해봐도 먹고, 마시고, 집세를 지불하기에도 그다지 풍족치 못한 돈으로 글자 그대로 물감값을 지불해야만 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수십 만 프랑을 들여서 국립 미술관을 짓고 있지만 그 와중에 화가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어제는 Scala 카페 콘서트를 보았다. 연인의 우행(Folies Bergeres)?인가 뭐 그런 것이었다. 아주 따분한 것이었지만--사람들이 나를 흥미롭게 했다. 멋진 여자의 두상들이 있었는데, 뒷좌석에 앉은 좋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정말 특이하다고 할만큼 멋진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나는 앤트원프의 여자들이 미인들이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카페 콘서트에서 본 대부분의 독일 처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마치 Bavarian 맥주처럼 똑같은 종족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도매로 한 품목을 수출한 듯이 보인다. 어디를 가든지 요즈음에는 떼를 이루고 있는 것 보게되는 그 모든 독일 요소들이 나를 끔찍할 정도로 괴롭힌다. 파리에서도 똑같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그들은 어디에든 침범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불유쾌한 것이다.
앤트워프는 색채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답다. 며칠 전 저녁에는 선창에서 선원들을 위한 대중 무도회를 보았는데, 정말 흥미로웠다. 아주 잘 생긴 처녀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멋진 여자는 못 생겼다--무슨 말이냐 하면 Velasquez의 멋진 작품--혹은 고야의 작품처럼 나를 감탄케 한 인물은 검은 비단 옷을 입은 여자였으며, 아마 십중팔구 술집 아가씨 인 듯 한데, 못 생기고 비대칭적인 얼굴이었지만, Frans Hals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생기가 넘치고 신랄했다. 그녀는 옛날 식으로 완벽하게 춤을 추었다. 한 번은 부유한 작은 농부와 춤을 추었는데 그는 왈츠를 출 때도 겨드랑이에다 커다란 녹색 우산을 끼고는 놓치 않았다. 다른 처녀들은 평범한 재킷에다 스커트를 입고, 붉은 스카프를 했다. 선원과 선실 보이, 연금을 받는 유쾌한 타입의 멋진 선장들이 와서 그 장면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즈음에는 렘브란트와 Hals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다. 그건 이곳 사람들 중에서 너무도 많은 타입이 그들의 시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선원, 군인의 머리를 보러 이러한 대중 무도회에 자주 가야 겠다. 입장료로 이십 셍타임을 지불하면 맥주를 한 잔 마시고(사람들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저녁 내내 즐길 수 있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람들이 실제로 즐겁게 노는 걸 보는 건 좋은 일이다.
내가 좀 더 잘 알려져 있었더라면! 내가 본 모델들을 포착해 낼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도 모델을 구했으므로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다. 여자들의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보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앞선다--실은 둘 다를 하고 싶지만.
이곳에는 사진사가 많이 눈에 띠는데, 상당히 번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스튜디오에서는 초상화도 걸려 있는데, 사진을 찍은 배경에다 그린 것이 명백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 똑같이 상식적이며 밀납처럼 차가운 눈과 코와 입,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짜로 그린 초상화는 예술가의 영혼으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 도시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은 듯이 보이며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확신한다.
또 간판에 손을 대볼까 하는 생각이 있다. 예를 들어, 생선 장수에게는 생선 정물화를, 꽃집에는 꽃을, 식당에는 야채를 그리면 어떨까?
오늘 처음으로 다소 어지러움을 느꼈다. ‘Het Steen’ 그림을 그린 뒤 화상들에게 그걸 보여주러 갔었다. 두 사람은 집에 없었으며, 한 사람은 그걸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다른 한 사람은 지난 이 주일 동안 글자그대로 가게에 쥐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다른 화상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림의 색채와 색조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자신의 그림을 정리하느라 거기에 너무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는 새해로 들어선 다음에 오라고 했다. 이러한 정황은 별로 좋은 것이 못 된다. 특히 날씨가 이렇게 차갑고 우중충하며, 마지막 남은 오 프랑을 바꿔 버렸기 때문에 다음 두 주를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브뤼셀에서 보낸 그 겨울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십 프랑 덜 받았지만, 현재는 유화를 그리기 때문에 오십 프랑 이상이 더 들어간다.
‘Het Steen’ 그림은 다소 공들인 작품으로 앤트워프의 기념품을 갖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류의 도시 풍경을 몇 장 더 그릴까 한다. 하지만 나는 성당을 그리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그리는 것을 몇 배나 더 좋아한다. 아무리 성당이 장엄하고 당당하다 할 지라도 사람의 눈에는 성당에는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가난한 거지의 영혼이든 아니면 거리의 여자의 그것이든, 사람의 영혼이 더욱 흥미롭다. 모델 때문에 인물화를 그리는 것이 더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상당히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더 많다.
나는 내 안에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을 느낀다. 내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두드러진다는 걸 보며, 그것이 나에게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데 엄청난 힘이 된다. 유화를 그리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이 그려야만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Portier 씨나 Serret 씨 같은 사람들이, 비록 내 작품을 팔 수 없다고 할 지라도, 적어도 내가 일을 해나갈 방도를 알아봐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Portier 씨가 더 이상 내 작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낌새를 챘다. 내 작품에 대해 처음에는 상당히 호의적인 인상을 받은 듯 하더니 왜 이제와서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는지?
눈이 내려서 오늘 아침 일찍 도시는 눈부실 정도로 멋있었다. ***(?)
지금은 나이가 들어버린 한 여인을 찾아내었다--그녀는 예전에 파리에 살았으며 화가들에게 모델을 연결시켜 주곤 했다. 예를 들자면 Scheffer, Gigoux, 들라크루아 등을 들 수 있으며, ‘Phryne’을 그린 화가도 그 중 한 명 이었다. 현재는 세탁부로 일하고 있는데 여자들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어서, 언제라도 모델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아름다운 모델을 한 명 기용해 두상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상당히 밝은 빛이긴 하지만, 어렴풋한 금빛을 넣으려고 한 배경 위에 두드러진다. 모델은 음악 카페(cafe-chantant)에서 일하는 처녀였다. 그녀는 지난 며칠 밤 동안 상당히 분주한 것이 틀림없는 듯 했는데, 귀에 확 들어오는 말을 했다. ‘Pour moi le champagne n m'egaye pas, il me rend tout triste.’ 그래서 나는 이해하게 되었고, 나는 육욕적이며 동시에 애처러운 뭔가를 표현하려 했다. 나는 농촌 아낙을 그릴 때 그들이 농촌 아낙이 되기를 바란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갈보를 그릴 때는 갈보 같은 표정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갈보의 두상이 나에게 그다지도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마네도 해냈고, 쿠르베도 마찬가지이다. 질어먹을! 나도 똑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다.
옆모습의 두 번째 습작을 마쳤다. 그리고 난 뒤 예정된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두 상의 습작을 나 혼자서 그렸다. 나를 다소간 기쁘게 한 것은 그녀가 내가 혼자서 제작한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서 자신을 위해 다시 그려 주었으면 한 점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내가 그녀 방에서 댄서 복을 입은 자신의 습작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은 카페의 주인이 그녀가 포즈를 취하는 걸 반대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열렬히 바란다. 그녀는 얼굴이 개성적인 데다가 위트가 있다. 현재는 모델의 얼굴이 생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이야기를 하는데 점점 더 익숙해 지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때로는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그런 류의 그림이 점점 더 요구된다는 것이 시대 정신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최상의 예술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그것에 반대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을 그린다는 것--그것은 오래된 이탈리아의 미술이며, 밀레가 했으며, Breton이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영혼에서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의복에서 출발할 것인가일 뿐이다. 다시 말해 형상이 리본과 나비 넥타이를 위해 빨래집게 노릇을 해야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감정과 정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아니면 그것이 그 자체로 무한히 아름답기 때문에 모델링을 위해서 모델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덧없는 것이고, 나중의 것은 둘 다 상급의 예술이다.
나는 내내 내 초상화 작업에 매달려 있었는데, 마침내 정말 ‘흡사한’ 작품을 두 점 제작했다.
실망스럽게도 너는 ‘지불해야할 때가 너무 많아서 이번 달 끝까지는 어떻게 그냥 지내 주었으면 해’라고 말하는 구나. 내가 네 채권자보다 덜 중요하다 말이지? 기다려야 할 사람이 누구냐? 그들이냐? 아니면 나냐? 일이 매일 같이 나에게 요구하는 부담이 나에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기나 하느냐? 때로는 계속 해 나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실감하느냐? 그리고 내가 그려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너무도 많은 것이 이곳에서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즉시 계속해 나가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내 상황은 온갖 방면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으며 기운차게 앞서 작업해나감으로써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물감 비용은 내 목에다 맷돌을 매달아 놓은 듯하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해 나가야만 한다. 나 역시도 사람들에게 기다리도록 한다. 그것도 무자비 하게. 그들은 돈을 받게 될 것이지만,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럴 여유가 없으면서도 항상 마음 약하게 돈을 지불한다면, 나 자신에게 너무나 큰 피해를 입히는 셈이며, 나는 내 일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말리라.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따뜻한 식사라고는 세 끼밖에 하지 못했다는 걸 아느냐?--그리고 그 나머지 아침 식사는 내가 사는 곳의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고, 저녁은 가게에서 커피 한 잔과 빵을 먹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트렁크에 들어 있는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서 먹었다. 이렇게 나아간다면 Nuenen에 있을 때 반 년 동안 그런 것처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이상의 채식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너의 돈을 받을 때면 내 위는 내가 산 음식을 소화해 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모델이 떠나고 나면 허약함이 밀려 온다. 또 바깥에 나가 있으면, 실외에서 작업하는 것은 나에겐 너무 힘겨운 일이라, 나는 또 어지러움을 느낀다.
내가 병이라도 들면 우리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너는 편지에 썼다. 나도 그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기대한다. 나의 튼튼한 정신력과 활력을 온전히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허약해지는 걸 두려워한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람을 갉아먹는 이이다. 하지만 Eindhoven의 의사인 Van der Loo는 내가 이곳에 오기 바로 전에 그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을 때 내가 꽤 건강하며, 필생의 작품을 제작할 나이에 다다르기도 전에 건강을 잃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내 신체에 관해 나를 아주 기쁘게 한 것은 암스테르담의 의사가 나를 일반 노동자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철공소에 일하시죠?’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내 자신을 바꾸려고 애쓰는 바이다. 청년 시절에는 지적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선장이나 철공소 인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심해야만 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을 유지하고 힘을 얻도록 애쓰야 한다. 매일 몸이 더 야위어 가고 있다.
어쨌거나 이번 연말에는 사오 일 정도 완전히 굶어야만 한다. 아마도 너는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비록 굶었을 지라도 나의 가장 큰 욕구는 음식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다. 대신에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히 더 강렬하여, 나는 즉시 모델을 사냥하러 나가고 돈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내 옷도 이제 이 년 동안이나 입어서 형편 없는 상태이다.
테오야, 너 역시도 다소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난 십 년 혹은 십이 년 동안에 네 삶이 내 삶만큼 어려운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니? 내가 이제 그만하면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말할 때 가욋돈을 좀 부쳐줄 수 있겠니?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전에는 몰랐던 것을 배웠으며 계속 시골에 밀려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항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델과 그림을 그릴 돈도 없이 그곳에 간다면 내가 거기서 무얼 할 수 있겠니?
근심이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여태껏 살아오고, 마치 굶주리는 사람이나 그 때문에 파멸된 사람이란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언제까지나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면! 내가 언제까지나 곤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림에서는 색채가 중요하듯, 삶에서는 열성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열성을 유지하려 애쓴다는 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요전 날 처음으로 졸라의 새 책 ‘작품’(ㅣ’Oeuvre) 일부를 보았다. 이 소설이 미술계를 관통해 들어온다면 뭔가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엄격하게 작업을 할 때 뭔가가--이를 테면 구성 능력, 인물에 대한 지식--더 필요하다는 걸 인정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이 모든 해 동안에 정말 헛되이 땀을 쏟아부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내가 보고 아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다. 인상주의가 그 마지막 말--‘인상주의’란 표현을 고수하는 것--을 이미 내뱉았건 아니건 간에 나는 인물화에 있어서는 새로운 화가들이 솟아날 것이라고 언제나 상상해 왔으며, 점점 더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최상의 예술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나는 보게 된다.
그러니 내 자신의 길을 분투해 나가도록 해 다오. 그리고 제발 용기를 잃지 말고, 보조를 늦추지도 말아 다오. 나의 전 미래가 내가 여기 앤트워프에서건 아니면 나중에 파리에서건 도시에서 쌓아나갈 관계에 달려 있을 때, 어쩌면 한 달에 오십 프랑을 더 절약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골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것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술 업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너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뭔가 독창적인 걸 보여줄 수 있다면 많은 새로운 변화도 올 것이다.
모델 문제 때문에 이번 달에 나는 이곳 아카데미의 원장인 Verlat 씨를 만나 뵈러 갈 것이다. 사정이 어떤지를 일단 알아봐야 겠다. 그곳에서 누드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할 수 있는지, 하루 종일 모델을 보고 작업하는 걸 허용하는지? 초상화 한 점과 데생을 몇 점 가지고 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Verlat 씨가 그림 재료는 내 스스로 대어야 한다고 할 때 그럴 비용이 있어야 하니까.
현재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꽤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특히 여기에는 온갖 부류의 화가들이 있기 때문인데, 다른 사람들이 작업하는 것은 전에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모델도 훌륭하며, 여기에 있는 것이 상당히 많은 비용을 줄이게 될 것이다.
Verlat 씨는 내가 시골에서 가져온 두 장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보더니, ‘좋구먼, 하지만 나는 그 쪽에는 관심이 없다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초상화 두 장을 보여주었더니, ‘이건 좀 다르군. 인물화를 그리고 싶거든 와도 좋소’라고 했다. Verlat 씨와 좀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면 한다. 그가 제작하는 많은 것들은 색채와 붓질에 있어서 딱딱할 뿐만 아니라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도 솜씨가 살아나는 날이 있으며,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초상화를 더 잘 그린다는 걸 안다.
내 유화 습작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 그들의 그림이 나의 것과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의 그림은 피부색과 똑같은 색깔을 띠고 있어서 가까이서 보면 아주 정확하다. 하지만 약간 뒤로 물러나면 그 그림들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밋밋하다--그 자체로는 부드러운 분홍과 섬세한 노랑 등 모든 색깔이 거친 효과를 낳는다. 가까이서 보면 내 그림은 녹색을 띤 빨강, 노르스름한 잿빛이다--하지만 약간 뒤로 물러나서 보면 그림은 물감(paint)으로부터 두드러진다. 그림 주위에 분위기가 있으며, 진동하는 빛 같은 것이 그림 위에 내려 앉는다.
모든 인물화의 뿌리는 붓으로 직접 모델링(modelling)하는 것에 엄청날 정도로 좌우된다. Gericault와 들라크루아 그림의 인물들은 우리가 그들을 앞에서 볼 때에 조차도 뒷면이 드러난다. 인물 주위에 분위기가 있으며--물감으로부터 두드러 진다. 내가 작업을 하는 것은 이걸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주에는 두 명의 누드 토르소--Verlat 씨가 포즈를 취하게 한 두 명의 레슬러--를 담은 큰 그림을 제작했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누드 반에서도 그림을 그렸으며, 현재 초상화를 그리고 있으며 그걸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그곳의 선생이 계속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상당히 애를 썼다는 게 보이는 군요. 머지 않아 발전을 볼 것입니다(Je vois que vous avez beaucoup travaille. Vous ne serez pas long a faire du progres)’***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와 연배가 같은 사내가 한 명 있는데, 그도 또한 오랜 기간 동안 그림을 그렸음에도,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생은 Verlat 씨가 내 작품에 좋은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고 했다. Verlat 씨는 나에게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 반에서는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리는데, 그래서 끔찍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그림이 되고 만다.
아카데미의 몇몇 사람들이 내 데생을 보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농부 인물화에 자극을 받아, 즉시 훨씬 강렬한 모델링으로 확고하게 그림자를 집어 넣으면서 모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그걸 보여주었으며 우리는 그 그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그림은 생명력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이곳 다른 누구의 작품보다도 멋진 데생이었다. Sibert 선생은 그를 불러 그가 만일 앞으로도 이와 똑같은 식으로 한다면 선생을 조롱하는 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너도 사정이 어떤지 알겠지.
그렇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문제로 화를 내거나 해서도 안 되며, 나쁜 버릇을 수정하기를 바라는 척 해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불행히도 자꾸만 그 쪽으로 되돌아 가고 만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생각의 마찰을 발견하고 있다. 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얻으며,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더 잘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싼 방법은 아카데미에 머무는 것이다. 특히 좀 더 정교한 누드 습작을 그리기 위해서는 모델을 혼자서 조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특히 다른 이들이 부지중에 강한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한다면, 내가 피하려 애를 쓴다고 해도 Verlat 씨가 나와 한 바탕 소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저녁에는 Vinck(Leys의 제자)와 고대 미술품을 보고 그리기로 해 두었다. 농부의 모습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석고를 보고 그리는 게 아주 유용하다는 걸 믿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지만 흔히 하는 그런 식은 아니다. 고대 조각품에서 엿볼 수 있는 정감--빌어먹게도, 석고 중에는 하나도 그런 정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이곳에서 본 데생들은 내 견해로는 아주 형편 없으며, 전적으로 잘못 된 것이다. 시간이 누가 옳은 지를 보여주리라. 아마도 아카데미의 신사들은 내가 이단적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좋은 고대 석고품을 하나도 보지 못했으며, 그 시기 동안에 나는 언제나 내 앞에 살아있는 모델을 두어 왔다. 그것들을 다시 보고 있노라니 고대인들의 놀라운 지식과 느낌의 정확성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수업이 끝난 다음, 열시 반부터 열한시 반까지는 클럽에서 모델을 보고 작업을 한다. 나는 이런 클럽 중 두 군데의 회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나게 바빴다.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찌 되었건 간에 이것은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한 시도이다. 아카데미에는 내 연배인 사람이 몇 명 있다. 옷을 입은 모델을 그린 뒤에 다시 누드를 보게 된 일은 나에게는 흥미롭다. 고대 작품도 그렇고, 뭔가를 입증하게 된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파리에서 어딘가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 전에 다른 어디에서 작업을 했어야만 되며, 긴 기간이든 짧은 기간이든 이미 아카데미에서 작업을 한 사람을 언제나 만나게 된다.***
Verlat 씨와 Vinck가 나에게 해 준 충고는 아주 신랄한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적어도 일 년은 더 데생을 할 것을 강렬하게 충고한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석고나 누드만을 보고 그리라고 한다.
이곳 날씨는 상당히 추우며, 대부분의 경우 몸이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림이 잘 되어가는 동안에는 나는 정신이 고양된다. 시골의 환경과는 정반대의 환경에 있다는 게 나를 새롭게 한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볼 때 나에겐 뭔가 뻣뻣하고 어색한 것이다. 한 십 년 정도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보인다. 내 외양을 바꾸어만 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서둘러서 의사에게 이빨을 보여주었는데, 내가 못쓰게 된 것과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합쳐 열 개가 넘었다. 너무나 많은 숫자이다. 마흔은 넘은 사람처럼 보일 것이고 그건 결코 이롭지 못하다. 비용은 백 프랑인데, 지금 할 수 있다는 구나.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그리고 있는 지금.
동시에 내 위도 보살펴야만 한다. 지난 달부터 나를 엄청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침도 하기 시작했다. 오월 일일 날 누에넨에 있는 내 화실로 갔으며, 그 이후로 뜨거운 저녁 식사라고는 여섯 번인가 일곱 번밖에 먹지 못했다. 일에 너무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때 나는, 지금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저녁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그리고 충분히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이 튼튼하다는 걸 너무 과신한 탓도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으리라. 아마도 사정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온당치 못하고 내가 집에 머물렀더라면 이런 결과는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시면서 어머니는 내 걱정을 하게 될 테니까. 또 담배를 엄청나게 피워서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는데, 담배를 피울 때는 공복을 그다지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이가 부러지자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입이 온통 아파서 음식을 가능한 한 빨리 삼켜버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튼튼하지도 않으며, 내 자신을 너무 소홀히 하면 다른 많은 화가들과 똑같이 되고 말리라(한 번 곰곰히 따져보면 정말로 그런 화가가 많다). 그리하여 죽게 되거나, 아니면--훨씬 더 심각하게--미치거나 백치가 되어버리리라. 의사가 내게 한 말은 내가 절대적으로 내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쇠약 증세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달에 병이 들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상태가 더욱 악화되거나 심각한 지경이 되면 장티푸스로 발전할 지도 모른다. 신선한 공기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수수하게 먹고 생활을 해왔으므로 내 상태가 쉽사리 악성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야,이러한 병증은 지금 현재로서는 나쁜 것이다. 나도 걱정하지 않으니까, 네가 그걸 걱정해서는 안 되지만.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요함과 평정심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강을 손상 당한 사람들이 그림 그리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온갖 종류의 병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작품이 그 때문에 나빠지거나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경이 과민한 사람들이 더욱 민감하고 섬세한 모습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이 그림의 비밀을 알아내었다고 말했다. ‘Lors-qu'il n'avait plus ni dents ni souffle.’***하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그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았으며, 그의 정부가 없었더라면 그가 죽었던 것보다 십 년 혹은 그 보다 더 일찍 죽었을 거라는 것도 안다.
너처럼, 나도 ‘Pere la Chaise’에 갔다 왔다.*** 나는 Beranger의 정부의 초라한 묘비 곁에서 존경심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한 번 찾아 보았던 것이며(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의 무덤은 Beranger 묘비 뒷편 구석에 있다), 거기서 나는 코로의 정부도 또한 기억했다. 이 여인들은 조용한 뮤지들이며, 나는 그 온화한 대가들의 정서와, 친밀감, 그들의 시에서 느껴지는 파토스에서 여인의 영향을 언제나 느낀다.
나는 일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위대한 화가들의 원칙이라는 것을 점점 더 믿게 된다. 거의 굶주릴 지경이 되더라도, 그리고 모든 물질적인 안락에 작별을 고해야만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Israels 자신도 거의 무명이었으며 마른 빵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그럼에도 그는 파리에 가고자 했던 것이다. 사회가 그들에게 그들의 완고함에 감사를 표하지는 않겠지만, Goncourt 형제로부터 얼마나 완고함이 필요한가를 보게 된다.
경비 문제로 나에게 화를 내지는 마라.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만, 필요가 규칙을 깨게 만드는 구나.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를 원한다면 살아 남으려고 애쓰야만 한다.
네 아파트가 어떤지 알고 싶구나. 만일 파리에 가게 된다면 동떨어진 지역(예를 들면 몽마르트)에 있는 싸고 작은 방이나 호텔의 다락방이라도 흡족해 할 것이다. 함께 살면서 사람들을 맞이 할 수 있는 꽤 괜찮은 화실을 구하는 계획에 대해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대찬성이다. 십 년 동안 우리가 함께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에 일단 생각이 미치게 되면 너는 그게 점점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녁에 네가 화실이 있는 집으로 오는 건 너에게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성 싶다. 그런데 내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 자신에 대해서 네가 네 자신에 대해 편지에 썼던 말을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나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점에서 그렇치는 않다. 대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 대한 너의 판단을 보면 너는 일상성이나 편견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는 듯 한데, 네가 언제까지나 거기에 집착하리라고 믿기에는 그것은 너무나도 피상적이고 부정확하다. 우리 두 사람이 해야할 일은 아마도 절충하는 것이라고 보여지며, 그 결과는 아마 훨씬 더 나은 이해에 이르게 되리다.
화실 문제를 좀 더 이야기 해 보자. 한 집에 반침이 딸린 방과 다락 아니면 더그메의 한 구석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얻을 수 있다면, 네가 방과 반침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가능한 한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낮 동안에는 화실을 방으로 이용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비용이 많이 들고, 우리는 형편이 어려우니까, 가장 현명한 것은 화실을 갖기 전에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리라. 일 년 정도 더 일을 한다면, 그리고 너와 나 두 사람 다 건강을 되찾게 된다면--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잘 버텨나갈 수 있으리라. 화가들이 ‘사람들이 나에게 오게끔 하려고 비싼 방을 얻었는데, 그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고, 나 자신은 그곳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고’하고 불평하는 걸 들었다. Cormon에서 일 년 더 그리도록 하자. 그 와중에 너는 다시 한 번 철저하게 사업을 조사하도록 해라. 그런 다음에는 모험을 걸어볼 만 하지 않은가 한다. 그리고 일 년 내에 우리는 서로를 더 잘, 더욱 친밀하게 알도록 애를 쓰야 하리라.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화실은--그걸 시작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전투가 될 거라는 것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전적으로 무관심할 거라는 걸 깨달아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이 있다는 확신감을 느낄 때 그걸 시작해야만 한다--어떤 힘이냐 하면 뭔가가 되고 싶다, 능동적으로 살고 싶다라고 느끼는 힘, 그래서 죽을 때 ‘나는 뭔가 과감히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가는 그곳으로 간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가 뭔가 좋은 것을 제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찬탄하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취급하는 것이다. 뭔가를 제작하고 뭔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긍정적인 사실에 집중한다면, 화를 내지 않고 사실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구필이나 우리 가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일 지라도. 먼저 우리 둘 다 이제 나이가 나이니 만큼 머지 않아 아내를 구하기를 바란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그것이 첫 번째 요건이며, 특히 여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서 예술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제는 너 자신이 Cormon에 가는 계획을 제안한다는 사실이다. 파리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다고들 하는구나. 이곳에서 보다 자신의 소재를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지. 그리고 기꺼이 내 작품을 수정해 주고 몇 가지 조언을해 줄 명석한 화가들을 너는 몇 명 알고 있지.
그 나머지는 Cormon 씨도 Verlat 씨와 똑같은 말을 하리라. 내가 항상 실물을 보고 데생을 했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로, 일 년은 누드나 캐스트를 보고 그려야만 하며, 그런 다음에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거의 그려낼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Verlat 씨나 Cormon 씨 같은 분이 그런 걸 요구할 때는 나쁜 징조는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혀 둔다. Verlat 씨가 자기 혼자서 그냥 힘겹게 작업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기억으로 인물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여자 누드 모델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적어도 수업 시간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도 드물게만 한다. 고대 수업 반에서조차도 열 명의 남자 인물에 한 명의 여자 이런 식이다. 물론 파리에서는 이 점은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모든 점에서 너무나 다른 남성과 여성의 인물을 지속적으로 비교함으로써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는 것처럼 보인다. 극도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려움이 없다면 예술이란 무엇이겠는가? 또 삶은 무엇이겠는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내팽개친 것이라고 가정하지는 마라. 바로 그것이야말로 아카데미와 화실에서만 작업을 한 사람들이 부족한 것이니까--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전. Cormon에서는 몇 년 동안 캐스트를 보고 데생을 한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해야만 하리라. 몇 달 간 그런 작업을 한다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리라. 아마도 나는 실지 대상을 보고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는 더 과감하게 일필휘지로 사물을 그려내고 앙상블을 포착해 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누드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사실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데생은 그 자체, 그 기교는 나에게는 별로 막히는 데가 없다. 글을 쓸 때와 같은 편안함으로 데생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흥미롭게 되는 것은 개념의 독창성과 폭넓음을 심각하고 철저하게 목표로 삼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이다.
너는 Cormon 화실에 있는 명석한 사내들 이야기를 했지--나도 정말이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저녁 반에서의 경합을 위해 제작하던 데생을 어제 끝냈다. Germanicus 인물화 였다. 내가 꼴지라는 건 확실한 데 다른 사람들의 데생은 거의 엇비슷 한데, 내 데생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최고라고 생각할 데생을 제작하는 걸 보았다. 바로 그 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데생은 정확하긴 하지만 죽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본 데생들은 모두 그랬다.
Sibert 선생은 고의적으로 나와 소동을 일으키려 했다. 아마도 나를 제거할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문제의 이면에는 수업을 받는 사내들이 내 작품을 이야기 하고, 수업 시간 외에 몇몇 사내들에게 그들의 데생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Cormon에게 간다면, 조만간에 선생이나 학생들과 문제를 일으키리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지는 말아야 하리라. 선생이 없다할 지라도 고대로부터의 데생 과정을 루브르에 가서 데생을 하던지 해서 끝낼 작정이다.
이곳 과정은 삼월 삼십 일일에 끝이 난다.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Nuenen에 가서 그곳 사정이 어떠한가를 보리라. 하지만 브라반트로 되돌아 가는 것은 에도는 길이자 시간의 손실이다. 이곳에서 거기로 그림 도구를 가져갈 돈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면 똑같은 이야기가 다시 그대로 시작될 것이다. 모델을 고용해 돈은 다써버리고 말게 될라. 그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나아 가야 하므로, 그런데 동시에 아프기도 하기 때문에, 너에게 파리로 갈 때 까지는 여기에 있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지만 내가 유월이나 칠월보다 더 빨리 가는 걸 허용한다면, 그것이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삼월이 지난 다음에 곧바로 파리로 가 루브르나 아니면 미술 학교에서 데생을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가장 시급한 것--Cormon에 갈 때 분명 상당히 도움이 될 고대 미술품을 보고 습작하는 것--을 즉시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쯤이면 다시 파리에 익숙해 질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 일단 다락방을 하나 세내었으면 한다. 그러면 유월 경에 가서 화실을 구하는 문제를 훨씬 더 수월하게 상의할 수 있으리라. 비록 내가 이 점에서는 운이 없었지만, 일거리가 좀 있을 거라는 믿음도 계속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도 그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거의 끝나간다. 건강은 약간 나아지고 있다. 작업은 그다지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억지로 무리를 하지는 않는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위해 힘을 저축하고 싶다. 거기에 좋은 건강 상태로 가고 싶다.
어쨌거나 앤트워프는 나를 무척이나 즐겁게 했다. 물론 나는 내가 떠나는 시점에야 갖게된 그런 경험을 안고 이곳에 도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겠지. 이 도시는 파리를 많은 닮았는데, 파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이다. 사업상의 목적으로, 그리고 이곳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활기참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앤트워프가 이전에는 훨씬 더 활기가 넘쳤다는 말을 듣게 되는 걸 보니, 나는 앤트워프의 평상시의 호경기를 보지는 못했다.
어제 Sibert 씨가 누군가에게 데생에 대한 나의 생각이 견실하며 자신이 너무 성급했었다고 말했다는 걸 들었다. 그는 수업에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며칠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캐스트를 보고 데생을 또 하나 끝냈는데, Sibert 씨는 자신에게는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오늘 내가 그린 데생은 비례에서는 거의 수정할 필요가 없으며, 색조 면에서는 전혀 나무랄 때가 없다고 말하기 조차 했다.
지금 여인의 가슴을 작업하고 있다. 모델링에 있어서는 더욱 두드러지지만, 인물이 농부나 나무꾼을 연상시키던 첫 캐스트 데생보다는 덜 투박하다.
오늘은 거의 봄날 같다. 시골에서는 종달새가 처음으로 노래하는 걸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혼자서 공원에도 가보고, 대로를 따라 걷기도 하면서 도시 전체를 오랫동안 돌아 다녔다. 대기에는 뭔가 부활의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사업과 사람들 사이의 낙담이란!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파업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과장을 하는 것이라거나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오는 세대에세 있어서 그들은 분명 쓸모 없는 인물로 판명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그들은 성공적인 인물로 판명될 테니까. 하지만 현재로서는 일을 해서 자신의 빵을 벌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시기이다. 해가 갈수록 상황이 점점 나빠질 거라는 걸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힘겨웁다.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노동자는 백 년 전 제삼 계급(tiers etat)이 다른 두 계급에 대항한 것이 그랬던 것처럼 정당화할 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결말에 이르려면 먼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봄이 오긴 했지만 수천 수만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거리를 헤매야 하는지!
최상의 낙관주의자가 그러하듯, 나는 봄 대기 속으로 종달새가 솟아 오르는 걸 본다. 하지만 건강이 좋아야 할 스무 살 가량 된 어린 처녀가 폐결핵의 희생양이 된 것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병으로 죽기 전에 물에 빠져 죽으리라. 항상 존중할 만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부유한 부르주아 가운데 있으면 아마도 이런 걸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몇 년 동안 가난에 허덕이며(la vache enragee)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해온 사람이라면 커다란 불행이 저울추를 늘어뜨리는 요인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이곳에 있는 동안 내내 동지가 한 명 있었다. 나이든 프랑스 인으로 나는 그 분의 초상화를 그렸다. Verlat 씨는 이 작품이 괜찮다고 했다. 연세 때문에 이 노인에게는 겨울을 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보다 훨씬 더 힘겨운 것이었다. 그 분과 함께 의사를 찾아갔는데, 아마도 수술을 받아야만 할 것 같다. 어쨌거나 병원에 가도록 설득은 시켰다. 그 분을 위해서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세상에 인간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으며, 아무리 연구를 하더라도 부족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르게네프 같은 이가 그렇게 위대한 대가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관찰하도록 가르친다.
다른 누구보다도 평정했던 코로--그는 한 평생 노동자처럼 단순하지 않았니?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그 모든 비참함에 그다지도 민감하지 않았니? 1870년과 71년에 그는 이미 나이가 아주 많았는데도 밝은 하늘을 보았으며, 그와 동시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야전 병원을 찾아갔었다.
환영은 지나가지만 숭고함은 남는다. 우리가 모든 걸 의심한다 해도, 코로와 밀레, 들라크루아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자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에도 인간에 대한 관심은 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너 역시도 행복하지도 않으며 기운이 넘치지도 않는다. 걱정거리는 너무도 많으며 제대로 풀려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고립되고 오해를 받으며, 물질적인 행복의 가능성을 모두 잃게 될 때에도, 이 한 가지, 믿음은 남는다. 우리는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그것은 이미 폭풍우에 선행하는 때의 불유쾌한 답답함과 압박감의 냄새를 풍기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앞으로 오는 세대는 좀 더 자유롭게 숨쉴 수 있으리라.’
졸라와 Goncourt 같은 사람은 어른--아이의 순박함으로 이걸 믿는다. 가장 기운 찬 분석가들인 그들의 진단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너무나 정확하다. 그리고 투르게네프와 도데, 이런 이들은 목표나 미지에 대한 일견 없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것이 우리의 힘을 증대시키고, 우리는 무한히 더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조만간에 네가 물질적인 행복의 모든 가능성은 치명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될 그런 순간이 오리라. 하지만 동시에 자신 안에서 일할 힘을 느낀다는 그런 보상이 있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확실성을 가지고 뭔가를 예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만히 분석을 해보면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력이 넘치는 사람은--회화에서건 문학에서건--언제나 곤경을 헤치며 일을 해왔으며, 언제나 개인적인 창의로부터 일을 했다는 걸 보게 된다.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거기도 똑같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소규모로 시작해서, 그렇지만(quand meme)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고, 돈 대신에 개성을 지니고, 신용보다는 대담 무쌍함--이것이 밀레와 Sensier, 발작, 졸라 등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Goncourt 형제가 이룩한 작업의 양은 엄청나다. 이처럼 함께 작업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착상이다. 그리고 매일 나는 예술가들 가운데 커다란 비참함이 상존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 상호간의 불화, 협력하지 않음, 그리고 서로에게 진실되지 않고 거짓으로 대하는 것 등에 있다는 이론을 입증할 만한 것을 발견한다.
내가 감명을 받는 것은 현재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위대한 평정심이다. 볼테르, 디드로--그들은 대혁명을 불러 일으킨 사람들이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천재의 작품이며, 생각이 없고 수동적인 정신으로 하여금 한 방향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게끔 한다.
Goncourt 두 형제의 마지막 길과, 고(故) 투르게네프의 마지막 날들을 생각해 본다. 여성처럼 민감하고, 섬세하며, 지적이었다. 자신의 고통에도 민감했지만, 언제나 생명력과 자신감으로 충만했다--무관심한 금욕주의나 인생에 대한 경멸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여자들이 죽듯이 죽었다. 신에 대해 고정된 생각이나 추상은 없이, 언제나 인생 자체의 굳건한 토대 위에 서서, 단지 그것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아직 그렇게 멀리 오지 못했다. 우리는 먼저 일하고, 먼저 살아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행복이 없을 지라도. 그림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제2의 젋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칼라일도 상당히 대담하게 행동한 사람이며 사물에 대해 나머지와는 다른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들의 삶을 더욱 추적하면 할수록 나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돈의 부족, 나쁜 건강, 반대, 고립,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 투성이었다.
내 모든 주의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내 이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자유로운 활동의 기회--을 얻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장애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를 극복하는 걸 의미한다.
사람이 점차적으로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젊음을 잃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좋은 것이리라.
권 4(1886년 삼월--1890년 7월)
파리, 1886년 삼월
내가 이처럼 급작스럽게 왔다고 해서 언짢아 하거나 하지 말아라. 나는 이 문제를 두고 상당히 많이 생각을 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아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두고 보아라. 잘 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아침에 네 편지를 받았는데, 홀랜드에 있는 삼촌들에게 그 문제를 귀뜸한 것은 모두 호의에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게 뭐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갖고 있는 꽃들의 연작을 그렸다. 검은 색--진주층을 박아넣은 검은 일본식 래커 같은 것--바탕에다 흰 백합--흰색, 분홍색, 초록--의 줄기, 그리고 푸른 바탕에다 오렌지 색 참나리가 한 다발 놓여 있는 것, 노랑 배경에다 보라 색 달리아 한 다발, 옅은 노랑에다가 푸른 꽃병에 담긴 붉은 글라디올러스.
Isabey가 그린 수채화 두 장을, 특히 인물이 들어있는 것으로, 기꺼이 교환하기를 원한다. 내가 여기에 갖고 있는 연작과 교환하도록 힘써 보아라. Prinsenhage에서 Otto Weber의 작품, 그 아름다운 ‘가을’을 얻을 수 없겠니? 나는 교환 조건으로 네 장의 연작을 줄 수 있다. 데생보다 그림이 더 필요하다.
이십 프랑 금화가 두 개 남아 있는데, 지금부터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걸로 버틸 수 없을 듯해서 겁이 난다. Asnieres에서 작업을 시작했을 때 캔버스가 많이 있었고, Tanguy 씨도 나에게 아주 잘 해 주었다. 좀 더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잘해 주고 있지만, 그의 나이든 마녀같은 아내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낌새를 채고 반대를 했다. 어쨌거나,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오늘 로트렉을 보았다. 그림을 한 장 팔았는데, Portier 씨를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Tambourin에 갔다 왔었다. 거기에 가지 않는 것은 움츠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Segatori에게 이 사업 문제로 그녀를 평가하지는 않으며, 그녀를 평가하는 것은 그녀를 위해서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림 영수증을 찢어버리긴 했지만 모든 걸 돌려 주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그녀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이 트집을 잡아 다투려고 한다는 걸 그녀가 안 걸로 간주하며, 그녀가 ‘가 버려요’라고 말했을 때,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그녀가 나에게 경고를 하려 했던 것이라고 해 주었다.
그녀는 그림과 그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트집을 잡아 다투려고 한 사람은 나라고 대답을 했다--그 말은 놀랄 일도 아니다. 만일 그녀가 나의 편을 든다면 그들이 그녀를 걸레처럼 취급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림들을 막바로 가져 오고 싶지가 않았으므로 나는 네가 돌아 오고 난 뒤에 그 문제를 상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림은 나의 것인만큼이나 너의 것이므로.
그녀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으며 왁스처럼 하얬다. 이걸 공공연히 이야기 해서는 안되지만, 내 생각에는 그녀가 낙태를 한 듯하다. 그녀의 사정이 나쁘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도 자유로운 위치도 아니고 누구의 정부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 좋은 것은 그녀는 아프고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개월 정도 지나면 그녀가 좋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때 쯤이면 그녀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은데 대해서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그녀를 믿는다. 그리고 그녀가 사업적인 측면에서 영업장을 잘 이끌어 나간다면 나는 그녀가 불리한 쪽이 아니라 유리한 쪽을 선택한 것으로 비난해서는 안 되리라. 그녀가 나아가기 위해서 내 발가락을 약간 짓밟았다면--나는 그걸 허용한다.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내 가슴을 짓밟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나쁘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하지만 내가 Tambourin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신해도 좋다. Segatori의 문제는 아주 다르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향한 애정이 어느 정도 있으며, 그녀도 여전히 나를 향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어제 Tanguy 씨를 보았는데, 그는 내가 막 그린 캔버스를 진열대에다 두었다. 네가 떠난 이후로 네 작품을 제작했으며, 현재 커다란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이 긴 캔버스가 팔기에 어렵다는 건 알지만, 나중에 사람들은 그 그림들에서 야외를 느낄 수 있으며 좋은 혈통이라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이 모두는 시골 집이나 식당을 장식하는 데 어울리리라. 그리고 네가 아주 깊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면, 상당히 많은 다른 화상들이 그랬듯이, 언젠가는 너 자신도 시골에다 별장을 마련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니? 잘 살게 되면 더 많은 돈을 쓰겠지만, 그런 식으로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즈음에는 초라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부유하게 보임으로써 더 잘 해나갈 수 있는 듯하다. 생활을 즐겁게 영위하는 것이 자살하는 것보다는 낫다.
집에 대해 쓴 것을 읽고 코끝이 찡했다. ‘가족들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하지만 아직도 가족들을 보면 슬픔이 몰려와.’ 십 년 쯤 전이었으면 너는 어찌 되었건 간에 가족은 언제나 잘 되어나갈 거라고 맹세를 했을 것이다. 네가 결혼을 한다면 어머니에게는 커다란 만족을 안겨 드리는 일이 될 것이며, 너의 건강과 너의 일을 위해서도 독신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나에 관해 말하자면 결혼과 아이에 대한 욕구를 잃어가는 게 느껴지며, 이따금씩 서른 다섯 살에 그렇게 느낀다는 게 나를 슬프게 한다. 이 때야 말로 그 반대로 느껴야 할 시기인데. 그리고 때로는 이 썩어빠질 그림에 대해 투덜거리기도 한다. Richepin이 어디서에선가 말했지.
예술을 향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걸 의미한다.
(L'amour de l'art fait perdre l'amour vrai.)
나는 이것이 끔찍스러울 정도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사랑은 예술에 구역질나게 한다. 때때로 나는 늙고 쇠약해 졌다고 느끼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림에 대한 진정한 열성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야망은 부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림은 결코 치른 만큼의 대가를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낙담케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너에게 부담이 좀 덜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는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내가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네가 타협하거나 하는 일 없이 대담하게 내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니까. 그 다음에 남쪽 어딘가로 떠나리라. 인간으로서는 나를 구역질 나게하는 이 많은 화가들로부터 멀어져야 겠다.
아를, 1888년 이월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이 이 피트 가량 쌓여 있는데, 아직도 더 많이 내리고 있다. 내게는 아를이 Breda나 Mons보다 더 커 보이지 않는다.
Tarascon에 다다르기 전에, 거대한 노란 바위들이 기괴하면서도 동시에 당당한 형상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장엄한 시골을 보았다. 이 바위들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올리브-녹색과 잿빛-녹색의 잎이 달린 작고 둥근 나무들이 열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아를 주변의 시골은 단조로워 보인다. 포도덩굴을 심은 멋진 붉은 빛 토양이 쭉 펼쳐진 뒷편에 정말 우아한 라일락이 피어 있는 산들을 보았다. 그리고 눈 속의 풍경은, 눈처럼 눈부신 하늘을 배경을 산 정상도 하얀 그런 풍경은 일본 사람들이 그린 겨울 풍경과 흡사하다.
여행 하는 동안에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새로운 곳을 생각한 것만큼이나 네 생각을 했다. 나중에 너 자신이 여기에 종종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생기를 얻고, 우리의 평온과 균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피난처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로서는 파리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것 없이는 사람은 절망적으로 잔인하게 취급 당하고 마는 것이다.
마을을 배경으로 눈 덮인 장면을 담은 풍경화 습작을 완성했으며, 눈이 내린 가운데에도 이미 꽃을 피운 아몬드 가지도 두 장의 습작에다 담아 보았다. 이것은 요 근래에 파리에 있었더라면 해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 나는 그걸 얼마 더 오래 견디지 못해으리라. 이따금씩 내 피가 실제로 순환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몸에 열이 있고 식욕이 없어서, 먹는 다는 것이 정말 강제적인 노역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많이 나아졌다. 단지 시간과 인내의 문제이리라.
이곳에서는 파리에서보다 비용을 더 줄이기가 아주 어렵다. 운이 더 나쁘다. 비용을 매일 오 프랑으로 잡고 있다.
고갱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이 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갚지 않을 수 없는 빚을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에 무일푼이라고 하는구나. 그리고 네가 그의 작품을 하나라도 팔았는지 알고 싶어하며, 약간의 돈이라도 긴급하게 필요하므로 그림 가격을 기꺼이 훨씬 더 내릴 수 있다는 구나.
불쌍한 고갱은 운이 따르지 않는다. 그의 경우에는 회복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아주 두렵다. 그리고 그의 역경을, 특히 건강이 위협을 받고 있는 지금에는,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고난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그런 기질의 소유자는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그를 지치게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 하느님! 건강한 신체를 지닌 예술가 세대를 과연 보게 될까?
그는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다종다양한 심통한 일 중에서도 돈이 없는 것보다 자신을 더 미치게 하는 일은 없지만, 자신이 영원히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할 운명인 것 같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러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이미 Tersteeg 씨에게 고갱의 작품 한 점을 구입하게 하려고 애를 썼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까? 그의 바다 풍경을 상회에 가져가는 모험을 할 수 있겠니? 그게 가능하다면 그는 당분간은 안전하리라.
우리들 중 다수에게는--그리고 우리 두 사람도 분명히 그 사람들 중에 속한다--미래가 여전히 얼마나 어려울지! 나는 마침내는 승리를 거둘 거라는 걸 굳게 확신하지만, 예술가들 자신들은 그로 인해 어떤 이익을 얻게 될까? 그리고 그들은 고난이 좀 덜한 날들을 보게 될까? 보다 운이 좋은 예술가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좀 위안이 되리라.
이제 영국 화상인 Reid 이야기를 좀 하자. 우리가 그를 알고 난 뒤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불공평하다. 그래도 그가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그림을 선물해 주었으며, Monticelli의 가격을 올렸는데, 우리도 다섯 점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 그림들 값도 마찬가지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니까. 그는 첫 몇 달간은 좋은 친구였다.
우리 쪽에서 보자면 Monticelli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것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죽은 화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단지 돈의 견지에서 이다. 따라서 그를 향한 우리의 신념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Reid는 나에게는 예술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 문제에 관해 보자면, 우리가 우리 본거지에서 주인이 되는 권리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너의 손을 거쳐 영국으로 소개되는 것이 공평하다.
하지만 너는 상회의 다른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즉시 Tersteeg 씨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림이 주는 이익을 낮은 가격과 비교한 관점에서 볼 때 Tersteeg 씨는 홀랜드에서 오십 명 내외는 쉽사리 없앨 수 있으리라. 그 밖에도 그들이 이미 앤트워프와 브뤼셀에서 이야기 되고 있다면, 오래지 않아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중 몇 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Tersteeg 씨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영국 사업에는 본거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테니까, 그가 영국에서 인상파 화가 전시회를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Tersteeg 씨에게 Reid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어서 영국 사업에 경쟁자가 있다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했으면 한다는 걸 알게 해야 한다--이건 나의 일이 아니라, 너와 Tersteeg 씨가 속한 Boussod Valladon 회사의 일이지만.
하지만 미술가 연합은 보다 손쉽게 이루어 질 것이다. Tersteeg 씨는 우리가 미술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림 전체 가격을 올리려고 한다는 점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문제의 요체는 이 점이다. 미술가들이 그곳 화상들에게 형편 없는 가격에 자신들의 작품을 넘기느냐, 아니면 그들이 그들 스스로 결속을 해서 그들을 갈취하지 않을 명석한 대리인을 선택하느냐? 우리는 현재 대담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리고 Mesdeg와 나머지는 인상파 화가들을 희롱하는 걸 포기해야만 한다.
Tersteeg 씨가 인상파 화가들을 영국에 소개하는데 앞장 서기만 한다면. 하지만 Tersteeg 씨 자신이 먼저 그들의 작품을 많이 보아야만 하리라. 네가 화실들을 안내해 주겠다고 제안을 해라. 씨도 내년에는 사람들이 이 새로운 유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갈 것이라는 걸 보게 될 것이다.
Tersteeg 씨가 거절을 한다해도, 우리는 영국의 대리인으로 Reid나 Wisselingh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만일 Wisselingh가 그 일에 착수하기라도 한다면, Tersteeg 씨는 즉시 너를 비난할 것이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을 취급하면서도, 자네를 고용한 회사에는 그걸 알리지도 않았지?’
Tersteeg 씨는 수집가를 확신시키는 뭔가를 갖고 있다. 네가 씨를 설득해 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정말 기쁠 것이지만, 먼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William 황제의 서거 소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이 일이 프랑스 내의 사정을 서두륵 할까? 그리고 파리는 잠잠히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림 업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으로 가는 그림에 대해서는 관세를 철폐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듯 하다.
화가들에게 그림을 판 돈을 똑같이 나누자고 하는 것보다는 화상과 수집가들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사게끔 하는 것이 보다 손쉬운 일이리라. 화가들이 뭉쳐서 그들의 그림을 공동체에 넘겨주고, 판매된 금액을 나누는 것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은 없는 듯 하다. 그렇게 하면 공동체가 적어도 회원들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작업을 하는 것은 보장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드가, 클로드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피사로 등이 앞장서서 ‘우리 다섯 사람이 각자 그림 열 장을 내놓겠소. 그리고 우리는 매년 몇 점 씩 내놓도록 하겠소. 또 우리는 당신들, Guillaumin, Seurat, Gauguin, Bernard, Anquetin, 로트렉, 반 고흐 등 “Petit Boulevard”의 화가들을 초대해서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겠소. . . ’
그렇게 함으로써 Grand Boulevard의 위대한 인상파 화가들은 그들의 위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애초에 그들의 개인적 노력과 개개의 천재성으로 얻은 명성이 주는 이익을 자기끼리만 간직하고 있다고 더 이상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반면에 점점 더 커나가는 명성은 지금까지는 지속적인 비참함 가운데서 작업을 해야만 했던 대대 규모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의해 지탱되고 실지로 유지되리라.
토요일 저녁에는 아마튜어 화가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명은 그림 재료도 함께 파는 잡화점 주인이고, 다른 사람은 행정관으로 명석하고 멋진 사람인 듯 했다.
덴마크 화가인 Mourier Petersen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얼마 전에 Rue Lafitte에서 있었던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를 보았다고 했다. 현재는 그가 내 저녁 친구이다. 그는 점잖은 영혼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무미 건조하고, 정확하며, 소극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화가가 젊고 명석할 때는 나는 그런 걸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졸라와 de Goncourt, 기 드 모파상 등을 읽었고, 여유롭게 지낼만큼의 돈은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젋은 Koning을 들인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아파트에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몹시 기쁘게 한다. 파리에서는 언제는 삯마차 말처럼 어깨가 축 처지기 마련이며, 그 위에다 마굿간에서 혼자 지내야만 한다는 건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침을 먹는 게 네 몸에 좋다. 나 자신도 여기서 그렇게 한다. 매일 아침 계란 두 개를 먹는다. 위가 몹시 약하기는 하지만, 벌서 파리에 있을 때보다는 정말 훨씬 더 나아졌다.
오늘 아침, 오랜 기다림 끝에, 날씨가 온화하게 바뀌었다--그리고 마찬가지로 미스트랄이 무어니 배울 기회를 이미 가졌다. 이곳 주위의 시골을 몇 번 산책을 했는데, 이 바람이 불 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늘은 진파랑 색이고, 그 가운데 떠있는 커다란 눈부신 태양은 눈의 거의 녹였지만, 이 바람은 차갑고, 너무나 건조해 소름이 돋아나게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았다--호랑가시나무, 소나무, 잿빛 올리브 등이 덮고 있는 언덕에 위치한 폐허가 된 대수도원 등등. 곧 그것을 담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몬드 나무는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다.
방금 Lucien 피사로가 갖고 있는 내 그림 중 하나와 흡사한 습작을 하나 마쳤는데, 이번에는 오렌지이다. 지금까지 여덟 점의 습작을 그린 셈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진정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편안하고 따뜻한 가운데 작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작업이 꾸준히 진척되어 나아가, 한 달 내에 내 첫 번째 탁송물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너에게는 최상의 작품만을 보내고 싶다.
오늘은 작은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도개교를 담은 캔버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도개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이 두드러졌다--강도 마찬가지로 푸른 색이었고, 강둑은 오렌지 빛깔이었는데, 푸른 풀이 여기저기 자라나고 있었으며, 작업복과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쓴 빨래하는 여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시골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을 더 많이 담은 다른 풍경화도 그렸다. 그리고 역 근처의 플라터너스가 늘어선 거리도.
테오야, 내 오랜 친구야, 마치 내가 일본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이상 더 말을 하지 않으련다. 그렇지만 이토록 일상적인 찬란함에 쌓여 있는 걸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때문에--바로 지금 경비가 많이 들고 그림은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지만--나는 낙담하지 앟는다.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것들을 보며, 배우고 있다. 천천히 나아간다면, 내가 나아가는 걸 내 몸이 거부하진 않으리라. 내 그림이 내가 쓴 비용을 덮어줄 그런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내가 모든 걸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건 인정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아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너는 이곳에서의 내 경비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있지만, 내가 계속해서 지금 이 속도로 작업을 해나간다면 유지해 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걸 미리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자신에보다 물감과 캔버스에 더 많은 돈을 썼다. 포장 상자와 운송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생기는 즉시 습작들을 보내주도록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한 푼도 없다.
첫 번째 탁송물을, 적어도 캔버스 열 장은 넘을것이 분명한데, 보고어떤 생각을 할 지 상당히 궁금하구나.
너에게 물감 주문서를 보낸다. Tasset에서 주문을 할 거라면, 그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으므로, 적어도 운송비만큼의 할인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으리라. 그리고 또 Tasset 노인에게 캔버스를 진짜 최하 가격으로 줄 수 없는지 물어봐 주지 않을래?
물감과 캔버스를 잡화점 아니면 서점에서 구하고 있는데, 그 곳에는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갖추고 있지 않다. 이곳의 물감 상인은 나에게 흡수성 캔버스를 제작해 주고 있긴 하지만 작업 속도가 느리다. 흡수성 캔버스 한 장을 기다리는 동안 비흡수성 캔버스 두 장에다 그림을 그린다. 꽃이 피는 계절은 너무나도 빨리 끝나는데, 이런 종류의 소재는 누구에게나 기쁨을 안겨 준다.
그러나 네가 한 달이나 이 주 정도 형편이 나쁘다면, 나는 데생 작업에 착수할 수도 있다. 불필요하게 네 자신의 힘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너무나 그릴 것이 많다. 네가 원하는 곳이라도 아무데나 앉을 수가 없는 파리와는 경우가 다르다.
독립 화가 전시회에서 몽마르트 언덕을 그린 두 장의 커다란 풍경화를 전시하는 문제는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데로 해라. 나는 올해의 작품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리고 독립 화가 전시회를 위해서 네가 힘쓴 하나 하나에 고마움을 표한다.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지만, 앞으로 안내 책자에 내 이름은 내가 캔버스에 서명하는 대로, 그러니까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로 넣었으면 한다. 이유는 단순히 여기 사람들이 내 성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 지 모른다는 점이다.
쇠라를 구입한 걸 축하한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작품으로 쇠라와 다시 한 번 교환을 하도록 힘쓰야 한다. 러셀에게 편지를 쓸 때 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나와 작품을 하나 교환하자고 그에게 부탁할 것이다. 새로운 르네상스의 문제가 도래하는 데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하게 될 것이다. 로트렉은 카페의 작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 여인의 그림을 끝냈니?
그리고 빌어먹을 Tersteeg 씨는 너에게 편지를 썼니?
이 도시의 거리들이 흥분한 사람들로 가득차는 걸 보았는데, 정말 굉장한 광경이었다. 이곳 매춘굴의 문간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신문이 행해지고 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탈리아 인 두 명이 주아브 병 두 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내가 ‘des ricolettes’라고 불리는 작은 거리에 있는 매춘굴 중 한 곳으로 갔을 때 우연찮게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를 여인들 사이에서 내 연애의 모험은 그 정도이다.
주아브 병, 매춘굴, 첫 번째 성체 배령에 가는 사랑스러운 작은 아를 처녀들, 위험한 코뿔소처럼 보이는 미사복을 입고 있는 사제, 압상트를 마시는 사람들--이들 모두가 내게는 다른 세계의 창조물처럼 보인다. 이곳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냥 치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를 미술관은 끔찍스러우며 Tarascon에 있어야만 할 그런 것이다. 고 미술품 미술관도 있는데, 그것들은 알짜배기이다.
지금은 매일이 좋은 날이다--날씨가 좋다는 것은 아니다. 날씨는 오히려 그 반대로 하루 고요한 날이 있는가 하면 삼 일은 바람이 분다. 하지만 꽃이 핀 과수원에는 그럴 것이 있다! 바람 때문에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었으나, 땅에다 말뚝을 박은 뒤 이젤을 거기다 묶고 억지로 작업을 해나갔다.
과수원의 야외에서 캔버스에다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라일락 재배지, 갈대로 엮은 울타리, 거기다 환희에 찬 푸르고 흰 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장미 빛깔의 복숭아 나무 두 그루. 아마도 지금껏 내가 그린 풍경화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리라.
그걸 막 집으로 가져 왔을 때 나는 여동생으로부터 Mauve 매형의 부고장을 받았다. 뭔가가--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나를 사로잡았으며, 목이 울컥 매였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에다 썼다
Mauve 매형을 추모하며
빈센트와 테오
그리고 네가 괜찮다면, 우리 두 사람은 그걸 그대로, 사촌누님에게 보낼 것이다. 집에서 그걸 두고 뭐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는 Mauve 매형을 추모하는 모든 것은 온화하고 쾌활한 것이어야 하지 우중충한 그런 것이이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사람이 죽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아요.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한에는
죽은 사람은 살 거예요, 죽은 사람은 살 거에요.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그 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그러나 매형의 죽음은 나에게는 끔찍한 충격이었다.
Tersteeg 씨의 편지에 축하를 보낸다. 그 편지는 정말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상파 화가들의 주가가 오름과 동시에 현재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그림의 가치가 그 결과로 절하되는 것을 씨가 고려하고 있는지? 비싼 그림을 거래하는 화상들은 방침이라는 이유로 수 년 동안 밀레나 도비니, 그리고 그 밖의 대가들에 버금가는 기력과 끈기를 보여준 유파의 도래를 반대한 대가로 파멸하게 되리라.
Tersteeg 씨는 자신이 수집하기 위해서 몬티첼리의 좋은 작품을 구입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 씨에게 우리가 수중에 Dias가 그린 꽃 그림보다 더 뛰어나고 더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갖고 있다면 씨는 무어라고 할까? 몬티첼리는 때때로 하나의 패널 화판에 자신의 가장 풍부하고 가장 완벽하게 균형잡힌 색조의 전 범위를 함께 모은다는 구실로 많은 꽃그림을 제작하곤 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의 색채의 조화로운 편성에 대적할 만한 어떤 것을 발견하려면 막바로 들라크루아에게로 가야 할 거라고 한다면?
씨는 너에게 이렇게 썼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좀 보네게. 그러나 자네가 생각하기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림만 보내게.’ 그런데 네가 그 탁송물 중에 내 그림도 보냈으므로, 내가 실제로 Petit Boulevard의 진정한 인상파 화가이고, 또 내가 그렇게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걸 Tersteeg 씨에게 확신시키기에는 그다지 편안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보게 된다.
어쨌거나, 씨는 자신의 수집품 중에 내 그림을 갖게 될 것이다. 작고 노란 마차가 지나가는 도개교의 그림이다. Tersteeg 씨가 그 그림을 거부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믿어다오. 그 그림과 Mauve 매형에게 드리는 그림이 홀랜드에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우리가 홀랜드에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 헤이그에는 너무도 추억이 많이 있으므로, 헤이그에 있는 현대 미술관(Musee Moderne)에 뭔가를 기부한다면 어떨까? 독립 화가전에 전시되었던 몽마르트 언덕을 담은 두 장은 어떨까? 그리고 누이 동생 Wil에게도 습작을 한 장 주어야 한다. 지난 며칠 간 Mauve 매형, Weissenbruch, Tersteeg 씨, 그리고 어머니와 Wil을 생각해서 그런지 별 다른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감정이 상당히 고양되었으며, 계속해서 거기에 가야할 그림이 몇 장 있으리라고 혼자말을 하게 된다. 나중에는 그들을 잊어버리고 단지 Petit Boulevard만 생각하게 되리라.
이해가 끝날 때 쯤에 어떤 결과가 올지 자못 궁금하다. 그 쯤에는 병치레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현재 상당히 안 좋은 날들도 있지만 그것에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지난 겨울의 영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피가 다시금 잘 돌고 있는데, 그게 중요한 일이다.
이번 달은 너와 나 두 사람 모두에게 힘겨울 것이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돈 낭비는 아니기를 희망한다.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꽃이 피고 있는 과수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담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다. 나는 이제 제대로 시작을 했으며, 앞으로 열 점은 더 그려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네 장의 캔버스 중에서 한 장은 Tersteeg 씨와 Mauve 매형에게 보낸 것처럼 그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머지도 교환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 피사로가 언젠가는 우리와 교환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아침에는 수 천 개의 검은 가지를 지닌 누르스름한 흰 색의 플럼 나무 과수원에서 작업을 했다. 갑작스럽게 사나운 바람이 치솟아 올랐다가 간헐적으로 되돌아 왔는데, 내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그런 자연 현상이었다. 그 사이에 태양이 빛났으며 모든 작은 흰꽃들이 반짝거렸다.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며, 덴마크 친구도 와서 함께 합류했다. 그리고 매 순간 모든 것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질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생생한 초록빛이 깔린 작은 과수원에서 열지어 늘어서 살구 나무를 막 끝냈다--살구 나무들은 아주 연한 장미 빛깔이었다. 이 작품은 장미 빛깔을 띤 복숭아 나무들만큼이나 좋다. 장미 빛깔의 복숭아 나무들은 열정적으로 칠해 졌다는 걸 보게 되리라.
하지만 이처럼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 사람들은 무어라고 할까? 두고 보아야 겠지.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Tersteeg 씨가 갖게 될 ‘l'Anglais 다리’와 똑같은 그림에 착수했는데, 이건 너를 위한 것이다. 자연에서 취한 신선한 캔버스 습작을 보고 작업해나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팔릴 가능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Tesset 씨에게 그가 그것을 제라늄 레이크(주:짙은 다홍색 안료)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한 건 맞는 말이다. 내가 주문한 색깔 중에서 세 가지 크롬색(오렌지, 노랑, 레몬-노랑), 감청, 에메랄드, 진홍 레이크, 공작석 초록, 오렌지 납 등의 색깔의 한 가지도 Maris, Mauve 매형, Israels 등 Dutch 팔레트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들라크루아에게서만 발견되는데, 그는 가장 저주받은 두 가지 색, 레몬-노랑과 감청색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유행시킨 색깔들은 모두 불안정하므로, 그것들을 대담하고 아주 거칠게 사용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색깔들은 색조가 너무나도 잘 누그러뜨려지기 때문이다.
친하게 지내던 Tanguy 씨에게 물감을 주문하지 않은 게 미안하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오히려 그 반대이다--그는 정말 우스꽝스러운 늙은이이며, 나는 여러 번 그를 생각하곤 한다. 그를 보게 되거든 나를 대신해 안부를 전하는 걸 잊지 말아라. 그리고 진열대에 전시할 그림이 필요하다면, 내가 이곳에서, 최고의 작품으로만 보낼 거라는 것도 이야기를 해 주렴.
점점 더 사람이 모든 것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너 자신이 진정한 삶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게 언제나 우울한 생각이 들게 하지만--무슨 말이냐 하면 물감이나 석고보다 피와 살 그 자체로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으며, 그림을 그리거나 사업을 하는 것보다 아이을 낳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너 만큼이나 진정한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친구들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네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리라.
그렇다면 예술이나 예술가가 없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말하겠지. 일견 그건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리스인들과 프랑스인들과, 옛 Dutch인들이 예술을 받아들였으며, 어쩔 수 없는 쇠미의 시기 후에는 예술이 언제나 다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누구라도 예술가와 예술을 경멸한다고 해서 더 나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화가들에게 친절하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술적인 것은 없다는 걸 더욱 더 느끼게 된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하는 일이 무한을 지향하며, 그 작업이 절대절명의 원칙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본다면, 그는 보다 평정하게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는 그러한 평정심을 두 배로 누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업의 중심부에도 있으므로, 우리는 홀랜드에서 우정을 쌓아나가야만 한다. 아니 우정을 되살려야만 한다. 특히나 인상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승리할 거라는 것 외에는 아무 두려움도 없으므로 더욱 더 그렇다.
기 드 모파상이 쓴 ‘피에르와 장’을 반쯤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서문에서 그는 작가가 과장하고, 자신의 소설에서 실제 현실 보다 아름답고, 단순하며, 위안을 주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주창하고 있으며, 플로베르가 ‘재능은 오랜 인내이고, 독창성은 의지와 집중적인 관찰의 소산이다’라고 말했을 때 아마 이런 걸 의미하지 않았을까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색채와 디자인, 그리고--예술적인 생활에 대한 새로운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신념으로 작업을 한다면, 우리의 희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보여진다.
베르나르가 보낸 편지가 내 손에 들려 있는데 거기엔 그가 날조한 소넷도 몇 편 들어 있다. 그 중 몇 편은 정말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는 좋은 소넷을 써낼 것이다--나로서는 거의 질투가 나는 그런 재능이다.
네가 브뤼셀에 갔다 왔다는 건 중요한 소식이다. 이전에 고가로 거래되든 물건이 거기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내가 떠나기 전에 그 문제를 이야기 했으며, Bouguereau, Lefevre, Benjamin Constant 등 그 부류의 모두는 Boussod로 불평하러 가, 그들은 Boussod Valladon (세계에서 최고인) 회사가 사실 가장 문명화 되고 가장 매력적인 예술의 원칙들--바꾸어 말하자면, 자기 자신들의 그림들--에 진실되고 충실하게 남아주기를 기대한다고 주장할 거라는 데 동의를 했었다. 상당히 동요를 불러 일으키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이 신사들과 싸운다면 사정은 심각하리라. 사업이라는 건!
두 그림을 제작하고 있는데, 복제품을 만들고 싶다. 분홍빛 복숭아 나무는 내게는 가장 큰 골치거리이다. 나는 또 작은 배나무도 그리고 있는데--대지는 보라빛이고, 곧은 포플러와 아주 푸른 하늘이 그 위에있는 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무의 줄기는 보라빛이고, 꽃은 흰색이며, 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한 곳에는 커다란 노란 나비가 한 마리 있다. 이것은 수평으로 된 두 캔버스 사이에 수직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하면 꽃이 핀 과수원을 담은 여섯 개의 캔버스를 갖게 되는 셈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배열되도록 세 장 더 그리기를 감히 희망해 본다. 매일 그것드을 손질하여, 함께 걸릴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이제 너는 내가 너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꽃이 핀 나무들의 장식 계획을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경쾌한 프로방스 과수원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실백편 나무 위로 별이 빛나는 밤도 담아야만 하리라. 이곳에는 정말 멋진 밤들이 있다.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열병처럼 지속된다. 그 다음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데생을 해야만 한다. 일본 판화 양식으로 데생을 제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곳 공기는 분명 나에게 도움을 준다. 너의 폐도 이 공기로 채울 수 있다면 하고 바라 보기도 한다. 그것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 중의 하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브랜디를 작은 잔으로 한 잔만 마셔도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래서 내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서 흥분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캔버스들은 25호, 30십, 20호 짜리 들이어서 과수원 그림이 끝날 때는 무일푼이*** 되고 말리라. 두 배로 더 많이 제작해낼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너무 많이 제작해서는 안 되리라.
이곳에서 내가 제작하고 있는 작품들은 지난 봄 Asnieres에서 제작했던 것보다 더 낫다는 걸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에는 커다란 발전을 이루기를 바라며, 정말 그럴 필요가 있다. 이 과수원 그림들은 ‘l'Anglais 다리’와 함께 연작의 첫 작품들이 되리라. 그림들은 지금 말리기 위해 덮어둔 테라스 위에 있다.
Kahn이 한 말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명암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마 후면 아주 다른 말을 하게 되리라--그리고 그 말도 마찬가지로 맞는 말이리라.
명암과 색채를 동시에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Th. 루소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걸 잘했지만, 색깔을 섞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둠이 증가해서, 그의 그림은 이제 분별할 수가 없다. 극지방과 적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너도 너의 노선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색채이리라.
너에게 작은 펜과 잉크 데생 두루말이를 방금 부쳤다--열두 장이 아닌가 한다. 이 데생들은 갈대를 거위깃털을 뾰족하게 하는 방식으로 뾰족하게 해서 그렸다. 이걸로 뭘해야 하는 지 알고 있겠지--여섯 장, 혹은 열장, 아니면 열두 장으로 일본의 고유한 화첩처럼 스케치북을 만들어라. 이런 화첩을 만들어서 고갱에게 주고 싶다. 또 하나는 베르나르에게.
Boussod Valladon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상주의가 아직 충분히 인지되지 않았다는 표식이다. 나는 즉시 그림을 중단했다. 이 사람들과 분쟁을 하기 위해서는 네가 내 때문에 쓰야만 하는 돈이 적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유화를 그림으로서 야기되는 비용보다 적은 비용으로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Valladon 무리가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네가 ‘결딴’이 나지는 않을까 때로는 심히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싸워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먼저 네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일 년의 휴가를 주는데 동의한다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와 함께 미국으로 가는 걸 바라니? 하지만 나는 네가 이 사람들의 소유물인 비싼 그림을 들고 다니며 여행을 하는 그런 삷을 살아가는 것보다, 구필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다루는 걸 더 보고 싶다.
데생 중에서 노란 화지에 마을로 들어오면 맞닥뜨리게 되는 광장의 풀밭과 뒷편의 건물을 서둘러 스케치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이 건물의 오른쪽 부분을 세내었는데, 방이 네 개다--아니 방 두 개에다, 반침이 두 개 딸려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바깥은 노란 색으로 칠해 졌고, 안쪽은 회칠을 한 상태이다. 한 달에 십오 프랑을 주기로 하고 세를 내었다.
여러 가지 짜증나는 일이 많이 있는데 내가 있는 호텔에 머무는 한에는 피할 수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내가 그림 때문에 다른 투숙객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핑계로 모든 걸 더 비싸게 부른다.
내 생각은 이 집의 방 하나를 꾸며서, 일 층에 있는 걸로, 잠은 거기서 자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화실은 이곳 남쪽에서의 내 작품 활동에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관 주인의 온갖 속임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파멸시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한 달에 백오십 프랑 이상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현재로서는 그럴 수가 없지만, 두 달 안에 자리를 잡고 영구적인 화실을 갖게 되리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화가를 들일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이방인을 마구 갈취하는데, 이곳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옳다. 울궈낼 수 있는 한 많이 울궈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하는데, 마르세유로 간다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니? 이곳에서 꽃이 피는 과수원 연작을 그린 것처럼, 그곳에서는 바다 풍경 연작을 할 수 있으며, 마르세유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을 전시할 진열창을 확보하는 일에 힘을 쏟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지금부터 주소는 아래와 같다.
Lamartine 2번지
확고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을 하기 까지는 상당한 고뇌가 뒤따랐다. 헤이그와 누에넨에서 화실을 가지려고 시도를 한 걸 상기했기 때문인데, 얼마나 결과가 안 좋았는지. 이번에는 일이 술술 풀려나가기를 바란다. ***--바깥은 노란색, 안쪽은 흰색, 밝은 실내에서 캔버스를볼 수 있도록 햇빛이 잘 들어오게 하고. 바닥은 붉은 벽돌, 바깥은 광장의 뜰.
변소가 옆 건물, 같은 주인 소유의 꽤 큰 호텔에 있다는 게 너에겐 우스꽝그럽게 들릴 것이다. 이 남쪽 마을에서는 나로서는 불평할 권리가 없다고 느낀다. 이러한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며--게다가 더럽다. 세균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반대편에 있는 뜰이다.
집을 수리하고 가구를 들여놓고 하는 건 연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리라. 여름에 이곳에 콜레라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시골로 자리를 옮길 작정이기 때문에 특히 더 그렇다. 현재로서는 거기에 가서 자는 것이다. 어제 가구점에 들러서 침대를 빌릴 수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안타깝게도 침대를 세 놓지는 않으며, 할부로 파는 것조차도 거절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간단히 담요와 매트리스를 구해서 화실 바닥에 침대를 만드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름 동안에는 찜통 더위가 계속될 테니까 이것만 해도 충분하고 남으리라. 벽에다 일본 작품들을 몇 점 걸어둘 생각이다.
베르나르가 보낸 편지를 막 받았는데 그도 집 전체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도 무료로 갖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운좋은 일이다.
내 앞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힘겨울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때로는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되는 건 아닌가 묻곤 한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내가 육체적으로 허약한 순간이며, 지난 주에는 격심한 치통 때문에 내 뜻과는 정반대로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내 이 빌어먹을 건강만 아니라면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이곳 포도주는 질이 나쁘다. 그러나 나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의 먹지도 않고, 거의 마시지도 않아서 내 몸이 상당히 약해지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정말 훌륭한 수프를 먹을 수만 있다면 곧바로 나는 좋아질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곳 사람들로부터는 내가 주문한 것을, 아주 간단한 것조차도,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감자를 요리하는 건 어렵지 않겠죠?
불가능합니다.
그럼 라이스 종류는요, 아니면 마카로니라도?
다 떨어지고 없거나, 아니면 기름 투성이거나, 아니면 오늘은 그걸 요리를 하지 않지만 내일은 할 거라고 설명하거나, 레인지에 얹을 자리가 없다거나, 이런 저런 핑계 투성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내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는 새 화실을 다른 사람과 기꺼이 나누어 쓸 수 있으며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면 집에서 요리를 할 수 있으리라.
어쨌거나 화실은 liaison으로*** 끝나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공개적이다. 이곳의 도덕은 파리보다는 덜 비인간적이고, 자연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기질 상 술을 마시고 즐겁게 놀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가 없으며, 현재 상황에서는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건 진정한 삶은 결단코 아니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니? 그리고 정말이지 우리가 진정한 살은 아니라고 보는 이 예술가의 삶은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을 하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으로 여겨진다.
파리를 떠났을 때 나는 금시라도 발병할 듯 했다.***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술을 그만두고, 담배도 많이 줄이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대신에 생각을 다시 시작했을 때--하느님 맙소사, 그 우울감과 의기 소침함이란! 이 장엄한 자연 환경 속에서 작업을 하는 가운데 내 사기는 많이 진작 되었지만, 지금도 어떤 일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겹다.
불쌍한 동생아, 우리의 노이로제는 우리의 너무나도 예술가적인 생활 방식에서 나온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또한 치명적인 유전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 뿌리가 먼 과거에까지 이어지는 노이로제로 고통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에 속한다는 걸 시인해야만 한다.
나는 종종 Gruby 의사를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대한 그의 진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가장 현명한 방편은 잘 먹고, 잘 자고, 여자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그의 입을 굳게 다물고 ‘여자는 안 돼요’라고 할 때의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겠니? 그 모습은 드가의 멋진 그림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네가 하루 종일 네 머리로 계산하고, 이것저것 따지고, 계획을 세우며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네 신경이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해나가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대답이 없다.***간단히 말해, 마치 개인이 이미 뇌 질환이나 척추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전에 그렇게 사는 것이 소뿔을 잡듯 정면으로 대응해 나가는 방법이리라. 드가가 그런 식으로 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긴 하지만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끔찍스럽게 힘겹다고 느끼지 않느냐? 그래도 유쾌한 골(Gaul) 인의 기질을 지닌 위대한 낙천주의자이며 너의 자존심을 세워주는Pangloss의 현명한 충고에 귀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별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네가 Gruby를 찾아갔다는 소식은 나를 침울케 함과 동시에, 네가 갔다는 사실에 다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좋아 지려고 노력을 해라. 나는 대부분의 것에 무관심하지만, 이 문제는 그럴 수 없다. 사랑하는 동생아, 그리고 죽음은 때가 되어야 찾아 온다는 이슬람 식 사고에 대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결정권이 행사되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건강 규칙을 따르는 것이 생명을 연장시켜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보다 평온하고 맑은 흐름으로 만들어 준다는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해 네가 네 자신을 죽여가는 걸 보느니 차라리 기꺼이 그림을 집어치고 말거라는 걸 깨닫고 있느냐? ‘죽음을 준비하라’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독교 사상은 (다행스럽게도 예수님 자신은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적 사상의 흔적이 없는 듯하다. 그 분을 약간 미쳤다고 생각할 뿐인 족속들에 따르면 그는 사람과 사물을 우리가 잴 수 없는 척도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질 없다--마찬가지로 자기 희생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살을 포함한다면 실수라는 걸 모르겠니? 그 경우 너는 실제로 너의 친구들을 살인자로 만든다.
따라서 네가 아무런 마음의 평화도 없이 여행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내 자신도 마음 편히 지내고자 하는 욕구는 전혀 없다. 네가 이 제안에 동의한다면, 좋다--하지만 구필 회랑에 내 옛 봉급 그대로 나를 다시 채용해, 이 여행에 너와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라. 사람이 사물보다는 더 중요하며, 그림 때문에 더 많은 곤란을 겪으면 겪을수록, 나는 더 많은 그림들 그 자체에는 냉담해 지고 만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들 가운데 있기 위해서 이다.
네가 지금 현재 단지 일 년만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보낼 수 있다면, Gruby의 치료를 훨씬 더 쉽게 해 주리라. 네 가까이에 Dutch인 보다 꾸밈이 없고 따뜻하여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Koning은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나으나, 너에게 프랑스 인들 중에서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남쪽 지방에서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일과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나는 우울하게 되고 말리라. 네가 머무르고 있는 곳의 일이 흥미롭고, 인상파 화가들이 주목을 끌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좋은 일이겠지. 외로움과, 걱정, 어려움, 친절과 공감을 향한 만족되지 않은 욕구--이것들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실망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은 방탕보다도 우리를 더 손상시킨다--내가 우리라고 한 것은 우리 자신은 쓰러져가는 가슴의 행복한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좀 나은 식당을 발견했는데, 일 프랑에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즉시 나타나고 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졌다--피도 제대로 돌고 위도 음식을 받아들인다. 내 몸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은 것은 주로 나쁜 음식 때문이었으며, 포도주는 완전히 독약이었다.
이곳에서는 현재 바람과 미스트랄이 엄청나게 불고 있다. 나흘에 삼일 꼴로, 해는 빛나고 있지만 야외에서 작업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은 데생을 열두 장 정도 해서, 너에게 부쳤다.
러셀의 친구인 맥나이트가 나를 찾아 왔다. 나도 그를 찾아가 그의 작품을 볼까 한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하나도 보지 않았다. 그는 양키이다. 대부분의 양키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화가이겠지만, 양키는 누구나 다 똑같다. 그리고 러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는 Guillaumin을 한 장, 베르나르의 작품을 두세 장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상당히 기쁘게 한 것은 그가 습작품을 교환하자는 제안도 했다는 거다.
이곳에서 초상화를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방면으로 감히 시작을 하기 전에 먼저 신경이 좀 더 안정이 되고, 자리를 잡아야 하리라. 그래야 사람들을 화실로 불러 올 수가 있을 테니까.
이곳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그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하지만, 자기 자신의 꾸밈새나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북쪽 지방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술적이다. 이곳에서 나는 고야나 Velasquez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들을 보았으며, 검정 원피스에 장미를 꽂거나, 흰색, 노랑, 장미빛, 혹은 녹색과 장미빛, 혹은 파랑과 노랑 등의 색깔로 의복을 재단하는데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바꿀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이다. 사람들이 현대식 복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쇠라라면 이곳에서 그림같은 남자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오래된 거리에, 불결한 마을이다. 아를 여인들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정말 그렇다--그들은 쇠락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그런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아름다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다소 따분하고 진부한 로마 스타일의 유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인물은!
Fragonard와 르누아르의 작품에 나오는 듯한 여인들이 있으며, 몇몇은 지금까지 그려진 어떤 그림으로도 표찰을 붙일 수가 없다. 해야할 일은 여인들과 아이들의 온갖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내가 그 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일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친구(M. Bel Ami)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에 있어서 기 드 모파상 같은 이가 가벼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이곳에 있는 것들으 그려준다면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올 이 화가가, 내가 현재 그러고 있듯이 작은 카페에 살면서, 의치를 드러내며 작업을 하고, 주아브 병의 매춘굴로 간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나는 계속해서 작업을 해나갈 것이며 내 작품 가운데에는 여기 저기 앞으로 살아남을 작품이 있으리라. 나중에 이 사랑스런 고장에서 다른 예술가가 자라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장을 그림에 담았듯이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내가 언제까지나 이 고장을 사랑할 거라는 건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곳은 일본 그림과 흡사하다. 일단 사랑하게 되면, 결코 등을 돌릴 수가 없다. 이곳의 자연은 색채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런 것이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미래의 화가는 아직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색채화가이리라. 마네가 그것을 향해 작업을 했으나, 인상파 화가들은 이미 마네보다 강렬한 색채를 얻어 내었다. 우리는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그 목적을 향해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는다.
드가의 작품을 팔았다니 기쁘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중에서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게 되리라. 클로드 모네의 풍경화에 비견할 만한 인물화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너는 내가 보내는 것들이 그와는 대조적으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재 나는 내 자신에 불만족스럽고, 내가 하는 일이 불만족스럽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더 잘 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있다.
호텔의 밀린 계산을 하려다가 내가 얼마나 사기를 당했는가 하는 또 다른 증거를 잡게 되었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려 했는데, 그들은 듣지 않았고, 내 물건들을 가져 가려 하자, 그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빚진 사십 프랑이 아니라 오십칠 프랑 사십 상팀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영수증에다, 내가 이 금액을 지불한 것은 내 소유물을 되찾기 위해서 일 뿐이며, 이 부당한 계산서는 행정관에게 제출되어야 한다고 명기했다. 금액을 삭감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지만, 내가 이길 수 있을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매트리스를 사지도 못하고, 다른 호텔을 찾아가서 자야 한다. 매트리스를 살 충분한 돈을 네가 부쳐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건 정말 성가신 일로, 작업을 하는데 상당할 정도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날씨는 현재 멋지다. 이 화실을 좀 더 빨리 얻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서 갈취한 그 여분의 돈이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가구 등속을 들여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정이 나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처음에 나는 얼마 동안 전적으로 일에 몰두했다. 그 다음에는 너무 지치고 몸이 아파서,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몸이 아파고 해서 더 좋은 포도주를 부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좀 더 지불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때를 기준으로 이 계산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나에게는 거의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집에서 커피와 수프를 약간 만들 재료를 구입했으며, 의자 두 개와 탁자 하나, 튼튼한 아마포 셔츠 세 벌과 질긴 구두 두 켤레도 샀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지금쯤은 불운에다 내 몫의 경우는 충분히 표하지 않았는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는 것보다 처음에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연말 쯤이면 나는 다른 인간이 되어 있으리라. 나 자신의 집과 내 건강을 회복시켜 줄 평화를 갖게 되리라. 이젤에다 새로운 캔버스를 몇 장 곧 얹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열심히 작업을 하고도 그 이익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들 손에 들어간다는 것이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상자에다 부셔버린 몇 장을 제외하고는 내가 갖고 있는 습작을 모두 너에게 부친다. 하지만 모든 그림에 사인을 하지는 않는다. 틀(stretcher)에서 떼어낸 것이 열두 장 있고, 열네 장은 틀에 있다.
상자에서 네가 먼저 발견하게 될 것은 내가 Mauve 매형과 Tersteeg 씨를 위해 그린 그림들이다. 그 와중에 Tersteeg 씨가 그림을 받고 모욕감을 느낄 것이라거나, 씨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네가 도달했다면, 그걸 그냥 네가 갖도록 해라. 헌사를 긁어내고, 다른 작품과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그림들 중에서 네가 보기에 씨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그림을 발견하게 되면, 헌사 없이 그걸 끼워넣을 수 있으리라. 씨에게는 아무런 헌사 없이 그림을 드리는 것이 아마 더 나으리라. 내가 보내는 것은 아무것도 씨가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게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척 하면서 아무 말 없이 되돌려 보낼 수 있으리라. 내가 씨에게 작품을 보내는 것은 내가 이 운동에 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그걸 받아들인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잘 된 그림을 한 쪽에 놓고, 이 그림들이 내가 보내는 지불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내가 너에게 만 프랑 정도 안겨줄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더욱 행복하리라. 이번 탁송물에는 장미빛 과수원, 흰 과수원, 다리가 있다. 이 세 작품은 네 자신의 수집품으로 따로 빼놓고 팔지 말아라. 나중에는 각각 오백 프랑은 나갈 것이니까.
인상주의 그림의 주가가 올라갈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면, 그런 류의 그림을 많이 그려야만 한다.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작품의 질에 조용히 집중하여야 하리라. 몇 년간의 작업이 끝날 때면 우리는 과거를 어느 정도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그렇게 되기까지는 거리가 멀지만, 나는 이 환경 속에 좋은 작품을 그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내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내 자신의 잘못이리라.
액자에 관해 몇 마디 부치자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다리를 담은 두 작품은 사람들이 감청색(royal blue)이라고 하는 진청색에, 흰 과수원은 순백색 액자에, 장미빛 과수원은 다소 따뜻한 크림빛을 띤 흰색 액자에 넣으면 잘 어울릴 것이다.
흰색, 붉은색, 초록색의 오두막과 그 곁에 삼나무가 한 그루 있는 작은 풍경화가 하나 있는데, 나는 그 그림 전체를 집에서 그렸다. 틀이 없는 커다란 습작과, 점묘법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틀에 있는 다른 작품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구성은 삼나무로 둘러 싸인 이곳의 커다란 과수원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므로, 한 작품은 너무 부드럽고 다른 작품은 너무 거칠다는 생각만 들어서 유감이다.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었으며, 나는 하룻동안에 한 지역을 엉터리 없이 많이 먹어치워버리려는 러시아 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보낸 것인 Tersteeg 씨가 파리에 오기 전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보낸 것에 대해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 중에 정말로 너무 나쁜 작푸밍 있으면, 보여 주지 말아라.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덴마크 친구가, 화요일에 파리로 떠나는데, 너에게 그림을 두 장 줄 것이다. 그걸 Asnieres에 있는 la Comtesse de la Boissiere 부인에게 주고 싶구나. 부인은 볼테르 가에 머물고 있다. 그걸 나 대신에 직접 좀 갖다 주면서, 여기에서도 나는 부인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이번 봄에는 다시 보게 되기를 기대했었다고 말해줄 수 있겠니? 나는 작년에 그 분들에게--부인과 따님에게--작은 작품 두 장을 드렸다. 이 숙녀들을 알게된 걸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가족이니까.***
어제 오늘 다시 미스트랄이 불어왔다. 이번 주에는 정물화를 두 점 그렸다.
첫 번째 것은 왼 편에 푸른 에나멜 색의 커피포트, 감청색과 황금색의 커피 잔, 연푸른 색과 흰색이 체크 무늬를 이루고 있는 우유 잔이 놓여 있고, 오른 편에는 푸른색과 오렌지색 패턴을 이루고 있는 잔이 잿빛-노랑의 도기 받침 위에 얹혀 있으며, 빨강, 녹색, 갈색 문양에다 푸른 색을 띤 토기 물병, 즉 마욜리카 도자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오렌지 두 개와 레몬 세 개. 탁자는 푸른 천으로 덮여 있으며, 뒷배경은 노랑에다 녹색을 가미하였다. 따라서 여섯 가지 다른 푸른 색이 사용되었으며, 노랑과 오렌지 색도 네다섯 가지 사용되었다. 이 캔버스는 다른 모든 캔서스를 죽여 버린다. 단지 정물화에 지나지 않지만, 이 그림은 혼자서도 두드러 진다--데생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른 정물화는 야생화를 꽃은 마욜리카 물병이다.
그 그림은 어제 Fontvieille에 있는 McKnight 집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훌륭한 파스텔 화 한 점과 수채화 두 점을 시작했으며, 거기다 목탄으로 나이든 여인의 두상을 작업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색채 이론들이 그를 성가시게 하는 그런 단계에 있다. 이 이론들은 그가 옛날 방식으로 작업하지 못하게 막지만, 이 그림들을 성공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팔레트에 충분히 익숙해 지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걸 아주 쑥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Tartarin’의 아랍 유태인이 ‘평화의 Zuage’라 부르는 신사를 보러 갔었다.
십이 프랑을 돌려 받았으며, 여관 주인은 내 짐을 내주지 않을 것 때문에 질책을 받았다. 그가 이 번 사건에서 승소했으면, 여기저기에다 내가 지불할 수 없었다고 떠들고 다녔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으리라. 지금은 반면에 자기가 자제력을 잠시 상실했으며 나를 모욕할 의도는 없었다고 한다. 내가 그의 초라한 호텔에 있을 만큼 있었고, 더 이상 나를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걸 보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을 해 본다. 그 일은 이 정도로 그만 하자. 어찌되었거나 나는 내 자신이 관광을 나온 외국인이 아니라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사취당하는 걸 그대로 둔다는 건 나로서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가구점 주인과는 아직 흥정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침대를 하나 봐두긴 했는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비쌌다. 가구에다 돈을 더 쓰기 전에 좀 더 일을 마무리해야 겠다. 린넨이 너무 부족해서 린넨을 좀 더 구입했다.
습작을 두 장 새로 했다. 옥수수밭 사이에 있는 큰 길 가의 농장과, 진노랑 미나리아재비가 온통 여기저기 피어있는 목초지, 초록 잎에다 자주빛 꽃이 핀 붓꽃이 핀 도랑, 뒷배경으로는 마을이 보이고, 잿빛 버드나무 몇 그루, 거기다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는 모습. 목초지의 풀을 베지 않았다면 이 습작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 소재가 어주 아름다운데다가 구성을 제대로 하는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노랑과 자주색 꽃으로 온통 뒤덮인 시골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 정말--상상이 되니?--일본인이 꿈꾸워 오던 그런 마을이다.
다리를 하나 더, 그리고 큰 길의 옆부분도 담아 보았다. 이곳에 있는 대상 중 많은 것이 그 성격상 홀랜드에 있는 것들과 그대로 빼박은 듯하다. 단지 그 차이점은 색채에 있다. 태양이 빛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그 유황 노랑색이 있다. 소재를 많이 발견했다는 건 뭔가 의미있는 일이리라--그림이 들어간 비용만큼의 값어치가 있다면.
우리는 장미 정원을 담은 르누아르의 굉장히 훌륭한 그림을 보았었지. 나는 이곳에서 그런 소재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수원에 꽃이 피는 동안에는 그랬다. 이제 사물의 외양은 바뀌었으며 훨씬 거칠게 되었다. 하지만 초록과 파랑색은! 세잔의 몇몇 풍경화들은 그럴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요전 날 포플라가 담긴 Monticelli의 사랑스러운 풍경화를 그대로 빼닮은 풍경을 보았다.
오늘은 강풍이 불고 비가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도움이 되리라. 내일은 새로운 소재를 찾으러 나서 보아야 겠다.
조금씩 조금씩 내 피가 빨리 돔에 따라 성공을 향한 생각도 빨라진다. 내가 제거해나가고 있는 건 정확히 말해 혼미한 느낌이다. 기분 전환할 필요를 그다지 못 느끼며, 열정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줄어 들었으며, 좀 더 차분히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다. 사물을 보는 방식이 더 슬퍼졌다기 보다는 더 원숙(older)해 짐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고, 거기에 머물 것이며, 이따금씩 예술가의 삶에 만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그게 무엇이냐 하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진짜 삶에 대한 향수어린 동경. 그리고 때로는 예술에 자신의 가슴과 영혼을 소진시켜, 그 대가로 좋아지리라는 어떤 욕구도 사그라들고 만다. 자신이 삯마차의 말이며, 다시 묶이게 될 마차가 늘 몰던 그 마차라는 걸 알고 있다. 태양이 빛나는 강 옆의 목초지에서, 다른 말들과 어울려, 그 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저 밑바닥까지 파헤쳐 본다면, 심장 질환은 그것으로부터 온다. 뭐 그게 나를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사물에 대해 반항하지도 않으면, 그것에 처념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것 때문에 아프게 되고 나아지지도 않지만, 치료법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누가 이런 상황을 죽음과 불멸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끄는 삯마차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얼마간 유용할 것이 틀림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미술과, 미래의 화가들에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신뢰가 우리를 속이지는 않는다. 훌륭한 코로가 죽기 며칠 전에 ‘지난 밤 나는 꿈에서 장미빛 일색인 하늘의 풍경을 보았다’라고 말했을 때--그 장면, 장미빛, 거기에 덧붙여 노랑과 초록 하늘이 인상파 화가의 풍경화에 도래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은 도래하리라고 느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도래했다는 걸 의미한다.
죽음에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은 우리를, 내 생각에는, 두고 보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이 우리보다 더 크며, 우리보다 수명이 더 오래갈 거라는 걸 느낀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예술가의 계보에 연결 고리가 되기 위해, 우리는 건강과 젊음과 자유 등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봄날을 즐기기 위해 야외로 나가는 마차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끌고 가는 삯마차의 말처럼, 아무런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
미래의 예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너무나 젊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위해 우리의 젊음을 바친다해도, 우리는 평정심 가운데 그것으로 뭔가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걸 이렇게 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나처럼 너도 네 젊음이 한 줌의 연기처럼 지나가는 걸 보아야 하는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가 하는 일 가운데 그것이 다시 샘솟고 생명력을 얻게 된다면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은 없으며, 일을 하고자 하는 힘은 또다른 젊음이다.
이곳에다 파리의 불쌍한 삯마차 말들--그건 너와 우리의 몇몇 친구들, 불쌍한 인상파 화가들--이 완전히 찌들었을 때 풀밭으로 나가 쉴 수 있는 일종의 작은 휴양소 같은 곳을 얻고 싶다.
고갱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았는데, 너에게서 오십 프랑을 동봉한 편지를 받고는 상당히 감동했다고 말하는 구나. 그는 아주 낙심한 듯하다.
그가 Martinique에 있을 때 친구 Laval과 함께 지냈는 데 두 사람이 따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꾸려나갔다는 걸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는 데서 오는 이점에 대해서 기꺼이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판매해 줄 화상을 얻는 데 필요한 자본금을 구할 수 있을 듯한 희망을 이야기 한다. 이 희망이 궁핍에 따른 모르가너 요정(Fata Morgana: 역주: 아서 왕의 누이 동생. 여기서는 신기루의 뜻)에 지나지 않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나 자신으로서는 현재 고개이 가지고 있는 가장 견실한 재산은 그의 그림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사업은--자신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가 결성될 수 있으며,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기운차게 생활하며 제작을 하고, 손해뿐만 아니라 이익도 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우리가 화가들의 연합을 이야기 하던 지난 겨울의 논쟁을 지속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여전히 그것에 대해 상당한 욕구를 가지고 있거나 그걸 실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던 문제이므로 그 기반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고갱과 담당 은행원이 내일 나에게 와서 화상 공동체를 위해 그림 열 점만 달라고 요청한다면, 그걸 선뜻 내어줄 수 있을 지는 정말 모르겠다. 반면에 화가 공동체에는 기꺼이 오십 점을 내놓을 것이다.
예술가를 위한 예술, 이건 엄청난 혁명이다. 오 하느닌! 아마도 그건 유토피아이리라--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사정이 훨씬 더 나쁠 수 밖에 없다. 인생은 너무나 짧고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그럼에도 화가라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고갱이 브르타뉴에 가는 경비를 네가 댈수 없으며, 또 내가 프로방스 지방으로 들어가는데 드는 비용을 네가 댈수는 없지만, 우리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리고 매달 내 작품에 덧붙여서 고갱의 작품을 받게 된다면 액수를 정해둘 수도 있으리라--매달 이백 오십 프랑이면 어떨까?
고갱을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 되리라. 그리고 그를 돕는 일은 장기간의 사업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작품을 몇 점 파는 것은 나에게도 고갱에게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꾸준한 가치를 지니게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겠지만, 나는 고갱과 다른 화가들의 승리를 믿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는 낙담하여 Meryon처럼 파멸하고 말 지도 모른다. 그가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좋지 않다--그는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고갱이 이곳으로 온다면 호텔 비용, 여행 경비뿐만 아니라, 의사 진료비도 처리해야 하므로 상당히 힘겨우리라. 그리고 침대 두 개 아니면 매트리스 두 개는 꼭 사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동의를 한다면, 그리고 넘어서야 할 어려움이 이사뿐이라면, 그를 거기에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나으리라.
내 생각엔 빚은 통채로 그냥 두고 그림을 몇 장 담보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파리에 갈 때 똑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걸 잃어버리긴 했지만,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루하루 허약해 지는 것보다는, 어찌 되었든 간에,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낫다. 이젤에 캔버스가 두 개나 걸려 있어서 시간이 거의 없지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가 우리가 시도하려는 동맹을 안다면 고갱에게서 뭔가를 살 지도 모르겠다. 러셀이 아무것도 사지 않은 것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사라고 자꾸 압박하는 것은, 그가 사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갱이 그동안 아팠으므로 이 모든 게 우리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 해주었다.
고갱이 어떻게 할 지 궁금하기 짝이 없으나, 그에게 오라고 설득하거나 하는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시 사업에 뛰어들기를 원하고, 파리에서 뭔가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어야 하리라. 나는 어느 누구라로 족쇄를 채우기를 원치 않으며, 그가 그런 무리수를 갈망한다 해도 그를 막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가족을 다시 떠맡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이득이 나는 뭔가를 가져오려 애쓰는 것은 그의 의무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놈의 빌어먹을 여행이다. 그를 설득해서 이곳에 오도록 한다해도, 나중에 이곳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수렁 속에 빠진 격이 되고 만다.
요컨대 Tersteeg 씨의 방문이 내가 감히 기대했던 전부는 아니었으며, 씨의 협력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잘못된 계산을 했다는 걸 감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고갱과의 이 일도 아마 그럴 수 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자. 그는 벼랑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나은 작품을 그리는 이 사내는 돈이 한 푼도 없는데, 나는 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거리끼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러나 그가 큰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면, 나는 그다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항상 화가들이 혼자 생활하는 건 백치 같은 짓거리라고 생각해 왔으며, 내 자신에 이다지도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나를 근심하게 한다.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 있는 여자를 찾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다. 아니면 나와 합류해 그림을 그릴 사내를 구하는 거다. 여자는 찾을 수 없지만, 사내들은 보인다. 내 개인적인 소망은 다른 사람들의 종속되며, 다른 누군가가 내가 쓰는 돈으로 이익을 얻으리라. 여분의 작품을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너는 한 사람 대신에 두세 사람이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만족감을 누리게 되리라.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시초가 되리라. 이 남쪽 지방으로 오게될 베르나르도 역시 우리와 합류하리라. 나는 진정으로 네가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선봉장으로 나서는 걸 볼 수 있다. 그들을 함께 모으는데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 모두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걸 보아야 한다. 고갱은 선원들이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닻을 올릴 때, 기력을 돋구고 생기를 주기 위해 모두 함께 노래를 한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그런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이 점이다. 친구처럼 지낼 누군가를 구할 때,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나나 동생에게 이익이 될까? 그리고 이 다른 친구는 그렇게 해서 손해를 볼까 아니면 이익을 얻을까? 머리 속엔 이런 문제가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이 문제들이 사실이 되려면 실지로 나타나야만 한다.****
고갱이 아프다는 사실에 내가 낙담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도 고갱을 돕기를 원한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걸 제안할 도리가 없으며,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도 하려 하지 않으리라.
먼저 네가 고갱의 작품을 구입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리라. 고갱에게 준 돈의 교환의 대가로 우리는 그의 그림을 현재 가격으로 구입한다면, 돈을 손해볼 위험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이렇게 쪼들리지 않을 때가 오리라. 작품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므로, 조만간 한 달에 한 두 작품을 팔 게 되리라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다짐하기도 한다.
나는 ‘비타협(L'Intransigeant)’ 지에서 Durand Ruel에서 인상파 화가 전시회가 있을 거라는 공고를 읽었다--거기에 놀랄 만한 작품이 전시되리라는 건 분명하다.
네 화랑에서 모네 전시회를 개최한 걸 축하한다. 그걸 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구나. 그걸 못 본 걸 위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여기저기 다니며 자연에서 많은 것을 봄으로써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는 것이다. 모네가 이월에서 오월 사이게 그 열 점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빨리 작업을 하는 것이 보다 덜 진지한 작품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건 개인의 자신감과 경험에 달려 있다.
이 전시회를 보는 게 Tersteeg 씨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씨도 언젠가는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만, 너도 생각했다시피, 그 때는 너무 늦으리라. 씨가 졸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정녕 이상한 일이다. 한 때는 졸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듣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너와 씨가 사업 면에서 이제는 예전처럼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건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숙명이라고 부르는 그런 거라고 느껴진다.
Bing이 일본화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읽었다. 때로는 일본 판화를 한 번 더 많이 확보할 수 없다는 게 나를 심란하게 한다. 내가 진짜로 빚지고 있는 것은 단지 Bing에게 뿐이다. 아직도 나는 구십 프랑 값어치의 일본 그림을 위탁으로 갖고 잇다.
오늘은 이곳에서 물감과 캔버스를 좀 구입했다. 현재 날씨로 보아 작업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화창하고 뜨거운 날씨다. Mont-Majour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 왔는데, 이곳에서 사귄 소위도 나와 동행했다. 우리는 오래된 정원을 함께 탐색하고 멋진 무화과를 몇 개 서리했다. 정원이 좀 더 컸더라면 졸라의 Paradou를 떠올렸으리라--초록 갈대, 포도나무, 담쟁이, 무화과 나무, 올리브, 눈부신 오렌지 빛의 싱싱한 꽃을 달고있는 석류, 백 년 묵은 삼남, 반 쯤 부서져 버린 층계, 망가지 첨정 홍예 유리창.
어느 날 저녁 해가 붉게 지는 걸 보았다. 바위 더미 사이에서 자라는 소나무 줄기와 잎 위에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줄기와 잎은 오렌지색 불꽃으로 물들어, 정말 멋있는 장면이었다.
하루는 또 Tarascon 쪽으로 갔는데, 안타깝게도 태양만 밝게 빛나고 먼지가 너무 많아 빈 가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곳에서 나는 매우 아름답고 흥미로운 소재를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있으며, 경비에 따른 근심에도 불구하고 북쪽 지방보다는 남쪽 지방이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도데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남국의 명랑함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미적지근한 대기와 얌전함, 그리고 다소 불결한 일상성 등을 본다. 하지만 이 지방은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꽃이 드물다는 점이다. 밀밭에서 수레국화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 양귀비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새로운 소재에 손을 대고 있다. 눈이 닿는 한도내에서는 녹색과 노랑뿐인 들판이다. 이미 두 번 그걸 그렸는데, 다시 유화로 그걸 시작하고 있다. Philip de Koninck--렘브란트의 제자로 광활한 평원을 그렸다--의 그림에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오늘은 우편으로 데생을 세 장 보냈다. 농가의 건초가리를 그린 것은 너무 기괴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림에 이용하기 위해 급히 서둘러 그렸다. ‘수확’는 오히려 진지한 작품이며, 이번 주에 삼십 장의 캔버스에다 작업을 한 그런 소재이다. 이 그림은 전에 이야기한 그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걸 무색케 할 정도이고, 내 화실에 바닥에 깔린 붉은, 아주 붉은 벽돌 색깔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림을 바닥에 놓았을 때, 그림의 색깔이 공허해 지거나 탈색되지 않았다.
좀 더 자연스럽게 데생을 하게 되었으면 한다. 현재는 본질을 과장하고, 정해진 목적에 따라 명백한 것은 흐릿하게 남겨둔다. 피사로가 한 말은 진실이다. 색채가 만들어 내는 효과, 그것이 조화이든 불일치든, 대담하게 과장을 해야 한다. 정확한 데생, 정확한 색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색채나 그 밖의 모든 걸 그대로 포착해 낼 수 있다해도, 거울에 비친 실재의 반영은 전혀 그림이 될 수 없고, 사진보다 나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작은 크기의 작품만을 그림으로 인해 내 자신에 족쇄를 채우지 않는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리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좀 더 큰 판형의 캔버스를 택해, 예를 들자면 삼십 호(thirty square)를 택해, 담대하게 추진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에 말한 그 정물화에서 얻어냈던 색채의 공고함을 유지하도록 애쓰야 겠다. Portier 씨가 예전에 하곤 하던 말, 그러니까 세잔 작품은 그의 작품들만 놓고 보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다른 그림들 가까이에 가지고 가면, 그 그림들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색채를 씻어내 버린다는 말을 생각하고 있다. Portier 씨는 또 세잔이 황금색을 잘 처리했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건 색채의 범위가 매우 높이 정해져 있었음을(pitch) 의미한다. 따라서 아마, 아마도 나도 궤도에 올랐으며 이 시골을 내 눈으로 담아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면서 모든 걸 분명히 해야겠다.
본능적으로 이즈음에는 세잔에게서 본 것을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프로방스의 거친 면을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이다. 봄에 그랬던 것과는 아주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부터 그러기 시작할 활활 타오르는 이 시골을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건 분명하다. 어디를 가도 오래된 황금색과 청동색--누군가는 구리빛이라고 하리라--그리고 이것과 함께 열기로 탈색된 초록 담청 빛 하늘을 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의 혼합 색조와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이루는 유쾌한 색깔이다.
세잔이 작업을 하고 있는 Aix 근처의 지방도 이것과 똑같다. 그건 여전히 Crau이다.***캔버스를 들고 집으로 올때면 나는 ‘보아라! 나도 세잔의 바로 그 색조를 얻어냈다!’라고 혼자말을 한다. 내 말은 세잔이 진짜로 이 지역의 일부이며, 세세하게 알고 잇기 때문에 똑같은 색조에 도달하려면 머리 속에서 똑같은 계산을 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할 따름이다. 물론 그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잘 어울리기야 하겠지만, 닮은 점은 없으리라.
맥나이트와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이 마지막 습작을 보고 내가 지금껏 그린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나머지는 분명 빌어먹을 정도로 형편 없어 보이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맥나이트가 나에게 불만이 있긴 한 데, 러셀이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듯 하다.
지금은 옥수수밭이 있는 풍경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나는 그게, 이를테면, 흰 과수원만큼이나 좋다고 생각한다. 견고함과 스타일이 있다. 습작을 한 점 가지고 돌아오는 날이면, 매일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잘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혼자말을 한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로 먹고, 잠자고, 돈을 쓸때면, 자신이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보이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고 느끼게 된다.
지난 주 초에 지중해 해변에 있는 Saintes-Maries로 출발해, 그곳에서 토요일 저녁까지 머물렀다. 부지런히 Camargue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그곳에 닿게 되는데, Camargue는 반 쯤 야생화되고 매우 아름다운 숫소와 작고 흰 말의 무리가 있는 초원이다.
지중해는 고등어 색깔이었다--내 말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다. 초록빛인지 보라빛인지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데, 다음 순간 변화하는 빛이 장미색이나 회색 색조를 띠기 때문이다. 해변은 모래 사장으로--절벽도, 바위도 없다--사구가 없는 홀랜드 같으며, 색깔은 더 푸르다. 캔버스를 세 장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그렸다. 바다 풍경을 담은 것 두 장, 마을 정경을 담은 것 한 장, 그 다음에는 데생을 좀 했다.
그곳에서 아주 멋진 헌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으며, 사제도 그랬다--사람들은 그렇게 나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사제조차도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어느 날 밤 텅 빈 해변을 따라 바닷가를 산책했다. 유쾌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단지--아름다울 따름이었다. 진파랑 하늘은 짙은 코발트 색의 기초적인 파랑보다 더 짙은 파랑색의 구름과 은하수의 파랑 흰색처럼 좀 더 명료한 파랑 구름으로 흔들거리고 있었다(flick).*** 무한한 푸르름 위에 별들이 파리에서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밝게 보석처럼 빛을 내뿜으며 녹색을 띠기도 하고, 노랑, 흰색, 장미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가족은 이상한 것이다--부지불식 간에 나도 모르게 선원인 삼촌을 생각하게 되었다. 삼촌은 이 바다의 해변을 여러 번 보았으리라.
아침에, 매우 일찍 집으로 막 출발을 하려는 순간에, 배들을 그렸다. 이곳에 온지 단지 몇 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대답을 한 번 해봐라. 파리에 있었다면 배의 데생을 한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었을지? 그것도 틀도 없이? 이제는 측정하지도 않고 그냥 펜이 가는 데로 맡겨 둔다.
이제 이곳의 바다를 보았으니까, 나는 Midi에 머무르며, 색채를 과장하면서 차근차근 작업을 해나가야 할 중요성을 정말 확신하게 되었다--아프리카는 그렇게 멀지 않다.*** 단지 이곳에 머무른다는 그 덕택으로 내 개성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돈을 많이 벌어서 훌륭한 화가들이 이곳에 내려오게 해서, 현재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Petit Boulevard의 진창에서 떨지 않도록 해야겠다.
네가 이곳에 내려와 얼마간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얼마 후에는 그걸 느끼게 될 것이다. 우선 시각이 바뀐다. 좀 더 일본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며, 색채도 다르게 느낀다. 일본인들은 빨리, 아주 빨리, 마치 번개 불빛처럼 그린다. 아마도 그들의 신경이 더 섬세하고, 감정이 단순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다른 데생들도 너에게 보낸 이 그림들과 같다면, 너는 프로방스의 아주 아름다운 지역의 축도를 갖게 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많이 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과수원을 다시 보게 될 때, 내 상태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똑같은 소재에 대한 뭔가 신선한 것, 신선한 공격과 새로운 계절이 아닐까? 그리고 이게 일 년 내내 지속된다--수확과 포도밭,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Anquetin과 로트렉은--내 생각에--내가 하는 일을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다. ‘독립 화가 리뷰(Revue Independante)’ 지에 실린 Anquetin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그를 일본의 영향이 훨씬 더 두드러지는 새로운 경향의 선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Petit Boulevard의 선도자는 의심할 바 없이 쇠라이며, 일본 양식에서는 젊은 베르나르가 Anquetin보다는 훨씬 더 나아갔으리라. 나도 배들을 담은 그림을 마쳤는데, 그 그림과 ‘L'Anglais 다리’는 Anquetin만큼은 나아간 작품이라고 말해주어라.
Guillaumin이 내가 보낸 작품을 보러 왔다니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구나. 나는 그런 데 상당히 민감하다. 하지만 나 자신은 전체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 모두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지금은 수확기이다. 나는 태양이 가득한 옥수수밭 사이에서 일 주일 동안 열심히, 세심하게 일했다. 꽃이 활짝 핀 과수원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옥수수밭은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에게는 다음 전투를, 그 장소는 포도밭인데, 준비할 시간밖에 없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나는 바다 풍경을 좀 그리고 싶다. 과수원은 장미색과 흰색이었으며, 옥수수밭은 노랑, 바다 풍경은 푸른 색이다. 아마도 이제는 잠시 초록색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오고 있다. 칠현금의 전음계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결과는 옥수수밭과, 풍경의 습작이다--그리고 씨뿌리는 사람의 스케치이다. 보라빛 흙덩이로 가득한 갈아엎은 들판이 지평선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씨뿌리는 사람은 푸른 색과 흰색 옷을 입고 있다. 지평선에는 속성으로 자라는 옥수수밭. 그 너머에는 노란 태양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고.
색조에 대한 이 단순한 이름 붙이기로부터 색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은 구성이라는 걸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현재 상태의 스케치는 만일 내가 그걸 진지하게 착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부터 굉장한 그림을 제작해내지 않는다면, 나를 의아하게 하고, 괴롭힐 것이다. 나는 감히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를 못한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씨뿌리는 사람을 그리고 싶은 갈망을 지녀왔으나, 내가 오랫동안 원했던 것은 결코 완성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거의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다. 그렇긴 하지만, 밀레와 Lhemitte 이래로 아직도 해야할 것이 남아 있다면--씨 뿌리는 사람 채색화이다. 정말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내가 그걸 실행할 기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가 하고.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마침내 모델을 한 명 구했다--주아브 병으로, 자그마한 얼굴에다, 황소의 목, 호랑이의 눈을 지닌 청년이다. 그를 담은 반신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려웠다. 푸른 군복--에나멜을 칠한 스튜 남비의 푸른 색--가운데는 빛바랜 붉으스레한 오렌지 색 장식 끈과, 가슴에는 연한 레몬색의 별들이 자리하고. 초록 문과 오렌지 색 벽돌 담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붉은 모자. 어울리지 않는 색조의 무자비한 결합으로 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제작하고 있는 습작은 나에게는 매우 거칠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까지나 이 그림과 같은 평범하고, 일면 소란스럽기까지 한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그건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내 작업ㅇ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습작은 매우 추악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베르나르가 오늘 매춘굴을 대강 스케치한 걸 보내왔다. 데생 뒷편에는 시가 한 수 실려 있는데, 데생과 똑같은 색조를 띠고 있다. 그가 그 그림을 내 주아브 두상과 교환하기를 원한다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으리라.
지난 이틀 동안에 억수 같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루 종일 비가 따루었는데 들판의 모습이 바뀔 것이다. 모두가 한창 수확을 하고 있는 가운데, 비가 정말 예기치 못하게 기습적으로 내렸다. 그래서 나는 어제 오늘 씨뿌리는 사람을 작업해서, 지금은 완전히 재손질을 보았다. 하늘은 노랑과 초록이고 땅은 보라와 오렌지 색이다. 이 멋진 대상에는 우리가 그려내야할 그림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나에 의해서든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든 그려지기를 바란다.
그건 너를 몽유병 환자처럼 멍하게 만든다. 그렇긴 하지만 뭔가 좋은 걸 해낼 수 있다면! 용기를 잃지 말자. 곧 다른 것과 함께 이 시도의 결실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방금 전에 커다란 유화 습작을 긁어 내어 버렸다. 푸른 색과 오렌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노란 옷을 입고 있는 천사가 있는 올리브 밭이었는데, 내가 그걸 긁어내 버린 이유는 모델 없이는 인물화를 그리지 말자고 나에게 다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Rhone 강의 정경을 하나 담아 보았다--Trinquetaille의 철제 다리인데, 하늘과 강은 압상트 색깔이고, 선창은 라일락 색조를 띠고 있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인물들은 거무스럼하며, 철제 다리는 진파랑으로, 푸른 바탕에서는 생생한 오렌지 색의 기미를 띠고, 공작석의 진초록 기미도 띤다. 또다시 아주 거친 시도가 되고 말았지만, 나는 진짜로 상심한 뭔가를 포착해 진짜로 상심케 하는 뭔가를 표현해 내려고 애썼다.
누구나 다 내가 너무 빨리 작업을 한다고 생각할 거라는 걸 미리 너에게 경고해 두어야만 하겠다. 하지만 그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라. 우리를 이끄는 것은***우리의 감정, 자연을 향한 우리 느낌의 진실됨 아니냐? 그리고 때로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자신이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작업을 하고, 또 때로 이야기나 편지의 어휘들이 그렇듯이 붓놀림이 이어지면서 일관성을 지니게 될 때는, 항상 그렇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조만간 다시 영감이 사라지고, 답답한 날들이 올거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 않는다면, 캔버스 마무리 손질을 해야겠다. 그리고 그 많은 그림 중에서 쓸만한 작품이 몇 점 있으리라.
지금은 봄에 그랬던 것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별다른 곤경 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모기와 파리, 메뚜기--우리가 고향에서 본 것과는 달리 일본 스케치북에서 보게 되는 그런 것을 닮은--그리고 올리브에 황금색과 초록 색으로 떼를 지어 날아 다니는 가뢰 등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기가 아직도 나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메뚜기는(사람들이 cicidas라고 부르는 걸로 생각한다) 개구리만큼 크게 노래 부른다.
오십 장의 반도 아직 대중에게 공개하기에는 적절치 않으며, 그것들을 올해에 그려내야만 한다. 내 그림이 뭔가 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데 내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는 데에는 단지 한 가지 수단뿐이라는 걸 너도 알겠지--그건 그걸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에 이백 프랑으로 습작을 오십 장 그려낼 수 있다면, 한 편으로는 내가 마치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했다고 해서 아주 부정직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힘겨운 일이다. 현재 대략 삼십 장의 습작을 그려냈지만, 나는 그 모두가 그 가격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중 몇 점은 쓸만 하리라.
그러므로 나에게 야망이 있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캔버스의 숫자가 아니라, 단순히 그 캔버스의 바로 그 양이 내 쪽에서 뿐만 아니라 네 쪽에서도 진정한 노동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기 드 모파상의 소설에 나오는 신사를 기억하니? 이 사람은 십 년 동안 토끼와 다른 사냥감을 사냥했는데, 사냥감을 쫓아 다니느라 얼마나 녹초가 되었는지 결혼할 생각이 났을 때는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얼마나 곤혹스럽고 대경실색하게 되었는지! 결혼하고자 하는 욕구에 있어서는 이 신사와 같은 경우가 아니긴 하나, 육체적으로는 그를 닮아가고 있다. 존경할 만한 Ziem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음위가 되는 순간부터 야심가가 된다고 한다. 내가 음위든 아니든 나에게는 거의 마찬가지지만, 그게 나를 야망으로 이끌어 간다면 나는 저주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 필요하게 될 돈은 오히려 현재 내 노력의 기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외톨이라면--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일이 친구보다도 더 절실하며, 그렇게 때문에 나는 담대하게 캔버스와 물감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 때에만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걸 보다 덜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나는 좀 더 복잡한 것을 작업해야만 한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보니, 나는 어떤 순간에 나를 찾아오는 환희만을 기대하고 그 때에는 나는 내 자신이 무절제로 빠져들게 나둔다.
종종 나를 성가시게 하는 생각은 유화가 돈을 쓰고 또 쓰면서도 결코 충족감을 못 느끼는 질나쁜 정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럭저럭 쓸만한 습작이 나온다 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혔을 거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게다가 제작에 드는 경비로 인해 나는 언제나 아주 가난한다.
옥수수밭과 주아브 병 습작이 물감 튜브를 거의 다 먹어 치웠기 때문에, 새로 물감 한 통이 필요하다.
Tanguy 씨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새로운 그림을 그에게 맡기는 모험은 하지 말았으면 하고 부탁한다. 씨가 외상 거래 장부를 제시한 보복으로 그것들을 건네주지 말아라. Tanguy 씨는 여전히 내 습작을 가지고 있으며 팔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기껏해봐야 내가 씨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 뿐이다. 씨에게는 단 한 푼도 빚진게 없다. 내가 Tanguy 씨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또 나이든 부인의 초상화(이건 그가 팔았다)와 씨의 친구의 초상화도 갖고 있다는 점도 생각을 했다. 후자에 대해 내가 이십 프랑을 씨에게서 받았다는 건 사실이다.
Tanguy 씨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나에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Tanguy 부인을 상대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 문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그녀와 말다툼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 세상 그 누구도 그건 견딜 수가 없다.
크산티페와 Tanguy 부인, 그리고 다른 훌륭한 부인들은 자연의 요상한 변덕으로 내열성 석영 유리나 부싯돌 머리를 지니고 있다. 분명 이 부인들은 그들이 활보하는 이 문명화된 세상에서 광견에 물려서 파스퇴르 연구소 내에서 생활하는 불쌍한 영혼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다. 그리고 Tanguy 씨가 자신의 부인을 백번 넘게 죽이더라도 옳으리라. 하지만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그러지 않았듯이 씨도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 든 Tanguy 씨는 체념과 인고에 있어서 현재의 파리 건달들보다 옛날 기독교인들이나, 순교자, 노예들과 더 공통점이 많다. 그게 씨에게 팔십 프랑을 지불해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지만, 씨가 자제력을 잃는다 해도, 결코 네 자제력을 잃지는 말아야 할 이유는 된다.
지금 삼십 점의 습작을 너에게 부치고 싶다. 이게 고갱이 오는 데 필요한 돈을 구하는 일을 좀 수월하게 해줄 지도 모르니까. 작업을 시작하는 것, 특히 데생을 시작하고, 그가 올 때 사용할 물감과 캔버스를 예비해두도록 조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가들, 시인, 음악가, 화가들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불우했다는 건--행복한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분명 이상한 현상이다. 기 드 모파상도 그 생생한 증거이다. 그것이 영원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전 생애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죽음의 이편에서는 우리는 단지 한 쪽 반구만을 보게되는 것은 아닐까?
죽어서 묻힌 화가들은--일단 그들만을 두고 볼 때--다음 세대에 아니면 이어지는 뒷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것뿐일까, 아니면 그밖에 뭔가가 있는 걸까? 화가의 삶에서 죽음은 아마도 가장 힘겨운 것은 아니리라.
나로서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별을 볼 때면 언제나 나는 꿈을 꾸게 된다. 단순히 도시와 마을을 나타내는 지도의 검은 점을 두고 꿈을 꾸는 것처럼. 그런데 왜 창공의 빛나는 별들은 프랑스 지도 위의 검은 점에 가듯이 갈 수가 없는 것일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Tarascon이나 Rouen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 한다면, 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이 추론에 있어서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다다를 수 없다. 따라서 증기선, 승합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인 것처럼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노년에 고요히 죽는 것은 거기에 걸어서 가는 것이리라.
나는 점점 더 우리는 이 세상에 기초해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느끼게 도니다. 이 세상은 제대로 안 된 습작인 것이다. 화가를 좋아한다면, 망쳐진 습작 하나를 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 비판할 걸 일일이 찾아내지 않고 입을 다물 뿐이다. 하지만 더 나은 걸 요구할 권리는 있다. 그런 혼란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단지 신 뿐이며, 아마도 그러한 사실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이리라.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똑같은 창조의 손이 지난 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걸 볼 것이라고 희망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이 삶, 그렇게도 훌륭하고 심지어 숭고한 이유로 너무나도 많이 비판을 받는 이 삶은--있는 그대로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되며, 다른 삶에서는 이보다 더 나은 걸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지녀야 한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다. 밤이 깊었다. 좋은 밤이 되고 행운이 깃들기를.
네 편지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구나. 고갱이 우리 계획에 동의했단 말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이곳 남쪽 지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도 신나는 일이지만, 내 건강이 육 개월 전보다 좋아졌기 때문에 북쪽 지방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숙비가 상당히 싼 브르타뉴로 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한다면, 지출을 고려해 볼 때 나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됭 있다. 하지만 고갱이 Midi로 오는 것이, 특히 사 개월 후에는 북쪽 지방에는 겨울이 찾아올 것이므로, 좋은 일이리라. 그리고 똑같은 일을 하는 두 사람은 가정집에서 살 수 있어야 할 듯 한다. 문제는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일이다. 우리 두 사람이 카페에서 살지 않고 화실에다 집을 꾸민다면 비용을 절감하는 게 가능하리라.
고갱이 ‘내 기력과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다’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도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절정기라고 할 수 없으므로, 가장 싸게 먹히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많이 그림을 그리고, 돈은 적게 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노선이다.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어딘가에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진정 파멸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 그와 우리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기를 기대하자.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작업에 내 자신을 던져 넣는다. 그래서 또 다시 습작품을 많이 얻어 내었다. Picard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별로 없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덜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반면에 Monticelli, 도미에, 코로, 도비니, 밀레 등은 상대적으로 그 작품 수효가 많다고 해서 추악한 것도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 이전보다 더 빠르게 그린 그림들이 나의 최상의 작품들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수확과 건초가리 작품이다. 구성을 약간 조정하고 붓의 터치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다시 손을 댈 수밖에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작업은 모두 한 자리에서 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 졌다. 그리고 그것에 다시 손을 댈 때에는 가능한 한 신중하게 작업을 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도취된 작업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정말이지 머리가 아주 녹초가 되고 만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나는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멍해져서 일상적인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게 되고 말리라. 내부의 폭풍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되는 경우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술잔을 연거푸 비워버린다. 물론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는 미친 짓거리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내가 화가라는 걸 보다 확고하게 느끼지 못했었다. 집중력은 보다 강렬해 졌고, 손놀림도 보다 확고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 그림이 발전할 거라고 너에게 감히 맹세를 하는 것이다. 그건 또한 나에게는 그 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를 기대하며,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받지 않도록 작업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기본 색을 균형 있게 배치하는 정신 노동으로부터 돌아올 때면 흔히 탁월한 화가인 Monticelli를 떠올리곤 한다. 사람들은 그가 지독한 술꾼에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 하지만 이러한 정신 노동은 순수한 작업이자, 계산이며, 정신을 극도로 긴장한 채로, 단 삼십 분 내에 백 가지 이상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캔버스 앞에서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을 보고 싶다. Monticelli에 관해 Roquette 부인이 들려주는 심술 사나운 예수회적 이야기는 한결같이 저속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다. 논리적인 색채화가인 Monticelli는 자신이 균형을 추구하던(balance) 색조의 범위에 따라 세분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계산을 수행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들라크루아나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두뇌를 혹사했던 것이 틀림 없다. 이런 후에 편안함과 기분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폭음을 하거나 줄담배를 피워서 자신을 멍하게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건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들이 취하지 않았더라면 신경이 반란을 일으켜 다른 몹쓸 장난을 쳤을 거라고 나로서는 굳게 믿고 있다. Jules과 Edmond de Goncourt 형제도 똑같은 말은 했다. ‘창작의 용광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기 위해 아주 독한 담배를 피우곤 했다.’
내가 이 열에 들뜬 듯한 상태를 인위적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반면에 나는 복잡한 계산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그 결과 캔버스에 재빨리 옮기는 것인데, 이 또한 오래 전에 계산된 것이다. 이런 저런 작품은 너무 급하게 그린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가 그림을 너무 급하게 본 것이라고 응답할 수 있으리라.
수확기 동안 내 작업은 실제로 수확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 하는 일보다 조금도 수월치 않았다. 내가 그걸 불평하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술의 삶에서도 바로 이런 순간에는 내가 진짜 삶을 살고 있는 것에 준하는 행복을 맛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전망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다. 하루 종일 식사나 커피를 주문하는 말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종종 있으며, 사실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 때문에 근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눈부신 태양이 자연에 쏟아붓는 인상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때문에 고갱 문제를 추진하려 애쓰지는 말아라. 그 점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를 돕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어제 석양 무렵에 나는 바위가 많은 히스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주 작고 뒤틀린 오크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뒷편 언덕에는 폐허가 한 채, 계곡에는 옥수수가 있었다. Monticelli 그림처럼 낭만적이었다. 태양은 눈부신 노란 광선을 관목숲과 대지에 퍼붓고 있었다. 정말 완벽한 황금빛의 소나기였으며, 선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웠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기사와 귀부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거나, 옛 프로방스 지방의 음유시인의 목청을 듣는다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으리라. 습작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내가 시도한 것에는 훨씬 못 미치는 그런 것이다.
너에게 커다란 펜 데생을 다섯 점 부쳤다. 그러니까 여섯 번째 Mont-Majour 연작을 갖게 되는 셈이다--배경으로는 아주 어두운 소나무 무리와 아를 마을을 담았다.
고갱과의 연합에 착수한 이래로 나는 돈 문제를 전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계획을 마음 깊이 새겨두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나는 내 작품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두를 다 했다. 내 생각에는 Crau와 Rhone 강둑 곁 시골의 정경을 담은 두 점이 내가 펜과 잉크로 데생한 것 중에서는 최고다. 토마스가 그걸 원하기라도 한다면, 한 점 당 백 프랑 이하로는 가질 수 없다. 그에게 다른 세 점을 선물로 주어야만 한다 할지라도.
이 데생들 때문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넓다란 평원이 나에게 주는 황홀감은 아주 강렬해서, 정말 사람을 지치게 하는 상황, 그러니까 이 지칠줄 모르는 미스트랄과 모기의 지긋지긋한 악다구니에도 지치는 줄 모른다. 어떤 풍경이 이런 성가심을 잊게 만든다면, 그 안에 분명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긴 하지만 어떤 효과를 주려는 시도는 없다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첫 눈에는 마치 지도처럼 보일 것이다.
화가 한 명과 거기에 갔더니 그는 ‘거기엔 그림 그리는 걸 짜증나게 하는 뭔가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평평한 풍경을 보러 Mont-Majour에 적어도 오십 번은 갔었다.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일까? 나는 또 화가가 아닌 사람과도 그곳으로 산보를 했다. 내가 그에게 ‘보시오, 내게는 이곳이 바다처럼 아름답고 무한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바다를 아는 사람이었는데--‘내게는 바다보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듭니다. 바다처럼 무한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이 빌어먹을 놈의 바람이 아니라면 이걸 정말이지 얼마나 멋진 그림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 이젤을 어디에 세운다 해도 이곳에서는 바람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캔버스가 항상 바람에 흔들거리기 때문에, 대체로 유화 습작은 데생 만큼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Loti의 ‘국화 부인’을 읽어 보았느냐? 그 책은 진짜 일본 사람들은 벽에다 아무것도 걸어두지 않고, 그림이나 골동품 등을 모두 서랍장에다 숨겨두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일본 예술은 그렇게 보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고 바깥으로 개방된, 아주 밝은 방에서. 이곳에서 나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작업을 한다. 흰 네 벽면과 붉은 색 바닥뿐이다. Crau와 Rhone 강둑을 담은 이 두 점의 데생으로 실험을 한 번 해 보겠니? 일본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다른 것들보다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깨끗하고 푸른 바탕에서,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 그림들을 보아라. 이곳 자연의 단순성을 진솔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벌써 지갑의 바닥이 보인다. 식비와 집세에 들어가는 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캔버스와 물감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다는 걸 이해하겠지.
Bing의 일본 판화 대금 청구를 지불해야 한다는 네 생각이 옳다고 본다. 내 스스로 돈을 지불하러 그의 가게에 세 번이나 갔었으나, 갈 때마다 닫혀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내가 떠나기 직전에는 돈이 없었다. 그리고 Bernard와 교환을 할 때 상당히 많은 분량의 판화를 주었다. 하지만 Bing과 거래를 끝낸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 정말이지, 우리는 판화를 헐값에 구입해, 여러 화가들에게 그걸로 기쁨을 줄 수도 있다. 고갱이 이곳에서 나만큼이나 그 판화들을 갖고 싶어 한다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네 방도 일본 판화가 없다면 현재의 그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으리라.
일본 생활을 담은 그림들뿐 아니라 신성한 산의 Hokusai 정경을 담은 삼백 장도 잘 보관해 두어라. Bing의 집 더그매에는 풍경화와 인물화 등 수백 만 장의 판화가 쌓여있다. Bing의 더그매를 너에게 추천하고 싶다. 나 자신도 거기에서 배웠으며, Anquetin과 Bernard도 거기에서 배우도록 했다. 지배인은 아주 멋진 사내로, 진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 준다.
돈 문제에 있어서는 Bing과의 사업에서 이익을 보았다기 보다는 손해를 입었으나, 많은 일본 물품을 오랜 시간 침착하게 볼 기회를 누렸다. 내 전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일본 예술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는 일본 판화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지를 못한다. 수집품 가운데 처박혀 잊혀져 버리곤 하면서 자국에서도 그것은 쇠퇴의 길을 밟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이미 찾기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일본 미술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프랑스의 일본 작품에 관해서는 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일본 미술에 있어서 나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업보다는 화가들을 위한 실제적 가치면에서이다. 그리고 단 하루 동안만 파리를 다시 볼 기회가 주어 진다면, Bing의 가게를 찾아가 Hokusai 그림을 볼 것이다. 좋은 판화는 없애지 말아라--사실 더 많이 구해 두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 몇몇은 오 프랑의 값어치는 나가는데, 우리는 그걸 삼 수(sou)에 구입했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서 아무도 그걸 구입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몇 년만 지나면 이 모든 것이 아주 귀하게 되어서, 더 비싼 값에 팔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판화들은 너를 클로드 모네나 다른 화가의 작품들로 이끌어 줄 것인데, 그건 왜냐하면 판화를 찾아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걸 화가들의 그림과 교환하는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ing과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건--오, 제발, 결코 그러지는 말아라! 일본 미술은 원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인, 아니면 우리의 옛 Dutch 인들--렘브란트, Hals, Ruysdael--의 작품을 닮은 그런 것이다. 왜 테오 네가 몽마르트 가에 그 멋진 일본 작품들을 갖추고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
파리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의 전시실을 갖게 되기를 언제나 원했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Tambourin에서 가진 판화 전시회는 Anquetin과 Bernard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de Clichy 가에서 가진 두 번째 전시회 때 겪었던 어려운 점들은 지금도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다. Bernard는 거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았으며, Anquetin은 습작을 하나 팔았고, 나는 고갱과 교환을 했다.
Bernard는 아직도 너에게 습작을 하나 빚지고 있으나, 그건 예견된 일이다--파리에서 작업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라! 파리는 이상한 장소이다. 자신을 죽임으로써만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반쯤 죽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방금 전에 빅토르 위고의 ‘끔찍스러운 연도’(L'Annee Terrible)를 읽었다. 거기엔 희망이 있긴 하지만--그 희망은 별에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별들이 똑같다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리라--다시 시작하는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이걸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하나의 삶 이상을 사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리스인과, 옛 Dutch 대가들과,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유파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인들을 생각하는 것도 매력이 없지는 않다.
너에게 물감과 캔버스의 새 주문서를 보내야겠다--다소 양이 많다. 정말로 급작한 것은 캔버스인데, 방금 유화 스터디 삼십 점을 틀에서 떼어냈고, 그 위에 새 캔버스를 얹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일종의 전시회를 열고 있다. 벽에다 스터디를 모두 못질하여 말리고 있다. 그림이 많이 있을 때는 그 중에서 고를 수가 있으므로, 좀 더 고심을 한 끝에 작품 하나하나에 오랜 시간 작업을 한 것과 똑같은 결과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캔버스나 혹은 여러 장의 캔버스에 하나의 소재를 칠하고 다시 칠하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똑같은 것이 되니까.
우리의 캔버스가 중산층 가정을 꾸미는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예전에 홀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그보다 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계속해서 홀랜드를 생각하는데, 지나간 시간과 거리라는 이 두 겹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기억들은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이곳 남쪽 지방에서는 그림을 흰 벽에다 두고 보는 것이 우리의 심장에 좋으리라. 하지만 보아라. 어디를 가더라도 커다랗게 채색한 Julien medallion들 뿐이다--정말 끔찍스럽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 하지만 카페가 있다. 나중에 이 카페들을 꾸미게 될 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일요일이 찾아왔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편지 고맙게 잘 받았다. 편지는 햇빛 속에서 상당히 큰 캔버스를 그려 나가느라 긴장을 한 탓에 여전히 멍해 있는 가운데 도착하여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꽃이 가득한 정원을 새로 데생해 보았으며, 거기다 유화 스터디도 두 점 그렸다. 앞으로도 평화롭고 침착하게 작업을 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지는 진짜 장담을 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이 지속적인 바람이 유화 스터디에 보이는 초췌한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세잔의 작품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 그림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최근에는 초췌해 지고 말았다. Emil Wauters의 그림에 나오는 Hugo van der Goes와 흡사하다. 그리고 내 턱수염을 모두 주의깊게 밀어버린다면, 그 미친 화가가 그 같은 작품에서 그렇게나 지적으로 그려낸 평온한 사제를 닮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야 하며, 더군다나 언젠가는 위기가 올 거라는 사실을 눈만 껌벅 거리고 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고 너는 이야기 하는구나. 바로 그게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위대하고 진실된 미술의 르네상스라고 본다면, 벌레 먹은 공식적인 전통은 아직 살아있으면서도 실지로는 무력하고 무능하며, 가난한 새로운 화가들만이 광인 취급을 받고, 또 그렇게 취급을 받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실지로 그렇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테오 네가 이 소박한 화가들과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네가 그들에게 돈을 제공해 주어서 그들이 제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화가가 대상을 그리는데 몰두하느라--그 때문에 그는 다른 많은 것들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고 마는데--자기 자신의 개성을 망치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그가 색채뿐만 아니라, 부인과 단념과 상실감을 안고서 그린다면--너와 관련지어서 말한다면, 너 자신의 일은 그의 일보다 더 잘 대가를 지불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화가가 치르게 되는 비용, 즉 개인성의 망실을 너도 똑같이 치르게 되는 것이다.
네가 화상으로서 절망적으로 되면 될수록, 너는 점점 더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것은 똑같은 사실이다. 더 많이 피폐해져서, 병들고, 금이 간 단지가 되면 될수록, 그 정도에 비례하여 나는 점점 더 화가가, 창조적인 화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분명한 것이지만, 이 영구한 생명력을 지닌 미술, 이 르네상스, 오래전에 베어진 나무의 뿌리로부터 기운차게 솟아나는 이 푸른 순, 이런 것들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예술을 하는 것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할 때 우리에겐 일종의 우수가 남는다.
그리고 다시 우리 두 사람의 문제이다. 내가 예술 역시도 낡아빠진 군더더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순전히 상상이다. 할 수 있다면 네가 예술이 살아있다는 걸 나에게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예술을 사랑하는 네가. 하지만 그건 예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달려 있으며, 확신과 마음의 평화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더 잘 그리는 것뿐이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내 송장은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나의 이 화가의 손가락은 유연하게 된다. 내 야망은 너에게 덜 짐이 되는 것이다. 도중에 실제적인 재난의 오벨리스크가 다가오거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하지 않을까 희망한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캔버스보다는 그래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가 더 값어치가 있다. 그것이--나는 더 이상 주장하지는 않는다--내가 그림을 그릴 권리이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느라고 남은 것은 아주 피폐해진 송장과 박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살게 될지도 모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어떠한 삶에도 아주 열이 오른 위트이다.***너에게는 내 앞으로 부쳐준 만 오천 프랑이라는 돈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뤄야 했는가를 상기시키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돌아서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오고 말았다. 그게 내가 되뇌이는 말이다. 물질적인 생존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 그 밖에 내가 필요로 한 것이 여태껏 있었느냐?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파산 상태가 아니고, 이 빌어먹을 놈의 그림에 미치지 않았더라면, 단지 인상파 화가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런 화상이 되었으리라. 내가 몇 년만 젊었더라면 나이든 Bussod 씨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오는 이익의 반을 너의 몫으로 한다는 약속 외에는 아무런 월급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너와 나를 런던으로 보내 달라고 제안을 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송장 같은 육신은 더 이상 젊지 않으며, 인상파 화가들을 위해 얼마간의 돈을 긁어 모으려고 함께 런던으로 여행하는 것은 Boulanger나 가리발디, 돈키호테에게 어울리는 일이리라. 하지만 나는 네가 뉴욕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런던으로 가는 걸 보고 싶다.
머리를 써서 일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 빨리 망가지지 않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희망은 건강을 위한 최신의 섭생을 기운차게 적용해 나감으로써 이러한 인위적인 변통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내가 해야할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약간의 쾌활함이 다른 모든 구제책보다 효과적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그것이 나쁜 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비스마르크의 경우를 보아라. 그는 어떤 경우에도 아주 실제적이고, 아주 명석한 인물인데, 그의 작은 의사가 그에게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며, 일생 동안 위와 두뇌를 혹사해 왔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곧바로 술을 끊었다. 그 이후로 그는 몸이 쇠약해 졌으며 다시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사를 두고 그에게 더 빨리 진찰을 받지 않은 게 자기로서는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농담을 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Prinsenhage에 사시는 삼촌의 고통도 끝났다. 오늘 아침에 누이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또 얼마나 덧없는가! 그림보다도 화가에게 더 유념하는 것이 옳다.
네가 삼촌 장례식에 참석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최상의 방법은, 사자가 누구였던 간에, 그 이름난 이를, 모든 것이 최상을 위한 곳인, 이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서 최상인 세상에서 최상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이가 말한 것첢, 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간 순간부터 우리는 그들과의 좋은 순간들과 그들의 좋은 자질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일는 그들이 아직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사촌인 Cor가 나머지 우리들 보다 더 크고, 더 건장하게 성장해서 기쁘다. 그리고 그에게는 힘과 손재주밖에 없으므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힘과 손재주, 아니면 그의 손재주와 힘, 기계에 대한 지식 등이 있고, 나에게 누군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의 자리에 한 번 서보고 싶다. 그 와중에 나는 내 자신의 거죽 안에 있으며, 내 거죽은 맷돌 사이의 옥수수처럼, 미술이라는 톱니바퀴 안에 들어가 있다.
이런 모든 것들--가족, 조국--은 어쩌면 조국이나 가족과 상당히 떨어져 지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욱 매력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내가 여행자라고 느낀다. 어딘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어딘가와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한다면, 나에겐 그게 아주 합당하고,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라고 하는 수밖에. 그렇다면 미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단지 꿈이며, 자신도 아무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리라.
삼촌의 죽음이라는 이번의 경우에 있어서 사자의 안색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묵중했던 건 어째서 일까? 생전에는, 젊었을 적에나 연세를 잡수시고 난 후에도, 그런 적이 드물었다는 게 사실인데. 사자에게 질문이라도 할 듯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흡사한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래서 내게는 그것이 무덤 너머의 삶에 대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닐 지라도, 하나의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요람에 있는 아기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여다 본다면, 그 눈동자에서 무한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삼촌이 내세를 믿었다는 건 다소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런데 두 분은 우리들보다 더 확신에 차 있어서, 좀 더 깊이 파헤치고 들어갈 량이면 화를 내셨다.
그렇다, 예술가들은 횃불을 다음으로 건네줌으로써--들라크루아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그 횃불을 건네주었다--자신을 영속화 시킨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고가 상당히 한정되어 있고 뒤틀려 있는 한 가족의 상냥한 노모가 그녀가 믿는 것처럼 영생을 누려야 한다면, 광대한 사상을 갖고 있는 들라크루아나 de Goncourt 같이 폐병에 걸리거나 신경증을 앓는 삯마차의 말이 마찬가지로 영생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 비참한 자가 이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의 분출을 가장 많이 느끼는 듯 하다고 할 지라도. 하지만 파리와 미술이라는 문명의 흐름의 한 가운데에 살면서도 나이든 여인의 이 ‘나’를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의사들은 우리에게 모세나, 마호메트, 예수, 루터, 버니언, 그 밖의 다른 성인들도 미쳤다고 할 뿐 아니라, Frans Hals나, 렘브란트, 들라크루아도 마찬가지이며, 거기다 우리 어머니 같은 편협한 생각을 지닌 나이든 여인들은 모두 미쳤다고 한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이 의사들에게 ‘그렇다면 제정신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어봐야 할 것이다.
이 삶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이 있다면 모든 게 간단하고, 이다지도 우리를 아연케 하고 상처 입히는 삶의 끔찍한 것들을 잘 설명할 수 있으리라. 이 음울하고 변화무쌍한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기원과 공감을 보낸다.
그런데 ‘mousme’가 무슨 말인지 아니? (‘국화 부인’을 읽고 나면 알게 될 거다.) 방금 그림으로 담아 보았는데, ‘mousme’란 열두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일본 소녀--내가 그림으로 담은 건 프로방스의 소녀이다--를 가리킨다. 일 주일 내내 이 작업에 매달렸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몸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게 나를 언짢게 하는 일이다. 몸이 좋았더라면 중간중간에 풍경화도 손을 대었을 텐데. 하지만 ‘mousme’를 잘 그려내기 위해 내 정신적 기력을 저축해두어야 만 했다.
소녀는 공작석의 초록빛 색조가 강하게 드러나는 흰색을 배경으로 서 있다. 그녀의 보디스는 핏빛 붉은 색과 보라색이 번갈아가면 줄무늬를 이루고, 스커트는 노랑-오렌지 색의 커다란 점들이 있는 감청색이다. 평평한 피부 색깔의 색조는 노란 빛을 띤 회색조이며, 머리칼은 보라빛이 감돌고, 눈썹은 검정, 속눈썹도 마찬가지이고, 눈은 오렌지 색과 감청이다. 두 손이 다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손가락에다가는 협죽도 가지를 하나 끼워 두었다.
이제 여기와서 초상화는 두 번째로 그린 셈이다--이것과 주아브 병.
러셀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내가 그에게로 가서 얼마 동안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내 초상화를 작업하고 싶다고 고집한다. ‘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고갱의 “이야기하는 흑인 여자”를 보러 Boussod에 들렀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러셀이 뭔가를 해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 화실, 그리고 짓고 있는 집이 있다. 부유한 사람이라도 언제나 그림에다 백 프랑을 쓸 수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구입하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으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질이 낮은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잇다.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것 봐. 우리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하지만 나는 화가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제작할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런데 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전체에 믿음을 갖고, 그가 제작하는 모든 걸 좋아하지 못하지?’
그리고 Guillaumin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가 고갱의 인물화를 한 장 사주었으면 한다. 그는 로댕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의 정말 아름다운 흉상을 받았으며, 지금은 클로드 모네에 착수하고 있으며, Antibes의 그림을 열 점 보았다고 한다. 그는 모네의 작품을 아주 능숙하게 비평하고 있다. 우선 진심으로 흡족해 하는 데서 시작한다--문제에 대한 공략, 펼쳐지는 엷은 빛깔***, 색채. 그 다음에 그는 결점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다--전혀 구성이 되어 있지 않으며, 그가 그린 나무 중의 한 그루는 나무의 두께를 생각해볼 때 잎이 너무 많이 달려 있다는 등등. 그리고 많은 자연 법칙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네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걸 위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며칠이나 아무에게도 말 한 마디 않고 지나가곤 하므로 지금 고갱이 이곳에 온다면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한다. 시골에 혼자 너무 오래 있게 되면 멍청하게 되면,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이번 겨울에는 그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가 온다면, 착상이 부족하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 밖에도, 우리 두 사람이 다투지 않고 잘 지낸다면 우리의 평판 면에 있어서도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야기 했다시피 나는 언제나 미스트랄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그 때문에 붓놀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 스터디를 그리는 대신에 집에서 새 캔버스에다 그걸 다시 그려야 한다고 너는 말하겠지. 이따금씩은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림에 좀 더 활발한 터치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니까. 고갱이 이곳에 온다면 뭐라고 할까? 바람이 좀 덜 부는 장소를 찾아보라고 충고할까?
나는 이 집을 마이클마스까지만 빌리기로 했다. 반 년 정도 더 연장을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갱이 집을 보고 난 뒤에 결정을 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이번 주는 상당히 쪼들릴 듯 하다. 일 주일 내내 모델을 썼기 때문에 일 일에 집세를 낼 수가 없었다. 주인에게 다음 주 월요일에 지불하겠다고 하자, 그는 내가 이 집을 계속해서 빌리기로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들어올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집을 수리해서 지금은 더 값어치가 나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동일한 모델을 두 장의 인물화에다 담고 있다. 황금색으로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있는 우편 배달부인데, 턱수염을 길다랗게 길러서 소크라테스와 흡사하다. 이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흥미롭다. 내가 느낀 대로 Roulin을 그려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혁명주의자라는 점에서 Tanguy 씨와 같다. 아마도 그는 훌륭한 공화주의자로 생각될 수 있는데,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공화국을 온몸으로 혐모하고, 마침내 실제 공화주의 원칙 자체에 의심을 품고, 약간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라마르세이예즈’를 부르는 걸 보았는데, 그 때 나는 팔십 구 년--내년이 아니라, 구십 구 년 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은 들라크루아와 도미에의 장면이었고, 옛 Dutch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초상화 하나는 머리를 담은 것이고, 또 하나는 반신상으로 손도 집어 넣었다. 이 그림들은 나에겐 다른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이 멋진 사내는,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랑 같이 먹고 마시느라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갔으며, 가외로 Rochefort의 ‘랜턴’도 주었다. 하지만 그가 포즈를 아주 잘 취해 주었고, 그의 아내가 얼마 전에 출산을 해 그의 아기도 곧 그릴 수 있을 듯하므로, 그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내 그림에 생기게 될 변화는 인물화를 더 많이 그리려 애쓰리라는 점이다. 인물화를 그리는 것보다 작품을 향상시키는 더 나은 길도, 더 지름길도 없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릴 때면 나는 항상 확신을 느끼는데, 그건 그 작품이 훨씬 더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깊이라는 건 아마도 적절한 낱말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과 가장 깊이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신장하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인물화는 그림에서 나를 깊으곳으로 이끌고, 다른 무엇보다도 무한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Bernard는 나에게 지난 번에 보낸 매춘굴 같은 스케치를 열 장 보냈다. 그 중 세 장은 Redon 풍이다. 그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성을 전적으로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은 거의 렘브란트 풍이며, 인물이 들어 있는 풍경화는 아주 이상했다. 유화 스터디를 보고 그린 데생을 여섯 장 그에게 보냈다. 그에게 여섯 장 더 보낼 것을 약속하면서, 그 대신에 그의 유화 스터디를 보고 스케치를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커다란 데생을 세 장 막 부쳤다. 세 번째 정원은 그것으로부터 유화 스터디들도 제작한 것이다. 푸른 하늘 아래 오렌지 색, 노랑, 빨강 꽃들의 반점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투명한 대기에는 북쪽 지방보다 뭔가 더 행복하고, 더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 세로로 그린 작은 농가의 정원은 놀라운 색채가 담겨 있다. 달리아는 선명하면서도 수수한 자주빛이고, 이열로 늘어선 꽃들은 한쪽은 장미빛과 초록 색이고 다른 한쪽은 잎사귀가 거의 없는 오렌지 색이다. 중간에는 흰 난장이 달리아 하나와 정말 생생한 붉은 빛을 띤 오렌지 색 꽃과, 노란빛을 띤 녹색 열매를 단 작은 석류 한 그루. 이 모든 것들은 아침 나절에는 햇살의 세례를 듬뿍 받고, 저녁에는 무화과 나무와 갈대가 던지는 그림자에 잠긴다.
Quost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아니면 Jeannin이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걸 끌어안기 위해서는 옛 Dutch 인들처럼 서로를 보완 해주는 전 유파의 사람들, 초상화 화가, 풍속 화가, 풍경 화가, 동물 화가, 정물 화가 등등이 모두 필요하리라.
네가 ‘우리 힘으로 작업을 해나가면서 조용히 우리의 길을 나아가자’라고 말한 것은 정말 유효 적절하다. 이 신성불가침의 인상주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상관 없이 나는 들라크루아, 밀레, 루소, 코로 이전의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그리고 싶다. 마네는 거기에 아주 근접했으며, 형태와 색채를 결합시키려 했던 쿠르베도 그러하다.
작업이 진전되어 가고, 우리의 용기가 꺽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시기가 오는 걸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Patience Escalier 씨를 너에게 소개시켜 주도록 하마. 그는 ‘괭이를 든 남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전에는 Camargue에서 소떼를 돌보았고, 지금은 Crau에 있는 어느 집에서 정원사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농부 초상화의 색채는 누에넨 시절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만큼 그렇게 어둡지는 않지만, 우리의 아주 문명화된 파리 인인 Portier 씨는--그가 그렇게 불리는 건 그림을 퇴짜놓기 때문이리라--예전과 똑같은 것을 대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리라. 너는 그 이후로 바뀌었지만, 그는 바뀌지 않았다는 걸 보게 되리라.
테오 네가 갖고 있는 로트렉의 그림 옆에다 나의 이 농부 그림을 둔다 해도 그에게 모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한 걸음 나아가 로트렉의 그림이 동시적인 대조 가운데 훨씬 더 두드러져 보이고, 나의 작품도 태양에 흠뻑 젖고, 태양에 불이 붙은 듯한 특질, 타오르는 태양에 익고, 대기에 휩쓸려서 생긴 그러한 특질이 그 모든 쌀 가루(rice powder)?와 고상함 곁에서 훨씬 더 두드러 질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묘한 병치로 득이 될 것이라고 감히 바라게 된다.***
파리 사람들이 투박한 것에 대한 미각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실수인가! 그러나, 내가 파리에서 배웠던 것은 나를 떠나고 있으며, 내가 인상파 화가들을 알기 전 시골에서 가졌던 생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창작하는 방식은 인상파 화가들보다 들라크루아의 생각에 의해 비옥하게 되었으므로, 인상파 화가들이 내 방식에 트집을 잡는다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내 자신을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깔을 좀 더 자의적으로 사용한다. 이론에 따른다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일례를 들어보마.
나는 화가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그는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요, 본성이 원래 그러해서 그런지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듯 작업을 한다. 그는 공정한(fair) 사람이 되리라. 나는 그림에다가 그에게로 향하는 나의 감득과 사랑을 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그린다.
하지만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걸 끝내기 위해서 나는 이제 자의적인 색채가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금발 머리를 과장한다. 심지어 오렌지 색조와, 크롬 색, 연한 레몬-노랑 색도 사용한다. 머리 너머로는, 초라한 방의 일상적인 벽을 색칠하는 대신에, 나는 무한을 칠한다. 내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하고 짙은 파랑 색의 무지(無地)의 배경. 그리고 선명한 파랑 색을 배경으로 한 금발 머리의 단순한 결합으로 나는 담청색 하늘의 깊은 곳에 자리한 별과 같은 신비스러운 효과를 얻어 낸다.
농부의 초상화의 경우에도 나는 이런 식으로 작업을 했지만, 그 경우에는 무한 가운데 있는 창백한 별의 신비스러운 밝음을 창출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는 그 사람을 남쪽 지방 한 가운데, 수확의 절정기에 이른 그 끔찍스러운 뜨거움으로 담아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붉게 달군 쇠처럼 생생한, 몰아치는 오렌지 색 그늘, 그리고 그림자에는 옛 황금색의 빛나는 색조.
오, 사랑하는 동생아! 사람들은 나의 이런 과장을 캐리커처로만 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는 ‘대지(La Terre)’와 ‘제르미날’을 읽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농부를 그린다면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일부에 아주 근접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어제 맥나이트는 나의 마지막 두 스터디(꽃이 핀 정원)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그 동안의 침묵을 깨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Bock는 맥나이트와 함께 머물고 있다. 그는 외모가 내 마음에 쏙드는 청년이다--면도날 같은 얼굴, 초록 눈동자, 어딘지 특출난 분위기. 그 옆에서는 맥나이트도 아주 평범해 보인다. 나는 Bock의 작품도 보았는데, 완전히 인상파적이긴 하지만, 강렬함이 부족했다. 이 새로운 기법이 아직도 그를 너무 사로잡고 있어서 자신을 찾지 못하는 그러 단계였다.
그들이 체류하고 있는 마을은 전형적인 밀레 풍이다--가난한 농부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말 소박하고 수수한 그런 곳이다. 이러한 특성이 그들에게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토박이들은 졸라의 가난한 농부들처럼 무지하고 온순한 그런 사람들이다. 맥나이트에게는 돈이 좀 있는 모양인데, 그것으로 마을을 오염시킨다. 그 때문에라도 나는 거기에 종종 작업을 하러 가야겠다. 두 사람은 역장과 ‘완고한’ 사람들을 십수 명 알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시골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고 경멸한다. 하지만 그들이 마을의 이 게으름뱅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작업을 했더라면, 농부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로 하여금 몇 푼의 돈을 벌 수 있게 할 수 있었으리라. 그랬더라면 이 축복받은 Fontvielle가 그들에겐 금광이 되었을 텐데. 맥나이트는 초콜릿 상자에 이용할 양이 있는 작은 풍경화를 곧 제작하게 될 듯하다.
맥나이트와 Bock는 열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야겠지. 나는 이제 대상을 좀 더 명료하게 보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래 머물러야 한다. 유화 스터디는 터치의 명료함이 부족하다. 그것은 데생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내가 느끼는 또 다른 이유이다.
오늘은 어쩌면 내가 저녁에 가스등불 아래서 식사를 하는 카페의 내부를 시작할 듯하다. 밤새도록 열어 두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밤의 카페(cafe de nuit)라고 부르는 곳이다. 밤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방을 구할 돈이 없을 때나, 너무 취해서 방을 잡을 수 없을 때 그곳을 피난처로 삼는다.
오늘 아침에는 빨래터에 갔는데, 고갱의 ‘흑인 여자들’만큼이나 큰 여자들이 있었다. 그 중 흰색, 검정, 빨간 색의 옷을 입은 여인과, 노란 옷을 입은 이가 특히 몸집이 좋았다. 나이든 여자들과 젊은 여자들 모두 합쳐서 삼십 명 가량 있었다.
요즈음은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잔인하리만큼 힘겹다. 내가 무엇을 하던 간에 생활에는 상당한 돈이 들어 간다--하루에 오육 프랑을 쓰고서도 그 결과로 보여줄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파리와 흡사하다. 모델을 쓰면 그 대가로 고통을 치뤄야 한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며, 나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권은 좋은 화가가 되는가 아니면 나쁜 화가가 되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은 화가가 그 때문에 견디기 힘든 부담을 안는 대신에, 공공 경비로 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림에 대한 무관심이 안타깝게도 널리 퍼져 있으며, 그러한 사정이 영구화 될 전망이며, 아무도 우리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하지 않으므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 네가 가끔씩 여분의 돈을 보내 준다면, 내가 아니라 그림에 이득이 될 거라는 걸 분명히 밝혀 둔다.
이곳에서는 돈이 한 푼도 없는 동안에도 북쪽 지방 보다는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는데, 그건 좋은 날씨로(심지어 미스트랄조차도 그냥 보기에는 좋은 날씨이다), 볼테르가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몸을 말릴 정도로 완벽하리만큼 눈부신 햇살이 내리쬔다. 부지불식간에 졸라와 볼테르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된다. 정말이지, 이 남국은 너무나 활기가 넘친다! Jan Steen 같기도 하고, Ostade 같기도 하다. 이곳의 농장과 나지막한 선술집은 북쪽 지방 보다 음침하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은데, 그건 따뜻함이 가난을 좀 덜 잔혹하고 우울하게 하기 때문이다. 커다랗고 붉은, 동시에 사랑스런 프로방스 장미로 가득한 이 농가의 뜰과,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모두가 시정으로 가득하고, 거기다 영구히 눈부신 태양, 그럼에도 이파리는 진초록색을 간직하고.
다행스럽게도 소화 능력이 다시금 거의 괜찮아 졌기 때문에 나는 한 달에 삼 주는 선원들이 먹는 비스킷에다 우유와 계란으로 생활해 왔다. 내 기운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 축복받은 따뜻함이며, 그리고 내 몸의 사악한 기운이 치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 남쪽 지방으로 즉시 떠나온 것은 분명히 적절한 행동이었다. 그렇다, 정말 나는 이제 딴 사람이 되었다. Nuenen에 있을 때 잠시 그랬던 것 말고는 결코 이런 적이 없었으므로, 기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딴 사람이라는 건 누구를 가리키냐 하면 날품팔이, 나이 든 Tanguy 씨, 밀레, 농부 같은 사람이다.
몸이 괜찮다면 하루 종일 일을 하는 동안에도 약간의 빵만으로 견딜 수 있어야 하며, 담배를 피우고 밤에 자기 몫의 술을 마실 힘을 가지면서도--덧붙여 필요한 건 그 정도이다***--동시에 자기 머리 위에 높이 또렷하게 떠있는 별과 무한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인생은 궁극적으로 매혹적인 것이라고 할 만하다. 오! 이곳의 이 태양을 믿지 않는 자는 정말로 불경자이다.
내 예전의 힘이 돌아오는 걸 느끼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고 식사를 제대로 하라는 Gruby 의사의 말은 사실이다. 바로 뇌와 골수를 써서 작업을 한다면, 꼭 필요한 이상으로 사랑의 행위에 기력을 쓰지 않는다는 건 상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파리에서보다는 시골에서 실천에 옮기기가 더 수월하다.
파리에서 느끼게 되는 여자에 대한 욕망은 Gruby 의사가 활력의 징표라기보다는 무서운 적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러한 쇠약의 결과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원상태를 회복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러한 욕망은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악의 뿌리는 제도 그 자체에, 그러니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가족이 치명적으로 약화되는 그것에 놓여 있으며, 그 밖에 개인의 건전치 못한 직업, 파리의 황량한 삶 등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안타깝게도 그걸 구제할 방도가 없다. 인상파 화가들이 좋은 작품을 제작하고, 또 거기다 너와 가까워 진다면, 네가 나중에 조다 더 독립적인 위치를 만들어갈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지금부터 곧바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안타깝게도, 이 훌륭한 신과 같은 태양과 함께, 사분의 삼의 기간은 이 놈의 악마 같은 미스트랄이 분다. 하지만 지난 육 주 동안 바람이 불었으므로, 이제는 바람이 불지 않고 뜨거운 태양만 내리쬐는 그런 때가 될 듯도 하다. 그렇게 된다면, 작은 농가의 뜰을 비롯하여 이미 여러 군데 점찍어 둔 곳이 많으므로, 물감과 캔버스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게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
방금 십 미터 짜리 캔버스를 받았다. 거기에다 오십 센티 크기로 걸작만을 그린 다음, de la Paix 가의 뛰어난 감식가들에게 터무니 없을 정도의 가격으로, 그것도 현금으로만 팔아넘긴다면, 이 소포 꾸러미로 이 보다 손쉽게 백만장자가 되는 일도 없으리라!
계속해서 작업을 해나가야 하리라. 요전 날 아주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걸 보았다. 그건 자신이 입고 있는 보디스의 장미빛보다 더 검은 커피 색조를 띤 피부를 가진 소녀로, 보디스 아래의 가슴--보기좋게 단단하고 작은--을 볼 수 있었다. 배경으로는 무화과 나무의 에메랄드 빛 이파리. 들판만큼이나 순수하고, 하나하나의 윤곽선이 그녀의 처녀성을 나타내는.
그녀를 야외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는 게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으며, 정원사의 아내인 그녀의 어머니도 어쩌면 포즈를 취해줄 듯 하다. 흙 색깔의 피부를 지닌 여인으로, 눈부시게 핀 눈처럼 흰색과 레몬-노랑 꽃을 배경으로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에 더러운 노랑과 색바랜 파랑 옷을 입은 모습.
이 남쪽 지방은 나쁜 곳이 아니다. 결국에는 나는 이 곳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고갱을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았으면 한다.
네가 이 남국의 태양을 보고 느끼는 날이 오게 되기를 빌고 또 빈다!
현재는 눈부시게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으며 바람도 불지 않는다--바로 내가 원한 것이다. 이 태양빛은, 정말이지,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해, 노랑, 연한 유황-노랑, 연한 황금빛 노랑이라고만 부르다. 정말 얼마나 멋진 노랑인지!
그 미인 모델이 나타나지 않을 듯하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명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냥 몇 푼 벌고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정말 보기 드문 여자로, 수수하면서도 특이한 외모였다. 이곳의 미스트랄처럼 모델을 구하는 데 드는 힘겨움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을 미치게 한다
나도 Bouguereau가 그리는 것처럼 예쁘게 그린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게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리라. 내 생각에 내가 모델을 잃어버린 건 ‘색칠로 가득 찬 그림만(only pictures full of painting)’을 제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안 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불쌍한 어린 영혼들은 자신들이 궁지에 몰릴까봐,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비웃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인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호주머니에 항상 몇 푼을 넣고 다니면 자연스럽게 모델을 구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방스 방언을 할 줄 모른다는 건 나에게는 정말이지 커다란 손해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인물 스터디를 그리도록 언제나 나를 이끄는 뭔가가 있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모델을 내가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있다면 아주 다른 화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남자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정력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창의력이 사라지게 될 날이 오게되리라는 가능성도 느낀다.
지금은 위쪽 선창에서 본 작은 배 두 척의 스터디를 작업하고 있는 중이다. 배는 보라빛 색조를 띤 장미 색이다. 물은 밝은 녹색이고,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돛대에는 삼색기가 매어져 있으며, 인부 한 명이 외바퀴 손수레에다 모래를 실어 내리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내 친구 주아브 군 소위와 같이 보냈다. 파리로 가는데, 너에게 보낼 꾸러미를 맡아서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가 가지고 갈 두루마리에는 서른 다섯 점의 스터디가 들어 있다. 그 중에는 햇살이 쏟아지는 Tarascon행 길을 물감 상자와 지지대, 캔버스를 들고 가는 내 모습을 대략 담은 스케치도 있다. Rhone 강의 정경을 담은 것도 있는데, 하늘과 물은 압상트 빛깔이고, 푸른 색 다리와 검은 옷을 입은 인물들도 눈에 띈다. 그 밖에 ‘씨 뿌리는 사람’과 ‘빨래터’도 있다. 늙은 농부의 머리를 그린 그림은 색채면에서 ‘씨 뿌리는 사람’만큼 이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씨 뿌리는 사람’은 실패작이며, 농부 그림은 더더욱 그렇다.
우편 배달부의 두상은 한 자리에서 끝마쳤다. 하지만 그건 내 특기이기도 하다. 앞으로 항상 그렇게 해야겠다--처음 들어오는 사람과 술을 한 잔 하고 그를 그리는 것, 그것도 수채화가 아니라 유화로 그 자리에서 그리는 것. 그런 그림을 백 장 정도 그리면 그 중에는 좋은 작품도 있으리라. 그리고 좀 더 프랑스 인이 되고, 내 자신을 찾고, 숭도 좀 더 마셔야 겠다. 술을 마시지 않고 이 한량들을 그리는 게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면을 잃어 버린다면, 예술가로서 무얼얻을 수 있을까?
그럴만한 신념이 있다면 나는 고귀한 광인이 되리라. 현재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화약에 불을 부칠 정도로 그러한 명성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차라리 나는 클로드 모네가 풍경화에서 해낸 것--기 드 모파상의 소설을 보는 듯한 선명하고 활달한 풍경화--을 초상화에서 해낼 다음 세대를 기다리리라. 내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안다--그들과 같은 경지는 아니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발작의 작품이 졸라와 모파상 작품의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 아니니? 따라서 여기서도--우리가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가.
캔버스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으나, 너무 어리석은 일처럼 보여 곧 멈추어 버렸다. 바다 풍경을 그린 그림에는 요란스러운 붉은 사인을 넣었는데, 그건 푸른 색조에다 붉은 느낌을 가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들을 부치고 나니까 마음이 무척 흐뭇하구나. 누이 동생은 내 스터디를 보게 될 것이고, 그건 나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누이도 본질적으로 우리의 프랑스 생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걸 공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림을 직접 대면하게 될 거이다. 그러나 흰색 액자에다 끼워 틀 위에다 올려놓은 스터디 한 두 점을 그녀에게 보여준다면, 그것도 내 마음을 무척이나 흐뭇하게 하리라.
우리가 중간에 힘을 써서 Willemien이 예술가와 결혼하게 되기를 나는 언제나 희망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녀가 어느 정도의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그녀가 우리와 함께 사는 것도 분명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리라. 그녀가 조각을 좋아한다는 건 그녀의 취향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무척이나 흐뭇했다. 현재 상태의 그림은 좀 더 미묘하게 될 듯하며--좀 더 음악에 가까워 지고, 조각으로부터는 좀 더 멀어지리라--무엇보다도 그림은 색채를 지향하고 있다. 그림이 이러한 지향점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내 그림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도록 하지 마라. 나중에--백 장을 다 채우고 나면--우리는 그 중에서 열 장이나 열다섯 장 액자에 넣을 만한 것 고르면 되리라.
너의 뛰어난 판단력으로 너는 나의 독창성을 보고 이해 할 수도 있는 동시에, 다른 화가들이 터치의 명료함에 있어서 나를 능가하기 때문에, 당대의 일반인들에게 내 그림을 내놓는 게 부질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리라. 그러나 그건 내가 작업을 하는 환경, 미스트랄, 지나가 버린 청춘의 치명적인 상태, 상대적인 빈곤 등의 문제라고 봐야 하리라. 나로서는 나의 입장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으며, 현재처럼 지속해 나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으리라고 새악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현시대의 퇴폐주의자들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이다. 고갱과 Bernard는 이제 ‘아이들이 그리듯이 그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차라리 ‘퇴폐주의자들이 그리듯이 그리는 것’보다는 그 방법을택하고 싶다. 사람들이 인상파에서 퇴폐적인 뭔가를 보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사실은 그 정반대인데.
‘Mauve 매형을 추모하며’는 어떻게 되었니? Tersteeg 씨가 그 그림이 거절될 만한 그런 말이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불유쾌한 말을 한 것이 틀림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안달복달 하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너를 그렇게 홀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삼촌이 너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건 분명 나쁜 일은 아니다. 네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본금을 C M 삼촌과 빈센트 삼촌이 빌려주기를 거부했을 때 두 분이 사실 너에게 종신형을 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네가 우리 두 사람, 고갱과 내가 연합할 수있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고갱에게 향하는 우리의 정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정의 어머니처럼 행동하고 실제적인 경비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미래의 뭔가 애매한 걸 계속 희망하게 되고, 그 와중에 여인숙에 머물며 아무런 탈출구도 없이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수도승들처럼 수도원에 나 자신을 유폐시키고 싶다. 수도승들처럼 자유롭게 기분이 내키면 매춘굴이나 술집에도 가고.***
어쨌거나 나로서는 고갱이 어떻게 할지 알 도리가 없다. 영국인이나 미술 학교 출신의 사람들과 같이 머물면서 모든 걸 논쟁해야 한다면 Pont-Aven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하다. 일생 동안 지속될 지도 모를 실패의 긴 기간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보유할 방법을 고안해야 하며, 우리의 주된 열정인 작업을 해 나가며***마친 수도승이나 은둔자처럼 살아야 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곧바로 이곳 남쪽 지방으로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리는 고갱의 글을 받았다. 내 생각에는 고갱이 북쪽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려는 듯하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논쟁을 하고, 존경할만한 영국인들과 싸우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림을 한두 장 팔게되면, 나와 합류하는 것 외에 다른 계획에 착수할 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파리에서 투쟁해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약한 나는 그렇다면 나 자신의 길을 갈 권리가 있지 않을까? 지난 육 개월 동안 고갱이 혼자서 이럭저럭 지내나가는 걸 보니까 그를 도와야 할 급박한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과 좋은 날씨는 이곳 남쪽 지방의 이점이지만, 내 생각에 고갱은 파리에서의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그는 마음 속에 그걸 너무나 많이 품고 있으며 지속적인 성공을 믿고 있다. 나에게 손해될 일은 없다. 그와 똑같은 야망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두 삶은 아마도 합치점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의 이 활기찬 시도가 얼마나 영속성을 지니는가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이 일용할 양식과 거처의 문제이다.
고갱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Laval이 돈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우리를 곤경에 빠뜨렸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그의 친구 Laval이 도착함으로써 그는 순간적이나마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모든 게 잘 되어 나간다면 고갱은 아내와 아이들과 다시 결합할 것이다. 나도 분명 그가 그렇게 하는 거 원하지만, 돈 문제에 있어서는 일이 아주 심각한 지경이다.
고갱이 자신으 이익을 경시하지 않는다면 너도 너의 이익을 경시하지 않아야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네가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므로, 그가 그 이상으로 자신의 경비까지도 책임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는 그림을 너에게 위탁한다는 솔직한 제안을 하거나, ‘매일 빚이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으며, 여행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말 보다는 좀 더 분명하게 너에게 이야기를 했어야 하리라. 그가 ‘당신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친구인 당신에게 빚까지 졌으므로 내 그림을 당신 손에 맡기는 게 나을 듯 하군요’라고 말하는 게 도리에 맞는 일 아니겠니?
이 일이 성사가 될 거라면 우리는 그에게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는 충실할 것이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그는 뭔가 다른 걸 찾겠지만, 더 나은 걸 찾지는 못하리라. 직감으로 나는 그가 자신을 사회적 계단의 밑바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며, 매우 정치적인 것이긴 하지만 정직한 수단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고갱은 내가 이 모든 걸 고려할 수 있다는 걸 잘 모른다. 그리고 그는 시간을 버는 게 필요하며, 우리와 함께하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벌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답장을 보내지만, 그렇게 위대한 화가에게 우울하거나 음침하거나 아니면 악의 있는 걸 말하고 싶지는 않다.
러셀은 고갱의 작품을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적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나더러는 그에게 가서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문제의 처음과 끝은 여행 비용이다.
고갱은 Bernard가 내 스케치를 모아 앨범을 만든 걸 자기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Bernard의 작품을 좋게 말하고 있으며 Bernard의 편지는 고갱의 재능에 대한 찬사로 일관하고 있다. Bernard는 고갱이 너무나도 위대한 화가라는 걸 보게 되는데 때로는 두려울 정도라고 한다. Bernard의 편지를 모두 모아 두었다. 몇몇 편지는 정말 흥미로우며, 벌써 상당한 부피에 이르렀다. Bernard는 고갱이 전적으로 물감이나 캔버스 등의 재료가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다면 할 수 있었을 걸 종종 하지 못하는 걸 보게 될 때는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어쨌든 간에 그런 일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리라.
가을은 정말 놀라울 거라고 생각한다. 멋진 소재가 너무나 많아 캔버스를 다섯 장 시작해야 할 지 아니면 열 장 시작해야 할 지 모를 정도가 될 듯하다. 과수원에 꽃이 피던 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 이리라.
부이야베스(주:남 프랑스식 생선 수프)를 먹는 마르세유 인의 열성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열심히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멋진 해바라기 그림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다지 놀라지 않으리라.
현재 세 개의 캔버스를 작업하고 있다. 첫 번째, 밝은 배경에다 초록 꽃병에 꽂힌 커다란 꽃 세 송이이다. 두 번째도 세 송이 꽃으로, 감청색 배경에다 하나는 씨가 맺히고, 다른 하나는 꽃이 피었으며, 세 번째는 봉오리를 맺었다. 이 그림에는 ‘후광’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각각의 꽃은 배경의 보완적인 색깔의 빛에 싸여 두드러 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노란 꽃병에 담긴 꽃이 활짝 피거나 봉오리를 맺은 열두 송이이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작품은 빛에다 빛을 더한 것으로 최고의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네 번째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렸던 마르멜로와 레몬이 있는 정물화처럼 노란 바탕에다 열네 송이 꽃이 한 다발로 묶인 그런 것이다. 이 작품은 훨씬 크기 때문에 특이한 느낌을 주는데, 내 생각에는 좀 더 단순하게 그린 듯하다.
마네의 아주 특별한 그림, 환한 바탕에 초록 잎이 달린 커다란 분홍빛 작약을 몇 송이 그린 그 그림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야외라는 느낌과 꽃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정말 완벽한 pate로 그려진 것이다.***이것이 내가 기교의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캔버스에다 적용해 볼 아이디어들이 무수히 많지만 나는 점점 더 단순한 기교를 시도하려 한다. 아마도 그건 인상파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누구나가, 적어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고 싶다.
점묘법과 후광을 만드는 것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진정한 발견이지만, 이러한 기교는 보편적인 교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때문에 쇠라의 ‘Grande Jatte’나 Signac가 넓은 점묘법으로 그린 풍경화나, Anquetin의 작은 배 등은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 개인적인 것이 되고 더더욱 독창적인 것이 되리라.
단지 다양한 붓놀림에 지나지 않는 붓 작업 방법을 발견하려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너도 보게 되리라.
이제 내 자신의 화실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므로 나는 그걸 장식하고 싶다. 대단한 건 아니고 커다란 꽃들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면 열두 장 정도의 패널화를 완성하게 되리라. 전체적으로 파랑과 노랑의 교향곡이 되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동이 틀 무렵부터 작업을 하는데, 꽃이 너무나 빨리 시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전체를 단숨에 해치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과 저녁을 든든히 먹기 때문에, 기운이 약해지는 일 없이 장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물감을 많이 주문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물감을 더 곱게 빻으면 빻을수록, 기름을 더 많이 먹게 되는 것 같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기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Gerome 씨나 대상을 사진처럼 재현해 내는 그 밖의 다른 화가들처럼 그린다면, 아주 곱게 빻은 물감을 필요로 할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캔버스가 좀 거칠게 보이는 것을 괘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몇 시간이고 물감을 돌에다가 빻는 대신에, 그냥 다룰 수 있을 정도로만 찧어 준다면, 훨씬 싼 가격에 신선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좀 더 오래가는 물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렇게 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림 그리는데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일 주일만에 백 프랑짜리 수표를 한 장 써버리게 되겠지만, 이번 주말에는 그림을 네 점 끝마치게 될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제작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림이 팔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고갱의 경우에 보다시피 그림을 담보로 돈을 좀 빌리려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중요한 작품으로 얼마 안 되는 돈을 빌리려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저런 일의 희생양이 되며, 우리 생전에는 이러한 사정의 바뀌지 않을 듯 하다. 우리가 우리의 발자취를 따를 화가들의 풍요로운 삶을 준비한다면, 그건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 하지만 인생은 짧고, 모든 일에 맞서 싸울 정도의 대담함을 유지할 수 있는 햇수는 더더욱 짧다.
고갱에게 우리가 Bouguereau 스타일로 그림을 그린다면, 돈을 벌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으며, 대중들은 단지 쉽고, 어여쁜 것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좀 더 준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걸 기대할 수가 없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름을 좋아하고 이해할 정도의 지력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사기에는 너무 가난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고갱이나 내가 일을 덜 해야 할까? 아니다--하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가난과 사회적 고립을 감수하도록 강요되리라. 고갱이 결국에 가서는 이곳에 대해 뭐라고 할 지를 생각해볼 때 나는 자주 가슴 깊이 절망하곤 하지만. 이곳의 고립은 상당히 심각하다.
졸라의 ‘L'Oeuvre’에서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Bongrand-Jundt라는 인물이다. 그는 말한다. ‘너희, 너희 불쌍한 영혼들은 생각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고, 명성이 확고해 지면, 그는 안전하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앞으로는 그에게는 절대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제작해 내는 것이 거부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허약함의 징후가드러나면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무리 전부가 그를 비난하며 바로 그 명성을 파괴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칼라일의 말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이다 ‘브라질에 사는 개똥 벌레의 유충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저녁이면 숙녀들은 자신의 머리에다 이 놈들을 핀으로 꽂죠. 명성이라는 건 좋은 것이죠. 하지만 예술가에게 있어서 그것은 곤충의 등에 꽂힌 머리핀고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공하고 번쩍번쩍 빛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나는 성공이 끔찍스럽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그림이 결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혼자 되새겨야만 하는 건 정말 음울하기 짝이 없다. 그것을 제작하는 데 든 비용만큼의 값어치만 있다면, 나는 돈 문제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젊을 때는 쉬지 않고 작업을 함으로써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지만, 이제는 점점 더 의심을 갖게 된다.
종종 나는 물감 비용 때문에 그림 계획을 중단한다. 그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인데, 왜냐하면 오늘은 일할 힘이 있지만, 내일까지 그것이 지속될지는 모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내 체력을 잃기는커녕 다시 회복하고 있으며, 특히 내 위는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나로서 다행스러운 일은 나는 더 이상 슬이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림에서 내가 원하는 전부는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방편이다.
보내 준 ‘Lucie Pellegrin의 최후’ 복제화는 잘 받았다. 생생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왜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 게 금지되어야 하는지? 건강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흥분된 성기는 다 빈치의 그림 같은 쾌락과 기쁨을 추구한다. 원래 주아브 병을 위해 있는 삼 프랑짜리 여인들 외에는 거의 아무도 보지 못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은 생각하기 힘들지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다 빈치의 신비를 원한다. 이러한 사랑이 모든 사람의 이해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허용된 것의 관점에서 볼 때, 불건전한 섹스로 동성애보다 더 나쁜 이상 행위를 다룬 책들을 쓸 수도 있으리라.***
어찌 되었건 간에, 법과 정의와는 별도로, 예쁜 여인은 살아있는 경이이며, 그 반면에 다빈치와 Correggio의 그림들은 단지 다른 편에 존재한다. 왜 나는 너무나 보잘걸 없는 화가여서 조상이나 그림이 살아있지 않는 걸 항상 아쉬워할까? 왜 음악가를 더 잘 이해할까? 왜 나는 음악가의 추상적인 가락에서 살아있는 원칙을 더 잘 볼까?
될 수 있으면 빨리 한 번에 삼백 프랑을 일 년간 빌려줄 수 있겠니? 현재 너는 한 달에 이백오십 프랑을 보내준다. 그러므로 이번에 삼백 프랑을 먼저 빌려준다면 그 삼백 프랑을 다 갚을 때까지는 이백 프랑만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매일 밤 일 프랑씩 지불하므로, 일 년이 지나면 삼백 프랑의 이득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튼튼한 침대를 두 개 사리라. 그건 내가 집에서 잘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집을 갖고 정착해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사실, 정말이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우리는 일생 동안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굉장한 부자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변변치 못한 방식이다. de Goncourts 형제는 십만 프랑으로 집과 평온을 삼으로써 끝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천 프랑도 안 되는 돈으로 그걸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이 남쪽 지방에서 누군가에게 침대를 제공할 수 있는 화실을 갖는 걸 의미하는 한에서는 말이다--우리의 작업을 갉아 먹는 이러한 암적인 상황, 목을 자르는 듯한 여인숙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나와 무리들 중의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그런 것. 자신이 거리에 나앉았다는 음울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자신의 집, 우거(pied-a-terre). 모험심 가득한 스무 살 나이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서른다섯 살이나 먹게 되면 나쁜 일이다.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면--우리가 휴식처로 들어갈 때쯤이면 우리는 완전히 신경증 환자가 될 것이며, 그건 아직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신 더 나쁘다.
걱정할 것이 없고, 언젠가는 궁핍으로 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연 꿈에 지나지 않을까? 일생 동안 화실에서 평화로이 지낼 정도의 월급만 준다면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작업을 하리라.
이번 주에는 모델을 두 명 썼는데, 아를 여인과 늙은 농부이다. 이번에는 선명한 오렌지 색 바탕에다 그리고 있는데, 붉은 석양의 이미지를 흉내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암시를 주게 되었다. 그 작은 아를 여인이 오지 않아 그림 나머지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 대가로 그녀에게 약속한 돈을 모두 선금으로 달라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녀는 오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녀가 나와의 약속을 완전히 저버린다는 건 너무 심한 일이다.
어제는 벨기에 인 Bock와 같이 보냈다. 날씨는 별로 좋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하기에는 그저 그만이었다. 그는 파리로 갈 예정인데, 네 집에 그를 묵게 해준다면 그는 한 시름을 놓는 셈이 될 것이다. 그 덕택에 나는 내가 그 토록 오래 꿈꾸어 왔던 그림--시인--의 첫 번째 스케치를 마침내 손에 넣게 되었다. 그가 나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던 것이다. 예리한 눈매를 지닌 그의 멋진 머리가 짙은 군청색 별밤을 배경으로 초상화 내에서 두드러 진다. 옷차림은, 짧은 노란 외투에다, 표백하지 않은 속옷의 옷깃, 반점이 있는 넥타이. 그는 하루 동안에 두 번이나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때로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나는 내 삶과 그림 모두에 있어서 하느님 없이 할 수 있지만, 내가 이처럼 아플 때에는 나보다 더 큰 그 무엇, 내 생명과 같은 것--창조력--없이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창조할 힘을 갈취당하게 되면, 아이들 대신에 그가 여전히 인류의 일부라는 생각을 창조하려 애쓴다.
그림을 통해 나는 음악이 위안을 주는 것처럼 뭔가 위안을 주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림을 통해 예전에 후광이 상징하곤 했던 뭔가 영속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을 보여주고 싶다. 색채(colouring)의 실제적인 광휘와 떨림으로 그러한 영속성을 표현해내고 싶다.
초상화, 사상이, 모델의 영혼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초상화, 내가 제작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두 가지 생각의 갈래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방편을 계속해서 궁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색채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서 발견을 하기를 희망한다. 보완적인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두 연인들의 사랑을, 유사한 색조의 신비로운 떨림으로 그들의 어울림과 대립을 표현하고, 또 우중충한 배경에다 밝은 색조의 광휘로 머리에 품고 있는 색조를 표현하며, 거기다 별로는 희망을, 석양빛으로는 영혼의 갈망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그런 발견을. 정녕 사진으로 찍은 듯한 사실주의 그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런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니?
새로 그린 농부의 두상과 시인 스터디를 위해 오크나무 액자를 두 점 제작했다.
해바라기 연작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녹색을 띤 노랑 바닥에 열네 송이의 해바라기가 다발을 이룬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담은 정물화도 제작했다. 해바라기를 포함한다면 현재 열다섯 점의 스터디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작품에 대한 착상이 물밀 듯이 밀려와 고독 가운데 있어도 그걸 생각하거나 느낄 시간이 없다. 나는 증기 기관차처럼 줄기차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시는 멈춘다던지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결코 기성품처럼 만들어진 화실을 발견할 수는 없으며, 꾸준한 작업을 통해 하루 하루 창조되는 것이라고 본다.
근심걱정으로 찌든 몇 주가 지난 뒤에 나는 현재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걱정거리가 홀로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기쁨도 그렇지는 않다.
집주인에게 세를 제때에 지불하지 못해서, 사실 그도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언제나 기를 못펴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집세를 너무도 비싸게 지불하는 걸 복수할 겸, 그의 썩어빠진 초라한 집 전체를 그리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리고는 집주인과, 우체부와, 밤거리를 헤매다 찾아드는 술꾼들과, 나 자신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는 가운데,*** 삼 일 밤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낮 동안에 잠을 잤다.
‘밤의 카페’라는 그림을 통해 나는 카페라는 장소가 사람들이 자신을 망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표현하려 애썼다. 나는 빨강과 초록으로 인간의 끔찍스러운 열정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방은 핏빛 붉은 색과 짙은 노랑이며 중앙에는 녹색 당구대가 놓여 있다. 네 개의 레몬-노랑 램프는 오렌지 색과 초록 색의 광채를 내뿜는다. 텅비고 황량한 홀에서 보라색과 푸른 색 옷을 입고 ***잠이 든 건달들의 작은 모습에는 어디에서나 가장 어울리지 않는 빨강과 초록의 충돌과 대조가 일어난다. 한 구석에서 밤도 잊고 서 있는 단골 고객의 흰 외투는 레몬-노랑, 아니면 연하게 빛나는 초록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나는 싸구려 술집에서의 어둠의 힘을, 그것도 창백한 유황빛의 악마의 용광로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모든 걸 표현해 내려고 애썼다--이 모든 걸 일본적인 명랑함과 Tartarin의 선한 본성의 외관 아래.
이 ‘밤의 카페’는 씨뿌리는 사람의 뒤를 잇는 그런 작품이며, 물론 늙은 농부와, 시인--나중에 그림으로 그려내게 된다면--과도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표면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볼 때 국지적으로 사실적인 색채가 아니라 타오르는 기질을 암시하는 그런 색채이다.
Paul Mantz가 들라크루아의 격렬하고 영감적인 스케치 ‘예수의 돛배’를 보고는, ‘약간의 파랑과 초록으로 저렇게 끔찍하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라고 외치며 돌아섰다. Hokusai도 너로부터 그와 똑같은 비명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 데생으로 그걸 해낸다. 네가 편지에서 ‘파도는 맹수의 발톱이고, 배는 그 안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라고 했을 때, 네가 그걸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색채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혹은 데생을 정확하게 그리려고만 한다면, 그러한 놀라움은 주지 않으리라.
그런데 Tersteeg 씨가 ‘밤의 카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씨는 전에 인상파 화가 중에서 가장 신중하고 온화한 Sisley의 작품을 보고 ‘저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약간 취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구먼’이라고 했다지. 씨가 내 그림을 본다면, 완전한 섬망증 환자의 그림이라고 하지 않을까?
피사로가 ‘소녀’ 그림을 보고 괜찮다는 말을 했다니 기쁘기 한량 없다.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니? 나중에, 이러한 실험을 좀 더 밀고 나아갔을 때, ‘씨 뿌리는 사람’은 여전히 그러한 양식의 첫 번째 시도가 되리라. 그리고 그 착상은 늘상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과 ‘밤의 카페’와 같은 과장된 스터디는 나에게는 통상적으로 끔찍스러우리만큼 추악하고 나쁘다. ‘밤의 카페’는 내가 지금 껏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추악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건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등가물이다. 그러나 내가 뭔가에 감명을 받는다면, 방금 도스토이옙스키를 다룬 짧은 글에 감명을 받은 것처럼, 이런 것들만이 뭔가 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Revue Independante에서 전시회를 한 번 갖자는 너의 제안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보통 거기서 전시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씨 뿌리는 사람’과 ‘밤의 카페’를 제외하고는 완성된 그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부서진(broken) 색조로 낡은 풍차 스터디를 그렸다. 네가 ‘씨 뿌리는 사람’과 함께 액자에 넣어두었다고 한 바위 위에 오크나무가 있는 스터디와 같은 색조이다. 그리고 공장 하나와, 붉은 지붕 위 붉은 하늘에는 커다란 태양이 떠있는 풍경화의 세 번째 스터디도 제작했는데, 이 날은 자연이 분노에 차기라도 한 듯 사악한 미스트랄이 정신 없이 몰아치던 그런 날이었다.
어제는 집에다 가구를 들여놓느라 분주히 보냈다. 우체부와 그의 아내가 말한 그대로, 가장 중요한 품목인 침대 두 개는 하나당 삼백오십 프랑이다. 둘 다 시골식 침대로, 철제가 아니라 커다란 더블 사이즈였다. 견고하고 튼튼하며, 소리도 나지 않을 듯 했다. 침대를 좀 더 꾸며야 하기 때문에 귀찮게 손이 더 가야 하지만, 그래도 아무런 특색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돈의 대부분은 날라가고 말았다. 나머지 돈으로는 의자 열두 개, 거울, 그 밖의 자질구레한 필수품을 샀다.
네가 쓸 방은--혹은 고갱이 온다면 그가 쓸 방은--위층에 있는 더 깔끔한 방으로, 나는 그 방을 가능한 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여인의 내실처럼 꾸며볼 작정이다. 흰 벽에다가는 열두 송이 내지는 열네 송이가 한 다발로 묶인 커다란 노랑 해바라기 그림을 장식으로 걸어두리라. 아침에 창을 열면 정원의 풀과 떠오르는 태양,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등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소공원에 있는데, 어여쁜 여인들(주:매춘굴을 가리키는 듯)의 거리와 상당히 가깝다. Mourier와 나는 그 반대편으로 해서 거의 매일 같이 공원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Mourier는 한사코 여인들의 거리에는 가려 하지 않는다. 이 장소에 보카치오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공원의 이쪽 편도 정숙과 도덕이라는 동일한 이유로 협죽도와 같은 꽃 덤불은 없는 실정이다. 일상적인 플라터너스,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 버드나무 등과 푸른 풀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너무나 친숙한 것들인데, 마네가 이와 같은 정원을 지니고 있지 않나 한다.
그 다음에는 내가 쓸 방으로, 나는 커다랗고 견고한 가구, 모두 흰 목재로 된 침대, 의자, 탁자 등으로 정말 단순하게 꾸미고 싶다. 내 침대는 내가 직접 칠할 작정이다. 세 가지 정도의 소재를 거기다 넣으려 한다. 누드 여인이나 요람에 든 아기 등으로. 아직 결정한 건 아니므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려 한다.
아래층은 화실로 이용될 것이다--바닥은 붉은 타일을 깔고, 벽과 천장은 흰색으로, 거기다 수수한 의자와 흰 목재로 만든 탁자, 그리고 초상화를 몇 점 장식으로 걸어둘 생각이다. 화실은 도미에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될 것인데, 너에게 약속컨대 진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아를에 시골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네가 기쁘할 수 있도록, 또 정말 개성있는 화실이 되도록 꾸미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나는 이 집을 진짜 화가의 집으로 만들고 싶다--값비싼 것은 아니지만 의자에서 그림까지 모든 것 하나하나에 특색이 있는 그런 곳으로. 일 년쯤 후에 네가 휴가 동안에 이곳과 마르세유로 올 때면, 집은 단장이 끝날 것이고, 내가 의도한 대로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림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이 작은 집을 직접 그린 그림을 보게될 것이다. 배경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때가 나을까 아니면 별이 빛나는 밤에 창에 불을 밝힌 것이 더 나을까? 화실을 꾸미는 데 이용하게 도미에의 석판화나 일본 그림을 좀 찾아봐 줄래?
지난 밤에는 집에서 잤다. 아직 해야할 일이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나는 아주 행복하다. 이 집은 Bosboom의 그림에 나오는 실내를 상기시키며, 소공원이나 밤의 카페, 식료품점 등의 주변 환경은 밀레적인 것은 아니지만, 도미에나, 완전한 졸라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아이디어를 제공하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우리는 우리의 후임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화실을 설립한 셈이 된다. 이곳에서 후배들은 생활도 하고, 좀 더 평온한 상태로 작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예술을 향해 작업을 함과 동시에, 우리 생전에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뒤를 이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는 길을 향해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남쪽 관문에다 화실과 피난처를 세우는 것은 그렇게 투미한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화가들 중 가장 위대한 색채 화가(colourist)인 Eugene 들라크루아가 남쪽으로 그리고 바로 아프리카로 가는 게 필수적이라고 생각 했겠니? 그건 명백히 아프리카에서뿐만 아니라 아를 근처에서 빨강과 초록, 파랑과 오렌지, 유황 색과 라일락 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발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색채화가는 모두 이곳으로 와서, 북쪽 지방과는 다른 종류의 색채가 있다는 걸 시인해야만 하리라.
동일한 곳에 머물면서 똑같은 대상들 가운데서 계절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걸 보게 될 거니까, 매년 봄이면 똑같은 과수원을, 여름이면 똑같은 옥수수밭을 볼 것이므로 내 작품이 나빠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한 그 반대로 부지중에 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좀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리라.
작업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이미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되었으며 불필요한 성가신 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줄었다. 그러나 아직 몇 가지 덧붙일 일이 있으므로--정말 꼭 필요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오십 프랑이 아니라 백 프랑을 다시 부쳐주어야 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집안 청소를 해 줄 성실한 아주머니를 구했다. 사실 그 때문에 집에서의 생활을 망설여 왔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상당히 나이가 든 분으로 자식들이 여럿 있으며, 붉은 타일을 깨끗이 닦아 주셨다. 옷은 입은 지가 오래 되어서 헤지기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바로 지난 주에 상당히 질이 좋은 검정 벨벳 재킷을 이십 프랑에 구입했고, 모자도 하나 샀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늘은 혼자서 멋진 산책을 했다. Tartarin과 Daumier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이상야릇한 시골의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아직도 그리스 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으며, Lesbos뿐만 아니라 아를의 비너스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느끼게 된다.
매우 뜨겁고 바람은 불지않는 정말 안성마춤인 날씨가 이삼 일 계속 되었다. 포도가 익기 시작하고 있다. 미스트랄이 불 때면, 그 놈의 바람이 사람의 머리를 돌게 하므로, 이곳은 아름다운 시골의 정반대가 되고 만다. 그렇지만 바람이 없는 날이면, 이곳은 정말이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색채의 강렬함, 맑은 대기, 가슴 설레는 청명감 등등이란!
이 집과 내 작업이 얼마나 흥에 겨운지 나는 기쁨이 항상 외톨이는 아니고, 너도 그 기쁨을 공유하고 그 풍취을 느낄 거라는 생각마저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동생, 테오야, 너도 이곳의 삼나무와 협죽도, 그리고 태양을 보게 되리라--분명 그 날은 오게 되리라.
오늘 오후에는 몇 사람을 선별했다--건달 네다섯 명과 물감이 튜브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에 특히 관심을 가진 열두어 명의 아랍인들을 담았다. 그 다음에는 명성이 있다. 아니, 나는 이 거리의 아랍인들, 그리고 Rhone 강의 둑이나 아를의 Pont 가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비웃듯이 야망이나 명성에 코웃음을 치련다.
삼십 호짜리 새로운 캔버스에 작업을 하고 있다--소공원의 한 모퉁이를 담은 것으로 버드나무 한 그루와, 풀과, 둥글게 전정한 삼목 덤불과 협죽도 덤불 등이 있다. 이 모든 것 위로는 레몬 빛깔의 하늘이 있으며, 색채는 가을의 풍성함과 강렬함을 담고 있다. 나머지보다 물감을 많이 썼는데, 명료하고 두텁다. 이번 주에 들어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은 카페의 외부를 그린 것으로, 푸른 밤이 깊어 가는 가운데 커다란 개스 등이 테라스를 밝히고 있으며, 한쪽 모퉁이에는 별이 총총한 푸른 하늘이 걸려 있다. 종종 밤이 낮보다 더 생동감 있고 더 풍성한 색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 번째는 거의 색채가 없는 자화상으로 연한 공작석 색깔 바탕에다 잿빛 색조를 띠고 있다. 모델이 없을 때 나를 보고 작업을 하는데 적절한 거울을 하나 구입했다. 내 머리의 색채르 제대로 칠해낼 수 있게 되면, 사실 그 일도 어느 정도의 어려움 없이 되는 일은 아닌데, 다른 훌륭한 영혼들의 두상도, 남자든 여자든, 그와 마찬가지로 해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주에는 그림을 그리고 잠자고 식사를 하는 일 외에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열두 시간, 그 다음 여섯 시간 한 자리에서 작업을 하고, 그 다음 한꺼번에 열두 시간을 자고 이런 식이었다.
집 반대편에 있는 소공원을 담은 그림이 세장, 그리고 카페 그림 두 장, 해바라기, 거기다 Bock와 나 자신의 초상화, 공장 너머에 걸린 붉은 태양, 모래를 실어 내리는 남자들, 낡은 풍차 등을 그려 내었다. 다른 스터디들은 제쳐 두더라도, 내가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걸 알겠지. 그런데, 물감과, 캔버스와, 지갑이 오늘 모두 완전히 소진되고 말았다.
내 스터디를 담보로 토마스가 이백이나 삼백 프랑 정도를 나에게 빌려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까? 그 돈이 있으면 나는 천 프랑을 얻어낼 수 있는데. 내가 몇 번이고 너에게 말하지만 나는 정말 내가 보는 것에 완전히 홀리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걸 못 느낄 정도의 열성으로 작업을 한다. 그리고 지난 밤 다음의 아침과, 겨울 미스트랄을 조심해야 한다.
오늘은 아침 일찍 편지를 썼으며, 그리고 나서는 햇살이 솓아지는 소공원으로 그림을 그리러 갔었다. 그걸 다 끝내고 돌아와서는 빈 캔버스를 들고 다시 나섰는데, 그것 역시도 완성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편지를 쓰고 있다.
전에는 이런 기회를 누려본 적이 없다. 정말 이곳의 자연은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 어디서나 하늘의 궁륭은 모두 경이로운 푸른 색이며, 태양은 은은하고 매혹적인 연한 유황빛 빛살을 쏟아 붓는다. 이런 곳이 또 있을까!
나는 그걸 그만큼 매혹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어찌나 나를 사로잡는지, 규칙 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내 자신을 맡겨 버린다. 대상을 공략하는데 나는 아무런 의심도, 주저함도 없다. 이곳에 왔을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판연히 다른 존재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파리에 오기 전에 내가 추구하던 것으로 나는 돌아가고 있다. Nuenen에 있을 때 음악을 배우려 무모한 시도를 하던 시점으로 돌아왔다. 색채와 바그너 음악 사이에 느껴지던 그 관계성.
내 이전의 누군가가 암시적인 색채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들라크루아와 Monticelli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으며, 사실 인상파에서 Eugene 들라크루아의 부활을 보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구구하고 한 편으로는 상호 모순적이어서 우리에게 최종적인 교의를 던져줄 것은 인상파가 아니다. 인상주의가 제약을 가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무리 중의 한 명으로서 내 방식을 공표할 필요도 없으므로, 나 자신은 인상파 화가 중의 한 명으로 남으리라. 그와 동시에 인상주의가 뭔가 위대한 것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 유파가 시각적인 실험에 국한되는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걸 명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미래는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나, 인상주의는 지속될 거라고 느낀다.
맙소사, 어떻게 삶을 보내야 하는거니? 나는 단지 공구할 시간만을 바랄 뿐이다. 너 자신은 그 외에 무언가를 진짜 바라는 거니? 너에게 돈을 요구함으로써 그걸 때앗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쇠라는 무얼 하고 있니? 이미 보낸 스터디는 감히 보여줄 수가 없지만, 해바라기 연작, 카바레, 소공원 그림 등은 그가 보았으면 한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요즈음은 너와 내가 쇠락의 한 가운데 있지도 않고, 아직 파멸한 것도 아니며, 마지막에 가서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 강렬히 느끼기 때문에 정말 멋진 날들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내 그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다해도 나는 반박하지 않는다.
아침 일곱시부터 풀 사이에 자리잡은 둥글게 가지를 친 삼목 덤불 앞에 앉아 있었다. 뒷편으로 줄지어 늘어선 덤불은 미친 듯이 뻗어나가는 협죽도이다. 이 빌어먹을 놈의 것은 광란하는 듯이 꽃을 피우고 있어 보행성 운동 실조증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한다. 갓 피어난 꽃들이 가득 달려 있는데, 시든 꽃들도 마찬가지로 많다. 그리고 초록 이파리는 지칠 줄 모르고 생생하고 강렬하게 솟아나 계속적으로 새롭게 하고 있다. 그 위로는 음울한 삼나무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조그맣게 장미빛 산책로를 따라 완보하고 있다.
이 소공원의 환상적인 특색은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들, 단테와 페트라르카 등이 꽃이 핀 풀 위로 산보하는 모습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이 공원은 내 집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대상의 진정한 특성을 파악하려면 그 대상을 오랜 시간 동안 보고 그려야만 한다는 걸 명백히 보여준다. 아마도 너는 스케치로부터 선이 아주 단순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느끼는 것은 진정으로 이곳 남쪽 지방을 담아낸 그림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명석함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대상을 오랫 동안 응시할 때에야 그 대상이 우리 안에서 숙성되고 좀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미술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현명하고, 철학적이며, 지적인 미술가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내는가? 지구와 달의 거리를 연구하면서? 아니다.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연구하면서? 물론 아니다. 그는 풀잎 하나를 연구한다. 하지만 이 풀잎 하나가 그로 하여금 식물을 그리게 하고, 그 다음엔 계절과, 시골의 다양한 측면과, 동물과, 그리고 인간을 그리게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보낸다.
그들 자신이 꽃이기라도 한 양 자연속에서 생활하는 이 단순한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거의 실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습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며 교육도 받고 일도 하지만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좀 더 쾌활해 지고 행복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작품 하나 하나에서 보여주는 극도의 명료함이 부럽다. 그들의 작품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단순하며, 몇 번의 붓놀림으로 쉽게 인물을 그려낸다. 오! 나도 언젠가는 몇 번의 붓놀림으로 남자, 젊은이, 말 등의 모습이 머리와 몸통과 다리가 모두 제자리에 가도록 하리라.
고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매우 불행한 듯이 보였으며, 뭔가를 팔기만 하면 곧장 올거라고 한다. 그가 기숙하는 곳의 사람들이 그에게 아주 잘해주었으므로, 그들을 떠나면 커다란 소동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가 올 수 있는 데도 곧장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혹시라도 내가 품고 있다면 그건 자신의 심장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그림을 낮은 가격에라도 팔아 준다면 그는 만족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세면용 탁자와 그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구입했다. 따라서 내 작은 방은 완전하게 꾸며진 셈이다. 다른 방은 아직 세면용 탁자와 서랍장, 그리고 아래층에는 커다란 프라이팬과 찬장이 필요하다. 문 앞에다가는 화분에다 협죽도를 두 그루 심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화실에다가는 일본 판화, 도미에, 들라크루아, Gericault의 작품을 장식해 두었으며, 마지막으로는 Meissonier의 작품 ‘독서하는 남자’--내가 항상 찬탄해 마지 않는 작품이지--를 Jacquemart가 작은 동판화로 제작한 걸 걸어두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내가 제대로 제작을 못한 기간 동안에 써야만 했던 돈 정도의 가치는 있을 집 장식용 그림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쇠라를 보거든 집을 장식할 그림을 계획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열다섯 점의 캔버스를 끝냈지만 전체적으로 완성을 보려면 적어도 열다섯 점을 더 그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광범한 작업에 있어서 종종 내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은 그의 품성과, 그의 아름답고 커다란 캔버스를 보러 그의 화실을 방문했던 기억이라는 걸 이야기 해 주어라.
유황 색 햇빛이 쏟아지는 우리 집과 주변을 담은 캔버스를 막 완성했다. 이 소재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어려웠으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더욱 더 그걸 정복하고 싶었다. 왼쪽 편에 있는 집은 보라빛 셔터가 달린 분홍색인데, 내가 식사를 하는 식당이다. 내 친구인 우체부는 길 끝 기차가 지나는 두 개의 다리 사이에 있다.
Milliet는 이 그림이 끔찍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아무런 모양새도 없는 식료품과 밋밋한 집들을 그리면서 그렇게나 흥겨워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을 때, 나는 졸라가 ‘선술집(L'Assommoir)’의 초두에서 어떤 대로를 그런 식으로 그렸고, 플로베르는 어촌의 선창 한 모퉁이를 그렇게 묘사했는데, 둘 다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려운 대상을 그리는 것은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대해 끔찍스러울 정도의 필요를 느끼는 걸 막지는 않는다. 그것이란 뭔지 아니? 바로 종교이다. 네가 말하는 베네딕트 파 사제들은 매우 흥미로웠을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우리를 평온하게 하고 위안해 줄 어떤 것을 증명해 낼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죄의식이나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지 않고, 고독이나 허무에 몸을 담그는 일 없이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의 종교’라는 톨스토이의 책이 있다. 그는 육체나 영혼의 부활 어느 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천국을 믿지 않는 듯하다--그는 마치 허무주의자들이 논리를 펼쳐나가듯 그렇게 논리를 펼쳐나가지만, 그는 우리가 무얼하든지 간에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걸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건 아마도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는 부활을 믿지는 않는 대신에, 그 등가물--삶의 지속성, 인류의 진보--을 믿는 듯하다. 인간과 그의 작품은 다음 세대의 인류에 이해 거이 오류 없이 지속된다고 본다. 그 자신 귀족이었지만, 노동자가 되어, 신발이며 프라이팬 따위를 만들 수 있었고, 쟁기질도 할 줄 알았다. 나는 그런 일은 하나도 못하지만, 자신을 새롭게 주형할 정도로 씩씩한 그런 인간의 영혼을 존경할 수는 있다.
맙소사! 우리는 이와 같은 도덕의 표본, 그러면서도 천국에 그다지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는 그런 영혼과 나란히 있을 때 게으름뱅이들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종교의 욕구에 의해 촉발된 평화로운 혁명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회의주의와 사람을 낙담하게 만드는 절망적인 고통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들 사이에 나타나야 한다.
밤에 별을 그리러 나선다. 나는 항상 살아있는 인물들의 그룹과 함께 집에다 이런 그림을 꿈꾸어 왔다.
오늘 또 다시,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식사를 하기 위해 한두 발짝 물러난 것 외에는 꼼짝도 않고 작업을 했다. 작업이 빨리 진척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이냐? 그리고 지금으로 부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나 자신이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통찰력을 지니게 된 것일까? 아니면 사랑에 눈이 먼 것일까?
이러한 색채는 내게 유별난 환희를 가져다 준다. 나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바로 이 밤에 다른 그림에 착수한다면 끝낼 수 있으리라.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울 때는 나는 끔찍할 정도의 명료함을 지니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그림도 꿈에서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바람이 불지 않는 요즈음에는 나를 그냥 맡기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내가 지난 번에 보낸 것들 보다 작품이 더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89년도에 선보일 훌륭한 작품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도 내 목적을 향해 충분한 그림을 제작하도록 가능한 한 힘쓰고 싶다. 이것이 날씨가 나빠지면 반작용이나 우울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두렵기 하지만, 기억으로 인물을 그리는 일을 연구함으로써 그걸 피하려 한다. 내가 희망하는 한 가지는 열심히 작업을 함으로써 전시회 때 네가 그걸 원한다면 보여줄 만한 그림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전시를 할 필요는 없으나, 네 집에다 내 작품을 걸어둠으로써 내가 게으름뱅이나 건달이 아니라는 걸 입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Milliet는 오늘 내가 작업한 작품--‘쟁기질 한 밭’--에 만족 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내가 그린 작품을 좋아하지 않으나, 갈아엎은 흙 덩이가 그 색깔에 있어서 가죽신 한 켤레 마냥 부드러워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별이 빛나는 밤’과 ‘쟁기질 한 밭’을 좋아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보다 고요함이 더욱 흐른다. 작업이 항상 그런 식으로 지속 된다면, 그리고 기교가 더더욱 조화를 유지해나간다면, 나는 돈에 대해서 덜 걱정하리라. 사람들이 내 작품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현재는 새로 완성한 캔버스를 열 점 가지고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날들을 직접 보지 못한다면, 그걸 그림으로 옮겨 놓은 걸 보게 되리라. 그리고 나는 다른 작품들보다 더 많이 표현하려 애쓰고 있다. 이 작품들은 pate***를 한 번만 입혀서 작업을 했다. 터치는 그렇게 많이 나뉘어지지 않았고 색조는 종종 뒤섞였다. 전체적으로 나는 Monticelli가 하는 식으로 색깔을 두텁게 칠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나는 정말 그 사람의 뒤를 잇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단지 나는 그가 종종 그리곤 했던 연인들의 모습을 아직 그리지 않았다. Lareby Laroquette 부인은 한 때 ‘하지만 Monticelli, Monticelli야 말로 남쪽 지방에 있는 굉장한 화실의 수장에 꼭 어울리는 사람이에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그걸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걸 모르겠니? 고갱의 작업과, 나의 작업은 Monticelli의 그 멋진 작품들의 계보를 이을 것이며, 우리는 Monticelli가 Cannebiere의 카페 탁자 위에다 몸을 쭉 뻗고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훌륭한 사람이 아직 살아있음을 사람들에게 입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 우리는 아주 굳건한 토대 위에 그것이 지속되도록 하리라. 북쪽 지방에 있는 화가들이 붓의 능력, 우리가 흔히 ‘그림 같다’라고 하는 것에 점점 더 의존해 나가는 걸 보는데, 남쪽 지방에서는 새로운 색채화가의 유파가 뿌리를 내리리라는 걸 믿는다. 이 강렬한 태양 아래서 나는 피사로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고갱이 편지에 써 보낸 글도 글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위대한 태양 빛의 효과의 단순성, 엄숙성. 북쪽에서는 그걸 조금치도 의심해 보게 되지 않는다.’
남쪽 지방으로 오기 위해서 역에다 너를 두고 떠날 때가 기억나니? 나는 아주 비참했고, 환자나 다를 바 없었으며, 거기다 거의 술꾼 이었지. 그 겨울 우리는 정말이지 많은 흥미로운 사람들과 화가와 토론에다 열과 성을 보탰지만 나는 감히 기대하지는 못했다. 너와 나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이제 뭔가가 지평선 위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바로 희망이다.
그림 제작의 올바르고 정당한 길은 자신의 취향, 대가들로부터 배운것--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라고 더욱 더 생각하게 된다.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이아몬드나 진주를 찾는 일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고통을 이겨 내어야 하며, 화상으로서든 화가로서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훌륭한 원석을 갖게 되면 다시는 자신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이 돈을 쓰야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고통을 겪을 때 조차도 작업할 용기를 북돋아 준다.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다. 내가 이미 쓴 것만큼의 돈을 벌어서 너에게 돌려주고 싶고, 고갱이 화가로서 제작을 하고, 자유로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평화와 고요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고갱이 우리와 합류하게 되면 그 자신이 화실의 수장의 위치를 점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닫게 되면 그는 좀 더 빨리 몸이 회복되고, 또 좀 더 열심히 작업을 하려 할 것이다.
네가 구필에 머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는 그것에 내 몸을 담궈왔다.) 너는 첫 번째 화상-사도가 되리라. 너의 새로운 두 친구, 화가인 Meyer de Haan과 그의 친구 Issacson 이야기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소식이었다. Dutch 화가들이 너를 인상파 화가 그림 전문가라고 했단 말이지. 우리는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들은 Dutch 미술과, Bretner, Rappard,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뭐라고 하더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Tersteeg 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더냐?
그래, 내 자신의 그림이 따라오는 걸 볼 수 있으며, 내 힘이 미치는 곳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제작을 독려할 것이다. 나 자신이 그들의 모범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걸 고수해 나간다면 우리 보다 더 지속적인 뭔가를 만드는 걸 도우리라.
두 번째로 나는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올리브 나무 정원에 있는 스터디를 긁어내 버렸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진짜 올리브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모델 없이는 더 이상 그릴 수가 없다. 아니 더 이상 그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구도가 하나 있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예수님과 레몬-노랑이 섞인 옷을 입은 천사의 모습이다.
요 며칠은 아주 곤궁한 시간을 보냈다. 목요일에 돈이 떨어져 나흘 동안 스물네 잔의 커피와, 외상으로 산 빵으로 견디어 냈다. ***나흘 간의 절식 후에, 단지 육 프랑. 점심 식사는 했으나, 오늘 저녁에는 빵 부스러기로 때어야 한다. 너에게 다시 돈을 부탁하는 건 나 자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더 이상 나로서도 방도가 없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굳이 누구를 탓하자면 나의 잘못이다. 그림이 액자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에, 내 예산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주문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인의 뜰’ 연작 중 두 작품을 끼울 호두나무 액자를 두 개 주문했는데, 아주 잘 어울리고, 노란 빛을 띤 밤나무 액자를 하나 구하고 있다. ‘이랑’과 ‘포도밭’에는 소나무 액자도 잘 어울린다.
오! 포도밭 스터디! 노예처럼 작업을 했지만, 결국 그걸 재현해 냈다. 캔버스로서 뿐만 아니라, 집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서도 말이다. 네가 포도들을 보았더라면! 일 킬로나 나가는 포도 송이도 있다. 가을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올해의 포도는 최상품이다. 방금 그린 포도밭은 초록, 자주, 노랑으로, 포도 송이는 보라빛이고 줄기는 검정과 오렌지 색이다. 지평선에는 잿빛 버드나무가 몇 그루, 그리고 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압착기와 먼 마을의 라일락 빛 실루엣. 포도밭에는 빨간 양산을 든 여자들의 모습이 몇 명, 그리고 남자들은 수레에다 수확한 포도를 담고.
네가 나의 스터디들을 보았더라면 너는 날씨가 좋을 동안에 맹렬히 작업을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해나간다고 해서 뭔가 손해를 보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한다. 큰 캔버스들은 모두 좋다. 하지만 그건 사람을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께와, 어제 오늘 그런 것처럼 나쁜 날씨가 예상 밖으로 빨리 나의 행진을 막을 테니까. 비가 와서 길이 진흙탕이다. 지금부터 짧은 겨울 사이에 멋진 날씨가 얼마간 지속되어 멋진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기간 동안에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을 하는 것이다.
이번 겨울 동안에는 데생을 엄청나게 많이 할 작정이다. 기억으로부터 인물을 그려낼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나 뭔가 할 일이 있으리라. 베 짜는 사람들이나 바구니를 만드는 사람은 일만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혼자 지내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집이라는 느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사물의 친숙한 외관이다.
또 다른 캔버스를 하나 완성했다. ‘가을 공원’으로, 병처럼 생긴 암녹색 삼나무가 두 그리, 키 작은 밤나무 세 그루, 연한 레몬 빛 잎을 달고 있는 작은 주목, 진홍빛 잎사귀가 달려 피빛 붉은 색을 띤 관목 숲이 두 군데. 거기다 모래와 풀과 푸른 하늘.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나는 다짐을 하지만, 매일 이렇게 되고 만다. 거닐다 보면 정말 너무나 매혹적인 장면을 보게 되고 그러면 그걸 캔버스에 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나무가 노란 빛으로 물들어가는 걸 볼 수 있는데, 하루하루 그 노란 빛이 점점 더 짙어간다. 꽃이 피는 과수원보다도 더 아름답다.
집에다 만 프랑의 가치는 있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Goncourt 형제가 쓴 ‘Zemganno 형제들(Les Freres Zemganno)’을 읽었니? 나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나로서는 크게 괘념치 않으리라. 그 경우 장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나에게는 여전히 다른 방도가 있을 테니까--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리는 한은--
‘Tartarin’에 나오는 멋진 부분을 기억하니? 오래된 Tarascon 승합 마차를 불평하는 부분 말이야. 방금 전에 여인숙 뜰에서 붉고 푸른 색의 그 마차를 그렸다. 나중에 그걸 보게 될 것이다. 전면은 잿빛 자갈이 깔린 단순한 정경이고, 후면도 아주 단순한 데 초록과 붉은 색의 마차 두 대와 그리고 노랑, 검정, 파랑, 오렌지 색의 바퀴. 너는 해변에 있는 형형색색의 작은 배 네 척을 담은 클로드 모네의 아주 멋진 그림을 갖고 있었지. 여기서는 마차이지만 구성은 똑같은 방식으로 한 것이다. 험잡을 곳이 수 천 군데 넘겠지만,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면, 그런 거야 상관이 없다.
그리고 캔버스를 두 점 더 완성했다. 하나는 Trinquetaille 다리이고 다른 하나는 철로가 있는 곳에 놓인 다리이다. 뒤의 캔버스는 색채에 있어서 Bosboom의 것을 약간 닮았다. Trinquetaille 다리는, 계단도 다 그려 넣었는데, 흐린 날 아침에 그린 것이다. 돌, 아스팔트, 인도가 모두 잿빛인 반면 사람들은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있다.
Tarascon 승합 마차를 그리느라 내 몸의 기운이 하나도 없이 빠져 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그리려해도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가서 저녁을 먹어야 겠다.
사랑하는 동생아! 네가 만일 뭔가 좋은 걸 제작할 만한 것이 네 머리빡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불평한다면, 나는 너 없이는 단 한 획도 그릴 수가 없으며, 우리 두 사람이 제작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우리를 고문하지 말고 평화로이 담배나 피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따로따로 그리고 덜 고통스럽게 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도리가 없으므로 그걸 받아들이자. 네 편에서는 언제나 휴식도 변화도 없는 일에 묶여 있어야 하며, 내 편에서도 마찬가지로 휴식이 없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걸. 열심히 작업을 하고 난 후에는 나도 내 머리빡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도 그렇다.
내 기분을 그냥 따른다면 내가 방금 그린 그림을 증오하는 것 보다 쉬운 일도 없으며, 세잔이 예전에 그랬던 발로 몇 번 밟아 구멍을 내고 말았으리라. 그렇지만, 구멍을 낸다해서 좋은 일이 뭐가 있겠냐? 가만히 두는 게 낫지. 일 년 내에 우리가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었다는 걸 네가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좋고 나쁘고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지는 말자. 어차피 그거야 항상 상대적인 거니까. 한 작품은 정말로 좋고 다른 작품은 형편 없이 나쁘다라고 하는 건 바로 Dutch의 영향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토록 공고하고 단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는 아프지 않지만, 음식을 많이 섭취하지 않고, 한 번에 며칠 씩 그림을 중단하지 않으면 아프게 될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상 나는 다시금 Hugo van der Goes의 광기에 거의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중적인 본성, 즉 수도승과 화가롯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미 오래전에 앞서 말한 그러한 상태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흥분된 상태에서의 내 감정은 영속성이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생각으로 나를 이끌기 때문에 내 광기가 나는 박해의 형태를 띨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 신경 과민을 조심해야 겠다. 적어도 삼 일 동안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리라고 내 자신에게 굳게 다짐했다. 글을 쓰면서 휴식을 취하든가 해야 겠다.
마지막으로 그린 캔버스는 장미빛 하늘을 배경으로 초록 삼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는 그림이다. 하늘 한 켠에는 연한 레몬빛 초승달이 떠 있다. 불분명한 전면에는 흙과 자갈과 엉겅퀴와, 두 사람의 연인. 남자는 노란 모자에다 연푸른 색 옷을, 여자는 분홍 보디스에다 검정 치마를 입고 있다. ‘시인의 뜰’의 네 번째 캔버스로, 고갱의 방을 장식할 작품이다.
여인이라든가 그 복장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이런 면을 두고 볼 때 아를은 예전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닳고 진부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걸 오래도록 바라 보노라면 그 옛날의 매력이 되살아 난다. 거듭거듭 나는 Monticelli를 생각하는데--이곳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색깔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특별한 매력은 색깔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복장의 웅장한 선에 있다.*** 그러니까 형태라기 보다는 피부 색깔의 색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걸 보기 시작했으니까 그걸 옮기는데에는 얼마간의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밀리에는 운이 좋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원하는 아를 처녀는 다 사귈 수 있긴 하지만, 그들을 그릴 수는 없다. 반대로 그가 화가라면 그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으리라. 나는 내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Milliet가 좀 더 포즈를 잘 취해 주었더라면 그를 그리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것이고, 지금 완성한 것보다 좀 더 특징적인 초상화를 갖게 되었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리기에 좋은 대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얼굴의 편편하고 연한 색조, 에메랄드 빛 바탕에다 붉은 군모.
어머니의 사진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어머니가 건강하다는 것, 그리고 아주 생생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흑백의 색깔 없는 사진을 볼 수가 없다. 나는 기억 속에 회상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색채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그릴 것이다. 그리고 집에다 편지를 써 아버지의 사진도 부탁할 예정이다.
지난 주 동안의 일로 거의 녹초가 되었다. 죽은 잎사귀를 허공에 떠올리면서 아주 격렬한 미스트랄이 불고 있어서 나는 쥐죽은 듯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열여섯 시간이나 잤더니만 상다이 몸이 회복된 듯하다. 내일은 이 이상한 주기에서 어느 정도 회복될 듯하다. 하지만 지난 한 주는 정말 좋았다. 다섯 점의 캔버스를 완성했다. 이번 주에 그 복수를 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좀 더 침착하게 작업을 했더라면 미스트랄이 나를 다시금 방해했을 거라는 걸 너도 쉽게 알 수 있겠지. 이곳의 날씨가 좋을 때는 그걸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만다.
방금 전에 고갱이 그린 자화상과 Bernard가 그린 자화상을 받았는데, 고갱이 그린 자화상에는 뒷 벽면에 Bernard가 있으며, Bernard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고갱의 작품은 당연히 뛰어나지만, 나는 Bernard의 작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단지 화가라는 암시밖에 주지 않는 작품--얼마간의 갑작스런 색조와 어두운 선--이지만 진짜 진정한 마네적인 특성이 들어있다. 고갱의 작품은 좀 더 공구한 것으로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마침내 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나의 그림을 비교할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고갱에게 교환 차 보낸 내 자화상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나는 그걸 확신한다. 연한 공작석 색 (노랑은 쓰지 않았다) 바탕에다 잿빛 회색으로, 복장은 갈색 코트인데 끝 부분은 푸른 색이다. 그런데 나는 갈색을 자주 색으로 과장했다. 머리 부분은 밝은 바탕을 배경으로 두터운 pate로 밝은 색채로 칠해졌으며(model) 그림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눈은 일본 사람 눈처럼 약간 처지게 그렸다.
나는 고갱에게 편지를 써 자화상에서 나의 성격을 과장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그걸 나 자신뿐 아니라 인상파 전체를 전달하는 데 이용하겠다고 썼다. 그리고 고갱이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과 나의 것을 나란히 놓아볼 때, 나의 그림도 그의 것만큼 엄숙하지만, 덜 저랑적이다. Bernard는 내 자화상을 이미 한 장 갖고 있긴 하지만, 그런 그림을 갖고 싶다고 한다. 내가 그린 인물화를 그들이 싫어하지 않았다는 게 기쁘다.
고갱의 자화상이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이런 식으로 지속해 나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는 다시금 ‘흑인 여자’의 그 풍요로운 고갱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화상은 죄수를 나타내는 그런 인상을 분명히 풍겼다. 쾌활함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안도감을 찾을 수가 없다. 우울한 인상을 풍기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지라는 걸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긴 하지만. 그림자 속의 피부 색깔은 음침한 푸른 색이다. 감청색으로 피부 색깔을 칠해서는 안 된다. 그 경우 그건 더 이상 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고 만다. 색채와 관련지어볼 때 다른 Breton 그림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두 초상화를 갖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기쁘다. 이 그림들은 현 상황에서의 우리들의 운명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거든. 그래도 그들이 그와 같은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고, 좀 더 평정한 삶으로 돌아오리라. 그리고 나에게 부과된 의무는 우리의 가난을 줄일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애쓰는 것이라는 걸 분명히 느껴진다. 고갱은 병들고 고통에 찬 모습이다! 기다려라.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을 테니. 이 자화상과 앞으로 그가 육 개월 후 쯤에 그릴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 있는 일이리라. 제대로 식사를 하고 이 멋진 자연 속에서 나와 함께 산책을 하리라. 그리고 이 따금씩은 괜찮은 여자를 사귀기도 하리라. 집을 관찰하고 그걸 화폭에도 담기도 하면서 마음껏 즐기게 되겠지.
오늘은 다시 몸이 좋아졌다. 눈은 여전히 피곤하지만 머리 속엔 새로운 생각이 있다. 또 하나의 캔버스--이번에는 단지 나의 침실이다. 그러나 색채가 모든 걸 이끌어나가며, 단순화를 통해 사물에다 웅장함을 부여함으로써 이곳이 휴식과 수면의 장소라는 걸 암시하려 했다. 한 마디로 그림을 보면 머리에, 아니 그보다는 상상력에 휴식을 취하도록 하려는 것이 내 의도이다.
벽은 연한 보라빛이고 바닥에는 붉은 타일이 깔려있다. 침대와 의자의 나무 부분은 신선한 버터의 노란색이며, 시트와 베개는 녹색을 띤 레몬 색, 담요는 진홍, 창은 녹색, 세면용 탁자는 오렌지, 대야는 파랑, 문은 라일락 색. 가구의 넓다란 선은 다시금 금할 수 없는 휴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벽에 걸린 초상화, 거울, 수건, 옷 약간. 그림에 흰색을 쓰지 않았으므로 액자는 흰색이 좋을 듯 하다.
하루 종일 그 일에 다시 매달릴 생각이지만, 너도 보다시피 구상은 아주 단순하다. 일본 판화처럼 얇게 칠했다(wash). 점묘법, 해칭 등의 기법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단지 조화로운 균일한 색채이다. 이 작품은 ‘Tarascon 승합 마차’나 ‘밤의 카페’와는 대조적인 그림이 되리라. 내일 그림을 끝낼 수 있도록 아침 일찍 선선한 아침 햇빛 속에서 시작할 것이다.
글자가 제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잠이 마구 쏟아지고, 눈이 너무도 피곤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옛 Tartarin의 고장이다. 나는 점점 더 이곳에 매료되고 있으며, 제2의 고향이 되리라. 그렇다고 홀란드를 잊은 것은 아니다--바로 그 대조적인 점 때문에 그곳을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고갱이 이미 자신의 트렁크를 보냈으며 이달 이십 일경에는 올 거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며칠 남지 않았구나. 너와 마찬가지로 내 온 정신이 지금은 고갱에게로 향하고 있다. 사실은 진작에 왔어야 하는데. 그를 더 잘 알도록 힘쓰야 겠지.
고갱이 마침내 건강한 몸으로 도착했다. 그는 나보다도 더 좋아 보인다.
당연히 그는 네가 힘쓴 덕택으로 자신의 그림을 판 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으며,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집을 꾸미는데 꼭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네 어깨에만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아주 흥미로운데, 나는 그와 함께 많은 걸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제작하리라.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러겠지.
네가 져야할 부담이 좀 가벼워 졌으면 하고 바라며, 좀 더 나아가서는 너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감히 바란다. 정신적으로 짓이겨지고, 육체적으로 고갈될 정도의 강도로 제작할 필요성을 절감할 필요성은 느끼는데, 그건 궁극적으로 우리가 쓴 것을 돌려 받을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 그림이 물감 값이나 거기에 쏟아부은 내 자신의 삶--궁극적으로는 아주 보잘 것 없다--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볼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동생아, 내 부채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걸 갚을 때 쯤이면, 그림을 제작하는 데 쏟아부은 노고가 내 전생명을 앗아가, 마치 내가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이리라. 아마도 그 때쯤이면 그림 제작이 지금보다는 좀 더 어렵게 되고, 제작하는 그림의 수효도 항상 그렇게 많지는 않으리라.
한 동안 몸이 아프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는데, 고갱이 도착해서 내 정신은 온통 거기에 팔려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갈 거라는 확신이 든다. 경비가 이런 식으로 지속되었다면 병이들고 말았으리라. 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애를 쓰게 해서는 안된다는 고뇌에 빠져 있었지만, 고갱에게 우리와 합류하자고 설득한 일을 밀고 나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고갱의 작품을 파는 엄청난 행운을 우리 모두가 함게 두렸으므로 이제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기를 바란다. 어쨌든 간에 우리 세 사람은, 그와 너와 나는 정신을 좀 더 가다듬고 우리가 그간에 한 일을 조용히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신경쓰야 할 것은 식사를 거르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우리는 함께 한 달에 이백오십 프랑 이상을 쓰지 않으리라. 그리고 물감은 우리가 스스로 빻을 테니까 물감값은 훨씬 적게 들리라. 그러므로 우리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는 말아라. 그리고 너도 한 숨 돌리도록 해라. 그게 정말 너에게 필요한 것이다. 육개월 후 쯤에는 고갱과 너와 나 모두가 앞으로도 지속되어 나갈, 그리고 남쪽 지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 필요한, 아니면 적어도 유용한, 전초 기지로 남게 될 조그마한 화실을 세웠다는 걸 보게 되기를 감히 희망해 본다.
내가 아무것도 벌어들이지 못해서 네가 너무 곤궁하지 않다면, 네가 내 작품을 간직하고 팔지 않으려 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내가 그린 작품들이 좋다면, 우리가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저장실의 포도주처럼 조용히 숙성해 갈 테니까.
분홍 복숭아 나무를 그린 작은 캔버스를 액자에 넣은 것은 내 생각에는 Boussod Valladon에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 한 점의 의문도 남기고 싶지 않다. 그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갖기를 네가 원한다면, 그것이 또 지금이든 나중이든, 너에게 기쁨을 준다면, 분명 네가 전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반대로, 나는 그건 정말로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나는 내가 이 작은 복숭아 나무처럼 순진하게 캔버스 하나를 들고 그들에게 가는 것은 나의 이전의 행동과 모순된다는 생각이다. Boussod가 ‘저 작은 캔버스는 젊은 초심자가 그린 것 치곤 그렇게 나쁘진 않군’이라든가 하는 말을 할 기회를 주고 싶지가 않다.
아니다. 일 년이나 이 년쯤 후에 개인전을 열만큼 충분한 작품을 갖게 된다면, 그러니까 한 서른 점 정도의 캔버스를 갖게 된다면, 그래서 그들에게 가 ‘내 작품 전시회를 열어주실 수 있겠어요’라고 한다면, Boussod는 분명 나를 쫓아 버리리라.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순전히 사업 문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가느니 차라리 작품을 결코 팔지 않으련다. 우리가 이 문제에 보다 명료한 태로를 취하면 그들이 캔버스를 보러 올 거라는 걸 이해하기 바란다.
네가 내 작품을 팔지 못하는 건, 네가 회사 밖에서 내 작품을 보여주거나 하지는 않음으로써,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되리라. 회사 밖에서 내 작품을 판매하거나 하지는 말아라. 어쨌거나 나로서는 구필 상회의 문을 다시는 들어가지 않거나,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당당하게 들어가리라.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을 듯하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네 마음에 드는 작품은 어떤 것이든 네 아파트에다가 보관해두고 현재로서는 팔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은 네 아파트가 비좁을 테니까 이리로 보내다오
고갱과 나는 저녁을 집에서 먹으려 한다. 그 편이 싸게 먹히므로 잘 될 거라는 걸 확신한다. 그는 제대로 요리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나도 그에게서 요리를 배울까 한다. 아주 간편하다.
일요일에는 붉은 포도밭을 보았다. 너도 함께 가서 같이 보았더라면! 적포도주처럼 모든 게 붉은 색 투성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건 노란 색으로 바뀌었고, 글고 태양이 떠 있는 초록 하늘, 비 내린 뒤의 보라빛 대지. 석양 빛이 반사되는 곳은 여기 저기 노란 빛으로 반짝이고.
고갱은 벌써 아를 여인을 거의 손에 넣은 듯하다. 나도 그랬으면 하고 바래보기도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풍경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델 구하기가 힘든 것, 또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따르는 수천가지의 난관이 안타깝다. 우리는 매춘굴을 자주 방문해 그곳을 연구할 작정이다.
하루하루가 작업 가운데 지나간다. 우리는 하루 종일 작업에 몰두한다.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카페에 들렀다가,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게 삶이다. 물론 이곳도 겨울에 접어 들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아주 좋은 날씨가 지속되기도 한다.
나는 전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전에 말한 우체부 가족으로--그와, 아내와, 아기와, 어린 소년과, 열여섯 난 아들--처음 보면 러시아 인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모두 프랑스 인의 전형이다. 나는 내 본령을 느낀다. 나는 이걸 좀 더 밀고 나가 좀 더 조심스런 포즈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일가족을 좀 더 잘 해 낸다면, 나는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뭔가 개별적인 것을 해낸 셈이 되리라.
지금 현재로는 스터디, 스터디, 스터디들 가운데 완전히 빠져있다--그러한 무질서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렇지만 마흔 살이 되면 그것이 나에게 뭔가를 주리라. 너는 항상 나에게 양보다 질을 추구하면서 작업을 하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것으로 상정할 많은 분량의 스터디를 갖는 걸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에게 곧 캔버스를 몇 점 보낼 생각이다. 고갱이 정말로 흡족해 하는 것이 몇 점있는데,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 ‘해바라기,’ ‘침실,’ 등이다. 고갱은 멋진 작품을 하나 제작했는데, Bernard의 작품, ‘푸른 들판의 Breton 여인들’과 교환했다.
고갱은 무심결에, 그로서도 그렇고 나로서도 그런 상황 아래서, 내가 내 작품에 변화를 줄 시기가 되었다는 걸 보게 했다.
나는 언젠가 de Haan과 Isaacson을 알게 되기를 정말 고대하고 있다. 그들이 혹시라도 이곳에 온다면, 고갱은 분명 그들에게 ‘인상파 그림을 보려거든 자바로 가시오’라고 하리라. 고갱은 이곳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뜨거운 지방을 그리워 하고 있다.
그는 내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의 결실 없는 시도 중의 하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 밖에 그는 풍경화 몇 점에 손을 대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을 담은 캔버스를 하나 완성했는데, 내 생각에는 정말 훌륭하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인상파 화가가 아니라고 비난하게 될 것이다.
그는 Vintistes에 전시 요청을 받았다. 그는 벌써부터 브뤼셀에 자리를 잡을 상상으로 분주하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덴마크 아내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런데 나는 그의 아내와 그 사이에 어울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는 아이들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사진으로 판단컨대 아이들은 아주 예쁘다.
우리는 그 방면에서는 그다지 재능이 없다.
그 와중에 고갱은 아를 여인들 사이에서는 운이 좋았다. 결혼은 했지만 얼굴에서는 그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C. Dujardin 씨가 자신의 초라한 전시실에서 내 그림들을 전시하겠다는 편지를 부쳐왔다. 전시회를 열어 주는 대가로 그림을 한 점 건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구역질이 나서, 그의 편지에 대한 가능한 나의 답장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Revue Independante에서는 전시회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시를 거의 하지 않았던 듯 하다. 처음에는 Tanguy 씨 화랑에 몇 점, 그 다음엔 Thomas의 화랑에서, 그리고는 Martin의 화랑에다 몇 점 걸어두긴 했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서두르지 않는다면 좀 더 중요한 전시회에 내보낼 작품을 이곳에서 준비할 수 있으며, 또 좀 더 작업을 해나간다면 전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작품을 갖추게 되리라.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이다.
Guillaumin이 고갱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아주 곤궁한 듯이 보이는데, 좋은 작품을 몇 점 그린 듯 하다. 이제 아이도 생겼는데, 속박이 끔찍스러우며, 눈 앞에는 항상 붉은 점 같은 것(red vision)이 보인다고 한다.
이제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주 기쁘다. 날씨가 나쁠 때에는 기억으로부터 그리는데, 혼자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지는 못했어리라. 고갱은 나에게 대상을 상상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그런데 상상으로 그린 그림은 분명히 좀 더 신비로운 성격을 띤다. 나는 에텐에 있는 우리 뜰을 회상하며 작업을 했다. 양배추(cabbage)와 삼나무, 달리아, 인물들. 집안에 있으면서도 작업을 할 수 있으므로, 상상으로 작업을 하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고갱은 ‘포도를 수확하는 여인들’ 그림을 막 마쳤다. 이 그림은 ‘흑인 여자’만큼이나 훌륭하다. 그리고 밤의 카페도 거의 끝마쳤으며 아주 독창적인 누드화, 돼지가 몇 마리 꿀꿀 대는 가운데 건초에 누워 있는 여인을 작업하고 있다. 그는 아주 훌륭한 화가일 뿐 아니라 친구로서도 아주 흥미롭다.
나 역시도 포도밭 그림을 끝마쳤다. 자주와 노랑 일색이며, 조그맣게 보이는 파랑과 보라빛 인물들, 그리고 노랑 햇빛. 내 생각에는 이 작품을 Monticelli의 풍경화 곁에다 두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아를 여인을 구했다. 나는 한 시간 내에 이 인물을 담아 내었는데, 연한 레몬 바탕에다, 잿빛 얼굴, 옷은 생생한 감청색이 가미된 검정색 일색 이었다. 그녀는 초록 탁자에 기대고 있으며, 오렌지 나무로 만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다.
매춘굴도 대충 스케치 했다. 이 매춘굴을 그림에 담아볼 작정이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그린 두 스터디는 이상하기 짝이 없다. 하나는 벽을 배경으로 골풀 받침을 한 노란 색 나무 의자와 붉은 타일이고(낮), 다른 하나는 고갱의 팔걸이 의자로 붉고 푸른 밤의 효과를 주는 것이다. 자리에는 소설 두 권과 초가 하나, 두터운 pate로 두터운 캔버스에다 작업을 했다.
우리는 스트레처에다 못질하고 칠을 한 평범한 나무테로 액자를 만드는 일이 아주 쉽다는 걸 알게 되어서, 나는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저년에는 데생을 하고 글을 쓰는 일로 하루를 마치게 될 듯하다.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Jet Mauve 누님이 보내준 그림을 잘 받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도 기뻐할 듯 하여 알린다. 아주 훌륭한 편지였다. 누님은 옛날 일들을 이야기 하더라. 그리고 너를 또 기쁘게 할 소식은 화가들의 초상화 컬렉션에 하나를 더 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Laval의 자화상인데, 정말 훌륭하다. 아주 대담하고, 아주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이 작품은 네가 말하다시피 다른 사람들이 그 훌륭함을 알아차리기 전에 손에 넣게 되는 그런 그림들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고갱이 자신의 작품을 보내는 가운데 내 방은 캔버스로 가득 차 있는 데도 보낼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게 좀 미안하구나. 그건 고갱이 Pate로 칠한 작품을 이따금씩 씻어 냄으로써 기름을 제거하는 법을 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지금 너에게 보내면 나중에 보내는 것 보다 색깔이 둔탁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좀 더 기다린다고 해서 네가 손해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의 작품을 경멸하도록 그 사랑스런 무리들을 가만히 놓아 두리라.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며, 너무 성급하게 작업을 한다는 비판에 실지로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고갱이 요전 날 자신은 커다란 일본 꽃병에 들어 있는 클로드 모네의 해바라기를 보았는데, 아주 훌륭한 작품이지만--나의 것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로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마흔 살 쯤 되었을 때 그가 말하는 그런 꽃을 그려내게 된다면, 나는 미술사에서 누구 곁에도 서 있을 수 있는, 그가 누구든 간에, 그런 위치를 갖게 되리라. 그러니, 인내해야 한다.
어제 우리는 Montpellier에 가서 그곳의 화랑을 보았다. 거기에는 들라크루아, 쿠르베, Giotto, Paul Potter, Botticelli, Th. Rousseau 등의 작품이 있었는데,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법의 한 가운데 있었는데, Fromentin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렘브란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고갱과 나는 들라크루아와 렘브란트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이야기 했다. 우리의 논쟁은 불꽃이 튀는 듯하다. 우리는 때때로 전지가 방전된 후처럼 머리가 완전히 고갈 되어서야 논쟁을 중단하곤 한다.
내 생각에는 고갱이 이 멋진 아를과 잘 융화를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가 작업하는 노란 집과 특히 나와 잘 맞지 않는다. 사실 이 시점에서 그와 내가 극복해야할 심각한 어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어려움들은 외부적 요인이라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요인이다. 고갱은 힘이 넘치고, 창의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고요함을 누려야 한다. 어디서 그걸 찾아낼 수 있을까?
[다음 날, 십이월 이십사일, 고갱이 전보를 쳐 테오는 급히 아를에 도착했다. 빈센트는 극도의 흥분과 고열 상태에서 자신의 귀 일부를 잘라서는, 매춘굴의 여자에게 선물로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엔 엄청난 소동이 있었다. 우체부인 Roulin이 가까스로 그를 집으로 데려 왔으나, 경찰이 개입하여 빈센트가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병원으로 보냈다. 테오는 그를 병원에서 만나 크리스마스 동안 같이 지냈다. 고갱은 테오와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십이월 삼십일일 경에는 사정이 나아졌다]
Johanna 반 고흐
번역을 마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휘감고 돌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이 번역 작업을 끝낸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 앞선다. 물론 번역은 사실 엉터리인 부분이 많지만, 이 번역은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내가 인생을 견뎌나가는 한 방편이었으므로, 그것을 마친 이 순간에는 인생을 대면할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 우선시 된다. 내 언어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뒤엉키고 있다. 생각의 정리 정돈도 분명 많은 훈련이 따라야 하리라. 지난 일 년간(그러니까 98년 이맘 때를 전후하여 지금까지) 나로서는 삶이 그다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 죽을 권리마저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 삶이라는 걸. 그러나 그 역으로, 우리는 삶의 한 순간 순간을 찬란하게 살 필요가 있다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
우주에서 우리 인간이 처한 위치는 무엇이고, 나와 타인의 삶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나는 많이 고심을 한 듯하다. 지금까지의 삶은 삶 자체는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부단히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 않는 한, 그냥 순식간에, 혹은 한 없이 지루하게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예술은 신이 떠난 지구에서 구원의 대체물인지도 모르겠다. 삼 월에 시작해서 시월까지 거의 십 개월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 중간에는 번역 작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앓이와 고통을 겪었다. 나는 정말로 삶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렬하게 나는 내 끝을 보고 싶었다.
누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왜 고흐가 그토록 처절한 몸부림을 쳤는지, 왜 결국에는 미치고 말았는지, 누가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의 그림과 편지는 남아, 우리에게 하나의 표본이 되고 있다.
다시 한 번 후기를 적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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