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 대관령 옛길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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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강릉에 가려면 이 대관령을 넘어야 했지요. 대학교 졸업 여행 때, 대관령에서 바라본 운해가 저절로 감탄을 불러와 뭔가 글을 쓰고 싶었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운해를 보면 자꾸만 뛰어들고 싶은 마음, 구름이 나를 받쳐줄 것만 같은 착각. 그리고 오래된 영화 [Lost Boys]에서 자꾸만 주인공에게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흡혈귀의 일원이 되라고 부추기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강릉 쪽으로 내려갈 때나 올라갈 때나 엄청나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말 구불구불한 길이었지요. 하지만 이 대관령은 2001년 정도(?)에 대관령 터널(무려 7개나 되는)이 완공되면서 추억 속으로 정말 웬만해서는 찾지 않는 길이 되고 말았는데요. 강릉이 고향인 김선우 시인에게는 이 길에 남다른 애착이 있어 보입니다. 등단 시이자, 첫 시집의 첫 번째 시인 이 시에는 이후 시인의 시작의 특징 중 하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얼음 덩어리를 ‘화주’라고 말하는 대담한 거꾸로 말하기.
(이 시에 자극을 받아 ‘드라이아이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기도 했지요.
온갖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
물 없는 건조한 얼음
지극히 차가운데
만지면 화상을 입는다고 말하는 것
그래서 지극히 차가운 것이
지극히 뜨거운 것이 되게 하는 것
물고기가 아닌 고래처럼
개미가 아닌 흰개미처럼
얼음이 아닌 얼음)
김선우는 이런 ‘거꾸로 말하기’를 통해 언어의 인위적인 경계지움에 도전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근원적인 상처로 나아가려 하는 듯합니다(무슨 말인지?). 경계를 지우는 것은 또 자*타의 엄밀한 구분을 지우려는 시도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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