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즘과 스탈린의 볼셰비즘이라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대중들의 소외에서 찾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구절인데, 울림이 있어서--우리말 번역도 좋네요--옮겨봅니다.]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혼자 있기를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다른 삶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날카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몇 가지 다소 빗나간 논평들과는 별도로--이 논평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카토의 진술처럼 역설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홀로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 또는 차라리 "그가 고독 속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Cicero, De Re Publica, I, 17)--그리스 출신 해방 노예 철학자인 에픽테투스가 처음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던 것 같다. 그의 발견은 다소 우연히 이루어졌다. 그의 주 관심사는 고독도 외로움도 아니었고 절대적인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혼자 있다는 문제였다. 에픽테투스(Dissertations, Book 3, ch. 13)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은 그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그를 향해 적개심을 노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반대로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며 그래서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나 혼자" 있으며, 그러므로 한 사람-안에-두 사람인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모든 사유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와 나 자신의 대화이다. 그러나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전개하는 대화는 같은 인간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다. 내가 사유의 대화를 함께 이어가는 동료 인간들이 이미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결코 오인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불변의 개인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내 정체의 확인을 위해서 나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 교우 관계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그들을 다시 '전체'가 되게 하고, 항상 불명확한 존재로 남게 되는 사유의 대화에서 그들을 구해주며, 정체성을 복구시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한 목소리로 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독은 외로움이 될 수 있다. 내가 혼자 있으면서 나 자신의 자아에게 버림받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고독한 사람들이 이중성, 애매모호성과 의혹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교우관계의 장점을 발견할 수 없을 때면 항상 외로움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1973) [1951] 2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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